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대 유물로 보는 세계사 - 닐 맥그리거 지음, 강미경 옮김/다산초당(다산북스) |
최근 산 책 중 가장 두껍고 무거운 책입니다. 대영 박물관이 소장한 유물 중 인류의 과거에서부터 현재를 꿰뚫는 대표적인 유물 100개를 엄선한 뒤, 해당 유물로 알 수 있는 역사적, 문화적, 인류학적 정보를 전해줍니다. 인류가 처음 등장하여, 처음으로 도구를 만들고, 농경 생활을 시작하고, 목축을 시작하고, 문명이 생기고, 조직이 커져 나라가 되고, 종교가 등장하는 등의 과정을 그 시기를 대표하는 유물을 통해 상세하게 알려주는 식이지요. 매일 자기 전 몇 개씩 읽었는데 드디어 완독하게 되었네요.
유물 하나당 길지 않은 분량(5장 안팎)으로 구성되어 있어 쉽게 읽을 수 있을 뿐더러, 처음 보는 신기한 유물도 많고 분량에 비하면 담고 있는 내용과 시각이 새롭고 독특한 것이 많아 좋았습니다. 석기를 가지고 농경 생활이 시작되고, 사람들이 지역에 따라 2차 가공이 필요한 곡물을 재배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이 그러합니다. 바로 "가공"의 필요성 때문에 다른 동물들과 경쟁을 할 필요가 적다는 점 때문이라는데 무릎을 칠 만 했어요. 당시 인류는 거의 헐벗은 상태로 별다른 도구도 없었을 테니, 웬만한 초식동물과 경쟁하기도 힘겨웠을 테니까요.
다기 세트를 가지고 당시 영국을 분석하는 발상도 굉장히 새롭고 재미있었습니다. 차가 맥주를 제치고 국민 음료로 부상하면서 영국이 바뀌어 갔던 그 시점을 다기 세트로 설명해주는데, 예를 들면 다기세트 중에 우유 단지가 포함되어 있는 이유는 도시 거주자가 우유를 마셨기 때문이며 이는 교외 철도망이 등장했다는 뜻이라고 설명해 주는 식입니다.
그리고 17세기 시아파 이란의 아바스 1세는 보기 드문 정치적 식견, 종교적 실용주의를 지닌 대단한 통치자였더군요! 자신의 영지에 기독교 성당까지 지어주다니! 게다가 지금 서방과 날선 대립을 보이고 있는 현재의 이란 헌법에서도 모든 종교의 자유를 보장한다고 있다는 것 역시 처음 알았네요. 놀랐습니다.
그 외에 인상적이었던 것을 몇 가지 더 꼽아보면, 18세기 경 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건너간 북을 우선 꼽고 싶습니다. 가슴 아픈 과거의 유물로 아프리카 노예가 유럽인의 배를 타고 영국령 북아메리카에 도착한 뒤, 고향을 추억하는 유일한 물건으로 애지중지했을 것으로 추측되는데, 흥미롭게도 북을 덮고 있는 재료는 북아메리카산 사슴 가죽으로 원주민, 즉 인디언과의 거래를 통해 입수했을 가능성이 높고 이것은 18세기 아메리카에서 아프리카 흑인과 원주민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증명한다고 합니다. 그들 사이에는 결혼을 비롯한 활발한 교류가 있었다고 하거든요. 흑인 노예가 영국 땅에서 인디언과 결혼했다니까 뭔가 대하 서사극 배경 설명 같습니다. 그냥 드라마가 한 편 그려질 정도에요.
쿡 선장이 선물로 받았다는 하와이의 깃털 투구도 기억에 남습니다. 하와이에서는 깃털이 가장 귀한 원료였고 새 한 마리당 네 개만 구할 수 있는 깃털이 1만 개 가까이 필요하다니, 대체 이게 돈으로는 얼마나 할지 감도 안 잡히네요.
호쿠사이의 작품인 "거대한 파도"가 독일에서 개발된 합성안료로 제작되었다는 것, 즉 일본인들이 외세의 위험을 인식하지만 작품은 실용적인 목적으로 외세의 기술이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일본이 제국으로 변모한 과정에 대한 어떤 시사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했고요.
그리고 영국에서 발견된 황금 망토는 그 시기를 대표하는 유물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착용한 인물이 나이가 어리거나 여성이었을 것이다라는 것을 크기, 그리고 청동기 시대 당시에는 평균 수명이 25살도 안 되었을 것이기에 그것을 착용할 만한 리더도 어렸던 것이 확실하다!고 해석하는 부분에서 추리적인 발상이 엿보여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아시아 계열의 유물이 상대적으로 적다는 점, 반대로 "세계"라는 시각에서 볼 때에 딱히 큰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없을 영국 출토 유물은 되려 눈에 띄인다는건 아쉽습니다. 대영 박물관 기준이기에 어쩔 수 없는 점이겠지만요.
또 고대에서 중세, 근대, 현대로 올수록 책의 재미가 점점 떨어집니다. 뒤로 갈수록 별 관심도 없고 의미도 없고 재미도 크게 느껴지지 않은 탓입니다. 제가 고대를 더 좋아하는 취향이기도 하고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할 뿐, 책의 컨셉과 지적인 흥분을 안겨다주는 내용 및 만든 완성도 모두 뛰어난 책입니다. 도판도 최고 수준이고요. 원작이라 할 수 있는 BBC의 다큐멘터리도 꼭 봐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