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17/10/18

악마의 증명 - 도진기 : 별점 2점

악마의 증명 - 6점
도진기 지음/비채

소설쓰는 판사에서 소설쓰는 변호사가 되신 도진기 작가의 신작 단편집. 단편 8편이 수록되어 있으며, 책 뒤 소갯글에 따르면 주로 초기작들입니다.

익히 알려진 작가의 이력만 보면 한국의 존 그리샴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입니다. 작품들도 재판 과정이 핵심이거나, 아니면 일반인이 놓치기 쉬운 법의 맹점을 파고 드는 이야기가 많고요. 그러나 <<정신자살>>에서는 변격물적인 취향이 엿보였는데, 이 단편집 수록작들도 마찬가지더군요! 몇몇 작품은 김내성의 직계 후예라 해도 좋을 정도에요. 김내성의 나름 본격물이 아니라 <<비밀의 문>>에 수록되었던 범죄 추리 소설, 또는 환상 소설에 가까운 작품들 말이죠.

물론 작가의 특기라 할 수 있는, 한국 추리 문학계에서 보기 드문 퍼즐러로서의 장점을 잘 드러내는 본격 추리물이 없지는 않습니다. 검사이자 변호사인 호연정 시리즈 2편, 그리고 <<구석의 노인>>이 그러합니다. 작품들 모두 법정 미스터리 분위기가 물씬 나는 것도 괜찮고요. <<킬러퀸의 킬러>>도 독자의 의표를 찌르는 맛이 잘 살아있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외 4 작품은 김내성의 범죄 추리, 환상 소설과 유사하거나, 장르를 특정짓기 어려운 작품인데 개인적으로는 변격물적인 취향은 영 아니다 싶었어요. 몇몇 작품은 습작 수준이라서 좋은 점수를 주기도 힘들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을 전문가적인 지식을 더하여 써 낸다는 측면에서 항상 응원하고 있기 때문에 작가로서의 시작과 취향을 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는 책입니다만... 전체 수록작의 평균 완성도는 이 정도인 것 같습니다. 몇몇 작품은 괜찮은 만큼, 기회가 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네요.

마지막으로 수록 작품별 상세 리뷰로 글을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악마의 증명>>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박철은 부대찌게 집을 털려고 하다가 우발적으로 살인까지 저지른다. 그는 경찰에 순순히 체포되고, 검사 호연정에게 범행을 자백하지만 법정에서 이 모든 것을 뒤집는데...
모 드라마에서 표절했다는 시비가 붙었던 작품. 드라마를 보지는 않았지만 "범인이 쌍동이이고, 누가 범행을 저질렀는지 명확하지 않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설정을 따라갔다면 표절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도진기 작가 정도의 전문가가 아니면 이만큼 설득력있게 그려내기가 힘든 소재이니까요. 물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법리적인 이론을 바탕에 둔 아이디어라 표절을 증명하기는 어렵다는게 문제이지만요. 여튼, 표절 시비가 있을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였습니다.

그러나 호연정 검사가 박철 기소에 성공하는 후반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 원칙을 피해가기 위해서 첫번째 사건 기소를 허위로 작성했다는 것이 핵심인데, 일반 독자가 볼 때 너무 무리수였습니다. 박철이 법정에서 자백을 뒤집을 것이다는 것은 호연정 검사의 막연한 추측일 뿐, 명확한 것이 아니니까요. 꼭 이렇게 권선징악적인 결말을 가져가야 했을지도 의문입니다. 법대생 박철을 악의 화신으로 만드는 결말이 더 설득력이 있었을 것 같거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작가의 데뷰작으로 이후 활약을 짐작케하는 좋은 소품이지만, 억지스러운 마무리는 아쉬웠습니다.

<<정글의 꿈>>
노인 전문 요양 병원에서 시한부 인생을 사는 광수 노인은 오래전 경험을 토대로 밀림, 타잔 조각상을 만든 후 자신이 타잔이 된 환상 속에서 살아가는데...

광수 노인의 환상 묘사가 이야기의 중심인 작품. 이 환상은 의학적 실험의 결과물이라는 씁쓸한 이유가 있다는 결말인데 의학적 실험에 대해 깊이 파고든 것도 아니고, 딱히 특별한 반전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좀 미묘한 소품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습작 수준의 작품이었다 생각되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선택>>
검사를 그만두고 변호사를 개업한 호연정에게, 딸의 죽음에 대한 보험금 수취를 요청하는 한 할머니의 의뢰가 접수된다. 딸 백해령은 손녀 현지와 함께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였는데, 손목을 메스로 그어 피가 전부 빠져나갔기에 보험사는 자살임을 주장하는 상태...
보험사에서 자살로 판단하여 보험금 지급을 거부한다는 기묘한 사건을 밝혀내는 이야기로, 호연정 변호사의 끈질긴 수사와 추리가 돋보였습니다. 특히 작 중 중요하게 언급되는 '동기' - 살인이든 자살이든 물리법칙에 맞는 설명보다 더 우선되어야 할 것은 바로 '동기'다. 동기라는 인과를 벗어나 있는 사람은 없다. - 를 드러내는 과정만큼은 정말 괜찮았어요.

