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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0/20

기억 파단자 - 고바야시 야스미 / 주자덕 : 별점 1.5점

기억 파단자 - 4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주자덕 옮김/아프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느 날, 낯선 방에서 깨어난 니키치는 머리맡에 놓여 있는 한 권의 노트를 발견했다. 그리고 노트를 통해 자신이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다는 청천벽력 같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타인의 기억을 개조하는 초능력을 가진 살인마와 대면하게 되는데……. 의지할 수 있는 건 노트와 잃어버린 기억력을 보완하기 위해 발달한 뛰어난 추리력과 판단력을 가진 두뇌뿐이다. 니키치는 과연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출판사 책 소개 인용)

"앨리스 죽이기" 등으로 접했었던 공학 박사 학위를 지닌 공대생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의 장편 스릴러입니다. '기억 파탄'이 아니라 '기억 파단 (記憶破断)' 이라는 제목과 책 소갯글 그대로, '기억의 단절'을 핵심 소재로 다룹니다. 기억을 이어 나갈 수 없는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린 환자 니키치와 타인과 접촉하여 연속된 기억 속에 기억을 추가하여 기억 그 자체를 조작할 수 있는 초능력자 키라와 한 판 승부에서 단기 기억 상실증은 기억파단 그 자체이고, 기억 속에 다른 기억을 집어 넣어 왜곡하는 것 역시 연속된 기억을 파괴하는 행위니까요.

니키치는 자신이 기록한 노트로만 이전에 있었던 일을 떠올리고 대응하며, 이 노트를 통해 키라와 맞서 싸우는데 이를 위해 등장하는 설정들이 상당히 괜찮습니다. 노트의 사용법과 생활 방법 등에 대한 디테일이 꽤 그럴싸한 덕분입니다. 그리고 기억을 온전하게 노트에만 의존하고 있는 상황을 반전 요소로 써먹는게 아주 좋았습니다. 반전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억을 잃어버린 후 키라의 범죄 행위가 담긴 USB 메모리를 '서랍에 넣어 놓았다'는 노트 메모를 통해 알게 되고, 이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데 애초에 이 메모 자체가 거짓이었습니다. 키라에게 헛수고를 하게 만들고 실제로 교코를 통해 USB를 안전하게 빼돌리려는 계획이었거든요. 이렇게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기억' 그 자체가 '단기 기억 상실증'이라는 병 때문에 쉽게 왜곡할 수 있다는게 아주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또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기 때문에 기억을 조작하는 키라의 초능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아이디어도 괜찮았어요. 본인이 단기 기억 상실증에 걸렸던 사고 이후의 기억이 전혀 없는데, 새로운 기억이 생겨난건 분명 누군가의 조작이라는 논리인데 설득력있지요. 이걸 이렇게 써먹나 싶어 감탄스럽기도 했고요.

그러나 사실 이 반전 외에 딱히 건질게 많은, 좋은 작품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니키치 관련 주요 설정은 명백히 영화 "메멘토"에서 설정을 따 온 것이니까요. 노트의 메모가 중요하며, 또 자신의 '글씨체'로 기록한 메모만이 중요하는 점과 사진을 주요 기적 보조재로 사용하는 점이 그러합니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기억은 쉽게 왜곡될 수 있다는 점에서는 판박이에요. 나쁜 기억 대신 자신이나 타인이 왜곡한 기억을 갖고 살아가는게 더 좋을지도 모른다는 마지막 부분의 메시지 역시 마찬가지고요.

그리고 단기 기억 상실증은 "메멘토" 등을 통해 구축된 설정과 세계관이 반영되어 나름 설득력이 높은데 반해 키라의 초능력은 너무 허황됩니다. 접촉을 통해 기억을 조작한다는 설정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구멍이 많아요. 누군가 모르는 사람의 접촉을 쉽게 허용한다는건 상식적이지 않으니까요. 왜곡된 기억이 많아지면 당연히 일어날 여러가지 모순을 정신 붕괴를 일으킨다며 대충 퉁치는 것 역시 마찬가지지요. 잘못된 기억이 주입된다면 그 이유를 따져 볼 사람이 없을리 없잖아요? 특정 기억에 대한 반대 기억이 명확한 경우, 예를 들어 '언제 어디서 누구를 만났다' 가 '그 때 다른 누구와 무언가를 했다' 라는 분명한 기억과 겹칠 경우 더욱 그러할테고요. 기억 조작이라는건 전후관계와 디테일을 모두 고려해야 성공할 수 있을텐데 그런 부분은 이런 식으로 모두 대충입니다. 최소한 독자가 흥미를 가질만한 설득력있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었어요.
범행도 어이가 없습니다. 이 정도의 능력자가 편의점이나 털고 마음에 들지 않는 인물을 폭행하고, 여자들을 성폭행하고 살해하는 수준 이하의 범죄만 저지른다는게 말이 될까요? 심지어 기억 조작도 어설퍼요. 지하철에서의 성추행같은 경우는 피해자와 정의감에 불타 나섰던 사람 2명의 증인의 기억만 조작해서 빠져나가는데, 실제로 니키치를 비롯한 다른 사람들이 이 기묘한 상황을 눈치챕니다. 이렇게 백주대낮에 대중 앞에서 벌이는 범죄 행각들이 많다면, 아무리 CCTV의 사각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해도 결국 꼬리를 잡혔을 겁니다.

작위적인 전개도 거슬립니다. 살인마를 쫓고 있는 상황에서, 또 살인마에게 쫓기는 상황에서 니키치가 기억을 잃더라도 굉장히 필요한 정보만 잘 떠올리고 기억한다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마침 딱 좋은 위치와 장소에서 노트 속 필요한 페이지를 읽게 되는 식이거든요. 기억을 잃는 시간도 정해져 있어 보이지 않고요. 뒤로 가면 갈 수록 이 친구가 기억 상실증이 맞는지 의심이 들 정도에요. 억지로 세계관을 확장하려는 이런저런 설정들도 좋아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울러 니키치를 비롯한 캐릭터들의 묘사가 밋밋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살인마 키라는 그냥 나쁜 놈, 니키치는 성격 묘사없이 그냥 키라와 싸우는 정의의 사도라는 이분법적인 구분만 있을 뿐 별다른 묘사는 없어서 평면적이고 만화적이기 때문입니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한데, 매력적인 세계관과 설정 창조는 잘 하지만 캐릭터를 묘사하는 능력은 없는 듯 합니다. 그나마 괜찮아 보이는 조력자 도쿠 할아버지나 화법 교실 강사 교코도 다 어디서 본 듯한, 평면적인 캐릭터라는 점에서 다를게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일부 매력적인 설정과 돋보이는 아이디어가 없지는 않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단기 기억 상실증 관련 이야기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이 그러합니다. 작가의 팬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관심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2016/10/31

장난감 수리공 - 고바야시 야스미 / 김은모 : 별점 2점

장난감 수리공 - 4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알에이치코리아(RHK)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의 호러, 장르문학 작가 고바야시 야스미의 데뷰작인 표제작과 중편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가 수록된 중단편집입니다. 호러 소설이라 생각하고 읽었는데, 생각과는 다르게 조금 기묘한 장르 소설이더군요.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새롭지도 않고, 약간의 반전 역시 별로입니다. 가볍게 읽기에는 좋지만 추천드리기는 어렵네요.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하니 읽으시기 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장난감 수리공"

소녀는 무엇이든 고칠 수 있다는 장난감 수리공 '요그소토호스후'를 찾아갔다. 함께 육교를 건너다 사고로 굴러 떨어진 뒤 죽은 미치오를 고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가 동생의 시체를 낱낱이 분해하는 것을 지켜보는데..

