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2024/02/18

악의 사슬 - 리 차일드 / 정경호 : 별점 2.5점

악의 사슬 - 4점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오픈하우스

<<아래 리뷰에는 내용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한 겨울 네브래스카 주의 시골 마을에 흘러 들어간 잭 리처는 코피를 흘리는 여성을 도와준 뒤 그녀의 남편 세스 던컨을 박살냈다. 하지만 던컨 가문은 돈과 유통 계약을 통해 마을을 지배하는 악질들로 리처에게 복수하려 했다. 하지만 리처가 손쉽게 당하지 않자, 그들은 자신들이 불법적으로 판매하는 물건을 사가는 조직의 도움으로 킬러들을 마을에 불러들였다. 한편 리처는 25년 전, 마을 주민 도로시의 여덟 살 난 딸 마거릿의 실종 사건의 재조사에 나섰다. 사건의 범인이 던컨 가문임을 직감했기 때문이었다.
킬러들을 모두 해치운 리처는 던컨 가문의 인신 매매와 추악한 아동 성범죄 증거를 잡은 뒤, 마을 주민들과 함께 던컨 가문을 끝장내고 발걸음을 옮긴다.


잭 리처 시리즈 15번째 작품. 원제는 "Worth Dying For"입니다. 발걸음 닿는 대로 방문한 마을에서 우연히 사건에 휩쓸린 잭 리처가 악을 물리친다는 내용으로, 떠돌이 총잡이가 시골 마을을 지배하는 악의 무리를 소탕한다는 전형적인 서부극 영웅담과 똑같습니다.
흔한 소재이며 전개이지만, 이른바 '왕도물'답게 그만큼 효과는 뛰어납니다. 읽는 내내 몰입하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악당들을 박살내는 묘사가 상세한게 마음에 들었어요. 제가 읽었던 다른 시리즈 악당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그야말로 '씨를 말려버리고' 말거든요. 거처를 모두 불태운 뒤, 살려고 발버둥치는 던컨 가문 일족을 한 명씩 차례대로 제거하는 장면 묘사가 대단해서 큰 카타르시스를 안겨줍니다. 당해도 싼 놈들이라는 설명을 앞 부분에서 충분히 해 준 덕분이지요. 여기서 드러나는, 던컨 가문이 밀거래하는 물건이 마약이 아니라는 설정도 신선했습니다. 인신매매라는건 상상도 못했네요.
던컨 가문의 수하인 미식축구부 콘허스커스 출신 덩치들을 하나씩 재기 불능으로 파괴하는 격투 장면도 상세하며, 이를 통해 잭 리처(그리고 미국 육군)의 완력과 강함 역시 잘 표현하고 있습니다. 완력 뿐 아니라 덩치 중 한명인 존을 제압하는 화려한 화술도 볼거리에요. 입만으로 어설픈 초보 깡패를 뭉개는 솜씨가 대단했습니다.
다른 시리즈 물보다도 '자동차'에 대한 묘사가 상세한 것도 눈길을 끕니다. 자동차가 각 캐릭터들을 상징하기도 하고요. 예를 들면 연식은 좀 되지만 현대적인 옵션을 갖추었고, 운전하기도 편한 고급 캐딜락은 마을을 지배하는 오래된 가문의 악행을 잇는 젊고 철없는 후계자 세스 그 자체라 할 수 있습니다. 훔치기 쉬워 여러 명의 손을 탄다는 점도 결국 외부 세력에 의해 파멸하는 세스의 모습 그대로고요. 이런 점도 '말'이 중요한 '서부극' 장르의 속성을 따른 듯해요. 밀밭이 펼쳐진 평원에서 자동차로 사람을 추격하고, 자동차로 직접적인 공격까지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인신 매매 조직 먹이 사슬의 가장 밑바닥이자 공급책인 던컨 가문 바로 위의 로시 조직, 그 위의 사피르 조직, 최상위 마흐마이니 조직이 각각 킬러 두 명씩을 보내는데, 이들이 서로 죽이려 할 때 리처가 본의아니게 개입하여 사건을 복잡하게 만드는 - 리처가 먼저 마흐마이니 조직원을 한 명 죽이고 시체를 세스 던컨의 캐딜락 트렁크에 넣어 놓고, 나중에 남은 마흐마이니 조직원이 이를 발견한 뒤 던컨 가문을 족치다가 살해당하는 - 일련의 과정도 재미 요소입니다. 조직간의 알력 다툼을 이용해서 적을 약화시키는건(본의는 아니었지만) 고전 "피의 수확"을 떠오르게도 하고, 마흐마이니 조직원이 캐딜락을 훔친 뒤 시체를 발견하는 장면은 잘 짜여진 코미디 범죄 영화를 보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아래와 같이 잭 리처가 "61시간"의 벙커에서 탈출하다 팔을 다쳤다는, 시리즈의 연속성을 떠오르게 해 주는 장치도 반가왔습니다.
"실제 태풍을 말하는 게 아니오. 난 어느 지하 공간에 있었는데 갑자기 불이 났소. 그곳엔 층계가 하나였고 환풍장치가 두 개였소.운이 좋았소. 불길이 환풍구들 쪽으로 몰렸거든. 난 층계에 있었기 때문에 불에 타죽지 않았소. 하지만 불길이 환풍 장치 속으로 확 빠져나가면서 주변 공기들을 빨아대는 서슬에 위에서 엄청난 바람이 불어 내려왔소. 나로선 마치 태풍을 뚫고 계단을 올라가는 것 같았소. 두 번이나 바닥으로 나가떨어졌지. 일어서서는 도저히 계단을 올라갈 수가 없었소. 그래서 두 팔로 몸뚱이를 끝며 기어 올라가야 했던거요."

