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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8

시미가의 붕괴 - 기타무라 가오루 / 김해용 : 별점 3점

시미가의 붕괴 - 6점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김해용 옮김/황매(푸른바람)

"하늘을 나는 말"이라는 작품이 굉장히 유명한, 그래서 많이 소개되지는 않았지만 국내 추리 독자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기타무라 가오루의 작품입니다. 사실 대표작도 아니고 해서 이 작품이 어떻게 번역되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작가에 대한 호기심이 워낙 컸던 탓에 구입하게 되었네요.

일단 이 작품집은 크게 3가지 성향으로 나뉩니다. 하나는 추리를 기반으로 한 블랙코미디적인 작품, 그리고 일상의 소소함을 디테일하게 추리와 결합시키는 (하지만 추리물은 아닌) 일상계 추리분위기 소품, 마지막으로 인간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그린 드라마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번째 블랙코미디 류(類)로는 표제작이기도 한 "시미가의 붕괴"와 "죽음과 밀실", 그리고 "옛날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들 수 있을테고 두번째 일상계 소품은 "하얀 아침"과 "주사위, 데굴데굴", "오니기리, 꾹꾹"이 해당되며, 마지막 심리드라마는 "녹아간다"와 "나비", "나의 자리" 가 해당된다 생각됩니다. 이중 개인적으로는 일상계 소품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아무래도 일상계 미스터리로 유명한 작가답다고나 할까요? 추리적인 요소가 녹아있으면서도 그것이 그야말로 일상과 밀결합되어 있고 내용과 캐릭터들도 너무 귀여워서 읽는 내내 아~주 흐뭇했거든요.

물론 그 외의 대부분의 작품들 역시 추리적인 성향과 기발한 아이디어가 포함되어 있기에 재미있게 읽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블랙 코미디 류의 작품군은 조금 더 절제했더라면 동화적인 세계관에서 벌어지는 독특한 추리물로 와 닿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지나칠 정도로 설정이 과장되어 있다는 것이 약간은 아쉽더군요.

그래도 국내에서 접하기 힘들었던 작가의 작품집이고 작가 특유의 센스가 충분히 느껴지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정통 추리물들도 아니고 작가의 대표작도 아니긴 해도 가볍게 즐기기에 좋아서 추리소설에 거부감을 느끼실 수 있는 초심자분들에게 추천할만 하다 생각되네요. 특히 여성분들이 좋아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아울러 이 단편집을 계기로 추후 일상계 소품으로만 묶인 (대표작인 "하늘을 나는 말" 시리즈면 더욱 좋고요) 단편집이 나와준다면 정말 좋겠습니다.

PS : 최근 너무 바빠서 좀 격조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읽은 책이 쌓여가는데 포스팅할 시간이 없네요...
녹아간다
평범한 회사원 미사키의 정신 붕괴과정을 "만화"라는 독특한 매개체를 통해 표현한 심리 드라마입니다. 치밀한 묘사는 볼거리이지만 정신 붕괴, 즉 미쳐가는 과정에 대한 이유가 합리적이지 않아서 결과물만 놓고 본다면 평범한 수준이라 생각되네요.

시미가家의 붕괴
천재탐정과 그의 조수가 탐정의 친구인 장서수집가 시미가를 방문했다가 시미의 아내 가즈코가 밀실에서 살해된 것을 발견한다.
과장된 동화같은 설정의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추리물입니다. 일단 서두의 등장인물 소개가 너무 장황하고 허무맹랑해서 당황스럽더군요. 그냥 천재탐정과 조수였어도 충분했을텐데 조수의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사랑한다는 이야기에서 시작해서 탐정의 천재성도 정말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채워놓고 있거든요. 하지만 중반 이후에 등장하는 밀실 살인과 다이잉 메시지트릭을 적절하게 사용한 덕에 그나마 황당한 이야기안에 추리적인 이야기가 깔끔하게 녹아들어 있는 것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이 작품에 대한 책 소갯글이 더 예술적입니다. 별거없는 반은 장난같은 이야기를 흡사 고전 전통 트릭 미스터리와 고딕 호러의 결합물 처럼 소개해 놓았더군요.
(탐정에게 사건이란 이미 읽은 책이나 다름없다! 인간의 가장 깊은 욕망을 파헤치는 천재 탐정의 놀라운 활약!
완벽히 다 갖추어지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수집 강박증. 단순한 호기심과 관심의 경계를 넘어선 그것은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치명적인 욕망으로 자라나 목숨마저 위협한다. 책 수집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장서가 부부에게 어느 날 찾아온 죽음이라는 손님. 책에 대한 무모한 집착이 부른 재앙 앞에서 탐정은 진실의 페이지를 한 장, 한 장 넘겨 나가는데…….
아무리 채워도 꽉 차지 않는 서가의 구석에서 발견된 부인의 다잉 메세지. 남편의 가장 깊은 욕망이 드러나는 순간, 시미가는 마치 꿈처럼 아스라이 붕괴하고 만다.)


죽음과 밀실
노인 추리작가들이 모여사는 공동체 "환상의 정원"에 정말이지 완벽한 밀실살인사건이 발생하는데...
시미가의 붕괴와 연결되는 천재탐정과 조수 이야기로 추리소설의 이상적인 형태를 냉소적으로 비웃는듯한 작품입니다. 추리소설로 보기는 어려운, 추리애호가들을 위한 블랙코미디에 더 가까웠달까요?

하얀 아침
주인공이 과거 소녀였을때를 회상하며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1인칭 시점의 이야기로, 청춘드라마같은 깜찍한 사랑이야기가 나름의 추리적 요소 (누가 왜 아버지 차 백미러 성에를 닦아놓았을까?)와 잘 결합된 일상계 소품입니다. 여성작가다운 특유의 세밀한 심리묘사와 더불어 과연 일상계 미스터리의 거장이구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이야기에서 추리적인 전개를 이끌어내는 것이 놀라운 작품이죠. 개인적으로는 이 단편집의 베스트 중 한편으로 추리물에 대해 별로 내켜하지 않는 지인들에게 따로 권해주고 싶을 정도로 부드럽고 따뜻한 이야기였습니다.

주사위, 데굴데굴
출판사 신입사원 치하루씨는 우연하게 한 남자가 떨어트린 십면체 주사위에 관심을 갖는데...
5페이지짜리 이야기로 이정도면 소품이라기 보다도 꽁트라 해도 무방한 분량이죠. 하지만 이야기가 완벽하게 정리되어 있으며 무엇보다도 아주 일상스럽지만 귀여운 발상의 트릭이 깜짝 등장하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하여간.. 아이들 머리는 정말이지 못 당하겠어요^^

오니기리, 꾹꾹
치하루씨는 회사 선배 미즈마치와 함께 이와테로 현장조사를 나간다...
전편과 같은 주인공 치하루씨 시리즈로 이번엔 분량이 약간 기네요. 하지만 역시나 귀여운 소품답게 이와테로 무대가 옮겨갔어도 여전히 일상스럽고 밝은 이야기입니다. 등장 인물들이 모두 착하디 착한 사람들이라는 것도 그러하고요.

추리의 요소는 두가지로 한가지는 버린 깡통이 어떻게 멀리 있는 계곡까지 굴러가는지와 제목의 오니기리를 만든 결과물에 대한 추리가 등장하고 있습니다. 대다한 트릭이나 추리는 아니지만 이야기와 잘 맞아 떨어지는 것은 역시나 마음에 들었어요.

나비
한 여성의 술자리 잡담이랄까... 심리묘사는 좋은데 두서도 없고 이야기도 없는 단상만 모아놓은 짧은 잡문이랄까요. 언급할게 별로 없네요....

나의 자리
주인공이 평상시와 다른 일상을 통해 누군가의 자리를 빼았는다는 설정도 굉장히 독특하지만 이러한 자신이 느낀 일상속의 불편함이 결국 자기자신과 연결된다는 결과가 굉장히 서늘해서 "기묘한 맛" 류의 작품으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이러한 반전으로 이르는 전개와 묘사도 군더더기 없는, 작가의 필력과 센스를 잘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 두번째 베스트로 꼽고 싶네요.

옛날 이야기에 대한 새로운 해석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있지 않은 일본의 전래동화 "카치카치야마" 이야기 (할아버지가 밭일을 하다가 잡아온 너구리로 너구리죽을 만드려 하는데 너구리가 외려 기지를 발휘해서 풀려난 뒤 할머니죽을 만든다는 엽기 이야기?)를 추리물 형식으로 꾸민 내용으로 서두에 지극히 개인적인듯한 느낌의 장황한 옛날 이야기 해석에 대한 이론이 묘사되는 등 작가 스스로의 생각을 대화하듯이 써내려간 형식이 무척 이채로웠던 작품이었습니다. 뭐 달리 이야기하자면 좀 쭉쭉 써내려간 느낌도 들긴 하네요. 왠지 좀 장난스러움이 많이 묻어나는 것도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요. 어차피 모티브가 된 전래동화가 내용을 잘 모르는 일본 전래동화이기 때문에 몰입하기 힘든 탓도 크겠죠.

하지만 워낙 개인적인 단상이 많은 글이다보니 실제 기타무라 가오루라는 작가에 대해 조금 더 알게된 것 같아 흐뭇한 느낌도 들고 추리적으로도 이야기를 잘 구성해 놓아서 감탄했습니다. 전래동화를 앞뒤가 맞아 떨어지는 추리물로 각색할 생각을 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결과물도 상당한 수준이니 놀라울 따름이죠. 덕분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취향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것 같은 작품인데 저에게는 무난한 평작 수준으로 생각되네요.

2026/01/17

굿뉴스 (2025) - 변성현 : 별점 2.5점

일본 여객기가 테러조직 적군파에 의해 하이재킹되었다. 테러범들은 평양으로 향할걸 요구했지만, 이 소식을 들은 중앙정보부장 박상현의 지시로 박상현의 수족 아무개와 관제사 서고명 중위가 활약하여 여객기를 김포 공항에 착륙시키는데 성공했다. 김포를 평양으로 착각하게 만들 속셈이었지만, 라디오에서 팝송이 흘러나오는걸 알아챈 테러범들이 속지 않자 대치가 시작되었고, 결국 시간 내 평양행이 결정되지 않으면 자폭하겠다는 테러범들의 최후 통첩이 전달되는데....

작년에 공개된 넷플릭스 전용 한국 영화입니다. 별다른 사전 정보없이 감상하였습니다. 꽤 진지한 테러범과의 협상 중심의 영화일줄 알았는데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작품이라서 의외였네요.

블랙 코미디에 어울리는 재기발랄한 연출이 눈에 먼저 들어왔습니다. 설명이 필요한 지점에서 말로만 밀어붙이지 않고, 화면을 그 설명에 잘 어울리는 상황에 맞춰서 가볍게 웃음을 끌어내는 방식이 꽤 자주 나옵니다. 일본 여객기 통신망을 북한보다 먼저 잡아내는게 핵심인 초반부 작전에서, 이를 서부극에서의 일대일 결투로 묘사하는 식으로요.
이런 연출을 비롯해서 전반적으로 한 번에 빵 터뜨리는 개그를 의도했다기 보다는, 피식하게 만드는 요소들이 계속 이어지는데 타율이 꽤 괜찮은 편입니다. 실제 '요도호 사건'의 내용을 충실하게, 하지만 코믹하게 변주한 각본도 나쁘지 않아요. 평양 공항으로 위장한 김포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 안의 테러범들이 평양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아무개' 등과 벌이는 상황들 - 공항 건물에서 테러범이 햄버거를 먹는 흑인을 보고 따지자 서고명 중위는 '소련인'이라고 대꾸하고, 비행기 기장은 푸시킨도 흑인이었다고 말하는 등 -이 대효적인 예입니다. 

배우들의 연기도 전반적으로 만족스럽습니다. 특히 중앙정보부장 역의 류승범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충청도 사투리로 뺀질대고 깐족거리는 톤을 유지하면서도, 웃기기만 한 인물이 아니라 잔인성과 권력의 냄새를 슬쩍 끼워 넣는 균형이 꽤 좋습니다. 유머러스한 악역이라는 말이 딱 맞는데, 과장되지 않게 리듬을 타는 방식이라 장면을 끌고 가는 힘이 있었습니다. 능력있는 군인에서 출세에 눈이 먼 야망가, 거기서 다시 인질들 생명에 대한 책임감으로 괴로워하는 서고명 중위의 연기도 돋보였어요. 홍경이라는 처음 보는 배우가 연기했는데, 앞으로가 기대됩니다.
일본 테러리스트들, 비행사, 정부 고관 역할을 맡은 일본 배우들도 대체로 안정적입니다. 특히 "백야행"의 야마다 타카유키가 한국 영화에서 비중 있는 역할로 등장하는 건 개인적으로 꽤 뜻밖이었는데, 연기도 좋았습니다. 거의 유일한 인격자(?)지만, 막판에 흥분하는 장면에서 제대로 존재감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영화가 기대만큼 성공하지 못한 이유는 잘 알겠더군요. 중반까지는 여객기를 김포 공항에 착륙시키기 위한 작전을 나름대로 치밀하게, 그렇지만 일본, 한국, 북한, 테러범들 모두 바보스러운 모습을 극대화하며 블랙 코미디를 잘 섞어서 그려내는데 그 이후는 무엇을 이야기하려는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탓이 큽니다. 급작스럽게 인도주의자로 거듭난 서고명의 딜레마 - 출세냐, 인질들의 생명이냐! -를 그리는 건지, 각자의 이익과 유불리에만 골몰하는 인간 군상을 다루는 사회 풍자물인지(누가 봐도 윤석렬-김건희 부부가 떠오르는 영부인의 등장까지 포함해서) 잘 모르겠더라고요.

비행기가 평양으로 간 뒤에 이야기가 어느 정도 정리되고 마무리되었으면 그래도 깔끔했을 텐데, 이후의 내용은 완전히 군더더기처럼 느껴집니다. 실화를 바탕으로 서고명 대위를 “완전한 영웅으로 만들지 않겠다” 같은 의도를 넣으려 한 것 같기도 한데, 그렇게까지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생각되거든요. 이외에도 어색하게 메시지나 사상을 끼워 넣으려는 듯한 부분들은 모두 영 별로였습니다. 별로 웃기지도 않고요. 차라리 코미디로 계속 밀어 붙였더라면 더 나았을텐데, 괜히 러닝타임만 잡아먹을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아무개'의 존재입니다. 중앙정보부장이 뭐가 아쉬워서 신원도 불분명한 이런 인물을 국가간 외교가 얽히는 거대한 작전에 핵심 인물로 기용할까요? 북한 출신이라는 등의 설정도 억지스럽고, 아무개가 뉴스까지 조작하며 진실을 대충 숨긴다 어쩌구 하는 메시지도 잘 와 닿지 않습니다. 무언가의 전문가로는 전혀 생각되지 않는 배우 설경구의 연기도 별로였고요. 이 인물을 빼고, 중앙정보부장과 서고명 중위, 테러범들을 중심으로 하여 블랙 코미디 하이재킹 군상극으로 만들었어야 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재기발랄한 연출과 배우들의 연기는 장점이지만, '아무개'라는 존재의 무리수와 후반부 사족, 그리고 전반적인 영화 톤을 제대로 잡지 못해 러닝타임이 늘어진건 단점입니다. 그래도 가벼운 마음으로는 볼 만 합니다. 

2008/06/21

러시아 추리작가 10인 단편선 - 엘레나 아르세네바 외 / 윤우섭 외 : 별점 3점

러시아 추리작가 10인 단편선 - 6점
엘레나 아르세네바 외 지음, 윤우섭 외 옮김/황금가지

제가 좋아하는 추리 단편집에다가 이색적인 러시아 문학이라.. 도저히 안 사볼 수 없는 책이었죠. 그렇지만 역시 친숙한 추리 단편 문법과는 좀 차이가 있어서 완독에 좀 시간이 오래 걸렸네요.

