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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09/19

가공범 - 히가시노 게이고 / 김은모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도 부부 자택에 화재가 일어난 후, 도의원인 남편 도도 야스유키의 사체는 거실 소파에서 전소된 채, 전 여배우인 아내 도도 에리코 사체는 욕실에서 목을 맨 상태로 발견되었다. 아내가 남편을 살해하고 자살한 걸로 보였지만, 수사를 통해 위장된 자살임이 금세 드러났다. 경찰은 원한 관계를 축으로 탐문 수사를 진행해 나갔고, 고다이, 야마오 컴비는 진술을 통해 도도 야스유키의 태블릿이 사라졌다는걸 알아냈다. 그 직후, 범인이라는 인물이 협박 편지를 보내어 태블릿 속 정보를 거래하자고 제안하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장편입니다.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었습니다. '갈릴레오 유가와'나 '가가 형사'가 아닌, 새롭게 시작된 고다이 쓰토무 형사 시리즈이지요.

가장 큰 장점이라면 치밀한 수사 과정 묘사입니다. 주변 진술을 통해 태블릿의 존재를 확인하고, 태블릿 전원이 켜진 위치 데이터와 수상쩍은 언행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유력 용의자로 포착하고, 과거 조사를 통해 야마오 경부보가 도도 부부와 고등학교 때 부터 알고 있었다는걸 알아내고, 현금 인출책의 결정적 증언으로 야마오 경부보를 체포하는 일련의 과정은 모두 철저하게 발로 뛰는 수사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인터넷 정보 검색 따위는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범인에 대한 결정적 단서 역시 수사를 통해 자연스럽게 선보입니다. 도도 에리코는 귀한 손님에게만 티파니 찻잔을 낸다는데, 사건 현장 식기 세척기에서 그 찻잔이 발견되었습니다. 그런데 티파니 찻잔은 식기세척기에 넣으면 안 되는 물건입니다. 야마오는 사건 당일 차를 마시지 않았다고 말했고요. 그렇다면 범인은 최소한 야마오는 아니라는 뜻입니다. 티파니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귀한 손님, 또는 손님(범인)이 떠난 뒤 찻잔에 대해 잘 모르는 누군가가 찻잔을 현장에서 치웠던 것이지요. 

결국 수사를 통해 도도 야스유키가 살해당한 아내를 집에 있던 도구로 자살로 위장한 뒤, 스스로 집에 불을 지른 뒤 자살했다는게 밝혀집니다. 자기 딸이라고 생각한 미사키가 범인이었기 때문이었지요.

이러한 진상 외에도, 수사 중간중간에 나오는 여러 증언을 통한 의문들 - 예를 들어, 도도 야스유키는 체력이 좋았는데 어떻게 범인에게 간단히 살해당했는지 - 까지 모두 수사로 밝혀지는 등, 수사의 디테일은 최고 수준입니다.

수사 과정에서의 고다이의 예리한 관찰력도 빛납니다. 범인은 도도 저택에서 에리코를 목매달 끈을 조달했는데 왜 그런 준비를 사전에 하지 않았을까? 전기밥솥도 마찬가지, 왜 예약을 해제하지 않았을까? 즉 범인은 간단히 간파당할걸 알면서도 왜 이렇게 우발적이면서도 어설픈 위장 공작을 했는지?에 대한 의문을 관찰을 통해 제시하거든요.

그리고 야스유키의 유지를 이어받고 자신의 결의도 합쳐 미사키를 숨겨주기 위한 야마오 경부보의 범죄 계획도 흥미롭습니다. 사실 그는 일부러 단서를 흘려 체포되었던 겁니다. 제목 그대로 '가공범'인 셈이지요. 하지만 야마오는 몇 달 후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며, 그 시점이면 증거도 많이 사라져 진범을 체포하지 못한 채, 사건은 미제로 끝날 가능성이 높을 걸로 예상했습니다.

이는 거의 성공할 뻔 했지만, 고다이의 끈질긴 수사로 진범이 드러나게 됩니다. 고다이는 도도 에리코의 과거를 뒤져 고교 졸업 직후 숙모 집에 머물던 시기 임신했다는 정황을 잡고, 숨겨진 딸이 있으며 그녀가 도도 집을 드나들던 미사키였다는걸 밝혀냅니다. 도도 에리코의 임신을 밝혀내는건 수사 팀의 인해전술이었다는 점에서 현실적인 수사물이라는걸 선명하게 드러내기도 하고요.

야마오가 이런 계획을 진행한 동기인 40여년 전인 1985년 고등학생 시절의 야마오, 도도 부부가 엮인 연애와 욕망 이야기도 무척 흥미롭습니다. 팜므 파탈을 넘어서는 매력의 소유자 에리코의 존재감이 압권이었어요. 이런 설정에서는 일반적인, 학생과 관계를 가진 교사 도도 야스유키는 알고보니 굉장한 인격자에 선한 인물이라는 반전 설정도 신선했고요.
세 명의 관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짝사랑'에 대한 작가의 생각 - "경솔하게 사랑을 주고받으니까 잃게 되는 거에요. 짝사랑이라면 상처 입는 일도, 상처 주는 일도 없잖아요." - 도 와 닿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분명합니다. 우선 미사키의 범행 동기는 ‘버림받음’과 ‘비교에서 비롯된 분노’로 제시되는데, 이미 친모가 에리코라는걸 안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습니다. 아무리 자기 딸이 비행을 저질러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하더라도, 갑작스럽게 살인으로 폭발하기까지의 중간 과정이 너무 부족합니다. 단순 폭행도 아니고 살인인데 말이지요.

가공범 설정도 지금 보기에는 다소 뻔한 점이 없지 않습니다. 범행을 떠안는 모습은 "용의자 X의 헌신"과 별다를게 없으니까요. 너무 빠르게 야마오의 속셈이 드러나는 것도 문제고요.

핵심 동기인 도도 에리코의 출산과 아이 유기도 배경 설명이 빈약합니다. 아이는 야마오의 아이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구태여 낳을 필요부터가 없었습니다. 묘사된 둘의 관계로 보면요. 힘들게 낳는 선택을 했다면, 왜 곧바로 버렸는지도 알 수 없어요. 이 부분은 낙태가 금기시 되었던 시대적 배경이나 에리코의 개인사 같은게 추가적으로 보강되었어야 납득이 되었을 겁니다. 

진범이 밝혀진 뒤 사회적 파장이나 여론의 반응이 거의 다뤄지지 않아 결말의 현실감이 약하고, 나가마의 죽음은 결국 자살이었다는 점에서 불필요해 보인 등도 문제라 생각됩니다.
아울러 고다이 형사도 작가의 다른 시리즈 주인공들과 비교하면 존재감이 옅다는 단점도 있습니다. 성실함, 눈썰미 외에는 캐릭터적 매력이 부족한 탓입니다.

그래도 치밀한 수사와 ‘가공범’이라는 아이디어가 만들어내는 긴장은 꽤 만족스럽습니다. 경찰 수사물로는 우수한 수준이에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경찰 수사물을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그나저나, 읽고나니 제일 불쌍한건 도도 야스유키네요. 자기 딸이라고 착각한 남의 딸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끊기까지 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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