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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0

맹독 - 도로시 L. 세이어즈 / 박현주 : 별점 2.5점

맹독 - 6점
도로시 L. 세이어즈 지음, 박현주 옮김/시공사
<하기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성 추리소설가 해리엇 베인은 전 애인 필립 보이스 비소 독살 혐의로 기소된다. 그녀에게 반한 피터 윔지경은 배심원 합의 실패로 생긴 한달간의 유예기간을 이용하여 그녀의 무죄를 밝혀내기 위해 사건에 뛰어든다.

피터 윔지경 시리즈 중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 MWA 추천 베스트 미스터리 100 에도 선정되어 있죠. (순위는 36위)
워낙에 유명한 시리즈라 두어권 읽어보긴 했지만 모두 기대 이하라 딱히 읽을 생각을 하지 읺았었는데 읽어보니 의외로 재미있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이 시리즈가 재미없었던 가장 큰 이유인 피터경 캐릭터가 아주 친근하게 다가왔기 때문이에요.

물론 이 작품도 말하는 중간중간 유식한 티를 내는 인용 문구라던가 돈지랄과 같은 여러가지 재수없는 언행과 첫눈에 반했다는 이유만으로 해리엇 베인에게 충성을 다하는 신사 중의 신사, 귀족 중의 귀족과 같은 여자들의 판타지를 집대성한 사기캐릭터 속성은 여전합니다만... 그래도 꽤나 유쾌하고 유머러스하게 묘사되고 있습니다. 공부도 잘하고 돈도 많은 엄마 친구 아들이지만 허술한데도 있고 재미도 있어서 딱히 밉상은 아닌 그런 인물처럼요. 연예인으로 따진다면 유희열같달까요? (물론 피터경은 변태는 아닙니다)
여튼 <여신님>의 베르단디를 여자들이 바라보는 시각이 이렇지 않을까 싶은데 남자가 보기에는 별로 와닿는 점은 없지만 당대 인기 시리즈의 주인공다운 맛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작품 뒤의 해설을 보니 도로시 세이어즈 여사 본인이 작중 해리엇 베인과 같이 농락당하고 버려진 경험이 있다는데 그러한 비참한 현실을 정 반대로 심혈을 투영한 그야말로 이상향인 것이겠죠.
그 외에 다른 인물들도 인상적입니다. 못하는게 없는 집사 번터 등 조연들의 활약도 깨알같은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종교로 개심한 전직 금고털이 빌이었어요. 평범한 열쇠장수로 정직하고 훌륭하게 살고 있다고 피터경이 말하자 "이런 승리를 주신 주님께 감사를!" 외치는 인물인데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이러한 캐릭터 성은 번역 덕이 큰 것 같은데 이전에 "동서추리문고"로 읽었었던 다른 작품들도 제대로 번역되면 그런대로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그러나 이러한 캐릭터들 말고는 작품 자체의 완성도가 높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추리적으로 기대 이하이기 때문이에요. 마지막에 피터경이 "비소과자"를 대접하며 벌인 추리쇼는 꽤 기발하고 재미있지만 그 외에는 고전 황금기 걸작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일단 범인이 누구인지와 (유언장 위조가 밝혀진 시점에는 확정이죠) 동기가 작품 초반에 밝혀지는데 경찰 수사는 전혀 없고 피터경이 사적인 네트워크와 범죄행위(?)를 통해 진상을 밝혀낸다는 전개는 이치에 맞지 않죠. 결정적 역할은 머치슨양이나 클림슨양같은 피터경의 부하가 담당할 뿐더러 단서를 밝혀내는 과정에 운이 너무 많이 작용하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머치슨양이 직접 자물쇠따기를 배우는 등의 디테일은 괜찮지만 클림슨양이 유언장을 찾아내는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라고 밖에는 할 수 없으니까요. 이후 머치슨양이 비밀공간(?)을 발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고요.
또 트릭으로 승부하는 부분은 딱 하나 "어떻게 비소를 먹일 수 있었는가?" 밖에는 없으나 이 역시 뛰어나다고 보기 어려워요.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독에 대한 내성을 키운다는게 가능한 이론인지 잘 모르겠거든요. 꾸준히 연습해봤자 결국 몸에 독이 축적되어 죽어버리는 것이 더 설득력있어 보입니다. 대실 해밋의 단편 <파리 종이>처럼 말이죠. 정말로 가능했다 하더라도 몸이 많이 맛이 갔을게 분명할테고요.
몇몇 작위적인 설정도 눈에 거슬리는데 몰래 어쿼트의 모발을 입수하여 비소 검사를 한다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유언장과 같은 명백한 정황증거가 포착된 이상 그냥 어쿼트를 체포하여 모발 검사를 하는게 당연하겠죠. 이런 부분에서 공권력 위에 군림하려는 피터경의 속물적인 귀족 마인드가 강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유명 시리즈물로 피터경의 진면목을 제대로 알 수 있다는 장점과 함께 피터경의 부하인 여성들의 활약을 여자 스파이처럼 긴장감있게 그리는 솜씨는 나쁘지 않으며 007시리즈를 보는 듯한 경쾌함은 시대를 앞서간 느낌마저 들긴 합니다. 허나 제가 기대했던 추리적 완성도를 갖추었다고 보기는 어렵기에 감점합니다. 당대 애거사 크리스티 여사와 자웅을 겨루었다는 것이 솔직히 믿기지 않는데 추리적인 부분보다는 캐릭터가 더 인기를 끈 것으로 추측되네요.

그래도 제가 읽었던 피터 윔지경 시리즈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작품임에는 분명한 만큼 아직 피터경 시리즈를 읽지 않으신 분들께 먼저 권해드립니다. 여성 독자분들이라면 더욱 좋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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