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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05

마안갑의 살인 - 이마무라 마사히로 / 김은모 : 별점 2점

 

마안갑의 살인 - 4점
이마무라 마사히로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무라와 히루코는 마다라메 기관의 자취를 쫓다가 이전 기관의 연구소였던 '마안갑'을 찾았다. 그곳에는 기관에서 연구하던 예언자 사키미가 살고 있었다. 그러나 11월 마지막 이틀 동안 그곳에서 남녀 각각 2명 씩 죽을거라는 사키미의 예언을 두려워한 마을 사람들이 마안갑과 마을을 잇는 유일한 다리에 불을 지른 탓에, 둘은 예지 능력이 있는 여고생 도이로, 기자 라이타, 여행자 오즈 등 여러 사람들과 함께 마안갑에 갇혀 버렸다. 뒤이어 예언대로 기자 라이타는 산사태에 휩쓸리고, 사키미 독살 미수에 이어 도이로가 처참하게 살해되고 마는데....

"시인장의 살인"에 뒤이은 시리즈 제 2작입니다. 

비현실적인 소재에 의한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는 점에서는 전작과 유사합니다. 전작에서의 좀비가, 이 작품에서는 '진짜' 예언자가 등장하니까요. 고전적인 정통 본격물 스타일을 추구한다는 점도 비슷합니다. '클로즈드 서클'에서의 연쇄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외부에서 경찰이나 구조대가 오면 남아있는 사람들 중 범인이 있을게 뻔하니 클로즈드 서클에서의 범행은 불합리한데, 이 범행을 나름대로 설득력있게 풀어낸게 작품의 핵심이기도 하고요. 범인 오즈가 범행을 실행한 이유는 바로, 사키미의 예언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클로즈드 서클이건 뭐건간에 자기가 죽을 수도 있으니, 자기가 죽기 전에 다른 사람들을 죽였던 거지요. 와 정말이지 제가 여태까지 읽어보았던 추리 소설 중에서도 동기의 참신함으로는 몇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듯 합니다. 

완전 범죄를 위해 오즈와 도키노가 서로 다른 성별을 한 명씩 죽이는 교환 살인을 계획했는데, 오즈가 도이로를 살해한 뒤 공범 도키노가 범행을 저지르지 않아서 생겨나는 딜레마도 흥미롭습니다. 도이로가 살해당한 뒤 히루코마저 죽은 것으로 가장하자, 도키노는 죽음의 예언에서 벗어났으니 당연히 사람을 죽이려 할 리 없지요. 하지만 기껏 살인까지 저질렀는데 여전히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해있는 오즈는 필사적일 수 밖에 없고요.

히루코의 추리쇼를 거쳐, 마지막에 사키미가 진짜가 아니었다는게 드러나는 반전도 괜찮았습니다. 그녀는 진짜 사키미를 연구하던 도이로 할아버지의 조수였던 오카자키였습니다. 사키미와 도이로가 도주할 때 대역으로 남겨졌다가 예언자 역할을 떠맡게 되었던 거지요. 다행히 사키미가 예언을 기록한 노트가 있어서, 예언자 행세를 할 수 있었고요. 예언이 다 떨어지자, 자살해서 예언도 맞추고 자신의 신화도 유지하려 했지만 자살에 실패한 뒤 원수와도 같은 도이로 - 자기를 버린 박사와 사키미의 손녀 - 를 죽이도록 상황을 조작했다는 진상도 꽤 그럴싸했습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전작보다 못합니다. 앞서 "'클로즈드 서클'에서 범행을 저지른 동기" 만큼은 말이 된다고 말씀드렸는데, 정작 범행은 정교하지 못한 탓입니다. 죽은 네 명 중 라이타 기자와 구키자와의 사인은 사고로 살해당한건 도이로와 도키노 둘 뿐입니다. 그런데 도이로 사건은 공범 둘이 저질렀다는게 전부입니다. 별다른 트릭은 없어요. 이 정도라면 경찰이나 구조대가 오면 바로 범인이 밝혀졌을겁니다. 아무래도 어린 초등학생 아들이 포함된 시시다 부자나 도이로의 숭배자 구키자와가 범인일 가능성은 낮으니 단순 소거법에 의해서도 오즈와 도키노가 공범일 가능성이 가장 높은 셈이고요. 

물론 다른 방에 둘만 있었다는 사키미와 핫토리가 공범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저도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했고요. 하지만 핫토리는 작중에서 건물이나 가구 정도의 비중으로, 거의 언급되지 않습니다. 그런 그녀가 범인이라는건, 추리 소설로는 반칙일 수 밖에 없습니다. 

도이로 사건의 단서로 제공되는 박살난 시계 역시 공정한 단서는 아닙니다. 독자는 왜 시계를 부쉈는지를 직접 보고 판단할 수 없으니까요. '시계 바늘 두 개가 모두 비슷한 위치에서 부서져 있었다' 정도의 묘사만으로 두 바늘이 겹쳐진 시간에 범행이 일어났다는걸 추리해내는건 어렵습니다. 방음이 철저한 방과 같은 작위적인 무대 설정도 거슬렸고요.

도키노 사건에서 창을 든 도키(로 보였던 흰 천을 뒤집어 쓴 누군가)가 달아나면서 젖은 수건을 밟아 발자욱을 남겼는데, 젖은 발자욱은 이전에 찍어 놓았고 범인은 맨발로 자기 방으로 이동했다는 트릭은 너무 간단해서 실망스러웠습니다. 창은 벽지를 말아 만든 소품이었다는 것도 예전 "미스터리 탐정 야쿠모"에서 접했던 트릭이고요. 한마디로 말해 추리 퀴즈 수준에 불과했어요. 

그러나 트릭보다도 더 큰 문제는 이 범행이 일어난 이유입니다. 범인 오즈는 앞서 발생한 딜레마 - 도키노는 사람을 죽일 필요가 없다 - 로 도키노와 다투다 우발적으로 그녀를 빈사 상태에 빠트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녀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기 위해 이 범행을 저질렀는데, 도키노를 괴한으로 몰아봤자 도이로를 살해하려면 공범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녀가 도이로를 살해할 수 없었던건 명백한 사실이니까요. 도키노를 범인으로 몰아봤자 그녀가 깨어난 뒤 사실을 증언하면 오즈가 빠져나갈 방법은 없으니 도키노를 죽일 필요가 있는데, 그렇다면 이런 유치한 조작을 벌일 필요는 반대로 없어져 버리고 맙니다. 차라리 누구든 범인이 될 수 있는 상황이 더 나으니까요. 아니면 생존자들을 다 죽이던가....

그 외에도 헛점은 곳곳에서 눈에 뜨입니다. 사키미 자살 미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살 실패 후, 도이로를 죽이기 위해 꽃을 흩뿌렸다는 설정부터 납득이 가지 않았습니다. 도이로가 그녀의 죽음을 예지한다는 보장이 일단 없거든요. 모든 사건을 예지하고 그림을 그리는건 아닐테니까요. 사키미가 죽은건 아니니 그림을 안 그릴 수도 있고요. 게다가 그림에 꽃까지 그린다는건 더더욱 예상할 수 없었습니다. 또 오즈가 사키미 방 밖에 꽃을 뿌려 놓은 것 역시 시간대를 겨우 맞춰서 발생한 우연이라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여러가지 장치와 단서, 복선으로 정교함을 주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지만 단점도 많습니다. 다소 무리한 설정들도 눈에 뜨이고요. 시리즈를 계속 읽을 필요가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

2010/09/21

얼어붙은 섬 - 곤도 후미에 / 권영주 : 별점 3점

얼어붙은 섬 - 6점 곤도 후미에 지음, 권영주 옮김/시작

찻집 호쿠사이야를 운영하는 아야메와 나쓰코, 찻집 단골손님 토끼군, 나쓰코의 애인 무쓰군 등 여덟 명이 여행을 떠났다. 세토 내해의 무인도 별장에 도착한 다음 날, 아야메의 정부인 도리코의 아내 나나코가 밀실 안에서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이후 그들은 연쇄 살인의 회오리에 휘말리는데...

제4회 아유카와 데쓰야 상을 수상한 곤도 후미에의 데뷔작입니다. 줄거리만 보아도 알 수 있듯, 정통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물입니다.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구태의연하고 작위적인 설정이기는 하지만, 진부하고 뻔한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여성 작가다운 섬세한 심리 묘사에 더해, 화자가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서술 트릭적인 장치가 녹아 있는 점이 독특했습니다. 또한, 명탐정이 등장하지 않는 것도 현실적이라 좋았습니다. 어중이떠중이들로 구성된 여행객들 사이에 명탐정이 한 명 있다는 설정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요.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트릭도 괜찮은 편입니다. 첫 번째 밀실 살인은 간단하지만 효과적인 트릭이었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사건의 트릭도 논리적으로 타당했습니다. 또한, 이야기의 흐름과 잘 맞아떨어지는 현실성이 돋보였으며, 단서 제공도 매우 공정해서 좋았습니다.

하지만 일행이 섬에 갇히게 된 가장 큰 이유가 무쿠 씨의 독단적이고 즉흥적인 행동과 예상치 못한 날씨 때문이었다는 점, 이후 벌어진 살인 역시 우발적이고 운에 의존하는 측면이 많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건의 동기가 애매했습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왜 죽인 걸까?" 하는 의문이 먼저 들 정도였습니다.

아울러 앞서 이야기한 트릭 역시 결국 정상적인 경찰 수사가 이루어졌다면 쉽게 밝혀질 수 있는 것들이었습니다. 만약 첫 번째 나나코 살인 사건 발생 후 일행이 당황하지 않고 곧바로 경찰을 불렀다면? 구부러진 열쇠라는 단서, 모두의 알리바이와 동기를 조합하면 범인은 금방 밝혀졌을 겁니다. 그렇다면 범인이 굳이 무인도까지 와서 사건을 벌인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죠. 차라리 도시에서 사고로 위장하는 것이 훨씬 손쉬웠을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 특유의 작위성을 극복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낡은 설정을 뛰어넘을 만한 특별한 요소를 찾기도 어려웠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리소설로서의 완성도는 괜찮은 편입니다. 다른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물과 달리 트릭에 매몰되지 않고 이야기 전개를 이치에 맞게 풀어가는 솜씨는 데뷔작이라는 점을 잊게 만들 정도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작가의 다음 작품도 기대해 보겠습니다.

2025/12/27

어차피 곧 죽을 텐데 - 고사카 마구로 / 송태욱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탐정 나나쿠마 스바루와 조수 야쿠인 리쓰는 시한부 생명의 환자들만 모인 '하루살이 회' 정기 모임 초대를 받아 모임 회장 자야마 교이치의 외딴 별장으로 향했다. 미스터리 애호가인 회원들에게 사건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함이었다.

회원인 자야마, 지로마루, 롯폰마쓰, 가모, 하시모토, 하루나와 함께 즐거운 저녁을 보낸 다음 날, 홀 벽에 걸린 하루나의 그림이 훼손되었고 가모가 사망했다. 의사인 자야마와 지로마루의 검안으로 병사로 추정되었지만, 야쿠인은 타살일 수 있다 여기고 나나쿠마와 조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 날 나나쿠마마저도 죽은 채 발견되었다...

제 23회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대상의 문고 그랑프리 수상작입니다. 작가의 데뷰작이기도 하고요. 밀리의 서재에 업데이트 되어서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특징이라면 현대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정통 본격 미스터리의 ‘클로즈드 서클’ 형식을  도입했다는 점입니다. 외딴 별장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 기묘한 참석자들, 밀실이라는 공간적 설정 등은 전형적이지만, 외부와의 연락이 단절되지 않았고 피해자가 자연사(병사)로 보이도록 꾸며서 과학 수사나 경찰의 개입이 일시적으로 미치지 않는다는 설정이거든요. 작중 표현 그대로 ‘어정쩡한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아요. 

나나쿠마 사건은 별게 없지만, 가모 사건은 정통 본격물다운 트릭이 사용되고 있기도 합니다. 사체 발견 당시, 인슐린을 이용한 저혈당성 쇼크 살인이라는 가능성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이는 나나쿠마의 조사로 곧바로 반박됩니다. 가모가 부착하고 있던 혈당 측정기 데이터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쿠라코는 나나쿠마가 죽은 뒤, 데이터는 가모 것이 아니라 나나쿠마의 것이었다고 추리합니다. 그녀의 측정기가 가모와 동일 기종이었거든요. 가모는 나나쿠마에 의해 인슐린 쇼크로 살해당했고, 이를 나나쿠마가 모든 사람들 앞에서 아니라고 증명하기 위해 조작된 데이터를 보여주었다는 추리이지요. 밀실은 데이터를 보여주려고 가모의 짐을 뒤질 때(측정기를 찾기 위해서) 몰래 가지고 있던 가모 방 열쇠를 가방 안에 있었던 양 꺼내 들었던 것이고요. 현실적이라서 그럴싸하게 느껴졌습니다.

또 두 살인 사건 모두 "어차피 곧 죽을 사람을 왜 살해했나"라는 기묘한 상황에 더해, 사실은 가모와 나나쿠마가 모두 죽은 척 했었고 이는 대충인 검안과 사체 이동 등에서 드러난다는 등 진상 부분에서도 본격물적인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이외에도 나나쿠마가 휠체어를 탄 할머니였고 야쿠인은 그녀의 손자라는 점이 드러나는 장면은 서술 트릭의 맛을 느끼게 해 주고요.

하지만 앞서 언급했던 사쿠라코의 추리를 한 번 더 꼬아서 만든 반전과 진상은 억지스럽습니다. 무엇보다 핵심이 되는 가모 게이타 사건의 진상이 이상합니다. 나나쿠마가 살해한게 아니라 야쿠인이 인슐린을 투약해 죽이려 했던게 진상인데, 그렇다면 혈당 측정기 데이터가 변하지 않았다는 설명과 충돌합니다. 혈당이 실제로 떨어졌다면 데이터가 변했어야 하고, 변하지 않았다면 야쿠인은 무언가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렸어야 했으니까요. 의대생 출신이라는 설정까지 고려하면 당연합니다. 자신의 인슐린 투약이 효과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단순 병사로 믿고, 다음 날 나나쿠마 살해까지 저지른다는 건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밀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쿠인이 가모에게 인슐린을 투약한 뒤, 가모가 스스로 방을 잠갔다는 설명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주사에 이상함을 느꼈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피해자가 방을 잠글 이유가 있을까요? 인슐린이 가짜라는걸 나나쿠마가 미리 알려주어서 생명에 지장이 없다는건 알았더라도, 문을 잠그면 밀실이 되는데 혹시라도 죽으면 자연사로 보일 수 있으니 잠그지 않는게 당연합니다.

