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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7/30

이런 설정은 있을리 없다! 트릭이 변화하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

honto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오랫만에 소개드리네요. 국내 소개된 작품은 3편입니다. 이 중 '사쿠라다 리셋 3부작'은 라이트 노벨 같은데, 이미 절판되었고 중고 시세는 사악하네요. 구해 읽기는 쉬워 보이지 않습니다만, 뭐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겠지요.
그나저나 지나치게 일본 작품 위주라는건 좀 거슬립니다. 이런 류라면 '다아시 경 시리즈'를 빼 놓을 수 없었을텐데 말이죠


특수 설정 미스터리란 현실에서는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이 처음부터 설정으로 포함되어 있는 미스터리를 말한다. 예를 들어 현실과 다른 물리법칙, 심령현상이나 초능력, 판타지나 공상과학과 같은 설정 속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미스터리의 트릭과 추리 논리에 특수한 설정으로 인한 구속력이 더해지는 것이 매력이다.

"마법으로 사람을 죽일 수 없다" - 가모우 다츠야
19세기 영국을 연상시키는, 마법이 존재하는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 총 6편의 연작 미스터리. 이 세계의 마법에는 엄격한 규칙이 존재하며, 결코 무법천지가 아니다. 마법이 개입된 세계의 법칙에 따라 왕립 마법원 수사관인 데이븐포트가 논리적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앨리스 죽이기" - 고바야시 마스미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의 세계의 주민이 된 꿈을 꾸는 주인공들. 꿈속에서 누군가가 죽으면 현실 세계에서도 누군가가 죽는다는 것을 깨달은 주인공들은 꿈속의 범인을 찾기 시작한다.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꿈과 현실 세계가 연결되어 있다는 설정은 파격적이지만, 세계관은 매우 논리적이다.

"일곱 번 죽은 남자" - 니시자와 야스히코
주인공은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같은 하루를 9번 반복하는 특이한 체질을 가진 소년. 그에게는 가끔씩 일어나는 현상이지만, 이번만큼은 상황이 달랐다. 루프에 빠진 두 번째 바퀴에서, 첫 바퀴에서는 무사했던 할아버지가 살해당하고 말았기 때문. 주인공은 루프의 법칙에 따라 할아버지 죽음의 진실을 밝혀낸다.

"명탐정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 아쓰카와 다쓰미
탐정이 경찰 아래 움직이는 조직이 되어버린 세상. 증거를 조작해 죄를 면했다는 의혹으로 명탐정의 탄핵 재판이 열리는데........ 이 책의 특수 설정은 탐정 조직의 존재 뿐 아니라, 특수한 조건에서 죽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몸으로 환생한다는 것. 환생자도 참여하는 탄핵 재판의 행방과 사건의 진실이 복잡하게 펼쳐진다.

"고양이와 유령과 일요일의 혁명 (사쿠라다 리셋 3부작)" - 코노 유타카
주민의 절반이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도시 '사쿠라다'를 배경으로 한 소설. 주인공은 기억을 완전히 유지할 수 있는 능력을, 그리고 여주인공은 세상을 3일간 되돌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초능력자들로 가득한 마을에서 두 사람이 다양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데, 능력끼리 조합하는 퍼즐 같은 논리성이 매력적.

2024/02/02

흉인저의 살인 - 이마무라 마사히로 / 김은모 : 별점 2.5점

흉인저의 살인 - 6점
이마무라 마사히로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핵심 트릭과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무라와 겐자키는 나루시마의 의뢰로 폐허 놀이동산으로 유명한 드림 시티로 향했다. 드림 시티의 대표 후기 겐스케로부터 구 마다라메 기관에서 연구했던 무언가를 되찾기 위해서였다. 나루시마는 용병들까지 고용하여 만전을 기했다. 드림 시티 안에 있는, 후기 겐스케가 거주하는 흉인저는 매달 종업원 한 명이 불려간 뒤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입한 일행은 흉인저 안에서 후기를 제압하는데에는 성공했지만, 모두 갇힌 채 외팔이 살인마 거인을 만나 도륙당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거인이 햇빛을 싫어하여 낮에는 비교적 안전하게 탈출을 고민할 수 있었다. 폐쇄된 문을 부수는건 거인이 밖으로 나가 더 큰 사고를 일으킬 가능성이 높았기에, 첫 날 살해당한 코치맨이 가지고 있던 열쇠를 어떻게든 회수하기로 했다. 그러나 탈출을 준비하던 중 생존한 일행 내부에 또다른 살인자가 있다는게 드러났다. 후기와 흉인저 고용인 사이가가 살해당한 탓이었다. 뒤이어 거인을 유인하여 열쇠를 회수하는 작전도 실패했고 나루시마마저 거인에게 살해당했다.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하무라와 겐자키 시리즈 세 번째 작품. 마다라메 기관이라는 연구 기관에서 비롯된 괴물, 괴인들이 핵심 소재인 '특수 설정'이 여전히 작품의 중심입니다. 이번에는 강화된 신체를 얻은 살인마가 등장합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상당한 분량임에도 쉽게 읽힙니다. "13일의 금요일"과 유사한, 초강력 살인마가 등장하는 슬래셔 호러물로 기본 이상의 재미를 선사해주는 덕분입니다. 살인마를 피해 탈출하기 위한 작전과 쫓고 쫓기는 상황에 대한 묘사도 흥미진진하고요.

추리적으로도 나쁘지 않습니다. 후기를 살해한 범인이 고리키 미야코라는걸 밝히는 겐자키의 추리부터 깔끔했습니다. '거인이 거주구역을 오가는 철문을 연 건 딱 한 번 뿐이었다, 거인은 외팔이라 머리 두 개를 들 수 없었다, 머리를 잠깐 내려 놓았을 수는 있지만 후기의 머리는 먼지가 묻지 않고 깔끔했다' 등의 근거를 통해 합리적으로 설명되는 덕분입니다. 모든 단서와 근거들은 독자들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되고요. 고양이 장식 눈에 박혀있던 '알렉산드라이트'에 대한 말실수는 좀 오버스럽긴 했지만요.
사이가를 살해하고, 살해된 사이가의 머리를 머리 무덤으로 옮겨 놓은 사건은 불가능 범죄라 더 흥미롭습니다. 아침이 되기까지 사이가의 시체가 놓여있던 부구획에 드나든 건 거인밖에 없었습니다. 부구획은 하무라와 아울이, 주구획은 보스가 밤새 감시를 했었지요. 주구획 쪽에서 창문 너머로 목을 절단하기도 불가능했습니다. 밤이 되기 전 사이가의 목을 미리 잘라놓은게 아닐까?라는 것도 현장에 있던 중식도는 거인이 깨어난 뒤 나루시마가 후기의 방에서 가지고 나간 물건이었다는 점에서 부정되고요. 시신 주변에 고인 피가 굳은 상태로 보면 목이 절단되고 아홉 시간 가까이 지났기에 거인이 아침에 자른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럼 도대체 누가 어떻게 사이가의 목을 절단했을까요? 겐자키는 '목이 야간에 절단되었다'는걸 증명하는건 피가 굳은 상태 뿐이라는데 주목해서 거인과 같은 특수 능력을 갖춘 '생존자'가 창문으로 손을 내밀어 자신의 피를 뿌려 굳혔다는 트릭을 밝혀냅니다. '생존자'는 경이적인 생명력과 치유력을 갖춘 덕분에, 피를 많이 흘리고도 멀쩡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인이 아침에 거처로 돌아가면서 시신의 목을 절단했던겁니다. 이렇게 특수 설정이 트릭으로 활용된건, 정통 본격물로는 반칙이겠지만 이 작품에는 굉장히 잘 어울렸다고 생각됩니다. 재미도 있었고요.
반드시 피해자 목을 절단한 뒤 '머리 무덤'에 버리는 거인의 버릇을 이용해서 열쇠를 회수한 마지막 장면도 감탄스러웠습니다. '생존자' 우라이는 코치맨의 시체에서 열쇠를 회수한 뒤 열쇠를 입 안에 넣었고, 머리 무덤 안에 숨어있던 겐자키가 거인이 가져다 버린 우라이 머리에서 열쇠를 회수했다는건데 정말 생각도 못했네요. '머리 무덤'의 존재와 거인의 버릇이라는 특수 설정을 활용했다는건 두 번째 살인 사건 트릭과 유사한데, 이런게 이 작품의 묘미겠지요.
미스터리 애호회에 가입하려는 친구들에게 테스트를 하는 도입부도 "9마일은 너무 멀다"가 떠오르는 소소한 재미가 좋았으며, 그 외 안락의자 탐정에 대한 의견이나 탐정과 범인의 역할에 대한 담론 및 기타 추리들도 풍성한 편입니다.

그러나 '특수 설정'을 위한 여러 설명들이 유치하고 작위적이라는 문제는 큽니다. 거인의 과거를 설명하기 위한 케이라는 소녀 이야기가 대표적입니다. 그녀가 거인이며, 살육은 바이러스로 인해 사람들을 원숭이 괴물로 착각했기 때문이라는 나름의 반전은 뻔하면서도 억지스러웠습니다. 미쳐버린 케이를 후기가 그동안 어떻게 돌봐왔는지도 설명되지 않고요. '생존자'는 거인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능력을 얻었는데, 유사한 생명력과 치유력을 갖췄다는 것도 지극히 편의적인 설정이었으며, 우라이 고타가 무려 30년 전에 케이와 했던, '무슨 일이 있어도 우린 함께'라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쓸데없는 살인 (사이가 살해)을 저지른 것도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특히 이 사건은 작품의 핵심이라서, 이렇게 동기가 부실하다는건 추리물로는 큰 약점일 수 밖에 없어요.

작위적인 설정은 그 밖에도 넘쳐납니다. 사회 생활에 문제가 있는 사람들만 고용하고, 이들 중 한 명을 매달 거인에게 산제물로 바친다는 설정은 이게 과연 21세기의 이야기인지 의심스러울 정도입니다. 가문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마다라메 기관의 연구 성과를 노린다는 나루시마, 사고를 불러오는 명문가의 영애 겐자키 설정도 한결같이 만화스러웠고요. "13일의 금요일"이 떠오르는 거인 케이 설정 역시 뻔해서 고민한 티가 전혀 느껴지지 않았어요. 이런 점들은 '특수 설정 미스터리'가 가질 수 밖에 없는 고질적인, 당연한 문제이기는 합니다만, 이를 설득력있게 포장하려는 최소한의 노력은 필요했습니다. 
이보다는 차라리 2차 대전 때 생체 실험을 하다가 괴물을 만들었고, 전후 공습으로 폐허가 된 연구소 내에서 생존한 연구원이 괴물을 데리고 연구를 이어왔지만 괴물의 친구가 모든걸 끝내기 위해 찾아왔다는 정도로 끌어나가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사이가도 단순 고용인이 아니라, 연구소 내 연구원 중 한명이었다고 설명하면 동기가 설명되었을거고요. 너무 "경성크리처"스러웠을까요?
아울러 '흉인저''의 복잡한 구조에 대한 설명이 장황한 것도 별로였습니다. 계속 앞 부분에 수록된 약도를 찾아 읽게끔 하는 상세한 묘사가 이어지는데, 사건과 추리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는 요소는 아니었던 탓입니다. 일종의 맥거핀에 불과했어요.

이렇게 단점이 적지는 않습니다. 그래도 '특수 설정 미스터리'라는건 감안해야겠지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최소한 "마안갑의 살인"보다는 좋았습니다.

2025/07/27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 아쓰카와 다쓰미 /이재원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일본 신예 작가의 본격 추리 단편집으로, 총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 장르물이라는게 특징입니다. 표제작의 투명 인간과 "도청당한 살인"의 가공할 청력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다른 두 편도 아이돌 오타쿠들, 탈출 게임이라는 다소 특이한 설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고요. 이런 특수 설정들은 단순 재미 요소가 아니라 추리와 트릭에 효과적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특징은 표제작은 "브라운 신부" 시리즈 중 한 편인 "보이지 않는 남자"에서 따온 등 기존 추리 명작들의 패러디, 인용이 많다는 점입니다. 작가의 추리 장르에 대한 깊은 애정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설정이 과한 측면은 분명 있지만, 신선한 발상과 실험적인 구성에 본격 추리가 결합된 결과물은 썩 나쁘지 않습니다. 전체 평균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신선함을 추구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투명인간은 밀실에 숨는다"

일종의 병에 걸려 투명인간이 된 사람들이 존재하는 시대, 투명인간 아야코는 투명인간 치료제를 개발한다는 가와지 교수를 살해했다. 하지만 이를 안 탐정 자카제와 남편 나이토 등 관계자가 현장에 들이닥쳐 갇히고 말았다. 하지만 자카제의 치밀한 탐색에도 아야코는 발견되지 않았다. 그녀는 어디에 숨었나? 

투명인간이라는 비현실적인 설정을 전면에 내세우면서도, 트릭과 반전이 치밀하게 펼쳐지는 작품입니다. 

우선 밀실에서 아야코가 숨은 트릭은, 아야코가 살해된 교수의 시체 위에 올라가 누워 있었다는 겁니다. 이는 시체를 난도질하고, 오른쪽 가슴에 꽂은 칼을 망치로 눌러 부러뜨린 상황같이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제공된 단서를 통해 밝혀집니다. 멀리서 보아도 '확실하게 죽은 사람'으로 보이게끔(그래서 구태여 시신을 잘 확인하지 않게끔) 과한 상처를 입히고, 누울 자리에 칼이 튀어나오지 않게 만들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이 트릭 하나로 끝나지 않습니다. 사실 아야코는 이미 누군가에게 살해되었고, 지금 투명한 상태로 움직이는 '아야코'는 이웃집 여성 와타베 요시코가 변장한 인물이었다는 반전으로 이어집니다. 이 반전 또한 이야기 중에 제시되는 여러 단서들 - 아야코(요시코)가 자택에서 오른쪽과 왼쪽을 혼동하는 묘사, ‘보름달을 반지로 만든다’는 이야기가 성립하려면 집의 구조가 반대여야 했다는 점 등 - 로 설득력을 갖추게 됩니다. 교수를 살해한 동기도 이 반전을 통해 설명되고요. 투명인간이 치료되면 정체가 탄로나게 되니까요. 투명인간은 메이크업으로 외형을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메이크업 아티스트인 요시코가 아야코로 변장할 수 있었다는 것도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잘 녹여낸 대표적인 예입니다. 탐정 자카제 역시 투명인간이었다는 결말도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투명인간이라는 만화적인 설정은 그렇다쳐도, 밀실에서 시체 위에 올라가 숨는 트릭은 지나치게 억지스럽다는 문제는 있습니다. 아무리 투명하다 해도 경찰이 출동하면 결국 들통날 수밖에 없고, 숨은 다음의 계획도 숨는 트릭에 비하면 허술한 탓입니다. 또한 투명인간 설정에 상세한 설명을 덧붙여 공을 들이고 있지만, 눈이 보이지 않는다는 근본적인 물리적 모순을 무시한 점도 조금 거슬렸고요. 별점은 2.5점입니다.

"6명의 열광하는 일본인들"

큐티 걸스라는 여성 아이돌 그룹의 팬 두 명이 다투다 한 명이 사망한 사건에서, 여섯 명의 재판원과 판사들이 평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재판원 전원이 큐티 걸스의 팬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결국 이들이 나누는 토론을 통해, 피고인이 범인이 아니며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가 진범이라는게 밝혀지는데...

아이돌 팬들과 재판을 배경으로 한 코믹 미스터리입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트릭보다도 추리의 진행 방식입니다. 팬들만이 눈치챌 수 있는 단서들—응원봉의 컬러가 이상하다는 점, 울트라 오렌지 라이트 스틱이 현장에 과도하게 많이 남아 있었다는 점, 타다 남은 종잇조각 등—을 통해, 범인이 큐티 걸스의 멤버 사키였고 피고인은 우상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쓰기로 마음먹었다는 진상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꽤 그럴듯하게 진행되거든요. 시작은 "12인의 성난 사람들"이었지만, 전개와 결말은 "키사라기 미키짱"인 셈인데, 오타쿠 팬심과 진지한 법정 추리물을 결합한 방식이 신선했습니다. 코믹한 오타쿠들 대화 중심의 구성도 재미있는 요소였고요. 

추리는 얼마든지 반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본격 추리로 보기엔 무리가 있으나, 부담 없이 읽히는 소품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도청당한 살인"

청력이 비상한 미미카는 오노 탐정에게서 살인사건의 진상을 조사해달라는 의뢰를 받았다. 피해자의 집에 설치되어 있던 도청기에는 사건 당시의 소리가 그대로 녹음되어 있었고, 미미카는 이를 분석했다. 그녀는 녹음된 소리를 듣다가 이상한 불협화음을 느꼈다... 