작가의 데뷰작입니다. 죽은 사람도 고치는 기묘한 능력자가 나오는 심리 호러이자 독특한 크리쳐물 (장난감 수리공을 크리처로 볼 수 있을까요?)입니다. 누나의 눈이 고양이 눈이고, 이 이야기를 듣는 '나'가 두번이나 죽었던 동생 미치오라는게 밝혀지는 결말의 반전은 좀 서늘합니다. 기묘한 맛 장르물을 연상케도 하고요.
누나의 장황한 대사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내용도 상당한 흡입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수리공의 수리법이라던가, 죽은 동생이 어떻게 되었는지 등 볼거리가 많아서 끝까지 단숨에 읽게 됩니다. 분량도 적절하고요.

그러나 문제는 전혀 무섭지 않다는 점입니다. 장난감 수리공의 정체 등 대충 넘어간 부분이야 단편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전체적으로 너무 담백했던 탓입니다. 반전도 그다지 충격적이지는 않았고요. 시각적인 상상력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는데 소설보다는 영상, 그림으로 보는게 훨씬 나았을 작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남자"

대학 시절 연인 데고나를 되살리기 위해 두 남자가 의기투합하여 금단의 뇌 시술을 서로에게 시행한 후, 시간을 떠돌아다니는 존재가 되어버린다는 내용의 중편 SF입니다.

장점이라면 갖가지 물리이론을 들먹이며 펼쳐지는 장황한 설명이 제법 그럴싸하다는 점입니다. 작가가 물리학도라는 것이 잘 드러나지요.

그러나 이 장황한 설명 외에는 이야기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는건 문제입니다. 뇌의 특정 부분을 파괴하여 시간을 인식하는 능력, 시간을 제어하는 능력, 파동 함수를 재 발산하지 않는 능력 등 다양한 능력을 잃는다는게 전부거든요. 이를 앞서 말씀드린 장황한 설명으로 때울 뿐입니다. 이렇게 길어질 필요가 있나 싶을 정도이고, 그만큼 지루합니다.

아울러 시공을 초월한게 아니라 시간의 덫에 갇혀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일종의 저주라는 결말은 씁쓸하면서도 진한 여운을 남기지만, 지금 읽기에는 좀 뻔했습니다. 차라리 이 모든 것이 정신병자의 거대한 헛소리고 주인공은 그에 속아넘어간 것에 불과하다는 결말이 더 나았을 겁니다. 뭐 어느 쪽이든 지옥이긴 마찬가지겠지만요.

하여튼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와 완성도 모두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2023/04/16

안락 탐정 - 고바야시 야스미 / 주자덕 : 별점 1.5점

안락 탐정 - 4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주자덕 옮김/아프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일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고바야시 야스미의 연작 단편집. 제목 그대로 의뢰인의 이야기만 듣고 진상을 추리해내는 탐정이 등장합니다. 모두 다섯 편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딱히 좋아하는 작가는 아닌데 설정과 뒷 표지 소개가 그럴듯해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작가의 특기라 할 수 있는 기발한 설정은 여전합니다. 두 번째 이야기 <<소거법>>이 대표적이에요. 왕따를 당하던 회사원 토코가 탐정에게 자기가 초능력자라고 밝힙니다. 자기가 누군가를 "사라져"라고 하면 그 사람이 원래 존재하지 않았던 것 처럼 사라진다면서요. 그래서 회사의 적(?)들을 없애나가다가 같은 능력을 가진 사원 야마히를 만나서 둘 중 하나만 남아야 하는 상황에 빠진 뒤 탐정을 찾게 된 것이지요. 이를 여러가지 '인간 소거' 일화와 함께 흥미진진하게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다이어트>>는 의뢰인이 엄청 말랐을 거라는 분위기를 풍기지만 알고보니 200kg 정도의 뚱보였다는 반전이 꽤 좋았어요. 의뢰인에 대한 단서가 전무한데, 마른 사람처럼 생각하게 만드는 전개가 절묘한 덕분입니다. 다이어트 식품인줄 알고 먹었던게 알고보니 냉동 피자였다는 진상도 유쾌했고요.

그런데 역시나, 추리적으로는 점수를 줄 부분은 많지 않습니다. 아니, 추리의 결과가 얼토당토하지 않아서 화가 날 정도입니다. 앞서 흥미진진하다고 소개해드렸던 <<소거법>>이 대표적입니다. 알고보니 토코는 초능력자가 아니었다는게 진상입니다. 회사 사람들 모두가 합심해서 장난을 쳤다는 거지요. 회사 밖에서 사라지라고 한 사람들은 모두 무시하거나 화를 냈다던가, 토코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사람이라는걸 알려주는 등 몇 가지 단서가 있기는 합니다. 허나 그렇다고 진상의 설득력이 생기지는 않아요. 이런 장난을 합심해서 칠 정도로 한가한 회사가 있을리 없으니까요. 게다가 구조조정을 앞둔 상황에서, 여러 명이 없어져 업무가 늘어나고 심지어 조직까지 변경되는 상황에 처하면서까지, 심지어 여러 명 - 도코, 야마히 - 을 대상으로 회사에서 합심해서 장난을 친다? 너무나도 비현실적이었습니다. 초능력이 실재할 수 없으니 어떤 식으로든 결론을 내리긴 했어야 했겠지만, 그 답이 '장난이었다'니 맥이 다 빠집니다. 이래서야 제목이 무색할 정도죠.

이야기 하나하나가 모두 기묘한 헛점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지막 이야기 <<모리아티>>에서 탐정이 알고보니 사기꾼이었다는 결론으로 이어지는건 역대급 최악의 결말을 다툴만 합니다. 모든 사건의 진상을 알고 있었지만 추리해내는건 척 했으며, 헛점들은 모두 탐정이 미리 알고 추리하는 척 했기에 생긴 오류들이었다는건데, 소설의 기본 설정 - 안락의자 탐정물 - 을 흔들 뿐더러, 설득력도 한없이 낮은 탓입니다.
일단 탐정이 이 모든걸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는지는 전혀 설명이 없습니다. 홈즈가 명탐정이 된 건 그가 사실은 범죄계의 나폴레옹 모리어티였기 때문이라는게 거의 유일한 근거입니다. 하지만 탐정이 추리한 사건은 그라비아 아이돌 스토킹 사건, 특정 회사에서 벌어진 장난, 다이어트 블로거에게 가짜 식품 배달 사건 등 거리의 불특정한 누군가에게 일어난 사건들입니다. 모리어티가 저질렀거나 관여했음진한 큰 도난 사건같은 중범죄가 아니에요. 의뢰인들은 간판을 보고 찾아온 사람도 있는 등, 사전에 탐정을 알지도 못하고요. 심지어 경찰에 신고도 되지 않은 사건도 많습니다. 이를 모두 탐정이 뒤에서 조종했다? 턱도 없는 주장입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주장을 위해 일부러 탐정의 추리에 헛점을 만든 건 도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요. 탐정의 추리에도 헛점이 있고, 이를 설명하는 추리도 설득력이 전무하니 양 쪽 모두 점수를 줄 수 없는 괴작이 탄생하고 말았네요. 이런 에필로그 형태의 결말보다는 처음부터 탄탄하게 이야기를 완성하는게 더 좋았을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 기발하다는 측면에서는 볼 만한 부분이 약간 있습니다만 딱히 권해드릴 작품은 아닙니다. 

