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면세구역 - |
얼마 전 소개해드린 알라딘의 "끝내주는 책"에서 소개되었던 책입니다. 읽지 않은 작품이 많았지만 그중 가장 눈길이 가기에 구해 읽었습니다. 방대하고 깊이 있는 리뷰로 존경해 마지않는 게렉터 블로그의 주인이시기도 한 SF 소설가 곽재식 님의 소갯글이 너무나 멋졌기 때문이지요. 제가 읽은 책은 2000년 출간된 책의 개정판입니다. 모두 15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고요. 듀나의 평론은 많이 읽어봤지만 소설은 처음이네요. "판타스틱"에서 단편을 하나 읽어본 적은 있습니다만.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이유는 드라마가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들은 이야기 배경이 되는 설정이나 소재에 휩쓸리거나 적응할 뿐, 맞서 싸우거나 극복하려는 시도와 노력을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또 몇몇 작품은 재미는 있지만 단편으로는 어울리지 않습니다. "펜타곤 계획"이 대표적입니다. 작가 스스로 제시한 떡밥도 제대로 회수하지 못했고, 등장인물들의 행동도 설득력이 부족하더군요. 보다 상세하게 설정과 배경을 설명하려는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아이디어와 발상 자체는 대단합니다. 10년도 더 전에 발표된 작품임에도 지금 읽어도 낡았다거나 뻔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아이디어를 하나의 작품으로 풀어내는 힘이 부족한 점이 아쉽습니다. 작가적인 실력이 성숙해진 최신작을, 가능하면 장편으로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 추천작이 있다면 알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작품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참고로 약간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면세구역"
사고로 죽은 동생이 찍은 몇 장의 사진에는 서울임이 분명하지만 어디로도 들어갈 수 없는 골목이 찍혀 있었다. 그곳은 어디일까?
앞서 말한 ‘드라마가 거의 없다’의 대표적인 예입니다. 죽은 동생의 사진 속 비밀 공간을 찾아내려는 과정까지는 상당히 재미있고, 면세구역이라는 아이디어도 좋습니다. 그런데 찾아낸 다음에는? 그냥 그런 곳이 있더라.. 고 끝납니다. 이래서는 한 편의 이야기라고 보긴 어렵죠. 별점은 2점입니다.
"스핑크스 아래서"
인터넷으로 장난삼아 "스핑크스 아래서"라는 가상의 영화를 등록했는데, 실제로 그런 영화가 존재했다는 식으로 흘러가는 이야기입니다. 중간까지는 인터넷 루머가 어떻게 확대 재생산되는지에 대한 재미있는 은유로 보여 흥미롭습니다. 그러나 결말은 영화가 존재했는지 여부가 중요하지 않다는 식으로 짤막하게 끝나 버립니다. 올리비아 에번즈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궁금한데 설명이 턱없이 부족해 아쉬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나비전쟁"
모든 사물의 인과관계를 꿰뚫고 조작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등장합니다. 이 단편집에서 드물게 주인공이 적극적인 투쟁을 벌이는 작품이지요. 바닥에 물을 뿌리는 것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식의 인과관계 조작 설정은 정말 뛰어납니다. 적도 많은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려는 인물로 묘사되는데 "와치맨"의 오지맨디아스를 떠올리게 합니다.
딸에게 남긴 편지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설정에 비해 턱없이 짧다는게 좀 아쉽네요. 전설의 요약본 같은 느낌을 주거든요.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라지는 사람들"
사람들이 서로를 인식할 수 없게 된다는 내용인데, 주인공의 수동적인 태도와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결말 때문에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낡은 꿈의 잔해들"
누군가의 간절한 소망이 구체화되어 인격체가 되었다는 내용으로 일종의 도플갱어물입니다. 어떤 영화 예고편을 보고 떠올렸다는 창작 배경은 독특했고, 내가 허구이며 닮았다고 생각한 그 누군가가 진짜 나였다는 진상만큼은 괜찮습니다.
그러나 너무 직선적으로 드러내어 반전의 맛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단편의 한계일 수 있지만, 보다 깊이 있는 묘사로 결말의 충격을 극대화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오발행동"
무언가 지구로 다가오고, 그 영향으로 지구인들이 성적 흥분에 가까운 트랜스 상태에 빠져 신을 영접하기를 기다린다는 내용입니다.
예전 휴거 사태에서 모티브를 얻은 듯한데, 지구로 다가온 존재가 지구와 짝짓기를 원하는 정체불명의 거대 생물이었다는 결말이 흥미롭습니다. 주인공들이 부르던 노래가 흰긴수염고래의 구애가와 비슷했다는 설정도 좋고요.
