사악한 소년 - 케이트 서머스케일 지음, 김희주 옮김/클 |
이 책은 1895년, 런던 이스트 런던의 웨스트햄 지역에서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13세 로버트 쿰스와 12세 너새니얼 형제가 어머니 에밀리를 살해한 뒤, 열흘 동안 시신과 함께 지내며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을 이어갔던 사건이지요.
사건에 대한 상세한 묘사는 물론, 에밀리를 살해한 이유, 내티가 범행에 얼마나 관여했는지와 같은 법정 쟁점들이 당시의 보도 자료와 관계자들의 증언을 통해 하나씩 드러나는 과정은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변호인이 로버트가 정신 질환을 앓고 있었다며 사형 선고를 막으려 했던 전략은 법정 추리물을 방불케 하는 긴장감을 자아내고요.
사건 자체도 흥미롭지만, 이 기이하고 끔찍한 사건이 당시 영국 사회에 안긴 충격, 그리고 형제의 재판이 불러 일으킨 여러 논란을 방대한 자료 조사를 통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것도 좋습니다. 사건이 벌어진 웨스트햄 지역의 환경에서부터 시작해, 살인 사건이 발생한 장소의 모습, 법정에서의 증언과 공방, 그리고 이를 둘러싼 사회적 반응은 물론이고, 사건과 관련된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한 설명이 엄청난 수준인 덕분입니다. 예컨대, 로버트의 지능이 뛰어났음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빅토리아 시대 영국의 초등교육법과 의무교육 체계가 소개되는 식이지요. 이를 통해 19세기 후반 영국은 이미 선진국이었다는걸 새삼 깨닫게 되었네요. 또한, 형제가 탐독했던 저급 출판물 ‘페니 드레드풀’이 소년들에게 악영향을 끼쳤다는 주장은 현대의 게임 유해론과 연결되어, 시대를 초월한 논쟁의 공통점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의무교육 덕분에 문맹이 적어졌지만, 이들이 저급한 출판물을 탐독하게 된 현실은 뭔가 아이러니가 느껴지기도 했고요.
재판 후, 정신 질환이 인정되어 처벌받지 않은 로버트가 수용되었던 브로드무어 정신병원의 진보된 환자 관리 방식도 흥미로운 대목입니다. 19세기 후반임에도 강력 범죄를 저지른 정신병자들에게 안정적이고 편안한 환경을 제공했다는게 무척이나 놀라왔어요. 당연히 구속복을 입히고, 엄청나게 통제된 시설에서 가혹하게 환자를 다루었을거라고 생각했는데 말이지요. 이는 앞서의 교육 체계와 더불어 당시 영국의 진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만듭니다.
로버트 쿰스의 이후 인생 역시 놀라움의 연속입니다. 그는 정신병원에서 재단 기술을 익힌 뒤, 17년 후 서른 살 때 석방되어 호주로 이주했습니다. 그리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갈리폴리와 서부 전선에서 무공훈장을 받을 만큼 인상적인 복무를 기록한 전쟁 영웅으로 변모했거든요. 이 정도면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현실이 아닌가 싶네요. 이 때 그가 속했던 대대가 치루었던 전투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습니다. 로버트가 군악병이자 들것 운반병이라는 보직을 수행하여 전투를 치루었다는게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갈리폴리 전투는 멜 깁슨 주연의 영화로만 접해 보았었는데, 그런 전투를 겪고도 살아남았다는게 정말이지 대단합니다. 서부 전선의 참호전 역시 마찬가지고요. 책에서는 정신 병원에서 오래 수감된 덕에 가혹한 군 생활에 쉽게 익숙해지고 잘 버텨냈을거라 추측하는데 그럴싸했습니다.
로버트가 남은 여생은 호주 시골 마을에 정착해 살며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이웃 소년의 후견인이 되어 그가 성공적인 삶을 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점은 사건의 비극적 출발과 대비되어 큰 울림을 전해줍니다. 다른 인물들 - 아버지 로버트 쿰스, 동생 내티, 변호사, 검사, 기타 친척들 등 모두 - 대부분의 후일담도 함께 제공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책의 만듬새도 좋습니다. 판형과 디자인 모두 제 취향이고, 도판도 많지는 않지만 충실한 편이에요. 주석 및 출처도 확실합니다.
그러나 몇 가지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로버트가 왜 어머니를 살해했는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제시되지 않는게 가장 아쉬웠습니다. 로버트의 증언을 통해 어머니 에밀리가 자식들에게 가혹한 폭행을 가했을 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증거는 없는 탓입니다. 이전에도 형제는 어머니를 피해 도망친 적이 있었다고 설명되기에, 살인이라는 극단적 선택의 이유가 도무지 설득력 있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내티가 사건에 어느 정도까지 관여했는지도 불분명합니다. 범행이 어머니가 내티를 폭행할까 우려해 저질러졌다는 로버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내티 역시 공범으로 간주되어야 하지만, 재판에서는 증인 정도로 취급된건 좀 이상하더라고요. 이 부분에 대한 작가의 명확한 결론이나 추측조차 부족해 독자에게 답답함을 남깁니다.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결론내리자면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에드가 상 등을 수상하기는 했지만 '범죄 실화 논픽션' 보다는 사건과 사회적 맥락을 함께 알려주며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만드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에 가까운 책입니다. 빅토리아 시대 미시사 서적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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