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숭이 신의 잃어버린 도시 - 더글러스 프레스턴 지음, 손성화 옮김/나무의철학 |
오래전부터 온두라스 밀림 속에 숨겨져 있다고 알려진 '시우다드 블랑카', 즉 백색 도시라 불리는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을 그린 논픽션.
정복자 코르테스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백색 도시가 실려있는 다양한 사료 소개에서 시작하여 20세기 초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탐험들부터 상세하게 알려줍니다. 특히 미국의 대부호 헤이가 1930년대 미첼헤이스, 1935년 R.S 머레이, 1940년 모드를 고용하여 탐사를 벌였던 일련의 과정이 재미있었습니다. 이들 대부분이 사기꾼이었고, 특히 모드는 유적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금광을 찾기 위해 탐험에 뛰어들었던 악질이라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현대로 넘어와 본격적으로 잃어버린 도시 탐험이 시작됩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자율 주행 기술때문에 널리 알려진 '라이다' 기기를 활용했다는 점이었어요. 비행기에 실은 라이다 장치로 조사하려는 장소 스캔을 통해 GPS 정보까지 링크된 완벽한 3D 지도를 만들 수 있었고, 이 덕분에 실제 밀림을 뚫고 나가는 과정이 엄청나게 단축되었다는데 여러모로 놀라왔습니다. 과거 '인디아나 존스' 등으로 상징되는, 고고학자가 발로 뛰어들어 조금씩 유적의 실체를 벗기고 유물을 발굴한다는 것 자체가 과거의 유물이 되어버린 거지요. 그래서 백색 도시 탐사 초반부의 어려움은 발로 뛰는 현지 조사가 아니라 온두라스 정부와 발굴 교섭을 하는 행정 절차였다고 하네요. 이 과정에서 온두라스 쿠테타로 인해 새로 정권을 잡은 대통령이, 백색 도시 발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고 후원했다는 언급도 좀 신선했어요.
백색 도시 실체를 3D 지도로 확인한 뒤, T1 지구라고 부르는 현지 밀림 속으로 들어가 유적을 확인하는 과정은 어쩔 수 없는 인디아나 존스 스타일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이 역시 전직 SAS 장교 출신으로 위험한 환경으로 들어가는 방송 관계자를 서포트하는 전문가들이 고용되고, 다양한 안전 장치를 거의 완벽하게 확보해서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더군요. 세계에서 제일 위험한 독사를 만나고, 온갖 벌레들에게 습격당하는 묘사가 이어지기는 하지만, 실제로 현지 조사는 지팡이 없이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프로젝트 리더 스티브 엘킨스가 직접 참여할 수 있었을 정도니까요. 제 생각에는 <<정글의 법칙>> 보다 조금 위험한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백색 도시에 대한 설명도 상세하며 이해하기 쉽게 잘 쓰여져 있습니다. 확실히 '내셔널 지오그래피' 소속 기자다운 느낌이에요.
하지만 이렇게 중반부까지를 차지하는 백색 도시 탐험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저자가 책 서두에 던진 질문, 이 문화를 만든 이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왔으며, 어떻게 문명을 일구었으며 어떻게 그렇게 깜쪽같이 깡그리 사라져 버렸는가? 에 대한 답이 설명되는 뒷 부분이 진짜 이 책의 핵심이라고 생각됩니다.
우선 이 문화를 만든 이들은 누구인가? 바로 모스키티아 주민들입니다. 원래 이 지역에 작은 부락을 만들며 서서히 세력을 키워가던 모스키티아 문명은, 수백 Km 떨어진 마야 도시 코판이 강성해지면서 영향을 받고 성장하게 됩니다. 426년 마야인 케트살마코가 코판을 장악했는데, 이 때 코판 지역 원주민들은 모스키티아 주민들과 동일 어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하니 당연히 영향을 받았겠지요.
그 뒤 코판과 모스키티아는 5세기 이후 각자 교류하며 발전해 나갔지만 코판에서 왕족들이 신성을 강조하며 거대 토목 사업을 벌이다가 기근이 닥치고, 신성이 무너져 주민들이 반기를 든 탓에 코판은 9세기경 붕괴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반대로 이때부터 모스키티아 문명은 더욱 발전하여 마야 스타일 도시를 선보이게 되었습니다. 도시 파괴 후 흩어졌던 코판 주민들 일부가 유입된 덕분이었겠지요.
