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주신 분들께 안내드립니다.

검색어 쇼트쇼트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검색어 쇼트쇼트에 대한 글을 관련성을 기준으로 정렬하여 표시합니다. 날짜순 정렬 모든 글 표시

2015/01/27

서랍 속 테라리움 - 구이 료코 / 박의령 : 별점 3점

서랍 속 테라리움 : 신장판 - 6점
쿠이 료코 지음, 김민재 옮김/㈜소미미디어

"던전밥"으로 낙양의 지가를 올리고 있는 구이 료코(쿠이 료코)의 국내 첫 번역 출간작입니다. 200페이지를 갓 넘는 분량에 무려 33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2페이지에서 10여 페이지 남짓한 작품들의 분량을 볼 때에는 쇼트쇼트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네요.

참고로 쇼트쇼트, 쇼트-쇼트는 사전적인 의미로 원고지 10매 안팎의 아주 짧은 소설을 지칭합니다. 꽁트보다 더 짧은, ‘마이크로픽션’ 혹은 장편(掌篇)에 해당하는 형식입니다. 호시 신이치가 이 장르의 대가로 널리 알려져 있지요. 제가 무척 좋아하는 장르이기도 합니다.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을 뿐더러 의표를 찌르는 반전, "기묘한 맛" 류의 독특함 가득한 작품이 많을 뿐더러 평범한 일상 드라마는 물론이고 SF, 추리, 범죄 스릴러, 판타지 등 장르를 넘나드는 다양성이 마음에 들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특징은 호시 신이치나 아토다 다카시 같은 몇몇 쇼트쇼트 대가의 특징일 수도 있겠지만요.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도 이러한, 제가 알고 있는 쇼트쇼트의 특징이 가득한 작품들입니다. 정말 "기발하다"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독특한 아이디어를 보여주고 있거든요. 그중 인상적이었던 것을 몇 가지 소개한다면,

  • 자신을 멀리하던 사장 딸이 사실은 자기를 너무나 사랑하는 변화무쌍한 아가씨였다는 것을 타임머신 원리를 이용한 데이터 전송이라는 설정과 함께 전개하는 "연인 카탈로그"
  • 일 년에 한 번 용을 먹는 마을에서 여러 가지 용고기 요리(회에서 숯불구이, 국물요리까지!)를 즐긴다는 "용의 역린"
  • 주인공의 인사를 무시한 직장 동료에 대해 마음속에서 법정을 열어 재판을 통해 결론을 내린다는 내용을 아가씨의 귀여운 심리 묘사와 함께 선보이는 "대리 재판"
  • 애완동물 아기를 키우는 이야기로 짙은 여운을 남기는 "봄볕"
  • 왕따에 대한 인형극을 창작하다가 토끼 나라에 대한 거대한 서사극을 만들어내는 "머나먼 이상향"
  • 편의점 음식만 먹는 서민스러운 삶을 살던 친구가 프렌치 코스 요리를 먹고 난 뒤 요리에 대해 기이하게 평가하는 "특식"
  • 우연히 찾아간 산속 식당에서 주위 손님들이 파란만장한 행동을 펼친다는 "이런 산 속에"

등이 그러합니다. 전체적으로 유머러스하고 밝은 분위기의 이야기들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나저나, 이런 이야기를 창작할 때 아이디어를 어디서 얻는지 너무 궁금해지네요.

쇼트쇼트의 또 다른 특징인 다양한 장르를 펼쳐 보여주고 있다는 장점도 큽니다. SF, 판타지, 구루메(?), 기이한 법정물, 일상계 드라마에 러브 코미디, 심리 썰렁물까지 오만가지 장르를 오가거든요. 장르에 따라 작풍을 바꾸는 그림 실력도 높이 평가할 만하고요. 정통 판타지스러운 고풍스러운 펜화, 전형적인 순정만화 스타일의 작화, 그리고 평범한 스타일의 일상계스러운 그림 등이 장르마다 적절히 어우려져 보는 재미를 더해줍니다.

그러나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는 유명 거장의 작품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졸작이 의외로 많은 편인데, 이 단편집 수록작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모든 작품이 빼어나지는 않아요. 아주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건 아니고, 거장의 졸작보다는 볼 만한 작품이긴 합니다. 그러나 뻔한 아이디어, 뻔한 전개의 식상한 이야기들은 실망스러웠습니다. 예를 들자면 사랑을 알게 된 인공 두뇌의 이야기라든가 상위 문명에 납치당해 사육당하는 미녀의 이야기가 대표적이겠죠. 흔한 이야기로 작가만의 별다른 상상력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그래도 이 정도면 충분히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집이라 생각합니다. 제 별점은 3점입니다. 여러 가지 장르의 단편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군청학사" 시리즈가 떠오르는데, "군청학사"보다는 훨씬 짧은 호흡의 이야기로 여운은 짙지 않지만 스피디하게, 즐겁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차이점은 있습니다. 단편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2009/10/18

봇코짱 - 호시 신이치 / 윤성규 : 별점 3점

봇코짱 - 6점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지식여행

일본 플레이보이지 선정 "미스테리 - 철야본을 찾아라!"


일본 플레이보이지가 선정한 올타임 일본 미스테리 베스트100에 당당히 선정된 작품으로, 리스트를 접한 뒤 곧바로 구입한 책입니다. 호시 신이치 작품은 20여년전에 읽었던 "신선함을 드립니다" 이후에도 많은 단편 앤솔로지를 통해 접할 기회가 많긴 했지만 장단점이 너무 명확해서 선뜻 구입하기는 망설여졌었는데 제가 귀가 얇은 탓인지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이런 류의 리스트에 약해서 선뜻 지갑을 열게 되었네요.

하지만 작품은 역시나, 장단점이 너무나 명확한 호시 신이치의 전형적 작품들로 이루어진 책이었습니다.
장점부터 이야기하자면 뭐니뭐니해도 쉽고 빠르게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제일 크겠죠. 이른바 "쇼트쇼트"라는 콩트 형식으로만 수록 작품들이 이루어져 있기에 부담없이 접할 수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작가 특유의 의표를 찌르는 반전과 이른바 "기묘한 맛" 류의 독특함이 잘 살아 있다는 것, 마지막으로 SF, 추리, 범죄 스릴러, 판타지 등 다양한 쟝르를 선보이고 있다는 것을 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점도 명확합니다. 너무 많은 작품을 써내려가다보니 생긴 일이겠지만 유사한 분위기와 설정의 작품이 너무 많다는 것이 가장 큰 단점입니다. 작품의 주제도 "미지의 생명체에 대한 진상" 이나 "끝을 알 수 없는 인간의 욕망" 을 그린 작품이 대부분이기도 하고 말이죠.... 또한 뒷끝이 좀 허무하고 씁쓸한 작품도 적지 않다는 것도 다작의 탓이 아닐까 싶네요. 덕분에 작품들의 편차도 제법 큰 편입니다.

그래도 간만에 접한 쇼트쇼트 작품집으로 충분히 쉽고 재미있게 읽었기에 나름 만족합니다. 책도 아주 이쁘고 나와서 마음에 들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왜 "일본 미스테리 올타임 베스트 100"인지 도무지 모르겠네요. 모든 작품이 쟝르문학이긴 해도 추리 성향을 띈 작품은 정말 몇개 안되거든요. 저처럼 추리쪽을 많이 기대하고 읽으신다면 실망하시게 될 가능성이 높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 몇개를 소개합니다.

"봇코짱" - 표제작으로 바텐더가 만들어 가게 홍보에 사용한 미녀 로보트와 그녀에게 반한 남자, 그리고 예상을 깨는 결말을 다룬 이색 SF입니다. 굉장히 짤막한 쇼트쇼트임에도 너무나 단순한 남자의 마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것이 인상적이었어요.

"이봐, 나와!" - 한 마을에 생긴 끝을 알 수 없는 미지의 구멍, 그리고 그 구멍을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너무나 끝없이 사용하는 인류 앞에 섬뜩한 반전이 펼쳐지는 SF로 "일본 SF단편 올타임 베스트" 에 선정되기도 한 좋은 작품입니다.

"살인청부업자입니다" - 추리성향의 쇼트쇼트로 이색 살인청부 비즈니스에 대해 다루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범죄" 자체를 확인할 수 없고 때문에 "범죄"로서도 성립하지 않는 너무나 완벽한 살인청부 비즈니스! 주인공의 직업이 드러나며 밝혀지는 진상과 반전이 깔끔한 작품입니다.

"포위" - 누군가 나를 죽이려한다는 것, 그래서 그 배후를 쫓는 주인공을 그린 쇼트쇼트입니다. 스릴러물에 흔하게 등장하는, "위기에 처한 주인공"에서 시작해서 주인공이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까지는 뻔하게 흘러가는데 진상과 반전이 굉장히 이색적이더군요. 아주 현실적이면서도 통념을 깨는 결말이었거든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나를 죽이고 싶어한다" 는 것. 충분히 설득력있고 무서운 내용이었어요.

"더위" - "더위"를 참지 못하고 여름마다 곤충 등을 죽이며 겨우겨우 버텨온 남자가 나이를 먹으면서 죽음의 대상도 업그레이드 되어 간다는 내용의 작품입니다. "기묘한 맛" 류의 섬뜩한 느낌을 주는 작품으로 이러한 쟝르 전체를 놓고 따져보더라도 굉장히 높은 점수를 줄만한 명작이죠. 호시 신이치 작품 안에서도 손에 꼽을만한 작품이 아닌가 싶습니다.

"신년축하손님" - 친구의 어려움을 무시한 한 부자에게 친구가 마지막으로 "환생"을 언급한다는 이야기. 짤막하지만 무난한 수준의 반전이 깔끔해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친선키스" - SF와 SEX가 결합한, 농담같은 이야기입니다. 지구인과 흡사한 외모의 외계인들을 만난 우주선 승무원들이 지구의 인사라 속이며 키스를 난무하는데 결국 마지막이 되어서 알게되는 사실은 무엇일까요? 웃기면서도 황당한 결말이 아주 놀라운 작품이었어요.

"추월" - 과거 자신에게 버림받고 자살한 여인의 모습을 보는 한 남자. 추리물 성향을 띄고 있는 쇼트쇼트로 이른바 트릭이라 할 수 있는 자살한 여인의 정체가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된 작품입니다. 짤막하지만 복선도 확실해서 설득력도 풍부한 등 이쪽 쟝르물의 교과서적인 작품이라 생각되네요.

PS : 위 작품들 말고도 "이키가미"의 원조와도 같은 "생활유지청"이나 인간 욕망의 끝없음을 극명하게 드러낸 "거울" 같은 작품도 다른 매체에서는 걸작이라고 많이 소개하고 있더군요. 그 외에도 좋은 작품이 많이 실려 있습니다^^

2022/10/01

변덕쟁이 로봇 - 호시 신이치 / 윤성규 : 별점 1.5점

변덕쟁이 로봇 - 4점
호시 신이치 지음, 윤성규 옮김/지식여행

호시 신이치는 신선하고 기발한 아이디어를 핵으로 논리적인 줄거리와 함께 기상천외한 의외의 결말이 있는 초단편, 이른바 '쇼트쇼트'의 제왕입니다. 저도 좋아하는 작품을 여럿 발표했고요.

하지만 문제라면 워낙 다작이었던 탓에 작품들 수준이 일정하지 않다는 점입니다. 또다른 쇼트쇼트 거장 아토다 다카시와 비교해 보아도 호시 신이치 작품 수준 편차가 훨씬 큽니다. 그래서 국내에서 발표되었던 호시 신이치 쇼트쇼트 모음인 '플라시보 시리즈'도 쉽게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대체로 지뢰작 모음일 가능성이 높다는걸 알고 있었으니까요. 실제로도 그러했는지 시리즈는 금방 절판되고 말았지요. 그래도 이 시리즈 중 <<봇코짱>>은 괜찮은 작품이 많이 모여 있는,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 일컬어지고 있어서 인기가 많습니다. 저도 한 권 구입해서 소장하고 있으며 리뷰도 올린 적이 있는데, 소문대로 괜찮은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 <<변덕쟁이 로봇>>이 <<봇코짱>>과 더불어 최고의 작품집으로 선정하고 있다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확실한 근거라기 보다는 어딘가의 리스트에 국한된 선정이기는 하지만, <<봇코짱>>이 워낙에 괜찮았기에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절판된지 오래고, 인터넷 중고가가 비교적 높게 형성되어 있는 책이라 쉽게 구하지는 못했는데, 우연찮게 알라딘 온라인 중고 매물로 최상급 책이 정가의 절반 가격으로 등록된걸 발견하고 바로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쇼트쇼트 단편집답게 무려 50편이나 되는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중후반부까지는 전형적인 쇼트쇼트인데, 마지막 몇 편은 10 페이지를 훌쩍 넘기는 단편들이었고요. 수록작은 제목처럼 로봇이 등장한다던가, 과학자가 (대체로 F 박사나 N 박사) 이상한 약이나 기계를 만들거나 와계인이 이상한 장치를 가지고 벌이는 소동 등 SF 설정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조금 특이했던건, 엉터리 발명품이 오동작을 일으켜서 사고가 발생한다는 전형적인 이야기보다는 발명품이 생각대로는 작동하는 이야기가 많았다는 점입니다. 의외의 발명품으로 의표를 찌르거나, 아니면 생각대로 작동하는 탓에 문제를 일으키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전자는 화재를 없애기 위해 불이 있는 쪽으로 날아가는 새를 만들었는데, 태양으로 날아가버리고 말았다는 <<불조심>>, 자면서 학습이 가능한 수면 학습 베개로 배운건 잘 때만 효과가 있다는 <<신 발명품 배게>>가, 후자는 벌레잡는 풀꽃을 만들어냈지만, 먹이를 줘야 해서 벌레를 키워야 한다는 <<편리한 풀꽃>>, 소리를 없애는 장치를 만들어 도둑질을 하려고 했지만 비상벨과 경찰차 사이렌 소리도 없앤 탓에 체포되어 버리는 <<실패>>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발명품 이야기는 아니었지만 사람이 고양이를 돌보는게 아니라, 고양이가 사람을 노예처럼 부리고 있다는, 이른바 '집사' 분들의 현실을 (?) 유쾌하게 그려낸 <<고양이>>, 그리고 불사신이 되었다고 믿었지만, 정신만 살아있는 좀비가 되어버린 사람의 이야기인 <<뼈>> 는 꽤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생각되고요.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이야기 전개와 반전이 기발한 작품을 찾기 힘들었던 탓이 큽니다. 책 뒤 후기를 보니 어린 아이들을 위해 쓴 작품이 많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다소 유치하고 말장난같은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봇코짱>>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 이하의 작품들로, 고가로 구입하지 않은게 다행일 뿐입니다. 통상적인 중고가가 제가 구입한 가격보다 높기도 하니, 투자 개념으로 그냥 가지고 있어야겠습니다.

