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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8

빨간 리본 - 헨닝 망켈 / 홍재웅 : 별점 2점

빨간 리본 - 4점
헨닝 망켈 지음, 홍재웅 옮김/곰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웨덴의 외딴 마을 헤세발렌에서 19명이나 되는 마을 사람들이 처참하게 살해되었다. 피해자들은 어린 소년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을에 오래 살았던 노인들이었다. 이 뉴스를 접한 비르기타 로슬린 판사는 병가 중에 충동적으로 헤세발렌으로 향했다. 돌아가신 어머니 기록들을 통해 피해자 중에 어머니의 양부모가 있다는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비르기타는 미국 네바다에서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었으며, 경찰이 중요한 정보라고 이야기해 준 빨간 리본이 어디서 나왔는지를 알아내었다. 그녀는 간단한 조사로 수상한 중국인 손님이 찍힌 비디오 테이프를 손에 넣게 되었다. 그러나 경찰은 이 정보에 대해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라르스 에리크 발프리드손이라는 인물이 범인이라고 자백했던 탓이었다.
그 뒤 휴가를 얻어 친구 카린과 함께 중국으로 향했던 비르기타는 수상한 중국인 손님에 대한 탐문 조사를 벌이다가 강도를 당했다. 이를 통해 중국 공산당 실력자인 훙취와 알게 되었다. 그러나 훙취는 부정부패를 저질러 왔던 동생 야뤼에게 살해당했고, 그녀의 마지막 메시지가 비르기타에게 전해지는데...


스웨덴 작가 헨닝 망켈 (헤닝 만켈)이 쓴, 500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대장편. 작가가 창조한 유명 탐정인 쿠르트 발란더 시리즈는 아닙니다. 비르기타 로슬린이라는 헬싱보리에서 근무하는 여성 판사가 주인공인 작품이지요.

2006년 1월, 한 마을에 사는 친족들이 하룻밤 사이에 무려 19명이나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되는 도입부는 흥미롭습니다. 왜 이런 잔혹한 살인을 저질렀는지, 동기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신병자의 소행으로 보일 뿐이지요. 그러나 비르기타 로슬린은 돌아가신 어머니가 남긴 서류를 통해 피해자들이 '안드렌' 집안 사람들이라는게 이유일 거라고 추리합니다. 100년도 더 전에 미국으로 이주했던 네바다의 안드렌 일가도 얼마 전 처참하게 살해된걸 알아내고요.
여기까지 진행된 뒤, 갑작스럽게 1863년의 중국인 '싼'이 겪는 역정이 그려지는데, 흥미롭기는 뒤지지 않습니다. 속아서 미국으로 끌려간 뒤, 네바다에서 철로를 놓는 노역에 시달리는 과정에서 동생 두 명을 잃고, 중국으로 귀향한 뒤 선교사들 때문에 결혼할 여자와 뱃속 아이마저 잃어 복수귀가 된다는, 파란만장이라는 말로도 부족할 엄청난 내용이거든요. <<황비홍>> 1편에서 '금산에 갈 수 있다'고 사람들을 유혹한 뒤 노예로 팔아먹는 이야기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그리고 비르기타가 빨간 리본의 출처, 에덴 호델 주인의 증언과 피해자 유품인 JA의 일기를 통해 사건 배후에 중국인이 있다는걸 알게 되면서 두 가지 이야기는 하나로 합쳐지게 됩니다. 중국인 '싼'의 후예인 냉혈한 야뤼가 철천지 원수인 안드렌 가문에게 복수를 집행했다는게 진상이지요.

그러나 이렇게 합친건 아무리 무리수였습니다. 거의 150년 전, 증조 할아버지를 힘들게 했던 철로 노역 감독관 후손들을 죽인다는 동기부터가 전혀 와 닿지 않았으니까요. 어떻게든 설득력을 부여하기 위해 싼이 겪은 처절한 고생을 펼쳐놓기는 했지만, 이런 식이면 원수가 아닌 사람이 없을테니까요. 물론 복수심을 품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 후손 일가를 모두 몰살시키는건 억지였습니다. 미국 노예의 4~5대 쯤 되는 후손이 복수를 위해 노예선 선장이었던 백인 후손들을 몰살시킨다면, 미국에는 남아날 사람이 별로 없겠죠.
게다가 진범이라고 할 수 있는 야뤼가 등장한 뒤부터는 이야기는 아예 다른 길로 향합니다. 중국 특권층이 자신들이 가진 부와 권력을 빈부격차로 분노한 농민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아프리카'로 농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이 장황하게 펼쳐지는 탓입니다. 계획에 대한 설명은 그럴듯합니다. 마오 시대부터 이어진 여러가지 정책 들에 대한 상세한 소개가 곁들여져 설득력이 높았던 덕분입니다. 관련된 자료 조사가 철저했던 듯 싶네요. 아프리카 짐바브웨 출장에 대한 이야기도 생생함이 잘 살아 있고요. 아이를 업은채 50Kg이나 되는 시멘트 포대를 나르는 아낙에 대한 묘사가 대표적입니다. 아내의 황당무계한 권력욕으로 유명해진 무가베 대통령을 직접 만나는 장면을 통해 설명되는 짐바브웨와 무가베 대통령에 대한 설명도 충실했습니다. 또 이 계획이 식민지 주의의 재현이라며 반대하는 훙취와 야뤼의 대결도 볼만합니다. 하지만 본편 살인 사건과는 무관한 이야기였습니다. 이런 이야기를 할 거였다면 다른 작품에서, 다른 주제로 소개했어야 하지 않나 싶네요.