가모 사건 때 하루나의 그림을 훼손한 부분도 설명이 부족합니다. 이미 나나쿠마가 그림을 본 상황에서, 그리고 모델인 사쿠라코가 멀쩡히 살아있는 상황에서 그림만 훼손한다는건 말도 안되기 때문입니다. 나나쿠마를 어차피 살해할 생각이었으니까요. 게다가 가모와 나나쿠마를 '병사'처럼 보이게 만들 생각이었다면, 그림을 훼손하는 실질적인 범행을 저지른 건 자칫 경찰 수사의 꼬투리가 될 수도 있으니 하면 안되는 짓이었어요.

그리고 이 모든 사건이 지로마루가 손녀의 죽음 진상을 밝히기 위해 꾸민 연극이었다는 설정도 혼란스럽습니다. 그렇다면 자야마의 ‘하루살이 회’는 실재했던 것일까요? 자야마는 수년 전부터 블로그 활동을 해 왔던 인물인데, 그 모든 게 연극이었다는 설정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큰 연극을 벌이는 상황에서 정작 가모의 방에 CCTV를 장치해 야쿠인의 범행을 찍으려는 시도를 하지 않은 이유도 설명되지 않고요. 이래서야 무엇을 위한 연극인지도 잘 모르겠어요.

전개나 등장인물들의 설정도 썩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나나쿠마 1인칭이 섞이는 묘사는 전개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합니다. 나나쿠마와 사쿠라코의 말투도 의도된 유머일 수 있겠지만, 지나치게 무례하게 느껴졌고 몰입을 방해합니다. 마지막에 하루나가 야쿠인을 독살하는 듯한 묘사 역시 왜 필요한지 알 수 없습니다. 동기가 전혀 없으니까요. 그림을 훼손했기 때문에? 하루나 본인 스스로 습작에 불과해 미련이 없다고 했으니 이는 이유가 될 수 없지요.

정통 본격물을 현대 무대의 클로즈드 서클에 접목하려는 시도는 나쁘지 않았고, 몇몇 볼만한 장면이 없지는 않지만 전체적인 완성도는 한참 모자랍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수상작은 기대에 미쳤던게 없었는데, 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네요. 앞으로 더 읽어볼 일은 없겠습니다.

2026/02/06

십각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 양억관 : 별점 4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외딴섬 츠노시마의 '십각관'에 K 대학교 미스터리 연구회 회원 일곱 명이 일주일 일정으로 머물게 되었다. 회지 작업 등을 위해서였다. 십각관은 괴짜 천재 건축가로 유명했던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건물로 그는 반 년 전에 아내, 고용인과 함께 십각관 옆 청옥부에서 불타죽었다. 곧이어 연구회 회원들도 오르치부터 한 명 씩 살해당하기 시작했다.

한편 육지에 남았던 전 연구회원 가와미나미는 시마다라는 지인의 도움으로 나카무라 세이지 사건의 진상 조사에 나섰다.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냈다는 괴문서를 받은게 계기였다. 여기에는 같은 연구회원 모리스도 힘을 보태는데...

아주 오래 전, 20년도 더 전에 학산 문화사 출간본으로 읽었던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한스 미디어에서 재간된 버젼으로 '밀리의 서재'에 업데이트되었길래 옛 추억도 떠올릴 겸 다시 읽어보았습니다.

이 작품은 작가의 데뷰작입니다. 엄청난 성공으로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으로 시작된 일본의 '신본격 미스터리'라는 장르를 일으켰던 작품이지요. 클로즈드 서클에서 일어나는 연쇄 살인극이라는 고전적 설정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젊은 작가가 젊은 대학생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괴짜 천재가 만들었다는 기묘한 저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그려낸 덕분에 지금 읽어도 여전히 흥미로운 구석이 많습니다. 특히 '십각관'은 정말 후속 시리즈가 이어질 수 있는 멋진 아이디어였어요.

추리적으로도 높은 완성도를 자랑합니다. 츠노시마에서 일가가 불타 죽었던 괴짜 천재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관련되었던 반 년 전 사건부터 볼거리가 많습니다. 실종된 정원사가 정말 범인이 맞는지, 나카무라 세이지의 아내 가즈에의 왼손은 왜 잘려 나갔는지 등 수수께끼가 가득하니까요.

섬에서 일어난 살인의 트릭은 겉보기에는 단순합니다. 마스터 키를 이용해 방을 열고, 음료나 담배에 독을 넣는 방식이 중심인 탓이지요. 그러나 이 사건에서 트릭보다 더 중요한 건 범인의 정체입니다. 연구회에서 닉네임 ‘밴’을 쓰던 범인은, 육지에서 가와미나미, 시마다와 함께 수사에 참여했던 모리스 교이치였기 때문입니다! 모리스가 밴이었다는게 드러나는 장면은 정말로 대단한 충격을 안겨다 줍니다. 그는 고무보트를 이용해 육지와 섬을 오가며 연쇄 살인을 저질렀고, 범행을 엘러리가 저지르고 자살한 것처럼 위장해 완벽한 완전 범죄를 저지르는데 성공했던 겁니다. 
'십각관'이라는 장소가 사건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는 못하지만, 모든 컵이 십각형인데 딱 한 개의 컵만 십일각형이었다는걸 독살에 활용한 아이디어도 괜찮았어요.

트릭이나 단서의 제시도 공정한 편입니다. 섬과 육지를 보트로 쉽게 오갈 수 있다는건 진작부터 제시되는 정보이며, 루르가 살해당한 현장의 발자욱을 토대로 엘러리가 펼치는 추리는 결정적이니까요. 여기서 루르는 선착장에서부터 쫓아온 범인에게 살해당했고, 범인은 선착장으로 사라졌다는게 명백히 드러나거든요.
이런 여러 정보와 단서가 있음에도, 초반부터 나카무라 세이지가 살아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독자에게 심어주어서 범인은 학생들 중 한 명이 아니라 나카무라 세이지나 나카무라 고지로일거라는 생각을 독자에게 품게 만드는 전개도 좋습니다. 

아울러 미스터리 연구회 출신 작가다운, 현대 무대 탐정 소설은 클로즈드 서클 물을 쓸 수 밖에 없다는 등의 추리 소설에 대한 여러가지 이론들의 등장도 반가웠던 부분입니다.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워드프로세서로 쓴 것에 대한 분석, 십각관 사건에 대한 연구회원들의 추리 등 소소한 추리들도 재미있었고요.

다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우선 탐정역인 시마다 기요시는 이 작품에서는 하는게 별로 없습니다. 모리스 교이치의 완전 범죄극이 이야기의 핵심이기도 하지만, 여러모로 시리즈 탐정이 될 정도의 매력은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리고 모리스의 완전 범죄 계획도 큰 구멍이 있습니다. 가와미나미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협박장을 받고 모리스를 만나 알리바이를 만들어 주는게 핵심인 탓입니다. 가와미나미가 모리스의 전화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수사 활동에도 나서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까?에 대한 답이 없어요. 어떤 식으로든 알리바이를 만들기야 했겠지만, 최소한 중요한 첫 날 알리바이는 날려 버렸을 가능성이 높았습니다. 초반,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나카무라 세이지가 보낸 듯한 편지 역시 범행 후 엘러리가 보냈다고 주장하기는 어려워 보이고요.
동기도 빈약해요. 치오리가 술을 많이 먹어서 죽었다는건 분명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렇다고 그 술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죽일 생각을 품는다? 별로 와 닿지 못합니다. 강제로 술을 먹이는 게임이라도 했다면 모를까요.

또 미스터리 연구회 소속이라는 설정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이 너무 쉽게 살해당한다는 점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의심 없이 담배를 피우거나 음료를 마시는 장면, 홀로 건물 밖으로 나서는 장면 등은 미스터리 독자답지 않은 행동이어서 당황스러웠습니다.
치오리와 모리스가 연인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치오리가 나카무라 세이지의 딸이라는 걸 오르치조차 몰랐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르치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섬에 오지도 않았을테고, 처음에 연쇄 살인에 대한 의심이 싹틀 때 이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리도 없지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모리스가 자신의 범행 계획을 병에 담아 바다에 띄우고, 훗날 그 병을 주워 자백하는 구조는 지나치게 감성적입니다. 완전 범죄를 달성하기 위해 복수심으로 똘똘 뭉쳐 팽팽한 긴장을 유지하던 범인의 감성과는 너무 다른,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부분이었어요. 젊은 작가의 감정 과잉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리고 가장 크게 느꼈던 불만은 번역입니다. 제가 20여년 전에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때, 모리스가 첫 등장하는 장면에서는 '모리스'라고만 소개되었습니다. '모리스 교이치'라는 전체 이름이 아니라요. 그래서 '모리스'도 다른 연구회원들과 마찬가지로 유명 추리 작가의 이름을 딴 닉네임이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모리스가 밴 다인이었다는게 드러나는 마지막 장면의 충격이 더 컸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번역 버젼은 그런 맛은 부족합니다. 당연하지요. 모리스 르블랑과 밴 다인은 같은 사람일 수 없지만, 모리스 교이치는 밴 다인일 수 있으니까요...

그럼에도 클로즈드 서클의 정수를 보여주면서도 독자까지 완벽하게 속이는 완벽한 완전 범죄물이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계속 회자되고, 미디어 믹스가 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지요. 추리소설을 좋아하신다면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2024/11/29

십계 - 유키 하루오 / 김은모 : 별점 2점

십계 - 4점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예대 입시생 리에와 그녀의 아버지 오무로는 오랫만에 큰아버지 슈조의 소유였던 에다우치지마섬을 찾았다. 슈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리조트 개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일행은 개발회사, 부동산 업자, 건축가 등을 포함해 모두 9명이었다.
그런데 섬에서 대량의 폭탄 재료들이 발견되었고, 그날 밤 부동산 업자 오사나이가 살해당했다. 범인은 열가지 규칙('십계')를 남긴 뒤, 앞으로 사흘 동안 생존자들에게 섬을 떠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일행은 십계를 지키며 사흘을 버티려고 했지만, 슈조의 친구였던 야노구치, 부동산 업자 후지와라가 차례로 살해당하고 마는데...

유키 하루오의 장편 소설 "십계"는 그의 전작 "방주"와 같은 클로즈드 서클물로, 특유의 반전 매력을 내세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 중 하나는 짧은 분량입니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길이로, 빠르게 읽고 즐기기 좋은 점이 매력적입니다. 또한, 전작 "방주"보다는 설득력 있는 무대 설정이 돋보입니다. 부유한 개인의 취미 생활이었던 무인도라는 설정은 현실성은 물론이고,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제한된 공간과 상황에 대한 설득력을 충실히 전해줍니다.

추리 소설로서의 가치도 높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 단서가(그런대로) 독자에게 공정히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특히 '범인은 왜 자신의 발자국이 아니라 야노구치의 발자국만 지웠을까?'라는 핵심 단서를 통해 결말로 이어지는 추리가 좋았습니다. 야노구치가 범인의 신발을 착각해서 신었기 때문이며, 이렇게 착각할만한 신발은 후지와라의 신발밖에 없어서 범인은 후지와라이다!라는 건데, 아주 합리적이었어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방주"와 달리 사건의 템포가 느리며, 긴장감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방주"에서는 제한 시간 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모두가 죽을 수 밖에 없는 반면, "십계"는 제한 시간 내에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 조건만 지키면 모두가 생존할 수 있기 때문에 긴장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범인이 약속을 어기고 모두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는 하는데, 이는 독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작가가 애써 제시한 '십계'라는 공정한 룰이 깨지면, 본격물이라는 작품의 정체성을 해칠테니까요.

또 아야카와가 진범임을 반전처럼 밝히는 마지막 장면은 추리물로서는 불공정합니다. 애초에 아야카와는 리에와 오사나이가 살해당한 밤에 같은 방을 썼기에 알리바이가 성립되었었고, 심지어 리에는 주요 화자로 등장하여 아야카와의 알리바이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리에도 그녀가 범인이라는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설명하는건 반칙입니다. 차라리 아예 몰랐다고 했더라면 모를까요. 아울러 리에가 아야카와의 범행을 숨긴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점도 독자에게 혼란을 줍니다. 최소한 아야카와가 범행 이유- 폭탄을 만든 일당이 그들을 죽이려 해서 먼저 죽였다! -를 설명하고 같은 편이 되기를 설득했다는 설정은 필요했습니다.

작위적인 전개도 눈에 띕니다. 오사나이의 살해 이후 야노구치와 후지와라가 차례로 아야카와의 꾀임에 빠져 홀로 행동하다 살해당했다는 설정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본인이 유력한 다음 희생자라는 점이 명확한 상황에서, 알리바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야카와를 쉽게 믿고 행동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섬에 폭탄 재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점 역시 작 중에서는 실수로 설명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어요.

전작보다는 낫다고 해도 비현실적인 요소 역시 여전합니다. 예를 들어, 무인도에 엄청난 양의 폭탄이 있다는 설정이 대표적입니다. 왜 폭탄을 만들었는지 설명도 없고요. 중요한 연결고리가 끊겨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캐릭터 역시 평면적으로, 등장인물 대부분이 다른 작품에서 자주 보아왔던 스테레오 타입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매력이 부족합니다. 특히 탐정이자 천재 범죄자인 아야카와는 흥미롭기보다는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결말에서 리에에게 반 협박식으로 건네는 마지막 인사도 영 별로였고요. 다른 인물들도 건축사 노무라 씨 정도를 제외하면 특별한 묘사가 없어서 그들이 처한 위급한 상황이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전작만큼의 화제를 불러오지 못했는데, 읽어보니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전작을 정 반대로 비틀기는 했는데, 단점은 거의 그대로이고 좋았던 장점마저 희석되고 말았네요.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6/10/30

중공(中空) - 도리카이 히우: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수십 년에 한 번 피는 '대나무 꽃'을 촬영하기 위해 식물 사진가인 네코타 나츠미와 자연 관찰가 도비야마는 행상인 료안의 도움으로 오스미반도 남단에 위치한 '치쿠모 마을(竹茂村)'을 방문했다. 이곳은 단 7가구의 주민들이 '노장사상(장자의 사상)'을 생활 규범으로 삼아 숨어 살듯 지내는 매우 폐쇄적인 마을로, 20년 전 끔찍한 연쇄 살인 사건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들이 방문한 직후 마을에서 키우던 동물들이 화살에 맞아 죽더니, 결국 주민 중 한 명인 메구미 돈이 '목 없는 시체'로 발견되고 만다. 이후 미쓰루, 료안 등이 차례로 죽지만 마을 공동체가 경찰의 수사마저 거부하자, 도비야마와 네코타가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하는데...