2022/02/13

인외 서커스 - 고바야시 야스미 / 민경욱 : 별점 2.5점

인외 서커스 - 6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민경욱 옮김/하빌리스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서커스단 마술사 란도와 동료들은 급작스럽게 흡혈귀들의 습격을 당하고 말았다. 흡혈귀들이 그들을 흡혈귀 사냥 조직 컨소시움이 위장한 서커스단으로 착각했기 때문이었다. 흡혈귀들은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능력을 갖추었지만, 아크로바틱 곡예사 기프티와 비스트리 남매, 화살 묘기를 부리는 궁사 슈티, 동물 조련사 레이라, 공중 그네 묘기를 펼치는 리지와 진 컴비, 오토바이 곡예사 쿠와이, 마술사 란도와 조수 아야미, 그리고 피에로 단장까지 10명의 단원들은 그대로 물러서지 않고, 그리즐리가 이끄는 다수의 흡혈귀들과 자기들의 기술을 이용하여 처절한 사투를 벌이는데...

고바야시 야스미의 중편 액션 호러 스릴러입니다. "기억파단자"처럼 능력자들끼리의 배틀을 다룬 배틀물이라고 할 수 있데, 한 쪽이 굉장히 불리하다는게 특징입니다. 흡혈귀들은 뇌나 심장이 파괴되지 않으면 어떤 상처를 입어도 재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서두에서 컨소시움 군대 수십 명이 강력한 중화기로 무장하고도 흡혈귀 퀸 비 일당 세 명을 모두 쓰러트리지 못하는 묘사가 등장해서, 읽으면서도 서커스 단원들에게 과연 승산이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단원들이 각자의 능력을 펼쳐보이는 것에 더해, 그들에게 유리한 서커스 무대 장치 등을 활용하여 승리하는 과정이 설득력있게 그려진 덕분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습니다. 작가의 다른 작품들처럼 쓸데없는 설정을 부여하지 않고, 단순 화끈하게 풀어나가는 전개도 매력적이었고요.

특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란도의 활약이 대단합니다. 슈티가 죽어가면서 쏜 화살에 흡혈귀 위젤이 맞고 죽은 것을 통해 흡혈귀들이 심장이나 뇌가 파괴되면 죽는다는걸 깨닫고, 자신이 직접 만든 탈출 마술 장치를 이용하여 그리즐리를 없애는데 성공하니까요. 잠깐 관에 갖혔던 그리즐리가 나오는 틈에, 귀로 화살을 쏴서 죽였던 거지요. 진짜 최종 보스 미티아 역시 이 마술 장치로 발을 붙잡은 뒤 공격해서 죽일 수 있었고요. 단순 무식한 배틀이 아니라, 마술 장치 등의 복선도 활용한, 잘 짜여진 두뇌 싸움이라는게 마음에 들었습니다. 

조련사 레이라와 키리피시의 대결도 볼 만 합니다. 사자와 호랑이와 함께 공격하면서 키리피시의 눈길을 끌고, 그 틈에 코끼리 점보를 탄 단장이 뒤에서 키리피시를 밟아 없앨 수 있었다는건데 상당히 설득력이 높습니다. 상대방의 헛점을 이용하여 예상치 못했던 일격을 날렸다는 점, 그리고 코끼리 점보의 존재를 계속 독자들에게는 알려주었다는 점에서 공정한 두뇌 싸움의 좋은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지와 진이 공중 곡예로 캐터피라를 날려버리고, 쿠와이가 이 틈에 오토바이를 추돌시켜 불을 붙인 싸움은 그리 정교하지는 않았지만 흥미롭기는 하고요. 오토바이 공격이 아니라 휘발유를 부어버리는게 진짜 핵심이었다는건 괜찮은 발상이었어요. 뛰어난 곡예사이지만 평범한 인간에 불과하기에 기프티처럼 끔찍한 최후를 맞는 피해자가 나오는 것도 이야기에 설득력을 더해 줍니다.

문제는 다소 뜬금없던 두 개의 설정입니다. 첫 번째는 숲 속에 홀로 산다는 여행객 도쿠 할아버지입니다. 할아버지의 활약으로 캐터피라와 토타스를 없앨 수 있었지만, '산 속에 혼자 사는 무림 고수 은거 노인' 캐릭터는 너무 진부한 설정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토타스가 문으로 습격할걸 예측하여 문에 낚싯줄을 걸어 두었다는 것에 대한 설명도 부족해요. 토타스는 할아버지가 뭐 하는지 뻔히 보고 있던 상황이라서, 이렇게 쉽게 함정에 걸린다는건 말이 안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두 번째는 슈티가 흡혈귀 중 최강자인 미티아였다는게 밝혀지는 일종의 반전 부분입니다. 흡혈귀들이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아서, 그리즐리 패거리에게 인간에게 패배했다는 망신을 주기 위해 이런 음모를 꾸몄다는 것부터 영 와 닿지 않았어요. 오랜 시간 동안 서커스에서 일해가며 안배한 계획으로 보기에는 여러모로 허술했을 뿐더러, 최초 계획대로 그리즐리 패거리에게 망신을 주는 선에서 끝냈어야 했습니다. 미티아 스스로 모레노와 위젤을 죽인건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아요. 이렇게 죽일 거였다면 미티아가 직접 그리즐리 패거리를 찾아갔을 때 싹 죽이는게 나았겠지요. 슈티가 한 말 실수에서 란도가 슈티의 정체를 눈치챈다는 것 역시 조금 억지스러웠고요. 기프티가 흡혈귀가 되어 버렸다는 에필로그도 조금 애매했습니다. 이런 여지는 구태여 남길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적절한 분량으로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킬링타임용 읽을거리로는 나쁘지 않았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전형적인 일본 배틀물 만화를 글로 옮겨 쓴 느낌인데, 만화 버젼이 있다면 한 번 보고 싶네요.