핵심 단서는 불협 화음이 아니라 발소리가 일정하게 들린다는 것이었습니다. 도청기는 인형 속에 감춰져 있었고 고정된 위치에서 놓여 녹음되었기 때문에,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발소리는 멀어지거나 가까워지는 식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그런데 일정하게 들렸다는 건 누군가가 인형을 들고 이동했다는 뜻입니다. 불협화음의 원인인 녹음된 팩스음이 매우 희미하게 들리는 것도 도청기의 위치가 바뀌었음을 뒷받침하고요. 이를 통해 도청기의 존재와 위치를 알고 있는 탐정사무소 조사원 후카자와가 범인이라는게 드러나게 됩니다.
이렇게 주어진 단서만으로 범인을 추리해 낼 수 있는 완벽한 후더닛물로, 정통 본격 추리소설의 매력을 잘 보여줍니다. 미미카의 가공할 청력과 논리적 추론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좋은 특수 설정 미스터리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미미카의 비상한 청력이 일반 추리의 범주를 넘는 일종의 초능력처럼 느껴져, 약간은 추리 만화나 퀴즈물처럼 보인다는건 단점입니다. 사실 녹음된 소리를 듣고 분석하는 것이라면 이런 특수 설정을 이야기에 도입할 필요도 없었어요. 현실적으로는 음량 조절이나 소리 추출 장비를 활용하는 쪽이 더 설득력 있었을 테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논리적 재미와 퍼즐의 완성도 면에서는 추리 팬으로서 높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는 수작입니다. 오노 탐정과 미미카 컴비의 티키타카도 재미있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13호 선실에서의 탈출"

고등학생 가이토는 유명 추리작가 미도리카와 시로의 인기 시리즈를 모티브로 한 탈출 게임에 초청받았다. 그 곳에서 게임 후원사 사장의 아들인 마사루와 마사루의 동생 스구루를 만났는데, 가이토와 스구루는 갑작스럽게 납치되고 말았다. 알고 보니 납치범들의 본래 목표는 마사루 형제였고, 가이토는 마사루로 오인받아 함께 납치되었던 것이었다. ..

탈출 게임이 핵심 설정으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게임에 등장하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사건의 시각을 알려주는 시계에 대한 문제에서 시작해서, 목격 증언의 모순점을 밝히는 문제, 원고지에 남겨진 메시지를 해독하는 문제로 이어지는데 이 모든 문제들은 그냥도 풀 수 있지만, 마지막 수수께끼를 통해 중요한건 '거울'이며 앞서의 수수께끼와 거울을 조합하여 진짜 범인이 ‘사쿠라기’라는 사실이 밝혀지도록 잘 짜여져 있습니다.
또한 ‘재교부’라는 게임 규칙—같은 문제에 정답을 두 번 낼 수 있다는 룰—자체도 하나의 트릭으로 작용합니다. 초반부 수수께끼의 해답이 두 가지였음을 이 룰을 통해 암시되기 때문입니다. 실제 작중 게임의 구성과 배우들의 연기, 설정 모두 현실적으로 잘 설명되고 있고요.

하지만 납치극 설정은 과했습니다. 가이토와 스구루를 납치한 흑막이 사실 마사루였다는 진상, 그리고 동생 스구루가 처음부터 형의 음모와 게임의 정답을 모두 간파하고 있었다는 설정은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작위적입니다. 치밀한 퍼즐 추리에 비하면 완성도만 떨어트리는 느낌이에요.

그래도 추리 게임이 잘 연출되어 읽는 재미는 충분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09/16

[소설가 감수] 미스터리 소설 추천 인기 랭킹 33선 (2023년 최신판)

NTT에서 운영하는, 리서치 설문조사와 접속수를 바탕으로 모든 장르의 랭킹을 망라한 종합 랭킹 사이트인 goo 랭킹에서 선정했던 랭킹입니다.
전부 33편의 작품이 소개되는데, 랭킹을 감수했다는 소설가 OO씨가 선정한 작품 5개만 소개해드립니다. 상세한 내용은 원문에서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까지 결말을 알 수 없는 긴장감과 스릴은 미스터리의 묘미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의 세계에서도 미스터리는 인기 있는 장르이지요. 재미있는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 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많을 겁니다.
이번에는 소설가 OO 씨의 감수를 받아 '읽고 싶다! '라고 생각되는 작품을 추천해 드립니다. 수상작과 영상화된 작품, 그리고 선택 방법도 함께 소개하니 꼭 참고해 보시기 바랍니다.

소설가가 알려드립니다! 미스터리 소설을 고르는 방법
취재 협조 소설가 OO : 엔터테인먼트 계열의 작품을 출간하고 있는 소설가. 일반 소설,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읽을 뿐만 아니라 영화, 드라마, 만화, 애니메이션 등의 작품도 창작에 활용하기 위해 열심히 보고 읽는다.
OO 씨에게 미스터리 소설을 고를 때 중요한 포인트를 물어보았다.

POINT① :
각종 랭킹 상위권이나 문학상 수상작은 수준이 높다! 그런 작품인지 체크!
화제작이나 실력파 작가의 작품을 우선적으로 읽고 싶은 분들에게는 '고노미스', '서점대상', '나오키상' 등 각종 미스터리 랭킹 상위권 작품이나 문학상 수상작을 추천합니다. 매년 진행되는 랭킹에 오른 작품들은 수준이 높고 읽기 쉬운 작품도 많기 때문입니다. 저도 발표될 때마다 체크해서 소설을 쓸 때 참고하고 있습니다. 자신이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되는 작품을 골라 읽다 보면 '최고의 미스터리 소설'을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작품들의 줄거리를 확인하고 자신에게 맞는 작품을 골라보세요.

POINT②
깜짝 놀랄 만한 트릭과 논리가 충분히 전개되는 본격 미스터리 작품인지 확인하자.
미스터리라고 하면 예상치 못한 트릭이나 논리적인 구조가 재미의 핵심 중 하나입니다. '본격 미스터리 대상'은 본격만을 다루는 상이므로 트릭을 좋아하는 분이라면 참고하시면 좋겠습니다.

POINT③
숨 막히는 전개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서스펜스 작품인지 확인하자
서스펜스 요소가 있는 작품은 독자로서 비일상을 맛볼 수 있는 소중한 시간입니다. 경찰 소설이나 모험 소설, 하드보일드 소설 중에서 미스터리 요소가 있는 작품이 많으니 그 중에서 고르는 것도 추천합니다.

POINT④
사람이 죽는 이야기가 싫다면 '일상의 미스터리'를 다룬 작품인지 확인하자.
'사람이 죽거나 흉악한 범죄가 일어나는 이야기는 싫다'는 분들에게는 '일상의 미스터리'를 다룬 소설을 추천합니다. 가게나 학교 등 일상에서 일어나는 소소한 수수께끼와 궁금증을 풀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여운이 남는 작품이 많은 것도 특징입니다.

편집부
미스터리 소설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나 '어려울 것 같다'는 이유로 피했던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이나 선택 포인트가 있을까요?

OO 씨
사회파 미스터리나 서스펜스는 트릭을 중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의외로 쉽게 읽을 수 있어요.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요코야마 히데오의 '64' 등은 좋은 작품입니다. '수수께끼 풀이는 저녁식사 후에'와 같은 가벼운 미스터리도 쉽게 다가갈 수 있고요.
그중에서도 첫 책으로 추천하고 싶은 것은 아야쓰지 유키토의 '십각관의 살인'입니다. 본격 미스터리 붐의 시발점이 된 작품으로, 다양한 정수가 응축된 작품이거든요. 이 작품을 발판 삼아 점점 더 넓은 세계로 뻗어나가면 좋겠습니다.

편집부
반대로 '대부분의 작품은 다 읽었다'는 미스터리 소설 마니아들에게 추천할 만한 작품의 종류와 선택 방법이 있나요?

OO 씨
미스터리 계열의 신인상은 많이 있습니다. 이를 통해 신인 작가들의 작품을 많이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래야 스타일이나 설정 등의 트렌드를 파악할 수 있고, 보다 폭넓게 미스터리를 즐길 수 있습니다.
참고로 최근 트렌드 장르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입니다. 독자적인 세계관을 만들어 그 안에서 스토리가 진행되는 것으로, '시인장의 살인', '젤리피쉬는 얼어붙지 않는다' 등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소설가 OO 씨 추천! 미스터리 소설 5선
<<까마귀의 엄지>>
사기가 생업인 중년의 두 남자의 이야기. 점차 동거인이 늘어나면서 인생을 건 거대한 계획이 시작된다. 충격적인 전개와 감동적인 결말에 빠져들 수밖에 없는 걸작.
'고노미스'의 단골손님인 미치오 슈스케의 첫 나오키상 후보작으로, 제62회 일본 추리작가협회상을 수상했다. 상쾌한 느낌의 초인기 작품을 읽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OO 씨 comment :
사기꾼인 중년 2인조가 동거인들과 함께 사기 계획을 세웁니다. 마지막에 밝혀지는 진실에 '당했다!'는 놀라움과 함께 짜릿한 쾌감도 느낄 수 있는 명작입니다.

<<13계단>>
가석방 중인 청년과 정년을 앞둔 교도관 두 사람은 10년 전 살인사건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 위해 조사를 하게 된다. 범인으로 지목된 인물은 범행 당시의 기억이 없고, '계단을 올라갔다'는 단서만 알고 있는 상황에서 두 사람은 무고한 남자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데뷰작이자 제47회 에도가와 란포상을 수상한 작품. 2003년에는 영화화되기도 했다. 서스펜스를 충분히 맛보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OO 씨 comment
사형수의 억울한 누명을 벗기기 위해 조사를 시작하는 주인공 교도관. 단서 몇 개와 사형 집행까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과연 그는 억울한 누명을 벗을 수 있을까? 숨 막히는 서스펜스와 함께 독서 후의 만족감도 큰 작품입니다.

<<제 3의 시효>>
F현 경찰 수사 제1과를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집으로, 등장하는 형사들의 개성이 강하고 경찰 내부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 현장감 넘치는 걸작. 제16회 야마모토 슈고로상 후보작으로 드라마화되기도 했다.
독서 후의 충격과 고양감을 맛보고 싶은 분이나 형사 드라마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추천.
OO 씨 comment :
살인사건의 공소시효에 얽힌 '제3의 공소시효'를 파헤쳐 나가는 형사들. 시효 성립 직전의 범인을 체포할 수 있을까? 경찰소설이자 단편소설의 대가인 저자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단편소설집입니다.

<<최후의 증인>>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인 주인공이 불리한 상황에 도전하는 법정 미스터리 작품. 점차 밝혀지는 새로운 사실과 충격적인 전개에 빠져들게 된다. 2015년에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드라마 시리즈도 방영되었으니, 소설을 읽고 흥미가 생겼다면 확인해 볼 것.
OO 씨 comment :
전직 검사 출신 변호사가 활약하는 법정 미스터리. 반전이 있는 법정 장면은 물론, 인간에 대한 깊은 통찰이 감동을 불러일으키는 작품. 시리즈 첫 번째 작품인데, 꼭 시리즈 전부를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하늘을 나는 말>>
사람이 죽지 않는 '일상계 수수께끼'의 명작으로 여대생과 만담가가 '일상 속 수수께끼'를 추리해 나가는 연작 단편집. 살인 사건이나 흉악 범죄와 같은 무서운 소재가 아닌, 일상에 숨어 있는 위화감을 풀어간다. 미스터리 추리의 짜릿함을 맛보고 싶은 분이나 따뜻한 소설을 읽고 싶은 분들에게 추천.
두 사람의 여유롭고 차분한 분위기와 곳곳에 등장하는 라쿠고(만담) 이야기 등 전체적으로 느긋한 느낌이지만, 그 안에는 무거운 내용의 이야기나 인간의 무서움을 느끼게 하는 묘사도 존재.
OO 씨 comment :
여대생과 만담가가 일상 속에 숨어있는 수수께끼를 풀어나가는 본격 미스터리로, '일상계 수수께끼' 장르의 선구자격 작품입니다. 살인 사건 등 흉악 범죄는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미스터리이면서도 안심하고 이야기를 즐길 수 있습니다.

2024/09/01

정말로 추천하고 싶은 미스터리 소설 (オモコロ(Omocoro)bros)

유머러스한 기사들로 인기가 많은 일본 웹 사이트인 オモコロ(Omocoro)bros 편집부 멤버들이 추천하는 미스터리 소설들입니다.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품은 세 편 뿐이라는게 아쉽네요.

브로스 편집부입니다.
8월의 일요일마다 다양한 장르의 "추천 소설"을 소개하는 기사를 전해드리고자 합니다.
이번 주는... "추천 미스터리 소설"! 다양한 미스터리를 즐겨보세요.

**다빈치 오시야마의 추천 호러 소설**
《우주 탐정 노그레이》 (타나카 히로부미)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상황을 전제로 한 미스터리 작품을 "특수 설정물"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마법이 있는 세계"나 "타임루프가 있는 세계"와 같이, 이제는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특수 설정이라도 "아무거나 가능"한 것은 아니란 점이 중요합니다. 마법이 있다고 해서 "아무도 모르는 워프 마법을 범인만 사용할 수 있었다"라고 하면 흥이 깨지겠죠. 비현실적인 상황이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결말에도 논리적인 납득이 필요합니다.
《우주 탐정 노그레이》는 다섯 편의 연작 단편집입니다. 우주를 무대로 하는 능력 있는 탐정 "노그레이"가 기묘한 행성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단, 이 행성들이 모두 매우 특이합니다.
  • 고지라 같은 거대 괴수만 사는 "괴수 행성 킹고지"
  • 주민들이 거짓말을 할 수 없는 "천국 행성 파라이스"
  • 주민 수가 항상 일정하며, 죽은 자가 다시 태어나는 "윤회 행성 텐쇼우"
  • 모두가 대본대로 연극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 "연극 행성 엔게키"
……등, 독특한 행성들만 등장합니다.

예를 들어 미스터리에서 "목 없는 시체"는 흔한 미스터리지만, 그 시체가 무적의 거대 괴수라면? 유쾌한 행성에서 벌어지는 더욱 불가사의한 사건들. 그 해결도 역시 행성의 특수한 성질에 기반을 두고 있습니다. 결말을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렵지만, 마치 모든 것이 가능한 듯 보이면서도 마지막에 피스가 맞아 떨어지며 규칙의 전체 그림이 보이는 그 기분은 미스터리의 묘미라 할 수 있습니다. 장난감 상자를 들여다보는 듯한 재미가 있는 한 권입니다.

**카마도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명탐정의 제물: 인민교회 살인사건》 (시라이 토모유키)

플롯부터 너무 멋진 미스터리 작품입니다. 최고입니다!!!!!!!
미스터리 작품 중에 "다중 해결 미스터리"라는 장르가 있습니다. "진실은 언제나 하나"라는 개념과 정면으로 맞서는 것으로, "추리 결과, 여러 진실이 존재한다"라는 것이 이 장르의 특징입니다. 이 시라이 토모유키 선생님의 다중 해결물은 탁월합니다. 미스터리 팬이라면 반드시 읽어봐야 할 작품입니다.
다중 해결물은 매우 집중해서 읽지 않으면 추리가 계속 바뀌기 때문에, 도중에 "이게 뭐야... 방금 추리는 뭐였지?" 또는 "피곤해... 결론만 말해줘..."라는 상황이 될 수 있지만, 이 《명탐정의 제물》에서는 제시된 여러 추리가 모두 강력한 임팩트를 줍니다. 압도적인 해설 파트를 읽으면서 "이 사람, 정말 대단하다!"라고 감탄하게 될 정도입니다. 장인의 기술에 감탄할 정도로 멋진 작품입니다. "다중 해결"의 구조적 약점을 없애면서, 동시에 "다중 해결"이라는 장르 자체에 새로운 빛을 불어넣는 듯한 훌륭한 플롯을 꼭 경험해 보세요.
다른 작품도 읽을 가치가 충분하며, 이 《명탐정의 제물》을 시작으로 깊이 빠져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다음 작품인 《엘리펀트 헤드》는 정말 최악입니다. 물론 나쁜 의미가 아니라, 정말 재미있지만, 진짜 최악입니다. 사람이 이런 걸 써도 되나? 여러 의미에서 머릿속이 어떻게 된 걸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섭습니다.

**나시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세계에서 가장 투명한 이야기》 (스기이 미츠루)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손이 떨리다니" 라는 경험을 한 건, 이 책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 같습니다.
이제는 일종의 상쾌함까지 느낄 정도로, 기분 좋게 압도당했습니다.
훌륭한 독서 체험을 보장하므로, 아직 읽지 않으신 분들은 꼭 서점에서 구입하시길 권합니다.
아니면 Amazon 카트에 담아주세요.
"전자책은 없나요?"라고 낙담할 시간도 없습니다.
지금.
당장.

**마키노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여섯 명의 거짓말쟁이 대학생》 (아사쿠라 아키나리)

취업을 위해 양산된 듯한 여섯 명의 우수한 대학생들이, 모두 내심 내정받고 싶은 대기업의 최종 면접에 남았으나, 전원이 내정받는다고 생각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한 명만 내정된다고 변경되었고, 그뿐만 아니라 최종 토론 중에 우등생들의 "뒷모습"을 폭로하는 고발장이 나오면서, 한 사람씩 가면이 벗겨지는 미스터리입니다.
책의 재미 순위를 석권하고, 만화화, 영화화, 라디오 드라마화까지 이루어졌을 정도로, 정말 재미있습니다! 취업을 위해 드러난 좋은 면과 고발을 위해 드러난 나쁜 면이 교차하며, 사람의 인상이 전혀 믿을 수 없다는 스릴 넘치는 구성에 책을 놓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게다가 엄청 읽기 쉽습니다!).
여러 번 뒤집히는 대학생들의 의혹에 끝까지 예측할 수 없는 교묘한 미스리드, 마지막에 남겨진 고발문의 놀라운 결말, 그리고 모두가 좋아하는 선명한 복선 회수... 말할 것이 없는 소설의 완전체였습니다. 11월에 영화도 개봉된다고 합니다. 꼭 보세요!

