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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10

묵시록의 여름 - 가사이 기요시 / 송태욱 : 별점 3점

묵시록의 여름 - 6점
가사이 기요시 지음, 송태욱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중세 이단 카타리파에 대해 연구하던 야부키 가케루는 나디아와 함께 카타리파 최후의 전장이었던 몽세귀르로 향한다. 툴루즈 기업왕 로슈포르 가문이 카타리파 유적 발굴을 원조하고 있는데, 발굴을 맡은 샤를 실뱅 교수를 돕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로슈포르 가문의 산장 에스클라르몽드에 도착하자마자 일행은 기묘한 살인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독일인 발터 페스트가 에스클라르몽드 산장 자료실에서 살해된 사건이었다.
뒤이어 유력한 용의자였던 장 노디에가 성곽도시 카르카손 성벽 탑 안 밀실에서 살해되고, 로슈포르의 아내 니콜 로슈포르와 로슈포르마저도 몽세귀르 절벽에서 추락사한다. 이 모든 사건에는 '요한 묵시록'의 계시처럼 여러가지 상징과 말의 죽음이 함께 펼쳐져 있었다.
로슈포르 가문의 외동딸 지젤의 연인 줄리앙은 탐정 역을 맡아 사건 해결에 뛰어들고, 야부키 가케루는 이를 바라보는데...


"사건을 어디까지나 현상으로, 즉 의미와 의미가 뒤얽힌 유기체적 전체로 보고, 거기에서 전체의 지렛대에 해당하는 것을 발견하는 거야." - 야부키 가케루
"뭔가를 표현하는 것으로서의 상징은 뭔가를 은폐하기 위한 암호가 되는 거죠." - 줄리앙


가사이 기요시의 '현상학 탐정야부키 가케루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썸머 아포칼립스>>라는 제목으로 알려졌던 고전 명작입니다. '문예춘추 선정 미스터리 100선' 에도 36위로 선정되어 있습니다. '일본 본격 미스터리 100선'에서는 무려 4위고요. 하지만 개정된 '주간문춘 선정 동서 미스터리 100'의 상위 50권에는 포함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리뷰를 하면서 따로 설명드리겠습니다.
솔직히 번역되었는지 모르고 있다가, 무려 5년이 지난 얼마 전에야 우연히 작품의 존재를 알게 되어 읽게 되었습니다. 추리 소설 애호가로서 부끄럽네요. 구태여 변명하자면 제목이 제목이 한국어로 번역된 탓입니다. 전작 <<바이바이 엔젤>>은 원제 그대로 출간되었는데 말이죠.

하여튼, 작품은 명성답게 본격물로서는 완벽했습니다. 트릭의 수준도 높고, 추리도 합리적이에요. 고전 본격물다운 불가능 범죄, 기묘한 상황이 펼쳐지는데 이를 절묘하게 수습하고 있거든요. 특히 첫 번째, 두 번째 사건이 그러합니다.

첫 번째 사건 피해자 발터 페스트는 머리 앞 부분을 둔기에 맞아 살해당했습니다. 피해자가 창을 통해 들어온, 두 손으로 들어야 하는 흉기를 든 침입자를 봤을텐데 저항없이 죽음을 맞이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 자료실 창문은 이미 열려있었는데 범인은 왜 창문을 깼을까요? 그리고 흉기인 석구에는 요한이 부조되어 있었는데 이는 요한 묵시록 제 6장과 관계가 있다는게 밝혀집니다. 흰말 한 필 위에 사람이 활을 들고 있었다는 묵시록 내용에 따라 시체는 화살을 맞았으며 마굿간에 있는 흰 말도 죽은채 발견되지요. 범인이 이렇게 묵시록처럼 현장을 꾸민 이유는 무엇일까요? 게다가 사건 관계자들 모두 알리바이가 명확해서 사건은 미궁에 빠집니다.
두 번째 사건은 더 기괴합니다. 장 노디에는 잠긴 탑이라는 밀실 안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됩니다. 자살로 밖에는 생각되지 않는 상황으로요. 그런데 묵시록처럼 현장에는 큰 칼이 놓여 있었고 탑 밖에는 밤색 말이 죽어 있었습니다. 장 노디에가 자살했다면, 그가 자신의 자살 현장을 묵시록처럼 꾸밀 이유가 있었을까요?