2014/01/13

민들레 소녀 - 로버트 F 영 / 조현진 : 별점 3점

민들레 소녀 - 6점
로버트 F. 영 지음, 조현진 옮김/리젬

전부 15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는 SF 단편집. "비블리아 고서당 사건수첩 3"을 읽고 읽게 되었습니다. 뭐 도저히 안 읽을 수 없게 소개를 해 놔서... 도대체 그 소녀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참고로 "비블리아.." 이전에 일본 애니메이션 "클라나드"에서 비중 있게 언급된 것을 계기로 되어 국내에 번역 출간되었다고 해설에서 소개해 주네요. 일본 SF 쪽에서는 그만큼 잘 알려진 작품이라는 뜻이겠죠?

여튼 각설하고, 이 책의 가장 대단한 점은 넓은 장르 범위를 커버한다는 점입니다. 작품의 폭이 넓은 작가야 스티븐 킹 등 이쪽 분야에서는 널리고 널렸습니다만, 모든 장르 자체를 섭렵하여 넘나드는 작가는 보기 드물지요. 킹의 코미디야 있다고 쳐도, 달달한 러브 스토리는 쉽게 연상이 되지 않잖아요? 그러나 이 단편집은 러브 스토리에서 시작해서 코미디, 풍자극, 정통 SF, 쇼트-쇼트 스타일 꽁트 등 다양한 장르로 가득차 있습니다. 어떤 작품에서는 젤라즈니의 문학적인 SF, 어떤 작품에서는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가, 어떤 작품에서는 아시모프의 묵직한 종교적 SF가, 어떤 작품에서는 레이 브래드버리의 블랙 유머나 '기묘한 맛'이 떠오르거든요.

보다 자세하게는, 달달하고 잔잔한 사랑 이야기로 딱 한 번 남은 시간여행을 어떻게 사용했는지에 대한 깜짝 반전이 괜찮은 타임슬립 SF "민들레 소녀", 유쾌한 결말이 돋보이는 깜찍한 SF 요정물(?) 코미디인 "프라이팬 조종사", 자본가들의 계획으로 단순 소비재인 자동차와 TV에 매몰되어 정작 중요한 것을 잃어가는 소시민들을 통해 자본주의를 비판 및 풍자하는 "21세기 중고차 매장에서", "팝콘 튀기는 TV", 종교적인 성찰을 다룬 "과거와 미래의 술""약속의 별", 문학의 중요성을 문학에 대해 잘 모르는 안드로이드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시인과 사랑에 빠진 큐레이터", "당신의 영혼이 머물 자리", 우주비행사의 고독을 일상계스러운 분위기로 굉장히 설득력 있게 그려낸 분위기 있는 정통 SF "별들이 부른다", 가벼운 쇼트-쇼트 스타일 콩트 코미디인 "파란 모래의 지구", "하늘에 새겨진 글자", "시계장치 오렌지"를 연상케 하는 끔찍한 마인드컨트롤 설정이 돋보이는 기묘한 맛 류의 "붉은 학교", 일종의 타임 패러독스 SF "시간을 되돌린 소녀" 등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수록작들의 완성도 역시 명성에 걸맞으며 책장도 쭉쭉 넘어가는, 쉽게 읽히면서도 독자의 흥미를 끄는 작품들이었어요.

하지만 지금 읽기에는 시대가 너무 많이 지난 듯한 느낌이 드는 작품도 많습니다. 유쾌한 꽁트나 코미디 쪽은 괜찮은데 종교적인 주제의 작품, 풍자적인 작품의 경우는 많이 낡아 보였어요. 종교적 색채가와 설교적 분위기가 과한 것도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고요.

아울러 전체적으로 독자에게 설명이 부족합니다. 여운을 많이 남기고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하고자 하는게 작가의 스타일로 보이지는 하지만, 남용된 느낌입니다.

그래도 완성도 높은 단편집임에는 분명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개인적인 베스트는 "민들레 소녀" , "프라이팬 조종사""붉은 학교"를 꼽겠습니다. "민들레 소녀"는 SF 장르물 중에서는 손 꼽을만한 멋진 러브 스토리이며, "프라이팬 조종사"는 기발한 상상력을 높이 평가하기 때문입니다. "붉은 학교"는 교육에 대한 서늘한 비판이 인상적이었고요. 다른 작품들도 괜찮은 만큼 읽기 편한 SF 장르물을 좋아하시는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참고로 이 책을 소개한 다른 창작물에 의해 접하고 흥미를 가지신 분들이라면, 와닿지 않을 작품이 제법 많다는 점은 꼭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2015/03/12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카렐 차페크 / 정찬형 : 별점 3.5점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 8점
카렐 차페크 지음, 정찬형 옮김/모비딕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를 처음 읽고 기대에 미치지 못해서 선뜻 손이 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왠걸, 전작보다 훨씬 나았습니다! 수록 작품 하나하나의 재미와 소설적인 완성도 모두 빼어난 수준이었어요. 또한 추리적 속성의 작품이 많은 것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진실과 정의란 무엇인가? 일상에서 왜 미스터리가 벌어지는가? 그 사이에는 어떤 차이들이 있는가?에 대한 질문에서 시작된 소설이라고 하는데, 그 덕분인 듯싶네요. 이전에는 알 수 없었던, 메이즈리크가 명탐정이라는 것도 잘 드러나 있고요.

아울러 책 뒤 소갯글을 보니, 차페크는 실험적인 소설을 쓰는 데 가장 완벽한 형식이 단편소설이라고 깨달았다고 하는데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단편도 그냥 단편이 아니라 호시 신이치와 같은 "쇼트쇼트" 스타일의 초단편들이 많은데, 제가 아주 좋아하는 장르라 무척 반가웠습니다.

수록 작품의 편차가 있는 편이고 지금 읽기에는 조금 낡은 이야기들도 있으나, 전체적으로 세대를 뛰어넘는 아우라를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단편집이었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작품 몇 개를 소개해봅니다. 쇼트쇼트 스타일이라 수록 작품이 워낙 많아 전부 소개하기는 어렵네요. 아울러, 아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는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발자국"

네 명이나 되는 사람의 발자국이 딱 한 지점에서 사라졌다는 수수께끼가 등장합니다. 그러나 내용은 이 수수께끼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고, 수수께끼와 현실 사이의 문제를 냉정하게 지적하는 바르토세크 반장의 독백 - "우리가 범죄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것이 미스터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불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악당을 쫓는 건 지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함이 아니라, 법의 이름으로 그들을 처벌하기 위해서입니다." - 이 핵심입니다.

때문에 좋은 미스터리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발상은 괜찮았습니다. 하기사, 경찰에게 상상력이 필요한 건 아니니까요.

"메이즈리크 형사의 어떤 사건"

메이즈리크 형사가 선배에게, 최근 금고털이를 체포했던건 사실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고 털어놓는 이야기입니다. 우연이 겹쳐 범인을 체포하는 과정이 코믹하게 전개되는데, 메이즈리크는 본인을 너무 폄하하는 것 같아요. 범인 신발에 묻은 "가루"를 인지한 것은(그것도 비 오는 상황이라는 걸 특정해서!) 분명 뛰어난 수사 능력이죠.

"푸른 국화"

희귀한 푸른 국화를 찾는 정원사의 활약을 그린 작품입니다. 마을 바보가 가져온 푸른 국화 뿌리에 묻은 흙의 종류와 잎에 묻은 이물질을 통해 "어딘가의 정원에 있을 것"이라 추리하는 장면에서부터, 마을을 전부 뒤졌지만 찾지 못했던 이유는 보행 금지 표지가 있었던 철로 건너편 경비원 관사에 피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결말까지 완벽한 일상계 추리물입니다. "바보는 글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에 통행 금지 표지판을 무시하고 건넜다"는 핵심 트릭도 좋았고요. 그 외에도 경비원과의 언쟁, 정원사의 일탈 등 재미있는 부분이 많은 작품입니다.

"점쟁이"

점을 쳐서 생계를 유지하는 마이어스 부인을 의심한 서장이 자신의 아내를 손님으로 위장시켜 수사에 나선다는 내용입니다. 마이어스 부인을 사기로 옭아매는 데는 성공하지만, 그녀의 점이 실제로 들어맞는다는 기묘한 블랙코미디 같은 반전이 돋보였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다소 예상 가능한 전개지만, 시대를 앞선 발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통력의 소유자"

필적만 보고 그 글을 쓴 사람에 대해 모든 것을 파악할 수 있는 초능력자가 등장하는 작품입니다. 초능력자를 시험하기 위해 검사가 자신이 맡은 사건의 냉혹한 살인범이 쓴 편지를 보여주는데, 능력자의 평가 결과가 너무나 정확해 깜짝 놀랍니다. 하지만 나중에 그 편지가 자신이 쓴 메모로 바뀌어 있었음을 깨닫고, 그 초능력자의 분석은 그냥 일반화된 이야기였다는 것을 알게 되지요.

여기까지는 흔한 초능력 격파물인데, 이후 전개가 흥미롭습니다. 검사는 그 초능력자가 묘사한 말들을 활용하여 실제 재판에서 유리한 결과를 이끌어내거든요. 이 정도면 호시 신이치 급의 쇼트쇼트 거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필적 미스터리"

아내의 편지를 전문가에게 필적 감정받은 기자의 이야기입니다. 자칭 전문가의 현란한 말에 휘둘려 이십여 년 동안 행복하게 살아온 아내를 의심하고 매도하게 되는데, 백여 년 전 이야기임에도 인터넷상 자칭 전문가나 SNS 루머 등으로 판단을 내리는 현재와 크게 다르지 않은 점이 인상 깊었던 소품입니다.

"도둑맞은 서류"

마카로니 통 안에 숨겨 놓은 비밀 서류 도난 사건을 다룹니다. 지역 경찰관이 일종의 DB 기반 추론으로 범인을 검거하는 독특한 수사 방식이 돋보이며, 동시에 속물적이고 유쾌한 블랙코미디 요소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보티츠키 가문의 몰락"

메이즈리크가 역사학자의 의뢰로 15세기의 수수께끼를 풀어내는 역사 추리물입니다. 두 남자의 죽음, 사라진 딸, 국왕으로부터의 처벌 등을 단서로 펼치는 추리는 꽤나 흥미롭습니다. 실화가 아니라 허구의 역사 속에서 전개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진리는 시간의 딸"보다는 브라운 신부 시리즈의 한 단편이 연상되더군요.

"영수증"

메이즈리크 반장이 등장하는 정통 추리물입니다.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가 발견되고, 단서는 전철 티켓과 영수증 뿐. 하지만 별 볼 일 없어 보이던 영수증을 통해 피해자가 중국 도자기 가게에서 산 물건을 추리해내고, 그 이유까지 밝혀냅니다. 도자기를 산 이유는 그것을 깨뜨렸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추리적으로는 흠잡을 데 없는 명작입니다.

다만 전개 면에서는 약간 아쉬움이 있습니다. 청자인 두 연인 민카와 페파, 그리고 화자인 소우체크의 이야기는 서사의 흐름에 꼭 필요해 보이진 않았거든요. 여운을 남기기는 했지만, 감정적으로 깊게 와닿지는 못했습니다.

"어느 배우의 실종"

천재 배우 얀 벤다가 실종된 사건을 다룬 작품입니다. 벤다의 친구인 의사 골드베르크가 탐정 역할을 하며 사건을 해결하는데, 벤다가 '메소드 배우', 즉 배역에 몰입해 자신을 바꿔가는 배우였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벤다가 부랑자 역할을 맡으면서 자신을 완전히 부랑자처럼 바꾸어 버린 탓에, 결국 시체가 부랑자의 변사체로 오인되었다는 것이지요. 지금 봐도 설득력 있는 설정과 흥미로운 아이디어가 빛나는 작품입니다.

"우체국에서 생긴 사건"

단돈 200코루나가 사라진 사건으로 감사관에게 적발당하고 자살한 불쌍한 우체국 직원 헬렌카의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입니다. 화자인 경감 '나'는 다음과 같은 정보를 통해 사건의 실체를 밝혀냅니다.

1. 헬렌카의 시선을 잠시만 돌리면 200코루나 정도는 쉽게 훔칠 수 있었다는 점
2. 시선을 돌리려면 전보나 소포를 보내야 했다는 점
3. 사건 당시 익명의 편지가 파르두비체에서 대거 발송되었다는 점
4. 파르두비체에 사는 우체국 아가씨와 교제 중인 감독관이 소포를 보냈고, 주소 오류로 반송되었다는 점

이 정보들을 바탕으로, 감독관이 애인을 자신의 근무지 근처로 전근시키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고, 애인이 익명으로 그 사실을 고발해 감사가 이루어졌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일상계 추리물로도 수준이 높고, 평범한 사람들이 행복을 꿈꾸며 벌인 일탈이 결국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씁쓸한 결말도 매우 인상 깊습니다. 지금 읽어도 전혀 낡지 않은 걸작으로, 별 5점은 충분한 작품입니다.

2023/01/23

사키 - 사키 / 김석희 : 별점 2.5점

사키 - 6점 사키 지음, 김석희 옮김/현대문학

국내 첫 출간된 영국의 쇼트쇼트 대가 사키 단편선. 무려 71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발표작 중 절반에 가까울 정도에요. 몇몇 작품은 이런저런 경로로 읽었었는데, 꽤 인상적이었기에 큰 기대를 가지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나쁘지 않았습니다. 시대를 앞서는 빛나는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들도 많고, 기묘한 맛 스타일로 서늘한 느낌을 담뿍 전해주는 반전물, 피식거리게 만드는 웃음 가득한 작품들도 다수 수록되어 있거든요. 몇몇 작품은 걸작이라 부를 수 있고, 번역도 좋습니다. '께느른하다' 같은 단어까지 사용한건 놀라왔어요. 열심히 사는 농부가 화가인 이복형을 보고 느끼는 감정인데, 몸을 잘 안 음직이고 게을러 보이는 상태를 잘 표현한 말이라 생각되네요.
하지만 아주 좋았다! 라고 말하기도 애매합니다. 대부분의 작품들 등장인물과 소재가 비슷하고 자가복제한 작품이 많은 탓입니다. 적당한 신분의 어떤 인물이 속물이거나 허영심 가득해서, 혹은 자기 자신만을 생각한 탓에 낭패를 겪는다던가, 부르주아적인 습성으로 타인을 대하다가 예기치못한 상황에 처한다던가하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입니다. 누군가가 고의적으로 한 거짓말로 문제가 발생한다던가, '소악마' 캐릭터의 원조격인 악동들이 어른들을 골탕먹이는 내용도 많아서 읽다보면 지루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지나칠 정도로 짜증나는 인물들 묘사, 지나친걸 넘어서는 과한 장난들은 거북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키우던 고양이가 아무리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고 해도, 고양이를 죽인 이웃집 아이를 돼지 먹이로 주려고 한다는 <<참회>>가 대표적입니다. 지나치다 못해 끔찍했어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정말 엄선된 몇몇 작품만 읽는다면 훨씬 좋았을 것 같습니다. 몇몇 기억에 남는 작품들은 아래와 같습니다.

