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담백경 - 오노 후유미 지음, 추지나 옮김/북홀릭(bookholic) |
최근 좀 격조했습니다. 프로야구 시청 때문이지요. 덕분에 퇴근 후 저녁에 잠깐 책 읽던 시간이 거의 사라져 버렸거든요. 중계 중에 읽으려 시도해 봤는데, 집중이 잘 되지 않더라고요.
이 책은 오노 후유미의 괴담집입니다. 짤막한 괴담 99편을 모아 놓았다는 소갯글에 흥미가 생겼습니다. "시귀", "마성의 아이" 등을 통해 접했던 작가의 필력도 믿었고요.
그러나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실망스러웠습니다. 본인 혹은 지인이 겪었다는 맥락없는 두서없는 경험담으로, 인터넷 괴담 게시판 글 수준보다 못한 탓입니다. 게다가 무섭지도 않았고요. 화자들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기묘한 현상, 그리고 서정적인 이야기들이 많아서 괴담이라 부르기도 어렵습니다. 오노 후유미 특유의 서정적이고 섬세한 문체 역시 괴담과는 잘 맞지 않았고요. 그나마 무서운 이야기도 대부분 뻔해서 재미를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방대한 분량 덕분에 기억에 남는 몇 가지는 있었습니다. 대표적인 세 편을 꼽자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늘어나는 계단
한 중학교 7대 불가사의 중 하나인 ‘늘어나는 계단’은, 평소에는 열세 계단이지만 심야 2시에 세면서 오르내리면 끝없이 이어진다고 합니다. 어느날, 두 친구가 이에 도전했습니다. 한 명은 올라갔고, 다른 한 명은 내려갔지요. 내려온 친구는 열 셋까지 세었는데, 위에서 친구의 목소리가 계속 들려왔습니다. “열넷”, “열다섯”…
전형적인 괴담이지만, 목소리라는 요소를 활용한 극적 전개는 효과적이었습니다. 라디오 드라마나 영상물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2. 파란 여자
F씨가 초등학교 시절 처음 본 유령은 파란빛으로 이루어진 커다란 여자 얼굴이었습니다. 무서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바람에 울음을 터뜨렸었지요. 이후 다다미방 주변에서만 여자의 기척이 느껴졌고, 아버지가 급사한 뒤 사라졌습니다. F씨는 아버지가 쫓아 준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른이 된 후 의문을 갖습니다. 애초에 다다미방은 아버지의 방이 되었고, 여자가 쏘아본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여자가 사라진 것은 원하던 바를 이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마지막 반전이 괴담보다는 어른의 이야기로서 인상적이었습니다.
3. 마음에 들다
Y씨의 어린 딸은 몇 가지 단어만 말할 줄 알았는데, 그중 하나가 ‘그네’였습니다. 아직 그네를 탈 나이가 아니었는데도 계속 ‘그네’를 외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딸이 ‘미피’ 인형의 목에 끈을 걸어 흔들며 ‘그네’라고 말했습니다. 이어 허공을 가리키며 또다시 ‘그네’라고 했습니다.
아이는 어른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본다는 속설을 떠올리게 하는 섬뜩한 이야기였습니다. 이 책 속 괴담 중 가장 오싹한 이야기로 꼽을 만했습니다.
이외에도 학교 합숙 중 장지문에서 손가락이 튀어나온다는 "훔쳐보기", 사고가 잦은 건널목에 있던 지장보살이 부서지자 사고가 사라졌다는 "건널목의 지장보살"도 기억에 남았습니다.
하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해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오노 후유미 정도의 작가라면 단순한 괴담 나열이 아니라 최소한의 기승전결이 있는 이야기로 재창조했어야 하지 않았을까요. 이 정도라면 한때 유행했던 "깊은밤 갑자기" 류의 공포 실화집보다 나을 게 없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 몇몇 괜찮은 이야기 덕에 최악은 면했지만, 장르문학 팬이시라면 피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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