하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높지는 않습니다. 차가 절벽에 걸린 상태에서 뒷좌석에 앉은 딸아이의 생존을 위해 자신의 손목을 그어 피를 짜낸다는 극한의 모성애가 그것으로, 일종의 시소와 같이 무게 중심이 뒤로 이동하도록 한 고육지책이라 설명되는데 솔직히 납득이 되지 않았거든요. 전혀 현실적으로 느껴지지가 않았기 때문입니다. 손목을 메스로 그을 정도라면 최후의 순간까지 뭔가 다른 수를 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죠. <<김전일>>의 한 대사처럼 (아마도 <<비련호?>>), 어떻게든 둘이서 함께 살아날 방법을 찾는게 최선이니까요. 결국 둘 다 죽어버리게 되었으니 더더욱 그러합니다. 뭔가 이도저도 아닌 결말이라 씁쓸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일종의 불가능한 상황을 추리로 밝혀내는 작가의 특기는 잘 나타나있지만, 진상의 설득력이 약해 아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운 그런 작품이었습니다. 호연정 변호사 캐릭터는 마음에 든 만큼,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도 활약해 주면 좋겠네요.

<<외딴집에서>>
백수로 미제 사건을 추적하는 취미가 있는 "나"는 우연히 가평군 일대를 공포에 떨게 한 연쇄 토막 살인 사건의 범인을 목격하고 추격하지만, 그에게 되려 습격당해 정신을 잃게 되는데...

10페이지 정도에 불과한 짤막한 꽁트. 1인칭 시점으로 연쇄 토막 살인 현장에 대해 자세하게, 잔혹하게 설명하는 것이 내용의 거의 대부분인 작품입니다. 흔해빠진 공포 영화와 다를바 없는 상상력에 기반한 묘사도 진부할 뿐더러, 마지막에 화자는 이미 죽어 목이 잘린 상태라는 것이 드러나는 반전은 뜬금없기 그지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 점수를 줄 여지가 거의 없는 습작으로, 이 단편집 수록작 중 워스트로 꼽겠습니다.

구석의 노인
개업한지 2년밖에 되지 않는 변호사 성호는 한 살인사건을 수임하게 된다. 국밥집을 남편과 운영하던 강은심 여인이 어느날 남편을 죽인 스토커 장만녕을 살해한 살인 사건으로, 성호는 정당 방위임을 확신하고 변호를 진행한다. 강은심 여인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 의욕이 없었지만 성호의 노력으로 그녀는 무죄 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성호는 사건을 방청한 '구석의 노인' 김옥선으로부터 의외의 진상을 듣게 되는데...


국내에서 보기 드문 법정 미스터리와 안락의자 탐정물이 결합된 이색작. 강은심 여인이 정당 방위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이 성호의 활약으로 증명되는 부분이 법정 미스터리이고, 김옥선 노인을 통해 의외의 진상이 드러나는 부분이 안락의자 탐정물이죠. 김옥선 노인 추리의 근거가 되는 단서들은 대체로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어서 본격물로의 가치도 높은 편입니다.
특히 장만녕이 스토커로 오해받게 된 이유 - 공중 전화로 자기를 숨기고 연락을 했다는 등 - 가 사실은 둘이 몰래 사랑하는 사이었다는 추리로 이어지는 부분은 아주 괜찮았어요.
재판 과정의 디테일이라던가, 정당 방위와 오상 방위의 차이점이 중요하게 언급되는 등 작가의 법률 지식이 돋보인다는 것도 큰 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강은심 여인이 남편에게 폭행을 당하며 살아왔다는 것이 법정이나 주변 인물들을 통해 전혀 언급되지 않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오로지 김옥선 여사의 관찰로 얻은 정보고, 최후의 추리에서 소개되기에 독자는 이 정보를 얻기가 불가능하거든요. "형부에게 그렇게나 구박받고 살아왔지만.." 하는 식으로 사건을 의뢰한 강은심 여인 동생으로부터 정보를 제공받는게 보다 나았을 것입니다.
추리도 비약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긴 힘들어요. 마침 사건 당일 반지를 선물받았다는 것은 작위적이며, 이 반지로 강은심 여인의 마음이 갑자기 바뀌었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무리입니다.

아울러 장만녕, 강은심 커플의 계획 살인도 어설프기 그지 없습니다. CCTV 필름을 사건 후 회수할 생각이었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사건의 핵심 증거물이 될 CCTV 필름이 사라진 것을 경찰이 과연 허투루 넘겼을까요? 이렇게 대충 설명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죠. 차라리 가게 안이 아니라 입구 쪽에서 살해하고 도주했다는 것이 더욱 현실적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국내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형식으로 재미있는 작품이긴 합니다. 단, 추리적으로는 보완이 필요해 보여 감점합니다.

