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드랴프카의 차례 -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권영주 옮김/엘릭시르 |
가미야마 고등학교 축제에 참석한 고전부에게 위기가 닥친다. 달랑 30부만 인쇄하려 했던 문집 <빙과>가 마야카의 실수로 200부가 인쇄되어 전달된 것. 고전부는 3일간의 축제 기간 중 200부 판매를 위해 최대한의 노력을 다하는데 그 와중에 축제 참가한 참가단체를 대상으로 장난과 같은 물건을 훔치는 "십문자"라는 괴도 사건과 얽히게 된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고전부 시리즈 세번째 작품. 학교 축제를 무대로 한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각 캐릭터별로 1인칭 시점의 묘사가 이어지는 전개가 독특한데 탐정역의 호타로는 "에너지 절약"이라는 신조에 맞는 여전한 삶, 여전한 모습을 보여주지만 다른 고전부원들에 대한 비중과 묘사가 상당히 커지고 캐릭터별로 명확한 역할을 부여한 것이 눈에 뜨이네요. 그 중에서도 가장 가장 놀라운 것은 주변인에 머무르는 듯 했던 후쿠베입니다. 이른바 데이터베이스라는 역할에 충실하지만 데이터베이스 자체만으로도 퀴즈 경연대회에서 준우승, 요리 대회에서 팀을 이끌어 우승하는 등의 활약을 보이는 등 상당한 실력자라는 것을 주위에 강하게 어필하고 있으며 본인 스스로도 호타로에게 자극받아 스스로 사건 해결에 뛰어들 결심을 하는 등 확실히 "성장했다"는 것이 작중에서 강하게 느껴지기 때문이에요. 가장 큰 주제 중 하나인 "기대"라는 말에 가장 부합하는 고전부원이기도 하고 말이죠. '기대라는 것은 체념에서 나오는 말로 다른 사람에게 기대할 수 밖에 없는 괴로움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부담감보다 크다' 는 것인데 이 주제는 후쿠베 - 오레키는 물론 안죠 하루나와 코치 아야코, 구가야마와 다나베 지로의 관계에 그대로 대입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뭐 개인적으로는 '기대'라는 말로 포장해봤자 결국 '질투'일 수 밖에 없는 것이지만....
마야카도 잔소리꾼만은 아니고 만연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선배에 대항하는 강한 자기 주장이라던가 요리 대회에서의 활약이 인상적으로 그려집니다.
그런데 치탄다의 비중은 조금 애매하네요. 그녀도 나름대로 부탁과 협상 등의 노력으로 성장한 것은 물론이고 요리 대회에서의 활약상 (기세두부?)은 눈부시긴 합니다. 허나 실제로 고전부의 문제 해결이나 십문자 사건 해결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고 보기는 어려워요. 영화 상영하는 곳에서의 합동 판매는 실력자 이리스 선배와 안면이 있었던 덕분일 뿐이며 그 외에는 벽신문부와의 교섭 등에서 실패만 거듭했으니 말이죠. 십문자 사건이 불거진 후에는 그녀의 노력은 사실상 불필요했고요. (다들 고전부와 이야기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으니...)
여튼, 이러한 고전부원들의 활약에 더하여 추리물로서의 가치도 괜찮은 편입니다. "십문자" 사건이 일본어 50음도와 엮인 암호라는 설정이야 딱히 새로울 것은 없다 해도 (또 한국에서 풀기에는 너무나 어려운 트릭이기도 하고) 풀어나가는 방식이 나쁘지 않을 뿐더러 디테일한 소재와 복선을 잘 활용한 전개가 요네자와 호노부스러워서 마음에 들었거든요. 특히 앞부분에서 언급된 동인 만화 <저녁에는 송장이>가 주요 단서로 활용되는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호타로의 추리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린 것이 누군지를 찾아내는 지탄다와 마야카의 활약, 필명인 안신인 타쿠하가 "아지무"라는 것을 밝히는 데이터 베이스 후쿠베의 활약 등 고전부원들의 힘이 합쳐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거든요. 오랫만에 4위일체 활약이랄까요?
그러나 몇몇 부분은 조금 아쉽긴 합니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범행의 목적이에요. 십문자의 정체를 밝히는 과정까지의 추리는 설득력이 있는데 범행 목적이 너무 어이가 없어서 전혀 와닿지 못하거든요. 평범한 인물이 노력하지 않는 천재를 자극하기 위함이라는 동기야 나무랄데 없지만 반쯤은 범죄에 가까운 행동을 취해가면서 알릴 내용은 아니라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쿠“ 순서를 건너뛰어 그것은 이미 잃어버린것이다. 바로 <쿠드랴프카의 차례>다... 라는 것을 구가야마에게 알리기 위해서라는 논리의 비약이 어떻게 성립하는걸까요? 물론 <쿠드랴프카의 차례> 원작 줄거리와 같아서 구가야마 본인은 알 수도 있었을지도 모르나 몇몇 당사자만 알 수 있는 극도로 제한적인 광고 메세지에 이렇게까지 품을 들일 이유는 도무지 모르겠습니다.
또 핵심 증거인 학원제 가이드 설명 페이지를 마지막에 공개한 것은 옥의 티입니다. 독자들은 앞에 정리된 가이드만 열심히 보고 있었는데 실제 펼쳐져있었다는 페이지는 구성이 다르다는 것은 반칙이라 공점함에서 점수를 주기 어려웠거든요.
마지막으로 고전부의 위기처럼 묘사되는 문집 200권도 판매가격으로만 계산해도 4만엔 정도... 부원 1명이 나누면 1만엔씩인데 큰 돈이기는 해도 그닥 부담될 것 같지는 않은 비용이라 (어른들이라면 술한번 먹을 정도?) 딱히 위기라 생각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도 성장물이라는 청춘 드라마스러운 전개에 더해 일상계 추리물로서도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보여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추리적으로는 조금의 아쉬움이 있어서 별점은 3점입니다만 읽는 재미하나만큼은 정말 높이 평가하고 싶네요. 고전부원들의 시각으로 전해지는 학원제의 디테일, 빨간 클립 작전이 연상되는 "볏짚 프로토콜", 요리 시합에서의 긴장감과 드라마틱한 승부와 같은 잔재미도 충부한 만큼 읽지 않으신 분들께 일독을 권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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