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맹인탐정 맥스 캐러도스 - ![]() 어니스트 브래머 지음, 배지은 옮김/손안의책 |
이전 "눈먼탐정 캐러더스"라는 제목의 자유 추리문고로 접했던, 셜록 홈즈의 라이벌들 중 한명인 캐러도스 시리즈 단편집입니다. 모두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다행히도 이전 자유 추리문고 버전과 겹치는 작품은 2편밖에 없네요(하서판 걸작선에서 읽었던 "브룩벤드 장의 비극"까지 포함하면 3편이지만요).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렇게 좋은 작품들은 아닙니다. 추리적으로 별로인 탓입니다. 고전 황금기 작품답지 않은 수준이에요. 어떤 작품은 비약이 너무 심하고("디오니시우스의 동전" 등), 어떤 작품("나이트크로스 신호등 문제" 등)은 단서 추적이 전부라 추리의 여지가 별로 없습니다. "브룩벤드 장의 비극", "틸링 쇼 미스터리" 두 편은 괜찮지만 양적으로 부족해요. 이전 리뷰에서 언급했던 "추리적으로 그다지 정교한 장치는 없다. 이야기의 논리는 합리적이지만 세밀한 복선이나 반전 없이 한방향으로 흘러가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기에 기복이 별로 없고 드라마도 재미가 없으며, 무엇보다도 사건이 시시하다. 무엇보다도 결말이 너무나 한심스러운 것이 가장 큰 단점이다." 말 그대로입니다.
아울러 캐러도스의 능력에 대한 과장이 너무 심합니다. 제목 그대로 장님이기는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오감을 지닌 인물로 묘사되거든요. 인쇄된 신문도 손끝으로 만져 읽을 수 있을 정도니까요(너무 작은 글씨는 무리라서 비서에게 낭독을 부탁한다지만). 거기에 막대한 재산, 경찰 수사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지위에 더해 심장 고동소리를 듣고 명중시킬 수 있는 총솜씨까지! 이 정도면 "데어 데블"에 필적하는 능력자이지요. 추리 소설이 아니라 마블 혹은 DC 코믹스에서의 활동이 필요해 보입니다.
아무래도 추리 소설에서 뭐가 중요한지를 간과한 느낌입니다. 탐정의 개성에 집중하면 잠깐 흥미거리야 될 수 있겠지만, 오래 가기는 힘들죠. 노래 실력 없이 유행과 퍼포먼스에 치중하는 아이돌을 보는 느낌이랄까요. 국내에 소개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다른 셜록 홈즈의 라이벌보다야 이름이라도 널리 알려졌으니 아주 실패한건 아니지만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저와 같은 고전 본격물 애호가가 아니시라면 구태여 찾아 읽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디오니시우스의 동전"
이전 자유 추리문고 버전으로 접했던, 탐정 칼라일과 캐러더스가 처음 만나게 되는 시리즈 첫 단편입니다. 전설적인 명탐정이 첫 등장한다는 것 외에 딱히 언급할 만한 장점은 없으며, 추리적으로 비약이 심하다는 단점만이 도드라집니다. 칼라일이 가져온 동전을 캐러더스가 이전에 만져본 적이 있다 하더라도, 알 수 있는 것은 주인이 시스토크 경이라는 것 뿐입니다. 동전의 진위 여부를 감정할 수 있을지는 차치하고서라도, 헬렌 브루네시가 니나 브룬이라는 가명을 계속 써가며 하녀로 일한다는건 추리의 영역도 아니고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나이트크로스 신호등 문제"
"그때 성공을 갈구하는 내 욕망의 잔에 자네의 조롱을 가득 들이붓는 거야." - 캐러더스가 칼라일에게 도와줄 것을 약속하며 하는 말
"지금으로서는 아무리 작은 주택이라도 정부의 합법적인 약탈로부터 안전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 주식 투자를 하지 말 것을 권유하는 캐러더스에게 답하는 파킨슨의 대답
나이트크로스 역에서 발생한 중앙 교외선의 충돌사고로 6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기관사는 통과 신호를 받았다고 주장했고, 신호원은 정지 신호를 바꾼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칼라일은 기관사 허친스 씨의 의뢰로 조사에 나선 뒤 캐러더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진상은 신호등을 바꿔치기한 범인이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내용을 보면 이게 과연 사립탐정이 나서서 수사했어야 하는지 의문이에요. 두 명의 증언이 모두 사실이라면 제3자의 조작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해 보는 것이 상식이니까요. 캐러더스의 추리도 거의 없고, 탐문 수사에 의지하는게 전부입니다.
마지막에 드리슈나에게 자살을 권유하는 결말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셜록 홈즈라면 이런 인정을 베풀지 않았을 겁니다. 악당은 지옥으로 가야죠. 또 범인에게 유서도 없는 자살의 기회를 제공한다면 대체 불쌍한 기관사는 어떻게 풀어줄 셈인걸까요?
