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구의 모험 - 제임스 워드 지음, 김병화 옮김/어크로스 |
'당신이 사랑한 문구의 파란만장한 연대기'라는 부제처럼 우리에게 친숙한 (그렇지 않은 것도 있기는 하지만) 문구들에 대해 조망하는 잡학 서적. 종이 클립에서 시작해서 디지털 시대의 문구까지 모두 14개의 챕터에서 다양한 문구들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정 항목의 소소한 역사를 다루었다는 면에서는 일종의 미시사 서적으로 볼 수도 있겠네요.
주제별로 동일하지는 않지만 대체로 해당 문구가 어떻게 고안되어 일상 속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는지, 현재 상황은 어떠한지, 그리고 유명한 브랜드 제품이 무엇인지까지 알려주는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 깊이와 수준이 정말 놀라울 정도입니다. 해당 문구의 역사를 조망하는 미시사적 구성도 탁월하고요.
볼펜과 만년필을 다룬 항목을 예로 들자면,
- 이집트에서 검댕과 물로 만든 잉크를 갈대 솔로 찍어 파피루스에 글을 남김
- 6세기 이후 깃털 펜 등장. 거친 표면의 파피루스보다 부드러운 양피지 등이 발달하자 가는 선을 그을 수 있는 도구가 필요해 진 것. 이후 19세기까지 사용.
- 로마시대부터 금속제 펜촉이 등장하였으나 가공이 힘들고 비쌌음. 이후 19세기에 금속제 펜촉으로 교체.
- 19세기 후반 워터맨의 만년필 등장
- 1945년 미국에서 최초로 볼펜 판매 시작. 이후 볼펜의 문제점을 개선한 다양한 볼펜들 출시.
의 순으로 해당 문구가 현재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변곡점을 단계별로 상세하게 짚어줍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앞서 '잡학 서적'이라고 말씀드렸던 것처럼 관련된 잡학도 충실히 풀어내고 있고요. 워터맨이 만년필을 발명한 계기가 되었다고 알려진, 워터맨이 보험회사 영업사원을 할 때 중요한 계약 시 펜에서 잉크가 새는 바람에 잉크 얼룩이 번져 계약서를 새로 바꾸는 동안 고객이 가 버리고 만 일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가 전부 거짓말이라고 명확하게 짚어주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이러한 일화, 잡학들 모두 명확한 사료를 통해 검증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 외에도 기억에 남는 것은 많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유명 인사들이 사용하는 연필들에 대한 소개 - 조지 루카스는 딕슨 타이콘데로가, 스티븐 킹의 <다크 하프> 속 작가 조지 스타크가 쓰는 연필은 베롤 블랙 뷰티, 존 스타인벡이 가장 좋아한 연필은 블랙윙 602 (블랙윙의 팬은 많다. 기획자 넬슨 리들 / 작곡가 퀸시 존스 /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작품에도 등장 / 만화가 척 존스 등) - 라던가, 형광펜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 일본의 호리에 유키오가 사인펜을 만들고, 카터가 파이버팁 사인펜에 형광 잉크를 적용한 '하이-라이터'를 출시하고, 독일의 슈반호이저가 잉크와 디자인을 개선한 '스타빌로 보스'를 출시 - 를 꼽고 싶네요.
또 현재 널리 알려진 제품으로 넘어오면서 우리도 익히 알고 있는, 친숙한 제품이 다수 등장하는 것도 반가운 부분입니다. 볼펜은 많은 사람들의 연구와 고민을 통해 개발된 물건인데, 그 중 기존 볼펜의 문제점을 개선한 새로운 볼펜이 바로 BIC 크리스털 펜이었다는 식으로 말이죠. 그 외의 제품으로는 몽블랑 만년필, 몰스킨 노트, 스타빌로 형광펜 등이 있습니다.
허나 도판이 부실하다는 것은 정말로 큰 문제입니다. 최소한 소개된 제품의 도판은 빠지면 안 되었을텐데 극히 일부 제품만 도판이 선보이거든요. 앞서 예를 든 볼펜과 만년필 항목에서도 소개된 도판은 빅 크리스털 볼펜, 파커 만년필에 불과합니다. 비중있게 소개된 다양한 볼펜들 (파커 조터, 피셔 우주펜 등)이나 몽블랑 만년필 등은 글로 그칠 뿐이에요. 한마디로 표지에 있는 도판이 거의 내용의 전부랄까... 충실한 도판, 혹은 도해와 함께 보다 상세하게 사전적으로 설명하는 구성이었다면 훨씬 마음에 들었을텐데 아쉬운 부분입니다.
그리고 재미있는 정보가 가득함에도 큰 재미를 느끼기는 조금 어렵긴 합니다. 문구에 대해 관심이 많지 않은, 평범한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주제가 아닌 탓이죠. 평범한 일반인이 만년필의 역사나 구조 같은 것에 호기심을 갖기는 아무래도 어려울테니까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특정 분야에 대해 엄청나게 깊이 파고든 점은 확실히 대단하나 해당 분야에 관심이 없다면 재미를 느끼기 어려운, 그런 책입니다. 문구에 관심이 많으시다면 필독서일테지만 (그리고 아마도 이미 구입해서 읽어보셨겠죠), 그렇지 않으신 분들께는 추천드리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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