**가미죠의 추천 미스터리 소설**
《흑뢰성》 (요네자와 호노부)

나오키상을 받은 화제작을 지금 와서 추천하는 것도 뭐하긴 하지만, 너무 재미있어서 소개하고 싶습니다.
배경은 전국시대로, 주인공은 실존 인물인 전국 무장 아라키 무라시게입니다.
…잠깐만요, 이 시점에서 "역사물인가, 흥미 없네"라고 생각한 분들, 조금만 이야기를 들어주세요. 이 소설은 등장인물과 배경만 역사물일 뿐, 내용은 완벽한 미스터리입니다.
주인공 무라시게는 어느 계기로 상사 오다 노부나가를 배신하고, 성에 틀어박힙니다. 그곳에 쿠로다 칸베이라는 엄청나게 뛰어난 지장이 찾아와 무라시게를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성 안에서 둘이 나눈 이야기가 지금으로 치면 실제로 있었던 "밀실 토크"처럼 느껴져, 이 두 사람의 생각을 예상해가며 즐기게 됩니다.
그리고 사실 이 이야기에는, 예측할 수 없는 충격적인 반전이 숨겨져 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설마, 이런 전개가 가능하다니!"라고 생각하며 충격을 받을 겁니다. 요네자와 호노부 선생님의 《흑뢰성》을 강력하게 추천드립니다.

다시 한번, 독서의 즐거움을 느껴보세요!

2024/10/12

세상 끝의 살인 - 아라키 아카네 / 이규원 : 별점 1.5점

세상 끝의 살인 - 4점
아라키 아카네 지음, 이규원 옮김/북스피어
"아래 리뷰에는 진범 및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24년 9월 7일, 소행성이 지구에 충돌한다는 뉴스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충돌 날짜는 정확히 반년 뒤인 2025년 3월 7일이었다. 그 뒤 각지에서 폭동이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었다. 하루의 가족도 뿔뿔이 흩어졌다. 어머니는 도망갔고, 아버지는 자살했기 때문이었다. 남동생 세이고는 뉴스 전부터 중학교 때 학교 폭력을 저지른 탓에 히키코모리가 되어 있었다. 매일을 운전 면허 교습을 받으며 소일하고 있던 하루는 고속도로 실습날인 12월 31일에 운전학원 실습차 트렁크에서 칼에 찔려 죽은 여성 사체를 발견했다. 
전직 형사였던 운전학원 강사 이사가와와 함께 얼떨결에 사건 수사에 나선 하루는, 동일한 수법으로 살해당한 피해자들이 있는 하카타와 이토시마에서 펼친 끈질긴 수사로 사건에 NARU라는 인물이 관련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그런데 NARU는 하루의 동생 세이고였다. 모든건 세이고가 중학생 때 다른 친구들과 나카노 이쓰키라는 동급생을 심하게 이지메하고 괴롭혔던 과거와 관련되어 있었다.

제 68회 에도가와 란포상 수상작. 얼마 뒤 지구는 멸망하는데 운전학원에 다니는 여자와 운전을 가르치는 여자 교관이 차 트렁크에서 시체를 발견한 뒤, 연쇄 살인 사건 수사에 나선다는 기발한 설정이 돋보입니다.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 상황도 그럴듯합니다. 세이고는 유이치, 준야와 함께 지구 멸망 전, 자기가 괴롭혔던 이쓰키에게 사과하려고 변호사 히츠미의 도움으로 그를 불러냈던 겁니다. 그런데 마침 불러낸 현장이 폭주 택시 연쇄 살인마인 경찰 이치무라가 시체를 버리던 초등학교였지요. 범행이 들통났다고 여긴 이치무라는 우선 세이고를 현장에서 살해했고, 도주한 유이치, 준야, 히쓰미를 차례대로 살해했던 겁니다. 이 때 세이고의 차를 유이치가 타고 달아나서 범인의 동선이 기묘해졌던 것이고요. 
피해자들이 방심한 상황 - 왜 차 안에서 창문을 열어서 범인이 손쉽게 찌를 수 있게 했는지 - 을 통해 범인이 경찰이라는걸 은근히 드러내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정의감이 너무 넘치는 탓에 범죄자들을 극도로 혐오하는 이사가와 강사 캐릭터도 강렬합니다. 그외 멸망을 앞둔 상황의 다양한 인간 군상들도 다채롭고요.
하지만 추리 소설이라고 부르기에는 많이 부족합니다. 히쓰미의 신원을 알아내어 사건 파일을 입수하고, 피해자 준야를 처음 발견했다는 료도 형제와 우연찮게 만나게 되어 이야기를 듣고 동행하고, 세이고의 '마지막 사과'와 그 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현장에 있었던 이쓰키가 하루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알려주고, 이치무라가 직접 나타나서 하루 등을 납치하지만 료도 형제와 중간에 만났던 소녀 나나코 덕분에 위기에서 벗어나서 생명을 구한다는 식으로 이야기가 정해진 순서대로 흘러가는 탓입니다. 이 과정에서 추리가 개입될 여지는 전무합니다. 이사가와 강사의 추리력이 번득이는 장면이 없지는 않지만, 본 사건과는 크게 관련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고요.
그리고 범인이 경찰 이치무라라는건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습니다. 경찰차 범퍼에 가해진 손상이 비중있게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폭주 택시'가 경찰차라는걸 목격자들이 놓쳤다는게 더 말이 안된다고 생각이 됩니다. 높은 가드레일 탓에 경찰차 특유의 도장을 확인할 수 없었던 탓이라고 설명되는데, 지극히 운과 우연에 기반하고 있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이치무라의 동기가 작품의 핵심인 '지구가 곧 멸망하는데 사람들을 죽이는 까닭이 뭔지?'를 잘 설명하고 있지 못한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무대 설정만 기발할 뿐, 결국 뻔한 사이코패스 연쇄살인극과 다를게 없는 탓입니다. 특수 설정 미스터리라면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작품처럼 그 설정이 추리와 연결되어야 합니다.

다른 후보작이 어땠기에 이 작품이 만장일치 수상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란포상 수상작으로 믿기 어려울 정도의 망작이었습니다. 추리물도 아니고, 특수 설정도 이야기에 잘 녹여내지 못해서 좋은 점수를 도저히 줄 수 없네요. 그래서 별점은 1점에 가까운 1.5점입니다.

2026/01/23

수상탑의 살인 - 김영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년간의 연구 끝에 지구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을 절대 막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린 지구환경과학부 전 교수 박종호는 거액의 돈을 들여 동해 바다에 스스로 떠 있일 수 있는 거대 건물인 수상탑을 만들었다. 

종호는 특별히 선정한 몇몇 사람들을 수상탑으로 초대했는데, 초대한 당일 수상탑에 폭우와 강풍이 덮쳤고 휴대전화도 사용할 수 없게 되었으며 유일한 탈출 수단인 배마저 폭발해 버렸다. 그리고 다음 날 탑 정원 벤치에서 무언가에 찔려 죽은 종호의 딸 가온의 사체가, 종호의 잠긴 방 안에서 종호가 목이 베어 죽은 채 발견되었다.
사건 해결을 위해 마침 지도 교수와 함께 수상탑에 방문한 이론입자물리학 전공 대학원생 한규현이 탐정으로 나서는데...

"법의 체면"에 이어 한국 추리 소설은 올해 벌써 두 번째네요. 한국추리작가협회가 선정하는 제41회 한국추리문학상 대상 수상작이기도 합니다. 

국내 작품 중에서는 보기 드문, 정통 본격 미스터리를 정면으로 내세우는게 특징입니다. 특히 트릭은 공을 많이 들였습니다. 밀실 트릭과 장치 트릭이 사용되었는데, 플랫폼과 밸러스트 등을 이용해 파도에도 흔들리지 않고 물 위에 떠 있는 기묘한 구조의 수상탑 설정과 잘 결합되어 있거든요. 이 설정과 수상탑 방의 비정상적일 정도로 단단한 문, 기묘한 발코니 여닫이 구조가 트릭의 핵심이고요. 

박종호 사건에서 범인 가온은 범행 당시 수상탑을 바다 밑으로 가라 앉힌 뒤, 자기 방에서 5층 종호 방 발코니로 떠 갔습니다. 종호가 놀라 발코니로 나왔을 때 종호의 목을 칼로 그어 살해했고요. 한규현 등이 현장 조사를 했을 때 발코니 문은 열려 있었지만, 5층에서 아래로 내려갈 방법이 없어서 밀실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1층과 다름 없었던 상황이었던 겁니다.
종호의 애인 승희 살인 사건은 더 대담합니다. 가온은 약간의 조작(화약 폭발?)으로 승희 방문이 열리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승희는 욕실 비상구로 탈출하려고 했는데, 위층인 3층 내부는 탑이 가라앉은 탓에 물로 가득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비상구를 열자, 4m의 물기둥이 승희를 직격해 사망하게 되었지요.

이렇게 약간의 특수 설정을 활용한 본격물적인 트릭은 꽤 괜찮습니다. 추리를 위해 필요한 정보와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되고요.
수상탑도 본격물 무대로는 완벽합니다. 외부와 단절된 클로즈드 써클이며 그 자체가 트릭의 핵심이기도 하다는 점에서요. 이런 설정은 그간 한국 작품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부분이라서 신선하게 다가왔습니다.

그런데 단점도 명확합니다. 소설로 잘 읽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전개가 느리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이 약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캐릭터입니다. 주인공 한규현은 현실적인 인물이지만 너무 평범합니다. 심약하고 수동적인 성격이고, 유머 감각도 전무하다시피해서 이야기를 이끌 만한 매력이 없어요. 독특한 공간과 어울리는 인물이 하나 쯤은 필요했지만, 그런 역할을 해주는 캐릭터는 끝내 등장하지 않습니다.
등장인물도 과도하게 많습니다. 석승준 교수, 대학원생 박규리, 음모론자 태용제는 이야기에서 실질적인 역할이 거의 없습니다. 사건 해결에도, 긴장감 조성에도 기여하는 바가 없고요. 분량만 늘리는 인물들로 빼는게 더 나았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문제가 많습니다. 범행 동기는 설득력이 부족합니다. 자신이 후원하던 아이가 아버지의 실험으로 죽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에게 살의를 품는다? 전혀 와닿지 않습니다. 종호와 승희가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차별했다는 설정도 앞부분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요. 동기는 뒤늦게 억지로 덧붙여진 느낌입니다.

그리고 트릭은 나쁘지 않은데, 세세한 부분에서 문제가 없지는 않아요. 우선 승희 사건은 가온이 사망한 뒤 일어났는데 누가, 어떻게 수상탑을 침수시켜 트릭에 사용될 상황을 만들었을까요? 물론 가온이 종호 사건을 일으킬 때 3층도 침수되었을 수는 있지만, 그 경우 다음날 범행이 발각될 우려가 있습니다. 생존자들이 범인을 찾기 위해 탑 전체를 수색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종호가 수상탑이 아예 가라앉을걸 예상하고 수상탑의 발코니와 문을 침수에 대비하는 형태로 만들었다는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수상탑이 가라앉은 건 가온이 완전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억지로 만든 상황입니다. 극한 상황을 고려하여 첫 방문한 한규현이 이상하게 여길 정도의 설비를 갖출 이유는 없습니다. 
이런 거대 구조물을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소녀가 손쉽게 휴대폰 앱으로 가라앉히고, 폭탄으로 보트를 폭파시키고 단단한 문을 봉쇄했다는 등의 설정도 억지스럽습니다. 아무리 천재라는 설정이 있다 하더라도 비현실적이에요.

무엇보다도 범인 가온이 종호 방에서 탈출하다가 청새치의 습격으로 죽었다는 진상은 솔직히 너무 어이가 없었습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니까요. 실제 사례를 좀 찾아보아도, 낚시 중이거나 배 위에서 잡은 청새치의 몸부림에 찔려 죽은 경우는 있어도 바다에서 공격받아 죽은 경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불빛에 돌격한다는 습성도 없고요. 불가능 범죄를 위해 억지로 만든 설정에 불과합니다.
이후 가온의 시신이 부서진 수상탑의 정원 벤치 위에 놓여 있었다는 결과도 우연입니다. 시체가 떠내려가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정교하게 쌓아 올린 트릭을 이런 방식으로 마무리한건 큰 감점 요소입니다.

정보 제공이 지나치게 공정한 탓에 독자가 진상을 추리하기가 별로 어렵지 않다는 문제도 있습니다. 누가 봐도 '수상탑'의 기묘한 설정이 트릭에 사용되었으리라는걸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본격 미스터리로서의 긴장감과 지적인 쾌감을 오래 느끼기는 힘듭니다. "유리탑의 살인"처럼 나름의 반전이라도 선보였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한국 추리 소설로는 보기 드문 본격물이라는 의미는 있지만, 소설로서의 완성도는 낮습니다. 분량을 줄이고 밀도를 높였다면 훨씬 나은 작품이 되었을텐데 아쉽네요.

2024/10/27

종이학 살인사건 - 치넨 미키토 / 권하영 : 별점 2점

종이학 살인사건 - 4점
치넨 미키토 지음, 권하영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범인 및 진상 등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준세이 의대 부속 병원 조직 검사실 병리의 치하야의 아버지 미노루가 지병으로 사망했다. 병리해부를 유언으로 남겨서 치하야는 동기이자 지도의 시오리의 보조로 해부에 참석했다. 그런데, 아버지 위에는 암호가 새겨져 있었다. 암호는 28년 전 어린 아이들을 노렸던 미제 연쇄살인극 '종이학 살인사건'의 마지막 피해자 진나이 양의 시신이 숨겨진 곳을 의미했다.
둘은 이를 몰래 알리려 한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28년 전 형사였던 아버지의 동료 사쿠라이 형사와 진범을 찾아내려 나섰다. 그와 함께 다시 연쇄 살인극이 일어났고, 현장에는 28년 전과 똑같이 '종이학 살인사건' 범인의 흔적이 남겨져 있었다.

"유리탑의 살인"으로 이름을 날린 치넨 미키토의 장편 소설. "유리탑의 살인"처럼 특수 설정 미스터리라 생각했는데, 전형적인 연쇄 살인마와의 대결을 그리고 있어서 의외였습니다.

그래도 아래와 같이 '위 속에 암호를 새겼다.'는 독특한 설정은 흥미로왔어요. 덕분에 이야기 중반까지 흥미를 잘 잡아줍니다. 
치하야, 시오리가 의사이며 특히 시오리가 병리해부를 맡은 병리의라는 설정도 잘 써먹고 있습니다. 미노루가 생전 유전병인 '구루병'을 앓고 있었다는걸 알아내는 식으로요.

뼈가 약해지는 구루병은 X염색체 변이가 원인으로 100% 딸에게 유전됩니다. 즉, 키도 크며 격투기 동아리 활동을 할 정도로 튼튼해서 구루병을 앓지 않는 치하야는 미노루의 친 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미노루의 친 딸은? 목이 부러진채 발견된, 28년 전의 피해자 진나이 양으로 알려진 시신의 진짜 주인공이었습니다. 구루병 탓에 급작스럽게 딸이 죽어 혼란에 빠졌던 미노루의 아내가 진나이 양을 유괴했고, 범인이었던 야기누마(타치바나) 와카코가 이 사건을 연쇄 살인극이 하나로 위장했던 겁니다. 알리바이를 통해 혐의를 벗기 위해서요. 마침 유괴 사건을 엮어 미노루를 협박하기도 해서 운 좋게 빠져나갈 수 있었지요. 범인을 놓아준 죄책감에 경찰을 그만 둔 미노루는 더 이상의 범행을 막기 위해 와카코를 계속 감시해왔고, 미노루가 죽자마자 와카코는 범행을 다시 시작하게 되었죠.

하지만 여러모로 전작보다 못합니다. 일단 추리적으로 많이 부족해요. 범인을 추리할 만한 단서는 없다시피 하거든요. '미노루가 경찰을 그만둔 뒤,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무언가를 감시했다' 정도만 의미있는 단서입니다. 그 외의 단서들은 모두 쓸모가 없어요. 핵심 증거와 단서들은 모두 마지막에 범인이 치하야를 납치하며 스스로 정체를 드러낸 후 독자에게 공개됩니다. 시오리가 알아낸 아버지의 유전병이라는 단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독특했던 '위에 암호를 새긴다는 설정'도 이유에 대해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합니다. 작품에서처럼 위궤양으로 암호가 지워질 수도 있는 등 변수도 많아요. 차라리 변호사에게 사쿠라이 형사에게 전해주라고 편지를 남겼으면 될 일입니다. 게다가 암호로 남길 이유도 없었고, 암호의 내용도 불합리합니다. 마지막 사건의 시신 위치를 알린다 한 들, 이는 진상과 연결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냥 범인 이름을 써 놓지 않았을까요? 범인을 제대로 알리지 못한 탓에 피해자도 두 명이나 생겼는데 말이지요. 암호 해독도 특별한게 없고요.

전개도 어이가 없습니다. 둘이 암호를 곧바로 경찰에게 알리지 않은 이유, 시신 발굴 때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이유, 사쿠라이와 비밀 수사를 하는 이유 모두 합리적이지 않습니다. 경찰 수사도 많이 어설픕니다. 특히 가장 어이가 없었던건, 이전 수사 담당자 이노하라가 타치바나 사장의 자식이 마지막 사건에서만 알리바이가 없었다고 알려주는 장면이었어요. 모든 연쇄 살인이 단독범의 소행일리 없는데, 마지막 알리바이가 없다고 유력한 용의자를 그냥 풀어주는게 말이나 되는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무려 다섯 명의 아이가 살해된 사건인데, 경찰이 너무 안이한거 아닙니까? 범인이 유괴한 아이를 자기 아이로 키운다는 설정도 많이 접했던것이라 식상합니다. 이에 대한 정보도 많이 전해주고요.

