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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06

역사로 남은 조선의 살인과 재판 - 이번영 : 별점 3점

역사로 남은 조선의 살인과 재판 - 6점
이번영 지음/이른아침

정조가 남긴 <<심리록>>을 기반으로, 다산 정약용의 <<흠흠신서>> 내용을 덧붙여 정조 당시 대표적 옥사 18건을 추린 후 사건의 전말과 소송의 과정을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책.  참고로 <<심리록>>은 정조가 자신이 관여한 모든 중범죄 소송에 대하여 그 과정과 결과, 판단의 근거 등을 일일이 기록으로 남긴 뒤 이를 묶어 편찬한 종합적인 형사소송 판례집이라고 합니다.

무려 1,850건이나 되는 <<심리록>> 사건 중 대표적인 사건 18건인 덕분에 기본 재미는 보장됩니다. 소설 형식으로 쓰여져 읽기 편하다는 것 역시 큰 장점이에요. 정조 시절 형사 사건에 대한 수사 및 심문, 최종 판결에 이르는 과정을 사건별로 디테일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자료적인 가치도 아주 높고요.

읽으면서 놀랐던 점은 크게 두가지입니다. 첫번째는 후진적인 끔찍한 사건들, 그리고 두번째는 그것과 비교되는 생각보다 놀라울 정도의 치밀한 과학 수사 및 판결 과정입니다.

문중 며느리가 간음의 소문이 났다는 이유로 친오빠까지 합세하여 물에 빠뜨려 죽인 사건,  소문으로 정절을 의심받은 여인이 소문을 낸 원수를 참혹하게 살해한 사건, 동네 천것에게 희롱당해 팔을 잡힌 여인이 작두로 자신의 팔을 자른 사건, 아버지의 원수를 직접 죽이고 그 간을 꺼내어 씹고 창자를 몸에 둘렀다는 엽기적인 복수극 등 소문 중심의 동기와 여성의 정절과 인륜을 법보다 중시 여기는 문화, 이어지는 끔찍하고 잔혹한 범행은 굉장히 후진적이죠.

허나 반대로, 범인을 잡은 후 실제 판결을 내리기까지 심지어 10년 이상 걸릴 정도로 집요하게 사건을 심리하는 과정은 나름 합리적이면서도 인간적이라 대비됩니다.
일단 수사는 "무원록"을 기반으로 한 검시가 기준이 됩니다. 무원록에 '만삭 여인의 태아가 다치거나 죽은 경우'까지 수록되어 있는지는 처음 알았네요. 그 상세함과 깊이에 세삼 놀랐습니다. 예전에 "신주무원록"에 대한 책은 읽은 적이 있지만 실제 사건 중심으로 어떻게 무원록이 활용되었는지 설명되고 있어서 훨씬 쉽고 이해하기가 편하더군요.
이른바 "상명의 률", 즉 누군가의 목숨은 다른 목숨으로 대신해야 한다는 대전제가 있지만 사형에 있어서는 극도로 신중하게 판단하여 임금이 직접 지시와 판결을 내리는 모습도 돋보입니다. 목숨을 중히 여기는 모습에서는 후대에 명군으로 알려진 정조의 인간적인 모습이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그리고 수사 과정에서 헛점이 발생한 경우 관찰사 등 관계자까지 처벌하는 꼼꼼함은 외려 지금보다도 나아 보였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원수의 간을 씹고 창자를 꺼낸 복수극'의 원인이 된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현감과 부사가 제대로 형사사건으로 처리하지 않아 사적인 복수극이 일어난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한 후 현감과 부사를 사헌부에서 구속, 처벌케 하는 판부를 내린 것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격쟁"이라는 제도를 통해 왕에게 직접 억울함을 고하는 행위도 지금보다 낫고요.

물론 이러한 판결 과정도 후진적인 부분이 없지는 않습니다. 심문과 취조는 형벌 중심이라는 것이 대표적이에요. 덕분에 취조 중 용의자, 범인이 장독으로 죽는 경우도 많고요. 시대를 감안하면 당연했을 수 있습니다. 또 조카며느리 일가를 도둑으로 몰아 일곱명이 자살하게 만든 사건에서 범인 이경휘에게 '장일백으로 엄중히 처벌하라'라는 지시를 통해 '엄중히' 처벌받은 이경휘가 관문도 벗어나기 전 동헌 뜰에서 숨이 끊어지는 속 시원한 경우도 있어서 필요악이었다 생각이 들기는 하네요.

판결을 내리는데 기준이 되는 <<대명률>>에 있는 몇가지 조항들도 후진적입니다. '부모를 죽인 현장에서 살인자를 죽이는 복수는 죄가 되지 않는다.'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일이긴 한데 이를 법전에서 최상위 조항으로 정해놓았다는 것은 여러모로 문제가 있어 보입니다. 분명 악용될 소지도 있고 말이죠.
그리고 정조가 아무리 현명하더라도 실무자들이 철저히 조사하여 올린 보고에 대해 재검토를 지시하거나, 보고와 다른 본인 생각대로의 판결을 내리는건 좋아보이지 않더군요.

이러한 점을 종합해서, 가장 인상적인 사건을 하나 소개하자면 가장 복잡하고 최종 판결까지 오래 걸린 사건인 <<04. 자신의 목을 세 번이나 찔러 죽은 의문의 자살사건>> 입니다. 시어머니의 구박으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박여인 사건이죠. 사건부터가 후진적이죠?
반면 시체를 검시하는 과정의 디테일부터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무원록>>을 토대로한 검시관들의 다양한 의견이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바보같은 의견도 있지만 - 치명상을 세번 임에도 자살로 판단한 것 등- 목맨 자국이 초검에서는 나타났으나 재검에서는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죽은 뒤 목을 매어 목의 혈맥이 돌지 않은 까닭이라 밝히는 식으로 현대 과학 수사 못지않은 내용도 등장합니다.
또 추리적으로도 눈여겨볼만 합니다. 시어머니와 간통남이 둘의 행각을 며느리에게 들켜 살해한 것이 진상인데 간통남 조광진이 정체를 숨기기 위해 밤에 상복을 입고 방문했다는 일종의 트릭이 등장하거든요. 덕분에 당시 예법 상 상제로 상복을 입고 다니던 이차망이 장기간 곤욕을 치루게 됩니다만 수사 중 관계자의 증언으로 결국 진상이 밝혀지는 과정도 볼거리이고요.
한마디로 후진적 사건을 해결하는 과학 수사와 단서를 조합하는 추리가 결합된 잘 짜여진 이야기였습니다.
간통남으로 몰린 이차망이 석방 전 옥사하고, 진범인 간통남 조광진도 심문 중 사망한다는 것 역시 앞서 말씀드린 형벌 중심의 후진적 취조 과정을 그대로 드러냅니다.

그 외 다른 이야기들 모두 놀랍고 흥미진진하다는 점은 대동소이합니다. 소설 형식으로 구성되어 읽기도 편하고요. 조선 시대 (후기)의 형사 사건 수사와 판결에 대해 관심이 있으시다면 꼭 읽어보셔야 할 책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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