2019/08/09

앨리스 죽이기 - 고바야시 야스미 / 김은모 : 별점 2.5점

앨리스 죽이기 - 6점
고바야시 야스미 지음, 김은모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구리스가와 아리는 이상한 나라에서 험프티 덤프티를 살해한 범인으로 지목되는 꿈을 꾼 뒤, 대학원생 이모리 겐을 통해 이 꿈을 여러 명의 주변 사람들이 꾼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 두 세계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상태로, 현실에서는 꿈 속에서 험프티 덤프티였던 오지가 옥상에서 떨어져 죽은 상황이었다. 그 뒤 그리핀이었던 시노자키 교수가 상한 굴을 먹고 병사하고, 흰토끼 다나카 리오는 약물 중독자에게 습격당해 죽었다. 유일한 동료였던 도마뱀 빌 이모리 겐 마저 살해당한 뒤, 아리는 진범이 누구인지를 알아내는데...

고바야시 야스미의 장편 추리 소설입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와 현대의 지구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설정을 바탕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발표 당시 평이 꽤 좋았지요.

그런데 중반부까지는 굉장히 지루하고 짜증납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세계 속 정신나간 인물들이 정신나간 대사를 반복하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수사, 추리는 커녕 이야기조차 제대로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였어요.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앨리스만 정상일 뿐 조력자 이모리 겐의 아바타르 - 지구의 인물들이 이 세계 속에서 실체화된 존재의 통칭, 그런데 왜 아바타가 아닐까요? - 인 도마뱀 빌조차 너무나 멍청해서 방해만 될 뿐입니다. 물론 마지막에 다잉 메시지를 남기는 활약을 펼치기는 하나 애초에 그리핀 살인 사건의 유력한 증인인 굴을 먹어버리지만 않았어도 진상이 바로 드러났을테니 도움을 줬다고 보기는 힘들죠.
원작 느낌을 잘 살리기 위해서였다 하더라도 정도가 너무 과했을 뿐더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속 세계야 그렇다쳐도, 현대 지구의 등장인물들이 이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동문서답만 일삼는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도 명목이 대학원생들과 조교수들인데 하는 행동은 흡사 초등학생처럼 느껴질 정도에요. 심지어는 등장하는 경찰들마저도 언행 모두 경찰로 보기 힘듭니다.

때문에 이럴 바에야 그냥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이야기에서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는 이야기만 쓰면 되지, 구태여 현실 지구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 라고 생각했습니다. 이상한 나라 속 피해자들 모두 현실 지구에서 사망하지만 모두 사고나 병사로 처리된다는 설정 때문에 현실 지구에서는 특별한 수사나 추리가 이루어질리 없으니까요.

하지만 이렇게 서술한 이유는 후반부에 드러납니다. 이 설정이 후반부에 연속되는 반전에 요긴하게 사용되기 때문입니다. '공작 부인'인 줄 알았던 히로야마 부교수가 '메리 앤'으로 진범이라는게 드러나는 첫번째 반전부터요. 현실의 지구가 없었다면 이런 이야기를 반전으로 써 먹을 수 없었을 겁니다.
아울러 이 반전은 추리적으로도 꽤 합리적입니다. 여러가지 단서를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전달하고도 있고요. 예를 들자면 앨리스가 험프티 덤프티 살인 사건 현장에 출입했다고 증언한 흰토끼는 시력이 좋지 않았고 여러 사람들을 냄새로 구분했다는 것, 흰토끼가 앨리스와 메리 앤을 착각했던 적이 있다는 것, 공작 부인은 알 수 없었던 정보를 히로야마 부교수가 입에 올렸던 것 등입니다.
뒤이은 반전은 더 놀랍습니다. 현실 세계에서 히로야마 부교수가 자살합니다. 그러나 그녀는 '이상한 나라'에서 죽지 않고 부활하여 앨리스를 살해합니다. 이는 '이상한 나라'가 현실이고 현실의 지구는 오히려 이상한 나라의 '붉은 왕'이 꾸는 꿈이기 때문입니다! 그 동안은 한 쪽에서 죽으면 막연히 다른 쪽 세계에서도 죽는구나 싶었는데, 사실은 현실인 '이상한 나라'에서 죽어야 '현재의 지구'에서 죽을 뿐이고 반대의 경우는 다시 살아나는 것이었습니다.
이후 이어지는 마지막 반전은 구리스가와 아리의 정체입니다. 그녀는 앨리스가 아니라 앨리스 주머니 속 겨울잠쥐여서 현실의 지구에서 죽지 않고 살아납니다. 그리고 다니마루 경감과 니시타카지마 형사와 함께 히로야마 부교수의 범행을 드러내는데 성공합니다. 형사는 이상한 나라에서 공작 부인, 경감은 바로 여왕이었기에 이상한 나라에서 메리 앤은 능지처참에 가까운 끔찍한 사형을 당하는게 결말이고요. 히로야마 부교수가 공작 부인이 아니라 메리 앤이었다는 첫번째 반전과 겨울잠쥐가 말을 할 수 있다는 서두의 묘사를 복선으로 활용한 좋은 아이디어였어요.
그 외의 복선도 탄탄합니다. 험프티 덤프티를 죽인 이유는 히로야마 부교수가 자신의 승진의 걸림돌이라 생각하여 살의를 품었던 시노자키 선생으로 착각했기 때문인데, 이를 '험프티 덤프티에는 시노자키 선생이 어울린다'는 등의 지나가는 말로 드러내는 식으로요.

하지만 조금 깊게 생각하면 문제도 많습니다. 저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는 무의미한 캐릭터와 전개가 너무 많다는 점입니다. 일단 도마뱀 빌, 이모리 겐은 존재와 죽음 모두 무의미합니다. 현실 지구의 이모리 겐은 뭔가 있어보였던 첫 등장에 비하면 너무 하는게 없어서 놀랄 정도입니다. 도마뱀 빌은 이상한 나라에서의 온갖 민폐 행동도 거슬리는데, 유일한 활약이라 할 수 있는 다잉메시지도 불필요했습니다. 히로야마 부교수가 진범 메리 앤이라는건 다른 단서를 통해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요. 그냥 분량 늘리기에 불과합니다.
미치광이 모자 장수와 3월 토끼 역시 이상한 나라에서의 괴상한 언행 외에는 왜 나왔나 싶네요. 현실 세계에서의 비중은 아예 없다시피 하니까요.
다니마루 경감과 니시나카지마 형사 콤비도 등장과 비중에 비하면 활약이 미미합니다. 그들은 히로야마 부교수가 공작 부인이 아니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죠. 그렇다면 그녀가 수상하다는 전제 하에서 움직였어야 하는데 행동이 너무 굼뜹니다. 

