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독 소사이어티 - 마이클 카프초 지음, 박산호 옮김/시공사 |
비독 소사이어티는 82세로 생을 마감한 비독을 기리기 위해 인종, 성, 연령, 국적을 가리지 않고 총 82명의 세계 최고의 형사들과 범죄 수사 과학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자신들의 능력을 범죄 해결을 위해 제공하는 일종의 재능기부 단체, 자원봉사 탐정들이라고 합니다. 단, 발생한 지 2년 이상이 지나 경찰의 공식 협조 요청이 있을 경우에만 해당 사건의 조사에 응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아마 공권력을 넘보지 않기 위해서겠죠. 사건 해결을 하더라도 그들의 이름은 빠지는, 철저하게 조력자 역할에 충실한 전문가들입니다. 쿨하고 멋있죠?
이 책은 비독 소사이어티 소속 수사관들이 가 요청받은 미해결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을 다룬 논픽션입니다. 56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통해 수많은 사건과 수사관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서도 세계 5대 프로파일러 중 한 명으로 셜록 홈즈의 재림이라 불리는 골초 프로파일러 리처드 월터가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리처드의 프로파일링은 신급으로 묘사되는데, 사건을 맡으면 범인 체포를 자신하며 "내가 범인이라면 익지 않은 바나나는 사지 않을 겁니다"라고 말할 정도입니다. 캐릭터성도 확실해서 독신주의에 엄청난 골초, 전자제품은 제대로 다룰 줄도 모르고 양복은 단 한 벌 뿐, 그런데 피아노 연주 능력은 뛰어난 음악가이며 모든 일에 시니컬한 천재로 묘사됩니다. 작중 표현 그대로 "셜록 홈즈와 싱크로율 90%"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요.
그의 능력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는 20년 전 가족을 몰살시키고 도주한 존 리스트 사건 해결입니다. 리스트가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을지, 어떤 차를 탈지까지 정확하게 예측해 내거든요. 폭주족 살인자 나우스에 대한 프로파일링도 마치 직접 본 것처럼 정확했고요.
이러한 프로파일링 실력 뿐 아니라 "내가 듣고 싶은 것은 수갑소리야"라는 말로 대표되는 실질적 범인 검거 능력도 인상적입니다. 스콧 살인 사건에서는 자료만 보고 범인이 레이샤일 것이라 확신하며, "시체가 없으면 기소가 불가능하다"는 지방 검사에게 "현장의 혈흔은 누군가 죽었음을 충분히 증명한다. 피도 시체의 일부다"라고 설득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입니다.
이러한 능력은 개인적인 천재성으로 설명되기에, 그 비결이 자주 등장하지는 않지만 살인자를 4가지 성격 유형으로 나누는 "헬릭스 이론"은 매우 흥미로웠습니다. 이 분류를 통해 한밤중 마트에서 세 번 살해당한 브룩스 사건을 해결하는 장면도 인상 깊고요.
그러나 다른 수사관들은 리처드에 비해 활약은 별로 두드러지지 않습니다. 협회를 만든 윌리엄 플라이셔는 사건 해결보다는 리더십을 갖춘 마당발, 얼굴마담 역할이며, 또 다른 중심 인물 프랭크 벤터는 과거 사진만으로 존 리스트의 현재 모습을 예측한 흉상 제작으로 유명세를 얻은 천재이지만 범죄 전문가라기보다는 예술가에 가까운 탓입니다.
해골을 통한 얼굴 복원, 실종 용의자의 현재 모습을 조각하는 일 등을 담당하므로 이야기 중심에서는 조금 비켜나 있지요. 비교하자면 천재 아이언맨이 리처드 월터, 리더십 중심의 캡틴 아메리카가 윌리엄 플라이셔, 과학보다는 신화 기반의 토르가 프랭크 벤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도 사건, 수사관, 수사 이야기는 모두 흥미롭습니다. 비독 소사이어티에 의뢰될 정도의 사건이라면 기존 경찰 수사로는 해결이 어려웠던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미제 사건을 천재들이 해결해 나간다는건 추리 소설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는 설정(예를 들자면 이런 작품)인데, 그게 실제 사건이라면 왠만한 소설 이상으로 흥미로울 수 밖에 없지요.
아울러 공소시효 없이 미제 사건을 끝까지 추적하는 미국 사법당국의 노력도 인상 깊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흉악 범죄에 대해 공소시효 폐지를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책의 몇몇 사건처럼, 사건 발생 당시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DNA 감식 등의 수사기법 덕분에 진범이 밝혀진 사례도 있으니까요. 예전에 우리나라에서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미제 사건을 부각시켜 해결하려는 시도를 한 바 있는데, "화성 연쇄살인" 같은 경우는 비독 소사이어티에 의뢰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프랭크 벤터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화성 연쇄살인범의 몽타주는 철저히 가상이기에 현재 모습을 조각할 수는 없겠지만, 리처드 월터의 능력을 빌린다면 훨씬 정밀한 프로파일링이 가능할지도 모르니까요.
이처럼 재미와 가치를 지닌 책이지만, 아쉬운 점도 있습니다. 논픽션과 소설의 중간적 형태를 띠고 있어 불필요한 묘사와 지나치게 장황한 설명은 읽는 데 부담을 줍니다. 다른 유사한 논픽션과는 전혀 다른 접근법인데, 저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더군요. 리처드와 프랭크의 천재성에 대한 묘사는 지나쳐서 오히려 거부감을 줄 뿐이고요. 차라리 이들을 주인공으로 소설을 쓰는게 더 나았을 거에요.
아울러 너무 극적인 성공 사례만 실려 있는 점도 좀 아쉬웠습니다. 프로파일링은 본질적으로 데이터와 직감에 기대는 작업인데, 100% 적중이라는 건 비현실적이니까요. 한두 건의 실패 사례가 들어갔다면 오히려 설득력이 높아졌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상자 속 소년" 사건의 진범이 끝내 밝혀지지 않는 것도 불만이며 부실한 번역과 교정은 정말로 큰 문제입니다. 인터넷 리뷰에서도 공통적으로 지적된 문제인데, 18,000원짜리 책이라면 그에 맞는 완성도를 갖췄어야 했습니다. 초판 독자가 베타테스터도 아니고요.
그래서 결론적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4점을 줄 수도 있었지만, 책의 완성도 부족으로 1점 감점합니다. 다만 범죄 분석과 프로파일링에 관심 있으신 분들께는 매우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덧붙이자면, 대니 드비토가 운영하는 제작사가 비독 소사이어티 관련 영화 판권을 구입했다고 하는데, 어떤 영화가 나올지 궁금합니다. 리처드와 프랭크가 중심이라면 아마도 존 리스트 사건이 소재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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