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스 죽이기 -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검은숲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리스가와 아리는 이상한 나라에서 험프티 덤프티가 살해되는데 범인으로 지목되는 꿈을 꾼다. 아리는 대학원생 이모리 겐을 통해 이 꿈을 여러 명의 주변 사람들이 꾼다는 걸 알게 된다. 이 두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로 현실 세계에서는 꿈 속에서 험프티 덤프티였던 오지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상황이었다.
그 뒤 그리핀이었던 시노자키 교수가 상한 굴을 먹고 병사하며 흰토끼 다나카 리오는 약물 중독자에게 습격당해 죽는다. 유일한 동료였던 도마뱀 빌인 이모리 겐 마저 살해당한 뒤, 여러가지 단서를 통해 아리는 진범이 누구인지를 알아낸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장편 추리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와 현대의 지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발표 당시 평이 꽤 좋았어요.
그런데 중반부까지는 굉장히 지루하고 짜증이 많이 났습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세계 속 정신나간 인물들이 정신나간 대사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수사, 추리는 커녕 이야기조차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어요.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앨리스만 정상일 뿐 조력자 이모리 겐의 아바타르 - 지구의 인물들이 이 세계 속에서 실체화된 존재의 통칭, 그런데 왜 아바타가 아닐까요? - 인 도마뱀 빌조차 너무나 멍청해서 방해만 될 뿐입니다. 물론 마지막에 다잉 메시지를 남기는 활약을 펼치기는 하나 애초에 그리핀 살인 사건의 유력한 증인인 굴을 먹어버리지만 않았어도 진상이 바로 드러났을테니 도움을 줬다고 보기는 힘들죠. 아무리 원작 느낌을 잘 살렸다 해도 정도가 너무 과했습니다.
그나마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세계야 원작 그대로라고 쳐도, 현대 지구의 등장인물들이 이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동문서답만 일삼는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명목이 대학원생들과 조교수들인데 하는 행동은 흡사 초등학생처럼 느껴질 정도에요. 심지어는 등장하는 경찰들마저도 언행 모두 경찰로 보기 힘듭니다. 그래서 이럴 바에야 그냥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에서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만 쓰면 되지, 구태여 현실 지구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했었습니다. 이상한 나라 속 피해자들 모두 현실 지구에서 사망하지만 모두 사고나 병사로 처리된다는 설정 때문에 현실 지구에서는 특별한 수사나 추리가 이루어질리 없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서술한 이유는 후반부에 드러납니다. 이 설정이 후반부에 연속되는 반전에 요긴하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공작 부인'인 줄 알았던 히로야마 부교수가 '메리 앤'으로 진범이라는게 드러나는 첫번째 반전부터 그러합니다. 현실의 지구가 없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반전으로 써 먹을 수 없었겠죠. 이 반전은 추리적으로도 꽤 합리적입니다. 여러가지 단서를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전달하고 있기도 하고요. 예를 들자면 앨리스가 험프티 덤프티 살인 사건 현장에 출입했다고 증언한 흰토끼는 시력이 좋지 않았고 여러 사람들을 냄새로 구분했다는 것, 흰토끼가 앨리스와 메리 앤을 착각했던 적이 있다는 것, 공작 부인은 알 수 없었던 정보를 히로야마 부교수가 입에 올렸던 것 등입니다.
뒤이은 반전은 더 놀랍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히로야마 부교수가 자살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상한 나라'에서 죽지 않고 부활하여 앨리스를 살해하죠. 이는 '이상한 나라'가 현실이고 현실의 지구는 오히려 이상한 나라의 '붉은 왕'이 꾸는 꿈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은 한 쪽에서 죽으면 막연히 다른 쪽 세계에서도 죽는구나 싶었는데, 사실은 현실인 '이상한 나라'에서 죽어야 '현재의 지구'에서 죽을 뿐이고 반대의 경우는 다시 살아나게 되는 거죠.
