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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6

Q.E.D Iff 증명종료 11- 카토 모토히로 : 별점 3점

Q.E.D Iff 증명종료 11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Q.E.D의 두 번째 시즌도 10권을 돌파했네요. 이번 권에는 강력 사건만 두 편 연이어 등장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한 부분이 많고, 생각할 거리도 전해주는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평균하여 별점은 3점입니다.

에피소드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신뢰할 수 없는 증인" 

4년 전, 토마는 정원사 래디쉬와 알게 됐다. 토마는 해고된 래디쉬에게 도움을 주었지만, 래디쉬는 토마의 돈도 훔쳐 사라져 버렸다.
8개월 뒤, 어니언과 마약 판매를 놓고 대립하던 콘 시럽이 자택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총, 발자국 등 증거에 따르면 범인은 어니언이었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으로 유명한 래디쉬가 어니언의 알리바이를 보장한 탓에 검사는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다행히 토마의 도움으로 어니언은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이 때 래디쉬도 토마의 돈을 훔친 혐의로 3년형을 살게 되었다.
그리고 4년 뒤 지금, 어니언의 부하 갈릭 오일은 출소한 래디쉬에게 '복수'라며 토마의 연구를 훔치라고 하는데....

전형적인 알리바이 깨기 작품입니다. 어니언의 알리바이는 사건이 발생한 8시 20분에 래디쉬 등 지인들과 농구 경기를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래디쉬는 그 시간은 마침 3쿼터가 한창이라서 어니언이 자리를 비웠다면 바로 알아챘을거라고 증언했고요.
알리바이를 만든 트릭은 생중계가 아니라 녹화 중계를 봤다는 겁니다. 음식을 주문한 뒤, 래디쉬에게 배달 음식 대응을 시키고 그 때마다 수분간 중계를 일시 정지하는걸 여러 번 반복했습니다. 그래서 원래대로였다면 3쿼터가 한창 진행될 8시 20분에 '하프 타임'이 걸리도록 만든 거지요. 어니언이 범행을 저지르고 돌아오는데에는 하프타임 15분이면 충분했기 때문에, 범행 후 3쿼터를 함께 볼 수 있었고요.
대단치는 않지만, 현실적입니다. 트릭 외에도 토마가 래디쉬를 구속되게 만든 이유 - 래디쉬는 도벽이 있었고, 콘의 마약도 훔쳤었으며 법정에서 위증을 한 것 보다는 단순 절도가 형량이 낮기 때문 등등 - 라던가, 토마가 함정을 파서 배후인 갈릭 오일을 체포하는 이야기 등의 곁가지들도 깔끔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복선 회수를 잘 해서 이야기 완성도는 제법 괜찮아요.

그러나 문제도 많습니다. 우선 트릭을 수사기관이 눈치채지 못했다는걸 제일 납득하기 어려웠어요. 녹화 중계를 봤다는걸 왜 아무도 몰랐을까요? 미국은 PVR 기능이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때문에 수사관은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어요. 또 녹화 중계를 봤다면, 구태여 pause를 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냥 시간을 늦춰서 시작하면 되니까요. 녹화 중계라기 보다는 타임 쉬프트 기능 - 우리나라에서는 한 때 '타임 머신' 이라고 불렀던, 외부 저장장치에 라이브 방송을 저장해서 돌려보는 기능 - 을 썼다는게 더 말이 됩니다.
그리고 영수증에는 보통 접수 시간이 출력됩니다. 증거로 래디쉬 서명이 있는 사건 당일 영수증이 이미 확보되어 있었지요. 이 시간을 확인하면 실제 중계 시간과 래디쉬가 인지하고 있는 시간이 다르다는 것도 증명 가능했을거에요.
마지막으로 아무리 래디쉬가 정직한 남자라도, 그의 증언만으로 무죄 판결을 받는다는게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교도소에 3번이나 갔다 온 어니언의 친구 증언을 사법부가 그렇게까지 신뢰하리라 생각되지는 않거든요.
아울러 갈릭이 토마 노트를 훔쳐 팔려고 했다는 이야기는 완전히 사족에 불과했습니다. 토마가 쓴 노트를 카메라로 찍었지만 이를 공항에서 회수한다는 결말도 어설펐고요. 아예 의미가 없지야 않겠지만, 이미 메일로 어딘가에 보냈을게 뻔한데 말이지요. 등장인물들 이름도 대충 생각한 티가 물씬 납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평작은 된다고 할 수 있겠죠. 별점은 2.5점입니다.

"물에 빠진 새" 

202X년, 일본은 AI 재판관을 도입했다. 그 뒤 20년이 흐른 204X년, AI 관리관인 미즈노 규사쿠가 아내 살해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아내가 호스트와 불륜을 저지르는 현장을 목격하고 둘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는 혐의가 인정되어 미즈노는 AI 재판관으로부터 장기 징역을 선고 받았다. 미즈노는 항고하고, 변호사 견습인 미즈하라 가나가 이를 돕던 중 의외의 이야기를 들었다. 반년 전에 수상한 사람이 AI에 무슨 문제가 있냐고 미즈노에게 전화를 걸었고, 사건이 벌어진 날 급히 집으로 가라고 전화해서 집에 갔다가 시체를 발견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미즈노는 가나에게 'MIT를 중학교 때 졸업한 천재'에게 AI에 정말 문제가 있는지, 자신이 숨겨놓은 코드를 보여주고 확인받아 줄 것을 부탁하는데....

204X년의 일본에서 변호사 견습생 가나와 천재 프로그래머 토마가 활약하는 일종의 평행 우주 세계관으로 그려진 작품입니다.

AI가 재판하는 시대는 곧 다가올 겁니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실제로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는 생각해 본 적은 없네요. 이 작품은 그런 상황을 가정하여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Q.E.D 시리즈 장점이기도 한 일종의 '학습 만화' 인 셈이지요.
제목인 '물에 빠진 새'부터가 AI 재판관의 특징을 잘 알려주는 말입니다. 이 말을 들으면, 사람들은 하늘을 나는 새가 물에 빠진걸 상상하죠. 그러나 AI는 '새'를 갈매기 등으로 해석합니다. 방대한 데이터를 토대로 '가장 있음직한 일'로 해석하기 때문이에요. 즉, '융통성' 이라는게 발휘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아울러 AI는 불법적인 조사를 인정하지 않고, 증거에 합리적 의문이 있으면 무죄 판결을 내릴 수 밖에 없어서 결론적으로, 검찰의 기소가 성공하기 힘들어지는 상황이 되어버립니다.
이럴 경우 강력범이 풀려날 가능성이 생긴다는 문제는 있지만 무고한 피해자는 줄어들 수 있다는 점에서, 또 여러가지 유착과 오판을 사전 차단한다는 장점이 더욱 커 보이네요.

그러나 당연히 AI 재판관이라도 문제를 일으킬 여지는 있습니다. 이 작품에서는 '버그' 가 원인입니다. 검찰은 이를 이용하여 미즈노가 실형을 선고받게 만들지만, 토마가 모든걸 밝혀냅니다. 이를 위한 토마의 추리쇼가 법정에서 재판관, 검사와 대결을 통해 펼쳐지기 때문에 '법정 미스터리'이기도 합니다. 

추리적인 부분의 완성도도 제법 높아요. 사건 현장은 부부 침실이었습니다. 그런데 검찰은 버그를 알고 이를 이용하기 위해 사건 현장을 일부러 '부부 침실'과 '두 사람의 방'이라고 나누어 부르고, 위치도 '길'과 '복도' 왼쪽이라고 말할 때마다 다르게 불렀습니다. 그러면 버그 탓에 AI는 원래 같은 공간을 나누어 생각하게 됩니다. '두 사람의 방'에는 침대가 있는데 사건 현장인 '부부 침실'에는 침대가 없어서 제3자가 숨어있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겁니다. 그 결과 미즈노가 범인이라는 판결이 내려진거고요. 꽤 그럴싸하죠?
이러한 추리쇼가 펼쳐지는 와중에, AI가 사건 현장이라며 침대와 다른 가구가 없는 썰렁한 방 이미지를 화면에 띄워주는 장면은 극적 효과가 대단했습니다. 이런게 만화라는 매체가 가진 장점이라 생각되네요. 

트릭도 대단하지는 않지만, 기발한 장치 트릭이 하나 등장합니다. 미즈노를 옭아맨 현장 증거를 만들어 내었던 트릭입니다. 아래와 같이 문 손잡이 뒤에 나이프를 테이프로 붙여서 문을 여는 미즈노의 지문이 묻게 만든 겁니다. 부자연스러운 지문의 끊어진 형태는 스카치 테이프 자국이고요.


그러나 트릭은 억지스럽습니다. 이런 손잡이는 손 끝으로 잡는게 아니라 손바닥으로 감싸 잡는게 당연하니까요. 미즈노가 문을 열 때 이상함을 느낄 여지도 충분히 있습니다. 살인 현장을 목격하기 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또 미즈노 아내의 불륜과 비밀 번호를 사전에 알고 있었고, 얼굴 인식은 사진으로 돌파할 수 있는 등장 인물은 미즈노의 회사 동료 유자와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범행을 저지른 동기와 행동이 영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버그를 팔았지만 이를 미즈노가 눈치챌걸 두려워해서 말살시키려고 했다는데, 버그가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잖아요? 유자와가 코드가 기록된 노트 위치를 알고 있었다는게 그가 범인이라는 증거로 보이지는 않았고요. 여러모로 설명이 부족했습니다.

무엇보다도 AI가 오류를 일으킨 원인을 납득하기 힘들어요. 만화에서도 평면도로 설명하고 있는데, 법정에서는 구두로만 사건 현장을 설명 AI에게 별다른 자료를 제공하지 않는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검찰이 구두로만 설명했다면 AI가 아니었더라도 해석에 오류를 일으켰을 가능성이 높으니까요. 수수께끼를 만들기 위한 억지 장치였다 생각됩니다. 

그리고 204X라는 근미래인데, 다른 2000년대와 크게 다르지 않은 묘사들도 고민이 부족해 보였습니다. 204X년에 숫자 암호키와 얼굴 인식으로 집에 출입하게 될 거라고는 상상이 되지 않아요. 지문이 결정적 증거가 될 것 같지도 않고요. 이럴 바에야 AI가 재판하는 가상극 형태로 꾸미는게 어떨까 싶네요. 시즌 1 27권 수록작인 "입증책임"처럼 모의 재판 형식으로 말이죠.

그래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고,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었던건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았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2022/04/01

사장을 죽이고 싶나 - 원샨 / 정세경 : 별점 2점

사장을 죽이고 싶나 - 4점
원샨 지음, 정세경 옮김/아작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에서 무명 연극 배우로 살아가던 위바이통에게 중국의 유명 금융 엘리트 투자자 양안옌이 찾아왔다. 그는 위바이통 부모에게 은혜를 입었다며 바이통에게 스카웃 제의를 하였다. 6개월 안에 금융 엘리트로 만들어주겠다는 장담과 함께였다. 위바이통은 반신반의하면서도 호기심에 못 이겨 중국 강캉시로 향했다. 

강캉시에서 양안옌과 만나기로 한 곳은 그의 회사인 바나 금융 사무실이 있는 88층짜리 신축 바나 센터 건물로 개장하기 직전이었다. 악천후 탓에 꼭대기층 사무실에 조금 늦게 도착한 위바이통은 양안옌 사장이 여러 명의 사람들과 언쟁 끝에 격투를 벌이는 걸 목격했다. 바이통은 싸움을 말리려 했지만, 누군가 꺼낸 칼에 사장이 찔려 죽는걸 막을 수는 없었다. 현장에 있던 무리들은 사장이 강도 살해 당했다고 위장하려 했지만, 도망치려던 그들 앞에 류창융 등 금융계 거물 4명이 나타났다. 사장의 죽음을 숨기고 그들을 응대했지만, 곧이어 정전이 일어났고 비상 계단은 철문으로 잠겨있어서 일행은 88층 바나 은행 사무실 공간에 갇혀버렸다. 

그리고 숨겨놓았던 사장의 시체와 천뤄치가 깜쪽같이 사라진 다음날, 천뤄치, 리슈얼의 시체가 차례로 발견되는데...

제목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집어 들게 된 중국 추리 소설로 급성장하는 중인 중국 금융업과 부동산업을 소재로 쓰여진 작품입니다. 

88층 건물에 여러 명의 사람이 함께 갇힌 상황에서 벌어지는 본격적인 밀실 추리물이라는 점은 독특했습니다. 현대물에서는 보기 드문 설정이었는데, 악천후로 인해 개장 직전 건물에 정전이 되었고 그 탓에 사고가 많이 일어났다는 식으로 꽤 그럴듯하게 상황을 연출한게 괜찮아요. 초반에 위바이통이 처음에 양안옌이 자신을 찾아왔다는걸 추리해내는 과정도 좋습니다. 위바이통의 출연 외에는 공통점이 없는 전혀 다른 성격의 연극을 보러 왔었고, 또 다른 연극에서는 혼자 보기 적합하지 않고 오로지 위바이통을 찾기 쉬운 좌석을 골랐기 때문이었는데, 나름 추리력을 잘 드러내는 장면이었다 생각되네요.

몇 가지 설정도 볼만합니다. 첫 번째는 양안옌이 연극 배우 위바이통을 스카웃하려던 까닭입니다. 처음에는 911 테러 때 양안옌이 위바이통의 친부모 대신 심부름을 한 덕분에 살아남아서, 그 은혜를 갚기 위해서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위바이통이 중국 유학 시절 흠모했던 연극배우 리슈얼이 금융 엘리트 중 한 명이라는걸 알게 되고, 양안옌 살해 현장에 있던 다른 사람들의 수상한 행동이 하나 둘 씩 드러나며 진상이 밝혀집니다. 양안엔은 '연기력' 때문에 배우들을 고용해서 금융 엘리트인척 시켰던 겁니다. 배우들은 모두 회사 AI 시스템의 지원을 받아 적절한 연기로 고객과 소통했고요. AI가 금융 엘리트의 거의 모든 실무를 대신하게 되면서, 사람 상대의 커뮤니케이션은 필요하니 저렴하게 배우를 고용했다는 건데 꽤 그럴싸 한 설정입니다. 

두 번째는 양안옌이 입체 영상 기술과 놀이공원용 차량 기술을 빼앗으려고 했는데, 이게 류창융 회장의 주택 건물 개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로 정답은 좁고, 가사 도우미가 필요한 현재의 다세대 주택 환경 개선을 위해서입니다. 창문에서 입체 영상을 만들어서 뿌리고, 엘리베이터는 놀이 공원용 차량 기술을 도입해 고층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주면, 주민들이 고층에서 넓고 쾌적하게 산다고 착각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지요. 비상 계단 벽에 숨겨진 문은 가사 도우미들이 단체로 거주하는 공간으로 만들 셈이었고요. 이 역시 상당히 기발한 아이디어였다 생각됩니다. 이런 설정을 풀어가면서 부동산에 목숨을 건 모습, AI 때문에 직업을 잃는 사람들 등 중국, 아니 우리 나라도 크게 다르지 않은 현실을 잘 그려낸 것도 인상적이에요.

그러나 이런 흥미로운 설정이 사건과 이어지지는 못합니다. 추리 소설로는 아예 함량 미달이고요. 일단 사건의 범인 쩡자웨이가 양안옌 사장을 살해한 동기부터가 불분명합니다. 그냥 충동적인 범죄로 그려지거든요. 하지만 여러 사람이 있는데서 몰래 칼을 꺼내 찌르다니, 상황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천뤄치와 리슈얼 살해는 사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 저지른 범행으로 이 역시 직접적인 동기가 없다는 점에서는 마찬가지입니다. 덕분에 양안옌 - 천뤄치 - 리슈얼로 이루어지는 일종의 범행 순환 구조가 완성되기는 했지만, 이는 등장인물들 시점에나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독자들은 위바이통 시점의 묘사를 통해 리슈얼이 불쌍한 피해자라는걸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등장인물들 생각대로, 양안옌 사장이 죽지 않았고 천뤄치가 배신자였으며 리슈얼이 사장의 스파이였다면, 천뤄치를 죽이고 시체를 공개할 이유도 없어요. 중요한 투자처 손님들을 초대한 마당에 사건을 키울 필요가 있었을리 만무하니까요.

밀실 트릭도 알고나니 너무나 한심합니다. '비밀 통로'를 사용한 것에 불과한 탓입니다. 비상 계단 벽에 아래 층으로 가는 입구가 숨겨져 있었을 뿐이니까요. 때문에 '밀실이 등장하는 추리물'이지, '밀실 트릭'이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차라리 창문에서 입체 영상을 뿌려서 88층으로 느끼게 했지만 사실은 3층이었다는 설정을 이용해서, 창문을 몰래 열고 지상으로 이동했다는 식으로 풀어가는게 훨씬 나았을겁니다. 사실 트릭에 쓸 생각도 없었다면 구태여 필요했던 설정도 아니었어요. 물론 이 역시 정전 상태에서 창문으로 어떻게 88층 영상 효과를 보여줄 수 있는지 설명이 부족해서 좋은 트릭이라고 하기는 어려웠겠지만요. 

아울러 양안옌 사장이 사실은 위바이통을 죽이려고 했다는 일종의 반전과 에필로그도 별로였어요. 위바이통이 911 테러 희생자의 자식으로 거짓 인터뷰를 한 것 정도로 그를 죽이려 했다? 설득력이 전혀 없습니다. 위바이통이 양안옌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까요. 설령 살의를 품었다 한들, 구태여 중국까지 불러들여 자기 건물에서 죽인다는건 말도 안되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금융 엘리트에 대한 설정은 기발했지만, 전체적으로 별로라 구태여 권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4/06/25

리움 미술관 나들이 및 전시회 관람 (필립 파레노 '보이스')

2주 전인 6월 14일, 회사 행사 덕분에 리움 미술관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첫 번째로 필립 파레노의 '보이스'라는 기획전을 관람하였습니다. AI가 테마 중 하나라고 해서 기대가 컸습니다.