정통 추리물도 있고 심리 스릴러도 있고 블랙 코미디도 있는 등 다양한 쟝르가 혼재되어 있으며, 작품 수준도 천차만별이지만 평균적으로는 범작 수준 정도는 유지하는 듯 합니다. 결론만 이야기하자면 신선하고 이색적인 부분 덕에 꽤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단편집이었다 생각합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아주아주 독특한 블랙코미디적 "천사가 지나갔다"와 정통 추리 문법에 충실한 "이지웨이" 였습니다. 전체적인 별점은 3점입니다. 자세한 작품별 평은 아래와 같습니다.

니나의 크리스마스 기적

사립탐정 알렉세이는 부유한 미망인 니나로부터 조사를 의뢰 받았다. 키에프 역의 거지 소녀가 10년전 유괴당해 실종된 자신의 딸인지에 대한 조사였다. 

보기드문 "입양물" 입니다. 이러한 작품의 경우 대부분 입양과 관련된 재산분배가 이야기의 축이 된다는 것이 당연한 것일테고, 이 작품 역시 비슷한 구도로 흘러갑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여기서 더 나아가 입양 상황 자체에 대한 의심, 그리고 이 상황을 꾸민 인물은 누구이며 진짜로 노리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가 복잡하게 얽혀서 읽는 내내 아주 흥미진진했습니다. 

하지만 러시아가 무대라고 해서 이야기의 설정이 아주 독특한 것은 아니고 사립탐정이 등장하는 등 전형적인 영미권 추리물과 이야기의 얼개가 비슷한 것이 외려 놀라왔습니다. 추리물은 역시나 만국공통의 어떤 형식이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쨌건 반전이나 형식이 놀랍지는 않고 평이한 탓에 별 3개 때립니다.

공포의 인질 또는 내 고독의 이야기

폴리나는 위험한 사업을 하고 있던 남편의 총격 살해사건 뒤에 갑자기 사라졌다. 얼마 뒤 남편의 친구였던 바짐에 의해 기억상실상태로 발견되는데..

제목이 굉장히 시적인데 실상 내용은 뻔한 복수극입니다. 친구와 친구의 아내를 둘러싼 복수극은 엄청나게 진부한 소재이기도 하지만 이 작품은 황당하게도 증거가 거의 없는 상황에서의 직감에만 의존하는 복수극으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그래서인지 설득력이 떨어지고 긴장감도 그닥 느껴지지 않네요. 대국 러시아의 국민성 탓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을 죽고 죽이는 관계가 너무 쉽게 설정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눈여겨 볼만한 설정은 딱 하나, 폴리나가 바짐이 자신을 찾게끔 만드는 장치 하나뿐인데 이 역시 그냥 이야기에 묻혀 지나갈 뿐입니다. 심리묘사는 탁월하지만 너무 질질 끄는 탓에 지루하기까지 했고요. 좋게 이야기하자면 러시아 문학의 전통을 나름 이어받아 승화시켰다는 정도? 별점을 주자면 2개 밖에는 못 주겠네요.

천사가 지나갔다

드미트리 안토노비치 슈마코프는 개인 병원의 주임 의사로, 자신이 수술을 집도한 환자 표토르의 급작스러운 사망 소식을 듣고 격분했다. 그런데 우연히 의사 휴게실에서 환자의 링거팩을 발견하고 고의적인 살인 사건이 아닐까 의심하는데...

아주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추리물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상황극 드라마 같은데 일종의 갇힌 공간인 병원에서 주위 사람들의 증언과 알리바이를 확인해 나가며 진상을 파악하려고 애쓰는 주인공과, 주인공의 생각과 전혀 다른 결말이 상당히 재미를 가져다 주는 작품입니다. 추리물로 보기보다는 왁자지껄 블랙코미디랄까... 

그렇지만 증언과 증언들의 진위가 갈리는 마지막 장면의 통쾌함, 그리고 작품 전체에 흐르는 블랙코미디의 정서가 돋보여 별 4개의 가치가 충분했던 작품입니다. 물론 슈마코프의 로맨스(?)가 통하는 설정은 단지 천사의 능력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비약적이긴 하지만 뭐 그 정도는 봐 줘야죠^^

이지웨이

친구와의 크리스마스 파티 약속 때문에 마지막 버스를 타게 된 추리작가 알료냐는 버스 안의 승객들과 함께 기묘한 사건에 휘말린다.

추리작가가 탐정역으로 등장하는 작품으로 초반부의 여러가지 복선이 결말부분에서 모두 해결되는 추리적 장치는 잘 갖춰 놓은 작품입니다. 완성도 면에서는 허술한 부분도 눈에 뜨이며 정교하다기 보다는 단서 과잉일 정도로 단서가 곳곳에 넘치지만 그런데로 잘 끌고가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은 수작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도 주인공들 이름만 빼고는 "러시아적" 인 분위기를 느끼기는 좀 힘든 글로벌한 느낌이 들더군요. 그래도 아주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행복한 크리스마스

나는 학교 동창이자 악연으로 얽힌 친구 아냐의 집 애견 실종 사건에 도움을 요청받고 애견을 창고에서 발견했지만 그 사실을 숨겼다. 뒤이어 아냐의 남편인 세냐가 권총 자살을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유언장에 관련되어 풍파가 몰아닥치는데...

서구 미스테리의 한 축인 "유산상속"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실제 범행에 관련된 내용은 잘 짜여져 있고 추리적으로도 완벽한 수준이지만 가장 중요한 유언장의 진위여부가 두루뭉실하게 넘어가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단점으로 보입니다. 원래 변호사가 따로 있는 상황에서 유언장을 들고 나타난 누군가, 의심하는 것이 당연할텐데 그러한 것이 설명되고 있지 않거든요. "단지 연극" 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반칙으로 보입니다. 이 탓에 사건의 발단과 전개, 결말 모두 추리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아주 높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그냥 저냥한 평작입니다.

복수의 물결

대학교 입학 문제로 모스크바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료사는 높은 보수 때문에 크렘뇨프 가문의 하녀로 일하게 되었다. 하녀장 타이시야의 온갖 히스테리를 견뎌내는 와중에 소치에서 벌어진 파티에서 크렘뇨프가 살해당했고, 곧이어 미망인은 현상금 10만달러를 내걸었다. 현상금에 매혹된 료사는 범인을 직접 밝혀내기로 마음 먹는데...

1인칭 시점의 나름 매력적인 주인공 덕에 읽는 재미는 충분했습니다. 러시아 신흥 귀족층의 흥청망청한 분위기도 잘 살아있고요. 또한 추리적 요소와 단서, 정교함 역시 기대 이상으로 잘 짜여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재수생(?) 신분인 주인공이 손쉽게 범인을 특정할 수 있을 만큼 알려진 정보를 경찰이 간과하고 넘겼다는 것이 전혀 설명되고 있지 않더군요. 추리적으로는 성공했지만 독자를 납득시키는 데에는 반쯤 실패했다고나 할까요? 조금만 더 신경써 주었더라면 훨씬 좋은 작품이었을텐데 아쉽네요. 그래도 별 3개는 충분합니다.

러시아식 성탄절

스페틀라나는 영화 퀴즈에 당첨되어 "러시아식 성탄절"이라는 방송 촬영 출연자들과 같이 성탄절을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유명배우 아르세네프를 비롯하여 다양한 유명인들이 모인 시골 저택에서 촬영이 시작되었고, 곧이어 아르세네프의 전부인 잔나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된다...

떠들썩한 분위기. 뭔가 러시아스러운 느낌을 전해주는 단편이었습니다. 그러나 너무 장황하고 혼란스러운 점은 작품에의 몰입을 방해하는 측면이 있었습니다. 러시아스럽긴 한데 말이죠... 그래도 추리적으로 결정적인 단서가 등장하여 거기서 모든 사건이 풀린다는 깔끔한 전개는 괜찮았고 여러가지 설정면에서의 디테일이 좋았기에 평작 이상의 수준은 되는 것 같습니다. 별 3.5개 정도?

마지막 성탄절

젊은 아내 야나와 같이 사는 보리스는 큰 병에서 막 회복되어 야나의 보살핌으로 살아가고 있는 상태. 그 해의 마지막 날, 쓸쓸한 둘만의 새해맞이가 되지 않도록 야나의 친구 몇명을 불러 작은 파티를 여는데 그 날 야나가 살해된다...

두번의 반전이 있는 짤막한 소품입니다. 심리 묘사가 탁월하여 읽는 재미는 좋았는데 마지막 반전은 좀 뻔하긴 하더군요. 소품이자 평작. 걍 기본정도 하는 작품이죠.

예정된 살인

줄거리 요약 불가...

너무 혼란스럽고 어지러운 소설이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작품 전개를 알 수 없을 정도였거든요. 번역의 문제인지 원래 그런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소설 수준으로 보아주기 어려울 정도여서 뭐라 평할 수 없네요. 번역한 분이 다시 한번 읽어나 보셨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알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별 1개도 주기 힘드네요.

2021/11/07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 히가시노 게이고 / 민경욱 : 별점 2.5점

추리소설가의 살인사건 - 6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소미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소설 자체를 풍자했던 "명탐정의 규칙" 시리즈에 이은, 히가시노 게이고의 블랙 코미디 풍자 단편 모음집입니다. 이번에는 추리 문단에 관련된 모든 인물들, 즉 작가, 독자, 편집자, 평론가 모두를 비판하고 풍자합니다. 돈벌이에만 골몰하는 작가, 잘 팔리기 위한 화제를 만드는데 집중하는 편집자, 제목과 약간의 설정만 다른 똑같은 작품을 유명 작가의 시리즈라는 이유만으로 소비하는 독자들. 책의 완성도 따위는 관심없고, 쉽게 돈 벌 생각에, 생각과는 다른 평론을 써 제끼는 평론가가 등장하거든요. 2001년 발표작이라는데, 데뷰한지 15년이 지났고 여러 히트작으로 업계에서 탄탄한 지위를 굳힌 히가시노 게이고였기 때문에 쓸 수 있었던 작품이었다고 생각됩니다. 그 만큼 과격한 풍자가 많습니다.

돈벌이에만 골몰하는 작가를 풍자하는건 "세금 대책 살인사건"이 대표적입니다. 작중 추리소설가 '나'가 막대한 세금을 내지 않기 위해, 고액의 영수증을 비용 처리하려고 원래는 홋카이도가 무대인 소설에 하와이를 집어 넣고, 여러가지 옷을 구입한 이유와 골프 비용 등을 집어 넣으면서 작품이 산으로 가게 만든다는 내용이니까요. 소설을 어떻게 바꿔 썼는지가 자세히 등장하는데, 이게 굉장히 웃기더라고요. 결국 '나'의 작품은 망해서 연재마저 끊기고, 세금 대책에도 실패한다는 결말이고요. 추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블랙 코미디 풍자극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서점의 명탐정" 수록작이었던 "일상 업무 탐정단"에 소개되었던 작품인데, 이렇게 읽게 되어 굉장히 반가왔습니다.

잘 팔리기 위한 화제를 만드는데 집중하는 편집자는 "장편소설 살인사건"에 등장합니다. 긴쵸사의 편집자 오기는 그는 '초대작' 이어야만 팔린다고 작가 구주하라 만타로를 꼬드겨서, 800장의 완성도 높은 작품을 2,000 장으로 늘려버립니다. 별 거 아닌 문장을 몇 배로 늘리고, 쓸데없는 묘사를 덧붙이는 식으로요. 게다가 신작 "커브볼"은 3,000장을 목표로 작품과는 상관도 없는 정보를 다수 삽입하여 분량을 늘려가다가, 결국 '무게'로 승부하고 만다는 황당무계한 짓거리를 저지르고 말지요.
구즈하라가 작품 길이를 늘리기 위한 분투를 상세히 묘사한 내용은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그나저나 알맹이는 없는데, 이상하게 긴 대작 장편이 많은건 저도 불만이었는데, 정말로 이런 짓거리가 벌어진게 아닌가 의심스럽군요. 

"마카제관 살인사건"은 아주 짤막한데, 편집자에게 휘둘려 본의아닌 작품을 쓰게 되었던 작가의 절규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편집자를 풍자하고 있다고 보입니다. 물론 작가 문제도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요.

자기가 썼던 내용도 기억하지 못하는 탓에, 연재 소설을 제대로 쓰지 못하는 90대 고령 치매 작가 야부시마 기요히코가 등장하는 "고령화 사회 살인사건"은, 제목 그대로 '고령화'가 닥친 추리 작가의 비극(?)을 그려낸 블랙 코미디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독자들을 비판하는 작품이에요. 야부시마 기요히코가 엉망인 작품을 쓰면서도, 심지어 이전에 출간했던 작품과 같은 내용인데도 불구하고 팔리는 이유는 독자들이 유명 작가의 시리즈라는 이유만으로 소비하기 때문이거든요. 독자들도 고령이라 전작을 다 잊었다는 식으로 끝맺기는 하는데, 전작을 잊지 않았더라도 현실에서 실제로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 독자로서 반성하게 되더군요.
예를 들어 요코미조 세이시의 "삼수탑"은 "여왕벌"의 자가 복제에 불과했는데도 불구하고, 작품이 발표될 수 있었던건, 이름값만으로 무조건적으로 소비하는 독자 탓도 분명 크다고 생각됩니다. 

"이과계 살인사건"은 내용이 뭔지도 잘 모르면서 읽은 척, 잘난 척을 해대는 매니아들을 비판하는 내용으로, 이 역시 추리 애호가로서 많이 와 닿았습니다.

"독서 기계 살인사건"은 책을 읽지도 않고, 편집부 요청대로 호평과 혹평을 써갈기는 평론가 몬마가 주인공입니다. 이는 '쇼혹스'라는 기계를 구입한 덕에 가능했었지요. 쇼혹스를 만든 회사는 쇼혹스를 평론가들과 출판사에 팔아먹은 뒤, 쇼혹스의 비평을 최고 점수로 통과할 수 있는 요령을 알려주는 쇼혹스 킬러를 만들어 작가 지망생들에게 팝니다. 마지막 제품은 일반인용의 시타카브릭스로 책의 요약과 재미있고 지루한 부분을 알려주는 장치였고요.
단순히 평론가들만 비판하는건 아니고, 책을 읽지도 않는데 작가가 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고, 책이 팔리지도 않는데 베스트셀러가 발표되고, 일반 독자는 알지도 못하는 상이 들어나는 등 책은 사라지고 있지만 책을 둘러싼 환상만은 요란한 현 세태를 풍자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요즘 컨텐츠가 넘쳐나서 사람들이 책을 예전만큼 읽지 않는건 명확한 사실인데 차라리 시타카브릭스같은 장치가 상용화된다면 팔리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줄거리는 물론 스포일러까지 가득 담고 있는 제 리뷰가 바로 그런 역할을 하고 있기는 한데, 조회수를 보면 이나마도 안 읽는게 요즘 세태가 아닌가 싶어 좀 씁쓸하기도 하네요.

이런 블랙 코미디나 풍자극으로 즐길 수 있는 작품 외에도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작품들도 수록되어 있습니다. "범인 맞추기 소설 살인사건"이 그러합니다. 유명 작가 시마부쿠로는 직접 쓴 추리 소설 '문제편'을 해결하는 편집자에게 신작 장편을 넘기겠다고 말하고, 각 회사 편집자들의 두뇌 싸움 끝에 긴초샤의 가타기리가 범인이 누구인지 밝히는데 성공합니다. 그러나 시마부쿠로가 쓴 신작 장편 따위는 없었습니다. 얼마전 죽은 그의 아내가 진짜 작가였기 때문으로, 시마부쿠로는 아내가 남긴 소설 문제편의 해답을 알 수가 없어서 편집자를 동원했던 겁니다. 즉, 어떻게든 돈벌이를 만들기 위해 있지도 않은 장편을 걸고 편집자를 이용한거지요.
악덕 작가의 표본처럼 묘사되는 시마부쿠로를 통한 적절한 풍자도 인상적이었지만, 편집자가 그럴듯한 해답을 추리해 낼 수 있게끔 문제편에서의 단서 제공이 완벽한 덕분에 정통파 본격 추리 소설로 보아도 충분했던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예고소설 살인사건"에 등장하는 마쓰이 기요후미는 매 화마다 제복을 입은 여자가 살해되는 작품을 연재하는 인기없는 추리 작가입니다. 그런데 그가 쓴 내용대로 실제로 제복을 입은 여자들이 살해되기 시작하고, 마쓰이의 작품도 덩달아 큰 인기를 얻게 된다는 내용이지요. 마지막 화에 범인이 '자살'한다고 쓴 마쓰이는, 범인과 대결하려다 오히려 살해당하는데 그 탓에 범인으로 몰리고 만다는 결말입니다. 마쓰이는 중반 이후. 범인과 결탁해서 원고를 썼기 때문에 돈벌이에 골몰하는 작가를 풍자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풍자보다는 일종의 범죄물에 가까왔던 작품이에요.

