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식 살인 - 시릴 헤어 지음, 이경아 옮김/엘릭시르 |
<하기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병약한 워벡경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친지들을 초대한다. 초대된 사람들은 아들인 로버트, 가까운 친척이자 재무장관인 줄리어스 워벡, 로버트와 연인이었던 백작가의 딸 레이디 커밀라, 오래된 지인 카스테어스 부인. 그리고 워벡홀에서 사료를 연구하던 보트윙크 박사가 함께 하게된다.
그러나 참석자들 간의 갈등이 여러가지 이유 - 정치적 견해 차이, 로버트의 무례함 등 - 로 심화되던 중 크리스마스가 되는 자정에 로버트가 모두의 앞에서 독살당하는데....
이 블로그를 운영하면서 누누이 이야기한대로 저는 정통 고전물의 팬입니다. 허나 고전 퍼즐 미스터리의 팬일 뿐이지 이른바 "영국식" 스타일은 취향이 아니에요. 신사 숙녀라고 불리우는 귀족과 부르조아들이 등장하여 딱히 재미있지도 않은 유머로 예법이다 뭐다 하면서 장황하게 기이한 가식과 가증을 떠는 분위기가 싫기 때문이죠. 한마디로 "잘난척"이 보기 싫달까요. 그래서 피터경 시리즈 역시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제가 싫어하는 정통파 영국식 스타일의 종합 선물세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단 무대부터 전통있는 워벡 가문의 오래된 저택입니다. 그것도 정통 영국식 추리소설답게 눈으로 고립된, 클로즈드 써클 상황이죠.
범행 현장에 있던 인물도 워백 가문의 후계자, 가문의 친척인 재무장관, 오래된 친구인 정치가의 아내 (이자 부유한 숙녀), 그리고 후계자에게 연심을 품고 있는 백작 가문의 딸, 충직한 집사, 마지막으로 워벡 가문에 연구차 방문해있던 보트윙크 박사라는 구성입니다. 귀족, 신사, 숙녀, 하인에 손님까지! 정말 완벽한 파티죠. 게다가 하나같이 영국식 귀족, 부르조아 예법에 쪄들어 있는건 물론이고요. 덕분에 첫 피해자로 워백 가문의 후계자 로버트가 독살당했을 때에는 쾌재를 부를 정도였어요. 그 정도로 재수없고 짜증나는 극우 파시스트 귀족 떨거지였습니다.
그런데 놀라운건 이러한 정통 영국식 스타일의 향연에도 불구하고 의외로 재미있다는 것입니다. 영국식 스타일이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이야기 전개의 핵심 장치로 사용된 덕분입니다. 예를 들자면 집사 브리그스가 자신의 딸과 로버트의 결혼사실, 손자의 출생을 손님들에게 철저하게 비밀로 하는 것이 대표적이죠. 브리그스의 함구는 정통 영국식 부르조아 예법 덕에 완벽한 설득력을 갖추었으면서도 사건의 동기, 전개, 결말이자 파국을 완벽하게 만드는데 핵심 역할을 수행합니다.
또 탐정역인 보트윙크 박사가 외국인이자 역사학자라는 설정도 빼어난 편이에요. 외국인이라 이러한 영국식 관습의 이면에 감추어진 진실을 좌충우돌하면서 깨닫는 과정도 재미나지만 사건의 핵심 동기가 과거 영국에 실존했던 사건과 동일하다는 것을 바로 간파해 내는 것에 굉장한 설득력을 부여해주기 때문이죠.
별다른 단서나 증거가 있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탐정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윌리엄 피트라는 실존인물이 관련된 실제 역사를 가지고 있음직한 사건을 그려냈다는 점에서는 역사 추리물같은 느낌도 전해주네요. 아울러 동기가 정말로 "영국식" 이라는 점에서 기대에 부합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문제도 확실합니다. 바로 카스테어스 부인이 범행을 저지른 것이 와닿지 않는다는 점이에요. 독약병이 워벡 저택에 있었던 물건이라는 것을 볼 때 범행은 즉흥적인 결심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재무장관이 경호차 형사까지 대동한 상황에서 "독살"을 결심하고 감행할 이유는 전혀 설명되지 않아요. 그것도 저택이 고립된 상황이라 어차피 방 안에 있는 누군가가 범인인게 분명하다면, 그리고 누가 득을 보게 될 지가 결과로서 설명되면 빠져나가기 쉽지 않았을 것이잖아요? 그나마 유일하게 "배신" 이라는 동기가 있는 레이디 커밀라 쪽으로 뒤집어 씌우려고 한 것일 수도 있으나 범행 시점에는 그러한 사실을 몰랐기에 설득력이 없어요. 줄리어스를 설득하여 자살로 몰아가는 것도 작중 등장하듯 잘 되었을 것 같지도 않고요.
개인적으로는 이렇게 작위를 이용한 복잡한 상황을 이용하느니 줄리어스를 직접적으로 독살하고 정치적으로 날선 대립을 보인 파시스트 로버트에게 뒤집어 씌우는게 더 현실적이었을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더 당연한 사람의 심리겠죠.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영국식 설정을 작품에 녹여낸 솜씨가 탁월하여 무척 재미있게, 시간가는줄 모르게 읽은 작품이기는 하나 상기의 단점 역시 명확하기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제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영국식"이라는 설정도 재미있을 수 있다는 새로운 시각을 알려준 작품임에는 분명해요. 고전 추리소설 애호가 분들이시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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