도리카이 히우의 데뷔작으로, 제21회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 우수상 수상작입니다. 원서로 읽었습니다. 이전에 읽었던 작가의 작품인 "죽음의 모래시계"가 영 별로였기에 기대가 크지 않았는데, 생각보다는 좋았습니다.

폐쇄적인 마을에서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은 추리소설에서 흔하디흔한 설정입니다.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의 전형적인 패턴이니까요. 치쿠모 마을은 장자의 사상을 따르는, 일종의 가족 같은 공동체입니다. 완벽하게 닫힌 공간은 아니라는 차이는 있지만, 용의자가 제한된 상황에서 범인을 밝혀내는 '후더닛물'이라는 점에서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의 전형을 충실히 따릅니다.

추리적으로는 볼 만한 점이 많습니다. 메구미 돈의 참수, 미쓰루의 의문사, 료안의 살인 등 사건이 풍성합니다. 메구미 돈의 목은 누가, 왜 잘랐는지, 모두가 같은 술잔을 돌려 마셨는데 왜 미쓰루만 독살되었는지 등의 수수께끼도 흥미롭습니다. 탐정 역할의 도비 선배가 밝혀내는 진상은 다음과 같습니다.

메구미 돈은 미쓰루의 약혼자 아키라에게 최면을 걸어 제정신을 되찾게 하려 했습니다. 아키라가 어린 시절 참극을 일으킨 뒤 자살한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로 동물들을 죽였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최면술 도중 아키라에게 빙의한(?) 다케시의 망령이 돈에게 화살을 쏘고 맙니다. 돈은 고통을 끝내기 위해 미쓰루에게 자신의 목을 베어 달라고 부탁했고, 함께 최면에 걸렸던 미쓰루가 그 말에 따라 목을 베었지요.
미쓰루는 이 사건 이후 죄책감으로 스스로 독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술잔을 이용한 독살 사건은 애초에 없었던 셈입니다. 그러나 돈의 친구 료안이 미쓰루를 구하려고 입에 손을 넣어 토하게 한 행동 때문에, 아키라는 료안이 미쓰루를 독살했다고 오해합니다. 결국 아키라는 료안을 살해합니다.

이러한 진상을 밝혀내는 근거도 작품 곳곳에 제시되어 있습니다. 미쓰루가 들고 다니던 기묘한 봉의 정체가 바람총이었다는 점, 메구미 돈이 소장한 최면술 관련 서적 등이 대표적입니다. 네코타가 말한 '해석'을 료안이 할복할 때의 '가이사쿠'로 오해했던 대목도 재미있는 단서이고요.

배경 설정도 인상적입니다. 특히 장자의 사상을 사건에 연결한 발상이 독특합니다. 지도자인 '소' 가문은 장자의 직계 후손으로 여겨져 마을에 군림해 왔고, 소 가문의 대를 잇는 문제가 사건의 원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죽림칠현에서 따온 주민들의 성씨 같은 세부 설정도 탄탄하고요. 또 이 원인을 설명하기 위해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해 장자의 사상을 소개하는데, 이해하기 쉽게 쓰여 있어 마음에 듭니다. 대나무로 둘러싸인 치쿠모 마을의 폐쇄적인 분위기 묘사도 좋습니다. 대나무 꽃에 대해서도 몰랐던걸 많이 알게 되었고요.

그러나 핵심 반전은 화자인 네코타가 아키라를 남자로 착각한 데 크게 의존합니다. 미쓰루가 성인이 되는 날짜도 아닌데 성인 대접을 받는 이유는 결혼밖에 없고, 그렇다면 그 상대는 아키라뿐이라는 설명에는 무릎을 치게 됩니다. 그 외에도 네코타가 착각한 이유는 나름대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화자의 착각에 지나치게 의존한 반전이라 반칙처럼 느껴집니다. 아키라가 중요한 모임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것도 작위적이에요.

사건의 진상에도 비현실적인 부분이 많습니다. 최면술로 아키라의 정신을 되찾게 한다는 설정부터 무리입니다. 메구미 돈이 고통을 멈추기 위해 목을 베어 달라고 부탁했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더구나 사람의 목을 단칼에 베는 일이 그렇게 간단할 리도 없습니다. 장자의 후손을 모신다는 이유로 마을 전체가 장자의 사상에 지배된다는 설정도 대담하지만 현실성은 떨어집니다. 마지막에 아키라가 네코타 일행을 살해하려 한 이유도 불분명해요. 둘만 죽이면 소 가문의 후계자로 어떻게든 마을에 군림할 수 있다고 여겼던걸까요?

그래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개연성에는 문제가 있지만, 기묘한 수수께끼와 독특한 배경을 좋아하는 추리소설 독자라면 읽어볼 만합니다.

2020/06/13

미스테리아 23호 - 미스테리아 편집부 : 별점 2점

미스테리아 23호 - 4점
미스테리아 편집부 지음/엘릭시르

엘릭시르에서 출간하고 있는 국내 유일의 추리 전문 잡지로 2019년 3월 출간된 과월호입니다. 특집이 "명탐정 코난"이라 예전부터 관심이 있었는데, 알라딘에서 중고를 발견해서 저렴하게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실망에 가깝습니다. 과월호로 산게 다행이다 싶더군요. 특집인 "명탐정 코난"이 전혀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명탐정 코난"이 "소년탐정 김전일"의 대 히트로 기획되어, 당시 신인 만화가였던 아오야마 고쇼에 의해 창작되었다는 첫 출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관련된 모든 정보를 소개해주고 있는 구성은 나쁘지는 않습니다. 문제는 나무위키 등 인터넷 상에 있는 각종 정보들과 별 차이가 없다는 점입니다.
"코난" 속 주요 등장인물 이름과 지명의 유래에 대한 소개가 대표적입니다. 주요 등장인물마다 이 특집 전체 분량만큼을 할애하고 있는 나무위키에 비하면 턱도 없는, 그야말로 기본 정보만 알려줄 뿐이라 무척 실망스러웠어요.
만화 속 에피소드를 클로즈드 서클, 밀실, 암호, 다잉 메시지, 독살, 마술사, 알리바이, 미스터리 투어, 물리 트릭의 8종으로 분류하여 소개하는 내용은 더 별로에요. 일단 분류부터가 말이 안되지요. 클로즈드 서클과 미스터리 투어는 이야기의 '상황' 이고, 밀실, 암호, 다잉 메시지, 알리바이, 물리 트릭은 '트릭' 이며, 독살은 방법, 마술사는 직업이라 아무리 보아도 동일한 수준의 분류가 아닙니다. 주요 소재를 끄집어 내었을 뿐입니다. 이런 식으로 키워드를 도출한 뒤 관련된 추리 소설 등을 풀어놓는건 그다지 어려울 것 같지도 않고요. '마술사'를 이야기하는데 마술사 탐정인 그레이트 멀리니 인용이 없는 등 내용도 부실합니다. 이런건 아무래도 저자 편의에 따른 특집 기사 페이지 보충용 글 뭉치가 아니었나 싶은 의심이 듭니다. 저만 해도 이런 키워드에 '변장'이나 '축구' 를 추가하여 이야기를 풀어내는건 금방 할 수 있거든요. 변장이 등장하는 범죄물은 수도 없고, 축구는 "파리의 밤은 깊어" 정도만 당장 떠오르지만, 다른 스포츠 물도 인용하면 충분히 한 꼭지 글은 만들 수 있으니까요.
이렇게 인터넷을 통해 쉽게 알 수 있는 정보, 무의미한 키워드 도출말고 코난에 대해 의미있는 컬럼이나 분석이 실리는게 더욱 좋았을겁니다. 추리 만화계 전반의 흐름과 함께 코난이라는 작품의 위치를 짚어주어도 좋았을테고요. 이 특집은 구태여 구해 읽을 필요없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특집 기사 외에도 책 소개라던가, 드라마 작가인 도현정 작가 인터뷰도 이번 호는 별로 재미가 없었습니다. 도현정 작가 인터뷰는 두 번째 핵심 기사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분량이기는 한데, 드라마들 전부를 보지 못했고 딱히 관심도 없어서, 드라마 중심으로 인터뷰가 이루어지는 내용은 읽어도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너무 많았어요.

하지만 재미있는 기사와 글이 없는건 아닙니다. 와카타케 나나미의 "헌책방 어제일리어의 사체" 속 음식들을 작품과 함께 재미나게 소개하는 정은지 작가의 컬럼은 언제나처럼 포만감을 주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법의학을 통해, 상세한 과학 수사를 통해 진상을 밝혀낸 과거 사건을 소개해 준다던가, 옛 사건을 기록한 논픽션들도 마음에 드는데 이 중에서도 1950년대 말, 한국 최초의 텔레비전 방송국 HLKZ의 화재 사건은 몰랐던 사건이라 아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보험금을 노린 고의 방화인지, 정말 실수인지, 누군가의 음모인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는 결말도 재미있었어요.
"겨울 여자"를 쓴 조해일의 범죄 소설 "갈 수 없는 나라"에 대한 글도 인상적입니다. 대중 소설의 1인자가 추리, 범죄 소설의 수법을 차용하여 사회파스러운 작품을 일찌기 발표했었지만, 작가 스스로도 한계를 느낀 범작에 머무른 이유를 비교적 정확하게 서술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해방 후 20세기까지 한국 추리 소설의 한파가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었는지를 유추해 볼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에 수록된 소설들도 나쁘지 않습니다. 그 중에서도 한국 작가 송시우의 "누구의 편도 아닌 타미"는 엄지 척! 입니다. 작가의 단편집에 등장했던 서행물산 총무부 과장 임미숙이 등장하는 시리즈 단편인데 일상 속에서 벌어진 비일상적인 상황과, 그 속에서 빚어진 범죄를 일반인 임미숙이 해결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서행물산의 문제아 신입사원 추예나의 집을 찾아간 임미숙이, 그녀의 집에서 나타난 수상한 남자의 정체에 대해 궁금해하다가 추예나의 건방진 전화를 받고 진상을 깨다는 부분이 백미에요. 간단한 암호 트릭인데, 그 수준이 높지는 않지만 그래도 설득력은 충분했습니다. 다른 시리즈 작품을 꼭 찾아 읽어봐야겠어요.

실리아 프렘린의 "정말 필요한 경우"는 오싹, 불쾌하면서도 서늘한 반전이 있는 일종의 '기묘한 맛' 류의 작품입니다. 80이 넘은 독신 노처녀가 공짜 전화를 놓는게 위험하다고 말한 이유를 그리고 있는데, 앞 부분의 복선과 함께 하는 반전은 꽤 그럴싸 했습니다. 빼어나지는 않아도, 평균은 되는 좋은 작품입니다. 

마지막의 "가스등"은 히치콕 영화로 유명한 작품 시나리오를 3부작으로 나누어 1부를 싣고 있는데, 영화를 한 번 찾아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흥미진진하더군요. 굉장히 오래되었지만 서스펜스만큼은 명불허전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입니다. 다른 장점들이 없는건 아니지만 특집 때문에 구입했는데, 특집이 마음에 들지 않으니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마음에 들었던 논픽션들만 별도로 출간되기를 기다리는게 훨씬 낫아 보이네요.

2023/09/29

방주 - 유키 하루오 / 김은모 : 별점 2.5점

방주 - 6점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아래 리뷰에는 진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슈이치는 대학 동창들, 그리고 사촌형 쇼타로와 함께 유야의 별장에 놀라왔다가 유야가 발견했다는, '방주'라 불리우는 거대한 지하 시설을 찾았다. 일행은 버섯을 따러 왔다가 길을 잃었다는 야자키 가족과 하룻밤을 '방주'에서 보냈는데, 지진 탓에 그만 갇히고 말았다. 
지하에서부터 물이 차올라 일주일 안에 탈출해야 했지만, 방법은 입구를 막은 돌을 떨어트리는 것 뿐이었다. 하지만 돌을 떨어트린 사람 혼자 방주에 남게 되는 문제가 있었다. 마침 유야가 살해되었고, 일행은 유야를 죽인 범인을 방주에 남도록 하자는 암묵적인 동의를 이뤘다. 
그러나 증거가 없어 시간이 흘러가던 차에, 사야카와 야자키도 차례로 살해당했다. 그리고 최후의 순간, 쇼타로가 추리쇼를 벌여 범인을 밝혀냈다.

2022년 '주간문춘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 2023년 '본격미스터리 10' 2위에 선정되는 등 최근 가장 뜨거운 작품. 추석 연휴를 맞아 읽어보았습니다. 찬사를 받은 이유는 바로 알겠더군요. 일반적인 클로즈드 써클 (클로즈드서클) 장르의 틀을 완전히 깨버린 덕분입니다. 이렇게 닫힌 공간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이 벌어지고 이를 해결하는 이야기는 한, 두편이 아닙니다. 산장이나 섬같은 고전적인 장소에서 현대적인 빌딩이나 기묘한 이공간 등으로 장소도 확장되어 왔고, 고립되는 이유도 폭설이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에서 정전 등의 현대적인 이유, 특수한 집단이 납치하여 게임을 벌이거나 좀비가 등장하는 식의 특수 설정까지 다양한 상황을 선보여 왔고요.
그런데 이 작품은 고립된 장소도 독특하지만, '범행을 벌이는 동기'를 새로운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범인 마이가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원한따위가 아닙니다. 오로지 "고립된 장소에서 탈출해서 살아남기" 위해서에요. 게다가 이를 위해서 범행이 결국 밝혀지도록 유도하기까지 하고요. 전에 보지 못한 신선한 발상이었습니다.
고립된 장소인 '방주' 설정도 좋습니다. 출입구를 거대한 바위로 막을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는 이유는 물론, 반전에 유용하게 활용되는 출입구와 비상구를 감시하는 카메라의 존재를 오래전 과격 분자나 사이비 종교 단체가 이용했기 때문이라고 하는건 충분한 설득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방주 내에 이런저런 시설과 장비, 음식 등이 갖추어져 있는 것도 같은 이유로 말이 됩니다. 지하 3층에서부터 물이 차오르고 있어서 모두가 살아남을 수 있는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도 긴장감을 불러 일으키는 좋은 장치였습니다. 이렇게 '방주'의 존재감이 너무 확실해서 초, 중반부까지는 방주가 주인공인 느낌마저 전해줍니다.