결론적으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블랙 코미디이자 풍자극으로도 재미있지만 정통 추리적인 요소도 없지는 않은 만큼, 독특한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추리 문학 애호가분들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2010/06/21

악몽의 엘리베이터 - 기노시타 한타 / 김소영 : 별점 2점

악몽의 엘리베이터 - 4점
기노시타 한타 지음, 김소영 옮김/살림

바텐더 오가와는 불륜관계에 있는 종업원 요코를 집에 바래다 준 날 아내의 긴급한 진통 소식을 듣고 뛰어나가다가 엘리베이터에 갇히게 된다. 오가와와 같이 엘리베이터에 갇힌 사람은 이상한 중년남과 프리터, 운둔형 외톨이로 보이는 여자였다. 그리고 갇힌 상태에서 각자의 악몽이 시작되는데....

<사형대의 엘리베이터>가 연상되는 제목처럼 폐쇄된 공간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이야기, 블랙코미디 속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생각외로 등장인물들이 얽혀 있다는 점 등 비슷한게 많더군요. 하지만 단순한 아류작은 아닙니다. 굉장히 큰 차별화 포인트가 있는데 바로 배우, 각본가, 연출가로 활약해 온 작가의 성향이 작품에 두드러지게 반영되어 있다는 것이죠. 즉, 한편의 블랙코미디 범죄 연극을 보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이러한 연극적 요소는 작품의 장단점을 확고히 하는데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일단 굉장히 쉽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폐쇄된 공간에서 몇명의 등장인물만 나와 대사로 대부분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구조 자체도 단순하지만 대사와 성격, 상황이 희극적으로 강조되어 있어서 책장이 쉽게쉽게 넘어가거든요.
또한 3인칭 시점이 아니라 등장인물들의 시점으로 무대의 막이 나뉘듯 각자 한 꼭지씩 주인공 역할을 수행하는 것도 독자에게 내용을 보다 쉽고 재미있게 전달해주는데 한몫 단단히 하고 있습니다. 피해자 오가와의 시점으로 시작해서 사건의 개요를 일당 중 한명인 마키의 시점으로 정리해주고 마무리를 일당의 리더 사부로가 마무리하는 3막 전개인데 각자 사고방식도 확실하고 전개도 빨라 재미있게 읽을 수 있으니까요.

그러나 사건 자체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것, 우연에 의한 요소가 많기 때문에 추리-범죄물로 높은 점수를 주기 어렵다는 것은 단점이죠. 반전도 가오루의 첫 등장과 고용과정, 그리고 오가와의 불륜과의 인과관계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는 우연에 의한 부분이라는 점 때문에 완벽한 반전이라고 보기는 힘들고요. 개인적으로는 재미를 더해주는 요소임에는 확실했다고 생각은 됩니다만...

3막의 연극이나 영화로 각색한다면 좋은 소재가 되겠지만 소설로서는 조금 아쉬운 작품이었다 생각되네요. 무료하고 무더운 일요일 오전을 시간가는줄 모르고 보내게 해 준 재미 하나는 확실하지만 제가 일본식 코미디의 과장과 오버를 싫어하기에, 또 기대했던 추리-스릴러나 서스펜스가 아니라 블랙코미디에 더 치우쳐져 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010/02/25

더 박스 - 리처드 매드슨 / 나중길 : 별점 2.5점

더 박스 - 6점
리처드 매드슨 지음, 나중길 옮김/노블마인

"나는 전설이다"의 리처드 매드슨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비롯해서 전부 10편의 작품이 실려있네요.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 버튼, 버튼
  • 신비한 꿈을 꾸는 여자
  • 매춘부 세상
  • 흡혈귀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
  • 옷이 사람을 만든다
  • 카페에서 생긴 일
  • 충격파
  • 벙어리 소년
  • 특이한 생존 방식
  • 소름 끼치는 공포
반전물로는 "버튼, 버튼", "매춘부 세상", 그리고 범위를 좀 넓게 잡으면 "신비한 꿈을 꾸는 여자", "흡혈귀 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 까지 총 4편을 꼽을 수 있습니다. 그 외의 다른 작품들은 범죄 서스펜스 스릴러 ("카페에서 생긴일"), 썰렁 판타지 ("옷이 사람을 만든다"), 풍자 블랙 코미디 ("소름 끼치는 공포") 등 다양한 장르가 실려있어 일견 풍성한 느낌을 전해주네요.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별로였어요. 전체적인 분위기에서 좀 옛날 작품이라는 느낌이 팍팍 전해져온다는 것과 반전이 기대에 미치지 못한 작품이 많았거든요. "나는 전설이다"와 비교한다면 한참 처지는 단편집이라 생각되더군요.
예를 들자면, 표제작인 "버튼, 버튼"의 경우 20년전 환상특급 (Twilight Zone)의 에피소드를 연상케하는 작품인데 반전으로서의 설득력도 부족했고 너무 예상 가능한 결말이 아니었다 싶었어요. 버튼을 누를 경우 모르는 사람이 죽는 대신 5만달러를 받는다는 기본 설정은 분명 거장의 솜씨인데 전개와 마무리가 너무 약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버튼을 누르면 특정 "방"의 전원이 완전히 차단되고 그 전기료를 한전이 버튼 주인에게 보내준다는 소박한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그래서 매일 아내가 버튼을 눌러 적게나마 용돈벌이를 하는데 어느날 남편이 버튼의 작용으로 엘리베이터에 갇히게 되고 안에서 질식해서 죽는다는 이야기... 이게 더 재미있지 않나요?
그리고 "옷이 사람을 만든다"는 그야말로 "썰렁한" 이야기더군요. 반전물도, 범죄물도 아닌 드라마인 "충격파"는 독특하기는 한데 기대와는 너무 다른 작품이라 겉도는 느낌이 강했고요. 차라리 두 작품 모두 "스멀스멀" 계열로 쭈~욱 끌고 갔더라면 더욱 좋았을텐데 좀 아쉬웠습니다.
그 외에 진지하고 짤막한 드라마 "특이한 생존 방식" 도 그닥 인상적이지 않았고 풍자성격이 강한 블랙코미디 "소름 끼치는 공포"도 독특함은 좋았지만 미국이라는 나라에 특화된 발상과 풍자라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하지만 거장다운, 기대에 값하는 좋은 작품도 물론 실려있습니다. 영매가 등장하는 범죄스릴러 "신비한 꿈을 꾸는 여자"는 마지막 부분의 서늘한 느낌이 일품이었고, 블랙코미디스러운 맛과 독특한 설정, 반전까지 깔끔한 "매춘부 세상"은 그야말로 반전물 단편의 교과서같은 작품이더군요. 고딕 호러에서 시작해서 완전범죄 추리물로 끝나는 "흡혈귀따위는 이 세상에 없다"는 추리 애호가로서 좋아할 수 밖에 없는 작품이었고요. 초능력에 대한 작가의 색다른 시각이 돋보이는 (지금 읽기에는 많이 뻔해졌지만) "벙어리 소년"도 괜찮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작가 특유의 서스펜스와 심리묘사가 돋보이는 진지한 범죄물 "카페에서 생긴일"은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돋보이이기에 이 단편집 베스트로 꼽고싶습니다. 디테일하게 파고든다면 범죄가 너무 빨리 들통난다는 것과 주인공 여성을 범인들이 너무 쉽게 놓아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은 들지만 이런 단점을 뛰어넘을 정도로 숨막히는 전개가 돋보이는 명편이거든요.

결론내리자면 절반정도는 괜찮았고 절반정도는 그냥 그랬던 어중간한 책이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썩 뛰어나지는 않지만 읽는 재미는 있고 짤막한 작품들이니 만큼 심심풀이로 읽을거리를 찾으시는 분들에게 적합한 단편집이라 생각되네요. 그러나 되도록 구입보다는 빌려읽으시기를 권합니다.

PS : "버튼, 버튼"은 카메론 디아즈 주연으로 영화가 개봉되었다는데 보지는 못했지만 대관절 어떻게 만들었는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원작 단편은 30분짜리 단막극으로 만들어도 충분한 이야기인데 말이죠.

2010/01/16

벽장 속의 치요 - 오기와라 히로시 / 신유희 : 별점 3점

벽장 속의 치요 - 6점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신유희 옮김, 박상희 그림/예담

책의 제목이기도 한 표제작 이외 8편, 그러니까 총 9편의 단편이 실린 호러 단편집입니다. 잘 모르는 작가인데 책 소개만 보고 충동구매한 책이죠.

총 9편의 단편을 분류하자면 3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유령이 나오긴 하지만 인간적이고 따뜻한 "말랑말랑 에피소드" (벽장 속의 치요 / Call / 신이치의 자전거), 끔찍한 현실에 대한 모골 송연한 결말을 그리고 있는 "모골송연 에피소드" (어머니의 러시아 수프 / 늙은 고양이 / 어두운 나무그늘), 마지막으로 빠른 전개와 박력과 더불어 블랙 코미디적인 느낌이 잘 살아있는 "박력화끈 에피소드" (예기치 못한 방문자 / 살인 레시피 / 냉혹한 간병인) 정도로 말이죠. 이 가운데에서 개인적으로는 "화끈 에피소드" 쪽이 제일 마음에 들었습니다. 발상도 기발하고 전개과정에서 쉴틈 하나 주지 않는 박력이 인상적이었거든요.

하지만 아쉽게도 나머지 두 분류는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일단 "말랑말랑 에피소드"는 너무 분위기가 안 맞았어요. 유령이 등장한다고 해서 "사랑과 영혼"이 호러는 아니잖아요? 그나마도 너무 뻔한, 독특한 요소도 없는 이야기들이라 지루했습니다. 반대로 "모골송연 에피소드"는 호러물이라는 장르에 충실하긴 해서 어느정도 재미는 주지만 좀 억지스러운 설정이 많더군요. 물론 호러물이 설득력을 갖출 필요는 없겠지만 약간 아쉽더라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평균적으로 3점입니다. "화끈 에피소드"와 "모골송연 에피소드" 만 실려있더라면 3.5점을 줬을텐데 나머지 이야기가 너무 취향이 아닌지라 0.5점 깎았습니다. 베스트 에피소드로는 "예기치 못한 방문자"를 꼽고 싶네요. 작가의 역량은 충분히 알았기에 "화끈" 쪽 장편이 있다면 한번 구해봐야겠습니다.
벽장 속의 치요
게이타는 실직 후 이상하게 싼 집세의 맨션으로 이사한 뒤, 벽장속에서 "치요"라는 소녀 유령이 나타나는 것을 알게 된다.
이 단편집의 표제작이긴 한데 사실 큰 재미는 없었습니다. "치요"의 슬픈 과거를 게이타가 밝혀내어 성불시켜주는 이야기가 되어야 하나로 완성될 것 같은데 이야기 서두에서 서둘러 끝마친 미완성 작품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약간의 반전이 있기는 하지만 이야기에 큰 영향을 주는 요소도 아니라서 이래저래 애매해 보이네요. 별점은 2.5점.

Call
나는 미유키와 함께 죽은 대학 동창 묘지를 찾아간다. 우리 세명은 같은 대학 초자연현상 연구회 소속으로 나도 미유키를 좋아했었다...
중간에 시점이 바뀌는 일종의 서술트릭이 쓰인 말랑말랑한 멜로물입니다. 하지만 시점이 바뀌는 시점이 아무리 보아도 억지스러워서 트릭을 위한 트릭이라는 느낌밖에는 들지 않네요. 이건 완전 반칙이죠... 내용도 너무나 진부한 이야기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머니의 러시아 수프
나와 소냐는 어머니의 보살핌으로 중국에서 탈없이 살아가는 9살배기 쌍동이.
9살배기 꼬마의 1인칭 시점으로 세모녀의 힘든 삶을 다룬 이색 단편입니다. 힘든 시기 살기 위해 몸을 파는 어머니의 모습같은 이야기 등은 굉장히 뻔한 이야기죠. 하지만 이 작품은 마지막 반전과 현실적인 공포를 드러내는 결말을 통해 상당히 재미있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별점은 3점.

예기치 못한 방문자
히라이와 리쿠조는 정부 사토미를 우발적으로 살해한다. 어떻게는 시체를 숨기려 하는 찰나 청소서비스 더스 클린의 예기치 못한 방문을 받게 된다.
리쿠조의 살해 직후 이야기가 시작되는 단편입니다. 전편에 걸쳐 시체를 숨기려는 자와 불청객간의 숨바꼭질이 숨가쁘게, 그리고 유머스럽게 펼쳐지는 블랙코미디에 가까운 작품이죠. 시종일관 긴장감이 넘치면서도 유머스러워서 아주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4점.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은 흥겨운 분위기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살인레시피
야스다 후미히코는 아내 구미코를 살해할 결심으로 특별 요리를 준비한다.
바로 전 작품인 "예기치 못한 방문자"와 동일한 블랙 코미디 서스펜스 스릴러물입니다. 부부만 등장하여 식탁에서 서로의 생명을 건 사투를 벌인다는 설정은 흔하디 흔한 이야기죠. 하지만 딱 두명만 등장해서 저녁식사하는 식탁에서 혈전이 벌어진다는 설정에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식탁에서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식재료에 대한 묘사도 디테일하고요. 단 결말이 구태의연하다는 단점이 있어서 별점은 3.5점입니다.
혹 영상화한다면 규모와 등장인물은 적지만 서스펜스 하나는 제대로 뽑아내고 있기에 영화보다는 연극에 더욱 어울릴 것 같습니다.

냉혹한 간병인
소노코는 치매로 쓰러진 시아버지 젠조를 돌보는 척 하나 실제로는 학대하는 악질 며느리.
현실적이면서 주위에 있음직한 소재에서 "몬스터 호러물"을 뽑아낸 듯한 작품입니다. 전반부의 자기중심적 악질며느리 소노코도 괴물이지만 후반부에서 본격적 복수와 응징에 나서는 젠조의 존재감, 카리스마가 압권으로 아주 흥미진진하게 읽은 작품입니다. 젠조가 갑자기 정신을 차리는 계기에 대한 설명이 미흡한 등 단점도 물론 있지만 워낙에 박력이 넘쳐 별점은 4점입니다. 이 단편집에서 국내 시장에 가장 잘 맞지 않을까 생각도 됩니다. 우리나라야말로 고부간 갈등이 많잖아요^^

늙은 고양이
나는 히데오 숙부의 사후 숙부의 집을 상속받아 이사가게 된다. 숙부가 키우던 늙은 고양이와 함께 가족이 이상하게 변해가는데...
일종의 "이형 공포물" 정도 될까요? 정체를 알 수 없는 고양이 한마리로 나를 제외한 가정의 붕괴를 접해가는 주인공의 심리묘사가 포인트인 작품입니다. 다른 이형, 또는 바이러스 등으로 전염되듯 붕괴되는 공동체를 다룬 작품으로 좀비물이나 흡혈귀물과도 어떻게보면 맥락이 같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런 류의 작품군에서 가장 중요한 매개체, 즉 가장 중요한 고양이의 정체를 속 시원히 밝혀주지 않는다는 것이 치명적인 약점으로 보입니다. 분위기와 묘사는 그럴듯 했지만 단점이 너무 크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어두운 나무 그늘
15년전 숨바꼭질을 하다가 동생 야요이가 실종된 뒤 처음으로 나는 다시 외갓집을 방문한다. 외갓집은 사촌오빠 유이치 혼자 머물고 있었다. 야요이의 흔적을 다시한번 찾던 나는 마당의 오래된 녹나무에서 이상한 무언가를 느낀다.
실제 범죄가 가증스러운 것이기에, 그리고 결말의 묘사 하나가 섬찟해서 (유이치의 얼굴이 떠올라 있던 곳은, 지상 2미터가 넘는 높이였다는 것을) 개인적으로는 "모골송연" 쪽으로 분류했지만 어떻게 보면 일상계 심리물이기도 한 작품이죠. 별것 아닌 무대장치에서 서스펜스를 자아내는 전개도 흥미진진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진상이 15년동안 은폐될만한 것은 아니라는 단점 때문에 감점해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신이치의 자전거
나에게 신이치가 찾아와 한밤중 사당을 탐험하는 모험을 제안한다...
어린 시절 추억을 약간의 괴담처럼 꾸민 작품. 잔잔하긴 하지만 심심할 뿐 아니라 뻔하기까지 해서 높은 점수를 주긴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4/10/27

화성 연대기 - 레이 브래드버리 / 김영선 : 별점 2.5점

화성 연대기 - 6점
레이 브래드버리 지음, 김영선 옮김/샘터사

SF계의 거장 레이 브래드버리의 작품으로, 화성인 시점에서 지구인이 아직 화성에 오기 이전부터 지구인 탐험대가 수 차례에 걸쳐 도착하고, 이후 지구인의 이주와 화성인의 멸망, 이주민들의 귀환... 순으로 이어지는 여러 단편이 수록된 연작 단편집입니다.

