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계 - 유키 하루오 지음, 김은모 옮김/블루홀식스(블루홀6) |
예대 입시생 리에와 그녀의 아버지 오무로는 오랫만에 큰아버지 슈조의 소유였던 에다우치지마섬을 찾았다. 슈조의 갑작스러운 사망 이후, 리조트 개발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일행은 개발회사, 부동산 업자, 건축가 등을 포함해 모두 9명이었다.
그런데 섬에서 대량의 폭탄 재료들이 발견되었고, 그날 밤 부동산 업자 오사나이가 살해당했다. 범인은 열가지 규칙('십계')를 남긴 뒤, 앞으로 사흘 동안 생존자들에게 섬을 떠나지 말 것을 요구했다. 일행은 십계를 지키며 사흘을 버티려고 했지만, 슈조의 친구였던 야노구치, 부동산 업자 후지와라가 차례로 살해당하고 마는데...
유키 하루오의 장편 소설 "십계"는 그의 전작 "방주"와 같은 클로즈드 서클물로, 특유의 반전 매력을 내세운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장점 중 하나는 짧은 분량입니다.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길이로, 빠르게 읽고 즐기기 좋은 점이 매력적입니다. 또한, 전작 "방주"보다는 설득력 있는 무대 설정이 돋보입니다. 부유한 개인의 취미 생활이었던 무인도라는 설정은 현실성은 물론이고, 클로즈드 서클이라는 제한된 공간과 상황에 대한 설득력을 충실히 전해줍니다.
추리 소설로서의 가치도 높습니다.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 단서가(그런대로) 독자에게 공정히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특히 '범인은 왜 자신의 발자국이 아니라 야노구치의 발자국만 지웠을까?'라는 핵심 단서를 통해 결말로 이어지는 추리가 좋았습니다. 야노구치가 범인의 신발을 착각해서 신었기 때문이며, 이렇게 착각할만한 신발은 후지와라의 신발밖에 없어서 범인은 후지와라이다!라는 건데, 아주 합리적이었어요.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가장 큰 문제는 "방주"와 달리 사건의 템포가 느리며, 긴장감이 부족하다는 점입니다. "방주"에서는 제한 시간 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면 모두가 죽을 수 밖에 없어서 긴장감이 느껴지는 반면, "십계"는 제한 시간 내에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는 조건만 지키면 모두가 생존할 수 있다는 설정이라 긴장감을 느끼기 어렵습니다. 등장인물의 입을 빌어 범인이 약속을 어기고 모두를 죽일지도 모른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는 독자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작가가 애써 제시한 '십계'라는 공정한 룰이 깨지면, 본격물이라는 작품의 정체성을 해칠테니까요.
또 아야카와가 진범임을 반전처럼 밝히는 마지막 장면은 추리물로서는 불공정합니다. 애초에 아야카와는 리에와 오사나이가 살해당한 밤에 같은 방을 썼기에 알리바이가 성립되었었고, 심지어 리에는 주요 화자로 등장하여 아야카와의 알리바이를 단단하게 만들어 주기까지 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장면에서 리에도 그녀가 범인이라는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고 설명하는건 반칙입니다. 차라리 아예 몰랐다고 했더라면 모를까요.
아울러 리에가 아야카와의 범행을 숨긴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점도 독자에게 혼란을 줍니다. 최소한 아야카와가 범행 이유- 폭탄을 만든 일당이 그들을 죽이려 해서 먼저 죽였다! -를 설명하고 같은 편이 되기를 설득했다는 설정은 필요했습니다.
작위적인 전개도 눈에 띕니다. 오사나이의 살해 이후 야노구치와 후지와라가 차례로 아야카와의 꾀임에 빠져 홀로 행동하다 살해당했다는 설정은 합리적이지 못합니다. 본인이 유력한 다음 희생자라는 점이 명확한 상황에서, 알리바이가 있다고 하더라도 아야카와를 쉽게 믿고 행동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습니다. 또한, 섬에 폭탄 재료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도 경찰에 신고하지 않은 점 역시 작 중에서는 실수로 설명되지만, 독자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전작보다는 낫다고 해도 비현실적인 요소 역시 여전합니다. 예를 들어, 무인도에 엄청난 양의 폭탄이 있다는 설정은 현실적이지 않으며, 폭탄을 만든 인물들이 왜 그것을 제작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합니다. 중요한 연결고리가 끊겨 있다는 느낌을 줍니다.
캐릭터 역시 평면적입니다. 등장인물 대부분이 다른 작품에서 자주 보아왔던 스테레오 타입으로 구성되어 있어 매력이 부족합니다. 특히 탐정이자 천재 범죄자인 아야카와는 흥미롭기보다는 진부하게 느껴집니다. 결말에서 리에에게 반 협박식으로 건네는 마지막 인사도 영 별로였고요. 다른 인물들도 건축사 노무라 씨 정도를 제외하면 특별한 묘사가 없어서 그들이 처한 위급한 상황이 잘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전작만큼의 화제를 불러오지 못했는데, 읽어보니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전작을 정 반대로 비틀기는 했는데, 단점은 거의 그대로이고 좋았던 장점마저 희석되고 말았네요.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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