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리스가와 아리스 데뷰 35주년을 기념하여, 젊은 작가 일곱 명이 '아리스가와 세계관'으로 발표한 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세계관이지만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가 가장 많습니다. 또 다른 대표 시리즈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명탐정 에가미 지로 등장 작품은 한 편 밖에 없고요. 행각승 지장 스님 시리즈도 한 편 있을 정도인데 말이지요.
하여튼, 꽤 신선한 기획인데 작품들 수준도 괜찮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젊은 작가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덕분입니다. 대부분 아리스가와 월드를 충실히 구현한, 전통적인 신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 점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끈, 밧줄, 로프" 아오사키 유고
야스미 노도카가 모아이 도자기 상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살해당한채 발견되었다. 동기는 희귀 게임 카드이며 범인은 새시를 통해 시체를 밖으로 운반한 뒤, 바다로 시체를 내던진 것으로 보였다. 여러 현장 상황을 통해 범인은 자동 잠금장치가 설치된 아파트 주민 29명 중 한 명이며, 그 중에서도 당일 오전, 로프같은걸 버린 세 명 중 한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피해자가 죽기 전 로프 같은 것으로 묶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각자 버린 건 다용도 마끈, 안전용 수평 구명줄, 반사 소재 텐트 로프였다.
히무라 히데오가 '필드 워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전형적인 신본격 단편입니다.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아오사키 유고답게 추리적인 부분은 완벽에 가깝습니다.
히무라는 피해자가 둔기에 맞았을 때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가 깨어있을 때 침입했고 흉기로 위협했다고 추리합니다. 그리고 뭔가에 묶인 피해자를 나르는 범인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 사체를 유기하기 직전에 묶은 끈을 회수했다고 추리하고요. 사체 유기가 실패했다는걸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기 때문에, 끈을 푸는 데에는 위협에 사용했던 칼을 사용했습니다. 다음날 범인은 토막난 끈을 버려야 했으며, 이는 쓰레기 버릴 때 종이 팩을 사용했다고 지적받았던 시나다의 행동과 이어집니다. 즉, 시나다가 범인입니다. 시나다는 매일 종이 팩 쥬스를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 그게 재활용이라는걸 모르지 않았다는 것도 증거이고요.
사건과 범인이 로프를 그날 버린 이유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핵심 단서인 '로프'를 가지고 기둥서방 시나다의 유력한 동기였던 '동아줄'로 이어지는 일종의 언어유희적인 전개도 괜찮습니다.
다만 설정 자체가 조금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현대 법의학, 법과학으로 범인을 충분히 밝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수수께끼 풀이용 단편으로는 충분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정통파 추리 소설에 대한 작가의 고민도 흥미롭습니다. 아래의 말을 빌어서, 추리 소설가의 필사적인 창작은 결국 AI도 만들 수 있는, 독창적인 요소가 없는 결과물일거라는게 요지인데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 '정보를 수집하고 검토해 논리적으로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가 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그 해법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 "수수께끼 풀이 자체는 누가 설명해도 마찬가지인, 개성없는 장면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애초에 누구나 풀 수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면 본격 미스터리로 성립할 수 없다는 딜레마도 있어. 결국 탐정 캐릭터들도 '모범 답안'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 걸지도 몰라."
물론 이 논리는 미스터리는 과학이 아니라 유사 과학이라는 히무라의 입을 빌어 작가 본인 스스로 타개하고 있기는 합니다. 탐정들은 미스터리의 신의 말을 전하는 선교사인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 놓는 과학자와 다른 집단이라면서요. 그래도 AI도 만들 수 있다는 결과물이라는게 변하지는 않지만요...
"클로즈드 클로즈" 이치오 미치
아리스와 히무라는 여고에서 일어났던 교복 도난 사건 해결을 부탁받았다. 교복을 도난당한 다즈하라 시게오는 같은 3학년 부원인 고미야 리오와 반목이 있었다. 그러나 고미야는 이미 수개월 전 전학을 간 상황이었다.
다즈하라가 고미야에게 교복을 빌려줬는데, 다른 친구에게 빌린 거울이 들어 있어서 도난 소동으로 발전했다는게 진상입니다. 그런데 추리적으로 딱히 눈여겨 볼 부분은 없습니다. 히무라가 이렇게 추리해 낸 과정이 제대로 선보이지 않는 탓입니다.
또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팬에게서 만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아리스와 히무라가 여고에서 가짜 신분(?)으로 활동하는 일상계 추리물이라는 설정은 독특하지만, 둘의 대화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모두 여성 작가가 쓴 듯한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더 건조하게 묘사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수록작 중 최악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히무라 히데오에게 바치는 괴담" 오리가미 교야
도쿄에서 열린 이벤트에 참석했던 아리스와 히무라는 그날 밤 찾은 바에서 서점 직원 쓰지와 합석하게 되었다. 쓰지는 둘에게 자신이 겪었던 괴담을 들려주었고, 히무라는 자신만의 추리로 괴담의 진상을 풀어냈다.
