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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02/04

스파이와 배신자 - 벤 매킨타이어 / 김승욱 : 별점 4점

스파이와 배신자 - 8점
벤 매킨타이어 지음, 김승욱 옮김/열린책들

1970~80년대 영국 정보부서 M16와 내통하던 KGB 최고위급 간부(KGB 런던 지부장)였던 올레크 고르디엡스키에 대한 논픽션.

결론부터 말하면, 대박입니다. 냉전시대 여러 첩보 작전들이 굉장히 상세하며, 드라마틱하게 소개되어 큰 재미를 안겨주는 덕분입니다. 특히 고르디엡스키의 정체가 들통나서 모스크바로 소환된 뒤부터는 논픽션이지만 왠만한 스파이 소설보는 견줄 수 없을 정도로 흥미진진합니다. 고르디엡스키가 궁지에 몰리며 수렁에 빠지는 과정, 이런 상황을 예상하고 설계되었던 '핌리코 작전'의 가동, 그리고 고르디엡스키의 목숨을 건 소련으로부터의 탈출이 이어지는데 정말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실제로 진행되었던 작전이라 픽션에서는 주기 어려운 생생한 디테일도 가득합니다. 핌리코 작전 때 차 트렁크에 있는 고르디엡스키의 냄새를 지우기 위해 아기 기저귀를 차 트렁크 위에 올려놓고 갈았다는 것처럼요. 소련 당국의 안일한 태도 - 그래서 탈출을 눈치채지 못했음 - 도 오히려 설득력있게 다가옵니다. 픽션이라면 허술하다고 비판받았을테지만요.
이런 디테일들은 올레크가 M16과 안가에서 만나 내통하는 상세한 과정, 당시 기술로는 최고 수준의 정교한 라이터 내장 카메라, 스파이가 메시지를 잘 받았다는 답이 맥주병 뚜껑을 올려놓는 것인데 '진저비어' 병뚜껑을 올려둔건 가지고 토론을 벌였다던는 등으로 책 전체에 걸쳐 빼곡하게 들어차 있습니다.

실제 스파이들을 둘러 싼 첩보 과정도 실감나게 그려집니다. 대표적인게 고르디엡스키의 정보를 활용하기 위해 고심하는 부분입니다. 쉽게 생각하면 첩자의 정보를 그냥 활용할 것 같은데, 실제로는 그리 간닪난 일이 아니더라고요. 적의 깊숙한 곳에서 활동하는 첩자가 우리 진영 내 첩자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어 그들을 모두 체포했다면, 적 역시 자기들 내부에 첩자가 있다는걸 알아챌 수 있으니까요. 때문에 M16는 고르디엡스키의 정보를 길게 보고 이용하는걸 택했지만, 결국 정보를 이용한 탓에 고르디엡스키의 정체는 드러나게 됩니다. 
CIA가 고르디엡스키의 정체를 알아낸 과정도 왠만한 추리 소설은 비벼보기도 힘듭니다. 간략하게 설명하자면, CIA는 M16에서 제공한 라이언 작전 관련 정보로 정보원이 KGB 요원이라는걸 알았습니다. 보고서가 정기적으로 날아오는 것으로는 그 사람이 M16과 자주 만난다, 그렇다면 그는 소련 밖에 있고 영국에 있을 확률이 높다고 추리했습니다. 전달된 정보는 기술 정보나 군사 정보보다 정치 정보가 많다는 것으로 그가 제1주요부 PR라인에 근무한다는 걸 알려주었고요. 마지막으로 KGB 내부 첩자라면 서방의 소련 첩자를 알려주었을텐데, 최근 소련이 잃은 첩자들은 노르웨이의 호비크와 트레홀트, 스웨덴의 베릴링, 영국의 마이클 베터니였습니다. 호비크와 베릴링이 체포되었을 때 스칸디나비아에 있었고, 트레홀트와 베터니가 잡혔을 때 영국에 있었던 사람은? 올레크 고르디엡스키 뿐이었습니다! 이어진 올레크의 과거 조사는 그가 M16의 내부 첩자라는건 분명히 드러나게 만들었지요. 이렇게 CIA가 알아낸 내부 첩자의 정체를 CIA의 배신자 올드리치 에임스가 밀고하여 올레크가 위기에 빠졌던 것입니다.

고르디엡스키의 활약(?)과 함께 당시 국제 정세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도 설명되는데 냉전 때 KGB 수장이었던, 그리고 소련 서기장까지 올랐던 유리 안드로포프가 실제 서방의 핵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KGB는 서방의 선제 핵 공격 징후를 다각도로 포착하기 위한 '라이언 작전'을 진행했었으며, '에이블 아처' 훈련 당시가 가장 큰 위기 상황이었다는 등의 비화도 놀라왔습니다. 
라이언 작전 당시 크렘린은 '혈액 은행'이 진짜 은행처럼 혈액을 사고 파는 곳인줄 알았다는건 좀 웃겼고요.

고르디엡스키라는 인물도 무척이나 독특한 매력을 전해줍니다. 우선 그가 조국을 배신한 이유는 공산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과 혐오 탓이었다는게 놀라왔습니다. 이 책에 나온 다른 스파이들은 모두 돈 때문에 변절했는데 말이지요. 본인은 '옳은 일'을 하고 있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는 점, 그리고 정보를 넘긴걸 다른 반체제 활동과 동일시했다는 올레크의 생각도 신선했어요. 작곡가 쇼스타코비치는 음악으로, 작가 솔제니친은 글로 싸웠듯이 KGB 요원인 올레크는 첩보 세계에서 정보를 활용하여 싸울 수 밖에 없었다면서요.
 
하지만 문제는 그의 이상이 무엇이었던간에 고르디엡스키가 조국을 배신한 배신자라는 사실이 변하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가족을 버리고 홀로 도주한 비겁자이기도 하고요. 이런 인물에 대해 칭송하다시피하는 내용을 쓴건 적합하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그의 공적이라고 책에서 설명되는 것들의 실체도 모호하고요. 책에서는 소련이 선제 핵 공격을 고려할 정도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는걸 고르디엡스키의 활약으로 전달된 정보로 서방은 알고 있었다고 설명됩니다. 그러나 서방은 당시 스타워즈 계획을 중지하거나 핵 개발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즉, 고르디엡스키가 제공한 정보와 핵 전쟁을 막은건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책에서는 그의 활약과 희생이 대단한 것처럼 설명하고, 대처도 고르디엡스키의 활약을 그를 높이 평가했다지만 과연 그렇게까지 인정받을만한 인물일까요? 가족도 잃은 채 조국으로부터 사형 선고를 받아 평생 M16의 보호를 받는 일종의 구금 상태에 놓였다는 현재가 고르디엡스키가 어떤 인물인지를 가장 잘 드러낸다고 생각되네요. 

그래서 별점은 4점입니다. 고르디엡스키라는 인물에 대한 평가를 제외한다면, 달리 나무랄데 없는 최고의 책입니다. 스파이 소설을 좋아한다면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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