<<깜빡 잊은 지명>>
길에 버려진 시체로 자신을 위장하려 한 남자가 살해당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사형 선고를 받은 뒤 털어 놓은 고백.
기상천외한 발상과 온갖 기묘한 상황이 펼쳐지는 전개는 흥미롭습니다. 주인공이 당장 체포되지 않는 이유가 그레이하운드들이 그를 쫓고 있고, 누가 먼저 잡는지에 대해 큰 내기가 걸려있었다는 묘사가 등장할 정도니까요.
하지만 화자가 자기가 사실은 죽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못했다는 결론은 좀 억지스러웠습니다. 지명을 잊어버린 것은 사소한 문제일 뿐, 생김새 등 모든 면에서 이미 가짜라고 드러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요.

<<사냥 자루>>
사냥 클럽을 이끄는 펠러비 소령은 후핑텅 부인의 숲에서 오랫만에 사냥을 이끌 계획이다. 그러나 후핑턴 부인의 조카딸 엘리자베스가 데려온 러시아 청년 블라디미르가 여우를 먼저 사냥해 버리고 마는데...
블라디미르의 사냥 자루가 눈 앞에 대롱대롱 매달러 있는 상황을 통해 긴장감과 서스펜스를 가져 오는 전형적인 작품. 굉장히 영국 부르주아스럽고 전형적이지만 긴장감만큼은 최고였습니다.
아쉬운 건 블라디미르가 잡은 건 사실 여우가 아니었다는 반전인데... 마지막에 슬며시 드러내는 것 보다는 조금 드라마틱하게 가져가는게 어땠을까 싶네요. 발표 당시에는 먹혔음직 하나 지금은 좀 낡은 방식이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생쥐>>
몸 속에 들어간 생쥐 때문에 시어도릭은 모르는 여자 앞에서 옷을 벗어야 하는 위기에 처하는데....
지금 보아도 괜찮은 반전이 돋보였던 작품. 앞에 앉은 여자가 장님이었다는 암시, 복선을 제공해 주었더라면, 그리고 긴장감을 조금만 더 높여주었다면 쇼트쇼트 역사에 길이 남는 희대의 걸작 중 한 편이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4점입니다.

<<토버모리>>
한 시골마을 저택에서 열린 파티에서, 참석자 중 한 명인 코넬리우스 에핀은 저택에서 키우는 고양이 토버모리에게 사람의 말을 가르치는데 성공했다고 말했다. 이는 곧바로 사실로 밝혀지지만, 토버모리가 그동안 보고 들은 사람들의 말을 폭로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은 당황해했고, 결국 코넬리우스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은 토버모리를 죽이는데 동의한다.
영국 부르주아들의 가식을 비웃는 풍자물. 뒷담화, 불륜 등 온갖 더러운 짓은 다 하면서 서로 만났을 때에는 고상한 척을 하는 가증스러운 상태를 말하는 고양이라는 소재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작품입니다. 참신한 아이디어와 유머러스한 전개도 돋보이고요. 코넬리우스가 코끼리에게 말을 가르치려다가 밟혀 죽었다는 결말도 깔끔했습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토버모리의 폭로가 기대만큼 화끈하게 이루어지지 못한다는 점인데, 발표된 시기가 시기이니만큼 이 정도가 한계였겠지요. 별점은 4.5점. 풍자 블랙 코미디계의 H.O.F (Hall of Fame)에 입성하기에 충분해 보입니다.

<<브로그>>
마을 최악의 말 브로그를 소유한 멀렛 가족은 수년간의 노력으로 새로 이사온 펜리카드 씨에게 드디어 말을 팔아치웠다. 그러나 펜리카드 씨는 멀렛 가족의 딸 제시에게 호감을 드러냈고, 가족은 브로그가 사고를 쳐서 그 호감을 없애버릴까 노심초사하게 되는데....
내용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기 가족)만 생각하는 가족의 이야기로 이 책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내용으로 그리 높은 평가를 할 만한 작품은 아니지만, 아래의 딱 한마디만큼은 기억에 남기에 소개해드립니다.
“펜리카드가 그 말을 타고 밖에 나가도록 내버려 두면 안 되는 건 분명합니다.” 클로비스가 말했다. “적어도 제시가 그 사람과 결혼해서 남편한테 싫증이 날 때까지는 안 돼요. "

<<허황된 이야기꾼들>>
잔돈푼을 구걸하려는 사람을 거창하면서 허황된 이야기로 단념시킨다는 이야기. 이야기는 뻔했지만 신사답게 구걸하는게 어떤 것인지 조금 알 수 있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샤르츠 메테르클루메 교수법>>
기차를 놓친 귀부인 칼로타가 자기를 가정교사로 착각한 부인을 따라가 그 집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는다는 이야기.
끔찍할 정도로 지나친 장난을 그리고 있는 소품으로 개그 콘서트에 어울릴법한 이야기였습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그래도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리치는 방법이라며 허풍을 떤 제목의 교수법 아이디어만큼은 괜찮았어요. 로마 고대사의 사비니족 여인 납치를 실제로 실연하는 식으로 아이들을 가리지거든요. 다른 방식으로 녹여내었더라면 더 괜찮은 작품이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싶네요.

<<맹점>>
에그버트는 삼촌 롤워스 경에게 대고모 할머니가 요리사 세바스티앙에게 살해당했다는 증거를 입수했다. 하지만 롤워스 경은 증거인 편지를 벽난로에 태워버렸다. “요리사로는 아주 비범하기 때문." 이라며...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 범죄물로 흥미롭게 전개되다가 마지막 한 마디로 극적 반전이 이루어지는 초단편 (쇼트쇼트)의 교과서 같은 작품.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참고로, 롤워스 경의 심정은 어느정도 이해가 됩니다. 대고모가 살해당한건 먼저 세바스티앙을 자극했기 때문이거든요. 그렇다고 살인이 정당화될 수야 없겠지만 컵에 든 커피를 얼굴에 끼얹은건 솔직히 심했습니다.

<<평화 장난감>>
전쟁 놀이에만 열중하는 아이들 교육을 위해 의회와 역사적 인물들 인형을 선물했지만, 아이들은 그 장난감을 가지고 또다른 전쟁놀이를 시작한다는 이야기. 다른건 모르겠지만, '평화 장난감'이라는 발상이 기발했습니다. 전쟁이나 파괴에 대한 장난감이 대세인 지금에도 먹힐만한 아이디어에요. 별점은 3점입니다.

<<크리스피나 엄벌리 부인의 실종>>
집안의 독재자였던 엄벌리 부인이 사라진 뒤, 남편은 매년 2천 파운드의 돈을 은밀하게 요구받았다. 부인을 돌려보내지 않는 조건이었다...
마크 트웨인의 <<붉은 추장의 몸값>>과 비슷한, 기발한 발상의 유괴극. 별점은 3점입니다.
그런데 부인이 사라졌는데 경찰이 나서지 않은 이유에 대한 설명이 부족했던건 조금 아쉽네요. 이런 상황이라면 엄벌리씨가 부인을 죽여서 마당 어딘가에 묻어버렸어도 무방했을 거에요. 차라리 그런 인상을 주면서 마무리하는게 더 낫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엉뚱한 침입자들>>
평생을 원수로 지낸 울리히와 게오르그는 함께 나무에 깔린 뒤, 해묵은 원한을 청산하고 친구가 되기로 하는데...
숲을 둘러싼 오래된 원한이 살의에까지 이르른 원수 두 명이 산중에 고립된 뒤 친구가 되기로 합니다. 그러나 둘은 구조대가 아니라 배고픈 늑대 떼들에게 둘러싸이고 만다는 반전이 인상적인 걸작 쇼트쇼트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메추라기 먹이>>
인기없는 상점에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주인은 연극을 펼치는데...
인기없는 마을 상점에 손님들을 끌어모으기 위해, 상점에 정체불명의 손님이 방문한 뒤 무언가 드라마가 벌어지는 것처럼 꾸민다는 이야기. 전략은 성공해서 마을 주부들의 호기심을 가게에 집중시키게 됩니다. 지금으로 따지면 SNS 를 활용한 페이크 다큐성 타겟 광고라고나 할까요? 시대를 앞서간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이었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임시 정원>>
정원 자랑하기 좋아하는 밉살스러운 이웃이 찾아올 때를 대비해 임시로 멋진 정원을 꾸며주는 서비스 업체가 등장하는 이야기.
결말은 다소 답답했지만, 역시나 독특한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 브루주아들의 허영심 비판에 딱 맞는 아이디어이기도 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달력>>
클로비스는 예언을 적은 달력을 18펜스에 팔 생각을 했다. 예언은 모두 일어날 가능성이 높은 애매한 것들이었지만, 조슬린이 사냥터에서 화를 당할거라는 예언은 성공하기 힘들어졌다. 조슬린이 절대로 말을 타지 않고 사냥터로 이동했기 때문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상당히 시대를 앞서간 상품 아이디어가 등장합니다. 애매모호하고 두루뭉실하게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사이비 점쟁이의 뻔한 수법을 특정 시기와 결합된 달력이라는 제품에 도입해서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거든요. 실제로 만들어 팔았어도 괜찮았겠다 싶을 정도로 좋은 아이디어였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불가피한 희생>>
천 파운드가 넘는 돈을 잃은 딸이 그 댓가로 홀어머니를 채권자 도박꾼과 결혼시킨다는 이야기.
다른 무엇보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부르주아 풍자를 잘 그려낸 소품으로 대단히 신선하거나 재밌다기 보다는, 주인공 딸이 이 책에 등장하는 속물 부르주아 중에서도 뻔뻔하기로는 첫 손가락에 꼽을만해서 기억에 남습니다. 별점은 2.5점.

<<네모난 달걀>>
1차대전 참호에서의 참혹한 전투를 겪는 병사들의 위안은 술집가 카페가 합쳐진 공간 '에스타미네'에서의 한 때였다. 그곳에서 나는 자칭 양계업자를 만났다. 그는 품종 계랑을 통해 자기 양계장 닭이 네모난 달걀을 낳게 하는데 성공해서 거액을 벌었지만, 전쟁에 끌려온 뒤 양계장을 운영하는 고모가 돈을 내놓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고 소송 비용으로 수십 프랑을 요구하는데....
'나'의 마지막 말이 깨는 반전의 맛을 가져다 주는 작품. 그는 휴가를 얻으면 '양계업자'의 고향에 가서 네모난 달걀 산업 현황을 확인하고 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하지요. 그러자 '양계업자'는 자기 말이 사실이라면 어쩔 셈이냐고 되묻습니다. 그리고 '나'는 대답하죠. "당신 고모님과 결혼하겠소" 별점은 3.5점입니다.
아울러 시키는 1차대전에 참전하여 전사했다는데, 그런 경력답게 굉장히 탁월한 참호 묘사도 눈여겨 볼 만 했습니다.

2021/09/03

리처드 매시슨 - 리처드 매시슨 / 최필원 : 별점 3점

리처드 매시슨 - 6점
리처드 매시슨 지음, 최필원 옮김/현대문학

호러, 장르 문학의 거장인 리처드 매시슨의 걸작선. 이전 '리처드 매드슨'이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단편집은 거의 모두 읽어볼 정도로 좋아하는 작가라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서 읽어보았습니다.

수록작들 대부분이 좋은 작품들이라 만족스러웠습니다. 무려 33편이나 되는 볼륨도 풍성하고요. SF, 호러, 범죄물, 드라마, 서스펜스 스릴러, 심지어 서부극까지 아우르는 장르적인 스펙트럼도 엄청나게 넓습니다. 전부 걸작이라고 보기는 힘들지만, 별점 5점, 4.5점, 4점의 걸작과 수작도 포함되어 있기에 전체 평균한 별점은 3점입니다.

작품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읽으시기 전 참고하세요.

그나저나 무슨 기준으로 선정된 작품들인지는 궁금하네요. 작가가 직접 선정한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지요. 이전에 읽었던 작품 중 분명 걸작이라고 생각했던 작품이 빠져있기도 하거든요.

"남자와 여자에게서 태어나다" 

흉칙한 무언가가 부모님에 의해 지하실에 쇠사슬에 묶여 갇혀 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2021년에 읽기에는 많이 뻔합니다. 괴물이 다음 번에는 지하실에서 탈출해서 사람들을 덮친다는 여운을 남기지만, 명확한 결말이 더 낫지않나 생각되고요. 별점은 2점입니다.

"사냥감" 

아멜리아는 애인에게 줄 선물로 기묘한 인형을 샀다. 인형을 구속한다는 금줄이 풀리자, 인형은 아멜리아를 죽이기 위한 공격을 시작하는데...

예전에 읽었던 작품입니다. 일종의 크리쳐물로 20cm밖에 안되는 나무 인형과 사투를 벌이는 묘사가 압권이에요. 시대가 흘렀어도 여전히 멋집니다. 

하지만 결말과 담고 있는 주제가 제 기억과 사뭇 달라서 의외였습니다. 아멜리아가 처참하게 희생된다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멜리아가 인형을 처단한 뒤, 스스로 사냥꾼이 되어 어머니를 죽이게 된다는 결말이더라고요. 착각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기억과 달라서 더 재미있게 읽은 것 같아요.

예전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었던 사회적인 메시지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미 장성해서 독립한 자녀를 구속하는게 살의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시사적이면서도 대가족에서 핵가족으로 넘어가던 시기였을 발표 시점에는 충분히 공포스러웠을 시의적절한 메시지였다 생각되네요. 이런 메시지를 돌직구로, 매력적으로 한 가운데 꽂아넣는 작가의 솜씨도 대단하고요.

단, 결말에서 어머니를 죽일 결심을 한 아멜리아가 문의 빗장을 쉽게 연 건 좀 안일했습니다. 인형에게서 도망칠 때에는 여러번 실패했던 걸로 묘사되니까요. 그래도 단점은 사소합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사회파' 크리쳐 호러라는 신경지를 장르 문학 초창기에 개척한 명작입니다.

