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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12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카렐 차페크 / 정찬형 : 별점 3.5점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8점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모비딕

두권을 세트로 구입했는데 처음 읽었던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가 기대에 미치지는 못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왠걸, 전작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수록 작품 하나하나의 재미와 소설적인 완성도 모두 빼어난 수준이었어요. 또한 추리적 속성의 작품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진실과 정의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왜 미스터리가 벌어지는가? 그 사이에는 어떤 차이들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 덕분인 듯 싶네요. 이전 권을 읽었을 때에는 알 수 없었던 메이즈리크가 명탐정이라는 것이 잘 드러나기 있기도 하고요.

아울러 책 뒤의 소갯글을 보니 차페크는 실험적인 소설을 쓰는 데 가장 완벽한 스타일이 단편소설이라고 깨달았다고 하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단편도 그냥 단편이 아니라 호시 신이치와 같은 "쇼트쇼트" 스타일의 초단편들이 많은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장르라 무척 반갑더군요.

수록 작품의 편차가 있는 편이고 지금 읽기에 조금은 낡은 이야기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세대를 뛰어넘는 아우라는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단편집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 몇 개 소개해봅니다. 쇼트쇼트 스타일이라 워낙에 수록작품이 많아 전부 소개하기는 무리거든요. 스포일러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발자국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의 발자국이 딱 한 지점에서 사라진 미스터리가 등장하는 작품. 그러나 내용은 이 미스터리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미스터리와 현실 사이의 문제를 냉정하게 지적하는 바르토세크 반장의 독백이 핵심입니다. "우리가 범죄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미스터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당을 쫓는 건 지적 호기심이나 충족시키자는게 아닙니다. 법을 이름으로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입니다."라는 것이죠. . 좋은 미스터리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발상은 괜찮은 것 같아요. 하기사, 경찰에게 상상력이 필요한 건 아니겠죠.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떤 사건
메이즈리크 형사가 선배에게 최근에 체포한 금고털이는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고 털어놓는 내용. 우연이 겹쳐서 범인을 잡게 되는 과정이 코믹하게 전개됩니다. 그런데 메이즈리크는 본인을 너무 폄하하는 것 같아요. 범인 신발에 묻은 "가루"를 인지한 것은 (그것도 비가 오는 상황이라는 것을 특정하여!) 분명 뛰어난 수사 능력인데 말이죠.

푸른 국화
희귀한 푸른 국화를 찾는 정원사의 활약을 그린 작품. 마을 바보가 가져온 푸른 국화 뿌리에 묻은 흙의 종류, 잎에 묻은 이물질을 가지고 "어딘가의 정원에 있을 것이다" 라고 추리하는 장면에서부터, 마을을 전부 뒤졌지만 찾지 못한 이유가 보행 금지 표지가 있었던 철로 건너편 경비원 관사에 피어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결말까지 완벽한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핵심 트릭은 "바보는 글을 읽을 수 없어 통행이 가능했던 것"인 것이죠. 그 외에도 경비원과의 언쟁이라던가 정원사의 일탈 등 여러모로 재미있는 부분이 많았던 작품입니다.

점쟁이
점을 쳐서 먹고 사는 마이어스 부인을 의심한 서장이 자신의 아내를 손님으로 위장시켜 수사에 나선다는 내용. 마이어스 부인을 사기로 옭아매는 대는 성공하지만 그녀의 점이 들어 맞는다는 기묘한, 블랙코미디같은 반전이 돋보였습니다. 반전 자체는 지금 읽기에는 예상대로의 수순이지만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임에는 분명해 보이네요.

신통력의 소유자
필적만 보고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서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기묘한 작품.
초능력자를 시험하려는 검사가 자신이 맡은 사건의 냉혹한 살인범이 쓴 편지를 보여준 뒤, 그에 대한 평가를 듣고 깜짝 놀랍니다. 너무나 정확했기 때문이죠. 그러나 이후 편지가 자기가 쓴 메모로 바뀌어져 있었다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초능력자의 놀라웠던 평가가 일반화할 수 있는 것이라는 걸 깨닫게 되죠.
여기까지는 흔하디 흔한 초능력 격파물인데, 이후 이어지는 이야기가 재미납니다. 검사는 초능력자가 묘사한 말을 적절히 활용하여 재판에서 이기게 되거든요. 나름 반전이라면 반전인데 이 정도면 호시 신이치 급의 쇼트 쇼트 거장이라 불러도 손색없지 않을까 싶네요.

