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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8/21

그리고, 또 그리고 1~5 - 히가시무라 아키코 / 정은서 : 별점 4점

그리고, 또 그리고 1 - 10점
히가시무라 아키코 지음, 정은서 옮김/애니북스

일본의 순정만화가 히가시무라 아키코의 자전 만화.

저는 만화가가 그린 자기 이야기는 무조건 재미있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화의 길>>이라던가 거장의 단편 <<종이요새>>과 같은 고전은 물론, <<아오이 호노오>>, <<만화가 상경기>>, <<바보도 따라할 수 있는 만화 교실>> 등 만화가의 자전적 이야기를 그린 대부분의 작품은 제게 실망을 준 적이 없었으니까요. 전기 만화인 <<블랙잭 창작 비화>>, 아니면 만화가가 주인공인 <<호에로 펜>>, <<바쿠만>>이나 <<만화가의 사랑>>같은 픽션들도 본전치기 이상은 충분했고요. 
이 작품도 제 지론을 증명해 주는 좋은 예입니다.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수작입니다.

고등학교에서 미대를 진학하여 졸업하고, 순정만화가로 데뷰하기까지의 삶에서 그녀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쳤던 화실 선생님인 은사 히다카 켄조 선생과의 이야기를 그리 길지 않은 분량으로 그리고 있는데, 크게 세 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미대를 목표로 했던 미야자키 소녀 아키코의 입시 분투기, 대학에서 방탕한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졸업 후 직장 생활을 하며 만화가를 꿈꾸던 시기의 이야기, 만화가로 데뷰한 뒤 켄조 선생이 폐암으로 죽을 때 까지의 이야기로요. 히가시무라 아키코라는 작가가 미대에 진학하여, 만화가를 꿈꾸다가 데뷰하여 만화가가 되는 과정에 중요했던 인생의 변곡점만을 콕 찍어 그려낸 거지요.

이 중 초반부를 담당하는 입시 분투기와 헐레벌레한 대학 생활 이야기는 굉장히 웃겼습니다. 수험 공부가 아니라 문제 푸는 비결을 터득하여 고득점을 기록했다던가, 단지 게가 먹고 싶어서 가나자와 미대에 지원했다던가 하는 상상을 초월하는 경험이 많은 덕분이에요. 입시 대응 전략은 <<수험의 제왕>>이 떠오르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제가 미대를 다녔기에 더 와 닿는 이야기였습니다. 제 이야기를 잠깐 풀자면, 만화와 애니메이션의 빠져있었던 고등학교 당시의 저는 갑자기 미대 진학을 결심했었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올라가기 직전 겨울 방학에요. 그런 걸 만들어 보고 싶다는 생각에 내렸던 충동적인 결정이었지요. 그래서 1년도 안 되는 짧은 미대 입시 준비 기간을 가졌었지만, 정말 운 좋게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바로 입학할 수 있었지요. 평생 운을 거진 다 끌어 쓴 것 같아요.
그러나 정작 대학 입학 후에는 그 꿈을 바로 접었습니다 너무 힘들다는 걸 금방 알아버렀기 때문이죠. 그래서 대학교 4학년 내내 놀았던 기억 밖에는 없네요. 충동적인 대학 선택과 유흥과 음주밖에 기억에 남지 않은 대학 생활 모두가 이 책에 나오는 히가시무라 아키코와 똑같습니다... 미대에 대해 작가가 말한 아래의 비판은 정확합니다! 미대생 학부형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중반 이후, 대학 졸업 이후 나름의 좌절을 겪다가 만화가가 되는 과정은 담담하게, 진지한 톤으로 전개됩니다. 그렇게 드라마틱하지는 않많은걸 생각하게 했습니다. 당시 자기는 핑계만 대며 도망치기만 했다는 아키코의 후회섞인 고백이 특히 그러했어요. 저도 많이 반성하게 만드네요.
그림이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들까지 그런 줄 알고 대했던 그림 바보 켄조 선생과, 현실과 타협한 속물인 히가시무라 아키코의 갈등도 재미 요소였고요. 사실 미대 진학에 성공한 뒤에도, 켄조 선생이 아키코에게 집착하여 그림을 강요한건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아키코가 작가로 성공할 수 있었던건 은사 켄조 선생님 덕분인건 분명해요. 수백장, 수천장의 그림을 그렸고, 그림과 만화와 삶에 대한 고민을 어린 나이에 충분히 할 수 있었으니까요. 그림이 너무 좋아서, 다른 사람들까지 그런 줄 알았던 그림 바보인데, 그 순수함과 열정은 정말 놀랍고, 이런 분을 어린 시절에 만나 좋은 쪽으로 영향을 받은 아키코가 너무나 부럽기만 합니다.
켄조 선생이 폐암으로 별세하면섣, 끝까지 '그려라'는 말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도 큰 울림을 가져다 줍니다. 켄조 선생님 장례식까지 담담하게 그려나가다가 마지막에 눈물샘을 터트리는 전개도 효과적이었고요. 죽는다는걸 알고 읽기는 했지만, 정말 뭉클했어요.

켄조 선생이 지나치게 자기 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 아키코를 휘둘렀고, 아키코도 지나치게 죄의식이나 후회를 갖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묘사는 다소 아쉽지만, 재미와 성장기 측면에서, 그리고 감동 측면에서 뭐 하나 빠지지 않는 작품입니다. 2015년 만화 대상을 수상했는데, 충분히 그럴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생각되네요. 별점은 5점입니다. 미술에 관심이 있으시다면, 특히 미술 대학 쪽과 관련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도베르만 형사를 그렸던 하라마츠 신지의 <<극도 만화가 이야기>>는 제 지론이 틀렸던 실패작이었습니다. 만화가 자신의 실제 이야기를 그려낸 자전 만화인건 분명한데, 뒤로 가면 갈 수록 억지스러운 마쵸 세계관 설정이 삽입된 기묘한 판타지가 되어버렸지요. 두 눈 뜨고 보기 힘든 졸작으로, 연재도 조기 종료된 듯 하더군요. 다행히 우리나라에 정식 발매되지는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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