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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6/25

658, 우연히 - 존 버든 / 이진 : 별점 2.5점

658, 우연히 - 6점
존 버든 지음, 이진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핵심 트릭과 진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은퇴한 전설적인 뉴욕 경찰 거니에게 대학동창 멜러리가 찾아왔다. 1부터 1000까지의 숫자 중 무작위로 자신이 떠올린 숫자를 알아맞춘 누군가가 자기를 협박하고 있다는 걱정을 털어 놓기 위해서였다. 경찰에 신고하라는 거니의 지시를 자신의 사업 - 조금 수상쩍은 일종의 종교단체 - 핑계를 대며 회피하던 멜러리는 결국 살해당하고 말았다. 사건 현장도 기묘한 점 - 허공으로 사라진 듯한 발자국, 총을 쏜 뒤 깨진 병으로 목을 찌른 점 등 - 투성이었다.
거니는 지방검사 클라인의 요청으로 수사본부에 자문역으로 참여했고, 브롱크스와 소더턴에서 잇달아 일어난 살인 사건이 동일범의 소행이라는걸 알아냈다. 범인은 경찰과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었다....


<<유리탑의 살인>>에 꽤 중요하게 언급되었던 작품. 소개가 멋드러지고 재미있어 보여서 바로 집어들게 되었습니다. 
"범인은 1에서 1000까지의 수 중 피해자가 아무렇게나 떠올린 숫자를 어떻게 맞출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과 함께 시작되는 도입부는 기대에 부응합니다. 아주 흥미로왔거든요. 살인이 벌어진 뒤, 현장의 범인 발자국을 따라가보니 허공으로 떠오른 듯 갑자기 사라졌다는 엽기적인 현장도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었고요. 범인이 살인 현장에 이전 사건이 일어났던 장소에 대한 단서를 남기며 - 작약 (피어니), 넙치 (플라운더) - 경찰과 게임을 벌이는 전개도 재미있었습니다.
기상천외한 트릭, 불가능 범죄에 연쇄 살인극, 거기에 범인과의 두뇌싸움까지 결합되어 있으니 본격물로의 판은 제대로 깔린 셈입니다. 이런 작품을 21세기에 볼 수 있다는게 놀랍네요.

특히 도입부를 장식했던 '숫자 맞추기' 트릭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원리는 유명한 '주식 투자 사기'와 같아요. 여러명에게 '숫자를 생각하라'는 편지를 보내고, 그 뒤 '너가 생각한건 이 숫자야'라는 편지에 모두 똑같은 숫자를 써서 보내는 겁니다. 그러면 그 숫자를 생각했던 사람은 깜짝 놀라며 범인에게 조종되고 마는 것이고요. 범인이 편지를 보낼 대상자가 많으면 많을 수록 그런 사람은 늘어나게 됩니다. 문제는 주식이 오르냐, 내리냐와 같은 단순한 이지선다가 아니라 1부터 1000까지의 광범위한 숫자라는게 핵심인데, 챗 GPT에게 물어보니 "1부터 1000까지의 숫자 중에서 무작위로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 10000명이 각자 선택하는 경우의 수는 1000의 10000승으로 같은 숫자를 선택하는 경우의 수는 약 1/1000이 됩니다. 즉, 10000명이 각자 1부터 1000까지의 숫자 중에서 무작위로 하나를 선택하는 경우, 약 10명 정도가 같은 숫자를 선택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라고 하네요. 범인처럼 약 수만명에 이르는 광범위한 DB를 확보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시도해볼 수 있는 방법인거지요. 누구나 알고 있음직한 아이디어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고 그럴듯하게 만들어냈다는건 아무리 칭찬해도 부족하지가 않습니다.
트릭과 결합된 범인의 행동도 설득력이 넘칩니다. 범인은 당첨된 - 숫자를 맞춘 - 사람들에게 약간의 돈 (200여 달러)을 수표로 보내도록 유도합니다. 자신이 이런 숫자를 알 정도로 전지전능하고, 너의 비밀도 알고 있다면서요. 그러면 뭔가 비밀이 있는 사람들은 수표를 보낼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범인은 아는게 하나도 없지만 이렇게 받은 수표를 이용하여 피해자들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게 됩니다.
형사답지않고 프로파일러에 가까운 거니 형사의 활약도 독특했습니다. 범인 입장에서 왜 그랬는지?를 생각하고 추리한다던가, 범인의 심리를 예상해서 위기를 타개하는 장면들이 그러합니다. 과장이 심한 측면은 있지만 나름 볼 만 했어요. 아내와의 대화로 수수께끼를 풀어가는 묘사도 기존 컨텐츠들의 거친 상남자 뉴욕 형사들과는 달랐고요.