"마녀 전쟁"

군에서 키우는 일곱 마녀가 쳐들어오는 적군을 마법으로 물리친다는 이야기로, 마녀들이 각자 특기로 소환한 불과 물, 거대한 암석, 사자 등으로 적을 잔혹하게 몰살시키는 묘사가 내용의 전부입니다. 단지 이런 파괴적인 묘사를 쓰고 싶었던게 아닌가 싶어요. 이외에는 기승전결이 있지도 않으니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그래도 파괴 묘사만큼은 확실히 볼 만 합니다. 예전에 읽었던 판본보다 번역이 훨씬 좋은 덕분이지요. 약간 일본 만화나 애니메이션 느낌도 드는데, 이런 설정으로 애니메이션을 제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군요.

"깔끔한 집" 

소설가인 나는 아내 루시와 함께 굉장히 저렴한 아파트로 이사왔다. 하지만 얼마 뒤, 아내는 아파트 지하실에 거대한 엔진이 있고, 관리인은 뒷통수에 눈이 달려있다는 말을 하면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나는 처음에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관리인을 미행하여 이 모든게 사실이라는걸 알게 되었다. 친한 이웃 필, 마지 부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함께 아파트가 이륙을 준비할 때 탈출에 성공하는데....

아파트가 로켓이라는 기상천외한 발상, 그리고 마지가 미치지 않았을까?라는 분위기를 풍기다가 그녀가 말했던게 모두 사실이라는게 드러나는 전개가 아주 일품이었던 SF 단편입니다. 서스펜스가 뭔지 제대로 보여줍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사실은 블록 전체가 우주선이라서 탈출이 불가능했다는 반전도 인상적이었고요. 외계인들이 지구인을 침략하는게 아니라 "빼앗는다"는 점에서는 "보디스내쳐"가 연상되기도 하네요.

독특한 설정, 아이디어와 함께 전개에서 긴장감과 흥미를 동시에 불러 일으키는, 작가의 장점이 잘 드러난 걸작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피의 아들" 

기묘한 아이 쥴스는 드라큘라가 되고 싶다는 망상에 빠졌다. 쥴스는 학교도 그만두고 배회하다가 동물원에서 흡혈 박쥐를 훔쳐내는데...

꽁트에 가까운 짤막한 단편으로, 분량과 흡혈 박쥐가 진짜 드라큘라였다는 반전으로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로 생각됩니다. 하지만 반전은 뜬금없었고, 리처드 매시슨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는 찾아보기 힘든 탓에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듭니다. 이야기에 대한 설명도 턱없이 부족합니다. 현재 이야기는 쥴스가 정신병자인지, 진짜 흡혈귀와 관련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더라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뜻이 있는 곳에" 

나는 잠에서 깬 뒤, 관에 갖혀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이게 적들의 수작이라고 믿은 나는, 관을 탈출하기 위한 갖은 노력 끝에 결국 관 뚜껑을 부수고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주유소에서 아내에게 전화를 거는데...

'나'가 관에서 탈출하기 위한 노력이 작가 특유의 긴장감 넘치는 묘사로 잘 그려져 있을 뿐 아니라, '나'는 이미 7개월 전 죽었고, 거울로 본 '나'는 썩은 시체였다는 반전이 굉장히 좋았던 작품입니다. "환상특급" 등의 원작으로도 잘 어울릴 이야기가 아닐까 싶어요. 1인칭에서 3인칭으로 시점 전환되는, 그래서 거울 속 모습에 좀비가 보이는 식의 카메라 워크가 곁들여지면 아주 멋지지 않았을까요?

재미와 충격 외에는 설명이 부족하다는 단점이 있기는 하나 사소합니다. 얼마 전 읽었었던 좀비물 앤솔러지에 수록되었던, 흔해빠지고 수준 이하였던 작품들 보다는 몇 배 뛰어난 작품입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사막 카페"

밥과 진 부부는 여행 중 우연히 사막에 위치한 카페에 들렸다. 진이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밥이 사라져 버리고 마는데...

외딴 마을에서 맞이한, 남편 밥의 실종과 그에 따른 위기 의식을 극명하게 드러내는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여행하던 외지인이 외딴 마을에서 겪는 위기를 그린 작품은 많습니다. 저도 많이 읽어보았고요. 이전 스티븐 킹의 "밴드가 엄청 많더군" 리뷰에서 언급했던 적도 있는데, 보통은 외딴 마을의 기묘한 집단 광기를 그리곤 하지요. 그러나 이 작품은 단순한 범죄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정통 범죄물로, 궁지에 몰린 피해자 진의 심리 묘사를 통해 순수한 공포, 서스펜스를 극대화한다는 점이 차이점입니다.

희생자를 화장실에서 납치하는 것에 불과한 단순한 범죄인데다가, 보안관 등장 후 별다른 위기없이 깔끔하게 해결된다는 건 조금 아쉽지만 단점은 사소할 뿐입니다. 장르물이 주어야 할 요소가 무엇인지를 꿰뚫고 제대로 달려주는 수작이기에 별점은 4점입니다.

"위조지폐"

생계에 지쳐 일탈을 꿈꾸던 윌리엄 O. 쿡씨는 복제인간을 만드는 장치를 개발합니다. 복제인간에게 온갖 귀찮은 일을 시키고 자신은 놀 생각으로요. 그러나 쿡씨의 복제인간답게, 복제인간도 놀고 싶어해서 결국 복제인간이 급증하게 된다는 블랙 코미디 콩트입니다. 전형적인 쇼트쇼트 물이기도 하고요. 설정은 재미있는데 기계가 폭발하고 복제인간이 그냥 사라져 버렸다는 결말은 시시했습니다. 뭔가 반전이 있었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싶어요. 별점은 2점입니다.

"유령선" 

로스 선장과 메이슨, 미키는 외계 행성에 착륙했다. 우연히 목격한 인공물의 정체를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들이 추락한 우주선으로 밝혀진 인공물 속에서 발견한 건, 그들 세 명의 시체였다...

일행들이 자기들의 시체를 목격하고 느끼는 공포와 현재 상황에 대해 어떻게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노력이 잘 그려진 SF 단편입니다. 

그러나 자기 시체를 발견한 사람이, 자기는 이미 죽었고 시체를 바라보는 자신은 유령이라는 걸 깨닫는다는 결말은, 발표 당시였다면 모를까 지금 읽기에는 다소 낡은 설정입니다. 제목부터가 스포일러이기도 하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시체의 춤" 

대학 신입생 페기는 나쁜 선배들에게 이끌려 법적으로 금지된 루피 춤을 보러 갔다가 충격에 기절하고 마는데...

세기말 감성이 살아있는 독특한 SF. 예전에 읽었던 작품인데, 그 때와 평가는 거의 동일합니다. 페기 시점으로 묘사된 광란의 루피 춤 공연 묘사는 아주 좋습니다. 순진한 신입생이 거부하고 싶은 방탕과 쾌락도 끔찍하게, 그러면서도 잘 그려내고 있고요. 일종의 좀비인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의 발작을 '춤'이라고 이름 붙여 공연한다는 끔찍한 아이디어도 돋보였습니다.

그러나 페기도 잘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방탕함에 빠져버린다는 듯한 결말은 별로였습니다. 이 결말이 루피 춤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페기가 루피 바이러스 희생자가 되었다던가, 같은 반전이 필요했습니다. 지금의 결과물만 놓고 보면, '호기심으로 좀비를 보러 갔다 왔다. 무서웠다." 정도의 이야기일 뿐이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몽둥이를 든 남자" 

타임스퀘어에 온 몸이 털로 덮이고 몽둥이를 든 원시인 같은 남자가 나타났다. 출동한 경찰이 총을 쏴서 겨우 원시인을 제압했다.

조금 무식하고 무례한 젊은 마초 양아치 1인칭 대화체로 진행되는 이야기인데 화자 설정도 진부했고, 결말도 뻔했습니다. 핵심은 원시인이 온 곳이 '미래'였을 수도 있다는 건데, 미래에 문명이 퇴화할 거라는 설정의 이야기는 고전 "타임머신"을 비롯해서 너무 많으니까요. 조금 지적인 노인네를 '빨갱이'라고 지칭하는 부분에서 시대가 느껴지기는 했지만 다른 부분은 딱히 건질게 없더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버튼, 버튼" 

영화까지 나왔던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부부 사이도 서로 모른다'는 걸 드러내는 작품입니다. 기묘한 설정에 더해 서늘하고 섬찟한 느낌과 반전이 있는, '기묘한 맛'류의 쇼트쇼트입니다. 예전에 읽었을 때에는 박한 평을 했었는데, 지금 다시 읽어보니 '기묘한 맛' 류로는 손에 꼽을 만한 좋은 작품이네요. 왜 나쁜 평가를 했었을까요? 별점은 4.5점입니다.

"결투" 

스티븐 스필버그의 극영화 데뷰작의 원작으로도 잘 알려진 작품. 격렬한 카 체이스를 어떻게 글로 묘사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있다면, 모범 답안이라고 해도 좋을 작품입니다. 주인공이 트럭에 쫓기면서 느끼는 공포와 긴장감 등이 아주 잘 드러나 있으니까요.

그러나 트럭 운전사의 분노가 잘 이해되지는 않고, 마지막 트럭의 최후가 너무 뜬금없다는게 아쉽습니다. 확실한 급커브였다던가 등 속도를 반드시 줄여야 했다는걸 설명해 주었더라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심판의 날" 

루크는 심부름을 왔다가 목이 잘린 과부 블랙웰의 시체를 발견했다. 그녀의 아들 짐은 시체를 본 뒤, 극심한 공포로 광란 상태였다. 루크의 아버지 샘은 현장 조사를 통해 과부가 아들을 의도적으로 미치게 만들었다는 증거를 찾아냈다. 그녀는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에, 남편을 죽게 만든 (물에 빠진 아들을 구하려다가 죽었음) 아들을 증오했었다....

과부 블랙웰이 증오심 때문에 의도적으로 아들 짐이 자신이 없으면 미쳐버리도록 차근차근 준비한 뒤,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결말이 놀라운 작품입니다. 미스터리와 서스펜스, 끔찍한 공포가 짧은 분량 안에 모두 포함되어 선명하게 드러나는 걸작이에요. 블랙웰 부인이 목을 멘 칼이 어디 갔을지?에 대한 부분이 설명되지 않은건 약간 아쉽지만, 단점은 미미한 수준입니다. 별점은 5점입니다. 이 단편 하나를 읽은 것 만으로도 돈이 아깝지가 않네요.

덧붙이자면, 엄청난 의지로 저지른 자살이라는 설정은 크리스티 여사님의 걸작 심령 서스펜스 호러물인 "네번째 남자"가 살짝 떠오르기도 합니다. 이 작품도 시대를 앞서간 걸작이었지요.

"죄수" 

1944년, 비밀 연구소에서 핵분열을 연구하던 핵물리학자 필립 존슨은 폭발 사고 후 눈을 뜨자, 자신이 2시간 뒤 사형당할 1954년의 사형수 존 라일리 몸 속에 들어와 있다는걸 알게 되는데...

핵폭발이 시공을 초월할 수 있다는 SF적인 발상을 담은 심리 서스펜스 스릴러입니다. 과연 필립 존슨이 자신이 사형수 존 라일리가 아니라는걸 2시간 안에 증명할 수 있을까?가 서스펜스의 핵심이고요.

그러나 필립 존슨의 노력은 신부를 한참 설득하다가 아내 전화번호를 주는 것 뿥입니다. 그 외에는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요. 덕분에 긴장감이 급격하게 떨어집니다... 신부가 그의 아내가 실존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하며 마무리되는 결말도 애매했습니다. 진짜 필립 존슨의 아내가 없었는지, 아니면 신부가 귀찮아서 거짓말을 한 건지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필립 존슨이 모든걸 체념하는 마지막 장면은 영 별로였습니다. 곧 죽을 상황인데, 어떻게든 발버둥 쳐 봤어야죠..

아이디어, 설정은 좋았지만 끌고가는 힘이 부족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하얀 웨딩 드레스" 

세상을 떠난 엄마 드레스에 푹 빠진 아이가 친구에게 몰래 엄마 방과 드레스를 보여주다가 폭주한다는 내용의, 미치광이 1인칭 시점으로 그려낸 혼란스러운 심리극입니다.

그런데 익히 보아왔던 설정과 내용이라 진부합니다. 더 큰 문제는 여백이 많아서 완성된 이야기로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고요. 엄마는 못생겼고 드레스도 피투성이에 총 구멍이 나 있었다는게 살짝 드러나기는 하지만, 아이가 친구를 죽였는지, 엄마 사인은 무엇인지, 아이는 지금 어디 갇혀서 어떻게 된건지 설명되지 않는게 너무 많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발"

더운 여름날, 조는 기묘한 손님을 맞아 이발을 해 주었다. 손님은 손톱이 계속 자란다는 등 혼잣말을 읆조리고, 역한 냄새가 났다...

손님이 죽은 사람이었다는건 에상 가능했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 읽기에는 너무 낡은 설정이네요. 주머니에서 손을 꺼냈을 때 흙이 떨어진게 아니라, 손은 뼈 밖에 없었다고 하는게 좋지 않았을까요? 신선하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았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2만 피트 상공의 악몽" 

윌슨은 출장을 위해 탑승한 비행기 창문을 통해, 괴물이 비행기 날개 위에 앉아 있는걸 발견했다. 괴물은 다른 사람이 나타나면 숨어버려서 윌슨 눈에만 보였다. 비행기 엔진을 부수려고 시도하는 괴물을 막기 위해서, 윌슨은 비행 중인 비행기 문을 여는데...

영화판 "환상특급" 에피소드로도 잘 알려져 있는 작가의 대표작 중 하나로, 비행기를 타는 것에 대한 공포심, 신경증을 '날아가는 비행기 날개에 앉아서 나를 바라보는 괴물'로 형상화한 아이디어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윌슨이 커튼을 열고, 비행기 창문을 통해 자기를 노려보는 괴물을 처음 보는 장면 묘사는 정말이지 압권이에요. 비행기 안에서 담배를 피우고, 총을 가지고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등의 묘사에서는 시대를 느낄 수 있고요.

괴물에게 결국 총을 쏜 윌슨이 승객들에게 제압 당한 뒤 비행기 착륙 후 옮겨지는 결말은 다소 시시하지만, 아이디어와 묘사력이 발군이기에 추천하지 않을 수 없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례식" 

클루니스 장례식장 장의사 모튼 실크라인에게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찾아와서 최고급 장례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는 고인이 자신이라고 말했고, 장례식 날에는 하인인 곱추 이고르, 마녀, 늑대인간과 다른 흡혈귀들이 찾아 오는데...

