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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8/24

아자젤 - 보리스 아쿠닌 / 이항재 : 별점 2.5점

아자젤 - 6점
보리스 아쿠닌 지음, 이항재 옮김/아작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유한 대학생 코코린이 백주대낮에 기묘하게 자살하고, 막 스무살이 된 14등급 서기관 에라스트 판도린은 목격자 중 한 명의 '대학생' 이라는 증언에서 이상함을 느낀다. 코코린의 복장은 대학생임을 짐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수사를 통해 판도린은 코코린과 함께 행동한건 대학교 제복을 입은 니콜라이라는걸 알아낸다. 니콜라이는 심지어 코코린의 유언장에 집행인으로 언급된 인물이었다. 코코린의 자살은 자살이 아니라 둘이 수수께끼의 미녀 아말리야를 두고 벌인 일종의 결투였었다. 그러나 니콜라이는 곧바로 암살자에게 칼에 찔려 죽고 판도린도 죽을 뻔 하는데....

19세기 후반의 제정 러시아를 무대로 14등급 (중간에 진급해서 9등급) 서기관 에라스트 판도린이 활약하는 추리 모험 소설. 일종의 역사 추리물로 볼 수도 있으며, 특별한 정보를 입수하고 해석하여 국제적인 음모와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일종의 스파이 소설로 볼 수도 있는 복합적인 장르의 작품입니다.

러시아에서는 현재 굉장한 인기를 끌고 있는 시리즈라는데 수긍할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줄거리 요약이 된, 니콜라이가 살해되는 초반부까지는 아주 재미있었습니다. 왠지 모르게 유쾌한 분위기도 좋고, 러시안 룰렛을 흉내낸 기묘한 자살이 사실은 '결투' 였다는 아이디어도 기발하거든요. 사건에 니콜라이가 관련되어 있다는걸 깨달은 판도린의 직감도 높이 평가하고 싶고요. 이런저런 복선도 꽤 충실합니다. 고래뼈 코르셋은 아주 일품이에요.

그러나 이어지는 중반부는 많이 어설픕니다. 아말리야와 애증의 관계라는 주로프가 그녀의 행방을 알려주는 부분부터가 억지스럽거든요. 판도린이 정상으로는 생각되지 않는 객기를 부려 주로프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완벽하게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목숨을 내거는 모습에 감명한 주로프가 오히려 그를 살려주고 아말리야의 주소까지 전해준다는건 여러모로 납득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결투를 촉발한 둘 사이의 도박도 굉장히 이해하기 힘들었어요. 물주가 카드 한 장을 오픈하고, 두 장을 차례로 오픈한다, 첫 카드가 오픈된 카드와 같으면 물주가 이기고 두번째 카드가 같으면 상대방의 승리. 만약 두 카드 모두 오픈된 카드와 다르면 판돈을 2배로 올려 이를 최대 5번까지 반복한다는 룰인데 누가 봐도 물주가 너무 유리해요! 여기서 물주가 이길 확률은 97%!!!!에 달합니다. 이런 도박을 졌다고 주로프가 열이 받는건 말이 안됩니다. 어차피 다음 물주는 주로프였으니까요.
게다가 아말리야의 영국 주소를 받고 영국에서 벌어진 모험은 더 가관입니다. 판도린이 중요한 서류를 손에 넣은 건 단순한 미행 덕분이고, 그의 행방을 밝혀낸 아말리야 일당에게 죽을 위기에 처하지만 익사 직전에 빠져나올 수 있었던 건 범인들이 칼을 미쳐 빼앗지 않은 덕분입니다. 순전한 행운이죠. 배신자 프이조프에게 죽을 뻔 할 때 갑자기 나타난 주로프가 그를 구해주는 건 우연과 행운의 행진에 정점이고요. 워낙에 말도 안되는 행운인지라 작가도 무안했는지 주로프의 입을 빌어 '판도린은 '후광'을 갖춘 특별한 행운의 소유자다'라고 양념을 조금 치기는 하지만... 솔직히 그럴리가 없잖아요? 행운은 걷어내고 보다 설득력있게 전개할 필요가 있었어요. 아말리야를 사살하고 탈출한 판도린은 프이조프의 배신 덕분에 위기에 처하지만, 특유의 호흡법으로 살아나서 그들을 되려 해치운다는 식으로요. 이렇게 된다면 주로프는 등장할 필요도 없죠.

그래도 다행히 겨우 살아난 판도린이 팀장 브릴링에게 진상을 말하는 데에서 시작되는 후반부는 또 괜찮습니다. 특히 '아자젤'이라고 불리우는 집단의 정체가 백미입니다. 각국에 신원을 알 수 없는 인물들이 유력자로 급부상했다는게 확보한 서류로 알아낸 전부인데, 판도린은 이들이 모두 에스터 남작 부인이 운영하는 보육원 에스테르나트 출신이라고 추리하죠. 이 놀라운 추리는 앞 부분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었던 여러가지 복선들로 뒷받침 됩니다. 부유했던 두 대학생이 유산을 남기기로 유언한 곳은 에스터 남작 부인의 보육원이었다는 당연한 증거는 물론, 남작 부인의 교육 철학 역시 중요한 복선입니다. 각자의 재능을 딱 맞춰 개회시킨다는 것으로 이를 통해 고아들이 각자의 분야 (경제, 군사, 정치) 에서 두각을 나타낸게 그럴듯하게 설명됩니다.

물론 후반부에서도 판도린은 두 번의 위험을 순전히 행운으로 벗어난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특히 남작 부인에게 사로잡히지만 오래 수련한 호흡법으로 숨을 참아 클르르포름 마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는 대체 이게 뭔가 싶더군요. 판도린의 모습을 본 브릴링이 엄청난 충격을 받는 묘사에서 브릴링이 흑막 중 하나라는건 눈치챌 수 있어서 반전의 묘미도 약했고요. 
개인적으로는 남작 부인까지 처지하고 성공과 미인 신부까지 손에 얻은 판도린의 행복이 아자젤 잔당에 의해 박살나는 비극적인 결말도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래도 행운이 이어지는 전개 문제는 핵심 추리와 진상이 놀라운 덕분에 상쇄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시대상을 세밀하게 그려낸 묘사도 좋습니다. 러시아 작가가 쓴 오리지널 러시아 추리 소설은 알렉산드라 마리리나의 작품 이후 십수년만에 처음인데 저력이 대단하네요. 재미와 흡입력이 아주 상당합니다.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번역 출간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덧붙이자면, 어설픈 전개를 조금 보완해서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훨씬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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