또한 구리스가와 아리가 다니는 대학원에서는 오지의 자살로 보이는 추락 사건, 시노자키 교수가 상한 굴을 먹고 죽는 사건, 다나카 리오가 약물 중독자의 칼에 찔려 죽고 약물 중독자는 자살하는 사건, 이모리 겐이 술을 먹고 자다가 들개에게 뜯어먹혀 죽는 사건이 잇달아 일어납니다. 아무리 자살과 병사, 사고사라도 '이상한 나라' 속 인물이기도 한 다니마루 경감과 니시타카지마 형사는 당연히 수상하다는걸 알았어야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메리 앤은 현실의 지구가 사실은 이상한 나라의 꿈이라는걸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꿈 속에서의 신분 상승을 위해 현실에서 살인을 저지른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대단한 신분 상승도 아니에요. 단지 부교수가 교수가 되는 정도니까요. 이래서야 위험에 비하면 얻는게 너무 약합니다. 실제로 흰토끼가 냄새만 잘 맡았어도, 굴을 빌이 삼켜버리지만 않았어도 범인으로 체포되었을겁니다. 그녀의 주장대로 이상한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 정신이 나갔다고 치더라도, 이 정도 단서라면 빠져나가기는 불가능했을테니까요. 차라리 스나크나 벤더스내치를 조종하는 재주를 이용하여 이상한 나라를 자기 것으로 만든다는 계획이 더 나았을겁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입니다. 기발한 설정과 아이디어, 반전은 충분히 매력적이며 추리적으로도 평균은 됩니다. 저 같은 평범한 독자에게는 캐릭터, 전개, 묘사 모두 과한 느낌이라 조금 감점합니다만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팬이시라면 이 모든게 다 즐길거리겠죠. 앨리스 팬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05/06/15

베스트 미스터리 2000 1, 2 -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 / 정태원 역 : 별점 3.5점

베스트 미스터리 2000 - 1 - 8점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태동출판사
베스트 미스터리 2000 - 2 - 8점
일본추리작가협회 편저/태동출판사

소문만 듣던 책인데 인터넷 서점에 마침 재고가 있길래 냉큼 구입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일본 작가들의 단편선이니 구입 안 할 수가 없더라고요. 제목과 서론을 보니 일본 추리작가 협회에서 직접 선정한 2000년도판 베스트 단편선 쯤 되는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 한국 추리 작가 협회가 매년 출간하는 베스트 추리소설 모음집과 유사해 보입니다. 

워낙 일본이 추리 강국이라 저변과 시장이 넓은 덕분이겠지요? 수록된 작품의 양이 상당합니다. 두 권으로 나누어져 출판되었는데 1권에는 11편, 2권에는 9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작품들 수준도 우수합니다. 재미도 있고요. 정말 시간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통 추리물을 비롯해서 형사물, 공포스릴러, 환상단편, 인간 드라마, 심리 서스펜스에서 패러디까지 각종 쟝르를 넘나들며, 전개와 설정도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읽으면서 감탄을 금치 못하겠더라고요.
작가군도 풍성합니다. 사노 요, 노리츠키 린타로, 이마무라 아야, 모리 히로시, 니카이도 레이토 등 유명 작가들은 물론 끝부분 작가 소개에서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라고 표시된 작가도 상당수 있을 정도니까요. 이렇듯 작가진만 보더라도 정말로 다양한 작품들 중에서 엄선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 줍니다. 

전체적으로 우수하지만, 개인적으로 1권의 베스트는 사기극 "영원표묘", 정통추리물에 가까운 "사용중"과 "일곱통의 편지"이며 2권의 베스트는 정통 추리 "흉소면", "까마귀의 계시"였습니다. 물론 다른 작품들도 평균 이상 수준은 충분합니다.

번역이 약간 깔끔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는 점, 조금 더 작은 판형으로 예쁘게 장정하였다면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지만 이렇게 번역되어 출판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할 일입니다. 추리 강국으로서의 일본의 진수를 최소한의 노력으로 맛볼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습니다. 수고롭더라도 구해볼 가치가 있는 책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추후 2000년만 아니라 다른 년도의 베스트 단편 모음집도 소개되면 좋겠네요. 자세한 각 단편 소개는 아래와 같습니다.

1권

1. 잠들 수 없는 밤을 위하여 - 오리하라 이치 : 

 잡지의 "고민 상담실"의 투고와 신문기사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으로 소품에 가깝습니다.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드라마에 가깝지만 마지막의 여운이 인상적이었어요.

2. 거짓말쟁이의 다리 - 사노 요 : 

 형사수사물. 두 형사의 대화로 주거침입- 강간미수 사건의 뒤에 감추어진 진상이 서서히 밝혀지는 전개로 잘 짜여져 있는 작품입니다. 다만 마지막 반전은 약간 억지스럽습니다.

3. 배반의 푸가 - 스즈키 기이치로 : 

영안차 운전수라는 독특한 직업의 인물을 주인공으로 하여 한 여자의 집착을 서늘하게 그린 소품. 약간 로얄드 달 느낌이 드는 기묘한 작품인데, 조금 더 압축했으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4. 영원표묘 - 구로카와 히로유키 : 

미술상을 무대로 한 독특한 사기극으로 만화 "갤러리 페이크"같은 느낌을 전해줍니다.
초반에 제공되는 명확한 단서를 통해 결말까지 이끌어내는 추리극적인 성격이 강하면서도, 독자까지 속이는 세련된 전개와 트릭이 돋보입니다. 작가가 미대 출신의 전문가라 그런지 이야기에서 보이는 미술품에 대한 묘사도 괜찮았고요.

5. 지난날의 사랑 - 오사카 쓰요시 :

사립탐정이 여배우의 의뢰로 애인의 불륜 뒷조사를 한다는 내용으로, 별다른 추리적인 요소는 없지만 이야기 전개는 깔끔하고 무난합니다. 베스트로 선정되기에는 지나치게 심심한게 아닌가 싶지만요.

6. 얼음설탕 - 후지모토 유키 : 

한 주부가 과거에 사라졌던 애인과 우연히 재회하면서 자신의 감정을 추스리지 못하고 점점 수렁속으로 빠져드는 서스펜스 드라마입니다. 여성 버젼의 스텐리 엘린 단편같다는 생각이 들게 만들 정도로 심리 묘사가 탁월하며 반전도 인상적입니다.

7. 야수의 기억 - 고바야시 야스미 : 

호러 스릴러의 성격을 띈 작품입니다. 다중인격의 소유자로 다른 인격일 때의 파괴적인 행동에 괴로워하는 주인공을 잘 묘사하며, 추리적인 부분도 확실한 편이고 반전도 좋습니다.
하지만 독자를 속이기 위해서 전개가 필요 이상으로 복잡한건 감점 요인이네요.

8. 은폐꾼 - 가스미 야스시 : 

사회적 파탄을 불러올 수 있는 불상사를 국가 차원에서 사전에 방지하기 위한 단체가 등장하는 소품입니다. 설정과 전개가 스티븐 킹의 "금연 주식회사"와 유사하지요. 기발한 아이디어는 좋았는데 후반 전개는 좀 뻔해서 아쉽습니다.

9. 사용중 - 노리츠키 린타로 : 

한 추리작가가 살해되었는데, 그가 생각한 추리 소설의 전개대로 이야기가 흘러간다는 독특한 구성의 작품입니다. 스텐리 엘린의 작품을 인용해가며 전개되는데, 밀실 트릭에 대한 생각은 노리츠키 린타로가 직접 이야기 하는 것 같아 더욱 재미있더군요.
결정적 약점이 하나 있기는 하지만 짧은 분량으로 스릴과 서스펜스를 충분히 전해주는, 단편의 교과서 같은 작품입니다.

10. 일곱통의 편지 - 아사기 마다라 : 

동거하던 남자의 어머니와 왕래한 편지로 이면에 숨겨진 살인사건이 밝혀지는 작품으로 전개도 독특하지만 추리적으로도 일품입니다.