이렇게 위에 새긴 암호, 병리의, 유전병 정도의 소재를 제외하면 연쇄 살인범과 형사의 대결을 그리는 전형적인 헐리우드 범죄 스릴러와 흡사합니다. 범인의 정체도 반전처럼 등장하지만 굉장히 뜬금없다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설정은 흥미롭지만 그 뒤의 이야기들은 모두 설득력낮고 억지스러우며, 뻔했다는 점에서 위에 암호를 새기는 상황을 떠올리고, 전체적인 얼개없이 재미있겠다 싶어서 이야기를 써 내려간게 아닌가 싶네요. 

2025/12/13

피안장의 유령 - 아야사카 미쓰키 / 김은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대 초반의 야마모토 히나타는 강력한 염동력으로 사고를 일으킨 뒤 가족과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한 소꿉친구 사라와 함께 기지마 그룹 후계자 렌의 의뢰를 받고 외딴 저택 '피안장'으로 향했다. 피안장에 일어나는 괴현상 조사에 협조해 달라는 의뢰였다. 조사에는 예지 능력자 시게키, 사이코메트러 미즈키, 정신감응 능력자 도시코, 자동서기 능력자 아키라, 일렉트로키네시스 나기도 함께 참여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조사에 나섰지만, 저택의 괴현상은 실재했고 첫날 밤 시게키가 소파 속 비밀 공간에서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리고 일행은 저택의 의지에 의해 감금되어 버리고 마는데...

제미나이로 그려본 피안장

초능력자들이 대거 등장하는 '특수 설정' 미스터리물임과 동시에 하우스 호러물과 정통 본격 미스터리도 결합되어 있는 독특한 작품입니다. 초능력과 저주받은 피안장 내 특수한 조건에 의해 일어난 괴사건을 정통 본격물처럼 논리적으로 추리하여 진상을 드러내거든요.

특히 나름대로 정통 본격물이라는 게 밝혀지는 마지막 히나타의 추리쇼가 빼어납니다. 논리적으로도 확실하며, 단서들과 추리에 대한 근거 모두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히나타의 추리에 따르면, 첫 번째 사건인 '혈액이 모두 사라진 채 전신이 찢긴' 시게키 사건은 사고였습니다. 시게키가 사라에게 장난치기 위해 소파 빈 공간에 들어갔는데, 근처에 있던 나기가 천둥번개와 정전으로 놀라서 일렉트로키네시스 능력을 발동했던 겁니다. 이 충격에 시게키가 휩쓸려 체내 혈액이 전기분해되어 피는 수소와 산소로 분해되어 사라지고, 발생한 수증기 탓에 신체 표면이 파열되어 죽었습니다. 나기의 고의가 아닌 일종의 사고였기 때문에 도시코의 정신감응 능력으로 범인이 밝혀지지 않았고요.

두 번째 사건인 도시코 추락 사건은 밤이 되면 옥상 테라스에는 한 명만 올라갈 수 있어서, 사람을 심리적으로 쫓기게 만드는 저택의 능력에 의한 자살로 생각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나타는 과거 모녀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 죽었던 기사를 통해 '의식을 잃은 사람'은 머릿수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추리합니다. 즉, 누군가가 도시코를 때려 기절시킨 후 테라스로 끌어올려 떨어뜨려 죽였던 겁니다.
이는 미즈키의 사이코메트리로 도시코가 뒷통수를 가격당했다는 게 밝혀져 증명되고, 범인은 렌의 독살 미수 사건으로 드러납니다. 독이 든 와인잔은 아키라 앞에 놓여 있었는데, 아키라는 포도 알레르기라고 전날 아침에 밝혔습니다. 포도 알레르기인 사람을 와인으로 독살하는건 말이 안되니 범인은 그걸 모르는 사람이지요. 그때 자리에 없던건 렌, 가즈히사, 유토였고요. 이 중, 독을 마시고 죽을 뻔한 렌은 제외됩니다. 유토는 앞서 테라스 살인에 사용된 머릿수에 대해 알 수 있는 기사를 볼 기회가 없었고요. 즉, 소거법으로 범인은 가즈히사입니다. 렌이 독으로 쓰러졌을 때 신속하게 위세척 등을 진행한 행동이 그가 독을 넣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주요 사건에 대한 본격물스러운 추리에 더해서 소소한 추리들이 곳곳에 삽입되어 재미를 더합니다. 렌의 이모부 부부가 자살했던 사건에 대한 추리 — 이모부가 렌에게 성적인 학대를 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서, 이모가 이모부를 죽이고 자살했다 — 라든가, 사라의 염동력 힘의 원천이 히나타였다는 추리 등이 그러합니다.

정통 오컬트 호러 판타지 스타일의 마지막 박진감 넘치는 피안장 탈출 묘사는 꽤 볼만 했고, 히나타가 조사에 아르바이트로 참여한 연구 조수 유토와 사귀게 되어 결혼까지 이른다는 완벽한 결말과 에필로그도 마음에 듭니다. 최근 작품 중에서도 보기 드물게 깔끔한 마무리였어요. 수미쌍관식 구성이라고도 볼 수 있는 꽃잎 묘사도 여운을 남깁니다.

그러나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우선 렌이 초능력자들을 저택에 모은 이유부터 설명이 부족합니다. 저택을 깨우기 위해 초능력자들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있기는 하지만, 주장에 대한 근거는 전무한 탓입니다.
또 조사 참가자들이 머문 사흘 동안의 사건은 확실히 진상이 밝혀지지만, 과거 피안장에서 일어났던 괴사건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저택 안에서 행방불명된 남자가 일주일 후 온몸의 피를 잃은 변사체로 발견되었다는 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이를 단지 저택의 저주라고 하기에는 애매합니다. 저택이 이런 능력이 있다면, 렌 일행을 모두 직접적으로 처리하지 않은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고요..
첫날 밤 위기에 처했던 도시코가 어떻게 빠져나왔는지도 설명이 없으며, 가즈히사의 동기가 결국 ‘저택에 사로잡혔다’는 게 전부라는 것 등도 여러모로 납득하기가 힘듭니다. 뭔가 있어보였던, 아키라가 자동서기 능력으로 그렸던 '스페이드 모양 문고리가 달린 문' 설명도 흐지부지 넘어가고요.

전개 부분의 완성도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미즈키, 도시코, 아키라 등으로 시점을 전환하는 부분이 특히 별로입니다. 저택 괴현상 때문에 놀라는 심리 묘사 외에는 시점을 전환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키라만 별도 설정을 풀어낼 필요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아키라 시점 부분의 전개는 워낙 비호감으로 그려지는 탓에 짜증만 났습니다. 
그리고 예지 능력자 시게키의 죽음 이후에도 참가자들이 무방비하게 행동하는 모습은 비현실적입니다. 도시코의 능력으로 시게키 사건의 범인이 조사 참가자들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면, 협력해서 움직이는 게 당연했을 겁니다. 왜 저주받은 저택에서 밤을 홀로 보내다가 위기에 처하는 걸까요? 이 부분의 설득력이 낮아서 감정 이입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런 류의 작품에서는 항상 그래왔지만, 거의 모든 묘사가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점도 아쉽습니다. 지나치게 쿨한 염동력 미소녀 사라, 입이 험하지만 알고 보면 따뜻한(?) 색기 넘치는 누님 미즈키 인물 묘사 및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피안장에 대한 묘사는 물론 저택 내에서 반복되는 괴현상 역시 식상한 헌티드 하우스 호러물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해서 실망스럽습니다.

이러한 단점들에도 불구하고 하우스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의 혼합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개성을 가진 작품임은 분명합니다. 킬링 타임용으로는 나쁘지 않았어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2023/09/29

방주 - 유키 하루오 / 김은모 : 별점 2.5점

방주 - 6점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슈이치는 대학 동창들, 그리고 사촌형 쇼타로와 함께 유야의 별장에 놀라왔다가 유야가 발견했다는, '방주'라 불리우는 거대한 지하 시설을 찾았다. 일행은 버섯을 따러 왔다가 길을 잃었다는 야자키 가족과 하룻밤을 '방주'에서 보냈는데, 지진 탓에 그만 갇히고 말았다. 
지하에서부터 물이 차올라 일주일 안에 탈출해야 했지만, 방법은 입구를 막은 돌을 떨어트리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돌을 떨어트린 사람 혼자 방주에 남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마침 유야가 살해되었고, 일행은 유야를 죽인 범인을 방주에 남도록 하자는 암묵적인 동의를 이뤘다. 
그러나 증거가 없어 시간이 흘러가던 차에, 사야카와 야자키도 차례로 살해당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쇼타로가 추리쇼를 벌여 범인을 밝혀냈다.

2022년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2023년 '본격미스터리 10' 2위에 선정되는 등 최근 가장 뜨거운 작품. 추석 연휴를 맞아 읽어보았습니다. 찬사를 받은 이유는 바로 알겠더군요. 일반적인 클로즈드 써클 (클로즈드서클) 장르의 틀을 완전히 깨버린 덕분입니다. 이렇게 닫힌 공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이를 해결하는 이야기는 한, 두편이 아닙니다. 산장이나 섬같은 고전적인 장소에서 현대적인 빌딩이나 기묘한 이공간 등으로 장소도 확장되어 왔고, 고립되는 이유도 폭설이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에서 정전 등의 현대적인 이유, 특수한 집단이 납치하여 게임을 벌이거나 좀비가 등장하는 식의 특수 설정까지 다양한 상황을 선보여 왔고요.
그런데 이 작품은 고립된 장소도 독특하지만, '범행을 벌이는 동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범인 마이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원한따위가 아닙니다. 오로지 "고립된 장소에서 탈출해서 살아남기" 위해서에요. 게다가 이를 위해서 범행이 결국 밝혀지도록 유도하기까지 하고요. 전에 보지 못한 신선한 발상이었습니다.
고립된 장소인 '방주' 설정도 좋습니다. 출입구를 거대한 바위로 막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이유는 물론, 반전에 유용하게 활용되는 출입구와 비상구를 감시하는 카메라의 존재를 오래전 과격 분자나 사이비 종교 단체가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건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방주 내에 이런저런 시설과 장비, 음식 등이 갖추어져 있는 것도 같은 이유로 말이 됩니다. 지하 3층에서부터 물이 차오르고 있어서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도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좋은 장치였습니다. 이렇게 '방주'의 존재감이 너무 확실해서 초, 중반부까지는 방주가 주인공인 느낌마저 전해줍니다.

그러나 문제도 많습니다. 첫 번째는 '범인'에게 닻감개로 바위를 치우고 홀로 고립될 역할을 맡긴다는 암묵적인 동의입니다. 범인이 누구든간에 자기 범행이 드러났다고 그런걸 순순히 받아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범인이 피트니스 센터 강사 류헤이였다면? 완력으로 제압하여 굴복시키기도 어려웠을테지요. 그리고 침수 중이라 시간 제한이 있다면 범인을 찾아서 희생하라고 설득하느니, 누구든 빨리 돌을 치워 사람들을 탈출시키고 구조를 기다리는게 빨랐을겁니다. 아무리 산사태가 일어났어도 한나절 만에 올라온 산을 내려가는데 1주일이나 걸릴리가 없잖아요? 기본적인 상식을 부정하는 설정이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아무도 공기통을 활용하여 지하 3층을 지나 비상구로의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범인을 밝히는 것 외에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건 설득력이 약합니다.

마이가 범행을 저지르는 일련의 과정도 작위적입니다. 물론 마이가 곧바로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제비뽑기 같은 것으로 희생자(?)를 고르기 전에 상황을 바꿔야 했기 때문이라는건 어느정도 말은 됩니다. 전에 '방주'에 왔던 경험이 있는 유야는 출입구와 비상구가 바뀐걸 눈치챘을지도 몰랐기에 제일 먼저 죽였다는 것, 유야 사건에 증거가 남지 않고 모두가 범행이 가능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납득할 수 있어요. 
하지만 사야카의 핸드폰 속 사진이 출입구와 비상구가 바뀐걸 나타낼 수 있어서 죽였고, 사야카가 핸드폰을 분실해서 어쩔 수 없이 목을 잘랐다 - 핸드폰이 안면인식으로 잠금 해제가 되는 모델이라 - 는 것까지는 그렇다쳐도, 애써 종이 타월을 가져오면서까지 증거 인멸을 위해 노력했다는건 설명이 안됩니다. 어차피 범인임을 드러내어 희생양이 될 목적이었다면 시체의 목을 자르다가 들통나는게 더 확실했을거에요. 제한 시간까지 기다리면서 범행을 드러내는 것 보다는 말이지요. 사체의 목을 자르는 행동이 의심을 불러 일으킬까봐 그랬다? 그래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겁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고립된 사람들 앞에서는요. 마지막 쇼타로의 추리쇼에서 어떤 사진 때문에 사야카를 죽였는지에 대해 마이가 설명한걸 아무도 부정하거나 지적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또 마지막 추리쇼에서 마이가 범인이라는건 증명하지만, 앞서 쇼타로가 말했듯 "동기가 없다"는 이유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식량이 부족했다던가, 유야가 방주로 일행을 억지로 데리고 왔다는 등의 설정을 덧붙였더라면 좋았을겁니다.
마이가 탈출에 성공했다 한들, 이후 다른 사람들의 실종과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려 했는지도 잘 모르겠고, 테이프의 존재를 몰랐던 사람이 범인이라던가 유야의 손톱깎기와 지퍼백을 범인이 가지고 왔던 이유는 핸드폰이 방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억지스러웠습니다. 테이프 정도야 잊어버릴 수도 있지요. 지퍼백의 용도도 지나치게 국한되어 있고, 발표 시점에 생활 방수가 되지 않는 핸드폰을 사용하는 MZ 세대가 있을걸로 보이지도 않고요. 

이렇게 장점도 확실하고 단점 또한 확실한 그런 작품입니다. 돌직구 하나로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변화구도 적절하게 섞어주지 않으면 버티기 힘듭니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그래도 한 가지 장점으로 정면 승부를 벌일만큼의 매력도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비슷한 설정들에 지친 추리 소설 애호가분들이라면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덧붙이자면, 10명에 불과한 등장인물 - 심지어 3명은 중간에 살해당함 - 과 폐쇄된 공간, 일주일의 시간 제한 등의 설정은 '무대'에 잘 어울릴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각색해도 괜찮은 연극이 될 수 있을것 같네요.

2025/04/26

엘리펀트 헤드 - 시라이 도모유키 / 구수영 : 별점2점

엘리펀트 헤드 - 4점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내친구의서재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가조 의과대학 부속 병원 정신과 의사 기사야마는 배우인 아내 기키, 대학생이자 가수인 큰 딸 마후유, 고등학생 둘째 딸 아야카와 행복한 나날을 보내지만, 가족의 행복이 쉽게 깨질 수 있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 마술사였던 아버지의 학대로 인한 아픈 기억 탓이었다. 그래서 기사야마는 가족의 행복을 망치려는 원흉을 사전에 제거해 왔고, 최근에는 딸을 취재 목적으로 스토킹하던 방송인 이즈미를 살해했다. 그러나 마후유가 애인 하루를 가족에게 소개시켜 주는 날, 하루가 기사야마에게 돈을 받고 관계를 가졌다는걸 폭로해서 가족은 붕괴되고 말았다. 자포자기한 기사야마는 마약상 에덴으로부터 건네받은 '시스마'를 주사했다. 그런데 시스마가 이상한 효과를 일으켜 시간을 역행한 기사야마는, 하루를 습격해서 입을 막고 가족을 지키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는 단순 시간 역행이 아니라 시간 분기였다. 결국 두 개의 시스마를 사용해 사태를 해결한 행운아, 한 번 실패해서 시간 역행 효과만 확인한 복원자와 공격받아 입원한 산송장, 모두 실패한 도망자라는 다중 시간축이 생겨났다. 기사야마들은 어느 시간 축에서라도 사람이 죽으면(기사야마가 살해하면), 모든 시간 축 사람이 죽는다는걸 알아내고 나름대로 규칙을 세워 살인을 막으려 했지만, 마후유와 기키, 아야카가 차례대로 끔찍하게 살해되고 마는데....

신예 작가 중 '추리' 장르에서 가장 두각을 드러내는 시라이 도모유키의 최신작.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건을 여러 시점에서 추리하는 구성이 특징인데, 이번에는 각기 다른 시간축(멀티버스)에 존재하는 동일 인물이 사건을 파헤친다는 점이 새롭습니다. 이처럼 다중 시간축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 그리고 시간축이 달라도 죽음의 순간은 동일하게 일어난다는 설정에서 일종의 ‘특수 설정 미스터리’이기도 합니다.

탐정역을 소화하는 기사야마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점도 큰 특징입니다. 가족의 행복을 위해서는 방해물로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죽이고 파괴하는 소시오패스거든요. 아내의 스토커를 잡아다가 능욕하고, 딸 스토커는 살해하는 초반부 단계를 지나 후반부로 갈 수록 걷잡을 수 없이 폭주하는데 그 수준이 정말 어마무시합니다. 

그러나 참신함, 독특함은 설정에 국한될 뿐, 정작 추리의 완성도는 아쉬움이 큽니다. 여러 명의 기사야마가 가족의 죽음을 놓고 펼치는 대부분의 추리는 결국 ‘추리를 위한 추리’에 불과해 억지스럽고 설득력이 떨어지는 탓입니다. 아야카가 폭발한 이유가 알약에 숨겨진 소형 폭탄 때문이라는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사람이 산산조각이 나고, 신체 조각이 날아갈 정도라면 알약 크기 폭탄으로는 어림도 없으니까요. 다중 시간축에 있던 복수의 가족들이 동시에 죽었는데, 죽은 상태가 서로 극과 극이라 사망한 원인의 차이를 없애기 위해 저절로 폭발했다는 추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추리 자체는 그럴싸한데, 상황이 너무 말도 안돼요. 추운 차를 운전하다가 동사하고, 두꺼운 탈을 쓰고 공연하다가 열사병에 걸려 죽는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여러 명이 추리를 펼쳐봤자 다 억지스럽고 말이 안된다면, 이건 그냥 분량 낭비일 뿐입니다. 이런 류의 대표 걸작 "독 초콜릿 사건"처럼, 모든 추리는 말이 되어야 합니다.