쓰지가 네 편의 괴담을,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한 바 손님이 한 편의 괴담을 들려주어 총 다섯 편의 괴담이 선보입니다. 쓰지가 겪거나 들었던 괴담은 모두 추리를 통해 진상이 밝혀지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 후배 하숙집에서 심야에 전자기기가 오작동하는 사건이 자꾸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날은 한밤중에 탄내까지 났다.
진상: 개조한 불법 무선기로 통신하는 장거리 트럭이 원인이었다. 심야에 발생한건 장거리 트럭은 고속도로 통행 요금이 할인되는 심야에 운행하기 때문이며, 탄내는 오작동한 전열기구 때문이었다. - 쓰지는 대학 시절에 동창과 숲에서 고개를 돌리며 짐승 울음 소리를 내었던 인형 탈을 보았다.
진상: 몸은 땅 속에 묻힌 사람에게 인형 탈을 씌워 숲속에 방치해 둔 것이었다. 짐승 울음 소리는 재갈이 물려있던 탓이며, 비성수기 휴양지 산속이라는 현장이 근거이다. - 등산을 좋아하는 쓰지의 친구는 안개로 뒤덮인 산길에서 똑같이 생긴 오두막을 등산로에서 연이어 발견했다.
진상: 그냥 오두막이 두 채 있었다. - 쓰지는 방학 때 고향 친구 가가와, 가가와의 선배 유모토와 함께 폐업한 유원지에서 담력 시험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유모토가 미러 하우스 안으로 들어간 뒤 사라져버렸고, 그를 찾으러 들어간 쓰지는 미러 하우스 속 거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형체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그 뒤 가가와와 유모토와는 연락이 끊겼다.
진상: 고객을 놀라게 만드는데 사용했던 매직 미러를 이용하여 유모토가 쓰지를 놀라게 만든 장난이었다.
첫 번째 괴담은 재미있고, 네 번째 괴담도 추리만큼은 그런대로 합리적이지만 다른건 별로입니다. 그리고 모두 진상을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도 크고요.
이보다는 바 손님인 이토가 이야기한 진짜 괴담이 더 괜찮았습니다. 이토는 교통사고 현장에 놓여있던 시들어진 조화를 버리고 새로 꽃을 사서 갖다 둔 뒤, 원망하는 표정의 여자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선의로 행한 일인데 왜 귀신은 원망을 가졌을까요? 아리스의 추리는 '꽃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즉, 원래 놓여있던 시든 꽃이 귀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놓아둔 꽃이었다는 것이지요. 이 역시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는 있지만 의표를 찌르는 맛도 좋고, 아리스가 추리를 펼친다는 의외성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 저는 잘 모르는 '심령 탐정'이라는 아리스가와 월드 속 다른 주인공이 언급되는 등, 헌정물로는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블랙 미러" 시라이 도모유키
'나'는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때 친구였던 가가미 에이지로부터 오랫만에 연락을 받고 만났다. 그 뒤, 경찰을 만나 에이지와 그의 형 고이치가 연루된 살인사건에 대해 들었다. 상황은 에이지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나'와의 만남을 진행한 것으로 보였지만, 알리바이 트릭은 완벽해서 깨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추리소설가를 꿈꾸던 '나'와, 경찰을 돕던 건방진 교수 히무라가 힘을 합쳐 알리바이를 깨는데 성공한다.
복잡한 시간표로 구성된, 전형적인 시간표 알리바이 트릭물입니다. 쌍둥이인 에이지와 고이치가 어느 시점에 교체하여 서로의 알리바이를 만든게 진상입니다. 핵심은 고이치가 엄지손가락을 절단한 뒤, 그걸 가지고 에이지가 고이치의 비밀금고를 열었던 것이고요. 이는 고이치가 범행을 저지른 뒤, 생수병 뚜껑을 따지 못해 머그컵으로 물을 마셨던 상황 등으로 추리됩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는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70년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CCTV가 여러 곳에 가득한데 자신의 노출을 이렇게까지 숨기면서 짜여진 시간표 동선대로 이동한다는건 말오 안되니까요. 히무라가 사건에 뛰어든 이유가 역에서 뛰어나가던 에이지와 부딪혔기 때문이었다는 우연도 작위적이고요.
