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나무의 파수꾼 -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 |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레이토는 절도 사건으로 체포되었지만, 집안의 어르신이라는 치후네의 도움으로 석방된다. 치후네는 그 대신 레이토에게 '녹나무 파수꾼' 직을 제의하고, 별다른 방법이 없던 레이토는 녹나무 파수꾼을 맡게 된다.
레이토는 파수꾼을 하면서 이런 저런 제약과 수수께끼 가득한 녹나무 기원 행사에 대한 의문을 품게 되지만, 치후네는 기원 행사는 스스로 알아내야 한다며 정보를 주지 않는다. 마침, 기원을 하러 온 아버지 사지 도시아키가 불륜을 저지른다고 의심하여 미행해 온 사지 유미와 만난걸 계기로, 녹나무에 얽힌 수수께끼 풀이에 나서는데...
히가시노 게이고의 최신작. 이게 과연 무슨 장르물일까요? 사람의 염원을 담았다가, 그 사람의 혈육에게 전해 준다는 녹나무 설정은 분명 판타지입니다. 그런데 녹나무에 소원을 비는 '기념'이 무엇일까? 사지 도시아키가 만났던 불륜녀는 누구이며 그가 열심히 기념하는건 무엇 때문일까? 치후네 할머니가 녹나무 파수꾼 역할을 레이토에게 맡긴 이유와 그녀가 행해왔던 알 수 없던 행동들의 이유는 무엇일까? 와 같은 다양한 수수께끼가 던져지고, 이를 추리하는 전개는 추리물이라고 보아야 할 것 같거든요. 저는 일단, 판타지 설정이 가미된 일상계 추리물로 보고 있습니다. 추리물로 완성도가 그만큼 높기 때문입니다.
우선, 수수께끼 풀이를 위한 단서 제공이 상당히 공정합니다. 녹나무 기념 행사가 무엇인지는 레이토가 과거 '기념' 기록 데이터를 전산화하는 작업을 시작한 뒤 접한 정보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레이토는 기념 행사가 가족간 행사이며, 그믐과 보름에 한해 이루어진다는걸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기념은 가족 중 누군가가 그믐에 염원을 한 걸, 보름에 다른 가족 누군가가 전달받는 행사이며 녹나무는 일종의 '염원 기억 매체'라는걸 레이토가 추리할 수 있었던 겁니다. 주어진 정보만으로는 좀 과했던 추리이기는 했습니다만, 충분히 말은 되지요.
또 치후네 할머니가 치매를 앓고 있었다는건 이런저런 단서 제공과 복선이 많고 확실해서 그야말로 완벽한 일상계 추리물이었어요. 이를 약간 반전처럼 드러내는 마지막 장면도 좋았고요, 확실히 추리 소설의 거장인 히가시노 게이고의 필력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습니다. 그만큼 설득력과 흥미를 동시에 갖춘, 좋은 이야기였습니다. 그 외 가족을 증명하기 위해 호적 등본은 부실하다는 말과 유념을 받지 못할걸로 생각하는 모습을 보고 오바 소치가 친아들이 아니라는걸 추리하는 등 세세한 추리들도 풍성해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물론 사지 도시아키가 기념했던게 무엇인지는 도시아키가 직접 알려주는 탓에 추리의 여지는 많지 않습니다. 그래도 그가 몰래 만났던 여자는 불륜녀가 아니라 이미 죽은 형이 염원하여 남긴 곡을 피아노 연주곡으로 구체화해 주던 피아니스트였다는 전개는 재미있었어요. 귀가 먼 작곡가가 머리 속에 작곡되어 있는 '음악'을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녹나무의 특별한 힘이 필요했다는 것도 나름 설득력 있었고요. 사지 도시아키가 처음으로 녹나무에서 형 기쿠오가 남긴 유념 속 음악을 받는 장면은 영상화된다면 꽤나 멋질 것 같아요.
노인 치매에 대해, 그리고 자식을 키우는 것에 대해, 가족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하게 만드는 에피소드들의 결말도 감동적이었습니다. 가족과 추억은 소중하다는걸 다시금 떠올리게 해 주거든요. 또 작가가 이전에 <<붉은 손가락>>으로 치매에 대해 다룬 방식과는 다르게 이를 구구절절하게 설명하지 않고, 치매에 걸린 어머니 다카코에게 이미 죽은 기쿠오가 작곡한 음악을 들려주는 공연을 펼치는 클라이막스로 극대화하는 전개도 괜찮았어요. 확실히 완숙해진 티가 났습니다.
그런데 아쉬운 점도 없지는 않습니다. 녹나무의 능력을 잘 보여주는 사지 가족 이야기와 치후네 할머니에 대한 일상계 추리 영역은 하나로 잘 엮여 읽히지 않았던 구성부터가 그러합니다. 별개 에피소드로 보일 정도였어요.
캐릭터 설정과 배분도 문제입니다. 주인공 레이토는 기본 설정, 그리고 성장기로서의 전개는 너무 뻔하더군요. 치후네와 본의아니게 오래 떨어져 있다가, 급작스럽게 녹나무 파수꾼 역할을 맡는다는 배경 설정이 필요했다는건 이해됩니다. 그러나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으로, 도둑질까지 저지르던 말종이라는 스테레오 타입 설정을 가져가야 했을지는 의문이에요.
첫 등장에서는 반쯤 양아치였는데, 작중 시점으로도 얼마 지나지도 않은 마지막 장면에서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파수꾼으로 나오는 것도 영 와닿지 않았고요. 제대로 된 성장기로 기능하려면, 좀 더 긴 호흡의 이야기가 필요했습니다.
여주인공 포지션인 사지 도시아키의 딸 사지 유미의 존재도 애매합니다. 녹나무 기념이 무엇인지 드러내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녀 없이 레이토 혼자만으로도 충분히 알아낼 수 있었거든요. 오히려 아버지를 엿보는걸 넘어서 도청을 하려하고, 이를 위해 기념에 절대 개입하면 안되는 녹나무 파수꾼 레이토를 설득하여 한 편으로 만드는 과정은 여러모로 거북하기만 했습니다. 딸이 불륜으로 오해한건 가족 문제일 뿐, 파수꾼 레이토가 도시아키 기념을 엿들은건 명백한 사실이라 도시아키가 항의하면 레이토는 해고되어도 할 말 없는 상황이잖아요? 레이토와의 러브 라인도 딱히 드러나지 않아서 그닥 전개에 필요해 보이지 않더군요. 차라리 유미없이 레이토 혼자 과거 기록 정리를 통해 녹나무에 대해 어느정도 알아낸 뒤, 사지 도시아키와 대화를 통해 진상을 풀어내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단점이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신파성 드라마도 과한 편입니다. 일본 특유의 한 방(?) 전개도 지나쳐서 기쿠오 작곡 결과물을 들려주는 연주회는 괜찮았지만, 치후네 할머니 고문 은퇴 등이 결정되는 임원 회의와 여기서 레이토가 열변을 토하는건 억지스러웠어요. 야나기사와 호텔이 살아남는다는 결과는 작위적이었고요.
이렇게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읽는 재미만큼은 괜찮았던건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신다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은 작품이에요. 개인적으로는 노련하고 경력있는 파수꾼 레이토가 기념하러 온 손님들 고민을 들어주면서 사건을 해결해 주는 일상계 추리물로 그려내는게 더 좋았을 것 같지만요.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 영상화 횟수를 보면 영상화될게 거의 확실해 보이는데, 사기 기쿠오가 남긴 멜로디가 과연 어떻게 구현될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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