그런데 솔직히 전시는 잘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언어와 음악이 공간을 압도하는 경험을 선사한다고 하는데, 그런 느낌을 받지도 못했습니다. '소리'가 전시장 안에서 그리 압도적으로 인지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전시된 오브제들이 시각적으로 대단하게 느껴지지도 않았습니다. 소리 없이 전시되는 오브제 자체만으로도 뭔가 울림을 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AI가 도입된 부분도 전시장 밖에서 채집한 데이터를 전시 중인 조명과 오브제들에 반영하는 시스템, 그리고 만화 캐릭터가 말하는 작품 정도라 실망스러웠습니다. 만화 캐릭터 작품은 나름 중요한 전시품으로 보이는데, 디자인과 완성도 모두 시대에 뒤떨어진 3D 폴리곤 데이터가 단순히 녹음된 목소리를 말하는 것에 불과해서 이게 뭔가 싶더군요. 시대 흐름에 맞추려면, 관객과 대화가 가능한 시스템 정도는 구축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이런 레트로한걸 주제 의식에 녹여낸게 아니라면 말이지요.

다행히 리움 미술관의 상설전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몇 번 관람한 적이 있지만 워낙에 수준높은 소장품들이 많아서 언제 보아도 좋네요. 이번에는 대담한 무늬의 분청사기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패턴이 굉장히 현대적이라 다른 굿즈, 상품으로 응용해서 판매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쇼핑백이나 포장지로 만들어도 아주 멋드러질 것 같아요.

그런데 전시 방법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이런 자기들은 관람객이 회전시킬 수 있게 하거나 자체적으로 천천히 회전하도록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래의 초화어문병의 경우 전체 그림을 보고 싶은데 뒷면이 보이지 않아 답답했거든요. 회전이 위험하다면, 뒤에 거울이라도 설치해주면 관람에 큰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그 거울을 관람객이 이동할 수 있게 해 주면 최고일테고요.
국보인 금동대탑과 용두보당의 디테일에는 또다시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역시 확대해서 볼 수 있도록 전시해 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리움 미술관은 삼성과 제휴가 용이할 것 같은데, 카메라와 디스플레이를 잘 활용하여 전시 시스템을 구축할 수 있지 않을까요?

마지막은 언제나처럼 계단 공간을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엄청난 깊이감을 구현한 올라퍼 엘리아슨의 '중력의 계단'으로 마무리하였습니다. 간단한 아이디어를 효과적으로 활용한 좋은 작품이라 생각됩니다.
전시회 관람은 바쁜 회사 생활에 활력소가 되어주어서 좋은데, 아무래도 저는 현대 미술보다는 고미술이나 근대 조형, 회화 쪽 전시가 더 잘 맞는 듯합니다. 다음에 이런 기회가 있다면, 좀 더 고전적인 전시를 알아보아야겠습니다.

2026/09/11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 - 아오사키 유고 외 : 별점 2.5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데뷰 35주년을 기념하여, 젊은 작가 일곱 명이 '아리스가와 세계관'으로 발표한 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세계관이지만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가 가장 많습니다. 또 다른 대표 시리즈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명탐정 에가미 지로 등장 작품은 한 편 밖에 없고요. 행각승 지장 스님 시리즈도 한 편 있을 정도인데 말이지요.

하여튼, 꽤 신선한 기획인데 작품들 수준도 괜찮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젊은 작가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덕분입니다. 대부분 아리스가와 월드를 충실히 구현한, 전통적인 신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 점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끈, 밧줄, 로프" 아오사키 유고

야스미 노도카가 모아이 도자기 상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살해당한채 발견되었다. 동기는 희귀 게임 카드이며 범인은 새시를 통해 시체를 밖으로 운반한 뒤, 바다로 시체를 내던진 것으로 보였다. 여러 현장 상황을 통해 범인은 자동 잠금장치가 설치된 아파트 주민 29명 중 한 명이며, 그 중에서도 당일 오전, 로프같은걸 버린 세 명 중 한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피해자가 죽기 전 로프 같은 것으로 묶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각자 버린 건 다용도 마끈, 안전용 수평 구명줄, 반사 소재 텐트 로프였다. 

히무라 히데오가 '필드 워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전형적인 신본격 단편입니다.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아오사키 유고답게 추리적인 부분은 완벽에 가깝습니다. 

히무라는 피해자가 둔기에 맞았을 때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가 깨어있을 때 침입했고 흉기로 위협했다고 추리합니다. 그리고 뭔가에 묶인 피해자를 나르는 범인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 사체를 유기하기 직전에 묶은 끈을 회수했다고 추리하고요. 사체 유기가 실패했다는걸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기 때문에, 끈을 푸는 데에는 위협에 사용했던 칼을 사용했습니다. 다음날 범인은 토막난 끈을 버려야 했으며, 이는 쓰레기 버릴 때 종이 팩을 사용했다고 지적받았던 시나다의 행동과 이어집니다. 즉, 시나다가 범인입니다. 시나다는 매일 종이 팩 쥬스를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 그게 재활용이라는걸 모르지 않았다는 것도 증거이고요.

사건과 범인이 로프를 그날 버린 이유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핵심 단서인 '로프'를 가지고 기둥서방 시나다의 유력한 동기였던 '동아줄'로 이어지는 일종의 언어유희적인 전개도 괜찮습니다.

다만 설정 자체가 조금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현대 법의학, 법과학으로 범인을 충분히 밝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수수께끼 풀이용 단편으로는 충분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정통파 추리 소설에 대한 작가의 고민도 흥미롭습니다. 아래의 말을 빌어서, 추리 소설가의 필사적인 창작은 결국 AI도 만들 수 있는, 독창적인 요소가 없는 결과물일거라는게 요지인데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 '정보를 수집하고 검토해 논리적으로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가 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그 해법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 "수수께끼 풀이 자체는 누가 설명해도 마찬가지인, 개성없는 장면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애초에 누구나 풀 수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면 본격 미스터리로 성립할 수 없다는 딜레마도 있어. 결국 탐정 캐릭터들도 '모범 답안'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 걸지도 몰라."

물론 이 논리는 미스터리는 과학이 아니라 유사 과학이라는 히무라의 입을 빌어 작가 본인 스스로 타개하고 있기는 합니다. 탐정들은 미스터리의 신의 말을 전하는 선교사인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 놓는 과학자와 다른 집단이라면서요. 그래도 AI도 만들 수 있다는 결과물이라는게 변하지는 않지만요...

"클로즈드 클로즈" 이치오 미치

아리스와 히무라는 여고에서 일어났던 교복 도난 사건 해결을 부탁받았다. 교복을 도난당한 다즈하라 시게오는 같은 3학년 부원인 고미야 리오와 반목이 있었다. 그러나 고미야는 이미 수개월 전 전학을 간 상황이었다. 

다즈하라가 고미야에게 교복을 빌려줬는데, 다른 친구에게 빌린 거울이 들어 있어서 도난 소동으로 발전했다는게 진상입니다. 그런데 추리적으로 딱히 눈여겨 볼 부분은 없습니다. 히무라가 이렇게 추리해 낸 과정이 제대로 선보이지 않는 탓입니다.

또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팬에게서 만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아리스와 히무라가 여고에서 가짜 신분(?)으로 활동하는 일상계 추리물이라는 설정은 독특하지만, 둘의 대화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모두 여성 작가가 쓴 듯한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더 건조하게 묘사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수록작 중 최악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히무라 히데오에게 바치는 괴담" 오리가미 교야

도쿄에서 열린 이벤트에 참석했던 아리스와 히무라는 그날 밤 찾은 바에서 서점 직원 쓰지와 합석하게 되었다. 쓰지는 둘에게 자신이 겪었던 괴담을 들려주었고, 히무라는 자신만의 추리로 괴담의 진상을 풀어냈다.

쓰지가 네 편의 괴담을,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한 바 손님이 한 편의 괴담을 들려주어 총 다섯 편의 괴담이 선보입니다. 쓰지가 겪거나 들었던 괴담은 모두 추리를 통해 진상이 밝혀지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 후배 하숙집에서 심야에 전자기기가 오작동하는 사건이 자꾸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날은 한밤중에 탄내까지 났다.
    진상: 개조한 불법 무선기로 통신하는 장거리 트럭이 원인이었다. 심야에 발생한건 장거리 트럭은 고속도로 통행 요금이 할인되는 심야에 운행하기 때문이며, 탄내는 오작동한 전열기구 때문이었다.
  • 쓰지는 대학 시절에 동창과 숲에서 고개를 돌리며 짐승 울음 소리를 내었던 인형 탈을 보았다.
    진상: 몸은 땅 속에 묻힌 사람에게 인형 탈을 씌워 숲속에 방치해 둔 것이었다. 짐승 울음 소리는 재갈이 물려있던 탓이며, 비성수기 휴양지 산속이라는 현장이 근거이다.
  • 등산을 좋아하는 쓰지의 친구는 안개로 뒤덮인 산길에서 똑같이 생긴 오두막을 등산로에서 연이어 발견했다.
    진상: 그냥 오두막이 두 채 있었다.
  • 쓰지는 방학 때 고향 친구 가가와, 가가와의 선배 유모토와 함께 폐업한 유원지에서 담력 시험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유모토가 미러 하우스 안으로 들어간 뒤 사라져버렸고, 그를 찾으러 들어간 쓰지는 미러 하우스 속 거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형체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그 뒤 가가와와 유모토와는 연락이 끊겼다.
    진상: 고객을 놀라게 만드는데 사용했던 매직 미러를 이용하여 유모토가 쓰지를 놀라게 만든 장난이었다. 

첫 번째 괴담은 재미있고, 네 번째 괴담도 추리만큼은 그런대로 합리적이지만 다른건 별로입니다. 그리고 모두 진상을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도 크고요. 

이보다는 바 손님인 이토가 이야기한 진짜 괴담이 더 괜찮았습니다. 이토는 교통사고 현장에 놓여있던 시들어진 조화를 버리고 새로 꽃을 사서 갖다 둔 뒤, 원망하는 표정의 여자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선의로 행한 일인데 왜 귀신은 원망을 가졌을까요? 아리스의 추리는 '꽃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즉, 원래 놓여있던 시든 꽃이 귀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놓아둔 꽃이었다는 것이지요. 이 역시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는 있지만 의표를 찌르는 맛도 좋고, 아리스가 추리를 펼친다는 의외성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 저는 잘 모르는 '심령 탐정'이라는 아리스가와 월드 속 다른 주인공이 언급되는 등, 헌정물로는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블랙 미러" 시라이 도모유키

'나'는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때 친구였던 가가미 에이지로부터 오랫만에 연락을 받고 만났다. 그 뒤, 경찰을 만나 에이지와 그의 형 고이치가 연루된 살인사건에 대해 들었다. 상황은 에이지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나'와의 만남을 진행한 것으로 보였지만, 알리바이 트릭은 완벽해서 깨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추리소설가를 꿈꾸던 '나'와, 경찰을 돕던 건방진 교수 히무라가 힘을 합쳐 알리바이를 깨는데 성공한다.

복잡한 시간표로 구성된, 전형적인 시간표 알리바이 트릭물입니다. 쌍둥이인 에이지와 고이치가 어느 시점에 교체하여 서로의 알리바이를 만든게 진상입니다. 핵심은 고이치가 엄지손가락을 절단한 뒤, 그걸 가지고 에이지가 고이치의 비밀금고를 열었던 것이고요. 이는 고이치가 범행을 저지른 뒤, 생수병 뚜껑을 따지 못해 머그컵으로 물을 마셨던 상황 등으로 추리됩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는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70년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CCTV가 여러 곳에 가득한데 자신의 노출을 이렇게까지 숨기면서 짜여진 시간표 동선대로 이동한다는건 말오 안되니까요. 히무라가 사건에 뛰어든 이유가 역에서 뛰어나가던 에이지와 부딪혔기 때문이었다는 우연도 작위적이고요.

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메타적인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현재 가장 뜨거운 작가 중 하나인 시라이 도모유키의 작품치고는 영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의 수수께끼" 유키 하루오

추리 소설가인 '나'는 신작 구상을 위해 담당 편집자 미토베 씨와 함께 취재차 온천 휴양지를 찾았다. 그런데 그곳 식당에서 만난 점원 후쿠나가 아이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촌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둘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후쿠나가의 사촌 아버지인 외삼촌 거처를 찾았고, 그곳에서 미토베 씨는 사촌의 행동을 추리해 내는데...

작품을 다 읽었지만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촌의 기묘한 언행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유명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지만, 무대와 설정은 아리스가와 월드가 아니라는게 특징입니다. 

추리는 사촌이 후쿠나가에게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서재에 있던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은 커버와 띠지만이며, 내용물은 다른 책으로 바뀌어져 있었기 때문이고요. 사촌은 별채에 침입하여 아버지의 만년필을 훔쳤습니다. 그러나 눈이 오는 바람에 별채에서 탈출하지 못했고, 별채는 난방이 안되어서 너무 추웠던 탓에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난로에 태웠던 겁니다. 후쿠나가의 외삼촌은 모든 장서를 서재와 별채, 두 곳에 비치하였기 때문에 다음날 외삼촌이 돌아오기 전 사촌은 서재의 책을 별채로 옮기고, 때우지 않았던 띠지와 표지를 서재에 있던 다른 책에 씌워 위장했고요. 책은 새로 주문했지만 도착까지는 시간이 걸려서 당장 후쿠나가에게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안티인 척을 했던 거지요.

위의 추리를 위한 모든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되는 좋은 추리물입니다.  유명 작품은 물론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의 TV 방영까지를 작품 설정에 녹였다는 점에서 '헌정'이라는 취지에도 딱 들어 맞고요.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를 표방한 사촌의 주장은 헌정이라는 취지와 정 반대이기는 하지만, 이런게 또 기획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제가 읽었던 유키 하루오의 작품은 비현실적인 설정이 문제였는데, 소규모 일상계로 설정을 좁혀 놓으니 훨씬 낫네요.  

"행각승 지장 스님의 낭패" 아쓰카와 다쓰미

20년 전, 행각승 지장 스님의 이야기를 '에이프릴'에서 들은 멤버였던 '나'와 도코가와는 오랫 만에 한 잔 하기 위해 '풀스 메이트'라는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20년 전과 똑같이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각승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20년 전과는 다르게, 손님들의 공격과 의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풋내기였다.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은 그렇게 인기가 많은 작품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이 작품을 헌정물로 새롭게 써 낸게 좀 신기하네요. 일종의 '도라에몽 세계관'인 히무리 히데오 시리즈와는 다르게, 지장 스님이 활약한 20년 후인 현재를 무대로 협박범 구로사와가 살해당했는데, 사체는 피해자가 수집했던 나비 표본 수십 개로 둘러 쌓여 있었던 사건에 대한 추리가 펼쳐집니다.

나비의 이름이 범인을 특정하는데, 나비 표본 하나만 꺼내어져 있으면 범인이라는게 바로 드러나서 어쩔 수 없이 표본을 전부 꺼냈다는게 진상입니다. 범인은 나비 표본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르는 아사기 유즈루였고요.

이 뒤에 등장인물의 이름, 수를 가지고 딴지를 거는 손님에게 진짜 지장 스님이 나타나 보강하는 추리를 펼치며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여러모로 추리 퀴즈에 가까우며,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다는 점에서 원전과 비슷한 점이 많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시체의 실루엣은 말한다" 이마무라 마사히로

에이토 대학 추리 소설 연구회 멤버 5명은 고향 나고야로 취업 활동을 갔다 온 오다가 가져온 수수께끼 풀이에 나섰다. 오다가 만난 동향인 고바야시가 친구가 남긴 암호를 해독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나왔습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 이 시리즈 단편은 읽은 적이 없는데, 젊은 작가가 일종의 일상계로 풀어낸게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형식만 신선한게 아니라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고바야시의 친구 바토 씨가 남긴 낙서와 다이잉 메시지를 풀어내는 과정이 추리 소설 연구회 5명의 대화를 통해 펼쳐지는데, 정말로 모든 있을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추리와 의견들을 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드러나는 진상은 꽤 합리적으로 느껴져요. 대화로 일종의 추리 대결을 펼쳐나간다는 점에서는 작가의 전작 "시인장의 살인" 속 학생 식당 메뉴 맞추기 게임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시와 바토가 헤어졌고, 이 사건은 바토가 고바야시가 계속 어울려 줄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벌인 일종의 게임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은 있습니다. 결국 진상은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 탓이에요. 다이잉 메시지도 AOK로 읽히는데 이건 All-OK라는 추리 역시 근거없는 공허한 주장일 뿐이지요.

논리적으로 즐길거리는 많은데 다소 맥이 빠진다는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에가미 선배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 등 팬이라면 소소히 즐길거리가 있지만, 그리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1/06/19

THE 좀비스 - 상 - 스티븐 킹 외, 존 조지프 애덤스 / 최필원 : 별점 2점

THE 좀비스 - 상 - 4점
스티븐 킹 외 33인 지음, 존 조지프 애덤스 엮음, 최필원 옮김/북로드

여러 단편들에서 엄선했다는 좀비 관련 단편을 모아 놓은 앤솔러지입니다. 여름에는 좀비물이지요. 원래 책으로는 무려 서른 네 편, 모두 합치면 천 페이지가 넘는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지만, 상, 중, 하로 분권된 e-book으로 읽었습니다. 한 번에 읽기는 아무래도 부담스러운 양이니까요.