그러나 이렇게 사람이 살기 힘들어 보이는 밀림에서도 복합 농경 사회를 일구며 발전한 모스키티아 문명도 1,500년 경 갑자기 몰락하고 맙니다. 그 이유를 저자는 서구 사회에서의 전염병 유입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백색 도시 제단에 남겨진 제물들 형태를 볼 때, 살아남은 주민들이 제물을 바치고 떠난게 분명합니다.
이들이 번성하는 도시를 그대로 놔 두고 도망쳐 버린 이유, 그리고 도시가 저주받았다는 전설이 널리 퍼진 이유는? 전염병이 그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이치에 맞습니다. 신세계에 콜럼버스와 선원들이 천연두, 홍역과 같은 전염병을 들불처럼 퍼트렸고, 이에 대한 내성이 전혀 없던 신세계 주민들은 거의 90%가 죽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충분한 근거가 되고요. 코르테스가 단 500명의 군대로 아스텍 제국을 정복했던 것도 결국은 마찬가지로 전염병 덕분인 셈이니까요.
구세계 주민들은 전염병에 어느정도 내성이 있었는데 신세계 주민들은 속수무책이었는지도에 대한 저자 나름의 해석도 볼거리입니다. 구세계에서는 일찍이 온갖 가축을 키웠고, 밀집한 장소에 모여 살아서 병원균 침입 및 전파가 잦았고, 이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유전자를 물려주어서 유전 저항이 생길 수 있었지만, 신세계에서는 가축을 많이 키우지 않고 넓은 공간에 살아서 상대적으로 면역력을 키울 기회가 없었던 탓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꽤 그럴듯하지 않나요? <<총, 균, 쇠>>와 비슷한 이야기이기도 하고요.
이러한 무자비한 구세계 전염병의 습격을 저자가 온두라스에서 걸려온 풍토병 리슈아만편모충증과 연결하여, 우리는 분명 저주받았으며 이렇게 신세계에서 발생한 미지의 전염병이 우리를 습격하지 않을까라는 우려로 글을 끝맺는데, 최근의 코로나 사태와 어느정도 맥이 닿아 있는 부분이 있어서 꽤나 깊은 울림을 전해 줍니다. 앞으로 어떤 미지의 병원체가 인류를 습격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커지고 있는데, 남의 일이 아닌 셈이지요.
그러나 마지막 후일담은 씁쓸했습니다. 천연 밀림으로 그 누구도 발을 들이지 않았던 T1 지구가 온두라스 군대와 고고학자들이 머물며 파괴되어 가는 현재를 취재한 내용인데, 이렇게 사람 손 닿지 않은 비경이 훼손된 책임은 명백히 처음 도시를 찾아나선 전문가들에게 있으니까요. 때문에 그들은 저자처럼 훼손되는 숲을 보고 안타까와 하는게 아니라, 자연을 보호하고 원시림을 지키기 위해 행동에 나섰어야 했습니다. 그냥 발굴에 대한 명예만 얻고, 좋은 방송 콘텐츠 제작한걸로 끝내버리는 행동은 지극히 무책임해 보였어요.
하긴, 구세계 출신인 멤버들이 주도한 탐험과 발굴 자체가 문제이기도 합니다. 자기들이 퍼트린 질병으로 나라가 망했는데, 망한 나라를 숨겨진 도시라며 다시 찾아와 마지막으로 바친 제물을 끄집어 낸다? 부관참시와 같은 죽은 자를 죽어서까지 모욕하는 행위와 별로 다를게 없지요. 이래서야 발굴에 참여한 구세계 출신 멤버들이 안 좋은 운명을 맞게 되는건 당연해 보여요. 고고학이라는 학문 특성상 고인능욕(?)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라 하더라도, 최소한 그 나라 그 민족 후예들이 중심이 된 발굴이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발굴과 조사도 무인 드론이나 보스턴 다이나믹스의 무인 로봇개 등 무인 시스템을 활용하여 사람 손 닿지 않게 이루어지는게 바람직할테고요.
이렇게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는건 물론, 비교적 재미있고, 건질게 많았던 유익한 독서였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온갖 벌레와 독뱀이 사방에 천지라 쉽게 갈 엄두를 내기는 힘든 곳이지만, 제 평생 한 번 정도는 중남미 고대 문명을 직접 두 눈으로 보고 싶네요. 언젠가 기회가 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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