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주 -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북스피어 |
에도 간다에 있는 미시마야는 장신구와 주머니를 파는 주머니 가게로 멋스러운 주머니 외에도, 또 하나의 명물이 있다. 주인 이헤에가 최근에 재미를 붙인 특별한 도락으로, 실제로 있었던 괴담을 모으는 괴담 대회이다. 이야기를 듣는 건 이헤에의 조카딸 오치카로, 그녀는 약혼자를 소꿉친구에게 잃은 뒤 마음에 상처를 입고 숙부가 운영하는 주머니 가게에 '예절 견습'이라는 명목으로 맡겨진 소녀였다.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물'. 한 두어권 읽기는 했지만 딱히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어서 관심을 두지 않았었는데, 우연찮게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읽다보니 이게 전작이 있는 이야기더군요. 오치카가 겪었던 이전 사건이 계속 인용되더라고요. 그 외에도 이야기들 모두가 연결되어 있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다행히 따로 읽어도 무방한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데 지장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기대하고는 조금 달랐습니다. 별로 무섭지는 않은 이야기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물론 이건 제가 '괴담'이 '무서운 이야기'라고 잘못 생각한 탓입니다. 사실 '괴담'의 '괴 (怪)'는 괴이하다는 뜻이지요. 괴담도 '괴상한 이야기'라는 뜻이고요. 등장하는 이야기들 모두 괴이하다는 점에서 괴담의 사전적 정의에 부합합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정서에 맞지 않는 부분은 분명 있습니다. 모든 여성 이름들 앞에 '오'가 붙어서 혼란스러운 것과는 별개로요. 또 <<으르렁거리는 부처>> 외에는 모두 지나치게 평이한 이야기가 아니었나 싶기는 해요. <<달아나는 물>>은 심지어 뻔하기까지 했고요.
그래도 괴이함이 에도라는 공간과 미야베 미유키라는 작가의 글 솜씨로 결합되어 뿜어내는 독특함은 마음에 들었어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전편도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
각 수록 단편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달아나는 물>>
오래전 마을을 보호하는 신으로 숭배받았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지금은 찬밥 신세가 되어 허물어지는 신사에 봉인되었던 뱀신 오히데리는 우연히 만난 마을 소년 헤이타의 도움으로 봉인에서 풀려난다. 헤이타에게 씌워져 마을에 돌아온 뒤, 마을 물을 마르게 하는복수를 벌이자, 마을 고노기의 쇼야 (마을 사무를 맡아보는, 일종의 면장 직무)는 소년을 에도로 보내 버린다. 에도에서도 마찬가지 소동을 일으키나, 이야기를 들은 주인공 오치카가 살뜰히 보살펴서 에도에 무사히 적응한다. 그리고 헤이타는 물을 좋아하는 오히데리를 위해 소년은 뱃사공이 될 결심을 한다.
오래된 무언가에 깃든 요괴가 속박에서 해방되어, 누군가에게 씌워진다는 이야기는 하늘의 별처럼 많습니다. 따지고 보면 <<알라딘>> 부터가 그런 이야기지요.
천진난만하면서도 의리있는 주인공 소년, 본체는 뱀이지만 귀여운 소녀인 요괴라는 조합도 전형적인 소년 만화스러운 설정이고요. 훈훈한 전개와 결말 역시 소년 만화같다는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아동용 이야기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요.
뱀 요괴가 신이 되었다가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게 된 이유에 대한 설정은 탄탄하고, 이야기 전개에 있어 에도라는 시공간을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진부하다는 점에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덤불 속에서 바늘 천 개>>
미시마야 이웃인 바늘상 스미요시가에는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 혼인하지 못한 고명딸 오우메가 있었다. 그녀가 시집을 간 뒤, 그녀가 왜 시집을 늦게까지 가지 못했으며 결혼식날 있었던 이런저런 기묘한 일들은 무엇 때문이었는지를 그녀의 어머니 오미치가 이야기해 주기 위해 '흑백의 방'을 찾아온다.