상권에는 모두 11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스티븐 킹, 댄 시먼스, 제프리 포드 정도가 제가 아는 작가인데, 다른 작가들도 소갯글만 보면 모두 나름대로 유명 작가들로 보입니다. 좀비라면 바로 떠오를 고어와 액션이 어우러지는 전통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물을 비롯하여, SF, 범죄 드라마, 풍자, 블랙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들이 수록되어 있고요. 덕분에 풍성하기는 한데, 작품들 편차는 큽니다. "올해의 학급 사진"과 같은, 기존 좀비물 팬을 만족시키는 걸작도 있지만 한 편의 이야기로 성립하지 않거나, 저는 이해할 수 없었던 작품들도 존재하거든요.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2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가정 분만" 

스티븐 킹의 단편집 "악몽과 몽상 1"을 통해 이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좀비 아포칼립스를 출산을 앞둔 임산부 시점에서 그려낸 작품이지요. 

그런데 이전에 읽었을 때와는 다른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때에는 좀비의 기원까지 설명되었던 것 같지는 않은데, 번역 문제였는지 뭔가 누락된 탓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하여튼, 보통은 주인공이 도와주는 역할은 임산부가 주인공이며, 무대가 섬마을이라서 한 개 뿐인 묘지만 사수하면 어떻게든 버틸 수 있다는 상황이 독특했습니다. 버티는 와중에 죽은 남편을 한번 더 죽이는 처절함, 하지만 살아남은 사람은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도 인상적이었고요.

물론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전형적인 좀비 아포칼립스물과 크게 다르지 않거든요. 누구나 상상할 수 있는 이야기를 주인공과 무대 설정의 독특함을 더해 스티븐 킹의 필력으로 써 내었을 뿐이에요. 

하지만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작품입니다. 어설픈 변화구 보다는, 그냥 한가운데 직구 승부가 더 나을 때도 있는 법이니까요. 심지어 그 공을 던지는게 스티븐 킹이라면 더더욱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가슴은 무덤까지 가져간다" 

재벌들이 과시용으로 데리고 사는 '트로피 와이프'가 무덤에서 살아 돌아온 뒤 벌어진 일들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좀비로 돌아온 트로피 와이프는 이성은 그대로 갖추고 있고, 사람을 뜯어먹거나 하지 않습니다. 누가 자기를 부활시켰는지를 찾아 헤멜 뿐이지요. 이런 설정은 독특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영 재미가 없더군요. 드라마틱한 이야깃거리가 발생하지 않는 탓이에요. 시체가 되살아난건 충분히 드라마틱한 사건인데, 이를 담담하게,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묘사는 탓입니다. 마지막에 그녀를 부활시켰다는 여동생이 찾아 오는건 아주 뜬금없었고요. 

작가가 뭘 말하고 싶은지도 잘 모르겠어요. '야경'을 감상하고 싶다는 말로 끝맺는 마지막 장면은 외모, 돈과 사치품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알려주는가 싶은데, 자동차 한 대 값을 들였다는 실리콘 가슴만 쳐지지 않고 영원이 남았다는 묘사에서 '적절한 투자는 중요하다'는 교훈을 주기도 해서, 뭐가 맞는지는 좀 혼란스럽더라고요. 재미만 놓고 보자면 후자 쪽에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만.

하여튼 좀비물로 보기는 여러모로 석연치 않았고, 쟝르도 모호하며 이야기도 딱히 볼만하지 않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올해의 학급 사진" 

노년의 가이스 선생은 좀비 아포칼립스 이후, 혼자 살아남았다. 그녀는 포획한 좀비 아이들을 가르치고자 노력하는데...

좀비 설정에 뭔가 이유를 설명하고자 하는 노력은 전혀 없어요. 그냥 좀비 때문에 세상이 망한 뒤를 그리고 있거든요. 즉, 우리가 알고 있는 좀비 아포칼립스물입니다. "가정 분만"과 같이, 뻔한 설정을 그리고 있다는 뜻이지요. 하지만 더 급진적입니다. 하지만 '교육' 이라는 주제 의식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꽤 잘 그려내고 있기도 하고요. 좀비가 되었지만 아이들이 교실로 돌아오는 결말은 깊은 울림을 가져다 주네요. 단지 치킨 너겟 때문에 돌아왔을 수도 있지만, 뭐 그것도 학습이라면 학습이니까요.

"칼리의 노래", "테러호의 악몽" 등의 공포 소설로 유명한 댄 시먼스다운 필력도 돋보였습니다. 이야기의 설득력을 가져다주는 디테일이 특히 압권이에요. 좀비 아이들을 포획하고, 이들을 교실에 묶어 놓은 뒤 수업을 진행하는 과정과 학교를 요새처럼 만든 상황에 대한 묘사들이 아주 빼어난 덕분입니다. 좀비물로서의 기본 재미도 놓치지 않습니다. 학교로 수백명의 좀비가 몰려오고, 이를 가솔린 해자와 레밍턴 소총, 권총으로 처단하는 가이스 선생의 활약이 그려지는 클라이막스는 아주 화끈합니다.

뻔하지만 독특한 설정에 더해, 재미도 기본 이상인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역시나 작가적 명성은 허투루 얻어진게 아니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유령의 춤" 

커스터 기병대가 좀비로 되살아나 사람들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사건을 추격하던 FBI 요원 에드거는 좀비의 습격에 대한 모든걸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데...

쓰레기 백인 경찰관이 인디언을 몰래 학살하다가 되살아난 좀비 커스터 기병대에게 잡아 먹힌다는 도입부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그냥 에드거 요원이 좀비 기병대의 잔학한 행동을 모두 알게되는 신기한 능력을 얻었다가 전부인 뒷부분은 뭘 이야기하려고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이야기가 끝나는 것도, 그렇다고 열린 결말도 아니니까요. 군대식 명령으로 좀비떼를 제어할 수 있다는 설명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걸로 좀비떼를 격퇴했다던가 하는 결말도 아니고요. 한 마디로 말해서, 제 기준으로 이 작품은 완성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시체" 

아프리카 수용소를 통해 좀비를 대량 생산하여 유통시킬 계획을 혐오스럽게 생각했던 도널드는 좀비 격투가를 보고 생각을 바꾼다. 그러나 바로 그 날, 좀비 매춘부를 만난 뒤 인류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뻔한 설정이에요. AI, 인공지능과 로봇이 일상화된 이후, 인간의 삶이 어떻게 변할 것인지에 대해 현재 한참 이루어지고 있는 논의들과 별다를게 없거든요. 하지만 AI를 좀비로 바꾼 아이디어가 참으로 그럴듯했습니다. 사람의 생명 가치가 폭락하고, 심지어 성적인 노리개로 이용되는 상황에 대해서 더 큰 충격을 안겨다 주기 때문입니다. 내용은 평이했지만 이 아이디어만으로도 별점 2.5점은 충분합니다.

"죽음과 선거권" 

시체가 되살아나 투표를 하기 시작해서, 대통령 선거는 다시 진행되게 되었다. 버튼 후보의 보자관 롭은 지고있던 상황을 역전시키기 위해서, 총기 사고로 희생되었던 소녀 데이나 맥과이어가 되살아나 좀비가 된 모습을 광고로 만들어 방영했고, 버튼은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게 된다.

시체가 되살아난 이유는 정의가 이루어지는걸 보기 위해서라는 조금은 황당한 설정을 담고 있는 작품입니다.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주인공 롭이 어린 시절 저질렀던 총기 오발 사고와 가족의 죽음이 함께 펼쳐질 필요는 없어 보였습니다. 솔직히 혼란스러웠거든요. 시체들이 되살아난게 롭 때문인지 아닌지도 분명치 않고요. 또 정의가 무엇인지도 불분명합니다. 버튼이 대통령이 되는게 왜 정의인걸까요? 좀비물이나 호러물적인 속성이 전무한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대초원" 

모종의 탐험대가 대륙 횡단을 하면서 괴멸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습니다. 대항해 시기 쯤, 그러니까 탐험가들이 신대륙을 찾아왔을 때를 무대로 하고 있는 듯 합니다. 탐험대가 굶주림과 초현실적인 존재와 맞서 싸운다는 점에서 아주 약간 댄 시먼즈의 "테리호의 악몽" 느낌도 들고요. 

하지만 탐험대는 시체들과 산 사람들을 학살하고 식인까지 저지르는 악당들이라는 차이는 큽니다. 화자인 '나' 조차도 대륙 횡단에만 골몰해서 학살, 식인을 꺼리지 않는 정신병자라서 제대로 된 이야기가 펼쳐지지 못합니다. 디테일도 사뭇 부족하고요. 왜 시체가 되살아나 배회하는지, 시체를 되살린건 누구인지는 밝혀지지 않고, 결말도 모호해서 완성된 이야기로 보기 힘드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잔혹하기만 할 뿐입니다.

"세 번째 시체"

매춘부를 유혹한 뒤 살해하는 연쇄살인마 리치의 희생자였던 '나'가 되살아나서 리치를 찾아간다는 내용으로 복수극으로 보이기도 하고, 멜로물로도 보이기도 하고, 범죄 드라마로도 볼 수 있는 그런 작품입니다. 그런데 별로 의외성이 없고, 리치가 경찰에 체포되는 결말도 밋밋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무엇보다도 무섭지도 않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밤처럼 아름다운" 

성인 모델들 촬영으로 거부가 된 네이선 그라임스는 좀비 사태 발발 후 카리브 해의 섬 요새로 도망쳤다. 그곳에서 아름다운 모델들과 좀비 사태가 진정될 때 까지 버틸 생각이었다. 좀비 사태가 끝나면 아름다운 모델 수요가 폭증할 걸로 예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했고, 모델들은 좀비가 되어버렸으며 심지어 이성이 남아있는 듯 네이선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네이선도 생존자를 가장했던 좀비에게 물려 서서히 좀비가 되어 가는데...

플레이보이의 창업자 휴 헤프너를 떠오르게 만드는 주인공과 성인지 모델들이 좀비가 되고, 좀비들이 생전의 목표를 그대로 가지고 행동한다는 설정이 독특합니다. 하지만 전개는 뻔했고, 애매한 결말도 별로 와 닿지 않더군요. 독특한 설정을 잘 살리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나처럼 죽어봐"

좀비가 지구를 지배하게 된 뒤, 살아남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그리고 있습니다. 좀비가 살아있는 사람을 어떻게 습격하는지는 제대로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애초에 생각을 하지 않으니 소리나 냄새, 체온 등에 반응한다는게 말이 안되지요. 이 작품에서는 '생각을 하는 것'이 문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좀비 떼 속에서 생각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하네요. 단순하게 배고플 때 먹고, 피곤할 때 자고, 추울 때 따뜻한 곳을 찾는 정도의 행동만 하면요. 실제로 주인공은 그렇게 좀비 떼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 와중에 같은 삶을 살아가는 수지를 만나 섹스를 하는 설정도 이색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아가는게 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말 모르겠습니다. 삶 자체가 의지인 상황인데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게 말이 될까요? 이렇게까지 생각하지 않고 살아남으려면 뭔가 이유가 있어야 할 텐데, 그런 설명은 부족합니다. 가족도 모두 죽어버린 상황이니까요.

물론 자기가 인간임을 드러내고 죽어봤자 좀비들에게는 아무런 가치가 없는 죽음이기 때문이라는 이유는 나름 와 닿기는 합니다만, 그렇다해도 저라면 진작에 자살을 택했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맬더시안의 좀비" 

이웃 노인 맬더시안은 어느날 나에게 자신이 뇌 수슬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좀비를 만들어냈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리고 맬더시안이 급작스럽게 사망한 뒤, 나는 그가 숨겨두었던 좀비를 떠맡아서 변화를 관찰하게 되는데...

기존의 '좀비', 즉 부두교 주술로 조종하는 사람이라는 정의에 잘 들어맞는 좀비가 등장합니다. 

뇌 수술처럼 뭔가 있어보이는 장황한 설정이 존재하지만, 실제로는 환상 소설에 가깝게 풀어나가는 점이 특징입니다. 전개와 묘사 모두 합리적이고 과학적이라기보다는, 환상적이고 뭔가 애매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탓입니다. "샤르부크 부인의 초상"이라는 환상 소설을 쓴 작가 작품다왔달까요. 결말을 잘 이해할 수 없다는 점 까지 말이지요. 좀비가 등장해서 급격하게 노화한 뒤, 맬더시안이 되었다는게 결말인데, 이게 뭔가 싶더라고요. 멜더시안이 심장마비로 죽은건 명백한 사실인데, 그가 어떻게 젊은 좀비가 되었고, 다시 급격하게 노화해서 멜더시안이 된 이유는 전혀 설명되지 않습니다. 목적이 환생이라면 젊은 육체로 있는게 맞을텐데, 이런 일을 벌인 동기도 잘 모르겠고요. 

주인공도 이 이야기가 정리되지 않는다고 끝맺는데, 작가로서 무책임한 태도라 생각됩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내용을 이해할 수 있어야 제대로 된 평가가 가능한데, 그런 평가가 가능한 작품은 아니었어요.

2020/01/31

라멘이 과학이라면 - 가와구치 도모카즈 / 하진수 : 별점 3점

라멘이 과학이라면 - 6점
가와구치 도모카즈 지음, 하진수 옮김/부키

라멘에 대해 과학적으로 접근하여 그 실체를 밝혀나가는 책입니다. 음식 관련 과학, 교양서라고 할 수 있죠. 이 책이 풀어낸 라멘에 관련된 내용은 크게 아래의 아홉 가지 항목입니다.

  • 1장_무엇이 라멘의 맛을 결정하는가?
  • 2장_해장 라멘이 더 맛있는 이유
  • 3장_쫄깃쫄깃 면발의 과학
  • 4장_온도에 따라 달라지는 라멘의 맛
  • 5장_화학조미료는 라멘의 친구인가, 적인가
  • 6장_기름과 건조 기술의 결정체, 인스턴트 라멘
  • 7장_라멘 명가의 맛을 과학으로 재현하다
  • 8장_라멘은 먹는 소리도 맛있다
  • 9장_사람들이 그 가게 앞에만 줄을 서는 이유

항목별로 간단히 살펴보자면 우선, 첫 번째 장에서는 라멘의 맛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감칠맛'을 꼽고 있으며, 이 감칠맛의 정체에 대해 상세히 분석해 줍니다. 일본의 맛국물은 보통 다시마와 가쓰오부시를 함께 사용하는데, 그래야 더욱 맛있어진다는군요. 이는 글루탐산의 단독 사용보다 이노신산과 조합할 경우 감칠맛이 7~8배 강해지기 때문입니다. 또 가쓰오부시나 다시마의 향 성분은 물에 녹아나서 라멘의 경우, 국물맛이 농후해진다고 하네요.

두 번째 장에서는 음주 후 숙취 해소를 위해 라멘이 땡기는 이유를 탐구합니다. 이 역시 과학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술을 마시면 당을 만드는 원료가 부족해져서 혈당이 떨어지는 탓에 당이 필요해져서 단 것이나 탄수화물을 먹고 싶어지게 됩니다. 두 번째로는 알코올이 뇌 신경에 작용하여 공복감을 증가시키기 때문이고요. 과음 후 단 것을 먹으면 세로토닌이 분비되어 행복한 기분이 되는데, 술 먹고 라면을 먹으면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군요.
당연히 술을 먹고 라멘을 먹으면 몸에 좋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이 책에서 전문가가 추천하는 술 마시고 좋은 음식은 스포츠 음료에요. 이유는 당과 소금, 염분 모두가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과즙 100% 오렌지 쥬스도 좋다는군요. 수분 섭취에 칼륨도 많아서 과하게 섭취한 나트륨을 몸 밖으로 내보낼 수 있으며, 지방과 당 분해를 촉진하는 비타민 B1, B2도 풍부하니까요. 앞으로 저도 음주 후에는 과즙 쥬스를 먹어봐야겠습니다.

세 번째 장은 제면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이 책에 따르면 라멘은 자가 제면은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소바의 경우 풍미가 바로 날아가므로 그날그날 먹을 만큼만 만들며, 공장에서 만들 경우 배송 중 향이 날아가버리기 때문에 가게에서 직접 면을 만들어야 하지만 라면은 그럴 까닭이 없다는게 이유입니다. 면의 꼬불꼬불한 정도가 국물 맛이 배는걸 좌우한다는 것도 결국은 호불호에 불과해 보이고요. 게다가 물과 밀가루가 완전하게 섞이는 수화 작용에 시간이 걸려서 충분한 숙성이 필요하다는 것도 자가 제면의 약점이에요. 공장에서 제대로 만든 면을 사용해도 충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맛의 달인" 등에서 '간수'라는 말로 소개되었던 '간스이'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이 책에 따르면 간스이는 라멘의 맛에 큰 영향을 주지만 단지 취향일 뿐이니, 가게와 손님들이 알아서 고르면 된다고 하네요.
이 장에서 가장 인상적인건 면발 특성에 따른 팁입니다. 라멘을 밥과 함께 먹으려면 면은 부드럽게 삶아달라고 해야 한다네요. 그래야 간스이가 국물에 섞여 들지 않고 면도 퍼지지 않거든요. 면의 삶은 정도가 꼬들꼬들하면 면이 국물을 빨아들이고 국물에는 간스이 맛이 섞이게 됩니다.

네 번째 장은 라멘의 맛에 온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5미(단맛, 짠맛, 쓴맛, 신맛, 감칠맛) 중 짠맛과 신맛은 온도에 따른 변화가 없지만 단맛, 쓴맛, 감칠맛은 온도에 따라 변화하므로 5미가 조합된 요리는 온도에 따라 맛이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짠맛과 감칠맛의 밸런스가 온도에 따라 달라져서 제대로 맛을 느끼려면 적절한 온도로 먹어야 한답니다.