연대순 배치는 제목처럼 "연대기"라는 느낌을 전해 주는 데 크게 기여하지만, 수록된 작품들이 하나로 통일된 구성은 아닙니다. 본격 하드 SF는 물론 서정적인 동화, 블랙 코미디까지 장르의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거든요. 그래서 몇몇 작품은 다른 작가가 쓴 느낌마저 들 정도입니다.
"일러스트레이티드 맨"처럼 아예 대놓고 다양한 작품들이 수록되었더라면 더 나았을텐데, "화성 연대기"라는 속성의 작품만 모아 놓다 보니 송곳처럼 확 튀어나오는 작품이 많지 않다는 점은 조금 아쉽더군요.

그래도 한 페이지짜리를 포함한 스무 편이 넘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볼륨 덕분에 괜찮은 작품도 제법 됩니다.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매력 포인트라 할 수 있는 블랙 코미디 반전물들이 인상적이었어요. 지구에서 온 탐험대가 화성인들에게 정신병자로 오해받는다는 "지구인"은 이런 류의 농담물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지적 논리를 보여주는 작품이 아닐까 싶고, 아담과 이브가 되었는데 이브가 너무 못생겨서 도망쳐버린 사나이 이야기인 "적막에 휩싸인 도시들"은 이야기의 재미도 재미지만 주인공 월터의 심리 묘사가 대단해서 감정이입이 절로 되었습니다.
이런 블랙 코미디 외에도 화성인의 텔레파시 능력을 기반으로 한 독특한 이야기인 "3차 탐험대"나 "화성인"도 좋은 작품이며, 화성이라는 곳을 망치는 침략자로서의 지구인을 묘사한 "달은 지금도 환히 빛나건만"은 분명한 걸작입니다. 화성인이 멸망한 것이 지구인의 '수두'라는 전염병 때문이라니요!

하지만 환상을 다룬 설정이 반복되고, 작가 특유의 '기묘한 맛'을 느끼기 어려웠던 점 등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부분입니다. 또 낡은 소재들이 있기 때문에 "일러스트레이티드 맨"과 같이 지금 시점에 먹히기에는 조금 힘들 것 같습니다.

때문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좋은 작품인 것은 분명한데 시대가 너무 많이 지났네요. 이 작품을 실시간으로 접했던 당대 독자들이 부럽기만 할 따름입니다. 거장다움은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만큼 장르문학 팬들에게는 추천드리는 바입니다. 허나 작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도 조금 묵직한 편이니, 만약 브래드버리 입문자이시라면 다른 단편집을 먼저 찾아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덧 : 책의 디자인과 장정은 아주 예뻐서 소장 가치가 충분한데, 출판사가 "샘터"라는 것이 신기하네요. 앞으로도 꾸준히 장르 소설을 출간해 주었으면 합니다.

2009/05/20

인체 모형의 밤 - 나카지마 라모 / 한희선 : 별점 3점

인체 모형의 밤 - 6점
나카지마 라모 지음, 한희선 옮김/북스피어

국내에는 처음 소개되는 일본 작가 나카지마 라모의 단편을 모은 작품집으로, 단편들은 제목처럼 인체모형에 관련된 기괴한 묘사에서 시작되어, 눈-피-코-귀-다리-무릎-배꼽-팔-뼈-위-유방-날개와 성기 라는 인체의 부분을 주제로 하여 쓴 작품들로만 구성되어 있습니다. 전에 읽었던 판타스틱의 원사운드 만화를 보고 구입하게 되었네요.

각 단편별로 분위기가 굉징하 다른 것이 특징인데, 유령이 등장하는 정통(?) 심령 호러물에서 부터 시작해서, 일종의 괴물이 등장하는 스플래터 호러, 심리 스릴러에 더불어 진지한 드라마와 1인칭 시점의 블랙 코미디까지 실려 있어서 굉장히 풍성합니다. 그야말로 색다른 인생을 살아온 작가에게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다루고 있는 내용이 방대하기도 하고요.

하지만 작품별 수준의 편차가 크다는 것, 그리고 대부분의 작품이 예상 가능한 내용으로 흘러간다는 것이 좀 아쉽네요. 뭔가 한번 정도 더 비틀 수 있는 이야기들인 것 같은데 너무 평범하게 마무리한게 아닌가 싶거든요. 또한 앞서 말했듯 쟝르가 다양해서 호러 소설이 취향이 아니더라도 즐길 작품이 많다는 것은 장점이 될 수 있지만, 외려 정통 호러로 보이는 작품이 별로 없다는 것 역시 사람에 따라서는 단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개인적인 베스트인 "사안"과 "코" 처럼 오싹하면서도 의외성이 있는 작품들이 더욱 많았더라면 좋았을텐데요...

그래도 충동구매에 가까운 구매였는데 다행히 평균 이상은 해 주어서 만족스러웠습니다. 제가 워낙 단편집을 좋아라해서 점수가 더 높을지도 모르지만...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로 좀 더 자세히 설명하자면,
프롤로그 : 인체모형의 밤이라는 제목에 걸맞는, 작품을 한데 묶는 이야기로 별 특기할 점은 없습니다.

사안(邪眼) : 싱가포르를 무대로 한 심리 스릴러물로 스멀스멀 계열의 작품입니다. 일본인 싱가포르 주재원의 아내가 임신하였는데, 현지 고용인인 가정부가 임신한 아이가 "사안"을 지녔다.. 라고 믿는다는 내용으로, 사안이라는 전설과 푸른눈이라는 설정을 잘 결합한 좋은 단편입니다. 진실이 괴담보다 무섭다는 마지막 반전도 톡 쏘는 맛이 아주 좋았고요. 이런 류의 단편으로는 모범답안이 아닐까 싶네요.

세르피네의 피 : 세르피네라는 섬을 그야말로 "낙원" 이라고 믿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이야기로, 사실 "낙원"의 실체는 달랐다.. 라는 반전이 있는 전형적인 작품입니다. 반전에 이르기까지 교묘하게 장치한 복선을 풀어나가는 맛은 괜찮지만 반전 자체가 그다지 와닿지는 않아서 약간은 심심했습니다. 또 "피"를 연관시키기에는 좀 억지스럽기도 했고요.

코 : 조향사인 주인공은 옛 남자친구의 소개로 싼 맨션을 얻어 이사한다. 그러나 이유를 알수없는 물소리와 냄새 때문에 곤란해 하던 차에, 전 세입자가 자살했다는 것을 알게된다...
유령이 등장하는 괴담입니다. 뻔하게 흘러가서 뻔하게 끝맺긴 하지만 유령 이야기의 무서운 점, 즉 보이지는 않지만 들려오는 소리와 냄새를 조향사라는 직업의 주인공을 통해 잘 드러냈으며 특히나 "돼지뼈 라면 국물 끓이는 냄새"의 정체가 모골이 송연하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습니다. 전 정말이지 일본 욕탕이 물을 그렇게 데우는 시스템이라는걸 몰라서 마지막에 깜짝 놀랐네요.

굶주린 귀 : 판타스틱의 원사운드 만화를 통해 접한 것이 이 단편의 소개였죠.
옆방을 엿듣는것이 취미인 남자가 주인공입니다. 주인공은 새로 이사온 집 옆집을 엿듣던 중 분명 둘 사이에서 벌어지는 대화인데 여자만 이야기하는 것을 알게됩니다. 궁금함을 참을 수 없어 옆집에 인사를 가는 척 하며 여러가지를 물어보던 중에 옆집 여자 남편이 "언어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조금은 허무한 마음에 술을 사러가던 주인공은 여자 집을 우연히 올려다 보는데.... "남자 빨래가 하나도 없어!"
이 줄거리만 놓고 보면 굉장히 흥미진진한데, 아쉽게도 결말이 너무 예상 가능한 범위내에 있었습니다. 좀 더 반전다운 반전이 등장하는 편이 훨씬 좋았을것 같아요. 예를 들면 레즈비언 부부였다던가, 남편이 게이바 사장이나 트랜스젠더였다던가....

건각(健脚)-국도 43호선의 수수께끼 : 전직 드라이버 지망생이었던 주인공과 주인공이 우연히 알게된 소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유령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준다는 점에서 괴담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이 단편집 안에서 유일하게 희망적인 뭔가를 전해준다는 것 하나가 독특할 뿐 별로 남는건 없는 그냥 홈드라마같은 느낌의 소품이었습니다.

무릎 : "인면창" 이 실제로 그 주인을 먹어버린다! 는 내용의 이종괴물 스플래터 호러 단편입니다. 전개는 한마디로 일직선이라 별로 평할게 없는 평작인데, 주인공의 설정이 독특하고 전개가 어울리지 않게 유머스러워서 재미있게 읽은 작품입니다. 그나저나, 인면창이라니 "블랙잭"의 한 에피소드가 떠오르네요. 인면창이 있는 피해자(?) 가 "블랙잭"을 만났더라면 완치되고 생명을 건지지 않았을까요?^^

피라미드의 배꼽 : 대 부호의 데릴사위인 가난뱅이 학자가 도심 한복판에 피라미드를 건축한다! 는 SF 단편입니다. 피라밋과 피라밋 파워에 대해 그럴듯한 설명이 이야기의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색작으로, 작가가 정말로 다양한 분야에 박식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디테일한 묘사가 일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내용은 역시나 좀 뻔해서 별로 특기할건 없더군요.

EIGHT ARMS TO HOLD YOU : 비틀즈의 존 레논의 미발표 곡을 다룬 작품으로 작가의 방대한 지식세계를 다시한번 엿볼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그만큼 음악에 대해서 굉장히 설득력있게 묘사하고 있거든요. "비틀즈 4명이 안아준다는" 노래의 제목과, 마지막의 반전이 묘하게 어울리는 것도 좋았고요. 반전이 너무 끼워다 맞추는 것이 지나쳐서 작위적인 느낌이 강한 것은 아쉽지만 전체적인 수준은 평작 이상으로 생각됩니다.

뼈 먹는 가락 : 1인칭 시점의 공원묘지 판매원을 주인공으로 한 블랙코미디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제일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이었는데, 이유는 주인공이 왜 당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제대로 설명하고 있지 않을 뿐더러, 너무 다양한 내용을 펼쳐만 놓았지 이야기의 맥락이 전무한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마무리도 어설퍼서 도저히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든 수준이하의 작품이었습니다. 유사한 분위기의 작품인 레이 브래드버리의 "장의사" 정도로는 이야기를 끌고가 줬어야 하는데 말이죠....

다카코의 위주머니 : 거식증에 걸린 채식주의자 소녀가 최후의 순간에는 부모에게 살의를 품는다는 이야기로 "채식주의" 에 대한 이야기가 내용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는 작품입니다. 문제는 별다른 공포도, 반전도 없는 내용이라는 것이겠죠. 그냥저냥 홈드라마 소품입니다. 이게 호러가 되려면 다카코가 마지막 장면에서 배를 가르는 정도는 되어야겠죠. 어쨌건 저는 읽고나니 로스트비프가 먹고싶어질 뿐이었습니다.^^;

유방 : 영매사가 불러온 유령을 거짓이라 치부하는 주인공이 등장하는 소품입니다. 짤막한 블랙코미디 꽁트로 약간의 반전이 등장하긴 합니다만 별로 특이하지는 않더군요.

날개와 성기 : 무슨 이야기인지? 성기를 없애고 스스로 "무성", 천사와 가까운 존재가 되었다는 주인공이 명상을 통해 접한 실존적 존재에 대한 이야기인데 묘사는 현실적이고 와 닿지만 도대체 뭘 이야기하고 싶은지는 알 수가 없는 내용이라 평가 자체가 어렵네요....

에필로그 목저택 : 프롤로그에 이어지는 이야기로, 역시나 별로 특기할 것은 없습니다.

2007/07/15

ZOO - 오츠 이치 / 김수현 : 별점 3점

ZOO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황매(푸른바람)

현재 최고로 잘 나가는 신세대 추리 작가 오츠 이치의 작품도 드디어 국내 출간이 시작되었네요. 표제작을 비롯해서 10편의 독특한 작품들이 실려있는 단편집입니다.

읽어보니 역시나 괜찮더군요. 호러에서 추리, 블랙 코미디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실려있어서 작가의 팔색조같은 매력을 즐기기에는 아주 좋았고, 재미는 물론 기발함과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재주가 탁월해서 "과연 높은 평가를 받을만 하군!" 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 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천재"라고 부를 수 있을지 판단하기는 조금 이르지만, 이 단편집 하나만으로도 다양성과 기발함 측면에서는 합격점을 주기 충분했습니다.
특히 작가가 독자의 심리를 잘 건드릴 줄 안다는게 굉장히 돋보였습니다. 단적인 예로 목차 순서 역시 심리적 충격을 극대화 하는 의도로 짜여진 것으로 보였거든요. 작품별 심리적 충격의 강도를 강-약-강-약-중-강-약-중-중-약 (순전히 제 생각이지만) 순서로 배치하여, 충격이 강한 작품이 연속해서 이어지지 않도록 하는데, 확실히 독자 마음을 가지고 놀 줄 아는것 같아요.

하지만 신세대 일본 작가들에게서 보이는 가장 큰 문제점인 만화적인 상상력에 의존한 부분이 높다는 점, 그리고 이야기의 인과관계를 일부러 흐리는 듯한 전개가 많다는 점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기발하나 설득력은 떨어집니다. 만화나 TV 시리즈의 한 편이라면 모를까 소설에서 써 먹기에는 조금 부족한 듯 싶었습니다. 전체적으로 결말이 좀 약한것 같은 느낌도 들고 말이죠.