드라큘라를 연상케하는 뱀파이어 루트비히 아스페르가 스스로의 장례식을 치룬다는 블랙 코미디로, 마지막에 다른 괴물 손님이 찾아온다는 반전도 좋아서 '쇼트쇼트'로는 더할나위 없었던 작품입니다. 장례식에서의 소동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한 것도 좋았고요. 작가의 다른 작품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른데, 코미디의 정체성이 잘 살아있어서 놀랐습니다. 거장은 뭘 써도 거장인 법이겠지요? 오래 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역시나 그 때도 좋은 평가를 했었네요. 제 별점은 4점입니다.

"태양에서 세번째" 

우주 비행사가 세계 멸망을 앞두고, 다른 행성으로 처자식과 이웃 사람들까지 우주선에 몰래 태우고 출발했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태양에서 세 번째 행성이었다...

화자인 우주 비행사와 그 가족들이 다른 행성으로 떠나기 전 겪는 마음 속 불안과 혼란을 그리다가, 마지막에 그들이 있던 곳이 지구가 아니라 향한 곳이 지구라는 반전이 등장하는 짤막한 쇼트쇼트. 일종의 서술 트릭물이라고 해도 되겠네요. 쇼트쇼트로서는 우수한 수작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최후의 날" 

최후의 날을 맞아 음주, 난교, 광기어린 파괴 행위 등을 즐기던 리처드는, 가족의 소중함을 께닫고 마지막 순간을 어머니와 함께 보내려 한다.

리처드가 어머니와 함께 최후의 순간을 맞으며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걸 깨닫는다는 드라마. 여동생 가족이 죽음을 택하기 위해 약을 먹는 장면은 찡하면서도 괜찮았지만, 그 외의 내용은 전반적으로 평이했습니다. 소설보다는 "환상특급"과 같이 영상물에 더 잘 어울렸을 것 같습니다. 그래도 이런 이야기도 나쁘지 않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장거리 전화" 

몸이 불편한 미스 킨에게 어느날 한 밤중, 폭풍우가 불어올 때 전화가 걸려왔다. 그러나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 뒤에도 전화는 계속 걸려왔고, 속삭임과 단조로운 흥얼거림에 이어 상대방으로부터 '여보세요'라는 목소리까지 들려오게 되었다. 전화 회사의 조사 결과 이 전화는 묘지에서 걸려온걸로 밝혀지는데...

정체 모를 전화가 계속 걸려온다는건 충분히 공포스러운 일이지요. 이런 설정의 이야기는 많이 있는데, 아쉽게도 이 작품은 다른 이야기만큼 공포스러운 상황을 잘 살리지 못했습니다. 일단 미스 킨의 불안부터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았어요. 간호사의 말대로 전화를 그냥 끊던가, 수화기를 내려 놓던가, 전화선을 뽑아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제가 댁으로 갈게요." 라는 마지막 전화 목소리로 알려주는 결말은 괜찮았습니다만, 묘지에서 걸려왔다는게 드러났을 때 이미 예상할 수 있었습니다. 설득력 낮은 진부한 이야기라 별점은 2점입니다.

"데우스 엑스 마키나" 

행복한 가정의 아빠인 회계사 로버트 카터는 어느날 면도를 하다가 깊숙하게 베였다. 그리고 상처 속 전선과 기계 장치를 보고, 자기가 로봇이라는 걸 깨달았다. 충격에 거리를 배회하던 카터는 도시가 로봇들로 가득차 있었고, 음식들도 모두 기름이었다는 걸 알아 채는데...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통상적인 의미, 즉 이야기를 모두 해결해 버리는 전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사전적 의미인 "기계 장치의 신"에서 가져온 이야기라는게 독특하네요. 내가 내가 아니라 다른 존재일 수 있다는 흔한 설정을 독보적인 로버트 카터의 심리 묘사로 차별화시킨 솜씨도 거장다왔으며, 이야기를 풀어내는 전개도 괜찮았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로버트 카터가 진짜 로봇인지, 아니면 죽은 뒤 환상을 보는 건 지 알 수 없는 애매한 열린 결말은 좀 아쉬웠습니다. 보다 명확한 설명이 뒤따르고 반전도 있는 결말을 기대했거든요. 물론 로버트 카터가 쓰러지면서 떠올리는 성경 구절 - "하느님이 이르시되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의 사람을 만들고..." - 은 그가 기계라는걸 연상케 합니다만, 명확하게 증명된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기계라고 한다면, 그들을 만든 '하느님'이 누구인지도 설명이 필요해 보였고요. 그래서 제 별점은 2.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자신이 기계라고 믿는 주인공 이름이 '로버트'라는게 의미심장하네요. 우리나라로 변주한다면 '노보두 씨' 정도로 부르면 되겠지요?

"기록적인 사건" 

가방끈 짧은 쉰 아홉살의 대학교 건물 관리인 프레드는 어느날 아침 잠에서 깬 뒤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게 되었다. 대학교 건물 청소 및 수리를 하면서 대학의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되는데....

갑자기 모든 지식을 머릿 속에 넣게 된다는 독특한 설정과 그 이유가 인상적이었던 소품. 외계인들이 지구의 지식을 손에 쉽게 넣고자 프레드 머릿 속에 대학교 지식을 집어 넣은 뒤 그걸 한 방에 빼 먹은 것이지요. 한마디로 프레드를 일종의 외장 하드로 사용한 셈입니다. 좋은 쇼트쇼트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안에서 죽다" 

돈과 베티 부부에게 '돈 타일러'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돈은 자기는 돈 마틴이라고 주장히먀 화를 냈지만, 전화를 건 사람은 돈을 죽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날 밤, 누군가 부부의 집에 침임했고, 돈을 제압한 침입자는 돈이 저질렀던 과거 범죄와 배신에 대해 추궁하는데....

과거 저질렀던 범죄에서 발을 빼고,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온지 10년 만에 위기가 찾아온다는 서스펜스 범죄물. 돈이 침입자인 심슨과 사투를 벌인 끝에 그를 죽이고, 모든걸 알게 된 아내 베티가 경찰에 빈집털이가 들어와 싸우다 사고가 났다고 신고하는 결말까지 깔끔했던 작품입니다.

그러나 긴장감은 약한 편입니다. 악당 심슨이 침입한 뒤 하는게 없는 탓이에요. 총으로 부부를 위협하고, 과거 이야기를 떠벌이는게 전부거든요. 서스펜스를 끌어올릴 한 방이 필요했습니다. 코넬 울리치가 썼더라면 훨씬 멋진 이야기가 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정복자" 

1871년, 그랜트빌 잡화상 주인인 나는 남북전쟁 때 죽은 아들 루와 닮은 젊은 청년과 역마차를 함께 타게 되었다. 알고보니 그는 그랜트빌 최고의 총잡이와 싸울 목적이었다. 라이커라는 청년은 그랜트빌의 총잡이 바스 셀커크를 깔끔하게 사살했지만, 습격해 온 셀커크의 부하들에게 난사당해 허무하게 죽고 말았다...

"용서받지 못한 자" 느낌이 드는 현실적이면서도 허무한 서부극입니다. 라이커 캐릭터가 아주 인상적이에요. 서부극 총잡이들이 영웅이 아니라 허깨비라는걸 잘 보여주거든요. 어릴 때 부터 총잡이를 동경하여 연습을 거듭한 끝에 빠른 속사와 사격술을 익혔지만, 정신적으로는 애와 다름없는 철부지로, 1대 1 결투에서는 이겼지만 여섯 명의 악당이 습격하자 울며 애원하다가 총에 맞아서 꼴사납게 죽기 때문이지요. 풍자적이면서도 현실 비판적인 느낌이 좋았던 작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홀리데이 맨" 

데이비드는 아내의 성화에 못 이겨 내키지 않는 출근길에 나선다...

데이비드가 출근을 하기 싫어했던 이유는 그의 직업이 끔찍했던 탓입니다. 그는 사람들의 죽음을 미리 지켜보고, 사망자 수를 예측하는 일을 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가장 중요한 데이비드의 심리 묘사가 그닥이었고, 업무의 끔찍함도 잘 드러나지 않는게 단점입니다. 이 업무가 아무리 끔찍해도 누군가 해야 한다는 당위성도 느끼기 어려웠고요. 전개가 밋밋하고 반전도 그닥이었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분명 예전에 읽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은걸 보면 예전에도 별로 인상에 남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뱀파이어란건 없다" 

루마니아에 있는 작은 마을 솔타에 사는 게리아 부인은 어느날 밤, 누군가의 습격으로 목을 물어 뜯겨 피를 빨린채 발견되었다. 게리아 박사는 다음날부터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부인을 지켰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결국 게리아 박사는 후배 미카엘 바레스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

크리쳐 호러물로 시작해서 깔끔한 범죄물로 마무리되는 작품입니다. 왜 범죄물이냐 하면, 뱀파이어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게리아 박사가 커피에 아편을 타서 아내를 재운 뒤, 목에서 피를 뽑아냈던 거지요. 이유는 그녀가 후배 바레스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이었고요. 마지막은 바레스가 뱀파이어인 것 처럼 꾸민 뒤, 그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을 거라며 마무리됩니다. 

기발한 소재와 불륜에 대한 복수라는 동기, 의외의 반전, 내용은 모두 합리적으로 설명되며 비교적 짤막한 분량이라는 점 등 전형적인 미국식 쇼트쇼트의 특징을 모두 갖춘 작품입니다. 트릭도 조금 유치했지만, 뱀파이어 전설이 살아있는 루마니아라는 설정이라서 나름 설득력있고요. 너무 전형적이라서 작가 특유의 긴장감은 찾아보기 힘들다는게 조금 아쉬웠지만, 좋은 작품이었어요. 별점은 3점입니다.

"깜짝 선물"

늙은 호킨스 씨는 집 앞을 지나는 어린 소년들을 부르곤 했다. 소년들에게 "땅을 파면 깜짝 선물을 찾을 수 있다는" 주문을 알려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던 어느날, 어니에게는 주문이 아니라 정확하게 어디를 파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깜짝 선물이 금괴라고 확신한 어니와 친구들은 그 곳을 파기 시작했다...

당연히 선물이 뭔가 나쁜거라는 짐작은 되지요? 어니가 찾은건 일종의 관이었고, 그 안에서 호킨스 씨가 튀쳐 나온다는게 결말입니다. 그러나 결말의 반전은 약했으며 설득력도 없고, 동기도 불분명한 등 설명까지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어니가 땅을 파게 만드는데 까지의 전개는 좋았는데 아쉽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산타클로스를 만나다" 

켄은 산타클로스를 만나고 싶다고 떼를 쓰는 아들 리처드와 함께 다시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내 헬렌은 차에 남겨둔 채였다. 사실 켄은 이 기회를 빌어 헬렌을 죽일 생각으로 살인청부업자에게는 돈을 지급했었다. 그러나 산타클로스를 만나러 가는 동안, 그는 죄책감, 양심 등으로 심하게 갈등하는데...

아내를 죽이려고 하지만, 실제로 실행하는 순간이 되자, 켄이 겪는 극심한 마음 속 갈등과 혼란이 핵심인 심리 스릴러. 심리 묘사가 아주 빼어나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긴장감을 느끼게 만드는 심리 묘사야 말로 작가의 특기 중 특기지요. 살인과 극명히 대비되는 크리스마스, 산타클로스라는 소재를 적절히 사용하고 있는 것도 좋은 아이디어로, 특히 '착한 일을 해야 선물을 받는다'는 산타클로스와의 약속을 결말에서 제대로 써 먹고 있습니다. 결국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켄의 삶이 조금 더 비참해 졌다는 결말이니까요. 켄은 선물 (아내의 죽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뜻으로 읽히는데, 현실적이기도 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 4점은 충분한 수작입니다.

그런데 아주 오래전, 강남길 씨가 아내를 죽이려고 노력하던 TV 단막극이 떠올랐습니다. 특히 켄과 리처드가 많이 걷지 않아도 되도록 차를 옮겨 놓겠다는 아내의 말에 켄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장면에서요. 하지만 강남길 씨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었지만, 켄에게는 지옥이 열릴 거라는 결말은 천지차이이기는 합니다만, 이런게 미국과 한국의 감성 차이인지도 모르겠네요.

"춤추는 손가락"

장거리 버스 여행 중 내 앞에 앉은 여성은 장애인이었다. 그녀는 옆에 앉은 돌보미 여성에게 끊임없이 수화로 이야기를 건넸다. 그러다가 장애인 여성이 내 자리를 빼앗았고, 어쩔 수 없이 원래 그녀 자리에 앉은 나에게, 옆자리 돌보미 여성이 해준 이야기는 자신과 장애인 여성에 대한 이야기였다...

수화로 수다를 떨 수 있다는 발상에서 시작해서, 장애인 여성의 수화 수다로 돌보미 여성이 그녀를 벗어나고 싶어했고, 돌보미를 놓아주기 싫었던 장애인 여성이 괜찮은 남자를 물색해서 노리개로 던져준다는, 일종의 '남자 사냥' 으로 이어가는 전개가 자연스럽고 좋았던 작품. 아이디어 발상에서부터 시작해서, 하나의 이야기가 완성되기까지의 전 과정을 체험한 느낌이 드는 독특한 작품이었어요.

하지만 마지막에 남자를 유혹하던 여성이 갑자기 식어버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원래대로 돌아간다는 결말이 너무 허무하네요. 남자 사냥은 돌보미를 바꾸기 위함이었다던가, 아니면 최소한 남자를 잡아 먹기라도 했어야지요. 지금은 기승전까지는 흥미롭고 재미있는데, 결이 너무 급작스럽고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벙어리 소년" 

시골 마을에 살던 닐젠 부부가 화재로 죽고, 부부의 아들 팔은 보안관 해리와 코라 부부에게 위탁되었다. 학교도 다니지 않고 말도 못했던 팔을 코라는 사랑으로 돌보고, 죽은 자기 아들 대신으로 여겼다. 그래서 코라는 남편이 시도했던 닐젠 부부 지인에게의 연락을 훼방놓았다. 그래서 닐젠 부부가 죽은 뒤 한참 뒤에야 부부의 지인 베르너 교수가 팔을 찾아 왔다. 그러나 그 사이, 학교를 다녔던 팔은 그가 가졌던 독특한 텔레파시 능력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팔은 벙어리가 아니라 부모의 텔레파시 교육을 받았던 텔레파시 능력자였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말을 할 필요가 없었고, 부모는 텔레파시 능력이 훼손될까봐 특정한 이미지, 단어로 설명되는, '말'을 익히는 학교에 보내지 않았던 겁니다. 단어로 이루어지는 교육이 한계가 있다는 발상은 꽤나 시대를 앞서간 느낌이에요.