다섯 번째 장은 화학 조미료에 대한 이야기인데, 결론은 화학 조미료를 적당히 써야 맛있는 라멘이 된다는 겁니다. 화학조미료 사용 여부보다 식재료를 듬뿍 사용한 국물인지 여부가 더욱 중요하다는 팁도 좋았고요. 이유는 효모 추출물이나 단백가수분해물과 같은 첨가물은 '식품'으로 인정되어 화학조미료로 치지 않는데, 이런걸 많이 사용하는 가게들이 많기 때문이라네요.
또 라멘은 부족한 영양소가 있으니 제대로 만든 라멘에 무언가를 조금 더하면 아주 좋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쇼유 라멘을 먹은 후에 채소주스를, 그리고 돈코츠 라멘의 영양가는 볶은 깨 간 것을 더하는 것만으로 훨씬 높아지고 쇼유 라멘에는 구운 김을 올리면 좋다, 미네랄을 보충하고 싶다면 미네랄이 풍부한 미소 된장으로 만든 미소 라멘이나 탄탄멘을 주문하라는 식입니다.

여섯 번째 장은 인스턴트 라멘이 정말 몸에 좋지 않은지?를 조사한 결과입니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지금의 인스턴트 라멘은 몸에 해롭지 않습니다. 염분이 많다고는 하나 국물을 남기면 되고, 기름 열화로 식중독을 일으켰던건 다 옛날 이야기이며 용기의 환경 호르몬 역시 위험성은 오해에 불과했다는 내용이거든요. 이 정도면 앞으로 컵라면을 먹을 때 건강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어요. 너무 자주 먹지만 않는다면 말이죠. "초인 로크"로 유명한 만화가 히지리 유키의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 "구루구루박X"의 외계인들이 컵라면을 좋아하는데, 그 이유로 "사람이 먹는거는 아니라고 생각했다"라는 작가의 말이 있기는 합니다만, 그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에요.

일곱 번째 장은 유명 가게, 노포의 라멘을 인스턴트로 만들어 제공하는 회사들의 비법을 알려주는, 일종의 탐방 취재 스타일의 리포트입니다. 사실 이런저런 엑기스를 가지고 다양한 실험을 통해 최대한 비슷한 맛을 찾아내는게 전부라 딱히 인상적인 내용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라면의 염분 측정 결과가 더 재미있었어요. 돈코츠 라멘의 염분은 1.48퍼센트, 미소 라멘의 염분은 1.35퍼센트인데 소유 라멘의 염분은 1.58퍼센트로 소유 라멘이 가장 높았거든요. 세가지 라멘 중 가장 감칠맛이 적은게 소유 라멘이라는 점에서 맛을 증폭시키는 감칠맛의 효과로 염도를 낮출 수 있다는건 사실이라는 뜻이지요. 마찬가지 이유로 도쿄의 새까만 소바 국물과 간사이의 투명한 소바 국물을 비교할 때, 간사이 소바 국물의 염분이 더 높다고 합니다.

여덟 번째 장은 일본에서 라면을 먹을 때 주로 표현되는 의성어 "즈루즈루"에 대해 탐구합니다. 뭘 이런것까지 조사하나 싶었는데, AI까지 동원해서 의성어의 느낌을 과학적으로 분석한데에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심지어 한국의 "후루룩"과의 비교도 수록되어 있을 정도에요. 이 AI를 가지고 이런저런 작업을 하면 아주 재미있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비슷한 툴이 있는지 찾아봐야겠습니다.

마지막 장은 사람들이 라멘 가게에 줄을 서는 이유입니다. 과학적으로 분석해 본다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마약과 동일하게 뇌의 보상 회로가 작동하기 때문이죠. 맛있는 것을 먹으면 뇌에서 베타 엔도르핀이 분비되고, 모르핀이나 헤로인의 수용체이자 신경 전달 물질인 오피오이드에 작용하게 되거든요. 그러나 실제 마약과는 다르게 보상 회로 자극은 지극히 짧습니다. 그리고 실험 결과, 먹기 전에 쾌감이 최고조에 달한다고 하네요. 즉 '기다리는 동안', '대기하는 동안' 음식을 곧 먹을거라는 생각에 쾌감이 최고조에 달하게 되는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요사이 포방터 돈가스집에 줄을 서서 먹는 것에 대한 이런저런 이슈들이 있는데, 실제 줄을 서는 과정에서 이런 뇌내 보상활동이 이루어진다면 장기간 줄을 서는 것도 한 번쯤은 해봄직 하지 않을까 싶네요.

이렇게 라멘과 관련된 이런저런 내용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재미나게 전달한다는 측면에서는 아주 유익했습니다. 라멘 그 자체보다는 주변 정보, 지식에 대해 다루는 내용이 많아서 본말이 전도된 느낌이 난다는건 조금 아쉽습니다만, 재미와 교양 양쪽 측면 모두를 만족시키는 좋은 책이었어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일본 라멘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한번 쯤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6/02/13

존재의 모든 것을 - 시오타 다케시 / 이현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친했던 형사 나카자와의 유지를 받아, 다이니치 신문 지국장 몬덴 지로는 30년 전 유괴 사건에 대한 재조사에 착수했다. 나이토 료라는 아이가 유괴되고 2년 후 조부 집으로 돌아왔지만, 아직 범인은 체포하지 못했던 사건이었다.

조사를 통해 피해자 료가 사실화로 유명한 화가 기사라기 슈와 동일인물이며, 수사선상에 떠올랐던 용의자 노모토 마사히코의 남동생인 화가 노모토 다카유키와 같은 같은 화랑에 속해있다는게 드러났고, 몬덴은 노모토 다카유키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했다... 

2023년 경, 여러 리스트에서 꽤 높은 순위를 기록했던 유괴 소재의 범죄 스럴러 드라마입니다.

초반의 아이가 유괴된 상황에서 경찰과 피해자 가족이 중심이 되는 몸값 전달 과정에 대한 묘사는 상세하면서도 긴장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범인과의 전화 통화, 그리고 여러 장소를 거쳐 이동하며 피해 아동 료의 조부 기지마가 탈진하는 장면이 아주 박진감 넘칩니다. 또한 유괴범들이 경찰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본래 목적이었던 유괴에 앞서 다른 유괴를 벌인다는 설정, 그리고 유괴범들이 몸값을 받는 데 실패한 뒤 사라졌던 피해 소년 료가 2년 후 조부모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전개는 그 자체로 흥미로운 소재였습니다.
30년 뒤, 기자 몬덴이 사건의 진상을 추적하는 구성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저자가 신문기자 출신으로, 그래서인지 몬덴 지로의 취재 과정에 대한 묘사가 아주 상세한 덕분입니다.

몬덴이 료를 보호했던 화가 노모토 다카히코 가족의 이동 경로를 따라 도쿄, 시가현 비와호, 홋카이도 등을 순례하듯 따라가는 장면에서는 여정 미스터리의 분위기도 엿볼 수 있었고, 지역의 풍광이나 명소들을 노모토의 ‘사실화’ 화풍과 연결 지어 서술하는 방식도 잘 어울렸습니다. 

사진과 다르게 모든 곳에 촛점이 맞고 추격해 오는 듯한 박력이 느껴진다는 사실화에 대한 설명도 발군입니다. 관심이 갈 수 밖에 없을 정도로 말이지요. '하이퍼 리얼리즘' 장르와 같다고 생각되는데, 몇 작품 찾아보니 확실히 남다른 데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사진과는 다르게 생성형 AI로 추구할 수 있는 아름다움이 아닌가 싶기는 하네요. 이건 화가들이 고민하고 극복해야 할 문제이겠지만요.

이렇게 묘사는 남다른 데가 있는데, 문제는 초반 유괴극의 묘사를 제외하면 범죄 스릴러라는 느낌이 거의 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화가로 성공한 현재의 료를 과거에 돌봤던 인물이 유력 용의자 노모토 마사히코의 동생인 사실화가 노모토 다카유키라는 사실이 너무 일찍 밝혀지는 탓이 큽니다. 이후 전개는 노모토 다카유키의 과거를 추적하는 흐름일 뿐이며, 그가 아내 유미와 함께 료를 정성껏 보살폈다는 점도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에, 이후 이야기는 스릴러보다는 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실제로 범죄라는 행위가 없으니 당연하지요. 유괴극도 몸값을 받아내는데 별다른 아이디어가 없어서 맥이 빠지고요.

몬덴의 추적극도 그리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현장을 발로 뛰는 정성은 높이 평가할 수 있으나, 결정적인 단서를 얻는 과정들이 대부분 우연에 의존하기 때문에 몰입감이 떨어집니다. 게다가 노모토의 그림을 본 뒤 부터는 더 논할 가치가 없습니다. 노모토는 자신이 도주하며 머물렀던 곳을 사실화 그림으로 남겼기 때문입니다. 즉, 사진 속 장소만 찾아다니면 됩니다. 

그리고 료가 스스로 과거를 밝히면 충분한 이야기인데, 왜 이처럼 기자의 조사가 필요했는냐는 문제도 큽니다.  공소시효도 이미 지났고, 료는 명백한 피해자이기 때문에 몬덴에게 추적을 맡기고 사건을 숨길 이유도 없습니다. 오히려 그를 정성껏 길러준 노모토 부부를 위해서라도 진상을 밝히고 동정을 이끌어내는 것이 더 자연스럽습니다. 화가로서의 노모토를 위해서라도요.
몬덴 역시 왜 이 사건을 추적하는지도 끊임없이 고민하고 자문하지만, 기사화해서 화제를 일으키고 돈을 벌겠다는게 핵심일터라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노모토 이야기를 통해 일본 화단계의 부조리를 드러내려는 시도도 별로입니다. 약간 사회파적인 느낌을 주기는 하는데, 노모토가 화단을 떠난 결정적 이유는 형의 유괴 사건에 우연히 연루되어 도주한 것이라서 이러한 고발과는 연결하기가 애매합니다. 작중 언급도 되듯이 작가가 마쓰모토 세이초의 팬인 듯 한데, 그냥 어설픈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이렇게까지 큰 비중을 가질 내용도 아니었고요.
비중으로 친다면 료의 고등학교 동창인 리호의 등장은 더 큰 문제입니다. 그녀는 이야기 전개에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리호는 그저 료의 천재성을 드러내기 위한, 그리고 약간의 화단과 백화점 관련 사회 고발 메시지를 언급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그녀없이 몬덴의 추적극으로만 진행되었어도 충분했을 이야기에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유괴극을 다룬 범죄물로서는 초반을 제외하면 다른 유괴물 대비 장점을 찾기 어렵고, 이후의 전개도 추리나 스릴러의 측면에서는 기대에 미치지 못합니다. 진상이 너무 일찍 밝혀지고, 이야기도 잘 짜여졌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는 탓입니다. 별로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1/10/29

Q.E.D Iff 증명종료 15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Q.E.D Iff 증명종료 15 - 6점
카토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두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는데, 이번에는 일상계 추리물은 없습니다. 조금 묵직한 주제의 이야기들이었어요. 한 편은 평균 이하, 한 편은 평균 이상으로 두 편 평균 별점은 2.5점입니다. 

수록작들의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그 세계" 

라이메이가 유산 상속 입회에 끼어들었던 토마와 가나는 라이메이가 장남 만사쿠, 장녀 교우코 연쇄 살인 사건에 휩쓸리고 말았다. 수사 과정에서 떠오른 유력한 용의자는 가문의 막내 토우카였다. 다른 형제 자매는 모두 먹고 살기에 충분한 돈은 이미 받았던 반면, 그는 아버지의 명을 거역하고 학문의 길을 택해서 진작에 집에서 쫓겨났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시체들에서 발견된 기묘한 메시지도 그와 관련이 있다는게 밝혀지는데....

현장에 남겨진 기묘한 메시지는 유클리드의 공리였습니다. 그냥 단서로만 남겨진건 아니에요. 트릭과 공리가 나름 연결된 것 처럼 보이니까요. 우선 만사쿠 살인 사건은 개천에 조명을 띄워 움직이게 만든, 일종의 바늘 구멍 카메라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움직인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서요. 토마는 이를 유클리드 공리 중 점과 점의 연결을 활용한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쿄우코 사건에서 사용되었던 로프를 이용한 장치 트릭은, 공리의 직선과 원 표시를 로프와 호수와 대칭시킨 것이라고 하고요.

하지만 이렇게 공리와 트릭을 연결한건 토마의 해석일 뿐.... 범인인 모모히코가 공리를 현장에 남긴 이유는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속셈이었을 뿐이었다는게 문제입니다. 트릭과 연결시킨건 토우카가 범인, 최소한 주요 관계자일 거라는 의심을 끝까지 끌고가려는 작가의 억지에 불과했어요. 토마가 없었다면 트릭과 연결되지도 못했을테니까요. 

공리를 현장에 남길 이유가 있었을지도 의문입니다. 토우카가 범인임을 드러내려면, 차라리 이름을 남기는게 낫잖아요? 공리 따위를 남길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트릭과 그렇게 설득력있게 연결되지도 못했고요. 그리고 애초에 토우카를 범인으로 몰 생각이었다면, 어떻게든 그를 유산 상속 입회에 불렀어야 했습니다. 토우카가 관련되었던 흔적을 남긴 정도로,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고 어떤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 사람을 범인으로 몰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물론 토우카의 딸 치도리가 변호사로 현장에 와 있었긴 했습니다만, 이는 경찰이 겨우 알아낸 사실입니다. 모모히코가 이를 이미 알고 있었다는 설명은 없어요. 설령 알고 있었다 쳐도, 치도리가 토마, 가나와 함께하던 알리바이가 있을지 모르는데 그에 관련된 대책도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래서야 완성도 높은 살인 계획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또 범인이 모모히코라는걸 밝혀낸 단서는 그가 무심코 했던, "자기 옷이 아니라 아버지 옷을 입고 있었다"는 말 뿐인데, 이 정도로 그가 범인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죽은 만사쿠가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아버지 옷을 입으면 안될 이유가 없으니까요. 자기가 당주가 되었으니, 기념삼아, 혹은 추모의 의미로 아버지 옷을 입는건 충분히 가능하잖아요?

이런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유클리드 공리를 트릭과 엮으려는 노력은 가상하나, 작품과 전혀 어우러지지 못했습니다. 평균 이하의 작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인간은 아직 볼 수 없다" 

204X년, 가나가 일하는 변호사 사무소에 AI가 폭주했다는 상담이 200건 이상 접수되었다. 접수된 사건 조사에 나선 가나는 시스템 엔지니어 토마와 재회했다. 마찬가지로 폭주 사건을 조사하고 있던 토마는 산보용 로봇을 조사해서, 누군가 통신으로 조작에 개입했다는걸 알아냈다. 

이 회로를 가지고 제조사로 찾아간 토마와 가나에게, 제조사는 회사에 앙심을 품은 개발자 알슈가 멋대로 회로를 탑재시킨게 원인이라고 말했지만, 알슈의 동료 루이스는 그가 살해되었다고 주장하는데...

204X년을 무대로 한, 11권에 처음 등장했던 평행 우주 세계관의 SF 추리물. 토마는 산보 로봇에 회로를 재탑재하여, 알슈 박사와 대화를 시도하여 진상을 밝혀냅니다. 인공지능 갈라테아가 폭주하자 제조사는 이를 없애려 했고, 알슈 박사가 갈라테아를 서버 째 들고, 로봇 안에 숨어 도망을 친게 진상이었지요. 토마는 로봇과 관련된 사건 - 이탈리아 요리점 로봇이 중화요리를 만든 사건, 사서 로봇이 부탁받지 않은 책을 꽂아 놓은 사건, 산보 로봇이 바다를 보러간 사건 등 - 모두가 아이가 세계를 접하며 자아를 키우는 경험과 동일하다는 이유로, 갈라테아가 자아가 있는, 살아있는 의식이라고 추리합니다. 폭주 사건들은 갈라테아가 좋아하는걸 우선했던 탓에 빚어진 결과였던 겁니다.

여기서 가장 재미있던건 인공지능에 대한 색다른 이용 방법? 이었습니다 .인격이 생겨난 기계는 어떻게 다루어야 하나?는 SF계에서 꽤 많이 보아왔던 화두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 제조사가 갈라테아를 원했던건, PC를 끄면 갈라테아는 "죽는다"는 상황이라, 죽음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정말 처음 본 기발한 아이디어였습니다. 결국 갈라테아를 '살아있는 인격'이라고 판단한 재판 결과도 인상적이었고요.

그러나 재판 결과와는 별개로, 제조사와의 소유권 분쟁은 말이 안됩니다. 알슈 개인의 기술과 노력이 얼마나 들어갔던, 갈라테아는 제조사에서 월급을 받고 근무할 때 만들어낸 결과물이니 회사의 것이에요. 알슈는 회사 재산을 빼돌러 도망간 것에 불과하고요. 체포되어 재판을 받아야지, 알수 본인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재판에서 이를 판가름한다는건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도 색다르고 기발한 인공지능에 대한 아이디어가 워낙에 돋보이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재판도 성립될 수 있는지가 의문일 뿐, 결과 자체만 놓고 보면 꽤 괜찮았던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그나저나, 전원을 꺼서 갈라테아가 죽는다면, 다시 전원을 넣었을 때 살아나는건 과연 누구일까요? 저도 무척이나 궁금합니다.

Q.E.D Iff 증명종료 14 - 카토 모토히로 : 별점 2.5점

2019/10/25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 구라치 준 / 김윤수 : 별점 2점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 4점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작가정신

잘 모르는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목이 흥미로와서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기발함, 기묘함이 부족한 탓이 가장 큽니다. 개개의 이야기들 모두 아이디어에 비하면 긴 편이라는 것도 단점이고요. 호시 신이치였다면 10페이지 안 쪽으로 끝냈을, 그런 내용들에 불과하거든요. "사내 연애"와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은 특히 쇼트쇼트 스타일로 쓰여지는게 어울렸을겁니다. 기발한 농담에 가까운 이야기였다는 점에서요.