이후 마지막 반전이 이어집니다. 구리스가와 아리는 앨리스가 아니라 앨리스 주머니 속 겨울잠쥐여서 현실의 지구에서 죽지 않고 살아나 다니마루 경감과 니시타카지마 형사와 함께 히로야마 부교수의 범행을 드러내는데 성공한다는 반전이죠. 형사는 이상한 나라에서 공작 부인, 경감은 바로 여왕이었기에 이상한 나라에서 메리 앤은 능지처참에 가까운 끔찍한 사형을 당하는게 결말이고요. 히로야마 부교수가 공작 부인이 아니라 메리 앤이었다는 첫번째 반전과 겨울잠쥐가 말을 할 수 있다는 서두의 묘사를 복선으로 활용한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그 외의 복선도 탄탄합니다. 험프티 덤프티를 죽인 이유는 히로야마 부교수가 자신의 승진의 걸림돌이라 생각하여 살의를 품었던 시노자키 선생으로 착각했기 때문인데 이를 '험프티 덤프티에는 시노자키 선생이 어울린다'는 등의 지나가는 말로 드러내는 식이죠.
하지만 조금 깊게 생각하면 문제도 많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무의미한 캐릭터와 전개가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일단 도마뱀 빌, 이모리 겐은 존재와 죽음 모두 무의미합니다. 현실 지구의 이모리 겐은 뭔가 있어보였던 첫 등장에 비하면 너무 하는게 없어서 놀랄 정도입니다. 도마뱀 빌은 이상한 나라에서의 온갖 민폐 행동도 거슬리는데, 유일한 활약이라 할 수 있는 다잉메시지도 불필요했습니다. 히로야마 부교수가 진범 메리 앤이라는건 다른 단서를 통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요. 그냥 분량 늘리기에 불과합니다. 미치광이 모자 장수와 3월 토끼 역시 이상한 나라에서의 괴상한 언행 외에는 왜 나왔나 싶네요. 현실 세계에서의 비중은 아예 없다시피 하니까요.
다니마루 경감과 니시나카지마 형사 콤비도 등장과 비중에 비하면 활약이 미미합니다. 그들은 히로야마 부교수가 공작 부인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죠. 그렇다면 그녀가 수상하다는 전제 하에서 움직였어야 하는데 행동이 너무 굼뜹니다. 또한 구리스가와 아리가 다니는 대학원에서는 오지의 자살로 보이는 추락 사건, 시노자키 교수가 상한 굴을 먹고 죽는 사건, 다나카 리오가 약물 중독자의 칼에 찔려 죽고 약물 중독자는 자살하는 사건, 이모리 겐이 술을 먹고 자다가 들개에게 뜯어먹혀 죽는 사건이 잇달아 일어납니다. 아무리 자살과 병사, 사고사라도 '이상한 나라' 속 인물이기도 한 다니마루 경감과 니시타카지마 형사는 당연히 수상하다는걸 알았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메리 앤은 현실의 지구가 사실은 이상한 나라의 꿈이라는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꿈 속에서의 신분 상승을 위해 현실에서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대단한 신분 상승도 아니에요. 단지 부교수가 교수가 되는 정도니까요. 이래서야 위험에 비하면 얻는게 너무 약하죠. 실제로 흰토끼가 냄새만 잘 맡았어도, 굴을 빌이 삼켜버리지만 않았어도 범인으로 체포되었을겁니다. 그녀의 주장대로 이상한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정신이 나갔다고 치더라도, 이 정도 단서라면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했을테니까요. 차라리 스나크나 벤더스내치를 조종하는 재주를 이용하여 이상한 나라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계획이 더 나았을겁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기발한 설정과 아이디어, 반전은 충분히 매력적이며 추리적으로도 평균은 됩니다. 저 같은 평범한 독자에게는 캐릭터, 전개, 묘사 모두 과한 느낌이라 조금 감점합니다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팬이시라면 이 모든게 다 즐길거리겠죠. 앨리스 팬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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