진상 또한 억지스럽습니다. 기사야마들은 가족들이 죽는 순간의 기억을 공유할 수 있어서, 범인 기사야마는 피해자가 죽는 순간에는 손을 대지 않는 '시한 장치 트릭' 더하기 '원격 조종 트릭'을 사용했는데, 상황을 극단적으로 정교하게 맞춰야만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자면, 마후유는 '행운아'가 죽였습니다. '행운아'는 마후유가 하루와 자동차 여행을 떠난다는걸 알게된 뒤, '산송장'의 손을 빌어 하루를 죽게 만듭니다. '산송장'의 시간축에서 하루가 죽자, '행운아'의 시간축 하루도 죽는데 마침 운전 중이라 교통사고가 일어나게 되고요. 사고로 차밖으로 튕겨나간 마후유는 공교롭게 지나가던 차량에 머리가 으깨져 죽습니다. 즉, 이 모든건 말 그대로 ‘기적의 타이밍’에 의존하고 있을 뿐입니다. 안전벨트를 하고 있던 마후유가 왜 튕겨나갔는지도 모르겠네요.

아야카 폭사에 대한 진상은 불쾌하기까지 합니다. '도망자' 기사야마가 그녀를 성폭행해 임신시킨 뒤 태아를 불법으로 적출해 폭사시키고, 임신을 유지하던 '두더지' 시간대의 아야카의 뱃 속 아기가 폭발하자 다른 시간축의 아야카들 모두 폭사했다는건데, 이건 추리의 수준을 떠나 인간적으로 거부감이 듭니다. 이렇게 반인륜적인 이야기를 트릭으로 포장한건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합리적으로 설명되어야 할 동기가 불분명하다는 단점도 추리물로는 치명적입니다. 행운아는 마후유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행운아의 시간축에서는 마후유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으니까요. 소시오패스라서, 자신에게도 문제가 생길까봐 두려워서 죽였다? 정신병자의 과대망상이 동기인 작품이 추리물로서의 가치가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네요. 또 이게 동기라면, 행운아가 마후유를 살해했다는걸 숨길 이유는 없어요. 약속대로 다른 시간 축의 기사야마들이 가족을 죽이면, 손 안대고 위험요소를 모두 제거할 수 있으니까요. 

설정도 편의적이고 작위적입니다. 죽음만 동일하게 적용될 뿐, 상처 등은 시간축에서 공유되지 않는다는게 대표적이에요. 상식적으로는 상처도 동기화되어야지요. 산송장이 중상을 입었을 때, 다른 시간축의 기사야마들도 모두 동일한 상처를 입고 쓰러졌어야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두더지가 도망자를 죽이려고 배에 폭탄을 설치했다는 에필로그도 납득하기 어려워요. 도망자를 죽이려면 그냥 자살하면 됩니다. 시간축에 있는 모든 기사야마가 동일한 운명을 맞을테니까요. 또 에필로그에서처럼 한 시간축에서 터진 폭탄이 다른 모든 시간축에 영향을 미친다면, 앞서의 현란하고 복잡했던 시한 장치 및 원격 조종 트릭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네요. 그냥 하루와 마후유가 탔던 차에 폭탄을 설치하면 되잖아요?

기사야마에 대한 묘사도 이상해요. 기사야마들은 시간축만 다를 뿐 모두 똑같은 사람들입니다. 시간축마다 별개의 인격을 가진듯 보이는건 잘못되었습니다. 심지어 아야카 폭사 때 두더지는 도망자의 부탁을 받아 아야카의 아이를 살려주기까지 하는데, 이건 전혀 와 닿지 않았어요.

시스마를 잔뜩 맞은 탓에 시간축을 오가는 절대자가 된 우라시마도 사건 진상을 추리하기 위한 탐정역이 필요해서, 기사야마를 뛰어넘는 절대자가 필요해서 등장시킨 듯 한데, 인물 설정이나 등장 과정, 묘사 모두가 과장되고 억지스러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점이 전혀 없지는 않았습니다. 시스마를 맞은 복원자가 첫 번째 시스마 이전 시점으로 돌아가 시간축을 한 번 더 분기시켜 ‘두더지’가 생겨났다는 설정은 참신했습니다. 이즈미 사키와 페페코 등 단순한 희생양으로 보였던 인물들을 활용하여 독자에게 시간 이동을 착각하게 만든 디테일도 눈에 띄었고요. 여러 시간축의 기사야마들이 추리를 펼칠 때, 사이렌 소리와 기키와의 과거사 등을 근거로 산송장이 사실은 아파서 누워있는 척 했다는 추리도 괜찮았습니다.

그래도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참신한 설정과 캐릭터 구도는 흥미로웠지만, 지나치게 억지스럽고 비윤리적인 트릭과 없다시피한 동기, 개연성 부족의 삼박자는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게 만듭니다. 이전에 보았던 한 추천 리스트에서 언급했듯, 재미는 있지만 최악이에요. 모든 분들께 권해드리기는 좀 어렵습니다.

2023/05/14

미스터리 아레나 - 후카미 레이이치로 / 김은모 : 별점 2점

미스터리 아레나 - 4점
후카미 레이이치로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년 연말 방송되는 인기 TV쇼 <<미스터리 아레나>>는 출제되는 문제를 맞추면 거액의 상금을 얻는 쇼였다. 대신 틀린 답을 제시한 참가자는 자신의 장기를 이식용으로 기부해야 했다. 
올해 문제는 '클로즈드 서클 추리물'로, 대학 미스터리 연구회 동창생들은 매년 모임을 갖는 동창 마리코의 별장에 모였지만, 마리코는 4층 자기 방에서 칼에 찔려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방송에서 이야기가 조금씩 진행될 때 마다, 자신의 추리에 확신을 가진 참가자는 벨을 눌러 범인이 누구인지와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추리 뒤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앞서의 추리는 부정되며 계속 변형되어 나가는데...

후카미 레이이치로의 장편. 여러 명의 참가자들이 각자의 추리를 이야기한다는건 <<독 초콜릿 사건>> 등을 연상케도 하지만,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가지고 추리를 펼치는게 아니라 본편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 추리를 펼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일종의 배틀이라서 같은 답을 내 놓으면 먼저 답한 사람이 이기는 규칙이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여러가지 변수가 발생하는게 재미있었습니다.
수많은 추리가 등장하는데 대체로 성별 오인이라던가, 이름이나 묘사 등으로 같은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거나 한 사람을 두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등의 서술 트릭이 많습니다. 꽤 그럴듯한 추리도 등장합니다. "마루모가 범인이고, 그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왜 마루모가 여자이며, 실제로 범행을 어떻게 저질렀는지에 대한 추리를 여러가지 단서로 뒷받침하여 주장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높거든요.
피해자 마리코가 남자였다는 추리도 상황 - 마리코는 드레스를 입고 죽어 있었음 - 을 보면 억지스러우나, 마리코는 이름이 아니라 성이었다는 주장은 꽤 합리적이었어요. 앞서 본편 문제 이야기에 마리코의 본가가 안도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역참>에 그려져 있고, 마리코의 집은 마덮밥 체인점을 한다는 단서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도카이도 53역참> 스무 번째 역참이 마리코 역참으로 마죽 가게에서 마죽을 먹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걸 근거로 "마리코"는 성이라는 추리지요. 이를 통해 '피해자 마리코와 다른, 범인인 여성 "마리코"가 있다, 그건 '아키'였다'는 추리로 이어지는 과정도 깔끔합니다. 
이름을 활용한 서술 트릭은 관리인 히데가 사야카 시점일 때만 英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등 그 외에도 많습니다. 
다른 추리들도 볼만한게 몇 가지 있습니다. '범행 현장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인 나선계단이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서 실제로는 통로가 2개였다', '다이잉 메시지는 S가 아니라 적분 기호로 등장인물 중 세키 분타 (세키분 - 적분)를 가리킨다' 등이 그러했습니다. 앞서 히데 씨와의 대화에서 택시비에 대한 언급을 통해, 실제 별장에 온 사람이 몇 명인지 추리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단서들도 곳곳에 잘 삽입되어 있고요.
이런 점들만 보면 장르에 깊은 이해를 가진 작가가 썼다는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겁니다.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에 오르고 '본격 미스터리 대상' 2위에 등극하기까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엄밀하게 본격 추리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본격 추리물과 그 장르를 비틀고, 풍자하고 조롱하는 성격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작 중에서도 참가자의 입을 빌려 "성별 오인 트릭 자체는 이제 낡을 대로 낡았잖아. 한때 미스터리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작품에 '마유미'라는 이름이 나오면 거의 백 퍼센트 성별 오인 트릭이 사용됐다고 의심하는게 상식이었을 정도야"라는 말이 나오는 등, 본격 추리물의 작위성을 대놓고 놀립니다. 추리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 보다는 이른바 "바카미스 (게임성, 오락성을 과도하게 추구하고 의외성을 주기 위한 목적이 큰 작품들)" 류의 추리가 더 많아요. 고양이 다마가 알고보니 사람으로 발레리나였다던가, 사부로가 바라보았던 창 밖의 "가로수"가 사실은 사람 - "나미키 (가로수)"라는 이름의 - 이었을거라는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이야기의 정답을 조작했다", 즉 이야기의 분기를 다수 만들어서 누군가 그럴듯한 추리로 정답을 내 놓을 경우, 다른 분기로 이어지도록 조작했다는 게 '미스터리 아레나' 방송의 정체라서 애초에 공정한 추리가 이루어지는건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정답이라고 내 놓는건 앞서 알멩이를 다 뽑아먹어서 억지로 그렇게 만들 수 밖에 없는 황당한 결과일 수 밖에 없고요. 등장인물이자 피해자인 "다이라 사부로"와 다른, "다이라사부로"라는 이름의 인물이 별장에 있었다는 식인데 너무 억지스러워서 할 말이 없을 정도였어요. 이래서야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지요.

설정도 만화적이고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알고보니 <<미스터리 아레나>> 참가자들은 모두 특수 요원으로 방송이 거짓이라는걸 폭로하기 위해 투입되어 관계자들을 일망타진한다는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전개도 마찬가지라 본편 문제 이야기는 괜찮았지만, 퀴즈쇼 진행 부분은 과장되고 만화적인 묘사가 넘쳐나 읽기 불편했습니다. 풍자와 조롱을 위해 일부러 더욱 과장되게 쓴 듯 하지만, 보다 진지한 분위기로 추리 애호가들의 문답이 이루어지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오답자는 장기 이식 운운하며 생명을 건 추리 배틀을 벌인다는 TV 쇼 설정보다는 말이죠. 아니면 아예 히가시노 게이고의 <<명탐정의 규칙>>처럼 가볍게 접근하던가요. 지금의 결과물은 진지한건지, 말도 안되는 농담인건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신다면 즐길거리가 없지는 않으나, '소설'보다는 '장난'에 가깝습니다. 여러모로 과했어요. 별로 권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비슷한 소재라도 히가시고 게이고의 덴카이치 탐정 시리즈 (<<명탐정의 규칙>>, <<명탐정의 저주>>)가 훨씬 괜찮습니다.

덧붙이자면, 작가 이력을 보니 게이오 대학교 문학부 졸업에 파리 부르고뉴 대학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사람이더군요. 1963년 생으로 이 작품을 발표한 2016년에는 50대 중반이었고요. 그런 사람이 이런 만화같은 작품을 발표했다는게 의외인데, 한 편으로는 일본식 문화의 저변이 정말 넓고 깊구나 싶은 생각이,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정도 나이와 위치니 이런 본격 추리물을 조롱하는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겠구나 싶네요.

2025/10/26

디스펠 - 이마무라 마사히로 / 구수영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벽 신문 담당이 된 초등학교 6학년 사쓰키, 미나, 유스케는 마을 오쿠사토정에 전해 내려오는 ‘7대 불가사의’의 수수께끼를 풀어 기사로 쓰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사쓰키에게는 1년 전 살해당한 사촌누나 마리코 사건의 진상을 밝혀낸다는 목적도 있었다. 마리코가 죽기 전 ‘6개의 불가사의’라는 괴담 글을 남겼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사쓰키는 벽 신문 취재를 핑계로 오컬트 애호가 유스케의 협조를 얻기 위해 벽 신문 담당으로 끌어들였다.

사쓰키는 논리적 관점, 유스케는 오컬트적 관점으로 괴담과 사건에 대해 추리하고, 추리 애호가 미나가 객관적으로 추리를 판단하기로 협의한 뒤 세 사람은 취재와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그들은 괴담이 오래 전 마을과 관련된 거대한 비밀, 그리고 '나즈테의 모임'이라는 조직에 대해 폭로한다는걸 알아내는데...

하무라-겐자키 컴비가 활약하는 특수설정 미스터리로 유명한 이마무라 마사히로의 최신작입니다. 괴담, 호러 및 오컬트와 추리를 엮고 있는 점에서 미쓰다 신조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리커시블"도 유사하다고 느껴졌고요. 몰락해가는 시골 마을, 마을에 전해지는 전설과 현재의 사건이 엮이는 전개, 어린 아이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요. 

하여튼, 무슨 작품을 떠올렸건 이 작품만의 확실한 장점, 차이점은 명확합니다. 마리코 언니가 남긴 '6개의 불가사의' 이야기마다 숨겨진 진상을 알아내면, 마지막에 '일곱 번 째 불가사의'인 마을에 얽힌 비밀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겁니다. 

6개의 불가사의 각각을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습니다. 

■ 오쿠사토정 ‘6개의 불가사의’

첫 번째 불가사의 - S 터널의 동승자 :
내용 : 산 중턱 S터널에 놀러간 학생들 중 터널 끝까지 걸어간 세 명을 제외한 한 명이 차 안에서 죽고 말았다.
숨겨진 진상 : S터널은 일찍부터 '소몬' 터널로 알려져 있었는데, 소몬 터널은 휘어져 있어서 터널 끝에서 차가 보이지 않는다. 즉, S터널은 소몬 터널이 아니라 쭉 뻗은 사쿠라즈카 터널이었다. 이야기는 마리코 언니가 죽기 전날 사쿠라즈카 터널 안 멈춰있는 차에서 급사한 진케이 대학 교수 사건을 의미한다.

두 번째 불가사의 - 영원한 생명 연구소 :
내용 : 폐허가 된 신흥 종교 시설을 방문했던 학생들이 차례대로 무언가에 씌워져 죽고 말았다.
숨겨진 진상 : 영원한 생명 연구소는 종교 단체 시설로 사용하기 전에는 반도 정신 병원 건물이었다.

세 번째 불가사의 - 미시사 고개의 목이 달린 지장보살 :
내용 : K가 저주받은 목이 잘린 지장보살을 본 뒤, 누군가 K의 집을 찾아왔고 그는 죽고 말았다.
숨겨진 진상 : '누군가'가 정사무소, 병원, 도서관, '나즈테'에서 왔다고 소개하는 말에서 '나즈테의 모임'과 그들이 근무하는 직장을 알려준다. 또한 이 이야기는 K의 시점과 '그림자 괴물'의 시점이 교차되는 서술 트릭물이기도 하다. 

네 번째 불가사의 - 자살 댐의 아이 :
F는 면허를 따자마자 자살의 명소인 댐 수문 전망대로 향했다. 그곳 전화부스 전화기에 적혀있던 번호에 장난삼아 전화를 걸자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숨겨진 진상 : 916-7O62라는 전화 번호의 의미. 숫자 0이 아니라 영문 대문자 O라는게 핵심이다. 다섯 번째 불가사의와 연결하면, 이건 책의 분류번호와 페이지이다.

다섯 번째 불가사의 - 산할머니 마을 :
내용 : 시어머니를 산에 버려 죽게 만든 며느리 가족은 장례식에서 이상한 아이를 본 뒤, 한 명씩 차례대로 죽었다. 결국 의식을 주관하던 절의 주지스님까지 죽고 말았다.
숨겨진 진상 : 할머니가 쓴 관용구 - 날개 돋치다,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등을 지다 - 를 통해 '책'을 주목하라고 알려준다. 그리고 이 책을 통해 과거 계획을 무시했던 채굴 때문에 수십 명이 죽은 광산 사고가 있었고, 광산 마을에서도 연이어 사람이 죽거나 정신 이상이 생기는 비극이 있었다는게 드러난다.

여섯 번째 불가사의 - 우물이 있는 집 :
내용 : 오래 전, 후카자와무라라는 마을은 집마다 있는 우물을 통해 이상한 돌림병이 돌았다. 우물에서 무언가를 본 정사무소 직원에 의해 마을은 댐이 생긴 뒤 수몰당했다.
숨겨진 진상 : 정사무소 직원은 '열 가지 약속 중 단 한 가지'를 지키지 못했다고 했는데 이를 '녹스의 십계'에 빗대면, 화자인 정사무소 직원이 범인이거나 오컬트적 존재인 신이 실존한다는걸 알려준다. 


이렇게 괴담들 진상을 풀어내면서 점점 스케일이 커져가는 전개도 흥미롭고, 단순히 증언의 오류를 찾아내는 수준을 넘어 서술 트릭이나 리들 스토리 형태, 심지어 녹스의 십계까지 활용하는 추리적 장치가 돋보입니다. 덕분에 추리물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어서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임에도 쉽게 읽힙니다.

