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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30

포스터를 훔쳐라 - 하라 켄야 / 이규원 : 별점 4점

포스터를 훔쳐라 - 8점
하라 켄야 지음, 이규원 옮김/안그라픽스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 디자이너 하라 켄야가 1991년부터 4년 동안 소설신초에 연재한 50개의 수필에 더해 15년 후인 2009년 세개의 수필을 덧붙여 출간한 수필집.

저자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디자인의 디자인>을 읽었기에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글을 정말 잘 써서 놀랐습니다. 본인 스스로 디자인을 언어로 드러내는 것은 또 하나의 디자인이라고 책에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게 맞다면 당연한 결과일 수 밖에 없겠죠. 하라 켄야 본인이 1류 디자이너니까요. 그러고보면 유명 디자이너들의 에세이가 대체로 뛰어났던 것도 그래서인가 싶기도 합니다.

단지 잘 썼다, 즉 묘사나 문체가 유려하다는 것이 아니라 읽히는 재미도 뛰어난데, <딱한 사람>이라는 책 디자인을 하면서 제일 딱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토론을 벌인다거나, 다빈치가 그린 그림은 구석에 있는 잘 보이지도 않는 천사마저도 지능지수가 높아 보인다는 묘사 등이 그러하며 후지이 타모쓰의 위스키 광고 사진을 보고 감탄했는데 그 사진이 특별했던 이유를 나중에 들은 내용도 아주 인상적이에요. "잔 두개라는 사물을 본 것이 아니라 그 잔을 가지고 누군가가 술을 마시는 장면을 상상하고 찍은 것"이라고 하네요. 즉 사물을 어떤 인격으로 바라보고 찍은 것이라고 하는데, 이건 정말 사진 원본이 보고 싶어 미칠 지경이에요! (인터넷을 뒤지니 사진이 뜨긴 하는데 원본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도 너무 작고요) 참고로, 후지이 타모쓰는 <디자인의 디자인>에서 자세히 설명한 무인양행의 프로젝트를 찍은 사진가라고 합니다.

책 디자인을 투구에 비유하는 글도 재미나요. 히메노 카오루코라는 작가의 책 디자인 이야기로 동일한 작가의 책을 계속 작업한다면 점차 그 작가에 대한 "스트라이크 존"이 형성되며, 여기서 직구냐 변화구냐를 던질 의미와 여지가 발생한다는 내용으로 야구 애호가로서 무릎을 칠만한 비유였다 생각되거든요. 

또 하라 켄야의 작품과 작업 과정에 대한 내용이 많다는 것도 아주 좋았습니다. 디자인 전공자로서 여러가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음은 물론이고 자극제로서도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여러가지 작업들에 대한 내용이 실려있는데 그 중에서도 유명 건축가들이 파스타 디자인 한 것을 본따 하라 켄야 스스로 가락국수 디자인을 한 것이 기억에 남네요. 양산된건 아니지만 양념 국물이 많이 묻기 위해서라는 이유 자체는 충분히 공감가는 디자인이었으니까요.

책의 제목이기도 한, 사람들이 훔쳐가고 싶어하는 포스터 이야기에서는 극사실주의 작가 리처드 에스테스의 전시회 포스터를 만들려다 보니 아무리 봐도 그림으로 보이지 않았던 어려움, (극사실주의니 당연하죠) 고급진 새로운 커피 라벨을 작업하려고 엠보스 가공을 했는데 막상 병에 붙이려고 하니 요철이 거의 다 사라져버리더라는 이야기와 같이 작업 시 닥쳤던 어려움들에 대한 것도 좋은 반면교사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꼭 무언가를 얻을 수 있어서만이 아니라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대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작업을 하는지 그 편린을 엿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기도 합니다. 디자인은 단순히 껍데기가 아니라 제품의 배경과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한다는 사상은 충분히 공감되었거든요. 저도 이런 디자인을 해 보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책 가격에 비하면 너무나 부실한 도판은 아쉽군요. 저자 스스로 언급한 디자인의 절반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고 있거든요. 특히 앞서 이야기했던 위스키 광고라던가 커피 라벨 등은 결과물이 너무나 궁금한데 구해볼 방법조차 마땅치 않으니까요. 책 디자인도 하라 켄야 본인이 관여했을텐데 상상력을 자극하기 위한 저자의 의도였다면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독자를 위한 배려는 필요해 보이네요. 특히나 여기 나온 광고를 접하기 어려운 물건너 해외 독자들에게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도판만 좋았다면 별점은 5점도 충분했겠지만 이러한 문제로 별점은 4점입니다만, 디자인 전공자라면 꼭 한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별점 4점도 무척이나 높은 점수고, 재미와 생각해 볼만한 여지를 많이 던져주는 최상급의 수필, 에세이집임에는 분명하니까요. 제가 가르치는 사람 입장이라면 필독서로 지정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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