세 번째 사건에서는 로슈포르의 아내 니콜이 절벽에서 추락하고, 현장에서 묵시록대로 죽은 검은말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에서는 실뱅 교수가 도주한게 목격되었기 때문에 그가 범인일거라 여겨지게 됩니다. 야부키 가케루와 나디아의 조사로 실뱅 교수는 동기가 있다는게 밝혀지기도 했거든요. 그 외에 현장에 모인 관계자들 알리바이는 모두 확실했고요.

그러나 마지막 네 번째, 로슈포르 추락사 이후 줄리앙에 의해 진상은 드러납니다. 여기서 묵시록 효과를 위해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뿌렸지만, '말'에 주목해야 한다는 추리는 인상적이었습니다. 사실 묵시록에 다른 연쇄 살인은 다른 작품들 (<<장미의 이름>>, <<사쿠라 신부의 사건 노트 - 고도관 살인 사건>>)에서도 써먹었던 식상한 소재인데, 묵시록은 본질을 흐리기 위한 연출일 뿐이었다는 아이디어는 신선했기 때문입니다. 말은 그냥 마굿간에서 죽여도 되는데, 두 번째, 세 번째 사건에서는 현장 근처에서 말이 죽은채 발견되었죠. 줄리앙과 가케루는 말이 범행에 이용되었기 때문이라고 추리합니다. 두 번째 사건에서는 말의 힘을, 세 번째 사건에서는 속도를 이용한 거지요.
두 번째 사건에서 말의 힘은 밀실 안 피해자의 목을 밧줄로 걸어 밖에서 잡아 당기기 위해 필요했습니다. 사람은 빠져나갈 수는 없지만 창문은 있었거든요. 밖에서 피해자 노디에의 이름을 부르고, 피해자가 내다보기 위해 깊은 창에 머리를 내밀었을 때 창 주위에 바늘로 고정하여 둘러친 밧줄 올가미를 단번에 조여 살해한 겁니다. 이는 추리 애호가라면 친숙하실 유명한 장치 트릭입니다. <<소년 탐정 김전일 26. 마신 유적 살인 사건>>에서도 비슷하게 사용되었죠. 밖에서 이름을 부른건 아니고, 밀폐 공간에서 가스 냄새가 나도록 해서 피해자가 창 밖으로 머리를 내밀게 만들있다는 차이는 있지만요. <<명탐정 코난. 25 거미의 집>> 창 틀 테두리에 줄을 올가미처럼 장치한 것, 창에 소리가 나도록 해서 (BB탄 총을 이용) 피해자가 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게 한 뒤 밖에서 강한 힘으로 낚아채는 방법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똑같아요. 시대에 걸맞게 '말'이 아니라 '자동차'를 이용하여 밧줄을 당겼고, 거미님 전설을 이야기에 녹여내었다는 사소한 차이만 있을 뿐이고요. 이렇게 후대에서도 모방한다는건 그만큼 잘 고안된 트릭이라는 뜻이겠죠.

세 번째 사건에서는 말의 속도를 이용했습니다. 범인 로슈포르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현장으로 빠르게 이동할 때 타고 간 거지요. 이렇게 두 번째, 세 번째 범행에서는 말이 현장에 있을 수 밖에 없어서 그 자리에서 죽게 된 겁니다. 아주 그럴듯해요.

첫 번째 사건도 묵시록 효과를 빼고 사건 현장에만 주목하여 범인의 트릭을 풀어낸다는 추리를 통해 해결됩니다. 범행에 '투석기'가 사용되었다는 건데, 아주 기발했어요. 사건 현장 건너편 건물에서 동그랗고 무거운 석구를 이용하여 살인을 저지르는데 이만큼 적합한 흉기는 찾아보기 힘들테니까요. 피해자가 멍하니 머리 앞 쪽에 석구를 맞은 이유도 설명되고요. 실제로 머리에 제대로 맞는다고 장담할 수 없어서 투석은 유리창을 깨기 위함이고, 진짜 흉기는 쇠뇌로 쏜 화살이라는 아이디어도 좋았습니다. 투석에 사용한 석구가 요한 묵시록을 암시하는 조각품이고, 쇠뇌와 활 역시 그러해서 묵시록처럼 현장을 꾸민 발상도 기가 막힙니다. 카타리파의 복수, 혹은 페스트에게 원한이 있는 실뱅 교수에게 혐의를 돌리기에 딱 맞는 연출이었어요.

