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에 걷다 -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로크미디어 |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리 경시청 총감 방코랭은 스포츠 스타 살리니 공작으로부터 신변 보호 요청을 받았다. 아내 루이즈의 전남편 로랑이 협박 편지를 보낸 탓이었다. 로랑은 정신병으로 입원했다가 의사를 죽이고, 성형 수술을 한 뒤 도주 중인 위험인물이었다.
공작 부부를 만나러 페넬리의 가게에 방문한 방코랭 일행은 얼마 지나지 않아 완벽한 밀실에서 목이 잘린채 살해된 공작의 시체를 발견했다. 뒤이어 유력한 용의자였던 공작의 친구 보트렐르도 목이 베여 살해되고 말았다.
로랑은 어떻게 유럽 대륙을 건너 밀실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깜쪽같이 사라졌을까?
존 딕슨 카의 앙리 방코랭 시리즈 장편. 데뷰작이기도 합니다. 괴이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 그리고 정신병자 살인마가 괴이한 상황에서 사람 목을 베어 죽이는 간담 서늘한 묘사들은 고딕 호러물 느낌도 전해줍니다. 같은 시리즈인 <<해골성>>과 비슷하게요.
추리적으로는 밀실의 제왕 존 딕슨 카다운 밀실 살인 사건이 서두부터 등장하여 눈길을 잡아끕니다. 펠리니의 가게 3층의 방은 앞, 뒷문 모두 감시가 확실했고 (심지어 문 하나는 방코랭이 직접 감시!), 창 밖으로는 아무도 들어올 수 없었으며 비밀 통로도 일체 없었던 완벽한 밀실이었고,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도 완벽했거든요. 트릭이 무엇이었을지 아주 궁금하게 만들어 주었어요.
지명수배범인 로랑이 국경을 건넌 방법에 사용된 트릭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대륙에서 공작을 살해한 뒤, 공작으로 변장하고 국경을 건넌 것으로, 간단해서 현실적일 뿐 아니라 단서들 제공이 아주 공정했던 덕분입니다. 유럽 대륙을 갔다온 이후 공작이 180도 변했다는 증언과 단서들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많거든요. 공작이 마약 중독자였다는 설정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를 초반부 공작의 짐은 국경에서 검사를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와 연결하여 '공작이 마약 밀수를 했다'는 식으로 독자를 이끌지만, 알고보니 스포츠맨 공작은 마약 중독일 수 없으니 다른 사람이라는 결론에 이르는 단서였지요.
탐정으로서 매력은 다소 떨어지지만, 방코랭의 추리법에 대한 소개 등도 추리 애호가로서 볼 만 했습니다. 지식이나 경험없이 타고난 통찰력만으로 수사관이 될 수 없다며, 과학 수사 기법을 비롯하여 분석에 대한 전문가적인 지식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일갈하는데, 시대를 앞서간 생각이었어요.
벨 에포크 시대를 정면으로 다루는 배경 설정도 볼거리였습니다.. 공작 등 귀족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자유분방한 연애를 하며 마약을 빨면서 검술 대결을 펼치는데, 자동차를 타고다니고 전기불이 존재하는 이색적인 세계의 풍광이 잘 묘사되어 있으니까요. 분명 존재했던 과거인데 이상할 정도로 비현실적이라서 이런 곳이라면 명탐정과 미치광이 연쇄 살인범이 있어도 자연스러울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로 따지면 일제 강점기 당시, '마굴'이라 불렸던 상하이 분위기가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하지만 딕슨 카의 다른 걸작들에 비하면 많이 처집니다. 추리적인 부분에서의 문제가 너무 커요. 밀실 트릭부터가 알고보면 별게 아니었거든요. 설명도 부족했고요. 공작 (으로 변장했던 로랑)은 이미 11시경에 부인에게 살해당했고, 11시 30분에 목격된 공작은 보틀레르의 변장(?)이었다는 트릭이 사용되었습니다.
문제는 카드룸 입구를 지켜보는 경찰 눈에 뜨이지 않고 흡연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카드룸 문은 벽 때문에 홀에 서 있는 그 누구라도 문을 볼 수 없었다나요. 그렇다면 이건 밀실이 아니었던 겁니다! 이런걸 현장에 있었던 명탐정 방코랭이 몰랐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게다가 이 중요한 사실이 독자에게는 제대로 설명되지도 않습니다. 맨 첫 장에서 약도가 제공되기는 하나 이 정도로는 부족했어요.
보틀레르가 아무런 변장도 하지 않고 로랑처럼 보였던 이유, 루이즈 부인 몸에 반드시 튀었을 핏자욱은 어떻게 처리했는지 등 설명되지 못한 점도 너무 많습니다. 보틀레르가 가발이라도 썼더라면 모를까, 여러모로 억지스러워서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네요.
처음에 등장해서 살해당했던 살리니 공작은 변장한 로랑이었다는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아무리 연기력이 뛰어나고 얼굴이 닮았다 하더라도, 주위 사람들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는건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지금도 아니고, 이 당시 성형수술 수준은 별볼일 없었을텐데 말이지요. 옛 친구야 안 만났다쳐도, 공작 가문의 오래된 변호사 키라르의 눈까지 속였다는건 지나쳤어요.
또 변장에 성공했는데, 자기 자신을 협박하는 편지를 써서 경찰에 신변 보호 요청을 한 이유도 모르겠습니다. 특별히 경찰과 게임을 하고 싶었던 것 같지도 않고, 그나마 생각해 볼만한건 자기 과시지만 그걸 위해서는 잃는게 너무 많아서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방코랭의 추리대로 루이즈 부인을 살해하고 도주할 생각이었다면, 경찰을 부를 이유는 없었어요.
루이즈 부인의 자백만으로 마무리되는 결말도 그닥이었습니다. 첫 번째 범행은 그렇다쳐도, 보틀레르를 살해할 때의 증거는 이미 방코랭이 차고 넘치게 모은 것으로 보여서, 구태여 자백은 필요도 없었습니다. 그녀가 남자들에게 농락당한 기구한 인생이라는게 잘 그려지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이용한 남자들을 깔끔하게 살해한 팜므 파탈로 보기에는 범행이 허술해서 이도저도 아닌 캐릭터가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게다가 루이즈 부인이 모든 트릭과 살해 방법을 스스로 말하는 탓에, 방코랭은 별로 하는게 없다는 문제도 큽니다. 모든 트릭을 알아챘다고는 하지만, 정작 하는거라고는 루이즈 부인의 자백에 추임새를 넣는 것 밖에 없어서 이게 과연 명탐정인가 싶더라고요. 물론 진짜 공작의 시체를 발견하고, 루이즈 부인이 진범이라는걸 알아내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명탐정이라면 마지막 루이즈 부인 자백에서도 뭔가 존재감을 보여주었어야 했습니다. 이런 점이 방코랭을 다른 딕슨 카의 명탐정들만큼이나 기억에 남지 못한 이유가 아니었나 싶네요.
화자인 미국인 제프 역시, '사랑꾼' 으로의 모습 말고는 아무런 활약을 보이지 못해서 인상이 흐릿한건 마찬가지에요.
그래서 제 별점은 2점. 절판된지 오래인데, 구태여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번역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독성도 떨어지는 편이고요.
오래전 처음 읽었을 때에는 아주 좋았던 기억이 남아있는데, 나이를 너무 많이 먹었나봅니다. 제가 읽었던 딕슨 카 작품 중에서는 최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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