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뱀이 깨어나는 마을 - 샤론 볼턴 지음, 김진석 옮김/엘릭시르 |
영국 시골 마을에 사는 수의사 클래라 앞에 무서운 독사를 비롯한 뱀 떼가 나타났다. 그녀는 전문가적 지식을 발휘해 뱀을 처리하면서, 뱀에 물려 죽었다는 마을 노인 죽음에 대해 의문을 품고 독자적인 조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그녀가 돌보던 노부인 바이얼럿이 역시나 뱀에 물려 죽고, 그녀가 유력한 용의자로 의심받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조사를 통해 이 사건의 배후에 50여 년 전 마을에 있었던 기묘한 퇴마 의식과 마을 거주민들, 그중에서 위처 형제가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데....
귀여워 보이는 책 표지에 호기심이 생겨 읽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내용은 아주 진지한 범죄 스릴러물이라 의외였습니다. 600여 페이지가 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흡입력도 상당한 편이고요. 한적한 시골 마을에 무시무시한 독사(살무사와 타이판)가 나타난다는 상황부터가 아주 흥미로왔기 때문입니다. 뱀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마을 유일의 뱀 전문가로 모종의 책임감을 느낀 클래라가 사건에 뛰어든 뒤 위처 형제에 얽힌 비밀을 파헤치며 서서히 위기에 빠져드는 과정에 대한 묘사도 박진감 넘칩니다. 덕분에 마지막까지 손에서 떼기 힘든 재미를 선사해 줍니다.
영국 시골 마을을 무대로 공포스러운 괴사건이 연이어 일어나고, 이 모든건 오래전에 있었던 끔찍한 사고와 관련되어 있다는 내용과 설정은 정통파 영국 고전물을 떠오르게도 만듭니다. 시골 마을에 갑자기 무시무시한 독사가 포함된 뱀 떼가 나타나 사람들을 습격한다는 설정은 일종의 크리처 공포물 같기도 했고요.
또 주인공인 수의사 클래라가 상당히 매력적이네요. 여태 읽었던 수많은 추리 소설에 등장했던 까칠한 여주인공들과 비슷하지만 어린 시절 입은 얼굴의 상처라는 분명한 차이점이 있거든요. 누구나 얼굴을 돌릴 법한 끔찍한 흉터라는 설정인데, 덕분에 그녀가 까칠하게 자기를 방어하며 남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자만의 세계에 칩거한다는 묘사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스스로 흉터를 극복하는 성장기스러운 묘사도 제법 괜찮았습니다.
그리고 추리적으로 돋보이는 점은 없지만 우연히 어울리게 된 노인들의 죽음에 대해 경찰이 그녀를 의심하게 되는 과정만큼은 좋았습니다. 그녀가 마을 노인들과 친해져 유언장을 조작한 뒤 살해했다고 의심 받는다는건데, 노인들 죽음에 독사가 관련되어 있고 그녀가 수의사로 뱀 전문가라는 설정까지 겹쳐져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습니다. 클라이브의 정체가 솔의 아들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부분, 그리고 얼프레드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내는 과정도 그럴듯했고요.
하지만 재미에도 불구하고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오순절 운동'에서 비롯된 뱀을 다루는 사이비 목사를 등장시켜 마을 사람 반수가 관계된 대소동에서 비극이 촉발되었다는 등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드려는 의도가 지나쳤기 때문입니다. 영국 시골 마을에서 이런 일이 가능하기나 했을까요? 작중에서도 '전쟁 직후였다'라는 말로 어떻게든 설득력을 갖추려 안간힘을 쓰는 것이 안쓰러울 따름이입니다. 문란한 에덜린과 위처 형제들 간의 관계, 그리고 범죄자 성향이 짙어 마을에서 추방당한 솔 위처 이야기 정도로 풀어내는 것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아니면 앞서 말한 클래라가 범인일 것이라는 가설이 훨씬 현실적이었던 만큼 그렇게 밀고 나가던가요.
억지스럽게 용의자를 등장시키는 전개도 별로입니다. 뱀 전문가 숀 노스가 타이판의 본고장 파푸아뉴기니를 갔다 온 것을 숨겼다, 정신병자 얼프레드는 성도착자에 화가 나면 폭주하여 아무도 말릴 수 없다는 등의 묘사들이 그러합니다.
설명되지 않는 것도 너무나 많습니다. 아치로 위장한 조앨 패인 목사가 도싯으로 돌아온 이유는? 클라이브에게 얹혀 살기 위해서라면, 그는 클라이브가 솔 위처의 아들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런저런 이유로 어떻게든 알았다고 칩시다. 그러면 마을에 뱀을 푼 이유는? 조앨 패인이 클라이브 회사의 계획인 마을에서의 원유 탐사를 위해 마을 사람들을 쫓아내려고 협력한 것일까요? 그렇다면 얼프레드는 왜 병원에서 탈출시켰을까요? 조앨 패인 스스로도 뱀을 다룰 수 있는데 말이죠. 그리고 이러한 이유라면 뱀 떼면 충분했습니다. 독사를 푼 이유는 설명할 수 없어요. 독사가 등장하고 사람이 죽은 이상, 경찰이 주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는데 그래서 무슨 이득이 있었을까요? 그리고 이 많은 뱀은 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요?
물론 독사의 등장과 뒤이은 살인은 클라이브의 지시와는 별개로 패인이 유산을 노리고 폭주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경찰 맷을 공격하고 클래라마저 죽이려 한 시점에서, 패인이 아치 흉내를 내면서 클라이브의 유산을 가져가는 것은 불가능해져 버렸으니 계획은 실패입니다. 클라이브 살해를 클래라에게 뒤집어씌운다 해도 맷의 말에 따르면 바이얼릿의 죽음에 대해 클래라는 혐의를 거의 벗었고, 혹시나 패인의 지문이 채취된다면 진범이 누구인지 결국 밝혀졌을 테니까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클래라가 마지막에 목숨을 걸고 사투를 벌이는 과정의 개연성도 낮고 패인이 불탄 교회에서 얼프레드를 죽이려고 했던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습니다. 자포자기였을까요?
그리고 수많은 등장인물들 중 클래라를 제외하고는 전부 평면적이고 진부하며 존재감이 낮다는 것도 단점입니다. 남자 주인공들부터가 그러합니다. 숀 노스와 맷의 2인 체제인데 어디서 봤던 느낌의 캐릭터들일 뿐더러 숀은 하는 게 거의 없다시피하고, 그나마 활약을 보이는 맷은 다른 여자친구가 있을 뿐더러 막판에는 짐짝이 되어버리니 왜 나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노인들은 한두 명을 제외하고는 전부 어딘가 이상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영 보기 불편했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지나치게 나간 부분 때문에 감점합니다. 그래도 재미는 있고 전통을 계승한 부분도 있는 만큼 추리 애호가분들이라면 한 번쯤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덧 1 : 작가 서문과 후기, 역자 후기나 기타 자료가 전무하다는 특징도 있습니다. 최근 이런 책을 본 적이 없는데 신기했습니다.
덧 2 : 프레드릭 포사이스의 "아일랜드에는 뱀이 없다"와 비교해 읽어도 재미있을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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