그러나 이야기 자체는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닐젠 부부의 사고, 코라가 팔을 양자로 들이고 학교에 보낸 것, 베르너 교수의 방문 등 여러가지 사건이 두서없이 펼쳐지는 탓이 큽니다. 닐젠 부부가 죽은 화재 사고의 원인도 결국 밝혀지지 않고요. 또 팔을 학교에 보내지 않은건 엄연한 아동 학대입니다. 팔이 가진 능력이 대단하고 아름답다고 포장할 이유도 없어요. 실상 대단한 능력이 아니라 그냥 말 없이 생각으로 의미를 전달하는게 전부인데, 이러느니 말로 하는게 더 낫잖아요? 근거리에서만 가능한 듯 싶으니 결국 신문이나 방송을 접하려면 글을 익혀야 하는건 당연하고요. 왜 이렇게까지 팔을 옭아맸어야 했는지 잘 모르겠네요. 마찬가지 이유로 현실 학교 교육이 팔의 정신을 좀먹는다는 묘사도 불필요했습니다. 

팔이 말을 하기 시작해서 텔레파시 능력이 사라졌다는 결말도 맥빠집니다. 어차피 대단한 능력이 아니었으니, 그렇게 아쉬운 일로 느껴지지 않으니까요. 팔에게는 코라의 사랑이 더욱 필요했으니, 앞으로는 행복해질 일만 남아 있을테고요.

차라리 '사랑은 말이 없어도 알 수 있는 감정이다'는 이야기 속에 숨어있는 멋진 설정을 더 부각시키는 쪽으로 갔더라면 어땠을까 싶네요. 팔이 능력의 편린을 유지한채 성인이 되어 여자 마음을 잘 아는 능력자가 된다는 식으로요. 지금은 설정, 이야기가 따로 노는 느낌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충격파" 

교체를 앞둔 교회 오르간이 폭주해서 교회를 파괴한다는 내용의 작품.

늙고 낡아버려서, 사랑했고 필요로 했던 것으로부터 배척당하고 교체되는 것에 대한 공포를 그렸다고 봐도 되겠지요? 그런데 딱히 와 닿지는 않았습니다. 공포를 자아내는 맛이 부족한 탓이 큽니다. 파이프 오르간의 폭주는 상식적인 선에 그쳐서 크리쳐물로 보기도, 재난물로 보기도 어려운 애매한 작품이 되어버렸어요. 예전에 읽기는 했었는데, 기억에 남아있지 않을 정도로요. 별점은 2점입니다.

2019/10/25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 구라치 준 / 김윤수 : 별점 2점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 4점
구라치 준 지음, 김윤수 옮김/작가정신

잘 모르는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을 포함한 모두 여섯 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제목이 흥미로와서 별 생각없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제목에서 연상되는 기발함, 기묘함이 부족한 탓이 가장 큽니다. 개개의 이야기들 모두 아이디어에 비하면 긴 편이라는 것도 단점이고요. 호시 신이치였다면 10페이지 안 쪽으로 끝냈을, 그런 내용들에 불과하거든요. "사내 연애"와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은 특히 쇼트쇼트 스타일로 쓰여지는게 어울렸을겁니다. 기발한 농담에 가까운 이야기였다는 점에서요.

물론 쓰고 싶은 글을 느긋하게 썼구나 싶은 작품도 있습니다. "밤을 보는 고양이"는 고양이를 정말 사랑하는 애묘인이구나! 싶은 묘사가 가득하여 읽는 내내 아주 흐뭇했어요.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은 기발함이 추리적으로 잘 포장된 괜찮은 이야기였고요.

하지만 별점은 2점입니다. 재미 측면에서는 나쁘지 않고 아이디어도 괜찮았지만 약간은 어정쩡한 느낌이 컸기 때문입니다. 호시 신이치 쪽인지, 아토다 다카시 쪽인지를 좀 더 명확히 하면 좋겠네요. 호시 신이치 쪽이라면 더 짧게, 아토다 다카시 쪽이라면 아이디어의 보강과 약간의 엽기성(?)이 추가되어야 할 겁니다.

각 단편별 상세 소개로 리뷰를 마칩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ABC

불특정한 희생자를 살해하는 무차별 살인이 벌어지는데, 주인공은 우연히 2 건의 살인 사건이 ABC의 규칙을 따른다는걸 알아내고 C에 해당하는 희생자를 찾아내어 살해하려 했다. 이유는 유산을 노리고 동생을 죽일 계획인데 동생이 'D'에 해당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호그 연속 살인ABC 살인 사건의 결합은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귀환"에서도 써 먹은 아이디어입니다. 아마 다른 작품에도 쓰여진 경우가 있을 거에요. 그만큼 유명한 트릭이자 설정이니까요. 하지만 이 작품의 진짜 핵심 아이디어는 범인이 C 사건을 일으킨 뒤, 곧바로 다수의 D 살인 사건이 일어난다는 반전입니다. 여러 사람이 연쇄 살인에 편승하여 저마다 모방 범죄를 일으킨 것이죠. 그리고 주인공이 급작스럽게 자신도 D에 해당하는 인물이었다는걸 깨달으며 마무리됩니다.

반전과 결말 모두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어요. 흔해 빠진 서두를 조금 더 줄여서 쇼트쇼트로 발표했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사내 편애"

인사 관리를 컴퓨터가 전담하게 된 이후, AI 시스템 '마더컴'로부터 편애를 받게 된 주인공이 회사 내에서 이런 저런 황당한 일을 겪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인공 지능이 인사 관리를 한다는 아이디어는 새롭지 않지만 '모더레이트 플리커 메소드식 (MFM)' 이라고 불리우는 설정이 아주 기발합니다. 인사 관리를 지나치게 합리적이지 않도록 하는, 인간적인 모호함을 넣은 서브 프로그램으로 덕분에 좀 느슨하고 인간적으로 관리하게 된다는 설정입니다.
이런 시스템을 도입할 때 가장 중요한 원칙인 '공정성'이 훼손되는거라 일부러 이런 오류를 집어넣을 이유는 없지만, 상황 자체는 꽤 그럴듯 했습니다.

이 모호함이 주인공 데라시마에게는 '편애'로 작동하여 일으키는 소동들도 재미있습니다. 전무가 직접 커피를 타다 주고, 상사가 허물을 덮어주는 정도에서 마음에 둔 여사원과 억지로 이어주는 민폐 수준의 도움까지 진화하게 되거든요. 심지어 마음을 고백한 것도 아닌데 주인공의 눈빛 등을 분석하여 이런 억지를 이끌어내니 어떻게 보면 무섭지요.

그러나 결국 지긋지긋해진 주인공이 회사를 그만 두고 다른 회사 면접을 보는데 그 회사 마더컴은 주인공을 그냥 싫어하더라는 결말은 조금 시시했습니다. 조금 더 재미있는 상황을 끌어낼 부분이 많았는데 너무 쉽게, 상상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이야기를 끝낸 느낌이에요. 별점은 2점입니다.

"파와 케이크의 살인 현장"

살해된 피해자 입에 파가 물려있고, 머리 맡에는 케이크가 놓여있는 기묘한 상황을 그린 단편입니다.

살인 사건이 등장하는데 추리물로 보기는 어려워요. 나카모토 경부의 합리적인 수사를 통해 범인은 아주 쉽게 밝혀지기 때문입니다. 기묘한 범행 현장에 대한 아마치 형사의 추리가 전부인데, 진상이 밝혀지지 않기도 하고요. 어떻게 보면 혼잣말과 비슷한 수준의 이야기라 공허합니다. 아마치 형사 본인 스스로도 마음껏 공상한, 상식 밖의 엉뚱한 생각이라고 이야기할 정도니까요.

물론 실제 진상이 드러날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피해자를 스토킹하면서 피해자가 파를 싫어하고 케이크를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된 범인이 살인을 저지른 후, 좋아하는 케이크를 먹고 싶어도 싫어하는 파가 입을 막고 있어서 먹지 못해 원통해서 마음 편히 성불하지 못하게 하려는 목적으로 성불을 막기 위해 벌인 일이었다는 추리는 솔직히 억지스러워요. 피해자에게 집착해서 그녀가 죽어서 영원히 손에 닿지 않는 곳에 가면 안되어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건데, 누가봐도 정신병자의 행동입니다. 정신병자의 정신나간 행동을 합리적으로 추리한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에요.

때문에 추리 소설로의 가치는 별로 없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밤을 보는 고양이"

할머니 혼자 사는 시골집에 내려간 주인공 유리에는 할머니의 고양이 미코가 며칠동안 밤에 어딘가를 바라보는걸 알아챈다. 미코는 무엇을 보는 것일까?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양이 미코에 대한 묘사가 꽉 채워져 있는데 고양이에 대한 애정이 시종일관 느껴져 좋았습니다. 고양이를 쓰다듬고, 만지고, 같이 노는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사랑스러워요.

하지만 고양이가 어딘가를 바라보는 이유가 '냄새' 때문이며, 이는 이웃집 할머니를 아들이 암매장하기 위해 땅을 판 탓이라는 결말은 좀 억지스럽습니다. 고양이의 후각이 예민한건 맞지만, 이웃집에서 땅을 판다고 밤에 자지 않고 그쪽을 쳐다본다는건 좀 이상하잖아요? 땅을 판다고 해서 그렇게 특별한 냄새가 날지도 잘 모르겠고요. 실제로 공사 현장 옆에 산다고 해서 고양이가 그곳을 바라보지는 않는 것과 같은 이치 아닐까요?

그래서 별점은 2점. 고양이 묘사는 좋지만 그 외에는 그냥저냥한 소품이었습니다.

"두부 모서리에 머리를 부딪혀 죽은 사건"

패전 직전인 1944년 겨울, 나가노 현에 위치한 제국 육군 특수 과학 연구소 2-13호 실험실에서 벌어진 기묘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날카로운 흉기는 하나도 없는 밀실인 실험실에서 피해자가 후두부를 날카로운 흉기로 얻어 맞아 죽은 사건이었다. 언뜻 두부 모서리에 부딪혀 사망한 걸로 보이는데 과연 진상은 무엇일까?

밀실 살인물이자 불가능 범죄물입니다. 

매드 사이언티스트 마사키 박사가 실험실에서 연구하고 있는 인력 '공간 전위', 즉 일종의 텔레포트 현상을 인력으로 발생시켜 미국에 폭탄을 투하한다는 연구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라는, 특무 첩보 기관에서 파견 나온 도네 소좌의 추리는 꽤 기발했습니다. 공간 전위의 첫번째는 공간 역전 현상으로 공간이 뒤집혀 피해자는 거꾸로 떨어졌고, 우연찮게 지금은 움푹 들어간 천장 모서리에 후두부가 찍히게 되었다는 추리입니다. 공간 역전이 일어나면 움푹 들어간 곳은 반대로 튀어나올 테니까요.

하지만 당연히 이런 괴기한 추리는 진상도 뭐도 아니며, 뒤이어 주인공인 이즈카 가쓰오 이등병의 합리적인 추리가 등장합니다. 범인은 도네 소좌이며, 이유는 피해자가 스파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흉기는 벽돌 같은 걸로 범행 후 멀리 던져버렸고, 아침에 문을 열 때 문 앞의 눈이 치워져 있었다는게 증거고요. 밀실은 특무대 소속이면 자물쇠 여는 것 쯤은 식은죽먹기였을거라는 식으로 넘어갑니다.

그러나 이 역시 이즈카 이등병의 상상일 뿐입니다. 근거도 없고, 진상도 결국 밝혀지지 않아요. 그리고 이즈카 이등병의 상상이 진상이었다 하더라도 설득력이 없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고를 위장하여 연구에 종사하는 병사들을 죽이는건 별로 어렵지 않다고 이즈카 본인 스스로 이야기하는데, 도네 소좌가 이런 불가능한 상황을 연출해 가면서까지 가게우라 이등병을 죽일 이유는 없으니까요. 그가 스파이라고 생각했다면 사람들 앞에서 총으로 쏴 죽여도 괜찮았을겁니다. 그만큼 미친 시대였지요.

그래도 일본의 전황을 비관적으로 바라보는 시선, 무식한 특수 과학 실험, 생명 경시 풍조가 만연하고 있는 걸 풍자하는 묘사와 내용은 인정할 만 합니다. 공간 전위라는 기묘한 실험에 대한 아이디어와 이를 추리에 응용한 발상도 좋았고요. 차라리 이 추리가 마지막에 진상처럼 드러나고, 결국 진상은 아무도 모르지만 미친 시대에 누가 그런걸 신경이나 쓸까? 라는 형태로 마무리했더라면 훨씬 마음에 들었을텐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별점은 2.5점입니다.

"네코마루 선배의 출장"

하마오카는 회사 연구소에 극비 신소재 관련 자료를 가져오기 위해 방문했다. 그런데 마침 그 곳에서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학교 선배 네코마루를 만났고, 우연히 연구소 내 산책을 함께 하다가 연구 소장 살인 미수 사건을 접하게 되는데...

일종의 불가능 범죄를 다룬 정통 본격 추리물입니다. 그런데 도가 지나친 삼엄한 연구소 경비, 기묘한 연구원과 도저히 알 수 없는 센스의 연구소 마스코트 네코멜론군, 이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기이한 네코마루 선배 등 설정이 만화적이라 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건 단점입니다. 네코마루 선배 정도만이었다면 괜찮았을텐데 말이죠. 이래서야 지극히 현실적인 동기 - 극비 신소재에 대한 정보를 빼돌리는 것 - 와 거리감이 커서 영 와 닿지 않더라고요.

하지만 시종일관 장난으로 일관하는 행동과는 다르게 추리 자체는 논리적으로 접근하는 네코마루 선배의 추리만큼은 괜찮았습니다. 아무도 범행을 저지를 수 없었으니 이 범행은 소장의 자작극이다! 그리고 물이 가득 든 양동이를 던질 수 없으니 빈 양동이를 던져 부딪혔고 물은 그 전에 쏟아 놓았다!는 추리로 아주 현실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극비 신소재 자료를 빼돌리고 이를 하마오카에게 뒤집어 씌우려 했다는 동기도 좋았고요. 농담같은 철저한 보안은 구급차를 타고 빠져나감으로써 뚫을 수 있다는 발상 역시 보안이 나름 강한 회사에 다니는 제 입장에서 보아도 설득력이 높아 보입니다. 과연 시리즈 작품에 탐정으로 등장할 만 합니다.