다만 주인공이 수동적인 관찰자에 머무르는 점은 단점입니다. 특히 이 작품만큼은 다양한 인간군상을 3인칭 시점으로 바라봤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타인의 눈"
태어날 때부터 시각 장애를 가진 손녀가 시공간을 초월해 에드 버크먼이라는 남자와 연결되어 그의 눈으로 세상을 본다는 SF입니다.
가장 큰 아쉬움은 화자가 손녀의 할아버지라는 점입니다. 에드 버크먼에게 일어난 변화와 죽음까지의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인데, 이를 제3자가 전해 듣고 전달하는 방식은 몰입을 떨어뜨립니다. 에드 버크먼 시점으로 교차 편집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입니다. 설정 역시 그다지 신선하지 않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펜타곤 계획"
사고에서 살아남은 5명은 뇌사자의 몸으로 부활한 정보요원인데, 그 중 한 명인 구엔 투 레가 병원에서 탈출해 모두를 죽이려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초반에 5인의 설정을 풀어가는 전개와, 구엔 투 레의 의도를 추리하는 구성이 좋습니다. 특히 그들 모두가 한 사람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5개의 뇌로 나뉘어 부활했다는 진상은 인상적입니다. 설정과 진상만으로도 압도적인 재미를 전해줍니다.
다만 이 훌륭한 설정을 살리기에는 작품이 너무 짧습니다. 원래 육체를 부활시킨 이유나 각 인물의 비밀 같은 떡밥이 회수되지 않은 점이 아쉽습니다. 그래도 워낙 재미있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기녀기담"
송나라 시대, 기술자 공수반이 모욕을 당한 뒤 기계 인간을 만든다는 이야기입니다.
중국이 배경이라는 점 외에는 특별할 것이 없습니다. 인간보다 우월한 기계가 나타났을 때의 이야기는 이미 아이작 아시모프를 비롯한 많은 작품에서 다루었기에 참신함도 부족하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집행자"
호전적인 지성체가 사는 행성에 조난당한 지구 개척단의 이야기입니다. 그들이 호전적인 이유가 설득력 있게 설정되어 있고, 이를 존속살인 사건과 연결하는 전개도 뛰어납니다. 우두머리의 아들을 누가 죽였는지 추리하는 과정도 흥미로웠습니다.
다만 생존을 위해 아들에게 존속살인을 저지르게 한다는 설정은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긴박한 위기가 없는데도 이런 행동을 하는 이유가 부족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 크고 검은 눈"
거대한 생명체가 분신들을 우주 각지로 보내 지식을 습득한다는 설정의 SF입니다.
화자인 페를리니의 과거 모험담으로서도 흥미롭고, 괴생명체에 대한 추리적 접근이 돋보입니다. 기형 생명체의 디테일한 묘사에서 작가의 상상력이 빛납니다.
그러나 과거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결말이 시시합니다. 주인공이 거대 생명체를 찾기 위해 장거리 우주 여행자를 찾는다는 결말은 예상 가능하고 긴장감이 없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비잔티움"
비잔티움 행성에 찾아간 상속녀와 후견인이 마주한 행성의 비밀에 대한 이야기로, 행성이 인공 생명체를 키우기 위한 인큐베이터였다는 설정은 빼어납니다.
그러나 행성의 소유자 에오닌-드-레다가 예술품에 집착한 이유가 부족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집착이 강했다면 별과 함께 파괴되는 길을 택했을 가능성도 있는데 이 부분이 설명되지 않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로렐라이"
전투정 비행사가 자신이 죽인 적에 대한 죄책감으로, 적의 노랫소리가 머릿속에 맴돈다는 내용입니다. 그는 이를 없애려 적의 우주선을 찾아가지만 진짜 위기에 휘말리게 되지요.
우주를 배경으로 한 심령 호러물이라 할 수 있는데, 분량이 짧고 반전도 없어서 별로 언급할게 없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숲의 제단"
우주의 황제가 출생지인 별을 방문했다가 숲에 삼켜진다는 이야기입니다. 숲을 숭배하는 무속신앙 같은 설정은 "미사고의 숲"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반전 없이 예상 가능한 결말로 마무리되어서 특기할 점이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아이들은 모두 떠난다"
"숲의 제단"과 비슷하게, 별에 방문한 이주민들이 별에 삼켜져 하나가 된다는 내용으로 너무 짧아 아쉽습니다. 하멜른의 피리 부는 사나이 설화를 변주하는 식으로 구성했더라면 더 드라마틱했을 것입니다. 이주민과 원주민의 이후에 대한 언급이 없어 떡밥 회수도 부족하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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