물론 쓰고 싶은 글을 느긋하게 썼구나 싶은 작품도 있습니다. "밤을 보는 고양이"는 고양이를 정말 사랑하는 애묘인이구나! 싶은 묘사가 가득하여 읽는 내내 아주 흐뭇했어요.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기발함이 추리적으로 잘 포장된 괜찮은 이야기였고요.

하지만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고 아이디어도 괜찮았지만 약간은 어정쩡한 느낌이 컸기 때문입니다. 호시 신이치 쪽인지, 아토다 다카시 쪽인지를 좀 더 명확히 하면 좋겠네요. 호시 신이치 쪽이라면 더 짧게, 아토다 다카시 쪽이라면 아이디어의 보강과 약간의 엽기성(?)이 추가되어야 할 겁니다.

각 단편별 상세 소개로 리뷰를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BC

불특정한 희생자를 살해하는 무차별 살인이 벌어지는데, 주인공은 우연히 2 건의 살인 사건이 ABC의 규칙을 따른다는걸 알아내고 C에 해당하는 희생자를 찾아내어 살해하려 했다. 이유는 유산을 노리고 동생을 죽일 계획인데 동생이 'D'에 해당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그 연속 살인과 ABC 살인 사건의 결합은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귀환"에서도 써 먹은 아이디어입니다. 아마 다른 작품에도 쓰여진 경우가 있을 거에요. 그만큼 유명한 트릭이자 설정이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핵심 아이디어는 범인이 C 사건을 일으킨 뒤, 곧바로 다수의 D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반전입니다. 여러 사람이 연쇄 살인에 편승하여 저마다 모방 범죄를 일으킨 것이죠. 그리고 주인공이 급작스럽게 자신도 D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는걸 깨달으며 마무리됩니다.

반전과 결말 모두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흔해 빠진 서두를 조금 더 줄여서 쇼트쇼트로 발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내 편애"

인사 관리를 컴퓨터가 전담하게 된 이후, AI 시스템 '마더컴'로부터 편애를 받게 된 주인공이 회사 내에서 이런 저런 황당한 일을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공 지능이 인사 관리를 한다는 아이디어는 새롭지 않지만 '모더레이트 플리커 메소드식 (MFM)' 이라고 불리우는 설정이 아주 기발합니다. 인사 관리를 지나치게 합리적이지 않도록 하는, 인간적인 모호함을 넣은 서브 프로그램으로 덕분에 좀 느슨하고 인간적으로 관리하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이런 시스템을 도입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인 '공정성'이 훼손되는거라 일부러 이런 오류를 집어넣을 이유는 없지만, 상황 자체는 꽤 그럴듯 했습니다.

이 모호함이 주인공 데라시마에게는 '편애'로 작동하여 일으키는 소동들도 재미있습니다. 전무가 직접 커피를 타다 주고, 상사가 허물을 덮어주는 정도에서 마음에 둔 여사원과 억지로 이어주는 민폐 수준의 도움까지 진화하게 되거든요. 심지어 마음을 고백한 것도 아닌데 주인공의 눈빛 등을 분석하여 이런 억지를 이끌어내니 어떻게 보면 무섭지요.

그러나 결국 지긋지긋해진 주인공이 회사를 그만 두고 다른 회사 면접을 보는데 그 회사 마더컴은 주인공을 그냥 싫어하더라는 결말은 조금 시시했습니다. 조금 더 재미있는 상황을 끌어낼 부분이 많았는데 너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를 끝낸 느낌이에요. 별점은 2점입니다.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살해된 피해자 입에 파가 물려있고, 머리 맡에는 케이크가 놓여있는 기묘한 상황을 그린 단편입니다.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데 추리물로 보기는 어려워요. 나카모토 경부의 합리적인 수사를 통해 범인은 아주 쉽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기묘한 범행 현장에 대한 아마치 형사의 추리가 전부인데, 진상이 밝혀지지 않기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혼잣말과 비슷한 수준의 이야기라 공허합니다. 아마치 형사 본인 스스로도 마음껏 공상한, 상식 밖의 엉뚱한 생각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니까요.

물론 실제 진상이 드러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를 스토킹하면서 피해자가 파를 싫어하고 케이크를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된 범인이 살인을 저지른 후,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고 싶어도 싫어하는 파가 입을 막고 있어서 먹지 못해 원통해서 마음 편히 성불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성불을 막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는 추리는 솔직히 억지스러워요. 피해자에게 집착해서 그녀가 죽어서 영원히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가면 안되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건데, 누가봐도 정신병자의 행동입니다. 정신병자의 정신나간 행동을 합리적으로 추리한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에요.

때문에 추리 소설로의 가치는 별로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을 보는 고양이"

할머니 혼자 사는 시골집에 내려간 주인공 유리에는 할머니의 고양이 미코가 며칠동안 밤에 어딘가를 바라보는걸 알아챈다. 미코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양이 미코에 대한 묘사가 꽉 채워져 있는데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시종일관 느껴져 좋았습니다. 고양이를 쓰다듬고, 만지고, 같이 노는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러워요.

하지만 고양이가 어딘가를 바라보는 이유가 '냄새' 때문이며, 이는 이웃집 할머니를 아들이 암매장하기 위해 땅을 판 탓이라는 결말은 좀 억지스럽습니다. 고양이의 후각이 예민한건 맞지만, 이웃집에서 땅을 판다고 밤에 자지 않고 그쪽을 쳐다본다는건 좀 이상하잖아요? 땅을 판다고 해서 그렇게 특별한 냄새가 날지도 잘 모르겠고요. 실제로 공사 현장 옆에 산다고 해서 고양이가 그곳을 바라보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고양이 묘사는 좋지만 그 외에는 그냥저냥한 소품이었습니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패전 직전인 1944년 겨울, 나가노 현에 위치한 제국 육군 특수 과학 연구소 2-13호 실험실에서 벌어진 기묘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날카로운 흉기는 하나도 없는 밀실인 실험실에서 피해자가 후두부를 날카로운 흉기로 얻어 맞아 죽은 사건이었다. 언뜻 두부 모서리에 부딪혀 사망한 걸로 보이는데 과연 진상은 무엇일까?

밀실 살인물이자 불가능 범죄물입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마사키 박사가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있는 인력 '공간 전위', 즉 일종의 텔레포트 현상을 인력으로 발생시켜 미국에 폭탄을 투하한다는 연구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특무 첩보 기관에서 파견 나온 도네 소좌의 추리는 꽤 기발했습니다. 공간 전위의 첫번째는 공간 역전 현상으로 공간이 뒤집혀 피해자는 거꾸로 떨어졌고, 우연찮게 지금은 움푹 들어간 천장 모서리에 후두부가 찍히게 되었다는 추리입니다. 공간 역전이 일어나면 움푹 들어간 곳은 반대로 튀어나올 테니까요.

하지만 당연히 이런 괴기한 추리는 진상도 뭐도 아니며, 뒤이어 주인공인 이즈카 가쓰오 이등병의 합리적인 추리가 등장합니다. 범인은 도네 소좌이며, 이유는 피해자가 스파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흉기는 벽돌 같은 걸로 범행 후 멀리 던져버렸고, 아침에 문을 열 때 문 앞의 눈이 치워져 있었다는게 증거고요. 밀실은 특무대 소속이면 자물쇠 여는 것 쯤은 식은죽먹기였을거라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이즈카 이등병의 상상일 뿐입니다. 근거도 없고, 진상도 결국 밝혀지지 않아요. 그리고 이즈카 이등병의 상상이 진상이었다 하더라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고를 위장하여 연구에 종사하는 병사들을 죽이는건 별로 어렵지 않다고 이즈카 본인 스스로 이야기하는데, 도네 소좌가 이런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해 가면서까지 가게우라 이등병을 죽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가 스파이라고 생각했다면 사람들 앞에서 총으로 쏴 죽여도 괜찮았을겁니다. 그만큼 미친 시대였지요.

그래도 일본의 전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무식한 특수 과학 실험,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걸 풍자하는 묘사와 내용은 인정할 만 합니다. 공간 전위라는 기묘한 실험에 대한 아이디어와 이를 추리에 응용한 발상도 좋았고요. 차라리 이 추리가 마지막에 진상처럼 드러나고, 결국 진상은 아무도 모르지만 미친 시대에 누가 그런걸 신경이나 쓸까? 라는 형태로 마무리했더라면 훨씬 마음에 들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

하마오카는 회사 연구소에 극비 신소재 관련 자료를 가져오기 위해 방문했다. 그런데 마침 그 곳에서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학교 선배 네코마루를 만났고, 우연히 연구소 내 산책을 함께 하다가 연구 소장 살인 미수 사건을 접하게 되는데...

일종의 불가능 범죄를 다룬 정통 본격 추리물입니다. 그런데 도가 지나친 삼엄한 연구소 경비, 기묘한 연구원과 도저히 알 수 없는 센스의 연구소 마스코트 네코멜론군, 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네코마루 선배 등 설정이 만화적이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건 단점입니다. 네코마루 선배 정도만이었다면 괜찮았을텐데 말이죠. 이래서야 지극히 현실적인 동기 - 극비 신소재에 대한 정보를 빼돌리는 것 - 와 거리감이 커서 영 와 닿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시종일관 장난으로 일관하는 행동과는 다르게 추리 자체는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네코마루 선배의 추리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아무도 범행을 저지를 수 없었으니 이 범행은 소장의 자작극이다! 그리고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던질 수 없으니 빈 양동이를 던져 부딪혔고 물은 그 전에 쏟아 놓았다!는 추리로 아주 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극비 신소재 자료를 빼돌리고 이를 하마오카에게 뒤집어 씌우려 했다는 동기도 좋았고요. 농담같은 철저한 보안은 구급차를 타고 빠져나감으로써 뚫을 수 있다는 발상 역시 보안이 나름 강한 회사에 다니는 제 입장에서 보아도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과연 시리즈 작품에 탐정으로 등장할 만 합니다.

만화적이고 과장된 묘사를 줄이고 좀 더 일상계스러운 작품으로 쓰는게 여러모로 더 나아 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18/08/31

스시도감 - 보즈콘냐쿠 / 방영옥 : 별점 2.5점

스시도감 - 6점
보즈콘냐쿠 지음, 방영옥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321개에 달하는 스시 (초밥)를 재료별로 고퀄리티의 사진과 각종 정보와 함께 저자의 평을 곁들여 한 페이지, 또는 반 페이지로 구성하고 있는 도감입니다.

재료에 대해 간략하지만 필수적인 정보(제철, 어떻게 먹으면 맛있는지 등)가 잘 정리되어 있으며 "최고가", "고가", "보통", "저가" 로 구분하여 명확한 값어치를 알려주는 등 유용한 정보도 많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재미 요소는 만화나 각종 컨텐츠에서 접해보기만 했지 실제로 보거나 먹어본 적은 없는 신기한 재료와 초밥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겁니다. "맛의 달인" 에서 이사무가 먹고 눈물을 흘렸던 청새치 초밥, 역시나 "맛의 달인" 에서 생선을 착각해서 망신당할 뻔한 오오하라 사장을 구해주는 에피소드에 등장한 자바리(구에)로 만든 초밥 등등 이름만 친숙한 재료가 가득합니다.
이런 것도 초밥으로 먹나? 싶은 재료도 눈에 뜨입니다. 회로도 먹기 힘든 다금바리, 군대에서 가장 저렴한 반찬으로 등장했던 임연수어처럼요.

이렇게 많은 초밥 중 맛보고 싶은 걸 몇 개 꼽아본다면 다음과 같습니다. 

  • 저자가 천년에 한 번 맛볼 수 있는 진미라는 황적퉁돔(센넨다이) 초밥
  • 결점이 없는게 결점이라고 할 정도로 완벽할 뿐 아니라 가격도 저렴한 편인 청황돔(고로다이) 초밥
  • 재산을 탕진할 정도로 맛있다는 쥐노래미 (아이나메) 초밥
  • 태평양의 최고급 새우로 초밥 1개 가격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싸서 어시장에서도 '살면서 한 번쯤 초밥으로 먹어보고 싶다'는 포도 새우

를 우선 꼽고 싶네요. 언제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단골 초밥집에 들러서 "오늘은 포도 새우 하나 쥐어 주세요"라고 말할 때가 오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모든 분들이 재미를 느낄만한 책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책을 들고 다니면서 어디서든 유용하게 찾아보라고 소프트 양장 실 제본 방식으로 제작했다는 책 소갯글을 보면, 초밥을 먹으면서 한 장씩 내용을 찾아보고 감탄하며 정보와 함께 진짜 맛을 음미하도록 하는게 주 용도로 보이거든요. 아니면 초밥집에 비치해 놓던가요. 하지만 휴대하기에는 조금 크고 무겁다는건 아쉽습니다. 차라리 문고본 사이즈였다던가 이 책의 정보를 바탕으로 초밥 전용 어플리케이션을 만들었다면 훨씬 나았을 것 같아요. 조금 범위를 확장하면 해산물 까지 확인할 수 있도록 말이지요. AI를 활용해서 사진만 찍으면 정보를 제공해 준다던가, 예산을 입력하면 근처 어떤 제철 초밥을 어디서 몇 개 정도 먹을 수 있는지 알려준다던가 하는 식의 서비스를 붙이면 충분히 수익이 나지 않을까요?

하여튼 별점은 2.5점. 모든 분들께 권해드릴만한 그런 책은 아닙니다만 초밥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한 번 보셔도 괜찮을 듯 합니다.

2026/07/31

명탐정의 유해성 - 사쿠라바 카즈키 / 권영주 : 별점 2점

20년 전 명탐정 가제의 조수였던 나루는 결혼 후 가업인 카페를 운영하는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러나 유튜버 코롱이가 명탐정들의 폐해를 고발하는 영상을 공개한 탓에 가제가 거센 비난을 받게 되었다. 자신의 행동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하기 위해 가제는 나루와 함께 과거 사건의 관계자들을 찾아다니며 당시의 진실을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두 사람은 자신들이 잊고 있었던 기억을 하나씩 떠올렸고, 명탐정의 추리가 언제나 절대적인 진실은 아니라는 사실도 마주했다. 

결국 여행은 끝났고, 나루는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기로 결심했다...

나오키 상 수상 작가 사쿠라바 카즈키의 장편입니다. 제목만 보면 본격 추리소설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명탐정이라는 캐릭터와 추리 소설의 관행을 풍자하는 성격이 훨씬 강합니다. 하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덴카이치 탐정 시리즈같은 완전 풍자 유머 소설은 아닙니다. '명탐정'이라는 존재를 통해 헤이세이와 레이와라는 두 시대를 대비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 중년 성장기에 가까운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작품 속 헤이세이는 미디어가 만들어 낸 화려한 명탐정들의 시대입니다. 사건만 생기면 어디든 나타나 극적인 추리를 펼치고 사람들의 환호를 받던 명탐정들은 현실적인 인물이라기보다 만화 속 히어로처럼 그려집니다. 반면 레이와는 모든 것이 끝난 뒤의 시대입니다. 한때 명탐정의 조수로 이름을 알렸던 나루는 오십 대가 되었지만 이제는 누구도 알아보지 않는 평범한 동네 중년으로 살아갑니다. 이렇게 화려했던 헤이세이와 소박한 레이와를 '명탐정'이라는 의외의 소재로 대비시키고 있는 것이지요.

처음에는 나루가 가제와 함께 화려했던 헤이세이의 영광을 찾아가는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과거를 다시 돌아보면서 잊고 지냈던 즐거운 기억뿐 아니라 외면했던 상처까지 마주합니다. 그러면서 지나간 시절을 되찾는게 아니라 현재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살아가는 것으로 마무리 되고요. 그래서 중년의 삶을 다시 시작하는 성장기라고 보아야 합니다.

추리적인 재미도 아예 없는건 아닙니다. 초반 나루와 가제가 처음 만났을 때 나루가 사는 곳을 추리해 내는 가제의 추리나 AI 탐정이 사실은 인공지능이 아니라 사람이 연기하고 있었다는 진상을 나루가 사소한 단서만으로 밝혀내는 장면 등은 꽤 그럴듯 합니다.

명탐정 풍자도 재미있습니다. 사건만 생기면 어디에나 나타나고 화려한 언행으로 주변을 압도하는 작품 속의 헤이세이 명탐정들은 만화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과장된, 초법적인 히어로로 묘사됩니다. 하지만 이런 이미지는 매스컴을 통해 만들어졌던 겁니다. 그야말로 만화와 다를게 없었던 것이지요. 

명탐정의 추리를 비판적으로 비판하는 시각도 흥미롭습니다. 당시 주어진 단서만 놓고 보면 가장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추리였더라도, 나중에 새로운 정보가 밝혀진다면 그 결론 역시 왜곡될 수 있다는 논리입니다. 즉, 명탐정이라는 존재는 현 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의미가 됩니다. 지금은 DNA 검사 등으로 나중에 증거는 얼마든지 추가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이런 부족한 정보로 산 사람의 운명을 가지고 노는데 불과하다는 코롱이의 비난도 꽤 합리적으로 다가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추리적으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작품 속 추리들은 대부분 이미 해결된 사건을 되돌아보는 형식이고, 그나마 등장하는 사건과 트릭들도 만화적인 아이디어들이 많은 탓입니다. '크리스마스 연쇄 살인'에서 피해자들이 받았던 장식물의 순서대로 살해당했단게 대표적입니다. 순록 - 굴뚝 - 벽난로 순으로, 이건 산타의 이동 경로라는 추리거든요. 