괴담의 진상뿐 아니라 마리코가 왜 죽음을 택할 수밖에 없었는지에 대한 설명도 설득력 있었습니다. 괴이가 사람들의 찬미를 통해 힘을 얻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함으로써 축제를 연기했다는건데, 앞부분에서 교수가 목공소에서 축제 용품을 부쉈던 장면, 시바타 할아버지가 북이 이상했다고 했던 말 등이 이를 뒷받침하는 단서로 공정하게 제시됩니다.

유스케의 시점으로 보여지는 오컬트적인 묘사 역시 인상적이며, ‘나즈테의 모임’이 은근히 아이들을 협박하고, 더 이상 진상 조사를 이어갈 수 없도록 만드는 장면은 꽤 섬뜩했습니다. 이야기 전반에 은근한 공포를 깔고가는게 꽤 매력적이었어요. 아이들 시점의 묘사들, 성장기로 보아도 흐뭇한 설정과 전개도 마음에 들고요. 아이들이라서 가질 수 밖에 없는 한계 - 늦은 시간까지 멀리 돌아다닐 수 없음, 자유롭게 스마트폰을 사용할 수 없음 등 - 도 적절히 활용됩니다.

하지만 일찍이 '괴이'가 후카자와무라 사람들을 희생시켜 힘을 모았고, 이에 맞서기 위해 마을의 신관 가문 출신 무녀, 정사무소 직원 등이 힘을 합쳐 '나즈테의 모임'을 결성했다, 조력자인줄 알았던 사쿠마가 괴이였다는 진상과 사쿠마와의 대결이 펼쳐지는 결말은 아쉽습니다. 정통 본격 추리물에서 이형 호러 괴담으로의 방향 전환이 급작스럽고, 보는 것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괴이가 초등학생들을 포함한 인간들에게 패배한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지니까요.
왜 유튜버와 시바타 할아버지를 죽였는지 모르겠고, 인간의 모습으로 다녀야 한다는 제약 조건에 대해서도 충분한 설명이 제공되지 않는 문제도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미쓰다 신조의 작품들에 비하면 무게감이 부족하게 느껴집니다. 미쓰다 신조 쪽이 훨씬 더 무섭고, 그 존재에 대한 설명 역시 더 세밀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아울러 미쓰다 신조 작품에서 괴이의 존재는 여운을 남기지만 핵심은 아닙니다. 오히려 등장하는 모든 기묘한 사건을 괴이와 무관하게 어떻게든 설명하지요. 이 작품처럼 명백하게 괴이가 등장해서 모든걸 정리하지는 않아요.  

그리고 '나즈테의 모임'이 초등학생들을 방관하는 설정도 이상했습니다. 어느 정도 알아냈다면 바로 진상을 알려주었어야 합니다. 그걸 못해서 모두가 다 죽을 뻔 했잖아요? 초등학생들을 방관해서 죽은 사람이 정장, 도서관 직원에 유튜버 두 명, 시바타 할아버지까지 모두 네 명인데(유튜버 댓글에 사쿠마를 만났다고 쓴 두 명도 포함하면 일곱 명), 불필요한 희생이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괴담 풀이까지는 좋았지만 모든 진상과 반전이 드러나는 절정부와 결말이 아쉬움을 남깁니다. 직전에 읽었던 두 편의 추리 소설이 소설로의 기본적인 완성도를 갖추지 못한 졸작이라서 읽는 내내 즐거웠지만, 단점도 없지 않아 감점합니다. 그래도 평균 이상의 재미는 전해주는 만큼, 추리와 호러 장르 애호가 분들이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겠습니다.

2020/10/11

개의 힘 1,2 - 돈 윈슬로 / 김경숙 : 별점 2.5점

개의 힘 1 - 6점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황금가지
개의 힘 2 - 6점
돈 윈슬로 지음, 김경숙 옮김/황금가지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돈 윈슬로의 대장편 범죄 소설입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30주년 기념 킹 오브 킹 순위'에 해외편 무려 2위로 선정되어 있어서 관심을 두던 책입니다. 하지만 1, 2권 합쳐 1,0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에 기가 죽어 손대지 않고 있었는데, 코로나로 인한 추석 연휴 집콕 동안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1,000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쉽게 읽히고 독자를 몰입하게 만드는 맛이 일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약 단속 국장 아트 켈러, 멕시코 마약 카르텔의 파트론 아단 바레라의 20여년에 걸친 악연과 대결을 그리는데, 실제 멕시코 마약 카르텔에 대한 역사를 거의 그대로 각색했습니다. 여러 카르텔, 여러 보스가 얽힌 이야기를 바레라 가족 중심으로 풀어내었을 뿐입니다.

우선 작품 내에서 콘도르 작전 당시 마리화나 재배지가 초토화되고, 당시 보스였던 돈 페드로의 사망, 뒤이어 티오 미겔 앙헬 바레라가 사업을 코카인 운송으로 바꾸며 조직 보스인 파트론이 되면서 조직을 3개로 나누는 건, 실제로 시날로아 카르텔이 아마도를 보스로 하는 후아레스 카르텔, 아레나요가 보스인 티후아나 카르텔, 그리고 엘차포가 보스인 시날로아 카르텔로 분리된 역사와 거의 흡사합니다.
여기에 콜롬비아 메데인 카르텔이 생산한 코카인 유통을 도맡게 된 걸프 카르텔이 급성장하여 4대 조직이 되는데, 작품에서는 티오의 조카 아단 바레라가 지능적인 코카인 유통 혁신을 통해 카르텔 실권을 손에 쥐는 모습으로 그려지고요. 1985년 미국 요원 키키 카마레나 고문 살해 사건도 작품 안에서 어니 요원이 납치되어 고문받다가 살해되는 이야기로 거의 그대로 등장합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아단, 라울 바레라 형제와 게로 멘데스 사이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항쟁은 시날로아 카르텔 보스 엘차포와 티후아나 카르텔 보스 아레나요 형제 간에 실제로 벌어졌던 전쟁을 거의 그대로 따 왔습니다. 대표적인게 아레나요 형제가 잘생긴 킬러 클라벨을 시켜서 시날로아 카르텔 2인자 엘구에로의 아내 레이하를 유혹하게 만든 겁니다. 레이하는 유혹에 넘어가 클라벨, 어린 아들, 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떠나지만 클라벨에게 모두 살해되고 맙니다. 그 뒤 엘구에로는 레이하의 목과 아들, 딸이 다리에서 내던져지는 장면이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를 받게 되지요. 이 이야기는 작품 속에서 등장인물만 바뀐 채 거의 그대로 등장합니다. 아단 바레라가 사주한 킬러 파비안이 게로 멘데스의 아내 필라르를 유혹한 뒤 그녀와 아이들을 살해하는 이야기로요.

작품 내에서 굉장히 중요한 요소인 후안 신부 살해 사건 - 공항에서 바레라에게 살해당하지만, 바레라와 게로 멘데스간 전쟁에 휘말려 죽은걸로 처리되는 - 도 아레나요 형제와 엘차포 간 총격전에서 티후아나 대교구장 포사다스 오캄포 추기경이 휘말려 사살된 사건과 똑같습니다. 작품에서는 후안 신부가 멕시코 정부와 여러 관계자가 마약 조직과 관계된 증거를 가지고 있어서 살해된 걸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는데, 실제로 오캄포 추기경 역시 티후아나 카르텔과 살리나스 대통령간 결탁에 대해 폭로하려다 살해된 걸로 알려졌지요. 게로 멘데스가 성형 수술을 받고 모습을 바꾸어 재기하려다가 아단 바레라 측 킬러에 의해 살해되는 이야기도, 후아레스 카르텔 보스 아마도가 1997년 성형수슬을 받다가 사망한 역사를 따 온 듯 하고요.

NAFTA 이후 멕시코 경제가 파탄나고, 마약 사범들이 나라를 거덜내는 과정도 실제 역사와 거의 동일합니다. 차이점이라면 실제 카르텔간 전쟁에서 최후의 승리자가 된 엘차포는 체포된 뒤 멕시코 감옥에서 7년여간 편안하게 수감생활을 하다가 탈옥했다는 정도입니다. 작품에서 아단 바레라는 미국 정부에서 종신형을 선고받고 연방 감옥에서 복역하는 결말이거든요.
그 외의 모든 디테일들, 예를 들어 은이냐 납이냐, 코카 콜라냐 펩시 콜라냐와 같은 협박 문구라던가, 마약 수송용 지하 땅굴, 대형 여객기 수송 등도 모두 실제 조직 이야기에서 따 왔으리라는 확신이 듭니다.

이렇게 실제 마약 카르텔 이야기를 극화했기 때문에 설득력 하나 만큼은 기가 막힙니다. 그런데 이럴거면 아트 켈러라는 인물을 등장시켜 구태여 소설로 만들 필요가 있나 하는 의문도 생깁니다. 마약 전쟁 이야기 외의 이야기는 모두 재미가 없기 때문이에요. 바레라를 뒤쫓는 아트 켈러 이야기만 해도 간단한 도청, 정보원에 의지할 뿐이고 기껏 티오와 아단을 체포해봤자 모두들 기가 막히게 빠져나가는 탓에 제대로 마무리짓지 못하니까요.
또 소설로 만들면서 추가된 요소들도 거의 대부분 지루하고 뻔합니다. 이런 마약 전쟁의 뒷 배경에 중남미 지역에 공산주의 세력이 확산되는걸 경계한 미국의 자금 투입과 원조가 있었다는 음모론이 대표적입니다. 실제로 그랬으리라 짐작되는 설득력있는 설정인건 맞습니다. 그러나 지금 읽기에는 지나치게 식상하지요. '케르베로스'. '레드 미스트' 운운하며 뭔가 있어보이게끔 노력은 하지만, 다른 이야기에서 흔히 보아왔던, 미국이 돈을 주고 키워낸 용병단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요. CIA 국장 존 홉스가 이게 뭐 대단한 비밀이라고 은폐하려고 난리를 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어요. 미국은 이미 그 이상의 추문을 수도 없이 들켰잖아요.
또 이 설정이 사실이라면, 아단 바레라가 콜롬비아 반군에게 무기를 공급하고 댓가로 마약을 손에 넣으려는건, 파멸의 지름길에 발을 담근 셈입니다. 구태여 들쑤셔서 체포할 필요도 없었어요. 아울러 어차피 미국이 돈을 대지 않아도, 바레라 가문이 멸족해 버려도 멕시코 마약 카르텔은 누군가 권력을 잡고 마약을 여전히 유통할 겁니다. 실제로 역사가 증명하고 있고요. 흑막이니, 음모니 하는건 별 의미가 없습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모두 기대 이하입니다. 후안 신부와 유일하게 정의로운 멕시코 폭력 경찰 라모스 정도만 독특함과 생생함이 느껴질 뿐, 다른 인물들은 평면적이며 단순한 탓입니다. 특히 실제 인물을 따오지 않은 창작 캐릭터들 문제가 심각해요. 고급 매춘부 노라를 한 번 볼까요? 그녀는 멕시코 대 지진 때 '우연히' 알게 된 후안 신부와 친분을 맺습니다. 그 뒤 '우연히' 만난 아단의 정부가 되는데 아단의 사주로 후안 신부가 살해된 뒤, 여러가지 정보를 아트에게 제공한다는 설정입니다. 아단이 노라에게서 푹 빠져서 온갖 사업상 기밀을 전해주고, 심지어 사업 이야기에 동참시키기까지 했기 때문입니다. 노라 설정에만도 우연이 여러개 겹쳐있지만, 티오와 게로 멘데스, 아단 바레라 모두 여자에게 푹 빠져서 파멸한다는 설정은 황당하기만 할 뿐입니다.
아일랜드 낭만 킬러 칼란도 한 번 볼까요? 그는 우연히 킬러가 된 뒤, 멕시코에서 아단의 목숨을 '우연히' 구해주고, 아단과 게로 멘데스 전쟁에 끼어들어 아단의 사주로 후안 신부가 살해되는걸 '우연히' 목격하게 됩니다. 그 뒤 '우연히' 받은 청부로 정보원이 된 노라를 보호하다가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는 설정이에요. 마지막에는 아트를 죽이는 킬러로 고용되었다가 노라의 진심을 알고 고용주들을 쓸어버리고요. 이렇게 억지스럽고 작위적으로 이야기를 끌어나갈거라면 솔직히 안 나오니만 못했습니다.
게다가 칼란도 그렇고, 엘 티부론 파비안도 그렇고, 청소년 때 이미 타고난 킬러라는게 증명되었다는데 이 역시 설득력이 없습니다. 특수 훈련 한 번 받지 않은 애송이들인데 말이지요. 

이야기의 중심을 단단히 잡아주어야 할 아트 켈러도 이런 류의 작품에 흔히 등장하는 스테레오 타입에 그칩니다. 아내를 사랑하지만 마약 전쟁에 대한 사명감으로 가족을 저버리고 일에 몰두한다는 설정인데, 별다른 매력이나 특이함을 느끼기 힘들었습니다. 노라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는 정도만이 의외였어요. CIA 국장 존 홉스와 그의 오른팔인 인간 백정 군인 살 스카키 이런 작품에 나오는 악덕 CIA 국장과 그 부하와 전혀 다를 바 없어 실망스럽기는 마찬가지였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미만큼은 확실하지만 실화에 끼얹은 부분이 대부분 기대 이하, 함량 미달이라는 감점합니다. 흔하디 흔한 미국 음모론과 헐리우드식 설정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일각에 존재하는 높은 평가를 이해하기는 힘드네요. 이 작품보다 실화 논픽션이 훨씬 재미있었을 겁니다. 아니면, 일종의 종교단체를 만들어 활동한 엘차요와 '라 파밀라이' 이야기를 소설로 만드는게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돈을 위해 살인하지 않고, 여성과 어린아이를 해치지 않을 것이며, 민간인을 약탈하지 않을 것이지만, 죽어 마땅한 놈들은 모두 죽이겠다"고 선언하고, 마약을 재배하고 만들지만 절대로 마을과 멕시코 내부에는 판매하지 않고 미국에만 판다는 나름의 정의를 가진 기묘한 세력이거든요.

2017/10/06

하늘을 나는 말 - 기타무라 가오루 / 정경진 : 별점 3점

하늘을 나는 말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기타무라 가오루의 전설적인 일상계 연작 단편집입니다. "동서 미스터리 100"의 일본편 17위를 차지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는 걸작이지요. 오래 전 부터 국내 출간을 기다리던 작품입니다.
사실 국내 소개가 이렇게나 늦어진 것 자체가 굉장히 의외에요. 앞서 말씀드린 "동서 미스터리 100"선 상위 20개 작품 중 국내 미출간 작품은 이 작품과 아유카와 데쓰야의 "검은 트렁크" 두 작품이 유이할 정도거든요. 이 중 "검은 트렁크"는 1950년대 출간된 묵직한 고전이지만, 이 작품은 80년대 발표된 나름 신세대 미스터리 작품인데 말이지요. 게다가 일상계 미스터리는 국내에서도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들이나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 등으로 제법 인기를 확보하고 있기도 하고요. 온갖 수준 이하의 작품들까지 번역되는 일상계 추리물의 홍수 속에 이 유명 작품이 이제서야 소개된 것 자체가 미스터리같습니다. 무슨 어른의 사정이 있는지 조금은 궁금하네요.

여튼, 그만큼 기대가 컸는데 다행히 재미있었습니다. 작가가 여성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의 섬세한 묘사들이 가득하여 푸근하고 따뜻한 느낌을 전해주며, 추리적으로도 정통에 가까운 이야기들인 덕분입니다. 기묘한 이야기가 선보이고, 그것을 엔시씨가 주어진 단서만으로 풀어낸다는 고전적인 안락의자 탐정 스타일인데, 대체로 설득력있고 합리적입니다.
국문학을 전공하는 화자 "나"와 라쿠고가 탐정 엔시 씨 캐릭터도 좋아요. 작가의 섬세한 필치로 매력적으로 묘사되고 있음은 물론, 주인공의 "국문학도" 로서의 전문가적인 지식과 엔시 씨의 "예인"으로서의 특수 능력 - 놀라운 기억력과 라쿠고 연기를 통해 단련한 사람의 심리를 꿰뚫어보는 능력 - 이 이야기와 잘 결합되고 있는 덕분입니다.

단점이라면 분량에 비해 추리적인 부분이 좀 부족하다는 것 정도? 이것은 엔시씨와 나, 그리고 그 외 등장 인물들과 본 편 추리와는 무관한 배경 묘사 비중이 높은 탓입니다. 덕분에 캐릭터가 생동감있게 다가오고, 전개에 있어서도 설득력이 더해진다는 장점은 있습니다만, 추리 부분의 비중이 작아진건 개인적으로 아쉬웠어요. 국내 소개되었던 작가의 다른 단편집 - "시미가의 붕괴" - 등에 수록된 이야기들은 굉장히 빠른 호흡으로 전개되었기에 의외이기도 했고요. 아무래도 이 작품이 발표된 해가 버블의 정점이었던 1989년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네요. 여유있고 풍요로왔던 시대에 어울리는 느긋한 분위기가 가득 느껴지니까요.

그래도 숨 넘어갈 것 처럼 달리는 와중에도, 쉬어갈 필요는 있는 법이지요. 단점은 사소할 뿐, 시대를 뛰어넘는 재미를 전해주는 좋은 일상계 소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일상계 미스터리를 좋아하신다면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다음과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기 전 참고하세요.