11. 먼 창 - 이마무라 아야 : 

어머니의 죽음과 자신이 불구가 된 사고로 환상의 세계에 몰입하는 소녀의 이야기로 "환상특급"에 나올법한 이야기네요. 소녀의 일기로만 전개되는 구성도 독특하고요. 재미도 있고 후반부의 아버지의 일기에서 밝혀지는 진상도 좋습니다. 다만 결말이 예측 가능하다는건 단점이에요.

2권 

시효를 기다리는 여자 - 니이츠 키요미 : 

15년 전에 일어난 살인 사건의 시효가 끝나기 직전 진범의 심리와 사건의 진상을 묘사한 작품. 독자를 속이는 소설만의 효과로서 이루어진 트릭이 인상적입니다. 하지만 반전과 결말은 수긍하기 조금 어렵더군요.

부하 - 곤노 빈 : 

부하를 믿고 신뢰한 경부보가 방화범을 잡는다는 내용의, 인간 드라마와 추리물이 잘 섞여 있는 소품입니다.

흉소면 - 기타모리 코 : 

"미스터리 민속탐정 야쿠모" 처럼 대학의 민속학자가 한 고택의 오래된 가면을 둘러싸고 벌어진 살인사건을 해결하는 본격 추리물입니다. 트릭과 전개도 깔끔하지만, 무엇보다도 단편에서 소홀히 취급되기 쉬운 범인의 동기까지 설득력있게 등장하는게 마음에 듭니다.

독점 인터뷰 - 노자와 히사시 : 

유괴 살인 사건의 중요 참고인이 독점 인터뷰를 진행하다가 사건의 진상이 드러난다는, 약간 사회파 느낌을 전해 주는 작품입니다. 사소한 단서로 진상이 밝혀지는 계기가 마련된다는 구성은 취향이 아니라서 별로였지만, 복잡한 인간관계가 얽힌 드라마가 잘 살아있어서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석탑의 지붕 양식 - 모리 히로시 : 

사이카와와 모에 커플이 등장하는 단편입니다. 하지만 둘이 탐정으로 등장하는건 아닙니다. 모에와 그녀의 친구들이 모여서 사이카와의 수수께끼에 대한 해답을 내놓는 이야기거든요. 결국 정답은 집사가 맞춰버린다는 "흑거미 클럽"과 유사한 결말도 독특하고요.
그러나 고대 인도의 수수께끼의 석탑 지붕 양식에 관한 수수께끼라는 설정이 그다지 흥미롭지는 않았으며 무엇보다도 "정답은 아무도 모르지만 개중 설득력 있는 것"이라는 결말은 반칙이라 생각됩니다. 결론적으로 작가의 명성에 값하는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아가씨 출범 - 와카다케 나나미 : 

메이지시대를 무대로 천방지축 아가씨의 탈출 계획을 막는 하녀의 기지가 발휘되는 소품입니다. 일본어를 이용한 트릭이 하나 등장하지만, 대단한 수준은 아니에요. 유쾌한 분위기는 즐거웠지만요.

까마귀의 계시 - 우타노 쇼고 : 

동네 쓰레기를 마당에 모아놓는 정신병에 걸린 여인이 살해당한 시체로 발견된 사건의 진상을 밝히는 정통 추리물입니다. 사건 자체가 백만분에 하나 있을까 말까한 우연에 의해 발생했다는 점만 뺀다면, 독자에게 공정한 단서를 제공하면서도 전개도 깔끔하고 흥미롭게 진행되는 좋은 작품입니다.

생환자 - 츠부라야 나츠키 : 

산악 경비대 대장을 주인공으로, 산에서 발생한 알 수 없는 프로 등산인의 추락사를 놓고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소재와 설정이 독특하며 등산에 대해 전문가적인 지식이 등장하는 이야기는 재미있는데 아쉽게도 추리적으로는 별로였습니다. 별로 평가할 건덕지가 없었어요.

가스케의 세기의 대결 -니카이도 레이토 : 

사람들이 식사 대신 재미있는 추리소설을 읽는 장소인 "독서 레스토랑"을 무대로 주인공 가스케가 건방진 싸구려 평론가 고토쿠를 추리소설 품평 내기를 통해 혼내준다는 이야기입니다.
독서 레스토랑과 추리소설 품평 내기라는 설정도 참신하고, 등장하는 방대한 추리 작품에 대한 지식도 상세한데다가 무엇보다 유쾌한 꽁트 분위기가 즐거웠던 작품입니다. 작가가 평론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엿보이는 점도 재미있었고요. 

하지만 전개는 로얄드 달의 "맛"에서의 포도주 맞추기 게임과 거의 유사해서 신선함은 떨어집니다. 트릭도 추리적으로 평가하기에는 문제가 많고요. 여러모로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2026/09/11

아리스가와 아리스에게 바치는 일곱 가지 수수께끼 - 아오사키 유고 외 : 별점 2.5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데뷰 35주년을 기념하여, 젊은 작가 일곱 명이 '아리스가와 세계관'으로 발표한 단편을 모아 놓은 단편집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세계관이지만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가 가장 많습니다. 또 다른 대표 시리즈인 학생 아리스 시리즈의 명탐정 에가미 지로 등장 작품은 한 편 밖에 없고요. 행각승 지장 스님 시리즈도 한 편 있을 정도인데 말이지요.

하여튼, 꽤 신선한 기획인데 작품들 수준도 괜찮아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워낙 유명한 젊은 작가들이 다수 포진해 있는 덕분입니다. 대부분 아리스가와 월드를 충실히 구현한, 전통적인 신본격 추리물이라는 점도 마음에 든 점이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가볍게 즐기기에 적당합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습니다.

"끈, 밧줄, 로프" 아오사키 유고

야스미 노도카가 모아이 도자기 상으로 머리를 얻어맞아 살해당한채 발견되었다. 동기는 희귀 게임 카드이며 범인은 새시를 통해 시체를 밖으로 운반한 뒤, 바다로 시체를 내던진 것으로 보였다. 여러 현장 상황을 통해 범인은 자동 잠금장치가 설치된 아파트 주민 29명 중 한 명이며, 그 중에서도 당일 오전, 로프같은걸 버린 세 명 중 한명일 가능성이 높았다. 피해자가 죽기 전 로프 같은 것으로 묶여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각자 버린 건 다용도 마끈, 안전용 수평 구명줄, 반사 소재 텐트 로프였다. 

히무라 히데오가 '필드 워크'를 통해 범인을 밝혀내는 전형적인 신본격 단편입니다.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 아오사키 유고답게 추리적인 부분은 완벽에 가깝습니다. 