그러나 문제도 많습니다. 첫 번째는 '범인'에게 닻감개로 바위를 치우고 홀로 고립될 역할을 맡긴다는 암묵적인 동의입니다. 범인이 누구든간에 자기 범행이 드러났다고 그런걸 순순히 받아들일 이유는 없습니다. 만약 범인이 피트니스 센터 강사 류헤이였다면? 완력으로 제압하여 굴복시키기도 어려웠을테지요. 그리고 침수 중이라 시간 제한이 있다면 범인을 찾아서 희생하라고 설득하느니, 누구든 빨리 돌을 치워 사람들을 탈출시키고 구조를 기다리는게 빨랐을겁니다. 아무리 산사태가 일어났어도 한나절 만에 올라온 산을 내려가는데 1주일이나 걸릴리가 없잖아요? 기본적인 상식을 부정하는 설정이었습니다. 같은 이유로 아무도 공기통을 활용하여 지하 3층을 지나 비상구로의 탈출을 시도하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없었어요. 범인을 밝히는 것 외에 최소한의 생존을 위한 노력도 하지 않는건 설득력이 약합니다.

마이가 범행을 저지르는 일련의 과정도 작위적입니다. 물론 마이가 곧바로 범행을 저지른 이유는 제비뽑기 같은 것으로 희생자(?)를 고르기 전에 상황을 바꿔야 했기 때문이라는건 어느정도 말은 됩니다. 전에 '방주'에 왔던 경험이 있는 유야는 출입구와 비상구가 바뀐걸 눈치챘을지도 몰랐기에 제일 먼저 죽였다는 것, 유야 사건에 증거가 남지 않고 모두가 범행이 가능했다는 것 역시 마찬가지로 납득할 수 있어요. 
하지만 사야카의 핸드폰 속 사진이 출입구와 비상구가 바뀐걸 나타낼 수 있어서 죽였고, 사야카가 핸드폰을 분실해서 어쩔 수 없이 목을 잘랐다 - 핸드폰이 안면인식으로 잠금 해제가 되는 모델이라 - 는 것까지는 그렇다쳐도, 애써 종이 타월을 가져오면서까지 증거 인멸을 위해 노력했다는건 설명이 안됩니다. 어차피 범인임을 드러내어 희생양이 될 목적이었다면 시체의 목을 자르다가 들통나는게 더 확실했을거에요. 제한 시간까지 기다리면서 범행을 드러내는 것 보다는 말이지요. 사체의 목을 자르는 행동이 의심을 불러 일으킬까봐 그랬다? 그래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겁니다. 생명이 경각에 달린 고립된 사람들 앞에서는요. 마지막 쇼타로의 추리쇼에서 어떤 사진 때문에 사야카를 죽였는지에 대해 마이가 설명한걸 아무도 부정하거나 지적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또 마지막 추리쇼에서 마이가 범인이라는건 증명하지만, 앞서 쇼타로가 말했듯 "동기가 없다"는 이유는 간과하고 있습니다. 식량이 부족했다던가, 유야가 방주로 일행을 억지로 데리고 왔다는 등의 설정을 덧붙였더라면 좋았을겁니다.
마이가 탈출에 성공했다 한들, 이후 다른 사람들의 실종과 죽음을 어떻게 설명하려 했는지도 잘 모르겠고, 테이프의 존재를 몰랐던 사람이 범인이라던가 유야의 손톱깎기와 지퍼백을 범인이 가지고 왔던 이유는 핸드폰이 방수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추리도 억지스러웠습니다. 테이프 정도야 잊어버릴 수도 있지요. 지퍼백의 용도도 지나치게 국한되어 있고, 발표 시점에 생활 방수가 되지 않는 핸드폰을 사용하는 MZ 세대가 있을걸로 보이지도 않고요. 

이렇게 장점도 확실하고 단점 또한 확실한 그런 작품입니다. 돌직구 하나로 마운드에 오르는 투수를 보는 느낌이랄까요? 변화구도 적절하게 섞어주지 않으면 버티기 힘듭니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그래도 한 가지 장점으로 정면 승부를 벌일만큼의 매력도 충분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비슷한 설정들에 지친 추리 소설 애호가분들이라면 즐겁게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덧붙이자면, 10명에 불과한 등장인물 - 심지어 3명은 중간에 살해당함 - 과 폐쇄된 공간, 일주일의 시간 제한 등의 설정은 '무대'에 잘 어울릴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조금만 각색해도 괜찮은 연극이 될 수 있을것 같네요.

2010/11/29

리라장 사건 - 아유카와 데쓰야 / 김선영 : 별점 3점

리라장 사건 - 6점
아유카와 데쓰야 지음, 김선영 옮김/시공사

리라장이라 불리는 건물에 일곱 명의 학생이 피서차 방문했다. 서로 친구들이었지만 각자의 사연으로 갈등이 있었다. 그런 그들을 대상으로 한 무서운 연쇄 살인극이 시작되는데...

아유카와 데쓰야의 1958년도 발표 작품입니다. "필독 본격 추리 30선"이나 "동서 미스터리 베스트 100" 같은 리스트에서 자주 언급되는 고전 본격물이지요. '판타스틱'에서 주최한 이벤트 덕분에 읽게 되었습니다. 리뷰에 앞서 관계자분들께 감사드립니다.

특정 장소에서 특정 인물들에게 닥친 연쇄 살인이라는 기본 설정과 전체적인 분위기가 전형적인 일본 고전 본격물을 연상케 합니다. 그래도 1958년이라는 발표 시기 때문에, 기존 고전 본격물과의 차이점도 몇 가지 눈에 띄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리라장'이라는 장소의 존재입니다. 보통 이런 유형의 연쇄 살인은 외부와 연락이 두절된 '클로즈드 서클' 형태로 전개되는데, 이 작품에서는 경찰이 수시로 오갑니다. 심지어 경찰이 리라장에서 함께 거주하기까지 하는 파격적인 설정을 선보입니다. 경찰의 수사 과정이 탐정보다 훨씬 비중이 높고, 반대로 탐정은 니조와 호시카게 류조의 두 명을 등장시키면서도 이들의 매력을 의도적으로 배제하는 묘사도 특이했고요.

이런 점을 본다면 고전 본격물에서 트릭의 핵심만 남겨두고 작위성을 덜어낸, 고전 본격물에서 근대 사회파 추리물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시기를 드러내는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아직은 1950년대로 여전히 고전 본격물 쪽에 더 치우쳐져 있지만, 이후 1960년대에 접어들면 다카기 아키미쓰의 "야망의 덫" 등 장르의 주류가 점차 사회파 미스터리로 이동하게 되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러한 과도기적인 모습에서 오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우선, '리라장'이라는 장소와 스페이드 카드로 대표되는 작위성을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용의자가 축소되고 특정될 수밖에 없는 외딴 별장의 휴가 여행을 범행 무대로 삼기보다는, 도쿄에서 사고로 위장해 범행을 저지르는 것이 더 합리적인게 당연한데 말이지요. 탐정 캐릭터의 매력이 희박한 것도 고전 본격물에서 중요한 요소가 빠진 느낌이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려웠습니다.

또한, 이 작품의 핵심인 알리바이 트릭은 명성에 걸맞게 훌륭한 편이지만, 살로메 - 유키타케 살인 사건 이후에는 그렇게 정교하게 짜여 있지는 못합니다. 사건의 전개도 우연과 운에 지나치게 의존하고요. 예를 들면, 알리바이부터가 경찰 수사의 부실함이 원인이었고, 하나 씨의 증언을 경찰들이 초반에 무시한 것, 하나 씨의 증언을 남편이 듣지 못한 것, 니조가 조사를 핑계로 입을 다물면서 사건이 이어지게 된 것 등이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경찰이 상주하는 리라장에서 연쇄 살인이 계속 벌어진다는 것은 솔직히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특히 마지막 사건의 경우, 범인이 아비코를 위해서라는 이유로 범행을 저질렀다면, 애초에 범행을 저지르지 않고 경찰에 사실을 알리는 것이 더 현명했을 겁니다. 그런데도 불가능 범죄를 또 저지른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기본이 되는 트릭 자체는 상당한 수준이며, 초반부 살로메-유키타케 사건까지는 몰입도가 높습니다. 그러나 이후 이야기가 너무 확장되면서 사족처럼 느껴지는 부분이 많아졌고, 무리한 전개가 많아진 점이 아쉬웠습니다. 이런 점에서 명성과 기대에는 살짝 미치지 못했네요. 물론, 기대가 너무 컸던 탓도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니조가 등장하는 시점에서 마무리했더라면 더욱 괜찮은 작품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덧붙이자면, 최근 읽은 책 중에서 책의 완성도 측면에서는 가장 만족스러웠습니다. 판형도 마음에 들고 표지 디자인도 세련되었으며, 앞부분의 등장인물 소개, 중간중간 포함된 약도, 뒷부분의 해설 등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 쓴 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마치 옛날 추리 문고 스타일이 떠오르는데, 앞으로도 이런 책이 많이 나와주었으면 합니다.

2015/07/08

영국식 살인 - 시릴 헤어 / 이경아 : 별점 3점

영국식 살인 - 6점 시릴 헤어 지음, 이경아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병약한 워벡경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친지들을 초대했다. 초대된 사람들은 아들인 로버트, 가까운 친척이자 재무장관인 줄리어스 워벡, 로버트와 연인이었던 백작가의 딸 레이디 커밀라, 오래된 지인 카스테어스 부인, 그리고 워벡홀에서 사료를 연구하던 보트윙크 박사가 함께 하였다.

그러나 정치적 견해 차이, 로버트의 무례함 등 여러 이유로 참석자들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던 중, 크리스마스 자정에 로버트가 모두의 앞에서 독살당하고 마는데...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누누이 이야기한 대로 저는 정통 고전물의 팬입니다. 허나 고전 퍼즐 미스터리의 팬일 뿐, 이른바 "영국식" 스타일은 취향이 아닙니다. 신사 숙녀라 불리는 귀족과 부르조아들이 등장하여 딱히 재미있지도 않은 유머로 예법이다 뭐다 하며 장황하게 기이한 가식과 가증을 떠는 분위기가 싫기 때문이죠. 한마디로 잘난척이 보기 싫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피터경 시리즈 역시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이러한, 제가 싫어하는 정통파 영국식 스타일의 종합 선물 세트입니다. 무대부터 전통 있는 워벡 가문의 오래된 저택이고, 정통 영국식 추리소설답게 눈으로 고립된 클로즈드 서클 상황에 놓이거든요. 범행 현장에 있던 인물도 워벡 가문의 후계자, 가문의 친척인 재무장관, 오래된 친구인 정치가의 아내이자 부유한 숙녀, 후계자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백작 가문의 딸, 충직한 집사, 마지막으로 가문에 연구차 방문해 있던 보트윙크 박사라는 구성입니다. 귀족, 신사, 숙녀, 하인에 손님까지 정말 완벽한 구성이지요. 게다가 하나같이 영국식 귀족, 부르조아 예법에 쩔어 있는 건 물론이고요. 덕분에 첫 피해자로 로버트가 독살당했을 때에는 쾌재를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 정도로 재수 없고 짜증나는 극우 파시스트 귀족 떨거지였으니까요.

그런데 놀라운 건, 이러한 정통 영국식 스타일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재미있다는 겁니다. 영국식 스타일이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의 핵심 장치로 사용된 덕분입니다. 예를 들자면 집사 브리그스가 자신의 딸과 로버트의 결혼 사실, 손자의 출생을 손님들에게 철저하게 비밀로 하는 것이 대표적입니다. 브리그스의 함구는 정통 영국식 부르조아 예법 덕분에 완벽한 설득력을 갖추었고, 사건의 동기, 전개, 결말이자 파국을 만드는 핵심 역할을 수행합니다.

또 탐정역인 보트윙크 박사가 외국인이자 역사학자라는 설정도 뛰어납니다. 외국인이라는 설정은 영국식 관습의 이면에 감춰진 진실을 좌충우돌하며 깨닫는 과정과 사건의 핵심 동기가 과거 영국에 실존했던 사건과 동일하다는 것을 간파해 내는 것에 높은 설득력을 부여합니다.

별다른 단서나 증거가 있는건 아니라서 대단한 추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윌리엄 피트라는 실존 인물이 관련된 실제 역사를 배경으로 삼고 있어서 역사 추리물 같은 느낌도 전해줍니다. 동기 역시 정말로 "영국식"이라는 점에서 장르적 기대를 충족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문제도 분명합니다. 카스테어스 부인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 와닿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독약병이 워벡 저택에 있었던 물건이라는 점에서 보면 범행은 즉흥적인 결심으로 보이는데, 재무장관이 경호 차원에서 형사까지 대동한 상황에서 독살을 결심하고 실행할 이유가 무엇일까요? 심지어 저택이 고립된 상황이라, 방 안에 있는 누군가가 범인인 게 분명하고 누가 득을 보게 될지가 명확하다면 빠져나가는건 쉽지 않았을텐데 말이지요.
유일하게 배신이라는 동기가 있는 레이디 커밀라에게 뒤집어씌우려 했을 수도 있으나, 범행 시점에는 그런 사실을 몰랐기 때문에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줄리어스를 설득해 자살로 몰아가려는 시도 역시 작중 묘사대로라면 잘 되지 않았을 것 같고요.
개인적으로는 작위를 이용한 복잡한 상황을 연출하기보다는 줄리어스를 직접적으로 독살하고 정치적으로 날선 대립을 보인 파시스트 로버트에게 뒤집어씌우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아니, 그게 오히려 더 자연스러운 심리겠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입니다. 영국식 설정을 작품 속에 잘 녹여낸 솜씨가 탁월하여 무척 재미있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은 작품이기는 하나, 상기 단점도 분명하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제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영국식"이라는 설정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알려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고전 추리소설 애호가 분들이시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2021/04/16

최후의 일격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1.5점

최후의 일격 - 4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1929년 겨울, 작가로 갓 데뷔한 엘러리는 크리스마스부터 공현절까지 12일간 열리는 파티에 초대되어 인쇄업자 아서 크레이그의 저택으로 향한다. 파티에 참석한 사람은 젊고 매력적인 시인이자 막대한 유산의 상속자이기도 한 존과 그의 약혼녀, 허영 가득한 여배우, 출판업자인 댄 프리먼 등을 비롯해 모두 12명.

