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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25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루스 렌들 / 홍성영 : 별점 3점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 6점
루스 렌들 지음, 홍성영 옮김/봄아필

루스 렌델이 쓴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중심의 단편집. 수록된 대부분의 이야기 속 주인공들은 무언가에 몰입, 집착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대상은 열쇠, 시계, 저택과 같은 사물도 있고, 여장이나 동물로 변장하는 등의 독특한 취미도 있지요. 주인공들은 결국 그 때문에 파국을 맞게 되는데, 파국을 맞는 장면이 마지막 몇 줄로 정리되는 반전 묘미가 빼어난 작품이 많습니다. 등골 서늘한 반전을 짤막한 문장으로 펼쳐보인다는 점에서 '기묘한 맛장르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정교하게 계획된 범죄가 등장하는 <<휘파람 부는 남자>>와 <<늪지 저택, 펜 홀>>은 등장 인물들 심리와 주변 배경에 대한 상세한 묘사가 중심이기는 하지만, 잘 짜여진 추리물로 보아도 손색이 없었고요.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시대에 조금 뒤처진 느낌도 들고, 반전도 뻔한 작품들이 많다는건 아쉽습니다. 대표적인게 표제작인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겠지요. <<헤어가 살던 집>>, <<아버지의 날>> 등도 예상하기 쉬운 내용이었고요.
하지만 뻔하더라도 독자를 몰입시키는 구성과 전개, 묘사가 빼어나서 한 번 읽어볼 가치는 충분합니다. 거장이 달리 거장이 아닌 거지요.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간단한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나의 사적인 여자친구>>
남성 공포증이 있는 여자와 장난삼아 여장을 즐긴 남자가 겪는 파국을 그린 작품.

원제는 The New Girlfriend인데, 영화 때문에 제목이 바뀐걸가요? 여튼 여장한 데이빗을 진짜 여자로 생각하는 크리스틴의 심리 묘사가 볼거리였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데이빗이 크리스틴과 함께 하기(?) 위해 남자로 돌아오자, 그를 살해한다는 결말은 너무 뻔했습니다. 크리스틴이 남편 외 남성에 대해 갖는 혐오가 앞서서 상세하게 설명된 탓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조금 찾아보니 영화는 기본 설정만 따왔을 뿐, 전혀 다른 이야기로 각색했더군요. 저는 영화 결말보다는 원작 결말이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푸른 히아신스 향기>>
아내 캐서린이 불륜 뒤 임신하자 이혼하고 40년간 해외를 떠돌던 남자가 돌아왔다. 그는 다시 한 번 캐서린을 찾아 나서고, 그녀를 만나지만 그녀는 도망가버리고 만다. 남자는 다시 그녀를 찾아가 총으로 쏴 죽인다. 그러나 그가 죽인건 알고보니 그녀의 딸이었다.

남자가 캐서린에게 집착하는 디테일한 심리 묘사가 일품입니다. 이를 통해 그녀에 대한 살의와 살인이라는 직접적 행위가 설명되고요. 죽인 여자가 캐서린이 아니라 그녀의 딸이었다는 반전 역시 대단했습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과수원 울타리>>
나는 공습을 피해 엘라 이모가 사는 인치필드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엘라 이모가 남편이 징집된 틈에 병가를 받고 돌아온 조종사 데니스 클리프턴과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밤에 총 소리를 들은 어느 날 아침, 나는 나무에 매달린 허수아비를 데니스 클리프턴의 시체로 오인해 소동을 일으킨 뒤 런던으로 쫓겨난다.
엘라 이모도 아이를 낳다가 죽고, 오랜 시간이 지난 뒤 나는 그곳에서 머리에 산탄총을 맞은 유골이 발견되었다는 뉴스를 보게 되었다.


이 작품도 '나'의 심리 묘사가 빼어난 작품입니다. 또 어린 시절 추억을 회고하면서 그려내는 영국 시골 풍경에 대한 묘사도 좋고요. 서정적인 분위기에서 불륜으로 긴장감을 싹 틔우고, 이를 목 매달린 시체 (허수아비)로 터트리는 전개도 거장답습니다.

그런데 에필로그처럼 그려진 마지막 반전은 이해가 되지 않더군요. 발견된 유골은 데니스 클리프턴일겁니다. 그렇지만 데니스 클리프턴은 전시에 병가 중인 군인이었습니다. 그가 실종된게 유야무야 넘어갈 수 있었을까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불륜을 알고 입을 맞췄다고 하더라도 전시라는 상황이면 문제가 되었을텐데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헤어가 살던 집>>
살인 사건이 일어난 탓에 싸게 나온 집을 구입한 노먼은 아내 리타와 함께 이사온다. 10여 년 전에 일어난 사건을 계속 신경을 쓰던 노먼과 리타는 욕실 창문이 자꾸 열리는걸 가지고 다툼을 시작한다. 그리고 노먼은 리타를 거의 죽일 뻔 한다. 다시 이사를 마음먹은 노먼은 헤어 사건이 자기와 같이 욕실 창문이 열린 탓이라는걸 알게 되는데...

