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의 거리 - 엘러리 퀸 지음, 현재훈 옮김/동서문화동판주식회사 |
소설을 쓰기 위해 엘러리 스미스라는 가명으로 한적한 시골마을 라이츠빌로 찾아온 엘러리 퀸은 마을 창시자의 후예이자 지역 유지인 은행장 라이츠 씨의 집에 세를 든 후 가족과 친분을 맺는다. 라이츠의 세 딸은 모두 미인이지만 둘째 노라는 약혼자가 사라져 버려 몇년째 집안에만 은둔하고 있는 상태. 하지만 약혼자 짐이 돌연 돌아오고 둘은 결혼하여 행복한 생활을 보낸다.
그러던 어느날, 짐의 짐을 옮기던 엘러리와 셋째딸 패트리샤는 짐이 쓴, 아내 살해를 예고하는 듯한 편지를 발견하고 짐을 철저하게 감시한다. 이윽고 새해 전야 파티에서 노라가 한두모금 마시던, 짐이 만든 칵테일을 억지로 빼앗아 마신 짐의 동생 로즈매리가 독살당한 후 정황 증거로 짐은 범인으로 몰리는데...
엘러리 퀸의 기념비적인 라이츠빌 시리즈 제 1편. 1942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현재까지도 추리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작품인데 게으른 탓에 이제서야 읽게 되었습니다.
가공의 마을 라이츠빌의 폐쇄적인 분위기와 소도시 특유의 복잡하게 얽힌 인간관계, 그리고 사건의 주 대상인 라이츠가의 미녀 3자매 같은 설정은 명백히 이후 작품에 강력한 영향을 준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특히 일본 본격물에 비슷한 설정과 묘사가 많죠.
하지만 소설의 구성은 기념비적 장편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단순한 편입니다. 단 한 사람의 살인사건을 놓고 라이츠빌 전체가 휩쓸려 들어가는 내용으로 초, 중반부는 살인계획을 눈치챈 엘러리와 패트리샤의 고민을 다루고 있다면 중반 이후에는 실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난 이후 라이츠빌의 군중 묘사와 법정극에 중심을 두고 서술되고 있습니다.
그래도 작가 명성에 걸맞게 추리적인 장치는 굉장히 탄탄한 편이며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드라마와 잘 조화를 이루고 있어서 과거 국명시리즈 보다는 소설 자체의 완성도는 더욱 높다 생각됩니다. 국명 시리즈는 사실 트릭에 너무 집중하고 있어서 실제 이야기 전개의 현실성이 떨어지는 부분이 너무 많았던 반면, 이 작품에서는 단 한건의 살인사건만 등장하며 살인이 최소한이나마 가능했던 인물이 너무나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정통 퍼즐 미스테리보다 추리적 흥미는 덜할지 모르나 반대로 보다 현실감있는 전개를 보여주는 것이 독특하고 좋았기 때문이에요. 엘러리 특유의 추리쇼같은 사건 해결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점도 마음에 들었고요.
왠지 비극적인 결말과 인간 관계의 묘사가 많이 등장하는 점은 드루리 레인이 등장하는 "비극" 시리즈가 연상되는데, 엘러리 퀸의 트릭과 드루리 레인의 서정성이 합쳐진 시너지 효과가 제대로 나타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그 외에도 법정극의 묘사도 좋고 라이츠빌이라는 마을과 마을 사람들에 대한 묘사 역시 읽는 재미를 느끼게끔 하는 디테일이 잘 살아있으며 퀸의 잘난척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을만 합니다.
딱 하나 아쉬웠던 것은 여주인공이라고 할만한 패트리샤 라이트의 묘사가 그간 엘러리 퀸 작품에 등장하던 말괄량이 아가씨에서 한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점 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엘러리는 여성 캐릭터 묘사에는 서투른 것 같아요.
결론내리자면 그간 작품들의 장점을 살리고 단점을 덜어낸 것이 돋보이는 작품으로 제가 읽었던 엘러리 퀸 장편 중에서는 최고작이라 하겠습니다. 헌책방에서 운 좋게 구입했고 정태원씨가 번역한 전설의 시그마북스로 구해서 더욱 좋았고요. 역사적인 작품이자 엘러리 퀸 작품중에서도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인데 이제서야 읽어서 좀 후회가 되기도 하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과거 읽었었던 라이츠빌 시리즈 "열흘간의 불가사의"와 "폭스가의 살인"도 다시 한번 읽어봐야 할 것 같네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