그래도 최근 읽어 보았던 신세대 일본 작가들 작품 중에서는 가장 새롭다!라는 것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섬뜩하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한 다양한 이야기는 폭넓은 독자층을 수용하리라 생각되며 책의 번역과 장정도 괜찮으니 한번 구입해 보셔도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일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Seven Rooms

두 남매가 갑자기 유괴되어 어딘지 알 수 없는 방에 갇히게 된다는 호러 단편. "큐브"와 굉장히 유사한 전개지만 스케일은 대폭 낮추고, 수수께끼 역시 별다른게 없습니다. 하지만 동생의 체구가 작은 점을 이용하여 한정적인 이야기를 재미나게 풀어나가는 솜씨가 아주 돋보였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되는 피해자들의 운명, 기발한 탈출방법을 꽤 그럴듯하게 묘사하거든요. 그리고 감정을 스멀스멀하게 건드리는 섬찟함 역시도 매력적이었고요. 무지무지하게 현실성 없는 이야기라는 점은 약점이지만 개인적으로는 마음에 든 작품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2. SO-far

부부싸움끝에 아이가 심리적으로 치명상을 입는다는 기발한 아이디어의 작품. 이 작품집 내에서 가장 대중적이고 무난한 수준의 작품입니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특출난건 없다는 뜻이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3. ZOO

표제작인데, 사실 표제작이 될 정도로 최고 수준의 작품은 아닙니다. 살인자의 심리묘사와 생활에 대한 극한의 상세한 묘사는 작가가 정말 이 작품을 쓰고 싶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들여 쓴 티는 나지만 결말이 너무 아닌 탓입니다. 중간까지는 확실히 잘 달려줬는데 아쉬워요. 뭐 어떻게 생각하면 가장 무난한 결말일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실망스러웠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4. 양지의 시

일종의 SF로 생명 창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동급은 아니지만 젤라즈니와 유사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그러나 정통 SF로 보기에는 여러가지 부분에서 좀 애매한 부분이 있고 만화 등에서 유사 설정을 따온 느낌이 강하다는 것은 감점 요소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5. 신의 말

주인공이 지닌 말의 힘, 그것이 거의 전지전능하다는 설정의 작품으로 약간 "스멀스멀" 계열입니다. 주인공의 폭주와 그럴싸한 이야기 전개는 괜찮았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이 계속 들더군요. 만화에서 본 거 같기도 하고.... 그리고 너무 막 나간것 같기도 해서 조금 감점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6. 카자리와 요코

쌍동이 중 한명은 어머니에게 엄청난 학대를, 한명은 과분한 사랑을 받는 좀 전형적이고 뻔한 설정의 작품입니다. 그러나 학대받는 아이에게 감정이입하게 만드는 솜씨가 탁월하고, 특유의 "스멀스멀"한 느낌이 잘 묻어나와서 마음에 들었습니다. 결말부분의 반전(?)과 헤피엔딩이 작가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본다면 좀 이색적이라 독특하기도 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7. Closet

시동생 살해 혐의를 받는 주인공이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애쓰는 과정을 정통 추리물 형태로 전개한 작품으로 추리 매니아로서 무척 즐겁게 읽었습니다. 결말이 시시한 것은 안타깝지만 작품 특성상 어쩔 수 없었겠죠.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은 작품으로 별점은 3.5점입니다.

8. 혈액을 찾아라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주인공이 칼에 찔려 죽어가면서 벌어지는 가족들간의 소란가득한 슬랩스틱 블랙 코미디. 장르 속성에 충실하게 굉장히 웃깁니다. 정말이지 작가의 폭넓은 작품 범위에 깜짝 놀랐어요. 또 사건의 결말에서 밝혀지는 진상이 의외로 정통 추리물에 가깝다는 것도 마음에 든 점이었고요. 여러모로 즐길거리가 많았기에 별점은 3.5점입니다.

9. 차가운 숲의 하얀 집

클라이브 바커 스타일의 기괴한 환타지물. 바커 못지않은 엽기적 상상력이 표현된 작품인데 "스멀스멀"의 도가 너무 지나쳤습니다. 도저히 제 취향은 아니었어요. 결말의 반전이 있긴 하지만... 별점은 1.5점입니다.

10. 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

하이잭킹당한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블랙 코미디. "혈액을 찾아라"와 유사하지만 조금은 더 무겁고 진중한 작품입니다. 황당하고 웃기면서도 이색적이라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딱 한가지, 상투적인 결말은 아쉽더군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6/04/05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 노버트 데이비스 / 임재서 : 별점 3점

탐정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 6점 노버트 데이비스 지음, 임재서 옮김/북스피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거대한 개 카스테어스와 함께 하는 탐정 도앤은 다른 관광객들과 멕시코의 관광지 로스알토스로 버스 여행을 떠났다. 미국인 앨드리지를 찾아 모종의 행동을 하기 위해서였다(처음에는 부패 정치인들에게 고용되어 앨드리지가 미국에 돌아가지 않게 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후에 앨드리지를 미국에 데려가기 위해 온 것으로 밝혀짐).

그러나 도앤이 앨드리지를 만나는 순간 로스알토스에 대지진이 덮쳐 앨드리지를 포함한 여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중 사고로 죽은 줄 알았던 재벌 상속녀 패트리셔가 살해되었다는게 밝혀진 뒤, 범죄자 보티스트 보노파일을 체포하기 위해 마을을 감시하던 군인 페로나 대위가 마을을 통제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또다른 살인 사건이 벌어지는데....

마포 김사장으로 유명한 북스피어 김홍민씨의 홍보글을 통해 알게 된 책입니다. 김사장의 홍보력이야 익히 잘 알려져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책에 대한 소개가 유독 다른 책들보다도 호기심을 자극했던 덕분입니다. "하드보일드 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도 노버트 데이비스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고,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노버트 데이비스의 열렬한 팬이었다."라고 소개했는데, 하드보일드의 큰 형님이자 심오한 철학을 담고 있는 무게 있는 작품같이 느껴져서 도저히 안 읽을 수가 없었습니다.

허나 실상은 정 반대입니다. 기대와 예상을 이렇게까지 뒤집은 작품은 기억에도 몇 개 없지 싶을 정도로 말이죠. 예상했던 묵직함과는 몇만 광년 떨어져 있는 작품으로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유쾌하고 시끌벅적합니다. 등장하는 캐릭터들도 모두 극단적이기 짝이 없고요. "스쿠비 두"가 연상되는, 거대한 그레이트 데인 카스테어스를 끌고 다니는 탐정 도앤부터가 그러합니다. 학교 도서관에서 읽은 고문서를 통해 과거 개척시대 영웅 페로나 부관에게 푹 빠진 재닛은 한류 스타에 빠진 일본 아줌마와 다를 게 없고요. 여기에 파리 끈끈이를 발명한 부자의 상속녀 패트리셔 밴 오스델 일행, 상상을 초월하는 재앙덩어리 아들 모티머를 중심으로 한 배관 업자 헨쇼 가족, 근거 없는 엘리트 의식과 자신감에 절어있는 멕시코 군인 페로나 대위(개척시대 영웅의 직계 후손!) 등 모든 캐릭터가 좋게 말하면 한 개성하고, 나쁘게 말하면 만화적이라고 할 정도로 화려합니다.

이러한 과장된 캐릭터들이 멕시코 휴양지 로스알토스에서 대지진, 반군과 엮인 범죄자와 은닉 무기 등의 스케일 큰 사건에 휩쓸려 좌충우돌 소동을 벌인다는 내용은 옛날 코미디 영화 시리즈 "무슨무슨 대소동", 아니면 주성치 영화를 떠오르게도 합니다. J.M. 메르의 "개를 돌봐줘"와도 좀 비슷한 부분이 있네요. 사건이 얽혀 있는 블랙 코미디라는 점에서는요.

그러나 단순한 블랙 코미디에 그치지도 않습니다. 일어나는 사건들 모두 이치에 합당할 뿐더러 앞뒤도 잘 맞고, 복선도 잘 짜여져 있습니다. 재닛이 탐독한 페로나 부관의 일기와 마을의 은닉처가 연결된다는 설정이 좋은 예입니다. 김사장의 소갯글이 아주 허언은 아닌 셈입니다.
그러고보니 무언가에 푹 빠져 있는 오타쿠가 자신의 지식을 활용해 사건 해결에 기여하게 된다!는 설정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는, 다른 무언가가 나올 수도 있을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울러 추리적으로 상당한 수준이며, 탐정 도앤 역시 만만치 않는 명탐정이라는 점도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대지진의 와중에 상속녀 패트리샤가 사망한 사건이 사실은 살인 사건이라는 것을 순식간에 밝혀내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나무를 숨기려면 숲에 숨기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상황을 적절히 이용한 것도 좋지만, 순식간에 확인한 현장의 유류물을 나중에 진상을 밝힐 때 적절히 써먹기도 하니까요. (그녀의 가방은 어디로 간 걸까요?) 
유력한 용의자 그렉의 시체를 어디서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장면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단순한 부자의 변덕으로 보인 패트리샤의 방문 목적을 셜록 홈즈 식으로 해석해 내는게 아주 마음에 들었어요. 관광객들 모두 화가 프레딜립 때문에 로스알토스를 찾지만 패트리샤만 그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다는게 이유인데, 꽤나 그럴듯 했습니다.
복잡한 사건을 한방에 해결하는 능력 역시 탁월합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지만 결국 보티스트 보노파일을 죽이고, 그를 돌봐주던 흑막이 카야오 대령이라는 것도 밝히고, 패트리샤 살인사건의 진범과 실종된 그렉의 행방까지 한방에 해결해 버리니까요. 명탐정의 기본 소양이라 할 수 있는 추리쇼도 한껏 펼쳐 보이면서요.

그리고 앞서 말씀드린 대로, 전형적인 하드보일드 작품과 분위기는 사뭇 다르지만, 확실한 하드보일드이기도 합니다. 하드보일드의 핵심이 탐정이라면 이 작품 역시 경쟁작들에 뒤질 이유가 하나도 없거든요. 제목처럼 진실은 말한 적도 없고 – "탐정은 그럴 수만 있다면 절대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고. 노상 거짓말만 늘어놓습니다. 비즈니스죠." – 모든 것을 돈으로 바라보는 나쁜 놈인데다가 명탐정이라는 점에서요. 자신의 목적을 위해서라면 사람 죽이는 것 역시 서슴치 않기까지 합니다. 작중 어맨다 트레이시의 말을 빌자면 "이자는 교활하거든. 아가리 침 뱉는 것보다 쉽게 죽일 사람이야."인 거죠. 아, 당연히 말발도 아주 좋답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샘 스페이드나 필립 말로우에 에이스 벤츄라를 섞은 느낌이랄까요... (아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오버스러운 설정, 작위적인 요소 때문에 조금 감점하기는 하지만 좋은 작품임에는 분명합니다. 유쾌하며 추리적으로도 괜찮은 덕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어요. 비트겐슈타인이 좋아한 이유는 킬링 타임용으로 딱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세상은 넓고, 모르는 작가도 많고, 재미있는 작품도 아직 이렇게나 많다니 너무나 즐겁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신선한 작품이 많이 소개되면 좋겠습니다.

덧붙이자면, 묵직한 고전 하드보일드를 기대하고 읽는다면 실망할 수 있다는 점 꼭 참고하세요.

2004/03/04

스쿨 오브 락! - 리처드 링클레이터 : 별점 2.5점


이 영화는 “내겐 너무 가벼운 그녀”에서 꽤 인상깊었던 잭 블랙 주연의 영화입니다. 무엇보다도 포스터로 보는 사람을 압박하는 영화죠. 잘 만든 포스터와 여러 영화평들로 사뭇 기대를 가지고 보기 시작했습니다.

락 밴드 단원인 듀이 핀 (잭 블랙 분)은 로커 답지 않게 뚱뚱하고 촌스러운 외모 때문에 밴드에서 쫒겨 난다. 월세가 밀려 집에서도 쫒겨 나게 된 그는 급한 김에 친구 네드의 이름을 사칭하고, 호레이스 그린 초등학교의 대리교사로 취직한다. 수업 첫날부터, 공부를 가르칠 생각은 않고 시간 때울 궁리만 하던 듀이는 기발하고 엉뚱한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앞으로 열릴 락 밴드 경연대회에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과 함께 참석하려는 것!

클래식기타와 피아노, 첼로, 심벌즈 등의 악기를 다뤄본 애들을 뽑아, 리드 기타, 베이스 기타, 키보드, 드럼을 가르치고, 다른 아이들에겐 백 보컬, 매니저, 코디, 장비 담당 등의 일을 맡긴다. 3주동안, 듀이와 아이들은 여자 교장 멀린스 (조안 쿠삭 분)의 눈을 피해 교실에서 락 음악을 연습하고, 드디어 오디션 접수까지 끝낸다. 마침내, 경연대회가 있던 날, 듀이가 가짜 선생임을 알게 된 학부모들은 멀린스 교장을 앞세우고 대회장으로 쳐들어 오는데…


주연과 포스터, 간략한 영화소개만 보아도 “가짜”인 주인공에게 벌어지는 상황을 소재로 한 설정자체는 흔하디 흔한, 누군가 이야기 했지만 "시스터 액트"류의 코미디 물입니다. 그러나 열혈 락커가 일년 학비가 만 오천불이나 된다는 상류층 고급 초등학교 학생들을 락으로 세뇌시키며 진정한 락커로 만든다는 줄거리는 신선하고 유쾌하고 재미있습니다. 락에 대한 기본적인 지식이 있다면 조금 더 재미있게 볼 수 있겠죠. 무엇보다 주인공 듀이역의 잭 블랙의 원맨쇼를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진짜배기 락커가 보면 어떨지 모르겠지만 저는 잭 블랙의 노래나 기타도 꽤 마음에 들더군요. 유쾌한 맛이 있어서요. 무엇보다 “스쿨 오브 락”이라는 밴드명으로 참가한 마지막의 밴드배틀 장면은 압권입니다. 역경을 딛고 촌스럽고 유치하지만 자기의 음악을 선보이는 아이들과 듀이의 모습이 인상적이죠.

하지만 기대했던것 만큼 웃기진 않았습니다. 각본과 감독이 “비포 선라이즈”라는 달착지근 영화를 만들었던 리처드 링클레이터이고 가족영화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인지 화장실 유머 같은 저질 유머나 슬랩스틱 코미디 대신 락에 빠져가는 아이들과 인간적으로 성숙해 가는 듀이의 모습을 보여주며 어느정도 교훈적인 내용도 줍니다. 마지막에 교장, 듀이의 친구와 학부모들도 듀이와 아이들을 이해하며 마무리 하는 해피 엔딩은 너무 전형적이라는 느낌까지 줍니다. 락& 코미디판 “홀랜드 오퍼스”가 정답이겠죠.

그래도 오디션을 통해서 가려 뽑았다는 귀여운 아이들 (특히 베이스 치던 아이… 크면 분명 미인이 될 것 같습니다)과 잭 블랙의 연기를 보는 것, 덤으로 흥겨운 락까지 흐르는 즐거운 영화입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볼 만 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08/09/01

대일본인 (2007) - 마츠모토 히토시 : 별점 3점


코미디언 출신인 마츠모토 히토시의 영화로, 전기 충격을 받으면 거대 영웅으로 변신하여 정체불명의 괴수들과 싸우는 이른바 "대일본인"의 활약을 페이크 다큐 형태로 만든 영화로 히어로물의 웅장함과 거대 액션의 쾌감 대신에 찌질한 대일본인의 실제 삶을 통하여 현재 일본, 그리고 일본인을 풍자하는 블랙 코미디 입니다.

전기 충격의 고통을 받고 괴수들과 싸우지만 나라에서 받는 쥐꼬리만한 연금, 국민들도 민폐라고 생각하고 가족들도 창피하다며 그를 버리고 홀로 고양이와 함께 살아가는 대 일본인의 모습은 현재의 일본인의 모습 그대로를 나타내고 있으며 할아버지인 이른바 "4대째" 에 대한 회고, 그때가 정말 좋은 시절이었다~ 는 과거 제국주의 시대의 향수를 은연중 드러내고 있습니다. 마지막의 허접한 미국 슈퍼 히어로 가족의 도움은 그야말로 천박한 미국의 도움 없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는 일본의 모습 그 자체이고요. 그 외에도 매스컴에 의해 좌우되는 여론, 넘쳐나는 광고에 대한 풍자 등 삐딱하지만 코믹한 풍자가 전편에 넘쳐납니다. 이러한 풍자를 과거 특촬물의 형태로 만들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이고요. 그러나 썩 재미있지만은 않고 지나친 풍자로 영화적인 완성도나 기승전결이 무시된 감이 없잖아 있기에 별점은 3점입니다. 뭐 그냥저냥 볼만 했달까요.

아울러 비록 감독 자신은 엄청난 풍자를 통해 일본의 현재 모습을 자조하고 있지만 이러한 풍자 블랙 코미디가 그럴듯하게 만들어 질 수 있는 일본 사회는 외려 부럽기만 합니다. 그나마 개인의 자유 의견이 보장되는 국가로 보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나라에서 이런 영화를 만들겠다고 하면 아마도 미친놈 취급을 받거나 빨갱이 취급을 받을 것이라는 현실, 더군다나 이제부터는 잡혀갈지도 모른다는 현실이 더욱 씁쓸하네요.

