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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3

속임수의 섬 - 히가시가와 도쿠야 / 김은모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변호사 사야카는 출판 재벌 사이도우지 가문 유언 집행을 위해 가문의 별장이 있는 비탈섬으로 향했다. 유언 집행을 위해 반드시 필요했던 사촌 쓰루오카, 그리고 쓰루오카를 찾아 데려온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와 함께였다. 그런데 가문 일족에게 유언장 내용을 공개한 다음날, 쓰루오카는 전신이 골절되어 살해당했다. 태풍으로 경찰이 출동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다카오와 사야카는 진상을 밝히기 위해 노력하는데...

히가시가와 도쿠야의 장편입니다. 작가의 작품 중 가장 길다고 하네요.

특징이라면 고전 본격 추리물의 전형적인 요소를 충실히 갖추고 있다는 점입니다. 태풍으로 고립된 외딴섬 ‘비탈섬’, 기묘한 외형과 구조를 가진 별장 ‘화강장’, 그곳에 모인 출판 재벌 사이도우지 가문 일가, 그리고 명탐정의 등장까지 모두 고전 추리물 애호가에게 익숙한 클로즈드 써클 설정 그 자체입니다. 

설정뿐 아니라 제시된 수수께끼도 본격적입니다. 23년 전 낚시 중 물속에서 사람이 뱃전 위로 튀어 올랐던 괴이한 사건과 그때 목격된 ‘용’의 정체, 최근 벌어진 쓰루오카 전신 골절 살인 사건, 중정에 나타난 오두막과 빨간 도깨비, 전망대에서 사람이 사라진 수수께끼, 그리고 기묘한 화강장의 구조 등 여러 의문이 등장합니다. 이 모든 수수께끼는 결국 하나의 결말로 이어지고요.

그 중에서도 화강장의 구조가 ‘책을 읽는 사람’을 본떠 설계되었고, 그 구조가 핵심 트릭이라는 진상이 특히 흥미로웠습니다. 책의 위치가 중정이며, 그곳에 숨겨진 거대한 팝업북이 흉기였다는 사실을 다카오 등이 구조를 파악하며 밝혀내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던 덕분입니다. 현재 전망대 창은 ‘두뇌’ 역할을 하는 서재 앞에 있어 얼굴의 ‘이마’에 해당하는데, 그렇다면 그 아래에는 ‘눈’에 해당하는 공간이 있을 것이라는 추리도 설득력있었고요. 사야카의 눈을 피해 전망대에서 사라진 사람은 바로 이 공간으로 이동했던 것입니다(AI로 그려본 아래 이미지 참고하세요).

23년 전 사건에 대해 가문 사람들이 침묵했던 이유도 잘 설명됩니다. 사이도우지 도시로가 살해된 뒤 범인이 절벽 끝에서 사라지고, 게이스케의 익사체가 밀려왔으니, 일족은 ‘게이스케가 할아버지를 살해하고 투신 자살했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하지만 드러난 진상과 트릭은 솔직히 실망스럽습니다. 23년 전 사건의 실제 경위는 이렇습니다. 쓰루오카가 도시로를 살해한 뒤 절벽에서 로프를 매고 뛰어내렸고, 이를 막으려던 게이스케가 함께 추락했습니다. 쓰루오카는 캐러비너로 로프를 고정해 무사히 착지했지만, 게이스케는 로프 반동으로 낚시배 위로 튀어 오른 것입니다. 당시 목격된 ‘용’은 잘려진 로프였고요. 그러나 목숨을 걸고 절벽에서 뛰어내린다는 설정은 한 마디로 무리입니다. 안전하게 로프를 타고 내려가도 충분했을 텐데 굳이 도박에 가까운 방법을 택할 까닭이 없으니까요. 쓰루오카가 별장을 통해 되돌아오기 위해 이용한 동굴 통로를 일족이 전혀 몰랐다는 점도 납득하기 어렵고, 쓰루오카가 그 통로를 어떻게 알아냈는지도 설명되지 않습니다. 당시 배에 함께 있던 학생 히로시가 기억을 잃자 그를 게이스케의 대역으로 삼아 23년간 속여왔다는 설정 역시 지나치게 작위적입니다.

최근 사건의 흉기는 앞서 언급한 대로 중정에 설치된 거대한 팝업북 장치입니다. 사이도우지 출판사의 첫 동화책을 재현한 이 구조물은 전망대의 책과 연동되어 작동했고, 게이스케는 이 장치를 이용해 쓰루오카를 중정으로 유인해 압사시켰습니다. 피투성이 쓰루오카의 시신이 오두막 모양 팝업에 걸려 올라오자, 이를 미사키가 ‘빨간 도깨비’로 착각했던게 진상이고요. 그러나 이 팝업북 트릭은 지나치게 비현실적입니다. 이 정도 크기와 무게의 장치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 설명이 없고, 그렇게 거대한 구조물이 움직이는데 아무도 소음을 듣지 못했다는건 말도 안되니까요. 다른 일족들이 이처럼 거대하고 값비싼 구조물의 존재를 전혀 몰랐다는 것 역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이야기의 전개 역시 장황하고 불필요한 부분이 많습니다. 고전 본격물처럼 ‘일족’이 등장하지만, 실제로 사건에 관여하는 인물은 피해자 쓰루오카와 범인 게이스케 뿐입니다. 다른 등장 인물들, 특히 도라쿠 스님은 등장하지 않는 편이 나았습니다. 작가 특유의 유머를 곳곳에 섞은 문체도 끔찍한 살인 사건이 이어지는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으며, 웃음도 유발하지 못합니다. 읽는 내내 고통스러울 정도였습니다. 탐정 고바야카와 다카오 역시 시덥잖은 유머만 남발하는 가벼운 남자로 그려져 도무지 명탐정으로는 보이지 않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고전 추리물의 외형은 갖추었지만, 트릭과 이야기의 완성도가 턱없이 부족한 졸작입니다. 심지어 길기까지 하니 추천하기 어렵네요. 이 작가 작품도 더 읽을 일은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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