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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6/29

천사의 잠 - 기시다 루리코 / 오근영 : 별점 1.5점

천사의 잠 - 4점
기시다 루리코 지음, 오근영 옮김/북스캔(대교북스캔)

교토의 의학부 연구원으로 있는 아키자와 소이치는 연구실 조수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13년 전 불같이 사랑했던 여성, 아키호 히후미를 만난다. 아무 말 없이 사라지듯 떠난 그녀를 지금까지 못 잊고 있던 그는 뜻밖의 만남 앞에서 반가움보다는 알 수 없는 의문에 휩싸인다.
이미 중년이 되어 있어야 할 그녀가 20대의 젊음과 미모를 그대로 지닌 채 그 앞에 나타난 것이다. 당시 두 살배기였던 그녀의 딸은 열다섯 살 소녀로 성장해 있는데 어째서 그녀만은 세월을 거스르듯 오히려 13년 전보다 더 앳된 모습인 걸까?
타오를 듯한 과거의 열정이 되살아나 다시 그녀 주변을 맴돌던 소이치는 그녀에 관한 놀라운 사실을 알아낸다. 그녀를 사랑한 주변 남자들이 모두 수수께끼 같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사라졌던 13년 동안 그녀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살인 단백질 이야기>>로 접했던, 유전병인 치명성가족성불면증 (FFI)를 앓다가 죽어가는 가족이 주요 소재인데 자세하게는 몰라도 대충은 이해하고 있는 내용이라 반가웠습니다. <<살인 단백질 이야기>>를 읽고나서 소설이나 영화 등으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10년도 더 전인 2006년에 이미 관련 작품이 발표가 될 정도였네요.

소재도 반갑고 여성 작가다운 디테일한 묘사도 볼거리입니다. 여러가지 음식들 묘사도 괜찮지만 특은 패션에 대한 시각이 굉장히 인상적이에요. 빨간색 코트에 초록색 정장을 받혀 입는다던가 초록색 캐시미어 재킷에 하늘색 원피스, 노란 부츠에 파란색 가방이라는 히후미의 패션은 화려한 수준을 넘어선, 상상도 잘 안 될 정도의 시대를 앞서간 컬러 조합이니까요. 교토를 주 무대로 하여 은각사, 은사탄 등 각종 명소와 거리를 상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여정 미스터리 느낌도 나서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소재와 약간의 묘사만 괜찮을 뿐, 내용은 수준 이하입니다. 아무리 현실을 뛰어넘는 이야기는 없다지만 실존하는 이탈리아 FFI 가족 이야기보다도 여러모로 부족하거든요. 어딘가에서 괜찮아 보이는 실화를 접한 뒤 깊은 조사 없이 그냥 동기로 이용해서 책을 쓴 것에 지나지 않아 보여요. 이럴 바에야 프리온 어쩌구, 유전병 어쩌구를 소재로 사용할 이유도 없어요. 그냥 심장 이식이 필요했다고 해도 무방했을테니까요. 
일단 범행 동기인 히후미의 에마에 대한 걱정부터가 이해하기 어려워요. 어머니 입장에서 자신의 딸에게 같은 병이 유전되었을지 모른다는건 어마어마한 고민이겠지만 아무런 의학적 검사 없이 그냥 '유전병이니 죽을거야' 라고 생각하는게 말이 되나요? 그것도 프랑스의 유명한 연구소까지 갔다 왔다면서? <<살인 단백질 이야기>>를 보면 이미 20세기 후반에 정확하지는 않더라도 유전자 변이에 대한 검사가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이 책이 발표된 시점에서는 이미 발병 여부는 충분히 알 수 있었을거에요. 최소한의 검사도 없이 무조건 병에 걸릴거라고 믿는다? 최소한 '의학 미스터리'라고 홍보한다면 이런 식으로는 곤란하죠.
그래도 절박한 어머니의 심정만큼은 설득력이 있다고 칩시다. 저 역시 딸이 병을 앓고 있다면 무슨 짓을 해도 고쳐주고 싶을테니까요. 하지만 프랑스 연구소에서 5억엔을 기부받으면 치료약을 완성할 수 있다는 어이없는 설정과 이 5억엔이 동기가 되어 부유한 사람들을 유혹하고 살해하는 연쇄 살인극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는 설득력이 전무합니다. 지금도 프리온 관련 병의 치료제는 나오지도 않았으니 그냥 완벽한 사기죠. 5억엔이라는 애매한 금액은 대체 뭔가 싶고요. 차라리 피실험자로 자원한다는게 더 현실적이었을거에요. 그걸 위해 최소한의 체류비를 목표로 범행을 저질렀다면 말은 되니까요. 