모두가 파티 분위기로 들떠 있는 사이 저택은 폭설로 고립되고,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타나 초대 손님들에게 열두 별자리를 상징하는 크리스마스 선물을 건넨다. 그리고 얼마 후, 초대받지 못한 13번째 손님의 시체가 발견되는데… "출판사 제공 책 소개 인용"

엘러리 퀸의 마지막 장편입니다. 말년의 엘러리 퀸이 고전 본격물의 향취를 되살리고자 의욕적으로 도전한 작품으로 보입니다. 사건이 일어난 시기부터가 엘러리 퀸 데뷰작인 "로마 모자 미스터리" 직후니까요. 작품도 고전 본격물에 굉장히 충실합니다. 클로즈드 서클에 가까운 무대 설정과 부유한 주요 등장인물들, 기묘한 범행과 단서들 모두가요. 모든 단서는 공정히 제공되며, 심지어 '독자에의 도전'도 삽입되어 있을 정도입니다. "로마 모자 미스터리"에서 인용했다는 형태로요.

하지만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망작입니다. 고전 본격물의 단점만 집대성해 놓은 결과물이에요.

고전 본격물의 존재 가치가 멋진 트릭과 기발한 설정에 있다는건 분명합니다. 어떤 작품은 트릭과 설정만으로도 모든 단점이 덮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이런 설정들은 '비현실성;을 강화한다는 문제가 큽니다. 기상천외할 수록 그런 경향이 강하고요. 그나마 이런 설정들이 최소한의 현실성을 가지려면, 사용되거나 그런 현상이 발생한 이유라도 명확해야 합니다. 작위적인 상황 연출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이집트 십자가의 비밀"의 예를 들자면, 범인이 피해자의 목을 잘라 T자 형으로 매단 이유는 피해자인척 하기 위해서 벌인 행동이었죠. 작위적이기는 하나, 말은 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트릭도 변변치 않고, 설정들도 억지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대표적인건 범인이 12일에 걸쳐 20가지 선물을 예정된 피해자에게 보낸다는 설정입니다. 선물들은 폐니키아 알파벳이 유래한 사물들을 의미했습니다. 첫번째 '황소'는 알레프, A, 두번째 집은 베스, B 라는 식으로요. 이 경우 마지막 Z는 단검인 자인을 뜻하죠. 하지만 범인은 스무번째 선물이 전달되는 마지막 날, 단검으로 존을 살해한다는걸 미리 알리기 위해 선물을 보낸게 아닙니다! 범인 아서 크레이그는 존을 꼭 죽였어야 했어요. 파산을 막기 위해서요. 누군가 존의 죽음을 막거나, 자기 범행을 멈추어 주기를 절대로 원하지 않았습니다. 그럼 왜 선물을 보냈을까요?
이유랍시고 나오는건, 명탐정 엘러리 퀸이 선물은 페니키아 알파벳이고, 선물 카드 뒤에 그려진 그림은 교정용 기호를 쓴 거라 편지를 보낸건 이쪽 분야에 정통한 인쇄업 종사자 아서 크레이그라고 추리해내기를 원했다는 겁니다. 너무 뻔한? 단서라서 명탐정은 아서 크레이그는 진범이 아니고 누명을 쓴 거라고 주장해 줄 걸 기대했다면서요. 참으로 황당하기 그지없어요. 이러니 명탐정들이 현대의 비웃음거리가 된 겁니다...
차라리 피해자만 아는 일종의 기호로 피해자의 두려움을 가중시키려고 했다던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가 트릭을 알아채서, 자신의 범행을 멈추어 줄 것을 기대했다던가, 범인이 페니키아 알파벳에 집착하는 미치광이였다는 이야기가 조금 더 나았을 겁니다. 딱히 설득력이 높아 보이지는 않지만, 작품 속 설정보다는 말이 됩니다.

애초에 아서 크레이그가 선물을 보내면서, 열 두명이나 되는 손님이 모인 저택에서 12일 동안 파티를 즐기면서 시간을 끌 이유도 없습니다. 언제든 존을 죽이면 되요. 사고로 위장해서요. 실제로 작 중에서도 존은 2번의 큰 사고 - 승마 중 낙마, 과음 후 계단에서 추락 - 을 겪기도 했습니다. 물론 이렇게 범죄를 저지를 경우, 유산이라는 동기 때문에 의심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동기 부분은 선물을 보낸 뒤 살해해도 어차피 똑같습니다. 구태여 복잡하고 번거롭게 단서만 늘린 셈이에요. 게다가 아무리 자기 저택이라지만, 경찰마저 상주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려 12일 동안 몰래 선물을 놓아둘 수 있었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선물을 놓아두다가 잡혔다면 어쩔 생각이었을까요?

전개와 설정도 엉망입니다. 존3가 파티에 참석했던 사람들을 협박하는 장면은 볼썽사나울 지경입니다. 뭐 프리먼의 인쇄소를 손에 넣고자 했던건, 돈 때문에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허나 롤랜드 페인을 협박해서 존1이 쓴 시집에 대한 호평을 얻고자 한 건 설명이 안됩니다. 스스로가 존1이 될 생각이었을까요? 협박했다는 사실을 존1에게 숨긴 이유도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건 마찬가지고요. 물론 협박을 한게 존 1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협박대로 인쇄소와 시집에 대한 호평을 손에 넣지 않은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한마디로 존을 죽이고 싶은 용의자를 만들기 위한 억지스러운 설정에 불과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협박을 한 건 크리스마스 파티가 시작되고 선물이 보내지고 난 이후이니, 이 둘을 용의자로 보기도 힘들어요.

아울러 작품 속 경찰들은 정말로 무능했습니다. 사건 이후 아서 크레이그의 재산 흐름만 확인했어도 범인이 누구인지 알아내는건 별로 어렵지 않았을거에요. 이 정도 수사도 하지 않고 미해결 사건으로 덮었다?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물론 아예 건질게 없지는 않습니다. 존의 쌍둥이 형제가 죽었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사실 존은 '세쌍동이'여서 존 2가 존재할 수 있었다는 나름의 설정은 재미있었습니다. 살아있는게 존 1이냐 존 3이냐는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잘 설명되고 있고요.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 평가를 끌어올리기는 턱도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이제 정말 엘러리 퀸은 그만 읽어야 겠습니다.

2010/05/03

Q.E.D 35권 / CMB 13권 - 카토우 모토히로 : 별점은 3점과 2점

Q.E.D 큐이디 35 - 6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운송회사에서 일어난 강도사건을 다룬 "두 용의자", 미스터리 동호회와 연극부가 함께 토마가 쓴 탐정물을 크리스마스에 공연한다는 "크리스마스 선물" 두 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이 중 "두 용의자"는 많이 아쉬웠습니다. 범인이 사장의 동선을 다 파악하고 있던 만큼 아침에 조금만 일찍 나왔어도 훨씬 돈을 훔쳐가기가 쉬웠을텐데, 왜 어렵게 일을 벌이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거든요. 용의자가 저질렀던 과거의 다른 사건 이야기는 쓸모없는 단순한 사족일 뿐이었고요. 무엇보다도, 가장 중요한 추리의 논리 중 하나인 '아침에 출근하여 사장을 확인한 이유'는 두명의 용의자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어서 설득력이 떨어집니다.그래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두번째 이야기 "크리스마스 선물"은 학교가 무대인 Q.E.D의 전형적인 일상계 작품입니다. 에나리 "퀸"을 비롯한 미스터리 동호회 캐릭터들의 오랫만의 등장으로 등장인물도 풍성하고, 토마가 쓴 탐정물 "오각관 살인사건"과 연극을 방해하는 정체불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겹쳐서 진행되는 전개도 재미있었습니다. Q.E.D의 학교무대 일상계 추리물은 항상 기본 이상은 해 준다는 것이 "증명종료" 되었달까요. 추리적으로 대단한 트릭이 등장하는 것은 아니고, "오각관 살인사건"의 핵심 트릭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유치했지만(심지어 토마가 썼다고 보기에는!) 연극이라는 설정과 작품에 딱 어울린다는 점에서는 마음에 들었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결론적으로 두 작품 합쳐서 평점은 2.75점... 이지만 3점으로 하죠. 두 번째 이야기가 아주 좋았기에 다음 권이 기대되니까요.

CMB 박물관 사건목록 13 - 4점
카토우 모토히로 지음/학산문화사(만화)

무려 4편이나 되는 이야기가 실려있는 13권입니다. 첫 번째 이야기 "여름 풀"은 공터에서 가족과 연락하지 않고 지냈던 노인이 뭘 했는지를 공터의 식물들로 추리해내는 이야기. 식물들의 생태와 이른바 린네의 "꽃 시계"라는 것을 알려주는 박물학적 정보 전달 측면에서는 괜찮았습니다.그러나 결론 없는 추정에 불과한 신라의 추리, 그리고 사건성이 전무한 전개는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두 번째 이야기 "안개 산장"은 여름 학교에서 조난당한 신라 일행이 잠깐 머물게 된 산장에서 과거의 인기극단 O-ZAP의 리더 츠키야마의 목졸려 죽은 시체와 만나게 된다는 내용입니다.경찰이 도착하면 어차피 모두 밝혀질 이야기를 억지로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로 만든 느낌이 강했습니다. 결말도 심심했고요. 별점은 역시나 2점.

세 번째 작품 "아사도"는 학교 축제에서 아르헨티나 소고기 요리 "아사도"를 내놓기로 한 신라 일행이 축제의 말썽꾼들을 퇴치(?)하는 이야기입니다. 전형적인 일상계 작품인데, 핵심 이야기의 사건성이 약해서 그냥 학원물에 가깝습니다. "아사도"의 행방에 대한 잠깐의 추리가 더 나아보일 정도였으니까요. "아사도"라는 요리에 대한 관심이 생긴 것 정도가 수확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마지막 작품 "오르골"은 친숙한 고정 캐릭터인 마우의 등장도 반가왔고, 오르골에 대한 상세한 이야기는 인상적이었습니다. 박물학적 정보 전달 역할에 더 없이 충실했으니까요. 하지만 오르골에 관련된 오래된 사건을 풀어나가는 이야기의 결론이 단지 "오해"로 와전된 것에 불과했다는 건 추리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오르골 이야기는 확실히 재미있었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결론적으로 총점 평균은 2점입니다. 풍성하긴 했지만 실속은 별로 없었네요. 작가가 Q.E.D 쪽에만 집중해 주는 것이 더욱 좋지 않을까 생각될 정도로 밀도가 약한데, 후속권에서의 분발을 기대해봅니다.

2025/07/18

나이브스 아웃 : 글래스 어니언 (2022) - 라이언 존슨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세계 제일의 명탐정 브누아 블랑은 코로나 격리 탓에 지루함으로 몸부림치던 중, 대부호 마일즈의 초대를 받고 그리스의 섬으로 떠났다. 마일즈는 섬의 대 저택에서 친구만을 데리고 자기가 만든 추리극을 선보인 뒤, 범인 찾기 게임을 할 생각이었다. 초대받은 친구들은 모두 마일즈의 돈과 후원이 절실해서 그 앞에서 쩔쩔맸지만, 앤디는 동업자 마일즈에게서 한 푼도 받지 못하고 회사를 쫓겨난 원한이 있어서 냉담한 태도를 유지했다. 

유명 작가가 만들었다는 추리극을 블랑이 단번에 풀어내어 김이 빠져버린 그날 밤, 파티에서 듀크가 술을 마신 뒤 질식사했고 뒤이어 앤디마저 저격당해 살해당했다. 곧바로 블랑은 남은 사람들 앞에서 사건의 진상을 추리해내기 시작하는데....

넷플릭스 전용 장편 추리 영화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전편을 재미있게 보아서 관심이 컸었지만, 2시간이 넘는 시간 탓에 그동안은 손이 가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더위가 몰아친 지난 주말에, 여름에는 추리 영화지!라는 생각으로 보기 시작했네요.

특징이라면 전편도 그랬지만, 고전 본격물의 문법을 현대에 맞춰 풀어냈다는 점입니다. 잘난 척이 심하고 까칠한 외국인 탐정 브누아 블랑부터 그러합니다. '에르퀼 푸아로'를 현대에 옮겨놓은 듯한 인물이니까요. 괴짜 억만장자가 자신에게 원한을 가진 친구들만을 외딴섬의 대저택으로 초대해 추리 게임을 연다는 설정 또한, 고전적인 클로즈드 서클 추리극을 연상시키고요.
그런데 여기 포함된 등장인물들은 지극히 현 시점을 반영한다는 점도 눈에 띕니다. 주목받는 정치인, 과학자는 그렇다 쳐도, SNS 중독인 패션 모델과 남성 인권에 대해 떠벌이는 유튜버가 대표적입니다. 마일즈는 아무리 봐도 일론 머스크를 떠올리게 했고요.

이야기도 뚜렷하게 4막으로 나뉘어 시원하게 전개되어 재미있게 감상할 수 있습니다. 1막에서는 마일즈가 준비한 추리 게임이 중심이 되며, 2막에서는 듀크의 죽음이 벌어집니다. 이어지는 3막에서는 섬에 도착한 인물이 사실은 앤디가 아니라 그녀의 쌍둥이 동생 헬렌이었다는 사실이 회상을 통해 드러나고, 그녀가 언니의 의문사를 밝히기 위해 블랑에게 의뢰했음이 밝혀집니다. 마지막 4막에서 블랑의 추리와 헬렌의 폭주를 통해 이야기는 마무리되고요. 이렇게 구조적으로 큰 흐름이 명확하게 나뉘어 있어 몰입하기 쉬웠습니다.

또 다른 장점은 미술입니다. 마일즈의 섬과 '글래스 어니언'으로 상징되는 대저택의 내외부는 시각적으로도 인상 깊습니다. 뱅크시 조각으로 만들어진 부두나 모나리자 등 여러 미술 작품, 초대장이 담긴 퍼즐 상자도 그러합니다. 인물의 성격과 직업을 반영한 의상과 색상 표현도 뛰어나고요. 한 마디로 보는 즐거움은 넘칩니다.