2018/03/24

마음의 지배자 - 김현중 : 별점 3점

마음의 지배자 - 6점
김현중 지음/온우주

언젠가 인터넷에서 원사운드가 그린 "묘생만경" 만화를 읽고 관심이 가던 차에, 알라딘 헌책방에서 저렴하게 파는걸 확인하고 구입한 작품입니다. 헌 책을 충동 구매하지 말자고 결심한지 얼마 되지도 않았지만, 가격이 너무 착했단 말이지요. 

다행히 결과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꽤 재미있게 읽었거든요.
특징이라면 우선 독특하고 기발한 설정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는 점입니다. 듀나의 작품들처럼요. 그러나 듀나 작품들보다는 완성도는 훨씬 높습니다. 설정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작가의 생각을 충실히 이야기에 담아낸 덕분입니다. 남과 다른, 뛰어난 존재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는 특징도 있는데, 작가의 영원한 화두가 아닐까 싶습니다.

결말도 확실하고, 작가의 고민과 다양한 시도 및 이야기 별 다양한 결말 -그냥 한 계단 위에서 바라만 본다는 "묘생만경", 남들의 두려움을 통해 신으로 거듭난다는 "마음의 지배자", 블랙 코미디인 "그의 지구 정복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남과 다르다고 가장하고 있을 뿐 다 똑같다는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 능력을 발휘 못하고 찌질하게 살다가 한걸음 더 내딛는다는 "물구나무 서기" 등 - 을 선보이는 점도 마음에 듭니다.

기존에 널리 알려진 아이디어의 변주가 많은 등 아쉬움이 없지는 않지만, 단순한 설정 바꿔치기는 아닙니다. 나름의 아이디어가 바탕이 되어 있으며 재미도 수준급인 좋은 단편집입니다. 한국 SF 와 장르 문학이 착실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걸 알려주네요.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아직 읽지 않으신 장르 문학 팬이시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덧붙이자면, 원사운드가 그린 리뷰 만화를 읽고 책을 산게 이번이 두 번째인데(첫 번째는 이거) 제게는 100% 확률입니다. 원사운드는 리뷰 만화만 그려도 충분히 먹고 살 수 있지 않을까요? 하여튼, 제가 언젠가 책을 낸다면 제 책 리뷰를 좀 부탁드리고 싶네요.

단편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묘생만경" 

이 책을 구입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원사운드 만화의 원작입니다. 만화는 3~4페이지 분량에 불과한데, 원작을 굉장히 잘 압축한 결과물이라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대사도 그대로인데 만화에 적절한 것만 잘 가져다 썼고, 꼭 필요한 설정 중심으로 이야기를 짤막하게 잘 풀어내었더라고요.

그런데 반대로 이야기하면, 원작에는 불필요한 군더더기가 많다는 말도 됩니다. 무엇보다도 화자인 고양이 '나'가 영물로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갖추었다는 설정은 불필요했어요. "펠리데"처럼 뛰어난 지능 자체가 설정과 이야기의 핵심으로 활용되면 모를까, 이야기에는 전혀 영향을 끼치지 못하는 군더더기였을 뿐입니다.

그래도 세 가족과 닭 스무 마리, 개 세 마리라는 전원 주택을 무대로, 닭들 사이의 치정극을 통해 무시무시한 사건이 휘몰아친다는 범죄 스릴러라는 독특함은 누가 뭐래도 최고였습니다. 이런 작품을 또 볼 수나 있을까요? 이런 작품을 쓸 수 있는 작가가 부럽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마음의 지배자" 

표제작으로 초능력자가 어떻게 주위의 두려움을 불러오고, 어떻게 박해 받으며, 또 어떻게 신이 되는지를 담담하게 그려냅니다.

보통 이런 류의 이야기는 초능력자들이 능력을 각성한 뒤 무언가 사명을 짊어진다는 이야기, 혹은 자신이 세계 정복 같은 야심을 드러내는 이야기가 많은데 이를 고등학교를 무대로 하여 일상계처럼 담담하게 풀어내었다는 나름의 차별화 요소가 돋보입니다. 초능력자인 민국이 아니라 주변인물들 중심으로 묘사와 이야기가 전개된다는 점도 신선했고요.

두려움과 탄압만 있을 뿐 추종자는 없다는 점이 실제 현실과 괴리감을 느끼게 하며, 초능력자가 악인들과 손을 잡는 이유도 불분명한 등 아쉬운 부분도 없지는 않아요. 그래도 신과 기적 등에 대해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그의 지구 정복은 어떻게 시작됐나" 

김사장의 맘모스 마트와 우주행성 K9242의 정복 유닛이 서로의 이해가 일치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블랙 코미디 SF입니다.

사람이 많이 오가기를 원하는 김사장, 그리고 기억 유닛을 찾기 위해 이동하는 사람들에게 부분체를 부착하기를 원하는 정복 유닛이 같은 목적을 위해 여러가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이 화려하게 펼쳐집니다. 김사장의 계획은 충분히 그럴듯할 뿐 아니라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것들이며, 정복 유닛의 씨앗 옮기기 계획 역시 전형적인 식물의 행태를 잘 응용하고 있어서 설득력도 아주 높아요. 작가의 첫 작품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입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지배인의 머릿 속에 기억 유닛이 들어가 있었다는 결말입니다. 앞 부분에서 약간의 설명이라도 있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겁니다. 이대로라면 급작스러운 감이 없잖아 있거든요. 그래도 재미 만큼은 보장할 수 있는 좋은 작품입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우리는 더 영리해지고 있는가" 

아인 시술이라는, 머리가 좋아진다는 수술이 유행한 뒤의 세계를 그린 SF 단편입니다. 아인 시술은 효과는 증명되지 않았지만 비용, 그리고 흉터가 남기 때문에 부자들이 주로 시술 받고 그들만의 커뮤니티를 이룬다는 설정이 핵심이고요. 

사실 이 시술을 통해 선민 의식을 갖는다는 설정은 특별한 건 없습니다. 부자만 기계 인간이 된다는 이야기와 다를 건 없으니까요. 그러나 이 시술이 효과가 없을 수 있다!는 반전이 기가 막힙니다. 시술이 사기인지 아닌지 결국 밝혀지지 않는 점도 좋으며, 시술의 효과를 입증하기 위한 일종의 트릭도 효과적으로 사용되어 재미를 더하네요. 수진을 통해 상류층도 결국 허상일 뿐이라는 진실을 드러내는 것도 마음에 들고요.

다만, 앞서 언급했듯 뻔한 설정 탓에 이야기의 전체 분위기와 느낌에서 여러 다른 작품들이 떠오르며(개인적으로는 "가타카" 가 많이 연상 되었습니다), 등장인물들이 스테레오 타입이라는 건 아쉽습니다.

그래도 매력적인 이야기 임에는 분명하기에 제 별점은 4점입니다. 우리나라에 장르 문학 원작을 주로 다루는, 미국으로 따지면 "환상특급" 같은 TV 쇼가 있다면 영상화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물구나무서기" 

일종의 투시 능력을 갖춘 초능력자 김서권의 일대기입니다. 종도라는 섬에서 물구나무 서기를 혼자서만 못했던 김서권이 어느새 모든 것이 거꾸로 투영되는 투시력을 갖추고, 이를 이용하여 여러가지 일을 경험하다가 최후를 맞는다는 내용이지요.

김서권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종도에서의 이야기와 현재의 대형 운석으로 인한 지구의 위기가 교차 편집되다가 '물구나무 서기'로 현재의 초능력이 시작됨을 알려주고 끝나는 구성입니다. A와 B가 동시에 전개되는데, A는 B의 발단이라는 결말과 함께 B도 끝나는 식이지요.

우선 '물구나무 서기'라는 것을 키워드로 한 디테일이 볼거리입니다. 한번도 물구나무 서기에 대해 깊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이런걸 이런 이야기로 만들어 낸 작가의 상상력이 참 대단하구나 싶었어요. 물구나무 서기와 초능력이 연결되다니! 그 외에도 김서권이 꿈에서 보는 "검은 옷을 입은 남자" 의 정체가 운석이라던가, 한발두발 내딛어 물구나무 서기를 함으로 투시를 하고, 물구나무 서기와 같은 원리라 투시는 뒤집혀서 보인다는 등의 디테일들도 볼 만 합니다.

하지만 한 편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는 좀 애매했습니다. 죽음 직전에 신을 본다는 신학적 담론을 SF의 형태를 빌어 써내려간 작품인가? 싶은데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부수적인 이야기가 많아 혼란스럽거든요. 어린 시절 종도에서의 할아버지 환갑 잔치에 대한 장황한 묘사, 현재의 김서권이 무당과 손 잡았다던가 결혼에 실패했다던가 하는 이야기들이 그러합니다. 재미는 있는데 주제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솔직히 모르겠더라고요.

책 뒤의 편집자 글이나 인터넷 상에서의 리뷰를 보면 이 작품을 최고로 치는 분위기인데 개인적으로는 그냥 그랬어요. 너무 멋을 부리려고 하지 말고 핵심에 집중하는게 좋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피노키오" 

로봇들을 활용한 전쟁이 끝난 후, 이야기를 꾸며내는 재주가 있는 로봇이 발견되었다. 그 로봇은 자신의 사명을 잃은 채 극장에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되는데...

역시나 재미있는 설정을 갖춘 작품이지만,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작위적인 요소가 강하고 설정도 별로 디테일하지 않으며 결말도 예상에 가까운 범작입니다. 소설이라기보다는 일종의 우화에 가깝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거짓말만 하는 로봇 둘이 일종의 논리 게임을 펼치는 식으로 전개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서로 진짜 사명이 무엇인지, 폭발하는 조건이 무엇인지 거짓말만 하면서 내용을 파헤치는 두뇌 게임 스타일로 말이지요. 이러려면 지금보다 거짓말 조건이 더 상세하게 설정되었어야 했지만요.

하여튼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평범합니다.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부안 왕손이" 

거대 포크레인이 약간의 고장으로 무의미한 작업만 반복하는 현장으로 팔려간 후, 아파트 단지에 거주하는 소녀의 하트 수신호를 받은 후 자신의 모든 힘을 다해 거대한 하트를 그린다는 일상계 판타지입니다.

실제로 전라도 사투리 가득한 왕손이의 의인화 묘사가 돋보이며, 아파트 단지 소녀의 하트 수 신호의 진상이 무엇인지에 대한 수수께끼 풀이도 흥미롭습니다. 무엇보다도 롯데 월드 공사 시에 작가가 목격했던, 단지 공사가 진행되고 있음을 드러내기 위해 진행된 무의미한 단순 반복 작업을 가지고 이러한 이야기를 그려낸 작가의 상상력에는 박수를 칠 수 밖에 없네요.

그러나 하트 수 신호의 진상은 조금 생뚱맞은 데가 있고, 결말도 지나치게 낙관적인 해피 엔딩이라는 건 별로였습니다. 매력적인 도입부, 설정, 전개에도 불구하고 결말 때문에 맥이 풀리는 느낌까지 들거든요. 분위기 상으로는 판타지 버젼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처럼 사회 고발적인 내용으로 흘러가는데 훨씬 좋았을 거에요.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뱀과 소녀" 

뱀 신을 모시는 섬에서 뱀을 죽인 아이들에게 닥치는 일을 그린 단편입니다. 초자연적 존재(?)에 의한 일종의 호러물로 섬을 벗어날 수도 없고, 재앙이 다가오는 막막한 상황은 인상적입니다. 

그러나 어떤 마을이 있고, 이방인이 그 마을의 금기를 어겨 끔찍하게 살해 당한다는 흔해빠진 이야기를 이방인이 아니라 그 마을 주민, 그것도 반항심 많은 꼬마 아이가 금기를 어긴다는 약간의 변주만 준 셈이라 애초에 새롭거나 신선한 느낌을 받기는 힘듭니다.
또 민박집 손님은 누구고, 뱀을 어떻게, 왜 모시는 지와 뱀의 영향력도 설명되지 않아서 공포심을 자아내기는 무리입니다. 뭐가 어떻게 될지 대충은 알아야 무서운데, 지금은 그냥 수희 혼자 어둠 속에 남은게 전부니까요. 이래서야 한 편의 이야기로 성립하기도 힘들죠.

지금의 결과물은 주인공 소녀 수희가 어둠 속에서 무언가 흔적을 남기고(뭐 그런 거 있잖아요, 뱀 신상 뒤에 피로 글자를 쓴다던가), 그것이 이후 섬을 찾아와 금기를 어기고 쫓기는 신세가 된 이방인에게 발견되는 장면에서 효과적으로 쓰임직한, 긴 이야기의 도입부 정도에 불과해 보입니다. 이 단편집을 위해 새롭게 쓴 작품이라는데 이래서야 차라리 수록하지 않는 게 더 좋았을 거에요.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2015/03/12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카렐 차페크 / 정찬형 : 별점 3.5점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8점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모비딕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를 처음 읽고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왠걸, 전작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수록 작품 하나하나의 재미와 소설적인 완성도 모두 빼어난 수준이었어요. 또한 추리적 속성의 작품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진실과 정의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왜 미스터리가 벌어지는가? 그 사이에는 어떤 차이들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 덕분인 듯싶네요.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메이즈리크가 명탐정이라는 것도 잘 드러나 있고요.

아울러 책 뒤 소갯글을 보니, 차페크는 실험적인 소설을 쓰는 데 가장 완벽한 형식이 단편소설이라고 깨달았다고 하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단편도 그냥 단편이 아니라 호시 신이치와 같은 "쇼트쇼트" 스타일의 초단편들이 많은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장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수록 작품의 편차가 있는 편이고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이야기들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세대를 뛰어넘는 아우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단편집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 몇 개를 소개해봅니다. 쇼트쇼트 스타일이라 수록 작품이 워낙 많아 전부 소개하기는 어렵네요. 아울러,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발자국"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의 발자국이 딱 한 지점에서 사라졌다는 수수께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내용은 이 수수께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수수께끼와 현실 사이의 문제를 냉정하게 지적하는 바르토세크 반장의 독백 - "우리가 범죄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미스터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당을 쫓는 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입니다." - 이 핵심입니다.

때문에 좋은 미스터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발상은 괜찮았습니다. 하기사, 경찰에게 상상력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떤 사건"

메이즈리크 형사가 선배에게, 최근 금고털이를 체포했던건 사실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고 털어놓는 이야기입니다. 우연이 겹쳐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이 코믹하게 전개되는데, 메이즈리크는 본인을 너무 폄하하는 것 같아요. 범인 신발에 묻은 "가루"를 인지한 것은(그것도 비 오는 상황이라는 걸 특정해서!) 분명 뛰어난 수사 능력이죠.

"푸른 국화"

희귀한 푸른 국화를 찾는 정원사의 활약을 그린 작품입니다. 마을 바보가 가져온 푸른 국화 뿌리에 묻은 흙의 종류와 잎에 묻은 이물질을 통해 "어딘가의 정원에 있을 것"이라 추리하는 장면에서부터, 마을을 전부 뒤졌지만 찾지 못했던 이유는 보행 금지 표지가 있었던 철로 건너편 경비원 관사에 피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말까지 완벽한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바보는 글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통행 금지 표지판을 무시하고 건넜다"는 핵심 트릭도 좋았고요. 그 외에도 경비원과의 언쟁, 정원사의 일탈 등 재미있는 부분이 많은 작품입니다.