만화적이고 과장된 묘사를 줄이고 좀 더 일상계스러운 작품으로 쓰는게 여러모로 더 나아 보이기는 하지만, 이 정도면 다음 작품이 기대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2023/07/26

이 삶을 다시 한번 - 도다 세이지 / 조은하 : 별점 1.5점

이 삶을 다시 한번 - 4점
도다 세이지 지음, 조은하 옮김/애니북스

마사토끼의 추천 글을 읽고 보게 된 작품. 아래의 유명한 <<양파와 인생>>이 수록된 책입니다. <<양파와 인생>>처럼 짤막하지만 핵심을 찌르는 맛이 있는, 기묘한 맛에 가까운 쇼트쇼트 만화들이 수록되어 있으리라 생각하고 구입했습니다.


그런데 생각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기승전결이 무난한 드라마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한 페이지로 구성된 짤막한, 쇼트쇼트라 부를만한 작품들 역시 반전이나 기묘한 맛 장르물보다는 삶과 인생에 대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고요. 인스타 단상을 만화로 옮긴 느낌이랄까요? 짧고, 뭔가 있어보이지만 실제로는 별 알맹이 없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유명한 <<양파와 인생>>도 시인 칼 샌드버그의 원본이 있더라고요.

"인생은 양파와 같다. 한껍질씩 벗기다 보면 가끔 눈물이 난다. (Life is like an onion. You peel it off one layer at a time and sometimes you weep.)"

작화도 정성들여 열심히 그리기는 했지만 캐릭터 묘사나 뎃셍력, 터치 모두 좋지 않습니다. 아마추어가 단상을 홀로 SNS에 올리다가 주목을 끌어 출간되었다고 하는데, 딱 그 정도 수준의 작품들이에요. 프로 수준에 미치지 못하고, 완성도도 미흡했습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마사토끼한테 그만 낚여야겠습니다.

2009/10/17

일본 플레이보이지 선정 "미스테리 - 철야본을 찾아라!"

신촌 북오프에서 구입한 일본 플레이보이지 2008년 1월호에 실린 특집입니다. 평론가 5명이 선정한 일본 미스테리 올타임 베스트 100을 시작으로 여러가지 추리소설 관련 기획이 실려있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베스트 10까지만 소개해봅니다. (100작품 중 국내 출간된 작품은 추후 따로 정리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1. 야마타 후타로 메이지소설전집 7 / 메이지단두대 - 야마타 후타로
당당히 1위를 차지한 작품은 국내에는 소설은 소개된 적이 없는 야마다 후타로의 메이지 초기 시대를 무대로 한 단편집입니다. 정교한 트릭과 당시 시대상이 잘 결합된 좋은 작품이라고 하네요.

2. 화차 - 미야베 미유키
말이 필요없는 작품이죠.

3. 마이너스 제로 - 타다시 히로세
-도쿄 대공습의 날, 행방불명되었던 이웃집 딸이 18년 뒤 당시 모습 그대로 주인공 청년 앞에 나타난다-는 줄거리의 작품이네요. 일본 SF 미스테리사에 빛나는 타임 트러블 소설 불후의 명작!으로 하야카와 SF 매거진 선정 올타임 베스트 SF 일본편 4위에 선정되기도 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국내 소개된적은 없는데 이정도 명성이면 언젠가 나와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생기네요.

4. 텐도 신 추리소설전집 6 / 죽음에의 초대 - 텐도 신
"대유괴"로 유명한 텐도신의 작품입니다. 5인의 남자에게 살인 초대장이 온다는 이야기라는데 무척 궁금하군요. 재미있을 것 같은데...

5. 달팽이에게 물어봐라 - 츠즈키 미치오
아버지가 통신교육으로 킬러를 양성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된 주인공이 그 유산의 청산을 위해 여러 킬러들과 싸워나간다는 액션 모험소설로 시리즈이기도 하고 영화까지 등장했던 당대의 인기작. 국내 출간 가능성은 제로가 아닐까 싶군요...

6. 아 아이이치로의 낭패 - 아와사카 츠마오
추리 애호가들에게는 잘 알려진 아아이이치로 시리즈의 데뷰작인 본격추리 단편집. 국내 출간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7. 봇코짱 - 호시 신이치
"쇼트쇼트" 시리즈의 개척자로 유명한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 단편집.

8. 고향을 등지다 - 시미즈 다츠오
작품을 읽지 않아서 제목이 이게 맞는지는 잘 모르겠네요. 어쨌건 국내에는 소개되지 않은 작가와 작품으로 모험소설에 가까운 작품으로 생각됩니다.

9. 점성술 살인사건 - 시마다 쇼지
미타라이의 데뷰작인 유명작품. 더 이상 자세한 설명은 생략합니다.

10. 황토의 분류 - 이쿠시마 지로
국내에는 "끝없는 추적" 정도만 소개된 이쿠시마 지로의 "황토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다이쇼시대의 중국을 무대로 한 모험소설입니다. 일본 모험소설 불후불멸의 금자탑이라고 소개되고 있네요.

2011/10/09

4페이지 미스터리 - 아오이 우에타카 / 현정수 : 별점 1.5점

4페이지 미스터리 - 4점
아오이 우에타카 지음, 현정수 옮김/포레

초단편 장르문학은 엘러리 퀸의 '미니 미스터리'나 호시 신이치의 '쇼트쇼트' 처럼 기존에도 있던 장르입니다. 그런데 이 책은 전 작품을 단 4페이지로 완결한다는 아이디어로 초단편의 한계에 도전하는 이색 단편집입니다.

그러나 성공적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호시 신이치, 아토다 다카시의 쇼트쇼트 작품은 짧기 때문에 더 효과적이었는데, 여기 수록작들은 '4페이지'라는 아이디어만 있을 뿐, 길이와 상관없이 수준 이하의 작품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형식의 특성상 대부분의 작품들이 지나칠 정도로 반전에 의지하는데, 그러다 보니 시점의 변화, 우연이 겹치는 급작스러운 상황, 어처구니없는 오해 등으로 이야기가 이루어집니다. 내용의 설득력도 부족하며, 별다른 묘사 없이 화자의 심리묘사나 대화만으로 진행되는 전개 탓에 뒤로 갈수록 지루해집니다. 트릭도 눈여겨볼 만한 것이 많지 않았고요.

물론 워낙 실려 있는 작품이 많기에 건질 만한 것도 있습니다. 변장 알리바이 트릭을 다잉 메시지를 통해 파헤치는 정통 도서 트릭물 "최후의 메시지", 나름 서술 트릭을 효과적으로 사용한 "록 온", 실종된 아버지와 신원불명의 시체를 연결시키는 "예쁘지 않아도 괜찮아" 등은 기획 의도와 잘 맞아 떨어지는 수작입니다. 그러나 60편 중 이 정도라니, 비율로 따지면 너무 낮네요.

빨리 읽을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한 장점이나, 이런 작품 100편을 읽느니 완성도 높은 400페이지짜리 작품 한 편을 읽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전체적인 별점은 1.5점입니다.

덧붙이자면, 이 책 출간 이벤트로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서 4페이지 미스터리를 공모했는데, 그쪽이 더 기대되네요.

2019/11/29

회색 인간 - 김동식 : 별점 2점

전문적인 글쓰기 교육을 받지 않은 작가가 오늘의 유머 사이트에 꾸준히 업로드한 글이 인기를 얻은 덕분에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나온 결과물입니다. 과거 하이텔 시기에나 존재했을 법한 이야기의 재림이네요. 올린 글의 분량만 따지만 거의 "태백산맥"에 육박한다니 그 열정과 노력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그러나 하이텔 시기 인기를 끌었던 "퇴마록" 등과는 명확히 다른 점은, 굉장히 짧은 꽁트, 아니 쇼트쇼트라고 불러도 무방한 이야기들이 표제작을 포함하여 무려 스물 네 편이나 수록된 단편집이라는 겁니다.

하지만 솔직히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습니다. 대부분의 이야기가 한 편의 이야기로의 완성도가 부족한 탓입니다. 게다가 모든 이야기들이 대체로 비슷하다는 단점도 큽니다. 기묘한 설정, 그리고 그 기묘한 설정 때문에 인간들의 집단 이기주의나 탐욕이 생겨나 결국 파국을 초래한다는 결말의 이야기가 대부분이에요.
기묘한 설정이라도 재미있다면 괜찮지만, 그냥 기묘하다는 상황에만 매몰되어버린 이야기들이 많아서 아쉽습니다. 건물이 급작스럽게 식인 괴물로 변하여 밖의 사람들을 잡아먹는다는 "식인 빌딩", 인간이 녹았다가 다시 돌아오면 완벽한 컨디션이 된다는 기적의 물 정화수가 대유행한다는 "흐르는 물이 되어"가 대표적이에요.
또 기묘한 설정에 기댈 뿐, 이야기는 예상대로 흘러가고 반전도 뻔한 이야기들이 많습니다. "아우팅"에서 인류 모두가 인조인간이라는게 밝혀지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차라리 연구소 경비병들만 진짜 인간이었다는 반전이라도 넣어 주었어야 했어요. 그나마 조금 신선한 반전들도 대체로 기존 상식이나 그때까지의 현실을 반대로 뒤집는 것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괜찮아 보여도 읽으면 읽을 수록 식상해 질 수 밖에 없어요. "영원히 늙지 않는 인간들"에서 나이를 먹지 않게 만드는 영원의 구가 사실은 저주였다던가, "공 박사의 좀비 바이러스"에서 좀비 바이러스는 무적의 재생력을 안겨다주는 선물로 사람들은 다시 인간이 되려 하지 않는다던가 하는 식으로요. "피노키오의 꿈"에서 피노키오의 소원이 인간이 되는게 아니라 건강한 소나무가 되는 것이었다는 결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래도 반전이라도 있는 이야기는 조금 나은 편입니다. 특별한 반전 없이 인간미, 감동 쪽에 방점을 찍으려 노력한 이야기들은 더 엉망이에요. 표제작인 "회색 인간"이 대표적입니다. 1만여 명의 사람들이 갑자기 납치되어 땅을 파는 가혹한 노동에 시달립니다. 먹을게 부족해서 문화는 사치였지만, 어느날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고,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나타나 문화가 생겨난다는 결말입니다. 문화가 사라지면 인간도 아니라는 주제인데, 솔직히 억지스럽죠. 이런 상황이라면 집단이 생기고, 자체적인 법률이 생기는게 타당한데 그런 내용은 전혀 없이 그냥 살기 힘든 상황만 길게 묘사되는 것도 지루하고요. 가혹한 노동 환경에서도 추구하는 문화에 대한 욕구와 인간미는 "도박묵시록 카이지 외전 반장의 일일 외출록" 에서 훨씬 더 재미있게 잘 그려졌다 생각됩니다.
손가락 여섯개인 신인류를 낳게 만드는 비정상적인 계획이 비선 실세의 농간으로 밝혀진 후, 손가락 여섯개인 아이들을 차별하지 말자는 생각이 모든 차별을 없앤다는 꿈같은 이야기도 황당하기 그지 없고요. 괴물이지만 또 인간이기도 한 존재에 대한 이야기처럼 다른 작품들에서 흔히 접했었던 설정도 많습니다. 어설픈 풍자, 별 것 아닌 내용을 길게 늘려쓴 이야기도 눈에 거슬렸어요.

하지만 인터넷에서 널리 인기를 끌었던 이야기답게 반짝이는 부분도 없지는 않습니다. 무인도에 표류한 생존자들이 얼마 안 되는 식량을 노인에게 나누어주기를 거부하자 노인이 자신이 부자라면서 통조림을 500만원에 사겠다고 제의하는 데에서 시작하는 "무인도의 부자 노인", 신에게 소원을 빌 당사자로 선택되는 개인에게 닥치는 집단 광기를 설득력있게 보여준 "신의 소원", 노인을 가상 세계에 모신다는 발상이 그럴싸 했던 "디지털 고려장" 등이 그러합니다. 다만 문제는 이후의 전개가 뻔하고 결말의 반전이 억지스럽거나 작위적이거나 아예 없다는 단점은 그대로라는 점입니다 .

다행히 설정도 좋고, 전개도 괜찮으며 결말과 반전도 완성도 높은 보석과도 같은 작품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 재활용" 입니다. 돈만을 위해 살아온 두석구가 딸이 교통사고로 죽자, 13일 내 시체 세 구를 섞어 넣으면 한 명이 부활한다는 주술을 시도합니다. 그런데 생존은 랜덤이라 딸이 살아나지 못하자 두석구는 전 재산을 투자해서 13일 동안 이 주술을 계속 시도하고요.
그런데 영혼들이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하고, 영혼들은 두석구의 딸 부터 영혼을 찢어발긴다는 마지막 반전이 아주 기가 막혔습니다. 두석구는 딸이 살아날 때 까지 주술을 시도할테니 영혼들이 바보가 아닌 이상 딸부터 처치하는건 당연하니까요. 이를 고통스러워 하는 딸의 마지막 대사도 좋았고요.
쇼트쇼트로는 그야말로 완벽했던 작품으로 수록작 중에서 베스트입니다. 이 정도면 호시 신이치의 대표작과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 합니다.

"보물은 쓸 줄 아는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도 평균 이상입니다. 정대리가 가진 보물인 쇠구슬은 손을 대면 비가 오게 만듭니다. 김대리는 이를 훔쳐내는데 성공하지만 그가 아무리 손을 대도 비는 오지 않습니다. 아내 역시 흐려지기만 할 뿐이고요. 그런데 아기가 손을 대자 지진이 발생하여 결국 집이 무너지고 맙니다. 원리는 비가 오는게 아니라 자기가 좋아하는 날이 실현된다는 이야기지요. 기묘한 설정도 좋지만 제 생각대로 전개되지 않았던 덕분에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세 모녀, 한 사내와 협곡에 갇힌 김남우가 극심한 굶주림 끝에 식량으로 희생될 사람을 뽑는 제비뽑기에 참여하는 "협곡에서의 식인"도 기묘한 맛 측면에서는 꽤 괜찮습니다. 김남우의 편인줄 알았던 사내가 놀랍게도 급작스럽게 김남우를 살해하는데, 알고보니 그들 4명은 모두 가족이었던 반전 덕분입니다. 김남우가 가족을 경계하고 오히려 위협할까 두려워 남인척 김남우 편에 섰다가 배신을 했던 거지요. 살아난 가족이 에이즈 양성 판정을 받는다는 마지막 한 방도 묵직하고요.
아쉬운건 에이즈가 지금은 그렇게 위험한 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좀 더 '천벌'에 가까운 병에 걸리는게 나았을 거에요. 그런 면에서는 "살인단백질 이야기"에 나왔던 프리온을 활용한 병이 어땠을까 싶네요. 식인으로 전염되고, 치사율 100%이니까요.