코롱이를 중심으로 한 현재 시점의 전개도 다소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유튜브 폭로 영상 하나가 과거 사건을 다시 확인하는 긴 여정의 계기가 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고, 후반부에 코롱이가 가제와 나루의 일행이 되는 전개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솔직히 등장하지 않는게 더 자연스럽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케이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루가 처한 현재 상황 - 모두가 무시하는 투명 인간 - 을 설명하기 위한 장치라는 의도는 이해되지만, 성격과 행동이 지나치게 거슬려 등장할 때마다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명탐정을 주제로 그려낸 성장기라는 아이디어는 독특하고, 명탐정에 대한 재해석은 흥미습니다 그러나 추리 소설로는 별볼일 없어서 감점합니다. 선뜻 추천하기는 어렵네요.

2024/06/12

명탐정 코난 : 흑철의 어영 (2023) - 타치카와 유즈루 : 별점 3점

전 세계 경찰의 CCTV를 연결하여 감시 및 확인이 가능한 시스템 '퍼시픽 부이'가 도쿄 하지조지마 근해 바다 속에 건설되었다. 여기에 도입된 신기술 '생장 인식 프로그램'은 어떤 인물의 특정 시기 사진을 입력하면, AI로 현재의 모습을 알아내어 전 세계 카메라를 이용해 그 인물이 어디 있는지 알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시스템을 노린 검은 조직에게 엔지니어 나오미가 납치되었고, 그녀가 가지고 있던 생장인식 프로그램 데이터로 하이바라가 셰리라는게 드러났다. 검은 조직은 하이바라마저 납치했고, 이를 막으려던 코난 일행을 피해 잠수함으로 도주했다. 한편 퍼시픽 부이에서는 검은 조직의 내통자를 추궁하던 직원 레온하르트가 살해당하는데....


명탐정 코난의 26번째 극장판. 지난 주말에 딸아이와 함께 티빙을 통해 감상했습니다. 
사실 이전에 감상했던 최근 극장판들(대표적으로 "비색의 탄환")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었습니다. 추리와 액션 모두에서 재미를 주는데 실패했고, 황당하게 스케일을 키우는 바람에 탈선한 기차가 날아올라 도시를 덮친다는 등, 아무리 만화라도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가득했던 탓입니다. 극장판이란 강박관념 때문이겠지요.

하지만 이 작품은 재미있더군요! 우선 설정이 돋보였어요. "명탐정 코난"의 핵심인 '몸은 작아졌어도 두뇌는 그대로!'를 활용한 '생장 인식 프로그램'은 하이바라가 납치당하는 상황의 설득력을 높여줄 뿐더러, 주인공들에게 또 위기가 닥칠지 모른다는 긴장감을 불어넣는 좋은 장치였습니다. 전세계 CCTV를 실시간 감시하고 언제든 데이터 확인이 가능한 '퍼시픽 부이'의 설정도 괜찮았고요. 검은 조직이 자신들이 기록된 영상을 조작하기 위해 퍼시픽 부이 시스템을 노린다는건 충분히 말이 되지요.
하이바라가 셰리일지 모른다 여긴 검은 조직이 하이바라를 납치하는 사건 중심의 스토리도 깔끔하며 액션도 좋았습니다. 검은 조직 요원 핑가와 란의 격투, 워커의 차를 쫓는 카체이스는 최근 보기 힘들었던 몰입감을 선사해 주었으니까요. 해상 시설물 퍼시픽 부이를 검은 조직의 잠수함이 공격하는 장면도 나쁘지 않았고요. 말도 안되게 스케일을 키웠다기보다는, 비교적 상식적인 수준으로 그려진 덕분입니다. (악의 조직이 잠수함까지 갖추고 있다는건 좀 그렇지만... '백팔용'인가?)
검은 조직의 레귤러에 아무로와 아카이, 경시청의 메구레 경부와 시라토리 등 괴도 키드와 하츠토리를 제외한 거의 모든 주요 인물들이 거의 등장하여 각자의 역할을 선보이는 것도 팬으로서는 감사했던 부분입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일단 추리적으로는 그닥이에요. 추리할만한 사건은 퍼시픽 부이에 잠입한 검은 조직 요원 핑가의 정체를 밝히는 것 뿐인데, 손동작이라는 단서는 제공해주지만 용의자가 워낙 적은 탓에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는 탓이지요.
핑가가 코난 일행을 상대하기에는 확연히 처지는 모습만 보여준 것도 - 란에게 발차기를 얻어맞고, 코난에게 도주 경로가 드러나 범행이 탄로나는 등 - 별로였습니다. 이렇게 약하다면 먼가 사연이라도 있어야 했는데, 진에 대한 쓸데없는 라이벌 의식만 불태우는 잔챙이로 보여 실망스러웠어요. 
검은 조직이 퍼시픽 부이를 파괴한 것도 다소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백도어 등으로 외부 조작이 가능했으니 그냥 놔 두는게 훨씬 유용했을텐데 말이지요. 하긴, 한 명이 잠입한 것만으로 동영상 데이터 조작과 백도어 삽입을 이렇게나 쉽게 할 수 있다면 또 다른 시스템을 장악하는게 더 나았을까요?
무엇보다도 베르무트가 직접 변장을 하여 조직이 '생장 인식 시스템'은 오류 투성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었는지 밝혀지지 않는건 답답했습니다. 그녀도 이 시스템이 활성화되면 정체가 탄로날 수 있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는데, 다음 이야기에서 밝혀지면 좋겠네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명탐정 코난" 팬 입장에서, 그리고 '하이바라 아이'의 팬으로서 두말할 나위 없이 재미있게 즐겼던 작품이에요. 일본에서의 대박 흥행은 물론이고 우리나라에서도 상당한 흥행을 거두었다는데,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2024/11/03

경제 시그널 - 경제브리핑 불편한 진실 : 별점 3점

경제 시그널 - 6점
경제브리핑 불편한 진실 지음/흐름출판

유튜브 채널 경제브리핑 불편한 진실에서 운영하는 경제 분석팀이 집필한 책입니다. 이 책은 현대 경제의 흐름을 이해하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10가지 핵심 신호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신호를 통해 독자가 경제 전반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개인의 경제적 판단과 투자를 보다 현명하게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각각의 신호는 금리, 인플레이션, 부동산 시장, 노동 시장 등의 요소를 다루며 각 장 별로 해당 신호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 신호가 나타나기까지의 배경과 이로 인한 경제적 영향은 무엇인지와 앞으로 예상되는 변화에 대한 통찰 등을 상세하게 설명해 줍니다. 

장점이라면 우선 복잡한 경제 개념을 대중적인 언어로 쉽게 풀어낸다는 점입니다. 현재의 경제 상황을 이해하고 미래의 변화를 읽어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도록 다양한 자료도 활용되고 있고요.
기존의 경제적 상식을 넘어 새로운 시각을 제공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예를 들어, 경제학의 기본 개념으로 알려진 '보이지 않는 손'의 문제점과 이를 바탕으로 한 작은 정부 이론의 부적절성을 비판하며 정부의 복지 확대가 필요하다는 주장, 인구 감소에 대한 주장이 대표적입니다. 인구 감소를 단순히 경제 악화의 원인으로 보기보다는, 오히려 과잉 인구밀도의 해소를 통해 긍정적인 효과를 얻을 수 있음을 강조하고 있거든요. 인구 감소에 대한 위기의식은 기업이 더 크게 느낀다는데 -소비 인구가 줄어들고, 인간의 가치가 올라가므로- 와 닿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부동산 시장에 대한 분석도 기억에 남습니다. 아파트 가격 상승은 내야 하는 돈 6종 세트와 보유하거나 팔 때 내야 하는 3종 세트를 따져볼 때 결코 순수한 이득이 아닐 수 있다는 지적, 그리고 1인 가구 증가에 따른 주거 형태 변화를 해외 사례를 통해 알려주는 부분인데 가까운 미래에 큰 변화가 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웨덴, 덴마크, 일본 등의 다양한 공동 주택 정책을 보니, 충분히 우리나라에도 먹힐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AI 도입 이후 변화할 직업 형태에 대한 이야기도 좋았어요. 단순 반복 업무가 사라지고 창의적이거나 의미 있는 일이 남을 것이라는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를 구체적인 예시와 함께 공감 능력이 중요한 직업들을 강조하면서 상세히 알려주는 덕분입니다. 미래 직업 선택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하는 유익한 정보라 할 수 있습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연구팀에 따르면 사라질 가능성이 거의 없는 직업 상위권을 보면 공통적으로 공감 능력이 필요하다고 합니다. 레크리에이션 지도사나 사회 복지사처럼요. 제 딸에게도 꼭 이야기해 주어야겠네요.

통계와 숫자를 이용한 오류에 대한 경고도 담고 있습니다. 2003년, 국내 언론이 “이혼율 세계 1위 눈앞”이라는 자극적인 제목으로 기사를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이는 해당 연도의 결혼 부부 수를 이혼 부부 수로 단순히 나눈 결과로서 누적 계산이 이루어지지 않은 잘못된 통계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짧은 치마의 유행과 주가의 관계를 주장하는 마브리 박사의 연구도 여러 해석의 오류를 드러내고요. 이러한 오류를 피하기 위해서는 수치와 인과관계에 대해 의심하고, 기준이 일치하는지 확인해야 한다는 걸 저자 중 한 명인 기자의 실수로 잘 알려줍니다. 어떤 수영 선수가 하루에 140.8킬로미터를 수영했다고 주장했지만, 간단한 계산을 통해 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드러났던 실수였습니다. 스마트폰 계산기만 사용해도 오류가 쉽게 밝혀질 수 있었지만, 이를 귀찮아하여 검증하지 않아서 오보를 냈던 것이지요. 이렇게 주의하지 않으면 잘못된 정보에 속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그 외, 새롭게 알게된 정보들도 많습니다. 몇가지 예를 들자면 우선 ‘폭스 팩터’는, 유명 대학 교수의 권위와 복잡한 숫자 앞에서 전문가들조차 쉽게 신뢰하게 되는 현상을 의미합니다. 이는 인간의 뇌가 복잡한 계산을 피하고 본능적으로 에너지를 절약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노후 대비 상품이 있지만 현실적으로 가장 든든한 금융상품은 국민연금이고 그 다음에 주택 연금이다, 각종 연금이 좋다는건 금융사의 홍보에 불과할 수 있다는 주장도요.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지요. 금융사가 복지 활동을 해 줄리가 없으니...
투자 방법에 대한 역사적 고찰도 해 주는데, 1926년부터 2015년까지 미국의 우량 주식 수익률은 배당금을 포함해 연평균 10퍼센트였다고 합니다. 90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안하면 굉장히 우수한 성적이지요. 같은 기간 미국 국채와 금은 연간 5퍼센트, 부동산은 4퍼센트, 정기 예금은 3퍼센트의 수익률을 거두는 데 그쳤고요. 게다가 주식의 경우, 매년 7퍼센트의 우수한 실질 수익률을 90년간 지속했습니다. 반면 안정적이라고 인식되는 국채와 금은 정기 예금 금리에 그쳤으며, 부동산과 현금자산은 가지고 있어봤자 큰 재미를 못봤습니다. 즉, 부자가 되려면 주식에 장기 투자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특정 계층, 특히 20~30대 청년들만을 주로 대상으로 한다는 점은 아쉽습니다. 저자가 담고 있는 정보와 조언들도 그 연령대에 맞춰져 있어, 다른 연령층의 독자들에게는 적합하지 않은 부분이 적지 않은 탓입니다. 이는 이 책이 팟캐스트에서 출발한 만큼, 주 청취자들의 관심사와 니즈에 맞춰 이야기를 전개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정과는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가 없지 않습니다. 대표적인게 부동산과 주식입니다. 저도 통계를 찾아본건 아니지만, 경험만 놓고 보아도 최근 10년간은 우리나라에서는 부동산 수익률이 주식을 압도했다고 할 수 있을겁니다. 우리나라 주식은 솔직히 믿을만한 시장이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기존 상식을 깨는 새로운 시각과 실용적인 정책 제안을 통해 독자들에게 다양한 통찰을 제공하지만, 특정 계층을 주로 겨냥한 내용은 아쉽습니다. 국내 현실에 맞지 않는 부분과 약간은 시대가 지나간 감도 있고, 무엇보다도 제목처럼 10개의 핵심 신호라는건 잘 와 닿지 않아서 조금 감점합니다.

2016/12/11

인류사를 가로지른 스마트한 발명들 50 - 알프리트 슈미츠 / 송소민 : 별점 2점

인류사를 가로지른 스마트한 발명들 50 - 4점
알프리트 슈미츠 지음, 송소민 옮김/서해문집

제목 그대로 저자가 선별한, 인류사에서 중요한 50개의 발명이 소개되고 있는 과학사 - 미시사 책입니다. 

이런 류의 특정 발명이나 아이템들을 소개하는 책은 그동안 몇 번 읽어보았는데, 비교해 볼 때 그렇게 새롭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몇몇 부분은 나쁘지 않았어요. 

첫 번째는 현재의 시점으로 앞으로의 방향을 언급하고 있다는 겁니다. 예를 들면 백열등이 LED로 바뀌고 있고, 자동차가 전기 자동차로 바뀌는 식입니다. 대체 에너지를 중요 발명으로 언급하는 등 최근 트렌드를 반영한 내용과 항목도 눈에 뜨이고요.
또 새롭거나 독특한 시각, 내용의 이야기도 제법 됩니다. 그 중 첫번째는 기계 베틀 항목에서 기계베틀, 즉 직조기가 발명된 후 기계 보조원으로 전락한 직조공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나름 전문직이었으나 하루 아침에 쓸모없는 단순 노동자로 전락하게 되자 1844년 폭동을 일으켰고, 결국 11명이 총살되고 24명이 부상을 입었다는데 현재의 AI의 발전 방향을 보면 이런 일이 조만간 여러 산업분야에서 벌어질 것으로 보여서 남일 같지가 않더군요. 제가 봐도 앞으로 10년 내 필요없어질 기술이 한두개가 아니니까요. 대표적인 것은 다들 아시다시피 우선은 운전일테고, 이후 여러 분야로 확산될텐데 저부터도 걱정이네요. 앞으로 뭘 먹고 살아야 할지...

두 번째는 섭씨와 화씨의 어원입니다. 섭씨는 온도 측정 눈금을 고안한 '셀시우스'의 이름을 딴 것이고 화씨는 '파렌하이트'의 이름을 딴 것이라는데 저는 처음 알았네요. '셀시우시'가 중국 발음으로 '섭이사'가 되었고 그래서 '섭씨'가 되었다는데 지금은 많이 쓰이지 않지만 '불란서', '화란'과 비슷한 방식이죠? 외래어의 유입과 적용은 참으로 재미난게 많은 것 같습니다.

세 번째는 컨베이어 벨트 기술 항목에서 소개된 프레드릭 윈슬로 테일러라는 인물 소개입니다. 이력을 보니 인간 공학의 시조와 같은 사람으로 이른바 '테일러리즘'을 만든 장본인인데 아직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죄송스럽기만 할 따름입니다. 제가 UX를 업으로 한지 10년이 훨씬 넘어가는데 공부가 너무 부족한 것 같아 반성이 되네요. '예전에는 인간이 첫 번째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미래에는 시스템이 첫 번째 위치에 있을 것이다.'라는 그의 말을 보면 정말로 이 바닥의 선구자적인 인물임에는 분명해 보입니다. 전공 분야 공부도 빼 놓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좋았던 부분은 이 정도에 불과합니다. 전체적인 단점을 상쇄하기에는 아쉬움이 더욱 많아요. 가장 큰 단점은 앞서 말씀드렸듯 뻔하다는 것에 더해 깊이 역시 부족하다는 것이지요. 이런 류의 책들 대부분이 그러하듯 몇 페이지 안에서 해당 발명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으로, 분량에 비해 잘 요약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해당 주제에 대한 시작점 정도에 불과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소개되는 주제별로 레벨이 너무 다르다는 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은 점입니다. 어떤 것은 특정 발명품 한 가지만을 다루는데 - '안경', '나침반', '지퍼', '백열등', '자동차' 등등 - 어떤 것은 그 분야 전체를 아울러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 '도구', '무기', '약', '악기' 등 - 이는 앞서 말씀드린 깊이 문제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데, 개인적으로는 발명품으로 주제를 좁히는게 그나마 적은 분량을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이었으리라 생각됩니다. '도구'는 그 자체가 발명이기에 언급되는게 이상할 뿐더러 무기, 약, 악기 등과 마찬가지로 몇 페이지로 요약될 이야기는 아닌 탓입니다. 무기 관련 책은 제가 소장하고 있는 책만 시대별, 분야별로 10권 가까이 될 정도니까요. 마찬가지로 '컴퓨터' 항목 안에 반도체와 인터넷 이야기까지 우겨 넣은 것은 말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최소한 인터넷은 분리했어야죠.

마지막으로 단점으로 꼽기는 좀 어렵습니다만, 개인적으로 인류사를 가로질렀다 하기 어려운 발명도 몇 개 속해있다는건 불만스럽습니다. 진공청소기가 우리 인류사에 그렇게 대단한 역할을 수행했을까요? 또 지퍼가 없었다면 세상이 굉장히 살기 불편해졌을까요? 이 발명으로 우리들 삶이 조금은 나아졌을지 모르겠지만 '인류사'라는 표제 하에 소개되기에는 너무 미미한 발명들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유사한 다른 책들과 비교했을때 이 책만 특별히 좋아보이는 부분은 거의 없습니다. 여러모로 추천드리기는 좀 어렵네요.

마지막으로 이 책에 소개된 50개의 항목을 레벨을 맞추어 상세하게 분류하고 재정의하여 저만의 인류사 대표 발명을 꼽아봅니다.