그런데 인신 매매 이야기를 꼭 끌고 왔어야 했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밀밭만 있는 네브래스카 시골 마을의 유통을 장악한 지역 유지가 인신 매매 공급책이라는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항구 도시에서 컨테이너 하역을 장악하고 있다면 모를까요.
25년전 도로시 사건도 억지스러웠습니다. 경찰 수사가 부실했다는 결론인데, FBI까지 출동한 사건이 이렇게 허술할 것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듭니다. 최소한 마을의 버려진 건물들은 모두 조사를 했어야 하는건 당연합니다. 사건 현장이었던 헛간이 그 때 그 상태 그대로, 심지어 증거인 도로시의 자전거까지 멀쩡히 남아있었다는 것 역시 말도 안됩니다. 이런 점들은 던컨 가문의 악행을 부각시키기 위한 무리수로밖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시골 마을을 지배하는 악덕 가문이라는 설정도 솔직히 21세기에 먹히기는 힘듭니다. 서부 개척 시대처럼 외부와의 연락을 통제할 수 있다면 모를까, 스마트폰을 비롯한 각종 커뮤니케이션 수단이 발전한지 오래니까요.

그리고 후반부에 리처가 세스 던컨과 미식 축구 덩치들에게 사로잡히는건 좋은 방향은 아니었어요. 세스 던컨은 제가 보아왔던 시리즈 중 가장 허접한 소인배 악당이기 때문입니다. 리처가 손가락 하나로 뭉개버릴 대상이지, 리처에게 위기를 가져다주는 존재일 수는 없어요. 이후 리처가 결정적 순간에 던컨 가문 외 5번째 사람이 있을 것이다!고 추리하여 위기를 벗어나는 장면과는 정 반대되는 설정이기도 하고요. 이렇게 모든 경우의 수를 고려하는 사람이 '단순히 방심한다'는건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던컨 일당이 사로잡은 리처를 바로 죽이거나 묶어놓지도 않은 이유도 설명이 부족하고요.

그래도 서부극을 좋아한다면 즐길 수 있는, 킬링 타임에는 적합한 활극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마동석 주연으로 한국화해서 영화를 만든다면 아주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