사건과 함께 진행되는 카타리파의 숨겨진 보물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습니다. 첫 번째 사건에서 없어진 문서는 13세기 알비주아 십자군의 지휘자로 카타리파를 잔혹하게 살육했던 생조르주가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에게 보냈던, 카타리파의 숨겨진 보물에 대한 서한일 거라고 설명됩니다. 생조르주는 서한을 보내기 직전 일어난 카르카손 폭동으로 도주하다가 암살당했고, 품 속의 서한은 생조르주가 암살당한 성당인 베네딕트회의 수도사가 은닉했었죠. 베네딕트회는 생조르주가 속했던 도미니크회와 대립했던 탓으로, 이후 책임 추궁이 두려워 이를 영원히 생세르낭 성당에 묻었던 겁니다.
콜베르가 편찬했던 도아트 문서에 생략된 부분은 이 생조르주 서한인게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도아트 문서에는 기록되었던 걸까요? 콜베르는 실용주의자로 보물을 재정문제로 치부했었습니다. 그래서 잃어버린 생조르주 서한을 찾아 나섰죠. 결국 생세르낭 성당에서 서한을 발견하는데, 상황이 변했던 겁니다. 처음 서한을 찾아나섰던 8년 전에는 콜베르는 푸케와 경쟁하던 상황이라 왕에게 보물을 바치고 싶었지만, 8년 뒤 콜베르가 왕궁에서 차지한 지위는 확고부동하게 되기에 그는 왕에게 보물을 바치지 않고,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무기로 감춘거지요. 그럴듯하죠? 그러나 콜베르 사후, 이 내용은 왕에게 누설되어 도아트 문서는 헌상되었고, 그 때 생조르주 서한 부분이 삭제되었던 겁니다.
그리고 2차 대전 중 우연찮게 발굴된 생세르낭 문서, 그리고 생조르주의 서한을 향토 사학자 투르뉘가 손에 넣었지만, 그는 나치 독일군에게 체포되었고 문서는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그 나치 독일 군인이 발터 페스트였고, 투르뉘의 유복자는 샤를 실뱅이었다는 관계도 여기서 드러나게 됩니다.
하지만 숨겨진 보물의 위치가 기록된 서한을 13세기 십자군을 대표하는 도미니크 수도회, 17세기 부르봉 왕조의 절대주의를 대표하는 콜베르가, 20세기 유럽의 최고 권력이었던 나치 친위대 모두 손에 넣었는데 모두 암호를 해독하지 못해 발굴에 실패했다는건 말이 안되죠. 작품에서는 이들 중 독일군이 결국 매장된 보물을 발굴하는데 성공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카타리파의 상징인 거대한 황금 태양 십자가로, 종전 후 미군이 입수한 뒤 사라져 버렸다고 하네요. <<레이더스>>와 동일한 결말입니다만, 시기적으로는 이 작품이 더 빠르니 원조격이라고 보아도 무방할거에요. 이 역시 나름대로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인 셈이죠.
줄리앙이 투석기 잔해를 버리는 행동, 절벽을 등산 장비를 이용하여 수직으로 타고 내려와 알리바이를 만든 것 등 세세한 부분도 잘 짜여져 있어서 만족스러웠어요.

카타리파 보물이 사건의 중요 소재로 사용되고 있는 덕분에 관련된 설명도 상세합니다. 묵시록도 마찬가지고요. 개인적으로는 묵시록에 대한 상세한 설명이 아주 좋았어요. 소네 신부를 통해 머리에 쏙쏙 들어오게 잘 설명되고 있거든요. 원래 유대인들, 그리스도교들 모두 묵시록을 열심히 믿었지만,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공인하자 그리스도교는 더 믿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박해하던 로마가 멸망하고 신의 왕국이 오기를 고대하며 믿었는데, 로마 제국이 자기 나라가 되어버렸으니 그 멸망을 고대할 이유가 없어진거지요. 그러나 유대인들은 민족 종교로 유대인들만의 왕국을 기다렸기에 그리스도교와 다른 길을 갔고요. 그래서 묵시록을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이단이 된 겁니다.
또 남프랑스 일대 풍광이 소개되는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나쁘지 않았어요. 파리에서 출발하여 피레네 산들에 둘러 싸여 있는 마을 몽세귀르와 몽세귀르 절벽에 위치한 카타리파 유적, 카타리파 최후의 전장인 성곽도시 카르카손, 항구 도시 마르세유를 거쳐 몽펠리에 옆 작은 도시 세트까지의 여정이 손에 잡힐듯 생생하게 펼쳐지거든요. 심지어 실존하는 카르카손 성곽도시의 탑 안에서 시체가 발견되기까지 하니 여정 미스터리로 보아도 손색없을 수준입니다.