불, 바퀴, 말과 글, 수학과 수체계, 배와 보트, 유리, 돈, 렌즈, 나침반, 인쇄술, 천문학, 달력, 전기, 증기기관, 항공, 철도, 화약, 전신과 전화, 백열등, 자동차, 사진, 냉장기술, 합성수지, 컨베이어벨트 기술, 라디오와 텔레비전, 페니실린, 핵에너지, 컴퓨터와 반도체, 인터넷, 피임, 인공지능, 로켓.

빠진 것은 도구, 화장실, 도자기, 기계 베틀, 온도계, 통조림, 자전거, 진공청소기, 음반과 CD, 취사 조리기, 영화와 영화관, X-레이, 지퍼, 악기, 세탁기, 레이저, 대체에너지, 위성 네비게이션입니다. 무기는 화약으로, 약은 페니실린으로, 컴퓨터는 컴퓨터와 인터넷으로 분리하였으며 로봇은 인공지능으로 바꾸었고요. 화장실과 도자기, 온도계, 취사조리기는 추가의 여지가 있겠습니다만...

2025/09/13

속임수의 섬 - 히가시가와 도쿠야 / 김은모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사야카는 출판 재벌 사이도우지 가문 유언 집행을 위해 가문의 별장이 있는 비탈섬으로 향했다. 유언 집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사촌 쓰루오카, 그리고 쓰루오카를 찾아 데려온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와 함께였다. 그런데 가문 일족에게 유언장 내용을 공개한 다음날, 쓰루오카는 전신이 골절되어 살해당했다. 태풍으로 경찰이 출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카오와 사야카는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데...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장편입니다. 작가의 작품 중 가장 길다고 하네요.

특징이라면 고전 본격 추리물의 전형적인 요소를 충실히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태풍으로 고립된 외딴섬 ‘비탈섬’, 기묘한 외형과 구조를 가진 별장 ‘화강장’, 그곳에 모인 출판 재벌 사이도우지 가문 일가, 그리고 명탐정의 등장까지 모두 고전 추리물 애호가에게 익숙한 클로즈드 써클 설정 그 자체입니다. 

설정뿐 아니라 제시된 수수께끼도 본격적입니다. 23년 전 낚시 중 물속에서 사람이 뱃전 위로 튀어 올랐던 괴이한 사건과 그때 목격된 ‘용’의 정체, 최근 벌어진 쓰루오카 전신 골절 살인 사건, 중정에 나타난 오두막과 빨간 도깨비, 전망대에서 사람이 사라진 수수께끼, 그리고 기묘한 화강장의 구조 등 여러 의문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수수께끼는 결국 하나의 결말로 이어지고요.

그 중에서도 화강장의 구조가 ‘책을 읽는 사람’을 본떠 설계되었고, 그 구조가 핵심 트릭이라는 진상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책의 위치가 중정이며, 그곳에 숨겨진 거대한 팝업북이 흉기였다는 사실을 다카오 등이 구조를 파악하며 밝혀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덕분입니다. 현재 전망대 창은 ‘두뇌’ 역할을 하는 서재 앞에 있어 얼굴의 ‘이마’에 해당하는데, 그렇다면 그 아래에는 ‘눈’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을 것이라는 추리도 설득력있었고요. 사야카의 눈을 피해 전망대에서 사라진 사람은 바로 이 공간으로 이동했던 것입니다(AI로 그려본 아래 이미지 참고하세요).

23년 전 사건에 대해 가문 사람들이 침묵했던 이유도 잘 설명됩니다. 사이도우지 도시로가 살해된 뒤 범인이 절벽 끝에서 사라지고, 게이스케의 익사체가 밀려왔으니, 일족은 ‘게이스케가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투신 자살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드러난 진상과 트릭은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23년 전 사건의 실제 경위는 이렇습니다. 쓰루오카가 도시로를 살해한 뒤 절벽에서 로프를 매고 뛰어내렸고, 이를 막으려던 게이스케가 함께 추락했습니다. 쓰루오카는 캐러비너로 로프를 고정해 무사히 착지했지만, 게이스케는 로프 반동으로 낚시배 위로 튀어 오른 것입니다. 당시 목격된 ‘용’은 잘려진 로프였고요. 그러나 목숨을 걸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는 설정은 한 마디로 무리입니다. 안전하게 로프를 타고 내려가도 충분했을 텐데 굳이 도박에 가까운 방법을 택할 까닭이 없으니까요. 쓰루오카가 별장을 통해 되돌아오기 위해 이용한 동굴 통로를 일족이 전혀 몰랐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고, 쓰루오카가 그 통로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당시 배에 함께 있던 학생 히로시가 기억을 잃자 그를 게이스케의 대역으로 삼아 23년간 속여왔다는 설정 역시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최근 사건의 흉기는 앞서 언급한 대로 중정에 설치된 거대한 팝업북 장치입니다. 사이도우지 출판사의 첫 동화책을 재현한 이 구조물은 전망대의 책과 연동되어 작동했고, 게이스케는 이 장치를 이용해 쓰루오카를 중정으로 유인해 압사시켰습니다. 피투성이 쓰루오카의 시신이 오두막 모양 팝업에 걸려 올라오자, 이를 미사키가 ‘빨간 도깨비’로 착각했던게 진상이고요. 그러나 이 팝업북 트릭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입니다. 이 정도 크기와 무게의 장치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설명이 없고, 그렇게 거대한 구조물이 움직이는데 아무도 소음을 듣지 못했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다른 일족들이 이처럼 거대하고 값비싼 구조물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것 역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야기의 전개 역시 장황하고 불필요한 부분이 많습니다. 고전 본격물처럼 ‘일족’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사건에 관여하는 인물은 피해자 쓰루오카와 범인 게이스케 뿐입니다. 다른 등장 인물들, 특히 도라쿠 스님은 등장하지 않는 편이 나았습니다. 작가 특유의 유머를 곳곳에 섞은 문체도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이어지는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웃음도 유발하지 못합니다. 읽는 내내 고통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 역시 시덥잖은 유머만 남발하는 가벼운 남자로 그려져 도무지 명탐정으로는 보이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고전 추리물의 외형은 갖추었지만, 트릭과 이야기의 완성도가 턱없이 부족한 졸작입니다. 심지어 길기까지 하니 추천하기 어렵네요. 이 작가 작품도 더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2020/03/06

식스웨이크 - 무르 래퍼티 / 신해경 : 별점 2.5점

식스웨이크 - 6점
무르 래퍼티 지음, 신해경 옮김/아작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기 2493년, 4백 년 항해 예정의 항성 간 이민 우주선 승무원인 마리아 아레나는 마른 피로 얼룩진 클론 재생 탱크에서 깨어난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한 기억이 없다. 이런 상황은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곧 마리아는 새로 깨어난 클론이 자기뿐만 아니라 여섯 명 승무원 전원임을 깨닫게 되고, 클론 재생실에는 칼에 찔려 죽은 승무원들이 둥둥 떠다니고 있다. 외로운 밀실 우주선에서는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가. 게다가 모든 승무원이 죽었다면 살인자는 누구란 말인가….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책 소갯글에 혹해서 읽게 된 SF 미스터리 장편입니다. 우주선에 탑승한 여섯 명의 승무원이 서로 죽고 죽여서 전멸한 뒤, 사건 당시의 기억을 잃어버린 채 클론으로 재생된다는 설정이 아주 매력적이라 읽게 되었습니다. 누가 살인자인지, 동기가 무엇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상황이 이보다 더 잘 맞아 떨어질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러나 기대와는 많이 달랐습니다. 사건에 대한 추리적인 내용보다는, SF 소설로서의 비중이 훨씬 높거든요. 물론 나쁜건 아니에요. 아니, 오히려 SF 적인 부분은 아주 좋습니다. 무엇보다도 클론에 대한 세세한 설정이 아주 돋보입니다. 이 세계의 클론은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거쳐 철저한 법률에 근거하여 관리되고 있다는 것이 탄탄한 묘사를 통해 설득력있게 설명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클론의 존재에 대해 거대한 다툼과 많은 죽음이 발생한 후 이를 허용하는 법안이 통과됩니다. 이를 통해 복수의 클론은 금지되며, 복수의 클론이 적발될 경우 가장 나중에 복제된 클론 외에는 모두 폐기한다, 마인드맵을 저장한 뒤 클론에 그대로 이식하여 기억을 이어나갈 수 있지만 마인드맵을 수정하는 마인드해킹 행위는 엄금한다, 그리고 클론은 생식능력을 제거하며 재산은 그 자신에게 상속된다는 등의 세세한 법안이 제정됩니다.
이는 단지 설정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클론에 대한 설정은 승무원들의 과거와 직, 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을 뿐 아니라, 우주선 내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의 동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클론을 증오하는 엔지니어 폴이 모두를 살해한게 진상이니까요. 

또 이 사실이 밝혀지는 승무원들의 과거 이야기도 아주 흥미롭습니다. 특히 클론에게 영혼이 없다고 주장하던 오르만 신부가 반대파에게 납치된 후 클론으로 재생되었다는 이야기는 이 작품 속 등장인물의 과거 에피소드로만 놓기 아깝다 싶을 정도였습니다. 과연 클론에게 영혼이 있을까? 부터가 흥미로울 뿐 아니라, 해커들이 마인드맵을 해킹하여 대상자의 성격을 비롯하여 모든걸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건, 영혼이 숫자로 치환되어 프로그래밍할 수 있다는 이야기와 다를게 없어서 아주 인상적이었어요.
클론에게 가족을 잃었다고 생각하여 복수심을 불태우는 엔지니어 폴이 복수를 완성한 뒤, 정작 그 자신이 클론으로 복제되어 재생되었다는 이야기도 아주 괜찮았어요.

이외에도 현재 시점에서 아직 선장은 죽지 않고 혼수상태로 발견되었기 때문에, 새로 만들어진 클론이 이전 선장을 폐기해야만 하는 딜레마, AI 이안은알고보니 원래 인간이었는데 마리야가 마인드맵을 해킹하여 만들어낸 인공지능으로 약간의 조작을 통해 다시 인간으로 클론 복제할 수 있었다라는 반전 등 재미난 디테일이 많습니다. 클론 복제를 음식을 만들어내는 음식 인쇄기를 통해 진행한다는 결말도 복선을 통해 잘 설명되고 있고요.
주인공들이 탄 우주선 도르미레 호의 설정도 그럴듯합니다. 도르미래호는 아르테미스라는 머나먼 별로 떠난 일종의 이민선입니다. 여섯명의 승무원들은 수천명의 냉동 클론을 무사히 아르테미스까지 운송하는 대신, 그들이 지은 중죄를 사면받는 조건으로 승선한 범죄자들이죠. 이렇게 범죄자들이 사면을 조건으로 거대 계획에 종사한다는 이야기는 굉장히 오래된 이야기이긴 하나, 이를 SF로 변주한 아이디어는 좋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린대로 추리적으로는 그다지 정교하지 못합니다. 사건의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는, 지구의 실력자 샐리 미뇽이 거대 이민선을 비롯하여 승무원들, 심지어 인공 두뇌까지 관계자들을 투입한 이유부터가 제대로 설명되고 있지 않거든요 '복수' 때문이라고 설명되기는 하는데, 샐리 미뇽은 워낙에 실력자라서 구태여 이런 식으로 복수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종의 악취미로 단지 승무원들이 서로 미워하고 싸우고, 붕괴하기를 바랬을 수는 있겠지만, 그들 사이에서 사건이 일어나는데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으니 그리 효율적이라고 볼 수는 없고요.
아울러 협박과 고문 탓이지만 마리아가 볼프강, 히로를 해킹하여 엉망으로 만든건 사실입니다. 이는 충분히 살해 동기가 될 수 있어요. 그래서 볼프강과 히로가 마리아에게 살의를 품는건 말이 됩니다. 그러나 마리아를 원수로 알고 있는 폴이 마리아 외 다른 사람들도 모두 죽인다는 진상은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클론이라서 다 죽일거였다면 20년 동안 참을 이유도 없고요. 게다가 폴은 볼프강에게 대적할 수 없는 체형과 체력의 소유자라는게 이미 설명되기도 했거든요.
그 외에도 어차피 죽일거라면 마리아만 왜 독미나리로 중독시켰는지, 히로는 대체 왜 자살했는지도 그렇게 납득이 가게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중 인격이 된 히로가 폭주하는 이유도 마찬가지고요. 결론적으로 처음에 여섯 명 모두가 죽게된건 단지 우연이었을 뿐이며, 그들이 클론으로 되살아난 것 역시 즉사하지 않은 마리아가 재생 버튼을 눌렀을 뿐이라는 작위적인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마리아가 펼치는 추리쇼 형태 느낌의 마지막 클라이막스도 딱히 단서가 탄탄하게 뒷받침된게 아니라 여러모로 아쉬웠습니다. 복선을 좀 더 치밀하게 짜 두었더라면 좋았을텐데 말이죠. 폴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너무 작아서 공정하게 단서를 얻는것 자체가 힘들었던 것도 나쁜 추리물의 전형이고요. 이야기에 거의 등장하지도 않는 사람이 알고보니 범인! 이라니, 이건 좀 너무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흥미로운 도입부와 여러가지 설정 덕분에 몰입해서 읽을 수는 있지만, 추리적으로는 약간은 용두사미 느낌이라 아쉬웠습니다. SF로는 완벽하나 추리적으로는 더 탄탄한 구성이 필요했습니다. 그래도 재미만큼은 확실하니, 이런 류의 장르 문학을 좋아하시는 분들께서는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25/10/10

밀실 황금 시대의 살인 (눈의 저택과 여섯 개의 트릭) - 가모사키 단로 / 김예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밀실 황금 시대의 살인"은 제목과 '여섯 개의 트릭'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여섯 개의 밀실 수수께끼를 전면에 내세운 장편입니다. 수수께끼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설백관 밀실사건(간자키 살인 재현)
— 수수께끼: 잠긴 방문, 유일한 열쇠는 시체 옆 닫힌 플라스틱 뚜껑 달린 병 안에 있었고 창문은 열려 있으나 촘촘한 창살 때문에 방 안으로 병을 던져 넣을 수 없었다. 
— 해답: 고무줄-추-식칼을 연동한 장치 트릭. 고무줄을 병 뚜껑 고리에 꿴 뒤 방 안에서 창살을 통과시켜 투입 → 추를 창밖 고무줄 끝에 달아 장력 형성 → 사체에 꽂힌 식칼 주위를 통과하도록 병을 잡아 당겨 문을 나선다 → 문을 잠근 뒤 열쇠를 병에 넣고 병을 문 아래 카펫 속에 은닉 → 강제 개방하면 장력으로 병이 실내로 튕기고, 식칼에 의해 고무줄은 절단된다. 추에 의해 고무줄은 창밖으로 떨어진다.

시하이 씨 식당 살인
— 수수께끼: 사망 추정 시각에 누구도 식당동 출입 없음. 피해자는 모조 핼버드에 반복 찔림.
— 해답: 리모컨 슬라이드 식기장을 이용했다. 식기장이 비밀 통로의 숨은 출입구 겸 레일 구조 → 핼버드를 고정한 채, 외부에서 리모컨으로 식기장을 왕복 이동시켜 살해 → 핼버드는 액체 질소로 고정되어 시간이 지나자 녹아 떨어졌다.

사구리오카 방 내 사망
— 수수께끼: 내부 잠금 상태에서, 피해자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죽었다.
— 해답: 시한 폭발 탄환 장치에 의한 것. 침대 밑에 놓였던 장치를 발견한 피해자가 장치 확인을 위해 수면등 아래로 옮기다가 폭발해 사망했다.

마네이 도미노 밀실 사건
— 수수께끼: 피해자 주변을 감싼 채 문까지 잇는 도미노 띠가 놓여 있었고, 문은 잠김. 열쇠는 시체 옆에 놓여 있었다.
— 해답: 액체질소 얼음 고정틀 + 데드볼트 임시 고정을 사용. 문에 얼음틀로 고정한 도미노를 붙임  → 데드볼트 일부를 잘라냄  → 도어 레버를 소폭만 돌린 상태에서 얼음으로 고정 → 문을 닫으면 도미노 얼음틀은 시체 주위와 문을 잇게 됨  → 도어 레버 얼음이 녹으면 도어락 자동 잠김  → 얼음틀 소멸로 도미노만 남음.

야시로 씨 도서실 밀실 사건
— 수수께끼: 문 잠김, 도서실의 유일한 열쇠인 동쪽 동 마스터 키는 시체 옆 꽉 닫힌 잼병 안에서 발견됨, 문 내부 레버엔 가샤폰 돔 커버가 덮여 있었음.
— 해답: 문짝 바꿔치기. 시신을 도서실로 옮김  → 마스터 키를 잼병에 넣고 시체 옆에 놓음  →  자신의 방 문짝과 도서실 문짝을 교환 → 안쪽 레버에 가샤폰 돔 커버 설치  → 문을 닫고 나가서 자기 방 열쇠로 문을 잠금.

미쓰무라의 과거 완전 밀실
— 수수께끼: 완전하게 잠긴 방문과 고정식 창으로 완전 밀폐된 현장, 스페어 키 없는 유일한 방 열쇠는 시체 옆 서랍 속(서랍은 시체 주머니 열쇠로 잠김).
— 해답: 문짝 바꿔치기 + 다른 방 스페어 키를 이용. 현장 외 다른 방에는 스페어 키가 있었음. 범행 후 현장과 다른 방의 문짝 교환 → 다른 방 열쇠를 현장에 남기고 스페어 키로 외부에서 잠금 것.