"오리베의 망령" 

"나"는 우연히 대학교 은사 가모 교수의 부탁으로 라쿠고가 엔시씨 인터뷰에 동행했다. 인터뷰 후 회식 자리에서 가모 교수는 어린 시절 꾸었던 기묘한 꿈 이야기를 했는데, 엔시 씨는 이야기만 듣고 진상을 알아냈다. 그리고 그는 증거 보완을 위해 한 달의 시간을 요청하는데...

화자인 "나"와 탐정역인 라쿠고가 엔시씨가 등장하는 기념할만한 시리즈 첫 편입니다. 섬세하면서도 느긋하고, 조금은 할머니 취향인 "나"와, 뛰어난 기억력을 갖추고 사람들을 꿰뚫어보는 엔시 씨가 제대로 소개됩니다. 전통 일본적 소재인 라쿠고와 오리베 자기, 그리고 교수님 꿈 이야기가 한데 어우러지는 전개도 괜찮고요.

추리적으로도 단서가 공정하게 제공됩니다. 교수님 꿈의 이유가 된 숙부님이 평소 책을 함부로 대했다는게 핵심이거든요. 물론 교수님이 어렸을 때의 일본 사회 분위기, 당시 경매 제도 디테일 등은 국내 독자로서 알아내기는 불가능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만, 일본 한정으로는 충분히 설득력을 가질 수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리즈 시작으로는 적절한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설탕 합전" 

"나"는 어느 날 엔시 씨를 우연히 만나 함께 홍차를 마시게 되었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나"는 앞 테이블에 앉은 3인조의 기묘한 행동에 신경을 쓰게 되는데...

사소한 것에서 진상을 꿰뚫어보는 엔시 씨의 능력이 잘 드러나는 작품입니다. 핵심 추리는 "왜 세 명의 마녀(?)가 설탕 합전을 벌이는가?" 이지만, 돌아보지도 않고 "나"가 신경쓰는 사람들이 세 명의 여자 아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녀들이 반드시 다시 돌아올 거라는걸 예언하는 등의 소소한 추리도 아주 볼만했습니다. "설탕을 홍차에 타려고 한 것이 아니라 설탕을 꺼내려는 목적이었다"에서 시작되는 핵심 추리의 흐름 및 진상도 충분히 합리적이고요. 변장과 연기(?)로 사건을 완벽하게 해결하는 엔시 씨의 활약까지 더해지기 때문에, 그야말로 완벽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나"가 무언가 이상한 것(소금)을 넣는 것을, 원래 퍼낸 설탕을 다시 넣는 것으로 착각한 이유가 불분명하다는 단점은 있습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다른 용기에 담아온걸 넣었을 텐데, 이걸 착각한다는건 무리니까요. 앙심을 품은 알바생이 너무 자신을 드러내놓고 가게에 출입하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그래도 단점보다는 장점이 훨씬 많은, 시대를 전혀 느낄 수 없는 아주 좋은 일상계 소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호두 껍데기 안의 새" 

"나"는 친구 다카오카 쇼코와 함께 도호쿠 여행을 떠났다. 엔시 씨의 공연도 보고, 온갖 절경을 감상하며 여행을 즐기던 중, 현지에서 만난 친구 에미의 차 시트가 모두 벗겨진 채로 발견되는데...

분량은 약 90페이지에 가까운데, 80여 페이지에 걸쳐 도호쿠 여행담이 소개됩니다. 아무리 일상계 작품이라지만 이래서 되나 싶을 정도로 무관한 배경 묘사 비중이 높아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나"와 친구들 사이의 대화 역시 지나치고요. 

작품 속 추리 역시 억지스럽습니다. 동일 차종의 차 커버를 벗겨 위장한다는게 대표적입니다. 단지 시트 커버만 벗긴다고 차가 비슷해질까요? 그 안의 모든 디테일, 소품이 다를텐데 말이지요. 아울러 이렇게 위장하려고 했던 대상이 어린 여자아이라는걸 쉽게 떠올리는건 너무 심한 비약입니다.

물론 배경 묘사는 아주 근사합니다. 일본 인형 코케시의 고장이라고도 하는 "자오산"의 풍광이 정말 매력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나"가 문학에 대해 정말 조예가 깊다는게 잘 드러나는 점도 좋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아쉬움이 있기에 감점합니다.

"빨간 모자"

"나"는 동네 치과에서 우연히 함께 대기실에 있던 "점 여사"로부터 기묘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알고 있는 점 여사의 동창 모리나가 유미코 씨의 집 앞에, 매주 일요일 밤마다 빨간 옷을 입은 소녀가 나타난다는 이야기였다.

전편에서 이어진다고 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전편의 결과(아이를 버린 어머니)를 궁금해 한 엔시 씨가 "나"를 공연에 초대한 후 이야기를 듣는다는 설정과 본편 이야기가 이혼에서 비롯되어 있다는 점에서요.

추리적으로는 무난합니다. "빨간 모자" 이야기는 사실 모리나가 유미코의 창작으로, 점 여사가 찾아온 날 화장실 옆에서 신발장을 정리한게 핵심 단서라는 것은 괜찮았어요. 충분히 일상계스러우면서도, 독자에게도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해 준 셈이니까요. 그날 목격한 "빨간 모자"는 유미코의 딸일 것이며, 이 모든 것이 점 여사의 남편과 모리나가 유미코가 불륜 관계였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충분히 설득력 있습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인간 관계, 인간 심리를 그려낸 묘사는 부담스러웠습니다. 점 여사의 방자한 태도, 마지막에서 "나"가 사고가 날 뻔한 상황 등에 대한 묘사는 솔직히 불필요했고요. 본 편 추리하고는 동떨어져 있는 모리나가 유미코의 "빨간 모자" 동화 묘사도 지나치게 깁니다. 이러한 점은 한 편당 80여 페이지라는 분량을 맞추기 위한 목적이 아니었나 의심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냥저냥한 수준의 이야기였습니다.

"하늘을 나는 말"

"나"는 집 근처 상점 "모퉁이 집"의 젊은 사장 구니오 씨가 연인과 함께 있는 것을 우연히 목격했다. 이후 "나"는 부탁을 받아 유치원 크리스마스 공연 비디오 촬영을 나섰는데, 그 곳에서 산타클로스로 분장한 구니오 씨를 다시 만났다. 그날 그는 유치원에 가게에 있던 목마를 선물로 기증했다. 그런데 이웃집 며느리로부터, 유치원 마당에 놓여져 있던 목마가 순간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표제작으로 일상계 단편집 마무리에 어울리는 가슴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추리적으로 수수께끼 자체는 평이하지만, 다무라씨(구니오씨의 연인)가 날짜를 착각했다는게 잘 설명되고 있는 만큼 즐길거리는 충분합니다. 일상계에 딱 어울리는 정도의 수수께끼였어요.

무엇보다도 제가 읽었던 크리스마스용 소품들 중에서는 최고입니다. "나"의 생일이 크리스마스이고, 소재가 크리스마스 선물이며, 이야기의 핵심이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니 이만큼 좋은 작품이 또 있을까요? 크리스마스의 즐거움을 더해 별점은 3.5점입니다.

2024/03/24

라플라스의 마녀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1.5점

라플라스의 마녀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 및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물 영화 제작자 미즈키 요시로가 아카쿠마 온천에서 황화수소에 중독되어 사망했다. 나카오카 형사는 요시로의 아내 치사토의 범행을 의심했지만, 경찰 수사 협조를 요청받은 환경 분석 화학 전문가 아오에 교수는 고의로 중독 사건을 일으키는건 불가능하다고 단언했다. 
그러나 도마테 온천에서 유사한 황화수소 중독사가 또 일어났고, 나카오카와 아오에는 피해자들이 영화 감독 아마카스 사이세이와 연관되어 있다는걸 알아냈다. 아마카스도 수년 전 가족을 황화수소 중독으로 잃었던 과거가 있었다. 
뇌수술을 받고 기적적으로 살아났으나 기억상실에 걸렸다는 아마카스의 아들 겐토를 쫓는 소녀 우하라 마도카와 만난 아오에 교수는 마도카와 그녀 주변인물들을 통해 결국 사건의 진상을 깨달았다. 이 모든건 뇌수술로 물리 현상을 예측할 수 있게 된 겐토의 복수극이었다....

"인간은 원자야. 하나하나는 범용하고 무자각으로 살아갈 뿐이라 해도 그것이 집합체가 되었을 때, 극적인 물리법칙을 실현해 내는 거라고.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어. 단 한 개도."

히가시노 게이고 작가 인생 30주년 기념작인 500페이지가 넘는 대장편. 밀리의 서재에 있길래 읽어보았습니다.
 
겐토와 마도카가 가진, 물리법칙으로 미래를 예지하는 능력은 현상에 대한 물리적인 데이터를 구비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있다는 등으로 꽤 그럴싸하게 설명됩니다.
겐토가 저지른 범죄의 원인인 과거 아마카스가 가족을 살해했던 사건의 동기도 놀라왔습니다. 아마카스가 작성했던 블로그 글과는 사뭇 다른 가족 관계가 밝혀지는 등의 설명으로 반전이 효과적으로 그려지는 덕분입니다. 아마카스가 주장하는 천재 이론 - 대다수의 범용한 인간들은 아무런 진실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져 버린다 - 과는 반대되는 주제의식 - 이 세상에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는 없다 - 도 와 닿았고요. 암요, 천재도 중요하지만 일반 대중들이 있어야 천재도 빛을 보는 법이지요.

그러나 장점은 이 정도 뿐이고 대체로는 실망스러웠습니다. 우선, 전개부터 예상 그대로라 굉장히 평이합니다. 황화수소에 의한 살인은 온천을 방문했던 청년이 일으켰다는건 쉽게 짐작 가능합니다. 그 정체도 읽다보면 아마카스 겐토라는걸 쉽게 눈치챌 수 있고요. 전문가 아오에 교수가 불가능하다고 단언한 황화수소를 이용한 살인을 어떻게 저질렀는지도 대단한 수수께끼는 아닙니다. 마도카의 특수 능력이 초반에 밝혀지는 탓에, 그런 능력을 이용한 범죄라는건 누구나 짐작할 수 있으니까요. 오히려 상상을 초월하는 일종의 '초능력'을 활용한 범죄라는 점에서 추리 소설로 보기 어렵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지 않게 전개도 깔끔하지 못합니다. 주인공이 많아서 시점이 자주 전환되는게 가장 큰 문제입니다. 마도카 등 다른 인물들 시점으로의 전환은 필요했는지도 의문입니다. 이럴 바에야 아오에 교수, 나카오카 형사를 중심으로 끌고가는게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나카오카 형사의 수사가 '위'에서의 지시로 마무리되지 못한다는 것도 억지스러웠고요.

뇌 수술 덕분에 미래를 예지할 수 있게 되었다는 초능력도 앞서 말씀드렸듯 설명은 잘 되어 있지만 신선함은 떨어집니다. 결국은 '머리가 좋아진 것'에 불과하거든요. 즉, 아래와 같이 '아마데우스 조'가 미사일 궤도를 흐트러트리는 것과 똑같아요.
물이 흐른다던가, 공기의 흐름을 이용한다던가 하는 식의 물리법칙 이용은 듀나의 SF 단편 "나비전쟁"에도 유사한 설정이 등장했었고요.
게다가 이 능력에 대한 것 모두는 온갖 설명이 덧붙여져 있기는 하나 결국 과학이라기보다는 판타지입니다. 여기에 특수 능력자를 나라에서 관리한다 등의 설정에 '라플라스의 마녀'라는 코드네임(?)까지 더해지니 이거야 원, X-men과 다른 점을 찾아보기 힘드네요.

등장인물들도 진부하고 평이합니다. 겐토는 특히 문제입니다. 그가 아버지 아마카스를 살해하려는 동기는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하지만 목적 달성을 위해 치사토를 유혹하여 범죄에 끌어들이고 마지막에 함께 죽여버리려고 하면서 정의, 복수를 당당하게 주장하는건 앞뒤가 맞지 않아 보였습니다. 심지어 "존재 의의가 없는 개체 따위는 없다"고 주장하는데 말이죠!
아오에 역시 불가능하다는 말만 해서 전혀 교수답지 않았을 뿐더러, 아오에가 가족 붕괴를 앞두고 있다던가 하는 설정은 불필요했습니다. 
우하라 교수가 딸 마도카의 뇌수술을 하게 된 동기인 '토네이도' 사고도 굉장히 억지스러웠어요. 설령 이런 사고가 있었다한들, 딸에게 검증되지 않은 뇌수술을 한다는게 말이나 됩니까? 겐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할 생각을 해야지....
 
이렇게 추리적으로도, SF적으로도, 전개와 완성도 측면에서 별로이며 문제 투성이라 점수를 줄 여지가 없습니다. 과학과 미스터리의 절묘한 융합이라는 광고 문구는 과대 포장에 가깝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쓴, 뻔하고 유치한 마블 히어로물입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그래도 영화는 좀 궁금하네요. 예고편을보니 아오에 교수를 주인공으로 해서 복잡했던 시점 분산을 깔끔하게 정리한 듯 보여서 책보다 좋아보이거든요. 평이하고 쉬운 전개는 영화에는 분명 장점일테고, 물리법칙을 이용하는 장면들 - 특히 클라이막스의 '다운버스트' - 은 화면에서는 꽤 그럴싸하게 보일테니, 최소한 소설 후속권보다는 기대가 됩니다.

2023/01/14

마녀의 은신처 - 존 딕슨 카 / 이동윤 : 별점 4점

마녀의 은신처 - 8점 존 딕슨 카 지음, 이동윤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핵심 트릭과 범인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미국인 테드 램폴은 대학 은사의 소개로 영국 시골 채터럼에 거주하는 사전 편찬자 기디언 펠 박사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그 지방에는 스타버스 가문에서 다스렸던 교도소에 얽힌 저주가 전해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스타버스 가문의 주인들은 모두 목이 부러져 죽었다.

램폴은 스타버스 가문의 장녀 도러시와 사랑에 빠졌지만, 가문의 유산 상속을 위해 교도소의 교도소장 방에서 자정에 무언가를 가지고 왔어야 했던 가문의 장남 마틴이 교도소에 간 날 밤 목이 부러져 죽고, 사촌 허버트는 사라지는 사건에 말려드는데....

존 딕슨 카의 국내 출간작 중 유일하게 읽지 않았던 작품입니다. 출간이 해문의 어린이용 버젼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엘릭시르에서 전자책으로 출간해 주었기에 냉큼 구입해서 읽게 되었습니다. 

딕슨 카의 특기가 유감없이 펼쳐지는 작품으로 가장 마음에 든건 추리적인 장치들입니다. 정통 고전 미스터리의 대가다와요. 특히 일종의 순간이동 트릭이 볼만합니다. 범인인 손더스 목사는 교도소장 방의 램프 불이 꺼질 때까지 펠 박사와 랜폴과 함께 있었다는 결정적인 알리바이가 있었습니다. 램프 불이 꺼진 직후 램폴과 함께 펠 박사 집을 떠났고, 그 뒤 마틴의 시체가 발견되었으니 범인일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나 펠 박사가 추리해낸 진상은 실종된 허버트가 마틴 대신 교도소장 방으로 갔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교도소장 방의 램프는 마틴이 아니라 허버트가 켜고 껐으며, 마틴은 목사가 펠 박사의 집에 가기 전, 목사관에서 이미 살해해서 마녀의 은신처에 사체를 유기했던 겁니다. 이후 사체 발견 후 목사관에 들렸을 때 허버트도 살해했고요. 이는 마틴이 굉장한 겁쟁이었다는 것과 허버트의 맹목적인 충성이라는 인간 관계, 그리고 마틴은 골초였는데 교도소장 방에는 꽁초하나 남아있지 않았다는 것, 발코니 창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창으로는 빗물이 전혀 들이치지 않았다는 등의 단서들로 합리적으로 뒷받침됩니다. 허버트가 발명가라는 설정으로 발코니에 특수 장치를 했을 거라는 추론같은 잔재미도 충분하고요. 

사건의 동기라 할 수 있는, 우물에 보물이 있다는 펠 박사의 추론도 합리적입니다. 지극히 공정하게 독자들에게도 제공되는 정보에 의한 추리라는 점도 좋고요. 초대 교도소장 앤서니 스타버스는 왜 그렇게 완력이 강해졌는지? 교도소장 방 발코니 석재 난간에 깊숙하게 패인 홈의 정체는 무엇인지? 발코니로 향하는 문 열쇠가 왜 필요했는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가 미워하던 가족들에게 남겨주지 않은 막대한 재산은 어디에 갔는지? 라는 단서를 통해 앤서니가 난간에 밧줄을 묶은 뒤 바로 아래 있는 우물 안에 들어갔다 나오기를 반복했으며, 그 이유는 우물 안에 재산을 숨겨 놓았다는 결론에 이르거든요. 이 추론을 증명하는, 교도소장이 남긴 십자말 풀이같은 암호문도 인상적이었습니다. 형편없는 시를 썼다는 인물 설정에도 부합하면서도, 언어가 다른 국내 독자들도 풀어낼 수 있으리라 생각될 정도로 쉬우면서 합리적인 암호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지막에 손더스 목사가 범인임을 드러내는 추리쇼 장면은 정말 압권입니다. 펠 박사는 경찰서장과 여러 관계자들과 함께 기차역으로 항합니다. 도착하는 인물이 사건의 주요 인물이라면서요. 그리고 기차에서 내리는 사람이 누구냐고 손더스 목사에게 물어보는데 목사는 "당신 미쳤구먼! 나는 저 사람 처음 봅니다!"라고 답했고, 그 탓에 손더스 목사가 가짜라는게 드러납니다. 그 사람은 진짜 손더스 목사의 숙부였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아는게 아니라 '모르는 것'이 핵심 증거가 된다는 발상이 아주 신선했고, 이를 추리쇼 형태로 풀어낸 솜씨는 정말로 탄복할만 했어요. 

