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 캡슐의 수수께끼 - 존 딕슨 카 지음, 임경아 옮김/로크미디어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국의 시골마을 소드버리 크로스에서 독이 든 초콜릿에 의한 독살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 해결을 돕기 위해 런던 경찰청의 엘리엇 형사가 수사에 합류했지만, 엘리엇이 도착하자마자 마을의 유지 마커스 체스니가 가족, 친지가 보는 앞에서 독살당했다. 마커스는 스스로 독살 사건의 증명을 위한 퍼포먼스를 벌였었다. 퍼포먼스로 빚어진 주요 용의자들의 확고한 알리바이 등으로 사건은 미궁에 빠졌고, 엘리엇은 기디온 펠 박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존 딕슨 카의 '기디온 펠 박사' 시리즈 장편으로, 국내에서는 처음 소개된 작품입니다.
다른 존 딕슨 카의 작품과 달리 이 소설은 소품 같은 느낌을 주며, 별다른 역사나 전설, 괴담과 연결되지 않는 점이 특징입니다. 가장 인상적인 요소는 피해자인 마커스 체스니가 스스로 '퍼포먼스'를 벌인다는 설정이고요. 이 퍼포먼스는 추리물의 맹점이라 할 수 있는 '가치 없는 증언'이라는 요소를 이용해 이중 삼중으로 꾸며진 일종의 추리쇼이며, 연극적인 느낌을 주는 동시에 아주 사소한 디테일에서 목격자들이 서로 다른 증언을 하는 등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퍼포먼스 추리쇼는 작품의 핵심 트릭이기도 합니다. 퍼포먼스와 이어지는 질문-답변을 통해 심리학자 잉그람 교수가 보여주는 진지한 두뇌게임 역시 볼거리 중 하나이고요.
기디온 펠 박사를 통해 작가가 독살에 대해 진지하게 고찰하는 부분도 흥미로웠습니다. 여러 사례를 제시하며 독살범이 감수해야 할 세 가지 위험 요소—독살은 독을 넣었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독을 넣을 기회와 동기가 없다는 것을 납득시켜야 하며, 독을 입수하는 과정에서 걸리지 않아야 한다—를 설명하는 부분은 현학적인 재미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방법 중에서 가장 도망가기 어려운 것이 독살이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과정도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그러나 그 외의 부분에서는 존 딕슨 카의 작품답지는 않더군요. 완벽한 추리소설과는 다소 거리가 있거든요. 피해자가 주관한 퍼포먼스가 우연히도 범인의 혐의를 가리는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설정이라 하더라도, 범인이 소드버리 크로스에서 무차별 독살 사건을 벌인 이유가 전혀 설명되지 않는 점은 큰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범인의 진짜 목적은 마커스를 살해하는 것이었는데, 불필요한 사건을 벌여 마을에 수사력을 집중시키는 것은 불합리한 설정입니다.
또한, 윌버를 가격하여 뇌진탕을 일으킨 부분도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윌버가 죽지 않았다면 모든 진상을 고백했을 가능성이 크므로, 범인은 단지 운이 좋았을 뿐이며 계획이 치밀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마지막으로, 카메라로 촬영한 필름 트릭은 억지스러운 요소가 강합니다. 낮과 밤의 구분이 그렇게까지 모호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고, 리허설과 실제 퍼포먼스가 완벽하게 동일했을 것이라는 전제 역시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특히 주요 목격자가 두 명이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트릭이 성공했다는 점은 지나치게 운에 의존한 설정이라고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용의자가 제한된 상황에서 긴장을 유지하는 작가의 솜씨는 여전히 훌륭하며, 뻔한 상황을 노련하게 극복하는 전개 역시 거장다운 면모를 보여줍니다. 단점을 나열했지만, 공정한 두뇌게임이라는 본격 추리소설의 기본 원칙에 충실한 작품이며, 정통 퍼즐 미스터리로서의 추리적 수준 역시 높은 편입니다. 다만, 작가의 명성을 고려했을 때 지나치게 작위적인 요소가 많기는 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존 딕슨 카 작품 완독을 목표로 이 책을 읽었는데, 드디어 완독했다고 생각했더니 신작 "기묘한 사건, 사고 전담반"이 또 출간되었네요. 이 작품은 언제 읽어야 할까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