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살아있는 육체 - ![]() 루스 렌들 지음, 홍성영 옮김/봄아필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스물여덟 살의 빅터 제너는 어느 날 공원 숲에서 한 여자를 겁탈하려다 실패했다. 뒤쫓아 오는 사람들을 피해 숲을 빠져나와 마을로 도망친 빅터는 빈집을 찾아 잠시 몸을 숨기려 했는데, 집안에 홀로 있던 젊은 여인이 소리를 지르며 창문을 깼고,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이 집을 포위했다. 빅터는 여자를 인질로 잡고 경찰과 대치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빅터는 이모부의 것이었던 루거 권총을 가지고 있었다. 빅터는 그 총이 진짜 총이니 다가오지 말라고 경고하며, 여자를 놓아줄 것이니 도망칠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경찰이 그 총은 가짜 총이라며 말하면서 그의 말을 믿지 않자, 빅터는 경찰관인 데이비드 플리트우드의 척추 아랫부분을 향해 총탄을 발사했다. 총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쓰러진 플리트우드는 반신불수가 되고 마는데…
평범함 속의 악의를 다루며 읽는 사람의 마음을 서늘하게 만드는 능력자인 — 개인적으로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여사와 동급으로 봅니다 — 여성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 작가 루스 렌델 여사의 대표작입니다. 1986년 골든 대거상 수상작이지요.
경찰 데이비드 플리트우드 시점으로 인질극과 총격이 일어나는 27페이지 분량의 1장 이후, 392페이지까지는 범인 빅터 시점으로 전개되는 400여 페이지의 장편인데, 한 번에 읽게 만드는 흡입력이 대단합니다.
루스 렌델 여사 작품의 최고 강점인 심리 묘사 역시 탁월해요. 한 명이 반신불구가 되고, 한 명은 살해당하고, 몇 명의 여성들이 성폭행당하는 범죄 소설인데도, 범죄보다는 빅터가 처한 상황과 심리 묘사가 더욱 상세한 덕분입니다. 이런 점은 "활자 잔혹극 (유니스의 비밀)"과도 일맥상통하네요.
추리적으로는 특출난 점은 없지만 빅터의 범죄에 대한 상세한 묘사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가치가 있습니다. 플리트우드처럼 장애인으로 가장하여 도주하는 과정은 기가 막힙니다. 또, 이모부의 코트라고 생각했던 코트가 사실은 주프 씨의 것이고, 호주머니 속 박하사탕 껍질로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장면은 복선과 디테일이 잘 결합된 명장면이었습니다.
그러나 장점에도 불구하고,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유는 주인공 빅터의 모든 것이 불쾌해서 읽는 내내 불쾌함이 가시지 않는 탓입니다. 그는 나이만 들었을 뿐 아이와 다를 바 없는 존재로, 모든 일을 남 탓하며 자기 합리화를 반복합니다.
- 플리트우드는 (그의 말을) 귀 기울여 듣지 않았고 빅터는 이성을 잃고 말았다. 빅터는 극심한 스트레스나 압박감을 받을 때면 그런 일을 저질렀는데, 늘 그래 왔었다. 정신을 잃고 갑작스레 겁에 질려서 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죄를 묻고 살인미수죄를 씌우는 건 부당했다. (40p)
- 빅터는 플리트우드를 불구로 만든 것에 이모부의 책임이 얼마나 있는지 이따금 생각해보곤 했다. 시드니 이모부와 플리트우드, 그리고 로즈마리 스탠리도 각각 책임이 있었다. (81p)
- 빅터는 플리트우드가 고의로 그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이 불구가 된 영웅을 우러러 본다는 걸 알고서 일부러 스스로에게 총을 쐈는지도 모른다. (127p)
무언가를 얻는 데 '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도 없고, 한번 얻은 것은 영원히 자기 것이라 착각하는 자기 중심적인 태도 역시 문제에요.
- 빅터는 그녀에게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도대체 왜 그래야 한단 말인가? 그에게 자리를 양보해 준 여자는 지금껏 아무도 없었다... (140p)
뮤리엘 이모에게서 돈을 훔친 뒤에도 "어차피 유산은 내 것"이라고 생각하는 등, 성범죄자이자 전과자인 주제에 모든 상황을 남 탓으로 돌리는 모습은 정말 최악입니다. 이러한 이기주의는 클레어와의 하룻밤 후 그녀를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데이비드가 성기능이 없다는 이유로 그녀와의 관계를 정당화하고, 결국 폭주해 버리고 말이죠. 이처럼 타고난 악당이 막 나간다면, 차라리 확실히 끝장나 버리는 "내 안의 살인마" 같은 결말이 후련했을 텐데, 빅터가 감염으로 인한 패혈증으로 허무하게 죽어버려서 뒷 끝이 개운치 않습니다.
또, 빅터의 비정상적인 정신 상태의 원인을 유년 시절 부모의 성관계 목격 경험에서 찾는 설정은 충격적이긴 했지만 불필요했습니다. 평범하고 사랑 넘치는 가정에서 단지 그 장면을 목격한 것만으로 괴물이 된다? 설득력이 약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인간쓰레기를 주인공으로 몰입감 있게 전개된다는 점은 "사채꾼 우시지마"와 비슷합니다. 두 번 읽고 싶지는 않다는 점까지요.
덧1: 전과자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만듭니다. 이 모든 건 빅터를 생생하게 그려낸 여사의 필력 덕분입니다. 특히 성범죄자에 대한 처우, 치료, 사회 복귀 문제에 있어 많은 고민을 하게 합니다.
덧2: 제목 "살아있는 육체"는 빅터를 상징하는 말일 겁니다. 살아있는 육체를 가졌지만 정신은 썩어있는, 그런 인간을 그렸다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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