마지막 헬렌의 폭주도 화끈함만큼은 최고였어요. 모든걸 날려버린 뒤, '모나리자'마저 불태우는건 정말 최고의 마무리였습니다. 마일즈의 평소 입버릇과 절묘하게 연결되는 점도 좋았고요.

그러나 기대했던 추리적 측면에서는 아쉬움이 컸습니다. 주어진 정보를 통해 그럴듯한 추리를 끌어내는 브누아 블랑의 추리쇼는 일견 그럴듯해 보이지만, 여러모로 헛점이 많이 보이는 탓입니다. 듀크가 마일즈의 차에 치일뻔 했다는 대사로 마일즈가 앤디의 집에 먼저 갔고, 그녀를 살해했다는 근거로 삼는게 대표적인 예입니다. 발상은 좋지만 근거로는 턱없이 부족하지요. 마일즈가 멍청이라는 것과 그가 범인이라는건 아무런 관계가 없고요. 최악은 듀크가 마일즈의 잔을 잘못 알고 잡아서 죽은게 아니라, 마일즈가 듀크에게 잔을 전해주었다는 추리입니다. 관객은 모두 해당 장면에서 듀크가 잔을 잘못 잡는걸 봤습니다. 즉, 이건 관객에게 거짓말을 한겁니다. 공정함 측면에서 최악이라고 할 수 있지요.

하지만 이보다 더 큰 문제는 마일즈가 범인이라는 명확한 증거가 없다는 겁니다. 앤디의 사망과 관련해 마일즈의 차를 친구들이 목격했다는 사실은 정황일 뿐입니다. 범행의 동기가 되었던 메모도 이미 재판에서 조작된 증거를 기반으로 결론이 난 상태라, 지금 와서 앤디가 다시 제출한다고 해도 실질적인 위협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게다가 메모는 마일즈가 모두 앞에서 불태워버렸기 때문에 남아 있지도 않고요. 앤디가 이미 자살했다고 알려진 상황에서 그의 재력과 사회적 입지를 생각하면, 아무리 명탐정 브누아 블랑을 통해 고소된다 한들 유죄 판결은 어렵다고 봐야 합니다. 심지어 친구들마저 편을 들어준다면 더더욱요.
듀크 살인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범행 도구가 독이 아닌 파인애플 주스 알레르기였기 때문에 사망 원인을 사고로 처리할 가능성이 큽니다. 잔을 바꿨다는 점도 증거를 남기기 어려운 부분이라 수사 과정에서 명확한 결론에 도달하기 어렵습니다. 솔직히 헬렌이 가지고 있던 녹음기를 활용해서 증거를 잡으리라 생각했는데, 아무것도 없어서 좀 의외였어요.

그리고 부실한 동기도 문제입니다. 앤디를 살해한 이유가 메모 때문이라지만, 이미 메모를 누가 썼는지에 대한 법적 다툼은 끝난 상태입니다. 앞서 말했듯 지금 앤디가 '메모 원본을 찾았다!'며 들이미는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듀크 살해도 넘치는 재력으로 무마하는게 더 손쉬웠을테고, 헬렌을 저격하려 한 마지막 범행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일즈는 그녀가 앤디가 아님을 알고 있었고, 메모를 손에 넣은 상황에서 굳이 헬렌을 해칠 이유는 없습니다. 오히려 신분을 속인걸 밝히며 듀크를 살해한 범인으로 모는게 더 설득력 있었을 것입니다.
마일즈의 동기도 이렇게 부실하지만, 다른 친구들과 손님들은 더 합니다. 그들 중 누구도 앤디를 해칠 이유는 없었습니다. 앞서 설명한대로 메모는 마일즈의 현재 위치에 영향을 끼치기 힘드니까요. 게다가 듀크를 죽일 이유는 더 없습니다. 듀크 때문에 위험을 느낄 인물은 존재하지 않거든요. 때문에 후더닛물로는 낙제점에 가깝습니다. 아무도 설득력있는 동기가 없으니까요!

무엇보다도 이런 범행을 억만장자 마일즈가 직접 벌이는게 가장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그것도 세계 제일의 명탐정 앞에서 말이지요. 아무리 생각없이 즉흥적으로 벌인 범행이라 하더라도 너무 무모했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가 없지는 않았지만, 전작보다 규모가 커졌음에도 이야기의 짜임새와 특히 추리적인 완성도에서 아쉬움이 남습니다. 전편만 보셔도 될 듯 합니다.

2022/06/02

샴 쌍둥이 미스터리 - 엘러리 퀸 / 배지은 : 별점 1점

샴 쌍둥이 미스터리 - 2점 엘러리 퀸 지음, 배지은 옮김/검은숲
아래 리뷰에는 진범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휴가 중 퀸 부자는 산불에 습격했다. 탈주 끝에 산 정상에 있는, 저명한 외과의사 사비에르 박사의 저택에 머물게 되었다. 그런데 박사의 저택에 머무르던 가족과 손님들은 무언가를 숨기는 듯한 기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다음 날, 사비에르 박사가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 유일한 단서는 피해자 손에 남겨져 있던 찢겨진 카드 조각 뿐이었다. 퀸 경감은 사비에르 박사의 부인 새러가 범인이라고 추리했지만, 엘러리는 고심 끝에 카드는 조작된 증거이며, 조작한 건 사비에르 박사의 동생 마크였다는 걸 밝혀냈다. 그러나 도주하다가 퀸 경감의 총에 맞아 중상을 입은 마크마저도 결국 살해당했고, 현장에는 또 다른 카드 조각이 남겨져 있었다....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 일곱 번째 작품. 2012년 시공사의 엘러리 퀸 컬렉션을 통해 국내에 처음 소개되었던 작품입니다. 국명 시리즈는 더 이상 읽지 않기로 결심했었지만, 주말에 도무지 읽을 책이 없어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역시나, 별로 기대하지도 않았지만, 그나마도 없던 기대 수준에도 전혀 미치지 못한 졸작이었습니다. 억지스러운 설정들, 도무지 설득력 없는 범행, 어처구니없는 진상이 결합된 환장의 작품이었으니까요.

이 중 억지스러운 설정이 가장 거슬렸습니다. 휴가 중 산불을 만나 산 정상 저택으로 도피했던 퀸 부자가 그곳에서 유명한 외과의사 사비에르 박사 가족과 손님을 만나게 되는 도입부부터 억지스러웠어요. 급작스러운 산불도 그렇지만, 유명한 외과의사가 은퇴 후에 첩첩산중 꼭대기에 기묘한 저택을 지어서 은신한다는 건 대관절 무슨 설정일까요... 물론 사비에르 박사가 샴 쌍둥이 동물들의 분리 실험을 했다는 설명과 작중 묘사를 통해 "닥터 모로의 섬" 같은 작품에 등장하는 매드 사이언티스트 느낌을 전해주려고는 합니다. 정통 본격물은 어느 정도, 아니 꽤 많이 허구와 상상이 결합되어 있기도 하고요.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 해야죠.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근거지를 찾은 퀸 부자가 악을 물리친다는 아동용 모험물이었다면 모를까, 정통 본격물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설정이었습니다. 이 정도 설정을 부여할거라면 사비에르 박사가 괴물이라도 하나 만들어 놓았어야 하는데, 나오자마자 죽어버린다는 것도 황당했습니다.

산을 덮친 산불로 등장인물들이 모두 저택에 갇혀서 죽을 고비를 넘기는 과정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완벽한 클로즈드 서클 상황이기는 한데, 이 정도 첩첩산중 저택이라면 구태여 이런 억지를 덧붙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점입니다. 지금의 결과물은 화재로 갇힌 상황에서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재난물로서의 가치가 더 높습니다. 엘러리 퀸의 절대적인 팬이 아니시라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똑같이 샴 쌍둥이를 소재로 한 작품으로는 에도가와 란포의 "외딴섬 악마"가 있는데, 이 작품과 비교하면 노벨 문학상 수상작 급입니다. 차라리 란포의 작품을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살짝 등장하는 샴 쌍둥이 중 한 명이 범인일 때 어떻게 형벌을 내릴 수 있을까?에 대한 딜레마가 더 재미있었는데, 이런 이야기로 끌고 나가는 게 더 나았을 것 같기도 하네요.

2010/04/20

귀등의 섬 1~4 : 산베 케이 : 별점은 2점. 앞부분은 4점짜리였지만...

귀등의 섬 1 - 4점 산베 케이 지음/학산문화사(만화)

코코로는 어머니를 잃고 눈에 장애가 있는 여동생 유메와 함께 귀등의 섬에 있는 고아원 학교 "귀등 학원"으로 전학왔다.  귀등학원은 아이들과 교사까지 전원 함께 사는 기숙학교로 교직원 4명, 학생은 6명이 전부였다...

주인공이 코코로와 유메인 데다가, 무대가 되는 학교 이름이 귀등 학원이라니 무슨 AV물 같기도 한데, 이 작품은 주인공 코코로를 비롯한 아이들이 섬과 학교에 대한 불편한 진실 - 학원이 아이들에게 걸려있는 보험금으로 운영된다는 것! - 을 눈치채게 된 뒤 사람들이 하나둘 죽어나가면서 벌어지는 스릴과 서스펜스를 다룬 정통 클로즈드 서클 스릴러 만화입니다.

고립된 섬에서 벌어지는 이상한 음모, 그것에 말려드는 주인공들을 다룬 소설은 많지만 일단 초등학생들로 구성된 멤버들은 분명 독특한 부분이 있습니다. 아이들 설정들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코코로는 곤충 박사, 유메는 눈이 보이지 않는 대신 귀가 밝음, 슈우는 뛰어난 두뇌 보유했다는 식인데, 이런 특기들이 탈주 과정에서 선생들과 벌이는 추격전에서 잘 활용되어 위기를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묘사도 아주 좋습니다. 변태 선생을 대표로 하는 "어른들"의 혐오스러운 분위기, 배후에 숨겨져 있는 음모를 서서히 보여주는 디테일들, 예를 들면 들어가면 안되는 방에 적혀있는 무서운 경고문구 -"살려줘, "살해당한다" 등 - 라던가 열리지 않는 책상 서랍안에 가득한 핏자국 등이 그러합니다. 아울러 이렇게 서서히 드러나는 과정에서 빚어지는 스릴과 서스펜스 역시 일품이고요. 한마디로 초반부에는 걸작의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정말 두근두근하면서 읽었으니까요.

하지만 마지막 권에서 모든걸 망쳐버립니다! 결국 죽은 사람이 거의 없고 악당은 지옥으로 간다는 어거지 해피엔딩도 별로지만, 실제적인 음모나 공포는 전무한 단순한 착각에 의한 사고였으며 진정한 악인은 변태 선생 하나였을 뿐 나머지는 다 오해였다라는, 앞부분의 스릴과 서스펜스를 전부 뒤집는 같잖은 결말은 제 인생 최악의 결말 중 하나가 아닐까 싶을 정도였어요. 아... 정말 이게 뭔가요. 차라리 진정한 흑막은 정기선을 운항하는 할아버지라고 하던가...

작가의 동글동글하면서 육덕진 그림체도 좋았고 빠른 전개와 긴장감을 자아내는 연출도 높이 평가할 만 한데 마지막 권이 모든걸 허사로 만들어 버려서 별점은 2점입니다. 1~3권까지는 4점은 충분한데 마지막권이 빵점 그 이하로 완전 말아 잡순 케이스죠. 혹시 마지막권을 아직 읽지 않으셨다면 영원히 봉인해두시고 앞부분의 좋은 기억만 간직하시길 권해드립니다.

2023/01/08

정보는 모두 당신 손 안에! "독자에의 도전장"을 즐길 수 있는 미스터리 작품들

* 언제나처럼 honto의 북트리 서비스를 통한 추리 소설 추천. 국내 소개된 작품은 4편입니다. 아야츠지 유키토의 단편집도 재미있어 보이는데 꼭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독자에의 도전장"은 엘러리 퀸이 처음 시작했다고 알려진 미스터리 소설의 한 요소입니다. 사건 해결 부분 앞에 "지금까지의 이야기 중 범인을 지적하기 위한 증거는 모두 갖춰졌습니다. 범인을 맞춰보세요."라고 제시하는 형식이지요. 그만큼 작가가 공정하게 이야기를 썼다는 뜻이기도 하고,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다음 작품들과 함께 범인과 동기를 논리적으로 추리해 보시지요.

"돈돈 다리 떨어졌다" - 아야츠지 유키토 (국내 미출간)

대학교 추리 소설 연구회 활동 당시부터 범인 맞추기 중심의 작품을 써왔던 작가답게, 본 작품은 독자에게 전달된 단서를 바탕으로 수수께끼를 푸는 구성을 갖춘 단편집입니다. 수록작 5편 중 4편에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되어 있으며, 동서고금의 유명 미스터리 작가들이 등장하는 등 독특하고 의욕적인 작품입니다.

"월광 게임" - 아리스가와 아리스

부제가 "Y의 게임"이며 등장인물 중 한 명이 '아리스가와 아리스'인 점 등에서 엘러리 퀸을 의식하고 쓴 데뷔작입니다. 클로즈드 서클, 연쇄 살인 사건, 다잉 메시지 Y, 그리고 "독자에의 도전장"까지 본격 미스터리의 전형적 요소들을 모두 갖춘 논리 중심의 정통 추리물입니다.

"점성술 살인사건" - 시마다 소지

작가의 데뷔작이자 명탐정 미타라이 기요시가 처음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여섯 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그 사체 일부를 절단한 엽기적인 살인 사건이 40년간 미제로 남아 있다가, 미타라이 기요시에게 관련자의 수기가 도착하며 다시 사건이 펼쳐집니다. 특히 트릭의 신선함이 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은 작품으로, 일본 본격 미스터리의 전환점을 이루었다고 평가받습니다.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 - 츠지무라 미즈키

학교에 갇힌 고등학생들이 마주하는 '죽은 동급생의 이름을 기억해낼 수 없다'는 기묘한 상황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미스터리입니다. SF 판타지이자 청춘소설의 성격도 함께 지닌 이 작품은 제31회 메피스토상 수상작이자 작가의 데뷔작입니다. 작품 속에 작가 본인의 이름과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되어 있어 본격 미스터리 장르에 대한 애정이 잘 드러납니다.