딱 한 가지, 범인 드리슈나가 수십 명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지 않으며, 되려 영국 정부와 군대가 인도의 죄 없는 수천 명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논리로 자신이 영웅이라고 주장하는 장면만큼은 인상적입니다.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고려해보면 놀라울 정도죠.
"당신은 당신의 정부와 군대가 내 나라의 죄 없는 수천 명의 죽음에 책임이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까?"
그래도 저 한 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역부족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브룩벤드 장의 비극"
크리크와 결혼한 여동생 밀리센트의 생명이 걱정된 홀리어는 칼라일에게 조사를 부탁했다. 현장 조사를 나간 캐러더스는 크리크의 트릭을 눈치채고 범행을 벌일 날짜를 예측하여 잠복하는데...
이런 저런 앤솔러지 등에서도 접해본 나름 대표작입니다. 범인이 공들여 만든 과학적인 트릭이 돋보이지요. 지금 읽기에는 많이 뒤처졌으며, 범인 크리크가 이를 위해 지나칠 정도로 세공을 많이 했다는 단점은 있지만 발표된 시대를 감안하면 큰 단점은 아닙니다. 당시에는 충분히 벼락을 맞아 죽었을 것이라는 주장이 먹혔을 테니까요. 의외성 있는, "사랑과 전쟁"을 연상케하는 막장 결말도 아주 괜찮았어요. 지금 읽어도 낡아보이지 않으며, 크리크의 행동도 살짝 이해할 수 있게 만들거든요.
낡긴 했지만 대표작다운, 읽을만한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영리한 스트레이드웨이트 부인"
"어떤 상황에서 누가 뭘 할지를 정확히 파악하려면 그 사람의 행동이 지니는 단 하나의 특성만 연구하면 된다는 것이었지." - 캐러더스가 칼라일에게 추리법에 대한 단상을 어느 철학자의 말을 인용하며 하는 말.
"원의 호가 아주 작더라도 그 호를 가지고 전체 원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습니다." - 하인들은 아는 게 거의 없을 거라는 스트레이드웨이트 부인의 말에 대한 캐러더스의 답.
이전 자유 추리문고 버전으로도 읽었던 작품. 다시 읽어도 유치하고 조잡한 사기극입니다. 자기 물건이 아닌 물건으로 보험에 가입한다, 그리고 그 물건을 잃어버린 척 하고 보험금을 타낸다는 건데 발표 당시에는 먹혔을지 모르지만, 지금 읽기에는 너무 순진한 발상이었습니다. 부부의 잘못이 크지만 보험사가 과연 이렇게 허술하게 보험을 가입해 주었을지도 의문이고요.
또 목걸이를 잃어버린 척 위장한 것은 명백한 범죄입니다. 5천 파운드를 편취하려는 사기 행각이니까요. 그런데 남편이 목걸이를 반납하려 했다손 치더라도(그것도 의사를 처음부터 밝힌 게 아니라 캐러더스의 강압에 못 이긴 것), 이를 캐러더스가 받아들인 것은 엄연한 직권 남용입니다.
추리적으로도 언급할 게 별로 없습니다. 캐러더스가 부인 장갑의 향수 냄새가 다른 것을 눈치채고 진상을 알아낸다는 것만큼은 캐러더스의 특징을 잘 살리고 있지만, 문제는 이 정보가 독자에게 공정히 제공되지 않는다는 점이죠.
범죄라 하기도 어려운, 일종의 부르주아 상황극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배우 해리의 마지막 업적"
이 단편집에서 돋보이는 불가능 범죄물입니다. 진상도 합리적이에요. '범인이 변장하여 12개의 금고를 임대하여 열쇠를 복사하고 반납한다. 이후 아내를 통해 매니저 장부를 몰래 사진을 찍어 암호를 알아낸 뒤, 소유자로 변장하여 방문한다'는 것인데 꽤 그럴싸합니다. 캐러더스의 불에 타지 않는다는 호텔 (결국 화재로 전소해버린)에 대한 견해도 인상적입니다. "그 호텔이 화재에 안전하다고 확신한 조심성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인데 이 이야기만 가지고 소설을 쓸 수 있을 정도에요.
하지만 해리의 아내가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건 운과 우연 덕분이었으며, 변장이 만능처럼 사용된건 문제입니다. 아무리 변장이 특기라도 해도 한두 명도 아닌 열 두명을 변장했다? 무리입니다. 마지막에 범인 해리가 교회 간증회에서 구원을 얻어 훔친 물건을 모두 되돌려 준다는 결말도 어처구니가 없었고요.
또 캐러더스가 범인이 미국인일 것이라고 추리한 이유도 비합리적입니다. 현대 미국의 영민하고 창의적인 분위기가 그를 기발한 장치의 전문가로 키워낸 것이라고? 이건 뭔 말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래도 이 단편집에 수록된 작품 중 몇 안 되는 본격 추리물인 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틸링 쇼 미스터리"
조금 올드하지만 '팜므 파탈'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하지 않은 매들린 캐릭터가 돋보였고, 지나칠 정도로 운이 좋은 프랭크에게 의심이 가게끔 하는 전개도 좋았습니다.