히무라는 피해자가 둔기에 맞았을 때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가 깨어있을 때 침입했고 흉기로 위협했다고 추리합니다. 그리고 뭔가에 묶인 피해자를 나르는 범인을 목격했다는 증언을 통해, 범인이 피해자 사체를 유기하기 직전에 묶은 끈을 회수했다고 추리하고요. 사체 유기가 실패했다는걸 알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기 때문에, 끈을 푸는 데에는 위협에 사용했던 칼을 사용했습니다. 다음날 범인은 토막난 끈을 버려야 했으며, 이는 쓰레기 버릴 때 종이 팩을 사용했다고 지적받았던 시나다의 행동과 이어집니다. 즉, 시나다가 범인입니다. 시나다는 매일 종이 팩 쥬스를 마시는 습관이 있어서 그게 재활용이라는걸 모르지 않았다는 것도 증거이고요.

사건과 범인이 로프를 그날 버린 이유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핵심 단서인 '로프'를 가지고 기둥서방 시나다의 유력한 동기였던 '동아줄'로 이어지는 일종의 언어유희적인 전개도 괜찮습니다.

다만 설정 자체가 조금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현대 법의학, 법과학으로 범인을 충분히 밝혀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수수께끼 풀이용 단편으로는 충분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정통파 추리 소설에 대한 작가의 고민도 흥미롭습니다. 아래의 말을 빌어서, 추리 소설가의 필사적인 창작은 결국 AI도 만들 수 있는, 독창적인 요소가 없는 결과물일거라는게 요지인데 저 역시 동의하는 바입니다. 

  • '정보를 수집하고 검토해 논리적으로 수수께끼를 풀어낸다. 추리 소설이라는 장르가 하는 일은 따지고 보면 그 해법의 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 "수수께끼 풀이 자체는 누가 설명해도 마찬가지인, 개성없는 장면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야. 애초에 누구나 풀 수 있는 수수께끼가 아니면 본격 미스터리로 성립할 수 없다는 딜레마도 있어. 결국 탐정 캐릭터들도 '모범 답안'을 독자에게 전하기 위한 장치에 지나지 않는 걸지도 몰라."

물론 이 논리는 미스터리는 과학이 아니라 유사 과학이라는 히무라의 입을 빌어 작가 본인 스스로 타개하고 있기는 합니다. 탐정들은 미스터리의 신의 말을 전하는 선교사인데,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 놓는 과학자와 다른 집단이라면서요. 그래도 AI도 만들 수 있다는 결과물이라는게 변하지는 않지만요...

"클로즈드 클로즈" 이치오 미치

아리스와 히무라는 여고에서 일어났던 교복 도난 사건 해결을 부탁받았다. 교복을 도난당한 다즈하라 시게오는 같은 3학년 부원인 고미야 리오와 반목이 있었다. 그러나 고미야는 이미 수개월 전 전학을 간 상황이었다. 

다즈하라가 고미야에게 교복을 빌려줬는데, 다른 친구에게 빌린 거울이 들어 있어서 도난 소동으로 발전했다는게 진상입니다. 그런데 추리적으로 딱히 눈여겨 볼 부분은 없습니다. 히무라가 이렇게 추리해 낸 과정이 제대로 선보이지 않는 탓입니다.

또한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팬에게서 만족감을 주지 못합니다. 아리스와 히무라가 여고에서 가짜 신분(?)으로 활동하는 일상계 추리물이라는 설정은 독특하지만, 둘의 대화와 전체적인 분위기가 모두 여성 작가가 쓴 듯한 느낌이 많이 들기 때문입니다. 더 건조하게 묘사했어야 했는데 말이지요.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흉내내기에 불과해 보였어요. 수록작 중 최악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히무라 히데오에게 바치는 괴담" 오리가미 교야

도쿄에서 열린 이벤트에 참석했던 아리스와 히무라는 그날 밤 찾은 바에서 서점 직원 쓰지와 합석하게 되었다. 쓰지는 둘에게 자신이 겪었던 괴담을 들려주었고, 히무라는 자신만의 추리로 괴담의 진상을 풀어냈다.

쓰지가 네 편의 괴담을, 그리고 마지막에 합류한 바 손님이 한 편의 괴담을 들려주어 총 다섯 편의 괴담이 선보입니다. 쓰지가 겪거나 들었던 괴담은 모두 추리를 통해 진상이 밝혀지는데, 아래와 같습니다.

  • 후배 하숙집에서 심야에 전자기기가 오작동하는 사건이 자꾸 일어났다. 심지어 어느 날은 한밤중에 탄내까지 났다.
    진상: 개조한 불법 무선기로 통신하는 장거리 트럭이 원인이었다. 심야에 발생한건 장거리 트럭은 고속도로 통행 요금이 할인되는 심야에 운행하기 때문이며, 탄내는 오작동한 전열기구 때문이었다.
  • 쓰지는 대학 시절에 동창과 숲에서 고개를 돌리며 짐승 울음 소리를 내었던 인형 탈을 보았다.
    진상: 몸은 땅 속에 묻힌 사람에게 인형 탈을 씌워 숲속에 방치해 둔 것이었다. 짐승 울음 소리는 재갈이 물려있던 탓이며, 비성수기 휴양지 산속이라는 현장이 근거이다.
  • 등산을 좋아하는 쓰지의 친구는 안개로 뒤덮인 산길에서 똑같이 생긴 오두막을 등산로에서 연이어 발견했다.
    진상: 그냥 오두막이 두 채 있었다.
  • 쓰지는 방학 때 고향 친구 가가와, 가가와의 선배 유모토와 함께 폐업한 유원지에서 담력 시험을 하기로 했다. 그런데 유모토가 미러 하우스 안으로 들어간 뒤 사라져버렸고, 그를 찾으러 들어간 쓰지는 미러 하우스 속 거울에서 무언가 움직이는 형체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그 뒤 가가와와 유모토와는 연락이 끊겼다.
    진상: 고객을 놀라게 만드는데 사용했던 매직 미러를 이용하여 유모토가 쓰지를 놀라게 만든 장난이었다. 

첫 번째 괴담은 재미있고, 네 번째 괴담도 추리만큼은 그런대로 합리적이지만 다른건 별로입니다. 그리고 모두 진상을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도 크고요. 

이보다는 바 손님인 이토가 이야기한 진짜 괴담이 더 괜찮았습니다. 이토는 교통사고 현장에 놓여있던 시들어진 조화를 버리고 새로 꽃을 사서 갖다 둔 뒤, 원망하는 표정의 여자 귀신에게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분명 선의로 행한 일인데 왜 귀신은 원망을 가졌을까요? 아리스의 추리는 '꽃이 문제였다'는 겁니다. 즉, 원래 놓여있던 시든 꽃이 귀신에게 소중한 사람이 놓아둔 꽃이었다는 것이지요. 이 역시 증명할 수 없다는 문제는 있지만 의표를 찌르는 맛도 좋고, 아리스가 추리를 펼친다는 의외성도 좋았습니다.

그 외에 저는 잘 모르는 '심령 탐정'이라는 아리스가와 월드 속 다른 주인공이 언급되는 등, 헌정물로는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블랙 미러" 시라이 도모유키

'나'는 대학 미스터리 동호회 때 친구였던 가가미 에이지로부터 오랫만에 연락을 받고 만났다. 그 뒤, 경찰을 만나 에이지와 그의 형 고이치가 연루된 살인사건에 대해 들었다. 상황은 에이지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나'와의 만남을 진행한 것으로 보였지만, 알리바이 트릭은 완벽해서 깨기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추리소설가를 꿈꾸던 '나'와, 경찰을 돕던 건방진 교수 히무라가 힘을 합쳐 알리바이를 깨는데 성공한다.