필적 미스터리
아내의 편지를 전문가에게 필적감정받은 기자의.이야기. 그는 자칭 전문가의 현란한 말빨에 놀아나 이십여년 행복하게 살아온 아내를 매도하게 됩니다. 내용은 특별하지 않지만 거의 백여년 전에 쓰여졌음에도 인터넷 상 자칭 전문가들의 부정확한 정보라던가 SNS에서의 루머 등으로 모든 것을 잣대하는 현재하고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 인상적이었던 소품입니다.

도둑맞은 서류
마카로니 통안에 숨겨놓은 비밀 서류 도난에 관한 이야기. 지역 경찰관이 일종의 DB를 통한 범인을 검거한다는 독특한 수사법에 더하여 속물적인 사고방식이 가득한 블랙코미디 요소도 재미있었던 작품.

보티츠키 가문의 몰락
메이즈리크가 역사학자로부터 의뢰받은 15세기의 수수께끼를 추리해내는 역사 추리물. 두 남자의 죽음, 사라진 딸, 국왕으로부터 받은 처벌을 종합해 내린 추리가 재미있었습니다. 순전히 허구의 역사라는 점만 빼면 다른 역사추리물과 비교해도 빠지지 않는 수작이었습니다.
실화가 아닌 가상 역사 추리물이라는 점에서 <진리는 시간의 딸>보다는 브라운 신부 시리즈 중 한 단편이 떠오르네요.

영수증
메이즈리크 반장이 등장하는 정통 추리물. 신원을 파악할 수 없는 사체가 발견되는데 유일한 단서는 전철 티켓과 영수증이 전부인 상황. 별볼일 없어보였던 영수증을 통해서 피해자가 중국 도자기 가게에서 산 물건을 추리해내고, 그 물건을 왜 샀는지까지 추리하는 메이즈리크의 추리력이 돋보인 작품입니다. 제법 비싼 도자기를 산 이유는 그것을 깼기 때문이라는거죠! 추리적으로는 정말 나무랄데 없었습니다.
허나 전개면에서는 조금 아쉽네요. 청자인 두 연인 - 민카와 페파 - 과 화자인 메이즈리크의 부하 소우체크가 등장하여 이야기를 풀어나갈 필요는 없어 보였거든요. 두 연인의 모습이 여운을 남기기는 하지만 딱히 와 닿지는 않더군요.

어느 배우의 실종
천재 배우 얀 벤다가 실종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벤다의 친구인 의사 골드베르크가 탐정역으로 등장하여 사건을 해결하는데, 벤다가 요새말로 하자면 "메소드 배우", 즉 배역에 충실하게 자기 자신을 만드는 배우였다는 것아 핵심 트릭입니다. 벤다가 "부랑자" 역을 맡기로 하여 자기 자신을 완벽한 부랑자로 만들었기 때문에 사체가 부랑자의 변사체로 오인된 것입니다. 지금 보아도 설득력이 느껴지는 좋은 트릭이었어요.

우체국에서 생긴 사건
단돈 200코루나가 사라진 것을 감사관에게 적발당한 것 때문에 자살한 불쌍한 우체국 직원 헬렌카 사건을 해결한다는 이야기.
화자이자 탐정인 경감 "나"가
1. 헬렌카의 시선을 잠깐만 돌리면 200코루나 정도를 훔치는 것은 쉬웠다는 것
2.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는 전보나 소포를 보냈어야 했다는 것
3. 사건 당시 익명의 편지가 파루두비체에서 대거 전달된 것
4. 파루두비체에 사는 우체국 아가씨와 교제하는 감독관이 소포를 보냈으나 주소지를 잘못 기입해 반송된 것
등의 정보를 모아 사건을 밝혀냅니다. 애인을 자신의 근무지 근처로 이직시켜 결혼하기 위한 목적으로 감독관이 소포를 보내면서 돈을 훔쳤고 그 애인이 익명으로 횡령사실을 고발하여 감사관이 출동하게 된 것이죠.
일상계에 가까운 추리물로서도 높은 수준이지만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해지기 위해 벌인 일탈의 결과로 모두가 불행해진다는 씁쓸한 결말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 읽어도 손색없는 걸작으로 별 5점은 충분한 작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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