오미치 말에 따르면, 오우에가 시집을 늦게 간 건 그녀의 쌍둥이 자매 오하나가 병사한 뒤. 쌍둥이를 싫어했던 할머니의 저주 때문이었습니다. 오우메 혼자서 무언가를 누리게 되면 저주를 받기 때문에, 죽은 오하나와 똑같이 생긴 인형을 만들어 돌보았고, 그래도 오우메가 혼자 이득을 얻는게 있다면 오하나 인형에 바늘이 꽂히고, 오우에는 지독한 습진을 앓아 왔는데 결혼은 혼자서 이득을 얻으니, 도무지 벗어날 방법이 없었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와 닿지 않았습니다. 여러모로 이해하기 힘든 저주였기 때문입니다. 저주의 핵심인 '상인은 예로부터 쌍둥이를 싫어한다'라는 말부터 이해 불가였어요. 친할머니가 이 말 때문에 쌍둥이와 며느리를 저주했다는 것 역시도 납득할 수 없었고요. 에도 시대 일본 정서가 이랬던건지는 모르겠지만, 현대의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이야기였습니다.
인형에 바늘을 꽂은건 사람이었다는 진상도 와 닿지 않기는 마찬가지에요. 친딸이지만 강제로 동생 집에 딸을 보내고, 자기들은 인형과 함께 살며 재산까지 나눈 다에몬 부부, 친딸처럼 키워 온 양녀를 잃게 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센에몬 부부 사이에 알력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를 오하나 인형에 바늘을 꽂는 형태로 표출했다는건 비약이 심했습니다.
또 두 형제가 집을 합치려고 할 때 처음으로 저주가 발생했으니, 바늘을 꽂은 건 둘째 부부여야 말이 됩니다. 양녀를 잃기 싫었다면요. 그렇다면 합치지 않기로 한 뒤에 바늘이 꽂힌건 설명이 되지 않지요. 이렇게 두루뭉실하게 풀어내지 말고, 정말 오우메를 증오한 누군가가 있다는걸 증명했어야 했습니다.
아울러 바늘이 꽂힌 뒤 실제로 오우메가 습진을 앓았다던가, 할머니가 모든 가족들 꿈에 나타나 저주를 했다던가, 오카쓰가 대신 저주를 뒤집어 쓰는 역할을 한 뒤 모든 저주가 사라졌다는 등 이야기 속 주요 설정들에 대한 설명도 부족합니다.
처음에 나타난 오하나 유령이 '눈을 깜박이지 않았다'는 대사 하나는 조금 섬찟했고, '인형'과 같았다는 설명은 괜찮았습니다. 그러나 앞서 말씀드렸던 이유로 수록작 중에서는 가장 처지는 이야기였다 생각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안쥬>>
수국 저택이라고 불리우는, 지금은 폐허가 된 무가 저택에서 불이 나 3명이 죽었다. 사망자의 아들 나오는 어려워진 집안 사정으로 아버지의 사촌인 야채상 야오노에 양자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바뀐 환경에 적응을 잘 하지 못해 불안해 하던 차에, 미시마야 하인으로 습자소 친구인 신타를 폭행하는 사고를 치고 말았다. 그 뒤 나오를 개인적으로 돌봐주는 습자소 선생 아오노 리이치로가 나오 아버지가 죽은 저택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표제작. 읽기 전에는 술안주 할 때의 안주라 생각했었는데, '暗獸'의 일본어 발음이더군요. 특이한 점은 추리물 성향이 짙다는 점입니다. 나오의 아버지 요헤이가 죽은 화재 사고에 대한 진상을 괴담을 통해 추리해내기 때문입니다.
아오노 리이치로의 말에 따르면, 수국 저택에는 아오노 리이치로의 스승 부부가 은퇴 후 살았던 적이 있었습니다. 전 주인 아내의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으로 집 값이 쌌던 덕분이었지요. 그 곳에서 부부는 저택의 염 '구로스케'를 만나 친해지지만, 구로스케가 사람 때문에 약해진다는걸 알게 된 뒤 저택을 떠납니다.
