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 커트 보네거트 지음, 박웅희 옮김/아이필드 |
제2차 세계대전에 참여했던 주인공 빌리는 검안사로 성공하여 안정된 생활을 꾸려가던 중 비행기 사고로 머리에 큰 상처를 입고 퇴원한 날 부터 자신이 예전 딸의 결혼식 날 머나먼 "트라팔마도어"행성인들에게 납치되었다는 사실을 전파하고 다니게 된다. 빌리는 "트라팔마도어"로 납치된 이후 유럽의 전장에서부터 '현재'와 미래로 시공간을 초월하는 시간여행을 하며 자신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동시에 아우르는 초월적인 경험을 한다.
제목의 "제 5 도살장"은 드레스덴 폭격 당시의 미군 포로 수용소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소설의 내용은 부제인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이 더 어울리는 것 같지만요.
그런데 이 책은 도대체 어떤 장르로 정의할 수 있을까요? SF나 반전소설로 정의하기에는 너무 복잡한 작품이에요. 작가가 직접 경험했다는 2차 대전에서의 드레스덴 폭격에 대한 일화를 단순히 담아낸게 아니라 빌리라는 존재를 통해 시공을 초월한 구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의 윤회사상과도 닮아 있지만 결정적 파국, 즉 종말은 피할 수 없다는 종말론적 사고방식은 또한 기독교의 그것인데도 묘하게 어울리면서도 깊은 울림을 전해줍니다.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네요.
극중 주인공 빌리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시공 초월에 대한 소설적 접근은 엄청나게 새로우면서도 충분히 충격적이고 또한 재미도 있습니다. 짤막한 단상들이 이어져서 하나의 소설을 이루는데 그 단상들의 등장인물들이 엄청나게 방대하고 사건들도 다양함에도, 또한 시간과 공간이 제각각임에도 불구하고 소설로 성립되는데 재미까지 있다는 점은 정말 놀라워요.
그리고 "트랄파마도어" 행성인의 시선에서 바라보는 기독교에 대한 통렬한 정의! 왜 기독교인들이 그렇게 쉽게 잔인해지는지에 대한 해답. 즉 복음서의 의도는 무엇보다 사람들에게 자비로워질 것을, 나아가 낮은 자들 중에서도 가장 낮은자가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지만 실은 "누구를 죽이기 전에, 그자에게 든든한 연줄이 없다는 사실을 반드시 확인하라"라고 가르친다라는 부분은 너무나 멋집니다.
소설에서 말하는 "종말은 피할 수 없으니 가장 즐거운 시간을 즐겨라"라는 사고방식도 왠지 공감이 가네요. 채근담이었나요? 흡사 군대 훈련소 시절 화장실 벽에 붙어 있었던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라는 말과 왠지 잘 어울리기도 합니다. 하긴, 이 책은 군대소설이기도 하죠.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4점! 처음 접하는 작가의 작품이었지만 명성에 충분히 어울리는 좋은 작품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좋아한 작가 어쩌구 하는 선전문구가 꼭 필요했을지는 의문이나 하루키가 "노르웨이의 숲"에서 표현했던 "중간의 어떤 페이지를 열어도 멋진 책"이라는 표현이 어울리는 작품들 중 하나임에는 분명합니다. 정말로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한 작품으로 추천합니다.
그나저나 영화화가 되었다는 이야기가 뒷 해설에 나오는데, 도대체 영화를 어떻게 만들었을지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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