참고로 <<미스테리아 1호>>에 수록되었던 작품으로, 당시에는 별점을 1.5점 주었었네요. 그 정도로 형편없지는 않습니다.

<<시간의 뫼비우스>>
기차 여행 중인 민경에게 옆자리에 앉았던 중년 사내가 말을 건다. 그는 자신이 지금 마약을 가지고 있다는 말로 시작하여, 과거 108번에 걸친 기나긴 시간 여행에 대해 털어놓는데...

이색적인 환상 소설. 타임 슬립을 다루고는 있는데 의식만 과거로 돌아가서 자신의 삶을 지켜보기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다른 타임 슬립 SF와는 차별화되는 작품입니다. 주인공 정영한이 108번에 걸친 인생 반복을 통해 나름의 깨달음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구도 소설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아요. 정영한이 타임 슬립을 하며 가지는 두가지의 미련, 자신을 파멸시킨 악한 김광련과 이철환에 대한 원한과 자신의 실수로 헤어진 첫사랑 채희에 대한 회한을 정리하고 새로운 인생을 사는 것이 결말이니까요.
또 "풍뎅이"로 상징되는 타임 슬립 이론도 꽤 괜찮습니다. 머리 속에 영상으로 그려질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뒷받침되어 있기도 하고요.

아울러 108번을 살아온 사람다운 독특한 의견이 눈길을 끕니다. 그건 바로 청춘의 방황이라면 차라리 발산하는 것이 낫다는 것입니다. 안으로, 안으로만 들어가서는 지나고 보면 후회밖에 남지 않는다, 책 천 권을 읽으면서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여자 백 명을 만나며 젊음을 보낸 사람이나 지나고 보면 같은 것을 깨닫고, 그 깨달음의 깊이도 다르지 않다는 것입니다. 카사노바와 칸트가 같은 레벨이라는 것이죠. 동의는 못하겠지만 특이하긴 하더군요.

하지만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딱히 과학적인 설명이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타임 슬립 자체가 아니라 정영한에 집중한 이야기 구조는 좀 단순합니다. 108번이나 인생을 되돌아 살아왔던 사람에게 남은 것이 첫 사랑에 대한 회환과 원수에 대한 복수 뿐이라면 좀 시시하잖아요. 복수를 포기하는 것도 딱히 설명되고 있지 않고요. 저 같으면 복수를 하고, 마지막 기차를 타서 인생을 바꾸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야기를 듣는 민경의 역할도 애매합니다. 정영한 1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풀어내려갔더라면 더 좋았을텐데, 왜 민경이라는 역할을 등장시켰을까요? 화자도 아니고, 딱히 이야기에 도움을 주는 역할도 아닌데 말이죠. 이런 이야기 끝에 영한이 정말로 사라져버렸다면, 이렇게 담담하게 자리를 지킬 수 있을 사람이 있을지도 의심스럽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굉장히 독특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단, 이야기 완성도면에서 조금 아쉽네요.

<<킬러퀸의 킬러>>
헤어디자이너 성희는 킬러퀸이라는 바에서 펀드매니저라는 피터 최를 만나 사귀게 된다. 이후 장안일보 윤주현 기자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고, 마지막으로 윤주현 기자에게 발송된 메시지를 보낸 휴대폰 추적 결과를 통해 유력한 용의자로 피터 최가 떠오른다.
하지만 사건은 답보 상태에 놓이고, 윤주현의 로커룸에서 출처를 알 수 없는 현금 다발이 발견되는 등 사건은 꼬여만 가서 추리 소설을 쓰는 그의 아내 송지원이 직접 사건 해결에 뛰어드는데...

호구의 영원한 유행어,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를 뱉고 마는 성희였다.

이 단편집에서 재판이나 법조계 인물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정통 추리물인 이색작. 수준도 높은 편입니다. 송지원이 입수한 정보는 모두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며, 추리 역시 현실적이고 설득력있는 범주 안에 들기 때문입니다. 남편과 동명이인인 리틀 윤주현에 얽힌 해프닝도 적절하게 사용되고 있어서 마음에 드네요.

단점이라면 윤주현이 사실은 아내도 모를 정도의 이중 생활을 수년간 벌였다는 것이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정도면 꼬리가 밟혀도 진작에 밟혔어야 할 텐데 말이죠. 그리고 경찰이 "피터 최"의 행적을 제대로 쫓았다면, 결국 그가 윤주현 기자와 동일인물이라는 것도 밝혀졌을 것도 감점 요소입니다. 가끔 추리 소설을 읽다가 드는 생각인데, 작가들이 경찰력을 너무 우습게 보는 경향이 있지 않나 싶어요.

그래도 본 단편집 수록작 중에서는 최고로 치고 싶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죽음이 갈라 놓을 때>>
<<미스테리아>> 5에 수록되었던 단편입니다. 그 당시에도 리뷰를 작성했으며, 제 감상평은 그 때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기에 링크만 겁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링크를 확인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