복잡한 시간표로 구성된, 전형적인 시간표 알리바이 트릭물입니다. 쌍둥이인 에이지와 고이치가 어느 시점에 교체하여 서로의 알리바이를 만든게 진상입니다. 핵심은 고이치가 엄지손가락을 절단한 뒤, 그걸 가지고 에이지가 고이치의 비밀금고를 열었던 것이고요. 이는 고이치가 범행을 저지른 뒤, 생수병 뚜껑을 따지 못해 머그컵으로 물을 마셨던 상황 등으로 추리됩니다.

하지만 지금 시점에서 보기에는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70년대라면 모를까, 지금은 CCTV가 여러 곳에 가득한데 자신의 노출을 이렇게까지 숨기면서 짜여진 시간표 동선대로 이동한다는건 말오 안되니까요. 히무라가 사건에 뛰어든 이유가 역에서 뛰어나가던 에이지와 부딪혔기 때문이었다는 우연도 작위적이고요.

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일종의 메타적인 설정은 나쁘지 않지만, 현재 가장 뜨거운 작가 중 하나인 시라이 도모유키의 작품치고는 영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의 수수께끼" 유키 하루오

추리 소설가인 '나'는 신작 구상을 위해 담당 편집자 미토베 씨와 함께 취재차 온천 휴양지를 찾았다. 그런데 그곳 식당에서 만난 점원 후쿠나가 아이가 아리스가와 아리스를 극도로 싫어하는 사촌 이야기를 해 주었다. 둘은 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위해 후쿠나가의 사촌 아버지인 외삼촌 거처를 찾았고, 그곳에서 미토베 씨는 사촌의 행동을 추리해 내는데...

작품을 다 읽었지만 극도로 싫어한다는 사촌의 기묘한 언행에 대한 진상을 밝혀내는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아리스가와 아리스의 유명 작품들이 다수 등장하지만, 무대와 설정은 아리스가와 월드가 아니라는게 특징입니다. 

추리는 사촌이 후쿠나가에게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거짓말을 했다는 데에서 시작합니다. 서재에 있던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은 커버와 띠지만이며, 내용물은 다른 책으로 바뀌어져 있었기 때문이고요. 사촌은 별채에 침입하여 아버지의 만년필을 훔쳤습니다. 그러나 눈이 오는 바람에 별채에서 탈출하지 못했고, 별채는 난방이 안되어서 너무 추웠던 탓에 아리스가와 아리스 책을 난로에 태웠던 겁니다. 후쿠나가의 외삼촌은 모든 장서를 서재와 별채, 두 곳에 비치하였기 때문에 다음날 외삼촌이 돌아오기 전 사촌은 서재의 책을 별채로 옮기고, 때우지 않았던 띠지와 표지를 서재에 있던 다른 책에 씌워 위장했고요. 책은 새로 주문했지만 도착까지는 시간이 걸려서 당장 후쿠나가에게 책을 빌려주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안티인 척을 했던 거지요.

위의 추리를 위한 모든 정보는 공정하게 제공되는 좋은 추리물입니다.  유명 작품은 물론 히무라 히데오 시리즈의 TV 방영까지를 작품 설정에 녹였다는 점에서 '헌정'이라는 취지에도 딱 들어 맞고요. '아리스가와 아리스 안티'를 표방한 사촌의 주장은 헌정이라는 취지와 정 반대이기는 하지만, 이런게 또 기획의 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제가 읽었던 유키 하루오의 작품은 비현실적인 설정이 문제였는데, 소규모 일상계로 설정을 좁혀 놓으니 훨씬 낫네요.  

"행각승 지장 스님의 낭패" 아쓰카와 다쓰미

20년 전, 행각승 지장 스님의 이야기를 '에이프릴'에서 들은 멤버였던 '나'와 도코가와는 오랫 만에 한 잔 하기 위해 '풀스 메이트'라는 가게를 찾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20년 전과 똑같이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는 행각승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20년 전과는 다르게, 손님들의 공격과 의문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는 풋내기였다.

"행각승 지장 스님의 방랑"은 그렇게 인기가 많은 작품은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이 작품을 헌정물로 새롭게 써 낸게 좀 신기하네요. 일종의 '도라에몽 세계관'인 히무리 히데오 시리즈와는 다르게, 지장 스님이 활약한 20년 후인 현재를 무대로 협박범 구로사와가 살해당했는데, 사체는 피해자가 수집했던 나비 표본 수십 개로 둘러 쌓여 있었던 사건에 대한 추리가 펼쳐집니다.

나비의 이름이 범인을 특정하는데, 나비 표본 하나만 꺼내어져 있으면 범인이라는게 바로 드러나서 어쩔 수 없이 표본을 전부 꺼냈다는게 진상입니다. 범인은 나비 표본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모르는 아사기 유즈루였고요.

이 뒤에 등장인물의 이름, 수를 가지고 딴지를 거는 손님에게 진짜 지장 스님이 나타나 보강하는 추리를 펼치며 이야기가 마무리 됩니다. 

여러모로 추리 퀴즈에 가까우며, 작위적이고 설득력이 낮다는 점에서 원전과 비슷한 점이 많네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시체의 실루엣은 말한다" 이마무라 마사히로

에이토 대학 추리 소설 연구회 멤버 5명은 고향 나고야로 취업 활동을 갔다 온 오다가 가져온 수수께끼 풀이에 나섰다. 오다가 만난 동향인 고바야시가 친구가 남긴 암호를 해독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드디어 나왔습니다. "학생 아리스" 시리즈! 이 시리즈 단편은 읽은 적이 없는데, 젊은 작가가 일종의 일상계로 풀어낸게 신선하게 다가옵니다.

형식만 신선한게 아니라 추리적으로도 괜찮습니다. 고바야시의 친구 바토 씨가 남긴 낙서와 다이잉 메시지를 풀어내는 과정이 추리 소설 연구회 5명의 대화를 통해 펼쳐지는데, 정말로 모든 있을 수 있는 상황을 가정하고 추리와 의견들을 내 놓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를 토대로 드러나는 진상은 꽤 합리적으로 느껴져요. 대화로 일종의 추리 대결을 펼쳐나간다는 점에서는 작가의 전작 "시인장의 살인" 속 학생 식당 메뉴 맞추기 게임도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고바야시와 바토가 헤어졌고, 이 사건은 바토가 고바야시가 계속 어울려 줄 것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벌인 일종의 게임이라는 치명적인 단점은 있습니다. 결국 진상은 절대로 드러나지 않는 탓이에요. 다이잉 메시지도 AOK로 읽히는데 이건 All-OK라는 추리 역시 근거없는 공허한 주장일 뿐이지요.

논리적으로 즐길거리는 많은데 다소 맥이 빠진다는건 어쩔 수 없습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에가미 선배의 신상에 대한 이야기 등 팬이라면 소소히 즐길거리가 있지만, 그리 추천할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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