연쇄 살인극 이야기는 더 가관입니다. 핵심 트릭인 '바꿔치기' 부터가 어이 상실이에요. 아무리 지인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나이부터가 차이나는 다른 사람을 대역으로 삼는게 과연 말이 될까요? 그것도 불법 체류자를 자신의 대역으로 마련한다? 완전히 비상식적이에요. 게다가 불법 체류자를 가르쳐서 한 사람의 간호사로 역할을 하도록 만든다니... 간호사들의 업무가 그렇게 호락호락할걸로는 도저히 생각되지 않습니다. 대역 본인도 아니면서 13년전 소이치와의 과거를 완벽하게 기억하고 있다는 것, 히후미 본인은 전혀 다른 사람으로 살아간다는걸 너무 쉽게, 대충 넘기고 있다는 점도 문제고요.

왜 이런 범행을 저지르는지도 설득력ㅇ 약합니다. 13년 전 시점에서 히후미는 굉장한 매력을 지닌 여성으로 묘사되며 나름 유산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5억엔을 위장 결혼과 살인으로 마련하느니 지위가 높은, 예를 들면 의사와 결혼하여 마련하는게 더 현실적이었을겁니다. 최소한 살인 계획을 짜기 전에 그런 노력이라도 했어야죠. 하지만 히후미는 서슴없이 살인을 선택합니다. 그렇다면 5억엔을 마련하려면 범행을 최소화했어야 하는데 이런 저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연쇄 살인극을 벌이고요. 경찰을 우습게 알아도 이건 너무 과합니다. 그리고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더라도 동기가 명확한 사람이 한 명뿐이라면 범행이 연달아 성공할리도 없어요. 공범자를 밝혀내는게 수사의 기본이니 분명히 꼬리를 잡혔을겁니다. 부유한 남편들이 연달아 살해당했다는 소문이 돌면 더 이상 희생자를 구하기도 쉽지 않았을텐데 근거지를 옮기지도 않고 버티는 건 무슨 배짱인가 싶네요.

남자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아키자와 소이치의 존재도 작품을 수렁으로 몰고갑니다. 히후미를 불같이 사랑하여 그녀를 잊지 못하다가 그녀를 '가장'한 다른 사람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원래의 히후미는 가차없이 버린다는 이야기의 결론은 사랑 따위는 없고 결국 그냥 젊고 예쁜게 좋았을 뿐이라는 거니까요. 또 새로운 연인이 히후미와 교제할 때 옆집에 살던 중국에서 온 매춘 소녀 레이카였고, 히후미가 소이치와 동거를 결심한게 레이카를 자신의 대역으로 삼으려던 의도였다는 전개는 작위적이라고 하기도 미안할 정도로 유치하고 어이없기 짝이 없었습니다. 그 당시부터 레이카가 소이치를 마음에 들어했다는 안 넣으니만 못한 설정은 한마디로 쓰레기 더미에 얹은 음식물 쓰레기 느낌입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 소재는 흥미로우나 이를 전혀 살리지 못한 졸작입니다. '의학 미스터리' 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도 함량 미달이고요. 추리적으로도 점수를 줄 부분이 없네요. 오래전 작품으로 이미 절판되었지만 혹시나 눈에 뜨이시더라도 읽어보실 필요는 전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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