"체육관의 살인" - 아오사키 유고

엘러리 퀸의 국명 시리즈에 대한 오마주가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관 시리즈"의 제1작으로 제22회 아유카와 데츠야 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밀실 상태의 체육관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다루며, 탐정은 교내에 거주하는 애니메이션 덕후 학생이라는 독특한 설정을 가졌습니다. 특히 해결 부분에서의 논리적인 전개는 '헤이세이의 엘러리 퀸'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면모를 보여줍니다.

도대체 무엇이 동기? 와이더닛을 만끽할 수 있는 걸작 미스터리들

2008/07/13

외딴섬 퍼즐 - 아리스가와 아리스 / 김선영 : 별점 3점

외딴섬 퍼즐 - 6점
아리스가와 아리스 지음, 김선영 옮김/시공사

에가미 지로와 아리스는 에이토 대학 추리 동호회의 홍일점인 아리마 마리아의 초대로 아리마가의 별장이 있는 섬으로 여름 휴가를 떠나게 된다. 목적은 마리아의 할아버지인 아리마 데츠노스케가 섬에 숨겨두었다는 보물을 찾기 위함. 섬에 휴가 때마다 모이는 가족들과 손님들이 모두 도착하고 즐거운 휴가가 시작되나 곧바로 마리아의 고모부와 사촌누나가 밀실에서 총에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지고 연달아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에가미 지로는 최후의 순간에 진상을 꿰뚫고 아리스에게 자신의 이론을 설명하게 되는데…


국내에 두번째로 소개된 학생 아리스 시리즈 작품입니다. 전편 "월광게임"의 경우 아마츄어 미스터리 매니아의 데뷰작이라는 느낌이 너무 강해서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었는데 이 작품은 첫 작품에서의 단점을 보완하여 확실히 업그레이드했네요. 물론 클로즈드 서클이라고 불리우기도 하는, 고립된 섬이라는 무대와 일본 추리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부자 가문의 복잡한 인간관계라는 기본 설정은 골든 에이지 시절의 영국쪽 퍼즐 미스터리와 고전 일본 추리물의 영향을 부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뻔했지만 저도 이런 고전적 설정을 무척 좋아하기에 굳이 단점으로 꼽기는 어렵겠죠? 뭐 이런게 정통 아니겠습니까 .

작품은 크게 주어진 단서를 이용하여 섬에 숨겨진 보물을 찾는 이야기와 더불어 3건 (피해자는 4인)의 살인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일단 보물찾기 이야기는 암호 트릭으로 꽤 잘 만들어진 트릭입니다. 작위적이긴 하지만 기본 개념자체는 나쁘지 않았고 독자도 함께 할 수 있는 수준이라는 점에서 마음에 들었어요. 반면 살인사건 트릭은 그냥저냥하더군요. 밀실 트릭은 좀 대충 만든 것 같은 생각이 들기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었고 다이잉 메시지는 그냥 그러한게 있었다 수준이거든요. 그 외에는 별다른 트릭 없이 “범인이 누구인가?” 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등 트릭물로 보기는 좀 어렵기도 합니다. 하지만 떨어진 지도에 남은 자전거 바퀴 자국을 토대로 하여 범인을 이끌어내는 전개는 좋았습니다. 이치에 합당할 뿐더러 전개도 합리적이고 수긍할만 했기 때문에요. 에가미 지로가 범인을 밝히는 마지막 장 앞에 “독자에 대한 도전”이 있는 것이 만용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공정하면서도 치밀한, 잘 짜여진 이야기라 생각되네요.
그러나 범인이 단 한명으로 좁혀지는 결과를 낳은 것은 굉장히 아쉬웠어요. 전작 “월광게임”이 초딩스러운 불합리한 동기 부여로 작품의 수준이 바닥이었던것에 비교한다면 이번에는 범행의 동기 부여 부분에 있어서는 확실히 진일보하여 설득력을 갖추긴 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설득력을 제공하는 부분이 너무 자세하게 표현되어 버려서 범행의 과정이나 트릭은 몰라도 결국 범인이 누구인지 쉽게 알 수 있었어요. 닫힌 공간에서 연쇄 살인이 벌어진다면 “누가 범인인가?” 부분을 좀 더 흥미진진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도 캐릭터간의 갈등을 보다 디테일하게 묘사했어야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마키하라 준지 이외의 등장인물들은 갈등 자체가 묘사되지 않아서 마지막 부분에서 동기가 확인되자마자 김이 확 빠져버렸습니다.

그 외에도 실제 범행이 아리스가 이야기하듯 “철인 3종 경기” 같은 체력이 필요했다는 점, 어차피 복수극이었다면 에가미와 아리스 같은 외부 손님이 없는 다른 시기 (몇 년 뒤가 되더라도) 에 범행을 저지르는 것이 더욱 합리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들도 보완해야 할 점입니다. 보물찾기 트릭도 단서가 너무 명확한 장소를 나타내고 있어서 구태여 암호를 풀지 않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몇년간 찾았으면 결국 발견하지 않았었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시대가 많이 흐른 탓이기도 하겠지만 지금 읽기에는 "김전일"스러운 전개 (혐오스러운 범행때문에 발생한 눈물의 범죄. 동정할 수 밖에 없는 범인 등)가 약간 거슬리기도 했고요.

아쉬운 점들 때문에 재미있게 읽기는 했지만 뭔가 2% 부족한 느낌은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도 전작보다는 확실히 좋아졌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계속 발전하는 모습이니 다음 작품 “쌍두의 악마”는 이 작품에서 드러나는 몇가지 문제점을 보완하여 그야말로 확실한 정통 고전과 같은 맛을 충분히 전해주지 않을까 생각되어 기대가 큽니다. “쌍두의 악마”는 그렇잖아도 걸작이라는 평도 많으니 올 여름 시즌 지나기 전에 나와주면 좋겠네요.

2023/05/14

미스터리 아레나 - 후카미 레이이치로 / 김은모 : 별점 2점

미스터리 아레나 - 4점
후카미 레이이치로 지음, 김은모 옮김/엘릭시르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매년 연말 방송되는 인기 TV쇼 <<미스터리 아레나>>는 출제되는 문제를 맞추면 거액의 상금을 얻는 쇼였다. 대신 틀린 답을 제시한 참가자는 자신의 장기를 이식용으로 기부해야 했다. 
올해 문제는 '클로즈드 서클 추리물'로, 대학 미스터리 연구회 동창생들은 매년 모임을 갖는 동창 마리코의 별장에 모였지만, 마리코는 4층 자기 방에서 칼에 찔려 살해된 채 발견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방송에서 이야기가 조금씩 진행될 때 마다, 자신의 추리에 확신을 가진 참가자는 벨을 눌러 범인이 누구인지와 그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추리 뒤 이어지는 이야기를 통해 앞서의 추리는 부정되며 계속 변형되어 나가는데...

후카미 레이이치로의 장편. 여러 명의 참가자들이 각자의 추리를 이야기한다는건 <<독 초콜릿 사건>> 등을 연상케도 하지만,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를 가지고 추리를 펼치는게 아니라 본편 이야기가 진행되는 와중에 추리를 펼친다는 차이점이 있습니다. 일종의 배틀이라서 같은 답을 내 놓으면 먼저 답한 사람이 이기는 규칙이 있기 때문인데 그래서 여러가지 변수가 발생하는게 재미있었습니다.
수많은 추리가 등장하는데 대체로 성별 오인이라던가, 이름이나 묘사 등으로 같은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하게 만들거나 한 사람을 두 사람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등의 서술 트릭이 많습니다. 꽤 그럴듯한 추리도 등장합니다. "마루모가 범인이고, 그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였다."는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왜 마루모가 여자이며, 실제로 범행을 어떻게 저질렀는지에 대한 추리를 여러가지 단서로 뒷받침하여 주장하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높거든요.
피해자 마리코가 남자였다는 추리도 상황 - 마리코는 드레스를 입고 죽어 있었음 - 을 보면 억지스러우나, 마리코는 이름이 아니라 성이었다는 주장은 꽤 합리적이었어요. 앞서 본편 문제 이야기에 마리코의 본가가 안도 히로시게의 <도카이도 53역참>에 그려져 있고, 마리코의 집은 마덮밥 체인점을 한다는 단서가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도카이도 53역참> 스무 번째 역참이 마리코 역참으로 마죽 가게에서 마죽을 먹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는걸 근거로 "마리코"는 성이라는 추리지요. 이를 통해 '피해자 마리코와 다른, 범인인 여성 "마리코"가 있다, 그건 '아키'였다'는 추리로 이어지는 과정도 깔끔합니다. 
이름을 활용한 서술 트릭은 관리인 히데가 사야카 시점일 때만 英라는 이름으로 불리우는 등 그 외에도 많습니다. 
다른 추리들도 볼만한게 몇 가지 있습니다. '범행 현장으로 통하는 유일한 길인 나선계단이 이중 구조로 되어 있어서 실제로는 통로가 2개였다', '다이잉 메시지는 S가 아니라 적분 기호로 등장인물 중 세키 분타 (세키분 - 적분)를 가리킨다' 등이 그러했습니다. 앞서 히데 씨와의 대화에서 택시비에 대한 언급을 통해, 실제 별장에 온 사람이 몇 명인지 추리할 수 있도록 하는 등 단서들도 곳곳에 잘 삽입되어 있고요.
이런 점들만 보면 장르에 깊은 이해를 가진 작가가 썼다는건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본 내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겁니다.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 10' 1위에 오르고 '본격 미스터리 대상' 2위에 등극하기까지 했으니까요.

하지만 엄밀하게 본격 추리물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본격 추리물과 그 장르를 비틀고, 풍자하고 조롱하는 성격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작 중에서도 참가자의 입을 빌려 "성별 오인 트릭 자체는 이제 낡을 대로 낡았잖아. 한때 미스터리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작품에 '마유미'라는 이름이 나오면 거의 백 퍼센트 성별 오인 트릭이 사용됐다고 의심하는게 상식이었을 정도야"라는 말이 나오는 등, 본격 추리물의 작위성을 대놓고 놀립니다. 추리도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것 보다는 이른바 "바카미스 (게임성, 오락성을 과도하게 추구하고 의외성을 주기 위한 목적이 큰 작품들)" 류의 추리가 더 많아요. 고양이 다마가 알고보니 사람으로 발레리나였다던가, 사부로가 바라보았던 창 밖의 "가로수"가 사실은 사람 - "나미키 (가로수)"라는 이름의 - 이었을거라는 추리가 대표적입니다.
게다가 "이야기의 정답을 조작했다", 즉 이야기의 분기를 다수 만들어서 누군가 그럴듯한 추리로 정답을 내 놓을 경우, 다른 분기로 이어지도록 조작했다는 게 '미스터리 아레나' 방송의 정체라서 애초에 공정한 추리가 이루어지는건 불가능했습니다. 결국 마지막에 정답이라고 내 놓는건 앞서 알멩이를 다 뽑아먹어서 억지로 그렇게 만들 수 밖에 없는 황당한 결과일 수 밖에 없고요. 등장인물이자 피해자인 "다이라 사부로"와 다른, "다이라사부로"라는 이름의 인물이 별장에 있었다는 식인데 너무 억지스러워서 할 말이 없을 정도였어요. 이래서야 본격 추리물로 보기는 어렵지요.

설정도 만화적이고 황당하기 그지없습니다. 알고보니 <<미스터리 아레나>> 참가자들은 모두 특수 요원으로 방송이 거짓이라는걸 폭로하기 위해 투입되어 관계자들을 일망타진한다는 결말이기 때문입니다. 전개도 마찬가지라 본편 문제 이야기는 괜찮았지만, 퀴즈쇼 진행 부분은 과장되고 만화적인 묘사가 넘쳐나 읽기 불편했습니다. 풍자와 조롱을 위해 일부러 더욱 과장되게 쓴 듯 하지만, 보다 진지한 분위기로 추리 애호가들의 문답이 이루어지는게 더 나았을 겁니다. 오답자는 장기 이식 운운하며 생명을 건 추리 배틀을 벌인다는 TV 쇼 설정보다는 말이죠. 아니면 아예 히가시노 게이고의 <<명탐정의 규칙>>처럼 가볍게 접근하던가요. 지금의 결과물은 진지한건지, 말도 안되는 농담인건지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신다면 즐길거리가 없지는 않으나, '소설'보다는 '장난'에 가깝습니다. 여러모로 과했어요. 별로 권해드리고 싶지 않습니다. 비슷한 소재라도 히가시고 게이고의 덴카이치 탐정 시리즈 (<<명탐정의 규칙>>, <<명탐정의 저주>>)가 훨씬 괜찮습니다.

덧붙이자면, 작가 이력을 보니 게이오 대학교 문학부 졸업에 파리 부르고뉴 대학 석사학위까지 취득한 사람이더군요. 1963년 생으로 이 작품을 발표한 2016년에는 50대 중반이었고요. 그런 사람이 이런 만화같은 작품을 발표했다는게 의외인데, 한 편으로는 일본식 문화의 저변이 정말 넓고 깊구나 싶은 생각이, 또 다른 한 편으로는 그 정도 나이와 위치니 이런 본격 추리물을 조롱하는 작품을 발표할 수 있었겠구나 싶네요.

2023/06/10

유리탑의 살인 - 치넨 미키토 / 김은모 : 별점 2점

유리탑의 살인 - 4점
치넨 미키토 지음, 김은모 옮김/리드비
<<아래 리뷰에는 진범, 반전,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약물 전달 시스템 트라이던트를 개발하여 엄청난 부를 거머쥔 코즈시마 타로는 자신의 저택 '유리관'에 조촐한 행사를 위해 여러 손님 - 유명 추리 소설가 쿠루마 코신, 편집자 사쿄 코스케, 영능력자 유메요미 스이쇼, 형사 카가미 츠요시, 그리고 명탐정 아오이 츠키요 - 을 초대했다. 유리관에는 손님 외에 집사 오이타 신조, 메이드 토모에 마도카, 요리사 사카이즈미 타이키와 코즈시마 타로의 주치의 이치조 유마가 함께 있었다.
행사 직전, 이치조 유마는 코즈시마 타로를 독살했다. 코즈시마가 동생의 난치병 치료를 특허 분쟁으로 막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연사로 위장할 계획은 즉사하지 않은 코즈시마가 전화를 건 탓에 실패해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뒤이어 집사 오이타, 메이드 마도카가 연달아 밀실에서 살해당한채 발견되자, 유마는 명탐정 아오이 츠키요의 조수, 왓슨 역을 자처하여 컴비를 이루게 되었다. 두 사건의 범인에게 코즈시마 살해까지 떠넘기기 위해서였다.


