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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3

까마귀의 엄지 - 미치오 슈스케 / 유은정 : 별점 2.5점

까마귀의 엄지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유은정 옮김/문학동네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케자와는 실수로 직장 동료 빚을 떠앉은 뒤 사채를 끌어쓰다가 몰락하고 사채업자 밑에서 일하게 되었다. 채무자의 남은 돈을 쥐어짜는 일이었다. 그러다 한 편모 가정의 어머니가 자살한 뒤 다카자와는 충격을 받고 조직의 비밀 서류를 빼돌려 경찰에 신고했다. 조직은 괴멸되고 두목 히구치는 체포되었지만, 다케자와는 보복을 당해 열두살 딸 사요를 잃고 말았다.
7년이 흘러 다케자와는 똑같이 사채로 아내를 잃은 데쓰와 팀을 이루어 자잘한 사기를 저지르며 먹고 살았다. 다케자와 때문에 자살한 여자의 딸들 - 마히로, 야히로 - 과 그 남자친구 -간타로 - 와 우연찮게 동거하던 중, 다케자와를 노리는 누군가가 나타났다. 히구치의 복수임을 직감한 다케자와는 도망치려 했지만, 데쓰와 마히로, 야히로, 간타로의 조언과 도움으로 반격을 결심했다.
도청 장치를 설치한 선불폰을 이용하여 사채 조직의 계좌 정보를 빼낸 뒤, 도청 탐지 업체를 위장하여 조직에 잠입하여 금고 속 현금을 털 계획을 세웠고, 5명 모두가 역할을 맡고 실행에 나서는데....


미치오 슈스케의 작품은 여태까지 모두 일곱 권 읽어보았습니다.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은 좋았지만, 그 외는 대체로 그냥저냥이었어요. 서술 트릭과 무리한 설정에 기대는 경우가 많았던 탓입니다. 그래도 이 작품은 이런저런 랭킹에서 추천했고, 아베 히로시 주연의 영화로도 개봉된 적이 있는 대표작이기에 관심이 가던 차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작품은 크게 심각한 사채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는 전반부, 유쾌한 범죄를 그리는 후반부로 나뉩니다. 전반부에서 묘사되는 다케자와와 데쓰의 과거는 사채가 원흉이 된 가족의 파멸이라는 점에서 <<화차>>를 떠오르게 만드는데, 중반 이후 분위기는 돌변합니다. 다양한 인물들이 개성을 뽐내며, 비교적 유쾌하게 흘러가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외눈박이 원숭이>>와 비슷하게요. 또 다케자와 일당이 히구치 조직의 돈을 빼돌리려고 한탕 작전의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과정은 <<스팅>>이나 <<뉴욕을 털어라>>와 같은 케이퍼 소설 - 범죄자가 주인공으로 범죄를 유쾌하고 가볍게 다룬 소설 - 이라고 보아도 무방하고요.

그런데 전반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다케자와가 빚을 진 이유는 본인 실수입니다. 무고한 소시민이 사채의 늪에 빠져든게 아니라요. 일종의 사기를 당한거긴 하지만, 누구 탓을 할 건 못됩니다. 빚을 졌으면 갚아야죠.
게다가 딸마저 잃고 좌절한 다케자와가 '사기'로 먹고 살게 되었다는건 최악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을 등쳐먹는 사기꾼이야말로 사채업자보다 더 나쁜, 최악의 인물 아닌가요?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던들, 현재의 사기 행위에 면죄부가 될 수는 없습니다. 자잘한 범죄를 통해 기획력, 행동력을 선보이며 마지막 큰 '한탕'을 계획할만한 인물이라는걸 설명하기 위한 어쩔 수 없던 설정이라 생각되는데, 감정이입하기는 힘들었습니다. 사기꾼 주인공이 나올 수는 있어요. 다만 그럴거라면, <<스팅>> 처럼 대놓고 범죄물로 그리는게 나았을겁니다. 괜히 사채업자의 피해자라는 설정을 덧붙일 필요는 없었습니다. 이야기와 별 관계도 없고요.
자잘한 사기 행각 - 은행에서 출금한 손님의 현금을 빼돌리는 사기, 데쓰와 다케자와가 처음 만날 때 데쓰가 저질렀던 자물쇠 교체 사기, 전당포를 이용한 사기 등 - 도 재미는 있었지만 치밀하고 잘 짜여진 이야기는 아니었습니다.
아울러 <<외눈박이 원숭이>>가 떠오르는 다소 과장된 인물 설정도 감정이입을 방해합니다. 다케자와와 데쓰 외에는 비현실적인 인물들인 탓입니다. 화룡정점은 마술사 간타로입니다. 말투와 행동 묘사 모두가 도저히 현실에 존재하는 사람같지 않았어요.