우선 매들린부터 살펴보자면, 프랭크가 나쁜 놈이기는 하지만 일말의 죄책감 없이 캐러더스를 이용하여 그를 살인범으로 만드려는 조작을 벌이는 전개가 예상 외라 깜짝 놀랐습니다. 이 당시 추리 소설에서는 보기 드문, 굉장히 활동적이면서도 입체적인 여성 캐릭터로 생각됩니다.
또 매들린의 조작에 의해 프랭크가 범인인 것처럼 보이게 만들지만, 결국 최초 알려진(거짓말같은) 진상이 진짜이며, 의뢰인의 의뢰 후 독자에게 공유된 증언과 증거가 모두 조작되었다는 것 역시 시대를 앞서간 전개였고요.
물론 프랭크의 시계가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가 될 수 없다는 것은 단점이긴 합니다. 캐러더스는 여기서 진상을 알고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눈치챘지만, 독자는 시계를 물리적으로 확인할 수 없으니 끌려갈 수밖에 없거든요.
그래도 아주 신선하고 놀라운 요소가 많기에 개인적으로 이 단편집의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파운틴 코티지의 소동"
"사람들은 기이하고 알 수 없는 이런저런 상황들을 운이라는 이름으로 한데 묶어버리곤 하지요" - 엘시가 최근 닥친 불운을 이야기하자.칼라일의 사랑하는 조카딸 엘시 부부에게 이웃집에서 콩팥 요리를 정원에 던졌고, 멀쩡한 정원사가 저렴한 가격에 일하겠다고 자원하는 등의 기묘한 일이 벌어졌다. 캐러더스는 이 모든 일에 숨겨진 진상이 있다는 것을 눈치채는데...
일종의 일상계. 사실 지금 읽기에는 좀 뻔합니다. 원래 이 집의 집사였던 옆집 남자는 이 집에 세들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원래 이 집의 정원사였던 남자가 싼 값에 정원을 가꾸어 주겠다고 자원한다면 그 이유는 뭐겠습니까? 집에 뭔가 숨겨져 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독자에게 보물 찾기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해 주어야 하는데... 아쉽게도 거기까지는 나아가지 못했습니다. 암호가 숨겨져 있다는 책인 "돔 너머의 화염"이 독자에게 제공되지 않기에 암호문을 푸는 재미는 전무하고 그냥 캐러더스의 설명에만 의지하고 있거든요.
그 외 콩팥을 던진 이유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부분에 더해, 도움을 당당하게 생각하는 염치없는 엘시 캐릭터는 정말이지 호감을 갖기 어려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한마디로 그냥저냥한 소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어둠 속의 게임"
"귀도는 외국인이었고 그 중에서도 최악인 이탈리아인이었다." - 귀도에 대한 소개 중. 발로텔리에게 분노한 영국 팬이 쓴 글인가 싶을 정도로 편파적이라 외려 인상적이군요.비델 경감이 X 백작부인의 의뢰로 중요한 서류를 훔친 귀도 일당의 체포를 도와달라는 부탁을 해 왔다. 흔쾌히 허락한 캐러더스에게 대영 박물관에서 귀중한 동전이 도둑맞았다는 전화가 걸려왔고, 이후 정체 모를 이탈리아 여인이 귀중한 동전을 발굴했다며 찾아오는데...
첫 번째 이야기인 "디오니시우스의 동전" 사건에 등장했던 위조범 동피에르, 그의 부인 니나 브룬이 등장하여 단편집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입니다. 일종의 수미쌍관식 구조라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사건은 별게 없어요. 동피에르와 니나 브룬이 동전을 미끼로 캐러더스를 유괴한 후, 귀도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가두려는게 전부인 탓입니다. 이후 납치된 캐러더스가 기지를 발휘하여 은신처를 정전시킨 후, 제목 그대로 어둠 속에서 납치범들과 대치한다는 전개로 이어지는데 이래서야 추리물보다는 모험물에 가까와 보입니다.
때문에 추리적으로 특기할 만한 부분은 없습니다. 오히려 마지막에 비델 경감이 어떻게 은신처를 덮쳤는지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등의 약점만 도드라질 뿐이에요. 비록 캐러더스가 입구에 흔적을 남겼더라 하더라도, 그것만 가지고는 불충분했을 텐데 말이지요. 또 과연 어둡다 하더라도 맹인 1명에게 2명, 아니 3명(니나 브룬까지)의 악당이 꼼짝없이 털리는 것도 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캐러더스의 액션(?)이 펼쳐진다는 점은 놀랍긴 합니다. "데어데블"의 선구자격인 작품이랄까요. 어둠 속 클라이맥스의 긴장감도 대단했고요. 추리물로서 가치는 거의 없지만 만화 같은 극적 전개는 괜찮았습니다. 시대를 앞서간 장님 슈퍼 히어로물이랄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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