스트레스와 긴장이 쌓이면 사소한 일로 살의가 폭발하는 심리를 극단적으로 묘사한 작품입니다. 전형적인 일상 속 이야기처럼 그려내었다는게 특징입니다. 살의가 우리 삶에 얼마나 맞닿아 있는지를 잘 알려준다고 할 수 있네요. 일상 속 사소한 문제로 폭발한 살의라는 점에서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활자 잔혹극 (유니스의 비밀)>>과도 비슷하고요.

하지만 전개와 결말은 다소 뻔했습니다. 별다른 반전도 없고요. 창문 문제가 살의를 촉발할 수 있다는걸 이웃은 알고 있던걸로 보이는데, 이웃에 대해서 반전 형식으로 풀어내었다면 어땠을까 싶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뇌물과 부패>>
니컬러스는 여자에게 홀려 자기 수준에 맞지 않는 레스토랑을 방문하여 엄청난 덤터기를 쓸 위기에 처했다. 그러나 아버지를 해고했던 아버지 회사의 보스 소렌슨이 식사비를 대신 지불했다는걸 알게 되었다. 소렌슨이 아내가 아닌 젊은 여자와 함께 있는걸 목격했던 탓으로 여긴 니컬러스는 식사비를 돌려주기 위해 다음날 소렌슨을 찾아갔다.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는 니컬러스를 협박범, 그리고 바보 취급을 할 뿐이었다.
그리고 몇일 뒤, 소렌슨 아내가 살해된 채 발견되고 소렌슨의 알리바이는 식당에서 그를 목격한 니컬러스만 증명해 줄 수 있는 상황에 처하는데....


소심한 소시민이지만 자존심만큼은 갖춘 니컬러스가 펼치는, 자신을 무시했던 소렌슨에 대한 복수극. 독자가 니컬러스에게 공감을 느낄 수 있도록, 니컬러스가 울분을 쌓아가는 과정을 차분히 그려낸 전개가 돋보입니다. 전문용어로 말하자면 '빌드업'이 완벽했습니다. 이러한 빌드업을 완성하는 마지막 니컬러스의 한 마디, "보지 못했습니다. 절대로요."가 작품의 백미고요. 소시민의 잔혹 복수극이자 일상계라는 독특한 작품의 정체성도 인상적입니다.

식당에서 소렌슨을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는 조금은 작위적인 설정은 아쉽지만, 그 외에는 단점을 찾아보기 힘든 수작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휘파람 부는 남자>>
매뉴얼 밑에서 페인트 공으로 일하는 제레미는 영국인 불법 체류자이자 좀도둑으로, 일하던 중 모르는 집 열쇠를 줍게 되었다. 이 집을 털어서 인생 역전을 꿈꾼 제레미는 집 열쇠에 적힌 주소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집은 매뉴얼의 본가였고, 잽싸게 도망치던 제레미는 이 모든게 매뉴얼의 복수라는걸 깨닫게 되었다. 매뉴얼이 결혼할 여자인 루프와 즐거운 시간을 보낸게 들켰기 때문이었다...

허술해 보이는 쿠바 이민자가 영국인 좀도둑을 가지고 놀면서 제대로 복수하는 이야기. 마지막 몇 줄로 드라마틱한 반전이 완성되는, 오 헨리 스타일의 반전물이기도 합니다. 반전을 통해 매뉴얼이 이상하게 돈이 많았다는 복선도 회수되고요.
무엇보다도 호감이라고는 눈꼽만큼도 느낄 수 없는 영국인 제레미가 죗값을 치룬다는 권선징악적인 결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만큼 밉상으로 묘사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묘사력은 정말이지 부럽네요.

그런데 제레미가 집을 터는 동안, 제레미 짐 속에 마약을 숨긴 뒤 세관에서 걸리게 만든것 자체는 엄청난 복수이기는 합니다만 너무 복잡하고 거창한 복수가 아니었나 싶어요. 제레미가 집을 털 생각을 하지 않았거나, 집 주소를 알아내지 못했을 수도 있고요. 물론 매뉴얼은 다른 복수를 준비했겠지만, 여러모로 손이 너무 많이 가는게 아닌가 싶네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나팔꽃 시계>>
트릭시는 데본셔에 사는 친구 시빌에게 놀러갔다가 그곳 갤러리인 아티팩트에서 충동적으로 나팔꽃 시계를 훔쳤다. 시계는 그녀에게 극심한 스트레스를 안겨 주었고, 시계를 알아본 친구 미비마저 사고를 위장해 살해한다. 시계를 몰래 돌려 놓으려는 시도마저 실패하자 순간적 광기로 시계를 부숴버리는데....