그래도 후반부 한탕 작전은 꽤 재미있었습니다. 아래와 같이 그럴싸한 단계를 거치면서 상당한 설득력을 보여주는 덕분이지요. 흥미진진하기도 하고요.
  1. 일당은 싼 가격으로 유혹하여 히구치의 사채 조직이 도청 장치를 심어놓은 선불폰을 구입하게 만들었다.
  2. 도청으로 사채 조직의 계좌 번호를 빼 낸 뒤, 이를 알리는 편지를 보내어 계좌 속 현금을 사무실에 보관하게 만든다.
  3. 도청 감지 업체를 위장하여 사무실에 잠입한 뒤, 금고 속에 도청 장치가 있다고 속여 금고를 열게 만든다.
  4. 장난감 총을 진짜처럼 보이도록 속여 돈을 강탈한다.
  5. 달아나던 마히로가 건물에서 떨어져 죽은 것 처럼 위장하고 돈을 빼돌린다. (돈이 들었던 봉투를 바꿔치기 함)
알고보니 작전은 히구치가 이미 알고 있었으며 히구치가 모든걸 용서하고 끝낸다는 마무리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는 다들 과거를 잊고 각자의 인생을 사는 완벽한 해피 엔딩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일당이 저지른 행위는 엄연히 범죄이니만큼 이 정도로 마무리되는게 현실적이었겠지요.

하지만 문제가 없지는 않습니다. 특히 가짜 총까지 동원해서 돈을 훔치려고 했다는건 억지스러웠습니다. 일당 중에 마술사가 있었으니, 자연스럽게 봉투를 바꿔치기하는게 더 현실적이었을거에요. 계획대로 히구치 조직이 연극에 속아넘어갔다 하더라도, 금고에 돈을 돌려 놓을 때 봉투가 바뀐걸 알아챘을테니까요. 저 연극이 그렇게 시간을 많이 벌어주었을지 잘 모르겠습니다. 불법 추심 사채업체라 하더라도, 돈을 훔쳐 달아나던 사람이 떨어져 죽었다고 그냥 돈만 회수하고 물러난다는 것도 애매했습니다. 돈을 어떻게 모았건 간에, 모은 돈을 도둑맞았으니 엄연히 피해자입니다. 구태여 몸을 사릴 필요는 없어요.

다행히 마지막 반전이 이 단점들을 한 방에 해결해 줍니다. 다케자와 일당이 모든걸 걸었던 한탕 작전은 데쓰가 꾸민 연극이었다는 반전입니다.
데쓰는 마히로, 야히로 자매의 아버지로 자기가 집을 떠난 뒤 아내가 자살한 것에 대한 복수, 다케자와에 대한 연민 등이 겹쳐 남은 사람들이 모든걸 털고 새롭게 일어날 수 있도록 이런 일을 벌였던 겁니다. 그는 굉장한 경력과 실력의 사기꾼으로 연극에 사용한 거액의 돈은 진짜 히구치에게 사기쳐서 확보했고요. 그래서 다소 어설퍼보였던 작전, 그리고 이상할정도로 낭만적이었던 결과 - 히구치가 모든걸 용서하고 놓아주는 - 가 설명됩니다. 다케자와가 '사기꾼'이라서 마음에 들지 않았던 전반부도, 사기는 나쁘다는걸 확실하게 알려주며 마무리되어서 납득할 수 있게 만들고요.
데쓰가 모든걸 꾸몄다는걸 교묘하게 이야기 속에 숨겨서 진행한 것 역시 감탄스러웠습니다. 초반, 데쓰가 애너그램에 능하다는 것에서 시작해서 다케자와가 데쓰의 사기를 눈치챌 때부터 모든 부분에 관련된 단서를 교묘하게 삽입하고 있으며, 이를 마지막에 드러내는 솜씨는 절묘했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 그냥 케이퍼 범죄물로 끌고가는게 훨씬 좋았을거라는 생각은 들지만, 한 번 읽어볼만한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영화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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