이러한 추리적인 요소들 외에, 딕슨 카의 또 다른 특기인 오컬트적인 부분의 묘사도 빼어납니다. 광기의 교도소장 앤서니 스타버스와 그가 만들어 운영했던 죽음의 교도소, '마녀의 은신처'라고도 불리우는 교수형장 터에 대한 끔찍하면서도 생생한 묘사는 일품이에요. 20세기 초반, 영국 시골 분위기와 음침함이 잘 어우러지고 있습니다. 독자들에게 스타버스 가문에 내려진 저주(?)도 그럴듯하게 느껴지게 만들 정도로요.

하지만 손더스 목사가 저지른 범행의 원인이 된 티머시 스타버스의 행동에는 다소 의문이 남습니다. 티머시 스타버스는 죽기 전에 자기를 죽이려한건 손더스 목사였다는걸 알리지 않습니다. 어차피 티머시 사후 아들 마틴이 가문을 잇게될 때 확인하게 될 금고 안에 손더스 목사의 범행을 증명하는 서류를 넣어두었을 뿐이지요. 왜냐하면 남은 몇 년 간, 손더스 목사가 도망도 가지 못하고 범행이 드러날 때까지 지옥을 맛보게 하려는 생각이었다는데.... 이는 손더스 목사로 하여금 아들과 조카마저 살해하게 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습니다. 조금만 생각하면, 궁지에 몰린 손더스 목사가 마틴을 죽이고 서류를 손에 넣으려고 했으리라는건 충분히 알 수 있었을겁니다. 한 명을 죽이나, 두 명을 죽이나 어차피 별 차이는 없잖아요. 이런 계획을 세우고 서류까지 작성할 정도였으면 정신도 말짱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왜 이런 무모한 (?) 계획을 세웠는지 모르겠습니다. 

또 나중에 진술서를 통해 손더스 목사가 왜 도망가지 않았는지에 대해 설명해주지만 설득력이 낮습니다. 어차피 몇 년 뒤 범행이 드러날거라면, 스타버스 가문의 숨겨진 보물로 거액을 손에 넣을 수 있었으니 여행을 떠난다는 등의 핑계로 마을을 떠나 사라지는게 나았을테니까요. 손더스 목사로 위장하기 전 원래 신분으로 돌아가서 원래 머물던 뉴질랜드로 떠났다면 영원히 문제가 없었을 겁니다. 

그 외에도 티머스 스타버스는 보물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게 분명한데, 왜 진작에 보석을 꺼내어 가문의 재산으로 삼지 않았는지도 의문이며, 램폴과 도러시가 만나자마자 사랑에 빠진다던가, 아무리 손더스 목사가 의도적으로 접근했다 한들 마틴이 선뜻 목사 계획에 응했다는 등 설득력이 떨어지는 부분은 그 외에도 적지 않습니다. 

그래도 추리적으로 워낙 빼어나기에 단점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습니다. 오컬트적인 요소가 잘 어우러진 특유의 작풍도 아주 매력적이고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전에 올렸던 내용에서 업데이트한, 제가 여태 읽었던 딕슨 카 작품 순위를 공개합니다. 지금 읽으면 별점과 순위는 다소 조정될 수 있지만, 평균 별점이 3점을 넘으니 타율로 따지면 5할 이상! 쳤다하면 장타입니다. 대단하네요.

공동 1위 : 별점 4점 

"해골성",  "유다의 창",  "흑사장 살인 사건",  "화형 법정",  "마녀의 은신처"

공동 6위 : 별점 3점

"연속 살인 사건", "세 개의 관",  "구부러진 경첩",  "벨벳의 악마",  "아라비안 나이트 살인",  "초록 캡슐의 수수께끼"

"기묘한 사건, 사고 전담반" 수록작 중
"은빛 장막 속에서", "합법적인 사형집행인" 별점 4점"사라진 방", "분장실의 시체" :별점 3.5점"투명 인간 살인" : 별점 3점

13위 : 별점 2.5점 

 "모자 수집광 사건"

14위 : 별점 2점 

"밤에 걷다"

2022/09/18

조커게임 - 야나기 코지 / 한성례 : 별점 2점

조커게임 - 4점
야나기 코지 지음, 한성례 옮김/씨엘북스

어딘가의 랭킹에서 트릭이 뛰어난 작품이라며 추천하고 있어서 구해 읽었습니다. 사전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읽기 시작했는데, 생각과 전혀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랭킹 탓에 특별한 게임과 관련된 본격 미스터리 물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알고보니 구 일본 제국 시대를 무대로 한 스파이물인데다가 심지어 단편 시리즈였기 때문입니다.

많이 등장하지는 않지만, 등장하는 몇가지 트릭은 분명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대 상황을 잘 살리고 있는 덕분입니다. <<조커 게임>>에서 헌병대가 외국 스파이의 집을 철저하게 뒤졌지만 마이크로 필름을 찾지 못한 이유가 대표적입니다. 스파이는 마이크로 필름을 천황의 사진 뒤에 숨겨 놓았던 것이지요. 일본 헌병대는 불경죄를 저지를까 두려워 사진을 만져보지도 못했던 겁니다.
<<로빈슨>>에서 완벽하게 암호를 전달했지만 본국이 가짜라는걸 알아채게 만든 트릭은 일정 간격으로 오타를 입력해야 되는 것이었고요. 간단하면서도 현실적으로 보여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는 않습니다. 저 정도의 트릭으로 '빼어나다' 고 말하기는 힘들고요. 무엇보다도 작품 속 특수 정보 기관인 D기관에 대한 설정과 묘사가 유치하고 진부한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마왕' 유키 중령은 물론이고, 등장하는 모든 D기관원들 모두가 평범한 인간을 뛰어넘는 슈퍼 스파이 - 스파이 패밀리 같은 - 로 그려지고 있으니까요. 아무리 봐도 만화 속 등장인물에 가까와서 현실감을 느끼기는 불가능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 애니메이션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던데, 여러모로 애니메이션으로 보는게 더 나은 선택이 될 것 같네요. 그만큼 만화적이고 허구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저 역시 후속작을 따로 책으로 읽어볼 계획은 없습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조커 게임>>
육군에 유키 대령 지휘 하에 스파이 양성 학교가 세워졌다. 훈련생들이 군인이 아닌 일반 대학 졸업생이었고, 전통적으로 스파이 활동을 무사도에 반하는 행위라 생각하여 이 학교와 조직을 탐탁치 않게 여겼던 육군은 사쿠마 중위를 파견했다. 사쿠마 중위의 임무는 유키 대령 조직의 실수와 헛점을 찾아내는 것이었다.

사쿠마는 학교 훈련생들의 기상천외한 입학 시험과 훈련 과정, 그리고 천황제를 부정하는 듯한 사고 방식에 경악하던 차에, 미국인 기술자 고든의 스파이 행위 증거를 찾기 위한 작전에 투입되는데...

표제작이자 시리즈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 사쿠마 중위의 시점으로 첩보 기관 D기관에 대한 설정과 '마왕' 유키 대령에 대해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활동을 가장 잘 드러내는게 제목이기도 한 '조커 게임' 입니다. D 기관 훈련생들이 식당에서 여흥으로 즐기는 포커 게임으로 보이지만, 사실 식당에 출입하는 모든 사람들이 관련되어 있는 스파이 게임이지요. 누구나 누군가의 카드를 보고 정보를 줄 수 있는데, 그 정보가 사실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규칙입니다. 누구나 스파이가 될 수 있고, 누구도 믿으면 안된다는 D 기관의 룰을 잘 드러내는 게임이에요.

이러한 D 기관 설명이 중심이고, 고든이 스파이 행위를 했다는 증거물을 찾는 과정은 곁가지에 불과하지만, 이 과정에 약간의 트릭이 사용되고 있으며, D 기관원들이 천황제 부정 발언을 했던게 트릭과 연결되고 있어서 전개 구조 자체는 잘 짜여져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사쿠마가 주도한 수색 자체가 육군의 음모였다는 반전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최초 수색을 지시했던 무토 중령은 필름을 발견하지 못했고, 고든의 부당한 수사에 대한 항의로 궁지에 몰렸던 상태였지요. 그래서 D 기관을 시켜 두 번째 수사에 나선 것입니다. D 기관도 수색에 실패하면 모든걸 뒤집어씌워 조.직을 와해시키고, 자기 실수를 덮으려는 목적으로요. 사쿠마는 무토 중령의 음모를 위한 버림돌에 불과했던 겁니다.

그러나 반전이 드러나는 과정은 억지스러웠습니다. 이야기의 헛점도 많습니다. 무토 중령이 술집 게이샤에게 용의자 집 수색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고든 본인이 사쿠마 중위에게 지금이 두 번째 수사라고 말했더라면? 어쩔 셈이었을지 모르겠거든요. 유키 중령이 변장하고 무토 중령과 자리를 함께 했다는 등 작위적인 요소도 많았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그럭저럭 평작 수준은 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유령>>
영국 총영사 그레이엄은 일본인 양복점 점원 가모와 체스로 친해졌다. 그러나 가모는 D 기관 조직원이었다. 그의 임무는 폭탄 테러 계획의 유력한 용의자 그레이엄 총영사에 대한 혐의를 확정하기 위한 증거를 찾는 것이었다.
가모는 체스를 통해 총영사는 심증으로는 죄가 없다고 확신했다. 그러나 총영사 관저에서 사용하는 특수한 종이가 테러범 접선 장소에서 발견되었기에, 결정적 증거를 잡고자 철저히 미행했지만 별다른걸 찾아내지 못했다. 그래서 최후의 수단으로 새벽에 영사관에 잡입하게 되는데....


영사는 지령문을 옮기는 수단에 불과했다는게 진상입니다. 테러 조직은 영사의 우산 속 빈 공간을 활용해서 접선 장소에서 몰래 지령문을 전달받았던 것이지요. 그래서 영사가 테러 조직의 접선 장소와 동선이 겹쳤고요.

발상의 전환이기는 한데, 구태여 영사를 이용해야 했을지?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D 기관원 가모가 영어에 능통하고, 체스는 물론 미행과 잠입, 그리고 금고 털기에도 숙달된 슈퍼 스파이라는 묘사도 과장이 심해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무엇보다도 가모가 영사가 소싯적 저질렀던 악행을 고백한 일기를 읽은 뒤, 이걸로 영사를 협박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마지막 장면은 최악이었습니다. 촬영도 않고 다른 증거도 없는데, 단지 악행을 기억하고 있다는걸로 영사를 협박하는게 가능했을까요? 심지어 상대는 적국의 스파이인데 말이지요. 이게 통하려면 뭔가 결정적 증거를 확보해야 했습니다.

가모가 신분을 세탁하여 영사와 친분을 맺는 과정, 그리고 가모가 미행할 때 영사가 팁을 주는 행동이 자연스러운 정보 교환 방법이 아닐까 의심하는 장면 정도는 볼 만 했는데, 그 외에는 건질게 별로 없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로빈슨>>
D 기관원 이자와는 영국 런던에 잠입했지만 영국 첩보기관에 체포되었고, 자백 유도제를 맞아 비밀 암호 등을 털어놓고 말았다. 영국은 유키 대령에게 배반당했다는 이자와를 이용하여, 일본에 가짜 정보를 전달하여 혼란을 주려 했지만 이자와는 의식의심층 구조에 숨겨진 진짜 중요한 비밀은 털어놓지 않았었다. 그래서 D 기관은 이자와의 정보가 가짜라는걸 알아채는데...

앞서 소개해드렸던 , 암호가 가짜라는걸 알게된 이유는 꽤 괜찮았습니다. 스파이는 일본 남아의 사고 방식과는 다르다, 무조건 살아남아서 정보를 제공해야 한다는 유키 대령의 사고 방식도 스파이다워서 좋았고요.

하지만 그 외에는 과장이 심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특히 자백제에도 넘어가지 않았던 방법이 말이 안됩니다. 의식의 표층과 심층을 구분하여 표층 정보만 입에 올리도록 훈련했다는데, 전혀 설득력있게 묘사되고 있지 못했습니다. 훈련 과정이 설명되는 것도 아니고요. 하긴, 자백제라는 비과학적인 약도 마찬가지긴 하네요.
이자와 탈출에 결정적 역할을 한 '프라이데이'의 존재도 이전에 설명 한 번 없어서 뜬금없었습니다. 이자와가 임무를 떠날 때 유키 대령이 <<로빈슨 크루소>> 책 한권을 선물로 주었을 뿐이니까요. 게다가 위기에 처했던 이자와가 동그라미에 십자가 기호가 그려진 암호를 보고 프라이데이의 존재를 깨닫는다는건 솔직히 가관이었습니다. 이 암호는 연금술에서 '미의 여신'을 뜻하고, 미의 여신 비너스는 천문학에서는 금성이며, 이는 일주일 중 제 6일, 즉 '프라이데이'를 가리킨다는데 어이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국가 정보 기관들의 두뇌 싸움은 볼 만 했지만, 그 외의 부분은 설득력이 낮았습니다.

<<마의 도시>>
상하이에 파견된 헌병 중사 혼마 에이지는 상사 오이카와 대위로부터 헌병대 내부 내통자 색출을 지시 받는다. 헌병대의 미야타 중사가 살해당했기 때문이어다.
그 직후, 오이카와 대위의 자택이 폭탄 테러를 당했고 혼마는 본국 '특고' 시절 안면을 텄던 신문기자 시오즈카로부터 제보를 전달받았다. 옛 동급생이자 D 기관원인 대학 동창 구사나기를 상하이에서 목격했다는 제보였다....


D 기관원이나 기관의 작전이 중요하게 등장하지 않는 이색작. 헌병대 중사 혼마의 수사와 추리가 이야기의 핵심인 탓입니다.
특별한 트릭은 없지만, 잘 짜여진 이야기가 돋보였습니다. 오이카와 대위는 아편을 빼돌리다가 미야타 중사에게 들켰고, 그래서 중사를 살해한 뒤 증거 은폐 목적으로 자택을 테러로 위장해 폭발시켰던 겁니다. D 기관은 시오즈카로 변장시킨 조직원을 시켜 혼마가 이 수사를 하게끔 유도했고요.

하지만 혼마의 추리는 증거가 없다는 문제가 큽니다. 오이카와가 도박장을 드나들었고, 빚이 있었다는 정도로 미야타 중사 살인사건 및 폭탄 테러 사건의 범인으로 몰 수는 없으니까요. 그래서 오이카와가 혼마의 질책 정도로 패배를 쉽게 수긍하는건 납득하기 힘들었습니다.
그 뒤 요시노 상병에게 총을 맞고 죽는 장면도 뜬금없었습니다. 요시노 상병은 오이카와에게 지시를 받고 움직이다가 폭발 때 죽고 만 게이 소년의 연인이었다는 설정인데, 설명이 부족했어요.

혼란스러웠던 상하이 분위기와 이런저런 묘사는 그럴싸했고 재미도 있었지만, 결말이 별로였기에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더블 크로스>>
독일인 카를 슈나이더가 소련과 독일 양쪽에 정보를 제공하는 이중 스파이라는 증거를 찾기 위해 D 기관은 졸업 시험을 겸해 도비사키에게 임무를 맡겼다. 도비사키는 슈나이더가 어떻게 암호를 발송했는지 등을 밝혀냈고, 신병을 확보하기 직전 단계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슈나이더는 애인의 집에서 자살을 암시하는 글을 남기고 음독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는데...

범인은 사건 현장을 발견했던 슈나이더의 애인 노가미 유리코였습니다.
사건 당일 그녀의 알리바이는 완벽했습니다. 수 km 떨어진 극단 연습장에서 한창 연극 리허설 중이었고 그녀는 주역이라 연습장을 5분 이상 비우는건 불가능했는데, 차로 집을 왕복하는데는 최소 10분은 걸리는데다가, 슈나이더에게 유서를 쓰게하고 독이 든 와인을 마시게 하는데는 그 이상의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잘 짜여진 알리바이 트릭물 처럼 보였던 설정과 전개에 비해 진상은 보잘것 없습니다. 슈나이더는 미리 독을 넣어둔 와인을 마시고 죽었던 겁니다. 바로 직전에 읽고 소개해드렸던 <<흑마술의 여자>> 트릭과 똑같네요. 유서는 전화를 통해 연극 대사로 위장해 쓰게 했다는, 추리 퀴즈 수준의 트릭이었고요. 노가미 유리코가 자택에 설치해두었던 전화 대신, 사람을 시켜 경찰을 부른 이유 - 유서를 옮겨 놓으려고 - 정도에 대해서만 약간의 추리가 등장할 뿐입니다.
유서(?)에 작게 쓰여져 있던 '더블 크로스'도 슈나이더의 즉흥적인 낙서에 불과하다는게 진상이라 허무했습니다. 그가 양다리를 걸쳤다는 의미였다는데, 그냥 맥거핀에 불과했어요.

오히려 본편 사건보다는 도비사키의 과거,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등을 버리며 홀로 살아가는 스파이가 될 수 없다는 도비사키의 결심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이 결심은 급작스럽게 등장합니다. 이 작품이 장편이었다면, 그래서 그가 노가미 유리코를 심문하면서 애정이 싹텄다던가 하는 식으로 풀어나갔다면 괜찮았을텐데 중간 과정 없이 결심만 등장하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별점은 1.5점. 수록작 중 워스트로 추리물, 스파이물 양쪽 모두 별 가치가 없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