"점쟁이"

점을 쳐서 생계를 유지하는 마이어스 부인을 의심한 서장이 자신의 아내를 손님으로 위장시켜 수사에 나선다는 내용입니다. 마이어스 부인을 사기로 옭아매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녀의 점이 실제로 들어맞는다는 기묘한 블랙코미디 같은 반전이 돋보였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다소 예상 가능한 전개지만, 시대를 앞선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통력의 소유자"

필적만 보고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초능력자를 시험하기 위해 검사가 자신이 맡은 사건의 냉혹한 살인범이 쓴 편지를 보여주는데, 능력자의 평가 결과가 너무나 정확해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편지가 자신이 쓴 메모로 바뀌어 있었음을 깨닫고, 그 초능력자의 분석은 그냥 일반화된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여기까지는 흔한 초능력 격파물인데, 이후 전개가 흥미롭습니다. 검사는 그 초능력자가 묘사한 말들을 활용하여 실제 재판에서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거든요. 이 정도면 호시 신이치 급의 쇼트쇼트 거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필적 미스터리"

아내의 편지를 전문가에게 필적 감정받은 기자의 이야기입니다. 자칭 전문가의 현란한 말에 휘둘려 이십여 년 동안 행복하게 살아온 아내를 의심하고 매도하게 되는데, 백여 년 전 이야기임에도 인터넷상 자칭 전문가나 SNS 루머 등으로 판단을 내리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이 인상 깊었던 소품입니다.

"도둑맞은 서류"

마카로니 통 안에 숨겨 놓은 비밀 서류 도난 사건을 다룹니다. 지역 경찰관이 일종의 DB 기반 추론으로 범인을 검거하는 독특한 수사 방식이 돋보이며, 동시에 속물적이고 유쾌한 블랙코미디 요소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보티츠키 가문의 몰락"

메이즈리크가 역사학자의 의뢰로 15세기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역사 추리물입니다. 두 남자의 죽음, 사라진 딸, 국왕으로부터의 처벌 등을 단서로 펼치는 추리는 꽤나 흥미롭습니다. 실화가 아니라 허구의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진리는 시간의 딸"보다는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한 단편이 연상되더군요.

"영수증"

메이즈리크 반장이 등장하는 정통 추리물입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가 발견되고, 단서는 전철 티켓과 영수증 뿐. 하지만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영수증을 통해 피해자가 중국 도자기 가게에서 산 물건을 추리해내고, 그 이유까지 밝혀냅니다. 도자기를 산 이유는 그것을 깨뜨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추리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명작입니다.

다만 전개 면에서는 약간 아쉬움이 있습니다. 청자인 두 연인 민카와 페파, 그리고 화자인 소우체크의 이야기는 서사의 흐름에 꼭 필요해 보이진 않았거든요. 여운을 남기기는 했지만, 감정적으로 깊게 와닿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배우의 실종"

천재 배우 얀 벤다가 실종된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벤다의 친구인 의사 골드베르크가 탐정 역할을 하며 사건을 해결하는데, 벤다가 '메소드 배우', 즉 배역에 몰입해 자신을 바꿔가는 배우였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벤다가 부랑자 역할을 맡으면서 자신을 완전히 부랑자처럼 바꾸어 버린 탓에, 결국 시체가 부랑자의 변사체로 오인되었다는 것이지요. 지금 봐도 설득력 있는 설정과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우체국에서 생긴 사건"

단돈 200코루나가 사라진 사건으로 감사관에게 적발당하고 자살한 불쌍한 우체국 직원 헬렌카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화자인 경감 '나'는 다음과 같은 정보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밝혀냅니다.

1. 헬렌카의 시선을 잠시만 돌리면 200코루나 정도는 쉽게 훔칠 수 있었다는 점
2. 시선을 돌리려면 전보나 소포를 보내야 했다는 점
3. 사건 당시 익명의 편지가 파르두비체에서 대거 발송되었다는 점
4. 파르두비체에 사는 우체국 아가씨와 교제 중인 감독관이 소포를 보냈고, 주소 오류로 반송되었다는 점

이 정보들을 바탕으로, 감독관이 애인을 자신의 근무지 근처로 전근시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고, 애인이 익명으로 그 사실을 고발해 감사가 이루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일상계 추리물로도 수준이 높고,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을 꿈꾸며 벌인 일탈이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씁쓸한 결말도 매우 인상 깊습니다. 지금 읽어도 전혀 낡지 않은 걸작으로, 별 5점은 충분한 작품입니다.

2015/01/19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카렐 차페크 / 정찬형 : 모비딕 : 별점 2.5점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6점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모비딕

카렐 차페크의 단편집. 고전을 좋아하는 저로서는 구입하지 않을 수 없었던 단편집인데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정통파 본격 추리 단편집이라기보다는 '쇼트쇼트'가 연상되는, 조금 희한한 상상력이 발휘된 초단편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호시 신이치보다는 추리적인 색채가 짙다는 차이점이 있지만요.

이런 장르도 좋아해서 즐겁게 읽기는 했지만, 실려 있는 작품들의 완성도가 천차만별이라는 점, 그리고 좋은 아이디어에 비해 전개가 낡고 지루하며 결말의 의외성이 없는 등의 단점은 아쉬웠습니다. 쓰여진 시기를 감안한다면 어쩔 수 없었겠지만, 막 나가는 전개의 몇 작품은 의도인지 아니면 습작들이 이상하게 뭉쳐져 하나의 작품이 된 것인지 궁금해집니다. 탈영병이 거름더미 속에 몇 달 숨어 있다가 잡혀온 이야기와, 다리가 없다는 이유로 상이용사 연금을 받던 로이지크가 양심 때문인지 정말로 불구가 되어간다는 이야기가 하나로 묶여 있는 "실종된 다리"가 좋은 예입니다. 어차피 초단편이라면 나누어 수록했어도 될 것 같은데 왜 하나로 묶었는지 잘 모르겠네요.

그리고 단점이라고 하기는 어렵지만, 역시나 쓰여진 시기 탓인지 "양심"에 대한 것이 작품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도 눈에 띕니다. 등장인물들이 근본적으로 너무 선해서, 범죄를 저질러도 양심의 가책에 의해 갈등을 겪는 내용이 많거든요. 아무래도 좋았던 시기에 착한 사람이 쓴 작품이라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2.5점. 기묘하고 기발한 발상은 좋지만, 지금 읽기엔 너무 시간이 많이 지났습니다. 

수록작 일부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추리물 성향을 지닌 작품부터 소개해 드리자면,

"도둑맞은 선인장"

식물원에서 귀한 선인장이 도난당하자 선인장에 치명적인 질병이 유행하고 있다는 기사를 조작하여 발표한 뒤, 약품을 판매하는 가게에서 잠복하다가 범인을 체포한다는 내용입니다. 식물원에서 훔친 방법도 기발한데, 나이든 여자로 변장하고 가슴에 화분을 숨겨 나왔다는 것이죠.

"하르쉬의 실종"

아르메니아인들이 하르쉬를 어떻게 죽이고 시체를 옮겼는지에 대한, 즉 시체의 순간이동 트릭이 등장합니다. 굉장히 쉬운 트릭이기는 하지만 범행 당일 비가 왔다는 점, 카펫 속에 시체가 들어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시체의 기묘한 반점을 연결하는 부분은 괜찮았어요. 명탐정 메이즈리크의 활약도 나쁘지 않았고요.

"도난당한 살인사건"

범인들이 경찰로 위장한 뒤 살인을 저지르고 깜쪽같이 뒷수습한다는 이야기. 목격자는 많았지만 경찰 복장을 한 범인을 보고는 단지 지켜보기만 했던 것이죠. "오터모울씨의 손"이 떠오르는데, 이런 트릭의 원조격인 작품이라 생각합니다.

"영아 납치 사건"

사라진 영아를 찾기 위한 바르토세크 반장의 활약이 펼쳐집니다. 경찰들에게 아기를 보면 "정말 사랑스러운 아기군요. 몇 개월 됐나요?"라고 말하라고 시키고, 그 말에 과민반응을 보인 어머니를 체포한다는 내용이지요. 모든 어머니는 아이를 자랑스러워한다는 심리를 이용한 트릭과 전반적으로 유쾌한, 블랙 코미디스러운 전개가 인상적이었습니다.

법정물도 있습니다.

"하브레나의 판결"

기자들이 법정 소식을 실으려고 노력하던 중, 실제 법정에서의 사건보다 더 흥미진진한 사건들을 창조하는 하브레나라는 인물에게 창작의 댓가를 지불하고 이야기를 전해받는다. 하브레나는 스스로 법에 대해 통달했다고 여기는데 어느날 그가 창작한 이야기, 즉 앵무새를 훈련시켜 이웃집 여자를 볼 때 마다 "화냥년"이라고 말하게 만든 늙은 독신남이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이야기가 실제 법조인들에게서 잘못된 판결이라고 공격을 받게 된다. 그러자 하브레나는 자신의 이야기 속 판결이 정당하다며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스스로 앵무새를 훈련시켜 이웃집 여인에게 욕설을 하게끔 만들고 법정에 서게 되는데...

설정부터 흥미롭지만 진행 과정 역시나 눈을 떼기 어려울 정도로 재미있었습니다.

법의학물의 선구적인 작품도 있습니다.

"바늘"

롤빵 속에 들어간 바늘이 어떻게 들어갔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국립화학연구소의 우헤르 박사가 빵과 바늘에 대한 모든 상황을 검토한 끝에 롤빵이 만들어진 뒤에야 바늘이 들어갔다는 결론을 내리는 부분, 그리고 바늘을 누가 넣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이 빵을 찾기 위해 화학자들이 빵을 수도 없이 만들어본다는 과정에서 법의학물의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반전이 괜찮은 작품도 있습니다.

"우표 수집"

한 노인이 과거를 회상한다. 그는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하층민인 로이지크와 절친이 되었고, 우표 수집에 빠져 살았다. 그러나 성홍열로 앓아 눕고 얼마 뒤, 둘만의 비밀 장소에 숨겨둔 우표가 사라지자 로이지크를 의심하여 그와의 우정이 끝나버리고 말았다. 본인 스스로도 모든 것을 의심하면서 고독하고 외롭게 살아왔다. 그리고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유품을 정리하다가 우표를 숨긴게 아버지라는 것을 알게 된다... 는 내용의 작품.

"고해"

너무나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탓에 마음이 무거워진 범죄자가 신부, 변호사를 찾아가 죄를 털어놓는다는 이야기. 신부와 의사가 이러한 이야기를 공개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죠. 반전은 마지막에 그에게서 고백을 들은 의사가 모르핀 주사 2방을 추가로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가 다시는 괴로워하지 않게 말이죠.

블랙코미디 스타일의 유쾌한 범죄극도 있습니다.

"여의주와 새"

진귀한 카페트를 훔치기 위한 주인공의 노력이 엄청난 슬랩스틱으로 묘사된 작품입니다. 영화로 만들어도 좋을 정도의 연출감이 있습니다.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기발한 작품들도 있습니다.

"서정적인 도둑"

도둑이 범행 후 남긴 시가 지역 신문에서 극찬받자,  도둑의 창작욕이 폭발하여 도둑질은 시를 발표하기 위한 수단으로 변질되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풍자와 유머가 돋보입니다.

"오케스트라 지휘자의 이야기"

영어를 못하는 지휘자가 영국에서 우연히 남녀의 대화를 몰래 듣게 되는데, 그 속에 담긴 범행에 대해 인지하게 된다는 이야기. '남자의 사악한 말은 묵직한 베이스'같은 식으로 악기의 음색과 범행의 느낌을 연결한 설정이 대단히 인상적으로, 작가에게 경의를 표하게 만드는 기가 막힌 아이디어였습니다.

2020/02/07

모로호시 다이지로 자선 단편집 - 모로호시 다이지로 : 별점 3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자선 단편집 - 6점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미우(대원씨아이)

모로호시 다이지로는 그럭저럭 좋아합니다. 작품들의 편차가 큰 탓에 선뜻 읽게 되지는 않지만요.
하지만 이 단편집은 스스로가 선정한 단편들을 모아 놓았다고 해서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오랜 만화가 경력 기간 중 발표했던 작품들에서 뽑았다면 전부 기본 이상은 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요.

목차는 크게 3장, "제 1장 신이 된 인간, 혹은 귀신이 된 인간" 과 "제 2장 기괴한 사건이 일어나다", "제 3장 인간이 아닌 것이 인간이 되다"로 나뉘며, 목차별로 각각 1장에 세 편, 2장에 두 편, 3장에 네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들, 대표 시리즈들이 적절히 선정되어 있으며, 작가의 평상시 작풍과는 전혀 다른 색다른 작품까지 수록되어 있다는 점에서 기대에 값합니다.

국내에 이미 발표되었던 작품들이 여러 편 수록되어 있다는 단점은 있습니다만 이는 '자선 단편집' 특성 상 어쩔 수 없었을 겁니다. 이 정도면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팬에게는 충분히 어필할만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 부탁드립니다.

"도원기"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출세작인 중국 호러 판타지 중 한 편입니다. 도연명이 원량, 잠과 함께 복숭아 나무에 숨겨진 마을에서 불로장생을 꿈꾸지만, 자연의 섭리를 깨닫고 정신을 차린다는 이야기로 속세의 모든 것을 내려두고 불로 장생을 꿈꾸는, 즉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신이 되고 싶었지만 신이 되지 못한' 인간들의 종말을 그리고 있습니다. 도연명은 그들과 함께 하려다 헛된 꿈을 꾸고 말고요.

내용 자체는 굉장히 평이합니다. 불로장생 마을은 요상한 요물과 관련되어 있으며, 이 요물이 사라지자 모두 백골로 화했다는 전개는 뻔하디 뻔하니까요. 그러나 마을의 비밀을 더듬어 나가는 과정은 꽤 긴박감이 넘치며, 도연명의 본명이 도잠, 자는 연명 또는 원량으로 일행이었던 원량과 잠도 그 자신이었다는 반전은 독특합니다. 

1980년 발표 작품인데, 작가 자신의 스타일이 충실히 구현된 좋은 작품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진수의 숲"

오랫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나'는 산책 중 신사 근처에서 아이들과 어울려 술래잡기를 하다가 기묘한 시대로 이동했다. 그 곳에서 누군가에게 잡혀 왼쪽 눈이 뽑혀 나간 뒤 신사에 감금되었는데, 이는 1년에 한 번, 인신 공양에 이용되는 '두옥'이라는 신령의 권속인 산 제물로 선정된 까닭이었다. '나'는 신사를 탈출하여 숲에 숨어 사람들을 잡아먹으며 버티다가, 스스로 '귀신'이 되었다는걸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현대'로 이동하는데...

'귀신이 된 인간'이라는 제목에 어울리는 작품입니다. 일본 전통 설화를 바탕으로 하여 인신공양의 대상으로 신령이 될 수도 있지만 그렇지 못하면 귀신, 도깨비가 된다는 이야기를 현실감있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요괴 헌터" 느낌이랄까요? '한쪽 눈이 빠진' 상태와 도깨비를 연결시킨 아이디어도 좋아요.

그러나 아쉬운건 결말이 다소 허무하다는 것입니다. 귀신이 된 뒤 다시 타임 슬립하여 현대로 돌아온다는건 안이한 발상이 아닌가 싶거든요. 딱히 반전도 아니고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복수 클럽"

현대 사회에서 사람들이 인간관계를 통해 맞이하는 갖가지 불행들이 사실은 '복수 클럽' 때문이라는 내용의 작품. 불특정 다수가 회원이라서 상관없는 사람의 복수를 대행시킨다는 설정은 꽤 그럴듯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귀신이나 이세계 이야기, 설화나 SF적인 내용이 전혀 등장하지 않고 순수하게 현대 사회를 바탕으로 벌어지는 사회 풍자극이자 블랙 코미디에 가까운 이야기였기 때문입니다. 모로호시 다이지로의 이런 작품은 정말이지 처음 보네요.

그러나 반대로, 왜 이런 작품을 많이 그리지 않았는지도 잘 알 수 있었습니다. 작화라던가 전개 방식이 영 어울리지 않았거든요. 후지코 후지오의 "웃는 세일즈맨" 같은 형식에 더 적합한 아이디어라 생각이 되더라고요. 더 웃기거나, 더 극적인 반전이 있는 쪽으로 가는게 훨씬 나았을 겁니다.

그래서 별점은 3.5점. 더 좋은 작품이 될 수 있었을텐데 약간 아쉽습니다.

"모가지괴"

"이계록"에 수록되었던 중국 설화 이야기로 안정적인 작화와 전개 모두 괜찮은 수작입니다. 별다른 반전이야 없지만 원전이 되는 이야기가 그러한 탓이겠죠.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왜 "이계록"에서 이 작품을 선정했는지는 의문입니다.