여기까지 정리된 내용만 보면 본격물로 완벽하고, 보물 찾기 이야기도 잘 결합된 걸작으로 보이지요? 하지만 발표 이후 여러가지 리스트에 포함되었다가 지속적으로 순위가 하락한 이유도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 큰 헛점이 있을 뿐더러, 그 외의 단점도 명확하기 때문입니다.
추리적인 큰 헛점은 여러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로슈포르가 범행을 저지른 동기입니다. 노디에가 자신을 협박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한 들, 남프랑스 재계의 지배자가 눈 하나 깜빡할 이유가 있을까요? 게다가 니콜이 실뱅과 불륜을 저지른다고 한 들, 이는 니콜의 잘못입니다. 로슈포르가 니콜의 아버지 피에르를 강하게 압박할 수 있는 요소이지 피에르와의 동맹이 깨질 위험 요소는 아니에요. 설령 위협을 느꼈다 한 들, 재계의 제왕이 직접 복잡한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또 두 번째는 범행의 순서입니다. 발터 페스트 살해는 이어지는 진짜 살인 목적을 흐리기 위함이라는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를 살해함으로써 생조르주 서한이 노디에의 손에 들어간건 순전히 우연입니다. 게다가 노디에를 살해한 두 번째 살인은 공들여 만든 밀실 트릭으로 경찰도 자살로 생각했을 정도입니다. 그런데 세 번째, 네 번째 사건을 계속 일으키면 밀실을 만들 이유가 없습니다. 순서상으로는 생조르주 서한을 어떻게든 노디에게 전해주고 페스트를 죽인 뒤, 니콜을 죽이고 노디에를 밀실에서 죽여서 자살로 위장했어야 합니다. 지금의 이야기는 트릭을 위한 범행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아요.
마지막에 로슈포르가 줄리앙과 격투를 벌이다가 절벽에서 떨어진다는 결말도 시시했습니다.

이런 추리적은 문제에 더해, 개인적으로 더 큰 문제라 생각하는건 쓸데없는 철학적, 종교적 이야기와 함께 테러 조직 '붉은 죽음'과 러시아인 니콜라이 일리치의 존재가 이야기에 깊숙히 개입해 있다는 점입니다. 탐정이라 생각했던 줄리앙이 사실은 붉은 죽음의 조직원으로 로슈포르 가문의 재력을 이용하여 원자력 제국을 만드려고 한다는게 진상이었다는건 솔직히 헛웃음만 나오더라고요.
시몬이라던가 야부키 가케루 입을 통해서 이야기되는 종교적, 철학적 담론도 지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탐정 역할도 줄리앙이 담당하고 있어서 야부키 가케루는 이런 쓰잘데 없는 이야기를 위해 존재하는 느낌이 강하고요. 읽다보면 두 번째 사건에서 야부키 가케루는 진상을 파악한걸로 묘사되는데, 희생자가 더 나올 때까지 손도 쓰지 않습니다. 줄리앙이야 로슈포르 부부가 죽어야 유산을 손에 넣을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라도 있지, 야부키 가케루가 사건을 그냥 지켜만 볼 이유는 없어요. 이렇게 무의미하게 분량을 잡아먹느니 줄리앙을 정의의 명탐정 주인공으로 해서 이야기를 400페이지 정도로 줄이는게 훨씬 나았을겁니다. 이래서야 야부키 가케루 시리즈라고 부르기 창피할 정도에요.

그래서 제 별점은 3점입니다. 트릭은 멋집니다. 역사적 소재를 작품에 잘 끌고 들어왔다는 점도 높이 평가하고요. 그런데 지금 읽기에는 좀 애매하고, 지루하며 단점도 명확한 편입니다. 책 뒤 해설을 보니 역자분께서 시리즈 최고작이라는 <<철학자의 밀실>>이 출간될 수 있도록 잘 팔렸으면 좋겠다는 소회를 적고 계신데, 시리즈 출간이 더 이어지지는 않은 듯 싶군요. 약간은 아쉽지만 당연한 결과에요. 발표된지 거의 40여년이 지난 지금 읽기에는 한계가 명확했던 시리즈였습니다, 저와 같은 고전 본격물 팬이 아니라면 실망하실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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