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신들의 연기, 담배 -
에릭 번스 지음, 박중서 옮김/책세상 |
담배의 역사를 미국 중심의 근, 현대사와 엮어 설명하는 역사서입니다. 담배가 서구 문명을 어떻게 좌우했는지를 알려줍니다. 마야인, 아메리카 인디언들의 담배에 대한 인식에서 시작하는 큰 통사적 흐름 속에서, 역사 속에서 담배가 어떠한 역할을 하였는지를 자세히 설명해 주거든요. 그러면서 담배를 발전시키고 유행시키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운 여러 인물들의 다양한 에피소드도 함께 펼쳐집니다. 잘 모르는 인물들도 많지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월터 롤리 경, 포카혼타스의 남편 존 롤프, 찰스 디킨스와 마크 트웨인 등 유명한 인물들의 이야기도 많아서 재미있었습니다. 교양과 재미가 잘 결합되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마야인들이 신앙을 만들어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담배였고, 이를 알게 된 유럽인들이 담배를 접한 후 피우기 시작한 것은 "처방"의 용도가 컸다고 합니다. "대지가 인류를 위해 길러낸 풀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고 귀중한 것"으로 여길 정도로 말이죠. 콜럼버스가 유럽에 들여온 담배는 에스파냐의 역사가 만리코 오브레곤이 "금 못지않게 값지고, 어쩌면 금 못지않게 해로운 것"이라고 언급했다는데, 아주 그럴싸합니다.
콜럼버스의 부하로 최초의 흡연자 중 한 명인 로드리고 데 헤레스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입니다. 그가 담배 피우는 모습 때문에 주변 시민들은 그가 악마에게 사로잡혔다, 그가 내뿜는 연기는 지옥의 불에서 뿜어져 나오는 것이라고 믿어 종교재판소에 신고했고, 아마도 유럽 최초의 흡연자 데 헤레스는 재산과 토지를 몰수당한 뒤 무려 3~7년형을 선고받았다고 하네요.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잉글랜드에 흡연 열풍을 불러일으킨 월터 롤리 경에 대한 일화들도 화려합니다. 이후의 종교적, 정치적인 탄압과 맞물리는 그의 최후도 아주 인상적이에요. 처형당하기 직전 마지막에 담배를 피웠다고 하는데, 전기작가 존 오브리의 말 그대로 "그것이야말로 그의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기에 좋은, 적절한 일이었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이후 미국이 식민지로 개발되는데, 담배가 큰 역할을 했다는건 처음 알게 된 사실입니다. 정착민 중 한 명이 너무나 굶주린 나머지 아내 소금구이(!)를 만들 정도로 힘든 환경이었는데, 포카혼타스의 남편 존 롤프가 담배를 재배하여 가공하는 데 성공한 후, 해외 수출로 거액을 벌었던게 주효했다는군요. 당시 담뱃잎의 가치가 워낙 높아서, 한때는 화폐 취급을 받을 정도로 잘나갔다고 하네요. 또 이러한 담배 재배는 노예 제도를 기반으로 한 대농장 체제로 발전했고, 이러한 대농장의 주인들이 운영 등에 능력을 발휘하여 결국 식민지에서 벗어나 독립으로 이끄는 인물들이 되었다니 정말 미국 역사에 빼 놓을 수 없는 작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독립전쟁과 남북전쟁을 거치며 담뱃대에서 엽궐련으로 흡연자들이 옮겨가는 중, 씹는 담배가 유행한 걸 당대의 역사적 흐름과 연결하는 시선도 인상적입니다. 약동하는 신세계답게 양손이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인데, 정말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황제의 코담배 케이스" 관련 사연도 재미납니다. 재채기를 유발해서 처음에는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코담배의 장점 - 깨끗하고, 냄새도 나지 않고, 연기 구름도 만들지 않는 등 - 에 더해 왕실의 속물 근성을 자극했기 때문에 상류 계급에서 유행하게 되었으며, 이들의 과시적인 행위에 어울리는 고급 케이스가 등장한 것도 이유의 하나라고 합니다. 온갖 귀금속으로 치장한 물건들도 많았다니, 유명 소설에 중요한 보물로 나온 것도 이해가 되네요.
다음에는 담배의 유행이 지궐련으로 넘어가는 과정이 1차 세계대전과 함께 설명됩니다. 쉽게 담배를 피울 수 있다는 장점이 군인들에게 어필하였기에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으며, 본색의 지궐련 제조기가 발명되어 저렴한 가격에 공급이 가능하게 되는 등 복합적 이유가 작용한 탓으로 지궐련의 붐이 일어났습니다. 존 J. 퍼싱 장군부터가 "이번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총알만큼이나 많은 담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니, 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리고 흡연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면서 거대 담배 회사가 출현하고, 담배를 팔기 위한 광고가 대대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합니다. 그만큼 돈을 많이 벌었기 때문이겠지만, 여튼 현대 광고에도 담배가 정말 기여한 것이 많아서 놀랐습니다. 흡사 에세이에 가까웠던 장황한 설명조의 광고가 단순한 브랜드와 카피 위주의 광고로 바뀐 것이 '캐멀' 광고부터였다는 것에서 시작하는데, 이러한 광고의 최대 걸작으로 소개되는 것은 아메리칸 토바코(럭키 스트라이크로 유명한) 회사의 사주 힐이 만든 "단 것 대신 럭키를 집으세요."입니다. 여성 흡연자를 노린 선전 문구로 광고 홍보 전문가 에드워드 버네이스의 솜씨가 결합되어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다고 하네요. 이 사람의 전략은 지금 보아도 충분히 인상적으로, 럭키 스트라이크의 초록색이 촌스럽다고 생각한 여성들에게 어필하기 위해 모든 마케팅 채널을 동원하여 초록색을 유행 색으로 만든다는 식입니다. 대중이 좋아하는 영화에 PPL 투자는 기본이었고 말이죠.
하지만 점차 담배의 악영향이 분석되고, 1964년 미국 보건위생국장 루서 테리의 발표를 통해 담배가 만병의 근원임이 공표된 뒤 서서히 사양세를 걷는 것으로 책은 마무리됩니다.
이렇게 새롭고 재미있는 내용이 가득한 덕분에 5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책인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담배가 정말로 중요한 역할을 했구나 싶은 생각도 많이 들고요. 도판이 부족한 것은 살짝 아쉽긴 하지만, 도판이 중요한 책은 아니기에 큰 단점은 아닙니다.
무엇보다도 흡연자라면 굉장히 반가울 요소가 많은 책입니다. 담배가 인류 문화와 역사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 이 책 한 권이면 완벽하게 깨우칠 수 있고요. 비록 몸에는 좋지 않지만, 과거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이것이 신과 소통하는 방법이라 생각하고 담배를 피운다면 기분은 조금 더 좋아지지 않을까 싶기도 하네요.
흡연자이시면서 역사에 관심이 많으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에릭 번스 지음, 박중서 옮김/책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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