그러나 도입부의 숫자 트릭 외의 추리적 요소들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전화로 생각한 숫자를 말하게 한 뒤, 우편함의 편지를 보라고 했던 두 번째의 숫자 맞추는 트릭이 대표적입니다. 숫자를 듣고 편지를 우편함에 넣은게 당연하지요. 실제로도 그러했고요. 신발 밑창을 거꾸로 붙인 장화를 신고 범행을 저질러서 허공으로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는 트릭은 유치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트릭은 피해자를 골라내고, 이름과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서라는 목적이 분명합니다만, 뒤이은 트릭들은 이렇게 범행을 저지를 당위성을 확보하지 못힌다는 문제가 있습니다. 두 번째 숫자 맞추기를 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멜러리를 죽였을테고, 이미 죽였다면 현장을 기묘하게 위장할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를 위해 덧붙인 경찰과 게임을 하기 위해서? 라는 설정은 억지스러웠고요.
주정뱅이 경찰이었던 아버지 탓에 어머니가 장애를 얻어서 복수를 시작했다는 범인의 동기도 납득하기 힘들었어요. 그렇다면 범행 대상도 주정뱅이 경찰이었어야 했는데, 금주 치료를 받은 사람들을 죽이고 다닌건 다소 이치에 맞지 않아 보였거든요.
범인의 총구 앞에 놓인 나르도 반장을 구하기 위해 거니가 범인을 도발하면서 시간을 끌고, 이 틈에 나르도 반장이 술병을 던져 범인을 죽인다는 결말도 작위적이었습니다.
아울러 좋다는 첫 번째 트릭도 후보자가 많아지면 들통날 우려가 많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SNS 등 소통 수단이 많은 지금보다는 인터넷 등이 덜 발달한 시대에 적절했을 트릭이에요.

경찰의 수사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범인이 수표를 보내도록 유도한 사서함 주인 더모트를 철저하게 조사하지 않은게 대표적입니다. 범인이 그 사서함에 접근해서, 수표를 빼돌려 주소를 알아낸건 명확합니다. 그렇다면 수표를 보는게 쉬웠을 더모트가 유력한 용의자가 되는건 당연한 이치입니다.
범인이 어떻게 범행 현장에서 개인 흔적을 철저히 지웠는지에 대한 설명도 없어서 아쉬웠습니다. 전혀 다른 도시에서 무려 3건이나 범행을 저질렀는데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운다? 현대의 과학 수사를 일반 범죄자가 벗어나기는 거의 무리가 아닐까 싶네요. 이런 부분은 대충 넘어가고 있는데, 설득력을 갖추려면 보다 상세한 디테일이 필요했습니다.

너무 길다는 문제도 큽니다. 사건과 관계된 이야기로 분량이 늘어났다면야 괜찮았겠지만, 거니 형사의 지극히 개인적인 사진 작업들과 여러가지 생각, 꿈, 아들과의 인연과 사건 등이 차지하는 비중이 높은건 지루함만 더해줄 뿐이었습니다. 부인과의 긴장감 느껴지는 관계도 마찬가지고요.
그냥 집에서 쉬면서 편하게 사건 이야기를 하다가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잡으면 안되나요? 프렌치 경감처럼요. 현대물이라고 다 이혼남에 가정 내 위기를 겪는건 아닌데 말이지요. 필요한 설명보다 쓸데없는 부분의 디테일만 넘치는 셈입니다.

그래도 숫자 맞추기 트릭에 대한 발상만큼은 좋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분량을 줄이고 범행 과정의 설득력을 보강했더라면 아주 괜찮은 작품이 될 수 있었을겁니다. 그래도 본격적인 추리물 애호가라면 즐길만한 작품인건 분명합니다.

덧 : 유리탑의 살인에서는 이 작품의 '658'이 추리 소설에서 가장 대표적인 세자리 숫자라는 식으로 언급하는데, 추리 소설에서 가장 유명한 숫자는 '813'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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