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메타적인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현재 가장 뜨거운 작가 중 하나인 시라이 도모유키의 작품치고는 영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의 수수께끼" 유키 하루오
추리 소설가인 '나'는 신작 구상을 위해 담당 편집자 미토베 씨와 함께 취재차 온천 휴양지를 찾았다. 그런데 그곳 식당에서 만난 점원 후쿠나가 아이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촌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둘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후쿠나가의 사촌 아버지인 외삼촌 거처를 찾았고, 그곳에서 미토베 씨는 사촌의 행동을 추리해 내는데...
작품을 다 읽었지만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촌의 기묘한 언행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유명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지만, 무대와 설정은 아리스가와 월드가 아니라는게 특징입니다.
추리는 사촌이 후쿠나가에게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서재에 있던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은 커버와 띠지만이며, 내용물은 다른 책으로 바뀌어져 있었기 때문이고요. 사촌은 별채에 침입하여 아버지의 만년필을 훔쳤습니다. 그러나 눈이 오는 바람에 별채에서 탈출하지 못했고, 별채는 난방이 안되어서 너무 추웠던 탓에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난로에 태웠던 겁니다. 후쿠나가의 외삼촌은 모든 장서를 서재와 별채, 두 곳에 비치하였기 때문에 다음날 외삼촌이 돌아오기 전 사촌은 서재의 책을 별채로 옮기고, 때우지 않았던 띠지와 표지를 서재에 있던 다른 책에 씌워 위장했고요. 책은 새로 주문했지만 도착까지는 시간이 걸려서 당장 후쿠나가에게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안티인 척을 했던 거지요.
위의 추리를 위한 모든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되는 좋은 추리물입니다. 유명 작품은 물론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의 TV 방영까지를 작품 설정에 녹였다는 점에서 '헌정'이라는 취지에도 딱 들어 맞고요.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를 표방한 사촌의 주장은 헌정이라는 취지와 정 반대이기는 하지만, 이런게 또 기획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제가 읽었던 유키 하루오의 작품은 비현실적인 설정이 문제였는데, 소규모 일상계로 설정을 좁혀 놓으니 훨씬 낫네요.
"행각승 지장 스님의 낭패" 아쓰카와 다쓰미
20년 전, 행각승 지장 스님의 이야기를 '에이프릴'에서 들은 멤버였던 '나'와 도코가와는 오랫 만에 한 잔 하기 위해 '풀스 메이트'라는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20년 전과 똑같이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각승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20년 전과는 다르게, 손님들의 공격과 의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풋내기였다.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은 그렇게 인기가 많은 작품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이 작품을 헌정물로 새롭게 써 낸게 좀 신기하네요. 일종의 '도라에몽 세계관'인 히무리 히데오 시리즈와는 다르게, 지장 스님이 활약한 20년 후인 현재를 무대로 협박범 구로사와가 살해당했는데, 사체는 피해자가 수집했던 나비 표본 수십 개로 둘러 쌓여 있었던 사건에 대한 추리가 펼쳐집니다.
나비의 이름이 범인을 특정하는데, 나비 표본 하나만 꺼내어져 있으면 범인이라는게 바로 드러나서 어쩔 수 없이 표본을 전부 꺼냈다는게 진상입니다. 범인은 나비 표본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르는 아사기 유즈루였고요.
이 뒤에 등장인물의 이름, 수를 가지고 딴지를 거는 손님에게 진짜 지장 스님이 나타나 보강하는 추리를 펼치며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여러모로 추리 퀴즈에 가까우며,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다는 점에서 원전과 비슷한 점이 많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시체의 실루엣은 말한다" 이마무라 마사히로
에이토 대학 추리 소설 연구회 멤버 5명은 고향 나고야로 취업 활동을 갔다 온 오다가 가져온 수수께끼 풀이에 나섰다. 오다가 만난 동향인 고바야시가 친구가 남긴 암호를 해독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나왔습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 이 시리즈 단편은 읽은 적이 없는데, 젊은 작가가 일종의 일상계로 풀어낸게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형식만 신선한게 아니라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고바야시의 친구 바토 씨가 남긴 낙서와 다이잉 메시지를 풀어내는 과정이 추리 소설 연구회 5명의 대화를 통해 펼쳐지는데, 정말로 모든 있을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추리와 의견들을 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드러나는 진상은 꽤 합리적으로 느껴져요. 대화로 일종의 추리 대결을 펼쳐나간다는 점에서는 작가의 전작 "시인장의 살인" 속 학생 식당 메뉴 맞추기 게임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시와 바토가 헤어졌고, 이 사건은 바토가 고바야시가 계속 어울려 줄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벌인 일종의 게임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은 있습니다. 결국 진상은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 탓이에요. 다이잉 메시지도 AOK로 읽히는데 이건 All-OK라는 추리 역시 근거없는 공허한 주장일 뿐이지요.
논리적으로 즐길거리는 많은데 다소 맥이 빠진다는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에가미 선배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 등 팬이라면 소소히 즐길거리가 있지만, 그리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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