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모비딕 |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를 처음 읽고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왠걸, 전작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수록 작품 하나하나의 재미와 소설적인 완성도 모두 빼어난 수준이었어요. 또한 추리적 속성의 작품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진실과 정의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왜 미스터리가 벌어지는가? 그 사이에는 어떤 차이들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 덕분인 듯싶네요.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메이즈리크가 명탐정이라는 것도 잘 드러나 있고요.
아울러 책 뒤 소갯글을 보니, 차페크는 실험적인 소설을 쓰는 데 가장 완벽한 형식이 단편소설이라고 깨달았다고 하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단편도 그냥 단편이 아니라 호시 신이치와 같은 "쇼트쇼트" 스타일의 초단편들이 많은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장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수록 작품의 편차가 있는 편이고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이야기들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세대를 뛰어넘는 아우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단편집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 몇 개를 소개해봅니다. 쇼트쇼트 스타일이라 수록 작품이 워낙 많아 전부 소개하기는 어렵네요. 아울러,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발자국"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의 발자국이 딱 한 지점에서 사라졌다는 수수께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내용은 이 수수께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수수께끼와 현실 사이의 문제를 냉정하게 지적하는 바르토세크 반장의 독백 - "우리가 범죄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미스터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당을 쫓는 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입니다." - 이 핵심입니다.
때문에 좋은 미스터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발상은 괜찮았습니다. 하기사, 경찰에게 상상력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떤 사건"
메이즈리크 형사가 선배에게, 최근 금고털이를 체포했던건 사실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고 털어놓는 이야기입니다. 우연이 겹쳐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이 코믹하게 전개되는데, 메이즈리크는 본인을 너무 폄하하는 것 같아요. 범인 신발에 묻은 "가루"를 인지한 것은(그것도 비 오는 상황이라는 걸 특정해서!) 분명 뛰어난 수사 능력이죠.
"푸른 국화"
희귀한 푸른 국화를 찾는 정원사의 활약을 그린 작품입니다. 마을 바보가 가져온 푸른 국화 뿌리에 묻은 흙의 종류와 잎에 묻은 이물질을 통해 "어딘가의 정원에 있을 것"이라 추리하는 장면에서부터, 마을을 전부 뒤졌지만 찾지 못했던 이유는 보행 금지 표지가 있었던 철로 건너편 경비원 관사에 피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말까지 완벽한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바보는 글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통행 금지 표지판을 무시하고 건넜다"는 핵심 트릭도 좋았고요. 그 외에도 경비원과의 언쟁, 정원사의 일탈 등 재미있는 부분이 많은 작품입니다.
"점쟁이"
점을 쳐서 생계를 유지하는 마이어스 부인을 의심한 서장이 자신의 아내를 손님으로 위장시켜 수사에 나선다는 내용입니다. 마이어스 부인을 사기로 옭아매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녀의 점이 실제로 들어맞는다는 기묘한 블랙코미디 같은 반전이 돋보였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다소 예상 가능한 전개지만, 시대를 앞선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통력의 소유자"
필적만 보고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초능력자를 시험하기 위해 검사가 자신이 맡은 사건의 냉혹한 살인범이 쓴 편지를 보여주는데, 능력자의 평가 결과가 너무나 정확해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편지가 자신이 쓴 메모로 바뀌어 있었음을 깨닫고, 그 초능력자의 분석은 그냥 일반화된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여기까지는 흔한 초능력 격파물인데, 이후 전개가 흥미롭습니다. 검사는 그 초능력자가 묘사한 말들을 활용하여 실제 재판에서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거든요. 이 정도면 호시 신이치 급의 쇼트쇼트 거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필적 미스터리"
아내의 편지를 전문가에게 필적 감정받은 기자의 이야기입니다. 자칭 전문가의 현란한 말에 휘둘려 이십여 년 동안 행복하게 살아온 아내를 의심하고 매도하게 되는데, 백여 년 전 이야기임에도 인터넷상 자칭 전문가나 SNS 루머 등으로 판단을 내리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이 인상 깊었던 소품입니다.
"도둑맞은 서류"
마카로니 통 안에 숨겨 놓은 비밀 서류 도난 사건을 다룹니다. 지역 경찰관이 일종의 DB 기반 추론으로 범인을 검거하는 독특한 수사 방식이 돋보이며, 동시에 속물적이고 유쾌한 블랙코미디 요소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보티츠키 가문의 몰락"
메이즈리크가 역사학자의 의뢰로 15세기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역사 추리물입니다. 두 남자의 죽음, 사라진 딸, 국왕으로부터의 처벌 등을 단서로 펼치는 추리는 꽤나 흥미롭습니다. 실화가 아니라 허구의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진리는 시간의 딸"보다는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한 단편이 연상되더군요.
"영수증"
메이즈리크 반장이 등장하는 정통 추리물입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가 발견되고, 단서는 전철 티켓과 영수증 뿐. 하지만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영수증을 통해 피해자가 중국 도자기 가게에서 산 물건을 추리해내고, 그 이유까지 밝혀냅니다. 도자기를 산 이유는 그것을 깨뜨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추리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명작입니다.
다만 전개 면에서는 약간 아쉬움이 있습니다. 청자인 두 연인 민카와 페파, 그리고 화자인 소우체크의 이야기는 서사의 흐름에 꼭 필요해 보이진 않았거든요. 여운을 남기기는 했지만, 감정적으로 깊게 와닿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배우의 실종"
천재 배우 얀 벤다가 실종된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벤다의 친구인 의사 골드베르크가 탐정 역할을 하며 사건을 해결하는데, 벤다가 '메소드 배우', 즉 배역에 몰입해 자신을 바꿔가는 배우였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벤다가 부랑자 역할을 맡으면서 자신을 완전히 부랑자처럼 바꾸어 버린 탓에, 결국 시체가 부랑자의 변사체로 오인되었다는 것이지요. 지금 봐도 설득력 있는 설정과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우체국에서 생긴 사건"
단돈 200코루나가 사라진 사건으로 감사관에게 적발당하고 자살한 불쌍한 우체국 직원 헬렌카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화자인 경감 '나'는 다음과 같은 정보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밝혀냅니다.
1. 헬렌카의 시선을 잠시만 돌리면 200코루나 정도는 쉽게 훔칠 수 있었다는 점
2. 시선을 돌리려면 전보나 소포를 보내야 했다는 점
3. 사건 당시 익명의 편지가 파르두비체에서 대거 발송되었다는 점
4. 파르두비체에 사는 우체국 아가씨와 교제 중인 감독관이 소포를 보냈고, 주소 오류로 반송되었다는 점
이 정보들을 바탕으로, 감독관이 애인을 자신의 근무지 근처로 전근시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고, 애인이 익명으로 그 사실을 고발해 감사가 이루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일상계 추리물로도 수준이 높고,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을 꿈꾸며 벌인 일탈이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씁쓸한 결말도 매우 인상 깊습니다. 지금 읽어도 전혀 낡지 않은 걸작으로, 별 5점은 충분한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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