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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2/20

탈주자 - 리 차일드 / 안재권 : 별점 1.5점

탈주자 - 4점
리 차일드 지음, 안재권 옮김/랜덤하우스코리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잭 리처는 시카고에서 우연히 마주친, 다리가 불편한 여성을 도우려다가 그녀와 함께 무장한 괴한들에게 납치되었다. 납치된 리처와 홀리가 도착한 곳은 몬태나의 깊은 숲 속 민병대 은신처였다. 민병대 사령관 보우 보켄은 합참의장의 딸이자 대통령의 대녀인 홀리를 이용하여 미국 정부를 압박할 속셈이었다. 하지만 잭 리처는 감금 장소에서 탈출한 뒤, 보우 보켄의 진짜 목적을 알아차리게 되었다...

"탈주자"는 리 차일드의 대표작인 잭 리처 시리즈 중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제 기준으로는 시리즈 16번째로 읽은 작품이고요.

기존 잭 리처 시리즈와는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는 장면들이 눈에 뜨입니다. 가버 장군이 직접 총을 들고 나서는 모습이 대표적입니다. 팔팔한 모습으로 M16을 능란하게 다루는 모습이 신선했습니다.
시리즈 최고의 매력 포인트라 할 수 있는, 리처의 파괴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도 역시나 존재합니다. 납치범 중 한 명인 운전사 피터 웨인 벨과 민병대 사령관 보우 보켄의 오른팔인 파울러를 제압하는 장면이 그러합니다.

홀리의 행방을 쫓는 수사 과정도 잘 그려져 있습니다. 1998년이라는 이른 시기에 발표된 초창기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특정 각도의 흑백 CCTV 화면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으로 복원하여 다른 각도로 찍혀있던 용의자의 정면 사진을 얻어내는 과학 수사가 등장한건 아주 놀라왔어요. 지금은 아마 가능한 기술 같기는 한데, 이걸 1998년 발표 작품에 써먹었다는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연방수사국이 불탄 차량을 단서로 납치범들의 은신처를 좁혀나가는 과정도 설득력이 높았고요. 

연방수사국 요원 두 명이 모두 배신자였다는 나름의 반전도 존재합니다. 이 과정에서 밀로셰비치가 배신자임을 드러낸 후, 브로건이 배신자일 것이라는 리처의 추리가 이어지는데, 그 직후 브로건이 민병대에게 잡혀가는 장면으로 전개되고, 마지막에 리처의 기지로 브로건의 정체가 밝혀지는 흐름도 깔끔합니다. 일종의 서술 트릭처럼 느껴지기도 했고요.
헬렌이 납치되었지만 선거 때문에 드러내놓고 헬렌을 구출하지 못하는 상황 역시 현실적이고 설득력 높았습니다.

합참의장의 딸이자 FBI 요원인 헬렌도 매력적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심각한 다리 부상을 입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도구를 활용하여 활약하는 모습 덕분입니다. 주체적이면서도 강한, 리처에게 보호받는다기보다는 동등한 관계의 여성을 잘 그려냈다고 생각되네요. 실제로 리처의 생명을 한 번 구해주기도 하고요.

하지만 이런 장점들보다 단점이 훨씬 커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잭 리처 시리즈의 기존 매력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는 점입니다. 중반부까지는 리처가 시카고에서 홀리의 납치 사건에 휘말려 몬태나 숲 속 민병대 은신처까지 수천 킬로미터를 이동하는 과정만 반복될 뿐, 별다른 사건이 일어나지 않아 지루합니다. 최초 납치 시, 그리고 이동 중에 탈출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리처의 모습도 납득하기 어려웠고요.
몬태나에 도착한 이후의 전개도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상대가 아무리 오합지졸이라도, 백 명 이상의 군사 조직이라는 점은 이해합니다. 그러나 잡혀있는 동안, 리처가 감시를 빠져나간건 한 두번이 아닙니다. 너무 쉽게 풀려나고 빠져나가서 긴장감을 느낄 여지가 없을 정도에요. 감시병을 물리치는 대신, 엄청난 화술로 속여서 탈출하는 장면은 신선했지만, 이런 수작은 영 잭 리처답지 않아서 별로였습니다.

사건의 전개도 허술한 점이 많습니다. 우선 보우 보켄이 헬렌을 납치한 이유는 불분명합니다. 그의 계획은 몬태나로 모든 이목을 돌린 후 샌프란시스코 연방 준비 은행을 1톤의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리는 것이었는데, 이 계획에 헬렌은 필수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독립 국가 선언문을 발표해도 충분히 시선을 끌 수 있었을 텐데, 굳이 헬렌을 납치해 위험을 자초할 이유는 없습니다. 헬렌이 합참의장의 딸이자 대통령의 대녀라 한 들, 그게 미국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굳이 몬태나로 시선을 돌리게 만들 이유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진주만과 같은 사건을 언급하며 전략적으로 필요했다는 설명이 붙지만, 아무도 그들의 범행을 예상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왜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드는지 의문이 듭니다. 샌프란시스코를 폭파한 후 성명문을 발표하는게 더 논리적인 전개였습니다. 단적인 예로, '911' 테러 전 오사마 빈 라덴이 미국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노력했을까요? 그럴리 없지요.

연방수사국 요원 두 명이 배신자라는 설정도 억지스럽습니다. 게다가 이 두 명만을 선발하여 수사팀을 꾸렸는데 두 명 모두가 배신자였다는건 어처구니가 없어요. 맥그래스 지부장이 정말 유능한 인물인지 의심하게 만듭니다.
스팅어 미사일을 훔친 이유 역시 애매합니다. 등장 자체가 불필요하게 느껴지고, 스케일만 억지로 키운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아군 공격이 가능하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설명은 등장하지도 않고요. 설령 아군 공격이 가능했다 한 들, 몬태나에서 농성하며 연방군을 상대할 때 스팅어가 그렇게 강한 억지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도 않습니다. 이보다는 핵폭탄과 같은 강력한 장치가 더 설득력이 높았을 겁니다.

잭 리처 특유의 시원한 복수와 응징이 부족했던 점도 실망스럽습니다. 잭 리처의 파괴력보다는 저격 실력에 대한 묘사가 더 많고, 보우 보켄은 단 한 발의 저격으로 처리되며 이야기가 끝나기 때문입니다. 보켄의 잔혹함과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근거없는)카리스마, 이야기에서의 무게감을 고려할 때 이런 결말은 개운하지 못했습니다. 

불필요한 고어스러운 묘사나 총알 발사 과정에 대한 과도한 설명 등도 분량을 늘리기 위한 불필요한 요소로 보입니다. 550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은 이러한 묘사를 줄였다면 100페이지 정도는 줄어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한국어판 제목인 "탈주자"도 무슨 의미인지 영 알 수가 없네요. 여기서 탈주한 사람은 없는데 말이지요.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반전과 흥미로운 수사 과정은 돋보였지만, 지루한 전개와 비현실적인 설정이 작품의 완성도를 크게 떨어뜨린 졸작입니다. 제가 읽었던 시리즈 중에서는 최악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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