그러나 주인 때문에 도망갈 생각이었던 옆 저택에서 일하던 하인과 하녀, 그리고 이 둘을 도와주던 나오의 아버지 요헤이가 마침 빈 수국 저택에서 계획을 모의할 때 주인이 덮쳤고, 이를 막으려던 구로스케를 본 사람들이 놀라 도망치다가 죽은게 사건의 진상이었지요.
추리물 애호가로서 이러한 작풍도 마음에 들지만, 스승 부부와 구로스케가 보냈던 날들에 대한 상세한 묘사도 아주 좋았습니다. 노래라던가 공놀이를 가르쳐주고, 함께 시간을 보내며 정을 나누는 모습이 아주 훈훈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구로스케의 '귀여움'도 폭발합니다. (아래 그림 참고)
판타지물에서 슬라임과 교분을 나누는 노학자 부부의 모습이 이렇지 않을까요? 사람과 가까워지면 질 수록 약해진다는 설정도 좋았고요.
하지만 결국 사람이 3명이나 죽은건 분명하고, 원인을 제공했던 관리 나마즈히게가 딱히 대단한 응징을 받지 않았다는 결말은 개운치는 못했습니다. 이는 구로스케의 귀여움, 사랑스러움과는 너무 상반되는 이야기인 탓도 큽니다. 귀엽고 사랑스러워도, 괴이한 이형은 결국 사람에게 불행을 가져온다는 뜻이겠죠?
에도 시대에 그렇게 높은 관직도 아닌데 하인과 고용인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죽일 수 있었다는 것도 조금 놀하더군요. 하인이야 그렇다쳐도, 요헤이는 엄연한 고용인인데 말이지요. 나오가 양자로 간 야오노 가에서 겪는 불합리한 대우를 참고 견디는 모습 등도 우리나라 정서와는 잘 맞지 않아 보였어요.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재미있는 이야기였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으르렁거리는 부처>>
아오노 리이치로의 지인인 괴승 교넨보가 미시마야를 찾아온다. 그는 과거 깊은 산 속 '다테나리'라는 마을에서 겪었던 일을 오치카에게 이야기해 준다.
다테나리는 고신지라는 절의 스님 가쿠넨이 다스리는 풍요로운 마을이었는데, 도미이치라는 주민이 마을의 풍요에 대한 소문을 내려다 '반작'이라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도미이치의 아내와 갓난아기는 굶어죽었고, 광인이 된 도미이치는 장작에 불상을 새기는데 그 불상이 신통력을 발휘해 마을에 내분이 생겨 붕괴했다는 이야기였다...
마을 관습, 또는 집단 이기주의로 피해를 받았던 누군가가 복수한다는 이야기는 흔한 편입니다. 하지만 다테나리 마을과 '반작'이라는 설정은 탄탄하고, 수록작 중 제가 기대했던 '괴담'의 정의에 가장 충실해서 무척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교넨보가 겪었던 다테나리에서의 체험은 섬찟하면서도 이야기도 완성도가 높았기 때문입니다. 복수심에 불탔던 도미이치가 마을을 붕괴시키는 전개는 정말로 설득력이 넘치거든요. 혼자서는 역부족인 상황에서, 일종의 '초능력(?)'으로 가쿠넨 스님의 지배력을 무너트리는 과정이 아주 생생하면서도, 그럴듯했습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만으로도 충분했을텐데, 도적단이 미시마야를 습격한다는 이야기는 왜 등장시켰을까요? 억지스럽고, 이야기에 별로 도움도 안 됐는데 말이죠. 아오노 리이치로와 오치카의 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수단이었겠지만, 둘의 관계도 급발진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도 수록작 중에서는 베스트로 꼽겠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작품은 영상물로 만든다면 아주 볼 만 할 거라는 확신합니다. 특히 마지막에 '이형'이 된 도미이치가 "이 세상에 부처 따위는 없다!"고 외치는 장면이 말이죠. 조금 찾아보니 전작은 TV 드라마화가 된 것 같은데, 이 작품도 드라마로 나오면 좋겠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