이렇게 별 상관도 없는 중국 이야기로 1/3 분량을 할애한 뒤, 누나인 훙취까지 제거한 야뤼가 비르기타를 죽이기 위해 직접 나서고, 훙취의 아들에게 암살당한다는 결말은 그야말로 가관입니다. 작 중에서 야뤼는 전용 비행기까지 있는 거부이자 중국 공산당의 실력자로 등장합니다. 그런 인물이 직접 외국에서 살인을 저지르려고 한다는 발상부터가 현실적이지가 않습니다. 사건을 사주했다는 증거도 없을 외국인 여판사를 중국도 아니고 외국에서 직접 죽인다? 말이 될 리가 없지요. 몰래 커피에 유리 가루를 섞는다는 살해 방법도 불확실합니다. 많이 어설퍼 보였어요. 이보다는 초반부에 벌어진 헤셰발렌 사건을 직접 저질렀다는게 차라리 말이 될겁니다. 그 사건 피해자들은 납득은 잘 돼지는 않아도 가문의 원수라는 이유가 있기는 하니까요.
전개도 우연이 지나치게 많습니다. 에덴 호텔에서 리우신이 야뤼의 사무실 주소를 적은 팜플렛을 두고 간 것, 마침 중국 베이징 여행을 간 비르기타가 그 건물을 탐문하다가 강도를 당한 것, 그래서 훙취와 만나게 된 것 모두가 우연입니다. 비르기타가 중국 여행만 가지 않았어도 야뤼가 런던에 나타나 죽을 이유는 없었습니다.

덧붙여, 주인공인 비르기타 판사의 행동도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우선 그녀는 지나치게 경찰을 불신합니다. 그녀가 중국인이 배후에 있음을 알렸음에도 경찰이 무시한건 나름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범행을 자백하고 흉기까지 공개한 용의자가 등장했으니까요. 오히려 사건 담당 경찰 비바 순드베리는 사건 현장에 있던 중요 물건이었던 일기장을 훔친 그녀를 용서해주고 일기장을 빌려주는 등 도움을 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왜 비르기타는 경찰을 불신할까요? 판사가 경찰을 이렇게까지 불신해도 되는걸까요?
그리고 비르기타가 야뤼의 살의를 눈치채고 런던으로 도주하는 과정은 더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녀가 알 수 없는 중국인에게 위협받고 있다는 추상적인 이야기로 경찰이 움직일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에덴 호텔 주인 스튜레 헤르만손이 수상한 중국인 투숙 후 살해된건 명백한 사실입니다. 호텔 투숙객 장부가 없었졌고, CCTV라는 증거도 있고요. 스튜레 헤르만손이 전날 저녁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도 경찰 조사로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겁니다. 그렇다면 수상한 중국인의 다음 목표가 비르기타라는 것도 합리적인 추리일테고요. 이런 상황에서 왜 경찰에게 연락하지 않고, 홀로 정체도 확실치 않은 중국인 여자 말만 믿고 런던으로 향하는지 알 수가 없더라고요.
비르기타가 소싯적 마오 사상에 경도된 극좌였다는 설정도 불필요했으며, 야뤼가 이렇게 많은 증거를 남기면서 스튜레 헤르만손을 살해할 이유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제목이기도 한 빨간 리본은 뭘 의미하는지도 알 수 없고요. 살해 현장에 리본을 남길 이유는 나오지 않거든요. 구태여 해석해 보자면, 서구권이 노략질하고 약탈했던 중국이 복수자로서 돌아왔다는 상징적 의미이겠지만, 추리물 기준으로는 있어서는 안 될 단서였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흥미로운 이야기이기는 합니다. 제법 빠른 시점에서 중국의 위협을 드러낸 식견은 높이 평가할 만 하고, 방대한 자료 조사가 뒷받침된 드라마도 제법이었고요. 본 이야기와는 상관없는 디테일들 중에서도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추리물로는 함량 미달입니다.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구태여 권해드릴 만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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