"살아있는 목 사건"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인 "시오리와 시미코" 시리즈 중에서도 대표작이죠. 기괴하면서도 일상에 맞닿아 있고, 또 은근히 웃기기까지 한 좋은 작품입니다. 이전 작품들과는 다르게 대충 손가는대로 그린 듯한 작화도 이야기의 멋을 잘 살려줍니다. 누가 뭐래도 작가의 최고 대표작 중 한 편으로 별점은 4점입니다.

"연못의 아이"

남아메리카 오지의 차크타 호수에서 동물처럼 지내는 두 남녀가 발견된 후의 이야기를 그린 단편인데,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두 아이의 정체가 무엇인지도 애매하며, 여자 쪽은 헐리우드의 총아가 되지만 남자는 목동으로 살다가 자살한다는 결말도 뜬금없는 탓입니다. 딱히 무섭지도 않고, 의외성도 없으며 흥미롭지도 않은 졸작이에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린이의 놀이"

어린이들이 몰래 키우던 무언가가 그 아이를 대체한다는 내용인데 단순한 일상계 호러는 아닙니다. 사춘기나 '철 든다'는 특정 시기의 변화를 이러한 존재의 대체로 설명하려 한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런데 주인공이 이런 변화를 너무 쉽게 수긍하는건 좀 석연치 않았습니다. 여기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는걸 더 극적으로 그려내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그렇다면 또다른 "바디 스내쳐"가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지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역립 원인"

직립 원인의 미싱 링크로 역립 원인이 있었을 거라는 황당한 아이디어의 꽁트. 별점을 주기 애매한 쉬어가는 소품입니다.

"꿈꾸는 기계"

사람들은 모두 꿈만 꾸고, 일상 생활은 기계로 대체된 사회를 그린 SF인데, 1974년 발표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와 너무나 똑같아서 깜짝 놀랐습니다. 여기서 블랙 코미디 요소를 빼고, 액션만 넣는다면 "매트릭스"인 것이지요. 한마디로 시대를 20년이상 앞서간 작품이에요.

그러나 작화가 이야기와 영 어울리지 않다는 문제와 함께, 전개가 약간 아쉽습니다. 도시가 정지해버리는 결말도 너무 안이하고요. 한 발자욱을 더 못 나간 느낌이랄까요? 오토모 가즈히로가 그려내었더라면 영원히 이름이 남을 걸작이 될 수도 있었을거에요. 별점은 3.5점입니다.

2014/01/13

민들레 소녀 - 로버트 F 영 / 조현진 : 별점 3점

민들레 소녀 - 6점
로버트 F. 영 지음, 조현진 옮김/리젬

전부 1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SF 단편집.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3"을 읽고 읽게 되었습니다. 뭐 도저히 안 읽을 수 없게 소개를 해 놔서... 도대체 그 소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참고로 "비블리아.." 이전에 일본 애니메이션 "클라나드"에서 비중 있게 언급된 것을 계기로 되어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고 해설에서 소개해 주네요. 일본 SF 쪽에서는 그만큼 잘 알려진 작품이라는 뜻이겠죠?

여튼 각설하고, 이 책의 가장 대단한 점은 넓은 장르 범위를 커버한다는 점입니다. 작품의 폭이 넓은 작가야 스티븐 킹 등 이쪽 분야에서는 널리고 널렸습니다만, 모든 장르 자체를 섭렵하여 넘나드는 작가는 보기 드물지요. 킹의 코미디야 있다고 쳐도, 달달한 러브 스토리는 쉽게 연상이 되지 않잖아요? 그러나 이 단편집은 러브 스토리에서 시작해서 코미디, 풍자극, 정통 SF, 쇼트-쇼트 스타일 꽁트 등 다양한 장르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떤 작품에서는 젤라즈니의 문학적인 SF, 어떤 작품에서는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가, 어떤 작품에서는 아시모프의 묵직한 종교적 SF가, 어떤 작품에서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블랙 유머나 '기묘한 맛'이 떠오르거든요.

보다 자세하게는, 달달하고 잔잔한 사랑 이야기로 딱 한 번 남은 시간여행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한 깜짝 반전이 괜찮은 타임슬립 SF "민들레 소녀", 유쾌한 결말이 돋보이는 깜찍한 SF 요정물(?) 코미디인 "프라이팬 조종사", 자본가들의 계획으로 단순 소비재인 자동차와 TV에 매몰되어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가는 소시민들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 및 풍자하는 "21세기 중고차 매장에서", "팝콘 튀기는 TV", 종교적인 성찰을 다룬 "과거와 미래의 술"과 "약속의 별", 문학의 중요성을 문학에 대해 잘 모르는 안드로이드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시인과 사랑에 빠진 큐레이터", "당신의 영혼이 머물 자리", 우주비행사의 고독을 일상계스러운 분위기로 굉장히 설득력 있게 그려낸 분위기 있는 정통 SF "별들이 부른다", 가벼운 쇼트-쇼트 스타일 콩트 코미디인 "파란 모래의 지구", "하늘에 새겨진 글자", "시계장치 오렌지"를 연상케 하는 끔찍한 마인드컨트롤 설정이 돋보이는 기묘한 맛 류의 "붉은 학교", 일종의 타임 패러독스 SF "시간을 되돌린 소녀"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수록작들의 완성도 역시 명성에 걸맞으며 책장도 쭉쭉 넘어가는, 쉽게 읽히면서도 독자의 흥미를 끄는 작품들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시대가 너무 많이 지난 듯한 느낌이 드는 작품도 많습니다. 유쾌한 꽁트나 코미디 쪽은 괜찮은데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 풍자적인 작품의 경우는 많이 낡아 보였어요. 종교적 색채가와 설교적 분위기가 과한 것도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요.

아울러 전체적으로 독자에게 설명이 부족합니다. 여운을 많이 남기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자 하는게 작가의 스타일로 보이지는 하지만, 남용된 느낌입니다.

그래도 완성도 높은 단편집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민들레 소녀" , "프라이팬 조종사"와 "붉은 학교"를 꼽겠습니다. "민들레 소녀"는 SF 장르물 중에서는 손 꼽을만한 멋진 러브 스토리이며, "프라이팬 조종사"는 기발한 상상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붉은 학교"는 교육에 대한 서늘한 비판이 인상적이었고요. 다른 작품들도 괜찮은 만큼 읽기 편한 SF 장르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참고로 이 책을 소개한 다른 창작물에 의해 접하고 흥미를 가지신 분들이라면, 와닿지 않을 작품이 제법 많다는 점은 꼭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2013/06/23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 걸작선 - 에드 멕베인 외 / 홍한별 : 별점 3점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 걸작선 - 6점
에드 맥베인 외 지음, 린다 랜드리건 엮음, 홍한별 옮김/강

EQMM (엘러리 퀸 미스터리 매거진)과 쌍벽을 이루는 미스터리 잡지인 AHMM (앨프리드 히치콕 미스터리 매거진)의 50주년 기념 선집.

과거 엘리너 설리번이 엮었던 같은 잡지 걸작선은 이미 접해보았는데, 이 선집은 서문에서 밝히듯 독자 투표가 많이 반영되었기 때문인지 유명한 작가의 작품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작가진이 정말로 화려해요. 헨리 슬레서, 에드워드 D 호크, 에드 멕베인, 도널드 E 웨스트레이크, 빌 프론지니, 로렌스 블록, 새러 패러츠키 등의 작품들이 실려 있으니까요. 그것도 32편이나! 작품들도 작가들의 유명 시리즈들 중심이라는 점도 반가운 요소였고요. (제가 아는 시리즈는 매튜 스커더와 워쇼스키 시리즈밖에는 없었습니다만)

그러나 수록작 모두 수준이 뛰어나지는 않습니다. 추리와는 동떨어진 작품도 많았고요. 번역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문체가 딱딱해서 쉽게 읽기 힘들었다는 점도 단점입니다. 에드워드 D 호크의 "긴 추락"이 "내려가는 동안"이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는데, 제가 취미삼아 번역했던 결과물이 더 읽기 쉬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도 워낙 다양한 작품이 많이 실려 있기에 평균 이상의 값어치는 충분히 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가격도 볼륨에 비하면 상당히 저렴한 만큼, 관심 있으신 분들은 큰 부담 느끼지 말고 한 번쯤 읽어보셨으면 합니다.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던 작품은 아래와 같습니다.

헨리 슬레서 "사형 집행일"

아내를 죽인 범인에게 사형 선고를 받게 만든 검사 셸비 앞에, 그 사건의 진범이 자신이라고 주장하는 노인이 나타났다...

단편의 명수답네요. 깔끔하고 짤막한 분량 안에 스릴과 범죄, 동기, 반전까지 모두 들어 있거든요. 이런 쇼트쇼트물의 교과서 같은 작품입니다.

제임스 홀딩 "살인요리법"

은퇴한 요리사가 자신의 전설적 요리인 포타주 프랑수아 프르미에 비법을 노리는 조카 부부에게 맞서는 이야기. 짤막하지만 적절한 전개 및 반전이 잘 짜여져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계획을 눈치챈 뒤에 벌이는 반격이 과연 프로 요리사! 라는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기발했어요. 마지막의 한마디 - "포타주 드 볼라유 귀스타프 – 쥐약으로 간을 한 스프"- 까지 요리사다움을 잃지 않고요. 좋은 작품이었습니다.

윌리엄 브리튼 "역사적 오류"

옛 풍습을 지키고자 하는 마을에 역사학자 노먼이 억류된 뒤 고난을 맞는다는 이야기. 

폐쇄된 마을에 찾아온 이방인이 겪는 기이한 경험이라는 소재는 널리고 널렸습니다. 보통 "인스머스의 그림자"처럼 마을에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설정이 많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마을이 고증에 집착하는 오타쿠스러운 곳이라서 블랙코미디 같은 느낌을 가져다 주는 이색작입니다. 데미 무어가 출연했던 코미디 영화 "난폭한 주말"이 연상되기도 하더군요. (물론 영화는 망작이었지만...)

S.J 로잔 "바디 잉글리쉬"

중국계 미국인들이 등장하는 작품으로, 잘 짜여진 이야기 구조가 돋보이는 본격물입니다. 한국 막장드라마 같은 설정도 꽤 인상적이었어요.

캐럴 케일 "하수구"

궁지에 몰린 남자에 대한 일상계 서스펜스 심리 호러물. 전개가 뻔할 뿐더러, ‘미쳐버렸다’는 결말은 너무 쉽게 간 듯해서 아쉽지만, 뭔가 꽉 막힌, 그야말로 탈출구 없는 심리 상태에 대한 묘사가 제대로라 아주 만족스러웠습니다.

2012/08/23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상) - 스티븐 킹 / 조영학 : 별점 2.5점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 상 - 6점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하) - 스티븐 킹 / 조영학 : 별점 2.5점

먼저 읽었던 하권에 이은 상권.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제4호 부검실
검은 정장의 악마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잭 해밀턴의 죽음
죽음의 방
엘루리아의 어린 수녀들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그다지 무섭지 않으며 강한 심리 묘사가 중심이라는 특징은 하권과 동일합니다. 그래도 교훈적인 주제는 하권만큼 많지는 않더군요. 조금 더 재미에 치중한 작품들이었습니다. 별점은 2.5점. 개인적인 베스트는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입니다.

<제 4호 부검실>
의식이 있지만 몸 전체가 마비된 주인공이 부검실에서 부검을 기다리는 신세가 된 것을 깨닫는다는 스릴러. 그에게 닥칠 부검이 언제 시작될 것인지에 대한 긴장감이 부검실 의사들의 유머러스한 대화와 맞물린다는 점에서 블랙코미디같은 느낌도 큽니다. 결말이 예상대로이긴 하나 코미디로 보면 괜찮은 듯. 별점은 2.5점입니다.

<검은 정장의 악마>
한 노인이 20세기 초엽, 자신이 아홉살 때 만났던 악마에 대해 털어놓는다는 내용. 너새니얼 호손의 <영 굿맨 브라운>에 대한 개인적 헌사이며 킹 본인은 별볼일 없는 결과물로 생각했지만 반응도 좋았고 상도 탔다라고 소개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킹 의견에 동의합니다. 별볼일 없었어요. 호손 시대에 쓰여진듯한 오래된 감수성이 확실히 느껴지기도 했을 뿐더러 별로 무섭지도 않았거든요.
게다가 전개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악마가 왜 어머니의 죽음에 대해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가 없고 제대로 추격하지 않은 이유도 명쾌하지 못한 등 떡밥만 가득할 뿐이라서 말이죠. 중후반부 악마와의 추격전 하나만큼은 긴장감이 넘치지지만 단점이 워낙 명확하기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모든 것이 사라질 것이다>
한 세일즈맨이 자살을 하려다 평생 모은 화장실 낙서에 대한 노트의 처리를 놓고 고민한다는 드라마. 탁월한 심리묘사에 화장실 낙서라는 이질적인 소재를 잘 어우른 걸작 소품. 길이도 적당할 뿐더러 삽입된 낙서들이 참 적절하더군요. 그리고 열린 결말이 정말 잘 어울렸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잭 해밀턴의 죽음>
딜린저 갱단의 일원이었던 잭 해밀턴의 죽음을 딜린저의 오른팔 호머 반미터가 회고하는 안티 히어로 물이자 신화이자 팩션. 실제로 있었음직한 생생함이 압도적입니다. 딜린저에 대해 모르면 즐기기 어렵다는 단점은 있지만... 저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창작 동기가 킹이 호머 반미터가 파리에 올가미를 던지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라고 하는데 단지 그 정도의 소스로 이렇게나 그럴듯하게 이야기를 꾸며내다니, 역시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 하나만큼은 타의추종을 불허하는구나 싶더군요. 별점은 3점입니다.

<죽음의 방>
남미 한 국가 고문실에 잡혀온 미국기자 플레쳐의 탈출을 그린 모험물. 그야말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전개가 일품인, 서스펜스 하나만큼은 최고로 치고 싶은 작품입니다. 금연한 사람에게 담배를 피고 싶게끔 만드는 효과도 있는데 흡연 장려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지나치게 낙관적인 결말은 그닥이나 흥미진진한 것은 확실하기에 별점은 2.5점입니다.

<엘루리아의 어린 수녀들>
<다크 타워> 시리즈의 번외편 단편이라고 합니다. 원전을 읽지 않아 세계관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느낌은 <북두의 권> + <트라이건> 정도 되려나요? 이 작품집에서 가장 긴, 중편에 가까운 길이를 자랑합니다.
일단 수녀들의 정체, 녹색 괴물들과 끔찍한 벌레들이 등장하는 등 호러 판타지로서의 묘사와 설정은 좋습니다. 그러나 포로가 된 히어로와 그를 돕는 비련의 히로인 그리고 둘에게 닥친 비극적 결말이라는 전형적인 이야기 구조에서 조금도 더 나아간 것이 없어서 아쉽습니다. 이래서야 인어공주의 다크버젼일 뿐이죠. 물거품이 아니라 벌레가 되었을 뿐.
때문에 제게는 알맹이가 별로 없는 흔해빠진 호러 판타지였을 뿐입니다. 젤라즈니가 왜 대단한지 다시금 느끼게 해 주네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모든 일은 결국 벌어진다>
사람을 자살로 유도하는 초능력을 가진 딩크가 정체를 알 수 없는 기관에 고용되어 안락한 삶을 누리지만 자신이 살인에 이용되었음을 깨닫고 탈출을 결심한다는 이야기.
설정도 흥미진진하고 이야기도 재미있기는 한데 영화로 따지면 기본 설정과 주인공 소개 후 막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려 할 때 끝나는 느낌이에요. 기-승 까지만 있다는 느낌? 그래서 완성도는 높이 쳐주기 어렵네요. 뒷부분을 따로 본다면 모를까.
덧붙이자면 작가 스스로 밝힌, 창작 동기인 잔돈을 버리는 청년에 대한 설명도 그닥 잘 되어 있지 않더군요. 별점은 2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