특정 물건에 대한 충동적인 집착이 파국을 불러온다는 심리 드라마. 주인공이 노인이며, 시계 때문에 그녀가 살인까지 저지르는 파국이 일상 속에서 전개되는 일상계 속성이라는 점을 주목할 만 합니다. 마지막에 쓰러진 트릭시가 "똑딱똑딱, 나팔꽃 시계 소리"라고 말하는 장면도 대단했어요. 그녀 정신이 붕괴했다는걸 이렇게 한 마디로 표현하는 솜씨는 그야말로 일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전개와 결말은 다소 뻔하다는 단점은 어쩔 수 없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늑대탈>>
'나'는 임박한 결혼으로 스트레스를 받다가, 연극에 쓰는 늑대탈을 쓰면 자신을 잊을 수 있다는걸 알게된다. 점점 늑대탈을 쓰는 행위, 그리고 늑대가 될 때 야생으로 깊이 들어가던 같은 취미를 숨기고 살던 어머니와 함께 하게 되자 더욱 폭주한다. 마침내 약혼녀 모이라가 양가죽 외투를 입고 찾아온 날, 야생동물 두 마리가 양을 덮치고 만다....

두 마리의 야생 동물이 바닥에 쓰러진 양을 덮쳤다는 것이다. 는 마지막 문구는 섬뜩했습니다. 전형적인 '기묘한 맛' 류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모이라를 먹은 건지도 살짝 궁금해지고요.

그러나 정신병자가 쓰는 글이라는걸 계속 알려주고, 늑대탈을 쓰면 늑대가 된다는 행동 묘사가 상세해서 반전의 묘미는 약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분명 어딘가에서 읽었던 작품이라 신선함도 부족했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늪지 저택, 펜 홀>>
프링글과 친구들은 아버지 친구 리던 씨가 사는 늪지 저택 펜 홀 근처로 캠핑 여행을 떠났다. 리던 씨는 저택 관리를 위해 모든걸 걸었지만 돈과 인력, 시간이 턱없이 부족했고, 리던 씨 아내 플로라는 저택에는 관심이 없고 다른 물건에만 집착했다. 때문에 저택 내부는 쓰레기장같아 보였다.
태풍이 불어 포퓰러 나무가 쓰러진 다음날, 나무 구덩이에서 오래된 유물이 발견되고 이를 좋아하는 플로라는 발굴에 나섰다. 그러나 리던 씨가 해체하던 쓰러진 나무가 구덩이로 떨어져 그녀는 깔려 죽고 마는데...


서로 다른걸 원하는 부부가 있습니다. 그런데 아내가 사고로 죽어버립니다. 당연히 남편이 사고처럼 위장해서 저지른 범행이고요. 이렇게 내용은 굉장히 뻔합니다. 하지만 이를 어린 아이인 프링글 시점에서 은근히 드러내는 묘사만큼은 충분한 볼거리를 제공해 줍니다. 직접적으로 죽이는걸 본건 아니지만, 여러가지 정황 증거들을 묘사하는 식이거든요.
그리고 본 편 이야기보다도 오히려 늪지 저택 펜 홀과 숲에 대한 묘사가 훨씬 굉장하다고 느꼈습니다. 자작나무 줄기는 은색, 너도밤나무는 백랍색, 플라타너스는 회색과 노란색이라는 말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독자를 사로잡는, 굉장히 상세하면서도 맛깔나는 묘사였어요. 작가의 필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아버지의 날>>
테디는 처제 가족과 그리스 섬으로 여행왔다. 처제의 남편 마이클은 아내 린다가 아이들과 함께 자신을 떠나는걸 두려워하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마이클이 아내를 처치하고 아이들을 독차지한다는 이야기. 절벽에 떨어질뻔했던 테디와 아내 앤의 사고를 묘사하여 이어지는 사고와 연결시키는 전개는 너무 뻔했습니다. 수록작 중에서 가장 뻔한 이야기였달까요.
아이들과 헤어지기 싫지만 이혼이 만연한 세상에 두려워하는 마이클의 강박증 설정은 괜찮았지만, 테디 시점에서 묘사해서 그렇게 극적으로 묘사되지는 못한 것도 아쉽고요. 더 광적인 에너지가 느껴졌으면 했는데, 지금의 작품은 제 3자 입장에서 바라본 탓에 조금 무미건조한 느낌을 줍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케판다로 가는 초록길>>
나는 인기없는 판타지 소설을 쓰는 작가 아서 케스트렐과 친구였다. 그러나 그가 발표했던 15권에 달하는 '칼리나스 연대기'는 한 권도 읽어보지 않았다. 아내 엘리자베스만 읽었을 뿐이었다.
아서는 어느날 '나'에게 런던 외곽선이 폐쇄되고 생긴 아름다운 산책로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나'는 엘리자베스와 함께 산책을 나섰지만, 그가 이야기한 풍경을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서는 혹독한 비평이 신문에 실린 뒤 자살을 택했다. 바로 그 날, '나'는 알 수 없는 사명감에 아서를 찾아왔다가 귀가하던 중 아서가 이야기했던 산책로를 발견하는데...


작가가 만들어낸 세계가 다른 사람에게도 공감을 불러 일으킬 수 있다는, 작가들이 꿈 꿔볼만한 일종의 판타지 작품. 장르 문학을 쓰는 작가에 대한 세간의 푸대접에 불만을 품고 쓴 글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아서가 만들어낸 산책로의 아름다운 묘사가 빼어납니다.

하지만 다른 수록작들과 비교할 때 극적 재미를 느끼기는 힘들었습니다. 특별한 반전도 없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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