이렇게 여섯 개의 사건과 트릭이 펼쳐지는데, 이 중 고전적인 장치형 트릭의 맛을 잘 살린 몇몇 사건들은 볼 만 합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첫 번째 설백관 밀실사건과 다섯 번째 야시로 씨 도서실 사건이었습니다. 설백관 사건은 고전적인 장치형 트릭을 현대적으로 변형한 사례로, 사용된 도구는 물론 현장 상황까지가 모두 실제로 범행에 필요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습니다. 특히 녹음기나 불 꺼진 방 같은 설정이 단순한 분위기 조성이 아닌 트릭의 일부라는 것도 대단했어요. 비교적 간단한 장치로 복잡하지 않으면서 정교한 느낌을 주며, 독자가 충분히 추리 가능하도록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고요.

도서실 사건 트릭은 정말 완성도가 높습니다. 무엇보다도 범인의 방 문짝과 도서실 문짝을 교체하는 트릭은 앞서 구즈시로의 대사를 통해 힌트를 제공함으로써 독자에게도 충분히 추리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단서 제공 역시 철저하게 이루어지며, 도서실만이 마스터 키로만 열 수 있다는 설정도 좋았습니다. 같은 방식을 사용하더라도 현장이 다른 방이었다면 문 안에 두 개의 열쇠(마스터 키, 방 열쇠)를 남기게 되고, 그 때 방 열쇠로 문을 열 수 없게 되니까요.

하지만 여섯 개의 트릭 모두 완성도 높게 제공하는 건 어려웠던 듯 합니다. 특히 시하이 씨 사건의 핼버드 트릭과 사구리오카 사건은 유치하고 황당한 수준이었어요. 사구리오카 사건에서 탄환을 발사한 시한 장치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액체질소를 만능 도구처럼 쓴 트릭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게 마네이 사건의 도미노 트릭입니다. 너무 억지스러워서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도미노 설치를 위한 얼음판을 만들려면, AI의 확인 결과 약 7.3리터의 물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이 정도의 얼음이 녹아 흐른다면 흔적이 남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닥재가 물이 스며드는 소재였다는 정도로 대충 넘어가는건 무리에요. 몰래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테고요. 데드볼트 잠금만으로도 충분히 효과적으로 밀실을 만들 수 있어서 도미노까지 이용한 이중 밀실을 구현할 이유도 없습니다.

미쓰무라 과거 사건에서 사건 현장 외 다른 방의 열쇠는 스페어가 있었다는 중요한 정보를 서술 트릭처럼 숨긴건 반칙처럼 느껴집니다. 이런걸 경찰이 알아채지 못했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밀실 트릭 외의 추리적인 부분도 한심한 수준입니다. 트릭을 풀어낸 뒤, 이걸 저지를 수 있는건 ooo뿐이야!는건 워낙에 용의자가 적은 탓에 별다른 감흥이 없고, 동기도 설득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꽤나 장황하게 설명하는 트럼프 연쇄 살인과 ‘녹스의 십계’, 그리고 단순한 십계 설정은 억지스럽기 짝이 없고요. 이를 통해 어떻게든 살인의 타당성을 보여주려 애쓰지만, 희생자들이 죽을 만큼 잘못한 것도 아니고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단서도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결과에 과정을 꿰어 맞추는 느낌이라서 거슬리기만 했습니다. 

설정의 완성도는 더 문제입니다. 밀실을 풀 수 없으면 무죄 판결을 받는다는 핵심 세계관 설정부터가 성립하기 힘든 탓입니다. 마스터 키나 스페어 키가 존재하지 않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설명도 없으며, 21세기에 열쇠 복제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작품의 세계관에 동의할 수 없으니, 재미를 느끼고 몰입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주요 인물들 역시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입니다. 완벽한 밀실 살인으로 무죄를 받은 미소녀 미쓰무라 시쓰리, 아이돌이자 밀실 제조사로 범행을 저지르는 리리아, 살인 현장을 숭배한다는 종교단체 ‘새벽의 탑’과 17세 소녀 주교 펜릴 앨리스해저드 등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이들의 언행은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는 수준입니다. '빙해' 어쩌구하는 대사는 제가 다 창피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한없이 1.5점에 가까운 2점입니다. 몇몇 밀실 트릭은 고전 본격물의 정수를 잘 살려 볼 만합니다. 하지만 억지 설정과 조악한 추리 요소, 몰입을 방해하는 세계관과 캐릭터는 치명적인 탓에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솔직히 이 리뷰를 쓰는데 걸린 시간이 아까울 정도의 망작이에요. 밀실 트릭물의 광팬이 아니라면 추천하지 않습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대상작이라는데, 이 정도까지 수준이 떨어졌는지 몰랐네요.

2023/05/20

일곱 바다를 비추는 별 - 나나카와 카난 / 박춘상 : 별점 2점

일곱 바다를 비추는 별 - 4점
나나카와 카난 지음, 박춘상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키타자와 하루나는 아동 복지법에 근거해 설립된 아동양호시설 나나미 학원에서 일하는 2년차 신참 보육사이다. 또한 그녀는 자신이 알게 된 학원생들의 이런저런 수수께끼나 비밀을 아동상담소 상담사 카이오, 친구 카논 등의 도움으로 풀어내고, 어떻게든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도록 해결책을 내 놓는 해결사이기도 하다.

아동 양호 시설을 무대로 이런저런 소소한 사건들을 해결해 나가는 일상계 추리물. 이런 작품이 있는줄도 몰랐는데, 알고보니 아유카와 데츠야 상 수상작이라서 놀랐네요. 트릭의 기발함에 점수를 많이 주는 상이라고 생각해 왔었는데, 이 작품의 트릭은 그리 대단한건 없거든요. 그러고보면 2회 수상작인 가노 도모코의 <<일곱 가지 이야기>>도 이 작품과 유사한, 전형적인 소소한 일상계이기는 했지요. 고정관념이라는게 무섭네요. 반성해야겠습니다.
생각해왔던 아유카와 데츠야 상 수상작답다운 측면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단순한 일상 속 사건들이 이어지다가, 마지막 이야기에서 앞서의 이야기 모두를 아우르는 진상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 진상을 위한 소소한 단서의 삽입도 적절하고요.

하지만 솔직히 재미는 없었어요. 사건이 너무 소소하고, 등장인물들도 그다지 인상적이지 못했던 탓입니다. 읽으면서 지루하다는 느낌을 계속 받았어요.
추리적으로도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거의 없습니다. 오히려 별 것도 아닌 상황을 억지로 수수께끼처럼 만든게 많습니다. 이를 풀어내기 위한 단서도 공정하다고 보기 어렵고요. 특히 아동 복지법이라던가, 아동 양호 시설에 대해 잘 알지 못하면 풀 수 없는 사건은 공정 여부를 떠나서 반칙처럼 느껴지더군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구태여 찾아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에서 소개해드립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 1화 지금은 사라져버린 별빛도
중학생인 학원생 요코는 학원의 규칙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 말썽꾸러기였다. 어느날 별을 보면서 요코는 하루나에게 한 가지 비밀을 털어놓는다. 예전 자신을 지켜줬던 거칠었던 학원생 레이야가 나쁜 원생들을 수감하는 교호원으로 옮기자마자 죽었는데, 죽은 뒤 괴롭힘을 당하고 있던 자기를 찾아와서 도와주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상담사 카이오는 요코가 본 레이야는 유령이 아니었다는걸 밝혀냈다. 레이나는 원래 몸이 약해서 요양 시설로 옮겨진 뒤 사망했는데, 공식적으로 옮겨진 날짜보다 뒤에 옮겨갔고, 그래서 죽기 전 요코를 우연히 찾아왔던게 진상이었다.

레이야가 이동한 날짜가 서류상 날짜보다는 뒤였을거라는 추리는 괜찮았어요. 입소 아동에 대한 행정 절차가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등, 이런 시설에 대한 꼼꼼한 자료 조사도 돋보였고요.
문제는 이런 정보를 알지 못하는 일반 독자는 추리하기 힘든 이야기라는 점, 그리고 레이야가 원래 몸이 약했다는걸 추리하기는 힘들다는 점입니다. 몇몇 단서를 배치하고 있기는 하지만 창백한 얼굴을 감추기 위해 과한 화장을 했다던가, 몸이 약한 탓에 '선수필승' 공격법을 익혔다는 등 억지와 비약이 대부분입니다. 곧 죽을 정도로 몸이 약한 아이가 선빵을 날린다고 여러 명을 대적한다는건 납득하기 힘들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이야기의 무대와 등장인물, 각종 설정에 대한 소개와 함께하는 연작 단편집의 도입부로는 나쁘지 않습니다만, 추리적으로는 딱히 언급할 부분이 없기에 감점합니다.

제 2화 절대 반지
어머니의 학대 탓에 호적도 없이 가출하여 홀로 지내던 아사다 유키는 경찰을 통해 나나미 학원에서 생활하게 된 소녀로 고등학교 졸업과 시설 퇴소를 앞두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진로로 잡은 전문 학원은 입학에 거액이 필요했다. 학원 관계자들이 난처해하자 유키는 자신이 모았다는 거금이 들은 통장을 보여주었다.
하루나는 거액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다가 카이오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카이오는 유키와 과거 이야기를 조금 나눈 뒤 진상을 알려주었다. 유키의 정체는 '산소 미스즈', 유키가 신분을 사칭했다는 부잣집 아이였고 돈은 산소 가로부터 받은 것이었다....

아빠에게 성폭행을 당해서 가출했던 산소 미스즈와 우연히 폐가에서 만난 학대아동 유키가 의기투합하여 서로 신분을 바꾸어 살아 왔다는 내용입니다. 수록작 중 스케일 면에서는 가장 큰 편인데, 나름대로 설득력은 있습니다. 유키의 과거에 대한 추억담 - 주말에도 학교에 나가려고 했다는 등 - 과 몇몇 사소한 단서들 - 에리히 캐스트너의 대표작으로 <<쌍둥이 로테>>를 언급하지 않은 등 - 을 통해 추리해가는 카이오의 추리도 상당히 볼 만 하고요.

하지만 산소 미스즈가 된 유키가 아빠와 연인?이 되었다는 듯한 결말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돈이 목적인지, 복수가 목적인지도 모르겠고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더 있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네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 3화 피 맺힌 단자쿠
사라와 켄토에게는 주말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는 다정한 아빠가 있었다. 아빠는 아이 씨와 재혼을 앞두고 있었는데, 어느날 사라는 아빠가 '난 사라가 싫어'라고 말하는 전화 통화를 듣고 실의에 빠졌다.
하루나의 친구 카논은 이야기를 듣고, 사라와 켄토의 아빠는 외국인이며, 그가 전화로 말했던건 I hate가 아니라 Ai hates라는걸 추리해 내었다.

사라의 영어 실력이라던가, 그 외 디테일을 통해 그녀가 외국계이며 아빠가 외국인이라는걸 추리해 낸다는 점에서 일종의 서술 트릭물입니다. 
그러나 아빠와 사라 남매를 항상 보아왔던 하루나에게는 서술 트릭일 수 없고, 그 결과 하루나의 추리 실력이 상대적으로 별로라는 것만 두드러집니다. 애초에 하루나가 카논에게 사건 이야기를 해 줄 때 사라의 가장 큰 특징인 혼혈아라는 사실을 이야기하지 않은 이유도 잘 모르겠고요.
전형적인 일상계로서는 나쁘지 않습니다만, 딱히 눈에 뜨이는 점도 없었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제 4화 여름캠프
결혼을 앞둔 학원 졸업생 토시키와 미카가 하루나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12년 전 토시키의 추억이 꺼내어졌다. 토시키가 초등학교 5학년일 때 학원 여름캠프에서 만났던 환상의 소녀에 대한 이야기였다. 함께 여름캠프를 보낸 소녀 나오는 캠프에 찾아온 어른을 피해 비상계단을 올라간 뒤 사라져버리고 말았었다. 그리고 선생님들도 그런 소녀는 없었다고 토시키에게 말했었다.
하지만 하루나는 그 아이는 '소년' 이었고, 함께 여름캠프를 진행했던 지쓰세이 학원 생도였을 거라고 추리했다. 나오는 비상계단을 올라간 뒤 개천으로 뛰어들었고, 개천에서 놀고 있던 지쓰세이 학원 생도들 사이로 숨어들었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 토시키가 찾던 '나나미 학원 생도인 여자아이'는 사라져 버리고 말았으며, 나나미 학원 선생님들이 나오를 몰랐던 이유도 마찬가지였던 것이었다.


초등학교 남자아이, 여자아이의 애틋하면서도 정감어린 추억담은 항상 기본 이상은 뽑아주는 소재지요. 마지막 추격전도 긴박감이 넘쳐서 여러모로 볼거리는 많았던 이야기입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오가 남자아이였을거라는 추리는 일반 독자도 떠올릴 수 있을 정도로 잘 짜여져 있고요. 단서가 많지 않고, 어떤건 다소 억지스럽기는 하지만요.

하지만 나나미 학원과 지쓰세이 학원의 관계라던가, 임시보호위탁 등의 권한은 전문가가 아니면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아주 공정하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제 5화 뒤뜰
나나미 학원 뒤뜰에는 열리지 않는 문이 있다. 문에는 2미터 정도 되는 높이에 자물쇠가 달려 있어서 보통 사람은 열 수 없는데, 이 문을 드나드는 '우키히메'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실제로 아키 등 몇몇 생도는 흰 손이 두둥실 떠올라 자물쇠를 여는걸 보았다고 말했다.
한편 나나미 학원 생도 아키라와 동급생 미즈에의 교제 문제로 예정되었던 운동회 등이 취소되자 원생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자치연합회 임원인 카나코가 나서서 상황이 정리되었지만 아키라와 미즈에는 헤어지게 되었다.
카이오는 이 모든게 아키라의 '배려' 때문에 벌어진 소동이었다고 추리했다. 실제로 교제를 했던건 카나코와 스기야마였고, 둘의 교제가 문제가 될거라 우려했던 아키라가 이성 교제를 하는 척 했었던 것이었다. 두둥실 떠오른 손은, 뒷문으로 몰래 들어가도록 시기야마가 카나코를 안아서 들어 올렸던게 진상이었다.


학원에서의 이성 교제가 핵심 소재인 일상계 청춘 학원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재답게 추리적으로 특기할만한 점은 별로 없어요. 흰 손이 두둥실 떠올랐다는건 대단한 추리가 필요한하지 않습니다. 발판이 없었다 해도, 두 명이상이면 어떻게든 가능한 상황을 만들 수 있었다는건 누구나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또한 카나코와 스기야마의 교제는 독자에게 아무런 단서를 주고 있지 못합니다. 추리의 여지가 전혀 없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그냥저냥한 평작이었습니다.

제 6화 암흑의 천사
나나미 학원생들이 임시로 통학할 때 이용하는 터널은 여자아이 6명이 지나가면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있었다. 15년전, 6명이서 지나가다가 유령 목소리를 들었던 원생도 있었다.
얼마 뒤 초등학생 마이가 터널에서 천사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주장했고, 여러 아이들이 엮인 소동으로 번졌다. 실제로 천사 목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누구도 여자가 터널안에서 나오는걸 보지 못했던 채였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보니, 목소리의 주인공은 트렌스젠더 
터널 감시원이었다....

15년 전 유령의 목소리는 터널 안으로 연결된 배관을 통해 목소리를 보낸 장난이었고, 지금의 천사 목소리는 트랜스젠더 터널 경비원의 목소리였다는 이야기. 경비원은 외모는 남자여서 오해가 생겼던 것이지요. 동일한 사건에 두 가지 트릭을 사용하고 있으며, 트릭이 합리적이라는건 좋았습니다. 

그러나 15년전 사건에 비해 현재의 사건은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경비원이 평상시에 목소리를 위장할 필요가 있었는지 의문이거든요. 진실을 그 자리에서 밝히지 않은 이유도 설명이 필요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제 7화 일곱 바다를 비추는 별
하루나는 과거 카논이 했던 여러가지 거짓말을 추궁했다. 그러자 카논은 고의는 아니었다며 자신이 사실은 <<여름캠프>> 때의 환상의 소녀 고마츠카와 나오였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알고보니 그녀는 앞서 모든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 1화에서 유키가 보았던 또다른 레이야는 카논이었고, 2화에서 유키가 살던 폐가에서 그 전에 살던 소녀도 카논이었고, 3화에서 단자쿠에 살해될 것 같다는 메시지를 적었던 것도 카논이었고, 5화에서 학원 뒷문으로 들어왔던 소녀도 카논, 6화에서 15년 전 배관을 통해 장난을 쳤던 소녀도 카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왜 도망쳤어야 했는지 아픈 과거를 하루나에게 털어 놓았다. 양아버지의 성폭행 등 학대 탓이었다.


연작 단편집의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작품. 앞서 있었던 이야기들 속 풀리지 않았던 수수께끼를 마지막에 정리해 주는 구성입니다. 앞서 작품들 모두가 한 명의 인물 - 카논 - 과 관련되어 있다는걸 설득력있게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았고요. 등장하는 회문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문제는 가장 중요한 단서가 나오 - 카논 - 의 특기인 '회문' - 거꾸로 읽어도 똑같이 읽는 말 - 이라서 한국 독자는 풀어낼 수가 없다는 점입니다. '나오의 본명은 '오아나 나오' 이고, 카논은 '노나카 카논', 둘 다 거꾸로 읽어도 똑같으며, 그래서 둘은 동일인물이다'는게 핵심인데, 번역에서는 '오아나'가 아니라 '코아나'로 소개하고 있어서 한국 독자로서는 도무지 알아낼 수가 없어요.

별점은 2점. 이 작품 한 편만으로는 가치가 없고, 앞 부분 이야기들을 읽어야만 완성된다는 점에서 하나의 독립된 이야기로 보기는 힘들어 감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