발표 당시, 미스터리 애호가들 사이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던 작품. 이제서야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 대부호가 만든 기묘한 저택이라는 무대
  • 저택이 고립된 상황에서 벌어지는 3건의 연쇄 살인 사건
  • 모든 사건들은 일종의 밀실 상황
  • 사건은 명탐정이 해결
는 점에서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본격 미스터리입니다. 이 중 한 사건은 화자인 이치조 유마가 이미 저지른 도서 추리물이기도 하고요. 미스터리 애호가들이 좋아할만한 요소는 모두 들어가 있는 셈입니다.

또 사건의 이런 저런 상황이 여러 미스터리 명작들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도 애호가들을 자극하는 요소입니다. 저택에서 벌어진 살인 사건을 <<유리관의 살인>>이라고 부르고, 코즈시마가 남긴 다이잉 메시지는 <<비뚤어진 집>>, <<Y의 비극>>, <<독 초콜릿 사건>>을 의미한다던가, 마도카 사건에서 남겨져 있던 메시지는 '관 시리즈'와 관련이 있으며, 결국 이 모든 진상은 '관 시리즈'와 연결된다는 식입니다.
트릭도 모두 유명 작품에서 따 왔습니다. 오이타 신조 사건에서 특정 시간에 자동 발화시킨 트릭은, 의도적으로 창문이 아침 햇빛을 집중시키도록 만들었다는 점에서 엉클 애브너 시리즈인 <<둠도프 사건>>과 유사합니다. 토모에 마도카의 시체를 밀실 안으로 집어넣는 트릭은 작 중에서도 언급되듯 <<기울어진 저택의 범죄>>가 떠오르고요. 만화 <<외천루>>에서는 아래와 같이 아예 동일하게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내용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더라도, 주요 등장인물들이 모두 미스터리 애호가들이라 별로 중요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온갖 작품들이 언급되고 있어서 읽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후기 퀸 문제 - 작품 속 해결이 진짜 해결인지를 작품 속에서는 증명할 길이 없다 - 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든다던가, 비밀 통로와 암호, 심지어 '독자에게의 도전장'까지 삽입된건 그야말로 미스터리 애호가의 피를 끓게 만들지요.

무엇보다도 '작위적인 상황들은 알고보니 저택 주인 코즈시마 타로가 꾸민 연극이었기 때문이었다!'는 반전은 신선했습니다. '작위적'인게 당연한 상황을 설득력있게 만드는데 이보다 나은 아이디어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괜찮았어요. 엄청난 부자인 코즈시마 타로는 미스터리에 푹 빠진 나머지, 스스로 위대한 걸작을 쓰고 싶어서 트릭을 고안한 뒤, 추리와 관련된 이런 저런 손님들 - 명탐정, 추리 소설 작가, 편집자, 영매 - 을 초대하여 실제로 추리를 하게 만든 것입니다. 연극이니 당연히 코즈시마를 비롯한 피해자들은 죽지 않았었습니다. 지하 감옥에서 등산 조난자들을 대상으로 생체 실험을 한게 들통나서 살해당했다는 유치한 동기 역시 가짜였고요.
코즈시마가 연극을 위해 '유리탑' 안에 이중 나선 구조와 같은 비밀 나선 계단을 설치했다는 진상도 적절하게 써먹고 있습니다 (이 진상이 <<미로관>>과 유사하다는 점도 과연 코즈시마 타로답더군요). 영능력자 유메요미, 그리고 화자 유마까지 알 수 없는 인기척을 계속 느꼈다는 식으로 비밀 계단과 통로에 대한 단서도 공정하게 제공되고 있고요.
트릭도 다른 작품에서 따 온게 많다고는 했지만, 그런대로 볼만했습니다. 특히 오이타 사건에서 식당을 밀실로 만든 트릭은 괜찮았어요. 각설탕을 회전 빗장에 꽂아 넣고 화재를 일으키면, 스프링쿨러가 작동하여 각설탕이 녹아서 빗장이 걸린다는 것인데 현실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 시체에 등유를 끼얹어 화재를 일으킨 원인도 위장하는 등 디테일도 꼼꼼했고요. 명탐정 아오이 츠키요가 괜찮았다고 말할만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미스터리 애호가를 위한 장치와 반전 외에는 과연 그렇게까지 절찬을 받을만한 작품인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듭니다.
우선 본인이 명탐정임을 주장하는 아오이 츠키요는 작위적인걸 넘어서는, 그야말로 현실과는 백만광년은 떨어진 듯한 만화같은 캐릭터라 영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이래서야 "모든게 '연극' 이라서 작위적이었다"는 아이디어는 빛이 바랩니다. 그래봤자, 핵심 등장인물이 가짜보다 더 한 만화라서 영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을 위해서는 보다 진지한, 현실적인 탐정으로 묘사되는게 바람직했습니다.
아오이 츠키요의 비현실성은 진상 부분에서 극에 달합니다. 그녀는 연쇄 살인이 연극임을 초반에 간파하고 실제로 피해자들을 살해했다고 합니다. 졸작 <<유리관의 살인>>을 납득할 수 없어서 본인이 범인이 되는 걸작 메타 미스터리로 만들기 위해서라고요. 이게 무슨 말일까요? 살인이 무슨 장난도 아니고..... 이러한 '메타' 방식 설정은 일본 일부 작품에서 가끔 보곤 했는데, 적절히 잘 사용된 경우는 생각나지 않네요.
명탐정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명탐정을 부르기 위해 불가능 범죄를 저지르곤 했다는 아오이 츠키요의 또다른 배경 설정도 한심하기 그지 없었어요. 시로다이라 쿄의 <<명탐정에게 장미를>>에도 등장했던 설정인데, 그 때도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리뷰를 남겼었지요.
그리고 악당 - 명탐정 대신 명범인 - 이 되기로 결심하고 살인을 저질렀다면, 초지일관 그렇게 나갔어야죠. 마지막 순간에 유마를 구해주고 키스까지 한 다음 사라지는건 최악이었습니다. 캐릭터만 희미하게 만들었을 뿐입니다. 만화나 라이트 노벨 세계관이라면 모를까, 정통 본격물에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코즈시마 타로의 추리 소설이 엉망이라는건 츠키요가 이미 언급했지만, 실제로도 트릭 외에는 건질게 없습니다. 소설에서 진범은 카가미였습니다. 딸이 코즈시마 일당 - 코즈시마와 집사 오이타, 메이드 마도카 - 에게 납치되어 생체 실험을 받다가 죽었다는걸 알고 복수하기 위해서였지요. 그는 모든 진상이 밝혀지고 난 뒤 어차피 죽을 생각이었다며 자살합니다. 그렇다면, 복수를 마치고 죽을 결심을 한 범인이 밀실 살인 사건을 저질렀다는건데, 이게 말이 됩니까?
그리고 경찰이 수사에 본격적으로 나섰다면, 카가미의 동기가 밝혀지는건 시간 문제였습니다. 어차피 빠져나갈 방법도 없으니 트릭을 사용해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없지요. 손님들이 초대되었을 때 범행을 저지를 이유도 당연히 없습니다. 카가미는 이전에도 코즈시마를 방문해서 같이 식사를 한 적도 있었습니다. 다음에도 혼자 찾아와 모두를 죽이는게 더 쉬운 복수였을거에요. 관 시리즈, 특히 <<십각관의 살인>>이 걸작인 이유 중 하나는 범인이 트릭을 만든데 타당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처럼 아무런 설득력없이 수수께끼를 만들기 위해 트릭을 사용한게 아니고요.
또 딸의 복수를 위해서였다면, 조가타케산 사건을 언급하는 것도 이상했고 - 딸은 조가타케산 사건의 피해자라기 보다는, 최근 사건의 실종자이므로 -, 코즈시마 일당의 범행을 드러내기 위해서였다면 돌려 말할 까닭도 없습니다. 직접적으로 복수의 이유를 쓰면 되지요. 나카무라 세이지를 죽이라면서 비밀 통로를 은근히 알려주는건 도무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코즈시마가 유마가 자신을 독살하게끔 유도하여 연기했다는 설정도 어처구니를 상실케 했고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점. 원래는 모든게 연극이었다는 발상을 제외하고는 딱히 건질게 없었습니다. 쉽게 읽히는 라이트 노벨스러운 작풍은 분명한 장점이지만, 추리적으로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네요. 진지한 본격 추리물과는 거리가 멉니다.
예전 <<데드 트릭>>리뷰 에서, 본격 미스터리는 프로레슬링과 비슷하다는 말에 동의한다고 했었는데, 프로레슬링도 형편없고 장난스러운 각본은 욕을 먹기 마련입니다. 제가 나이가 있는 탓에 요새 트렌드와 거리가 있어서 이런 작품을 잘 받아들이지 못하는건 사실이겠지만, 살인을 장난스럽게 다루는 작품은 진심으로 없었으면 합니다. 

2010/04/25

폐허 - 스콧 스미스 / 남문희 : 별점 3점

폐허 - 6점
스콧 스미스 지음, 남문희 옮김/비채

멕시코 휴양지에서 휴가를 즐기던 제프 등 4명의 미국인 커플은 그곳에서 만난 독일인 마티아스와 그리스인 청년들과 친구가 된다. 그러던 어느날 마티아스가 유적 발굴팀을 따라간 동생 헨리히가 있다는 발굴현장으로 떠날때 즉흥적으로 따라가게 된다. 그러나 도착한 유적지에 발을 디뎌놓는 순간 무장한 마야인 원주민들에 의해 포위되고 결국 인적없고 텐트 등만 놓여진 언덕위 공터에 고립되게 되는데...

"심플 플랜"으로 데뷰하여 초대박작가가 된 스콧 스미스가 13년만에 발표한 장편. 이미 북미지역에서는 대박을 이어간 작품이죠. (부럽...) 바로 전날 읽은 "잘린 머리에게 물어봐"와 비슷한 두께인 530여페이지의 책인데 이 책은 "잘린 머리..."와는 다르게 하루만에 다 읽었습니다. 정말이지 손에서 떼기 힘든 재미가 넘치거든요.
사실 설정은 굉장히 뻔합니다. 특정 장소에 고립된 청춘남녀가 생명을 위협하는 크리쳐에 맞서 싸운다는 클로즈드 서클 설정의 작품은 널리고도 널렸죠. 개인적으로는 호수 위 뗏목위에서 기름막같은 아메바때문에 고립되는 대학생들이 등장하는 스티븐 킹의 단편 "뗏목/The Raft"이 바로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생명을 위협하는 이형 (異形) 괴물이 산성 식인 식물이라는 것이 일단 독특하고, 여행자들이 유적에 고립되는 방법과 이유도 비록 원주민들과 말이 통하지 않기는 하지만 분위기와 상황 묘사만으로도 나름 그럴듯하게 설명하고 있어서 충분히 차별화 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스티븐 킹의 작품은 짤막한 단편이기에 위험상황과 괴물의 공격이 비교적 짧은 호흡으로 진행되는 것에 반해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으로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와 상황묘사, 식인 덩굴의 업그레이드되는 공격방식 - 1. 살며시 접근 2.직접 공격 3.말과 향기로 심리공격 4.주인공들을 조정하여 공격 등 - 을 단계별로 자세하게 펼쳐놓아서 읽어나갈수록 업그레이드 되는 공포가 잘 살아있는 것도 이 작품만의 매력이겠죠.
아울러 긴 분량답게 캐릭터도 확실하게 형성해 놓은 것도 마음에 들더군요. 두뇌파와 행동파가 적절히 나뉘고 여자들도 나름의 생각들이 있는 것으로 그려지는 등 이런류의 공포물에서 쉽게 연상할 수 있는 순진하고 멍청한 금발미녀와 덩치만 좋은 근육바보 미국 대학생 캐릭터는 아니니까요. 무엇보다도 말도 통하지 않는 그리스 청년 파블로를 주요 피해자로 내세운게 대박이에요. 말이 통하지 않는 극한의 상황 때문에 허리가 부러지고 다리가 절단되는 처절한 상황이 더 설득력있게 와 닿거든요.
그리고 역시나 뻔하긴 하지만 결말도 마음에 들었어요. 주인공들의 패배야 예상했지만 어떠한 방식인지가 궁금했는데 기대치만큼은 뽑아내주니까요. 젊은이들의 실수가 반복된다는 부분도 괜찮았고요.

하지만 읽는 중간에는 워낙 몰입해서 단점은 별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다 읽고 리뷰를 적으려 하니 몇가지 떠오르긴 합니다. 일단 식인 덩굴의 지능에 대한 묘사가 너무 지나친 것 아닌가 싶네요. 두뇌가 있고 약간의 소리를 흉내낸다는 것 정도가 좋았을텐데 식물이 "말"을 한다는 설정부터는 솔직히 오버로 보였거든요.
그리고 긴 고립의 기간동안 생명을 "유지"하려고만 하지 살아남기위한 적극적인 행동을 보이지 않는다는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의아한 부분이죠. 예를 들어 "소금"으로 원주민들이 식인 덩굴의 번식을 막는다는 것을 알았는데도 불구하고 소금뿌려진 흙을 가져오는 등의 방식으로 식인 덩굴의 위협을 뿌리치려는 시도는 왜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마찬가지로 최후의 수단이긴 하지만 원주민들 사이로 탈주를 하기 위해 방패와 같은 방어막은 갖추려는 시도도 해봄직 했을텐데 말이죠.
아울러 500페이지가 넘는 책을 양장본으로 출간한 출판사의 만행(?) 탓에 출퇴근할때 들고 읽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운동이었어요...

그래도 단점이야 어떻게 되든 확실한건 처음 손에 잡으면 끝까지 읽게만드는, 그야말로 킬링타임용으로는 충분한 웰메이드 호러 스릴러라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여름날 서늘한 기분을 느끼기에 최고의 작품이 아닐까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뭐니뭐니해도 이 책이 주는 가장 중요한 교훈은

"잘 모르는 곳에 함부로 여행을 떠나지 맙시다!"

덧붙이자면, 이 책을 원작으로 한 "루인즈"라는 영화도 있는 모양인데 원작 그대로만 찍어도 본전치기는 할 것 같은데 어떨지 궁금하네요. 평은 별로 좋지는 않은 듯 싶고 예고편을 살짝 봤더니 식인덩굴 움직임이 강조되어 뭔가 포인트를 잘못 잡은 것 같습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