"지옥으로 간 사이비 교주"도 반전이 좋습니다. 사이비 종교 교주 두석구가 지옥에서 악마들의 부탁으로 죄인들에게 환생을 약속하는 환생교를 만들어 포교합니다. 그들에게 희망을 주어 통제를 잘 하려는 악마들의 계획으로 생각하고요. 그러나 1년 뒤, 절대자가 강림하여 두석구를 찢어 발기고 죄인들의 희망을 끝냅니다. 죄인들에게 어설프게 희망을 주었다가 큰 고통을 주기 위한 것이었다는 결말인데 아주아주 그럴 듯 했습니다.

하여튼, 전체 평균해서 별점을 주자면 2점입니다. 모든 수록작 중 세네 편 정도가 중간 수준, 세 편 정도가 중간 이상, 한 편이 수작이고 나머지가 모두 기대 이하이니 이 정도가 적당해 보입니다. 반 타작도 하지 못한 셈이니 전반적으로 좋은 단편집이었다고 보기는 어렵네요. 다음 권은 읽어볼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래도 일하면서, 전문적인 교육도 받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계속 창작하여 발표한 작가의 노력에는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등단도 한 만큼, 괜찮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다음에는 보다 완성도있게 다듬어 발표해 주기를 바랍니다.

2018/05/18

악몽을 파는 가게 1 - 스티븐 킹 / 이은선 : 별점 2점

악몽을 파는 가게 1 - 4점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황금가지

스티븐 킹의 최신작 단편집입니다. 원초적인 공포보다는 순문학 쪽으로 이동하는 느낌을 물씬 풍겼던 최근 작풍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오래전 분실한 초고를 다시 썼다는 "130"만 옛 작품을 연상케하는 자극과 속도감을 보여주며, 이외에는 대체로 자극이 부족합니다. 옛날 작품들이 불량 식품 같았다면, 이 책의 수록작들은 녹즙같은 느낌이랄까요.

물론 "모래 언덕", "못된 꼬맹이"와 같이 기발한 발상과 섬찟함을 겸비한 작품이 없는건 아닙니다. 순문학스러운 느낌이더라도 "죽음" 은 이런 류의 단편에서는 손에 꼽을만한 걸작임에는 분명하고요. 거장다운 깊은 연륜도 작품마다 가득합니다.

하지만 전체적으로는 좀 얌전하고 재미도 별로 없어서 아쉽네요. 최소한의 의외성은 가져갔어야 하지만 좀 쉽게 쓴 느낌으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마지막으로 작품 별로 조금 더 상세하게 소개해 드리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언제나 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30"

버려진 휴게소에 사람을 잡아먹는 자동차가 나타나 여러 사람들을 해치웠다. 그렇지만 몰래 숨어든 용감한 소년이 돋보기로 불을 붙여 괴물을 퇴치한다!

오래전 분실한 초고를 다시 썼다고 하는데, 그 덕분인지 사람을 잡아먹는 괴물차의 등장과 묘사는 킹의 초기 크리쳐 단편 느낌 그대로입니다. 사람을 빠져들게 만드는 생생한 묘사 만큼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에요. 처음 버려진 휴게소로 탐험을 떠난 소년의 묘사, 그리고 뒤이어 등장하는 사람 잡아먹는 자동차와 희생자들에 대한 묘사로 이어지는 속도감도 대단하고요. 끝까지 눈을 떼기 힘들 정도였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운운하며 희생된 첫 번째 희생자를 비롯한 죽은 사람들 모두가 "선의" 때문에 죽었다는 약간의 풍자도 젊은 시절 킹 작품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나 안이한 결말로 이런 장점 모두가 희석됩니다. 10살밖에 되지 않은 꼬마 소년이 불 좀 붙였다고 사라져 버리다니! 죽어나간 여러 명의 어른들은 대체 뭔가 싶더군요. 그래서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원래 결말도 이러했다면 아무리 마약 중독 등으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하더라도 킹이 이 작품을 분실한 건 별로 아까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최소한 다시 썼다면 결말 정도는 고쳤어야 해요. 이렇게 대충 마무리 지을 내용은 절대로 아니었으니까요. 예를 들자면 흑인은 잡아먹지 않는다던가, 여자는 잡아먹지 않는다던가 하는 식으로 뭔가 차별이나 혐오에 대한 이야기처럼 포장하는 등의 설정과 반전처럼 말이죠. 흑인은 잡아먹지 않아서 흑인 한 명이 살아남지만, 도착한 경찰들에 의해 사살된다! 는 "새벽의 저주" 스러운 이야기였다면 걸작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여러모로 아쉽습니다.

"프리미엄 하모니" 

부부는 조카 선물을 사러 마트에 들렸는데, 남편은 아내가 갑자기 쓰러져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다른 작품들과는 다른 조금 덤덤하고 건조한 묘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소개에서 킹이 "레이먼드 카버"의 책을 읽고, 그의 스타일로 썼다고 말하는데, 레이먼드 카버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네요. 그래도 엄청나게 더운 날, 아내가 죽은 후 주차장으로 돌아오자 애견마저 차 안에서 쪄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는 결말까지 소소하게 읽을만 했습니다.

문제는 너무 순문학스럽고 의외성이 없다는 점입니다. 죽은 게 애견이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면 조금 나았을지 모르겠네요. 상상하기는 싫지만, 그게 뭐든요.

하여튼 저는 킹의 작품을 읽고 싶지 킹이 쓴 카버 스타일 카피를 읽고 싶지는 않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배트맨과 로빈, 격론을 벌이다" 

치매에 걸린 아버지와 함께 주말마다 식사를 하는 60세 노인이 우연히 일으킨 차 사고로 트럭 운전사에게 구타당하다가, 아버지가 운전사를 칼로 찔러 살아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치매에 걸렸건, 나이가 들었건 아버지는 영원히 아들 앞에서는 슈퍼 히어로라는 주제 만큼은 정말 마음에 드네요. 저도 끝까지 딸 아이를 지켜주는 아버지가 되고 싶으니까요.

그러나 아쉽게도 좋은 작품은 아니에요. 무언가 복잡한 과거가 있는 듯 변죽을 울리다가, 갑작스러운 사고와 함께 이야기가 바로 절정으로 치닫고 끝나버려 내용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껏 고급차를 쓸고 닦아 광 내어 어렵게 시동을 걸지만 도착한 장소는 집 앞 편의점이랄까요? 그냥저냥한 평범 이하 소품으로 별점은 2점입니다.

"모래 언덕"

아흔살이 넘은 하비 비처 판사는 유언장을 작성하기 위해 변호사 앤서니 웨이런드를 불렀다. 그리고 유언장에 적혀 있는, 한 섬을 영구 야생지로 공표하는 사항을 두고 그 섬에 얽힌 오랜 비밀을 이야기 해 주는데...

짧은 분량, 섬뜩한 느낌, 여기에 반전까지 삼위일체를 이룬 '기묘한 맛', '쇼트쇼트' 계열의 작품입니다.

우선 아주 짧다는 점에서 '짧은 분량' 조건은 충족합니다. 그리고 섬의 모래 사장에 곧 죽을 사람 이름이 쓰여진다는 아이디어에서, 특히 비행기 추락 사고 때 수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쓰여져 있었다는 묘사의 섬뜩함이 대단해서 두 번째 조건 역시 충족하고요. 마지막 조건도 유언장 작성을 서두른 이유에 대한 반전 때문에 완벽하게 충족합니다. 특히 결말은 아주 좋은 수준으로 킹 역시나 결말이 마음에 든다고 자찬할 정도에요.

별점은 4점입니다. '기묘한 맛', '쇼트쇼트' 류 장르의 걸작만 모아 놓은 앤솔러지가 있다면 충분히 목록을 장식할만 한 교과서같은 작품입니다.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어느 못된 꼬맹이"

사형수 헬러스가 국선 변호인이었던 브래들리와의 마지막 면회에서 그가 아이에게 총알 여섯발을 쏜 이유를 설명해 주는데...

장난꾸러기 어린 아이가 상황에 따라서는 공포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이색적인 설정에 더해, 이러한 공포가 직접 닥쳤을 때 벌어지는 무간지옥의 묘사가 압권인 작품입니다. 읽는 내내 끔찍했고, 손에서 떼기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또 인생을 파멸시키기 위해 악마가 누군가에게 나타난다는 뻔한 설정을 악마가 아이의 모습으로 위장했다는 약간의 변주만으로 차원이 다른 몰입감을 선사해주는건 역시나 거장다웠습니다. 저 역시 악마같은 아이들을 몇 번 본 적이 있어서 굉징히 와 닿은 아이디어이기도 해요.

그런데 헬러스에게 이 악마가 나타난 이유를 설명해 주지 않는다는 점은 좀 문제입니다. 그냥 아픈 것, 자연 현상과 마찬가지라고 하면서 대충 넘어가는데, 그건 그렇다 쳐도 브래들리에게 이 꼬마가 나타날 이유는 또 없잖아요? 최소한의 설득력을 보장할 약간의 양념이 아쉬웠습니다.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재미는 있지만 잘 나가다가 결말을 만들기 위해 지나치게 무리수를 둔 느낌이라 감점합니다.

"죽음"

동네 바보 트러스데일은 한 소녀를 죽이고 은화를 빼앗은 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보안관 바클레이는 그의 무죄를 확신하나 형은 집행되고, 이후 유일한 증거인 은화가 교수형당한 트러스데일의 분비물에서 발견되었다...

일종의 '딜레마' 를 다룬 심리 드라마인데 한마디로 걸작입니다. 동네 바보 트러스데일이 무죄일 수도 있다는 분위기로 끌고 가다가 마지막에 반짝이는 은화가 분비물 속에서 발견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네요. 수감되어 있는 한 달 동안 발견되지 않은 이유는? 똥으로 나올 때마다 다시 삼킨 거라는 진상도 기발하고 말이죠. 무엇보다도 바클레이의 딜레마를 그리는 심리 묘사와 무엇보다도 어차피 교수형 당할거, 왜 자백을 하지 않았냐는 묵직함이 독자를 사로잡는 좋은 단편이에요.

그래서 제 별점은 5점. 수록작 중 최고로 치고 싶네요. 덧붙이자면, 트러스데일 시점의 번외편이 나와주어도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납골당"

정글 속 납골당으로 떠난 일행이 하나씩 죽어가는 과정을 술 먹은 사람의 독백으로 들려주는 특이한 작품으로 다양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과정의 묘사는 킹 답습니다.

그런데 그 외에는 솔직히 무슨 이야기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죽은 사람들이 되살아나 행진하는 죽음의 윤회 이야기인지? 아니면 술 주정뱅이의 주정에 불과한지? 킹 본인은 산문적 해설을 제거한 형식만 보았을 때 훌륭하다고 소개하고 있는데, 지금 보다는 훨씬 더 해설이 필요한 이야기였어요. 말하고 있는 술주정뱅이도 무슨 벌어졌는지는 모르는 듯 하고, 이게 더 현실적이기야 하겠지만 여러모로 일반 독자에게 잘 와 닿을 것 같지는 않네요.

한마디로 소갯글처럼 학교 작문 시간에 발표했음직한 실험적이고 전위적인 습작에 불과합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도덕성"

가난한 부부에게 아내 노라가 간병하는 부유한 신부 위니로부터 이십만 달러의 유혹이 다가왔다. 죄를 짓는 장면을 촬영해서 보여달라는 유혹에 굴복한 채드와 노라 부부는, 노라가 변장하여 어린아이를 때리는걸 채드가 촬영하여 돈을 받고 말았다. 이후 채드의 작가로서의 미래, 그리고 부부의 결혼생활은 끝장나 버리는데...

일단 재미도 없고 여러가지 문제가 많아 점수를 줄 부분이 많지 않네요. 일단 설득력 없는 등장인물들의 고민이 아쉽습니다. 얼척없는 도덕심보다는 돈이 더 이유를 가진다는 건 당연한 현실인데 이를 뭐 이렇게 진지하게 고민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아이를 때린 정도로 평생 죄책감을 느낄 것 같지도 않고 말이죠. 덕분에 위니를 통해 종교적인 시점에서 나쁜 짓, 회개에 대해 한번 쯤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발상은 좋지만 이를 풀어나가는 데에는 그다지 성공하고 있지 못합니다.

소싯적 피를 팔고 리포트를 대신 써 주는 밥벌이를 했었는데 그 당시 자신을 매춘부라고 생각했다는 창작 비화가 더 인상적이었던 작품입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아이를 유괴하는 등 더 강력하고 심각한 딜레마를 초래하는 범행으로 묘사하는게 훨씬 나았을 것 같네요.

"사후세계"

대장암으로 죽은 빌은 기묘한 공간에서 해리스라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과거 공장 문을 잠갔다가 화재로 146명의 여직원을 죽게 한 죄로 끝나지 않는 상담이라는 연옥에 갇힌 인물로, 빌에게 환생과 사라짐을 선택할 수 있지만, 다시 태어나도 변하는 것은 없을 거라 말해 주었다. 그가 이곳에 온 게 다섯번 째이며 언제나 똑같은 말을 했다면서. 그러나 빌은 동생의 손가락을 잘랐던 실수 , 어렸을 때의 시계 절도, 성폭행 등의 실수 중 하나라도 막기를 바라며 환생을 선택한다.

사후 세계에 대한 독특한 묘사와 설정, 그리고 동양적인 일종의 "윤회"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 인상적인 소품입니다. 단, 묘사와 설정에 비하면 결말은 좀 평이한 편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우르"

구식 영문학과 교수 웨슬리는 농구팀 감독인 애인 엘런과 헤어진 후 반쯤은 복수심에 킨들을 구입했다. 그런데 그가 구입한 킨들은 시판되지 않는 핑크빛 제품으로, '우르' 라는 일종의 평행우주로 접속하여 작품을 찾아 제공하는 능력이 있는 기기였다. 웨슬리 스미스는 헤밍웨이의 미발표작 등을 검색하는데...

아마존 킨들을 위해 집필했다는 소설인데, 한마디로 말해 광고를 위해 쓰여진 수준 이하의 졸작입니다.

이유는 명확해요. 소설을 쓰지 못하는 영문학과 교수가 핑크빛 킨들을 통해 다른 평행 세계에서 유명 작가들이 발표한, 이쪽 세계에서는 발표되지 않은 작품을 읽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절반 이상까지 장황하게 펼쳐나가기 때문에 독자는 유명세를 위한 표절같은 이야기를 상상하게 되는데, 정작 이야기는 급작스럽게 "내일 뉴스" 와 같은 이야기로 빠지기 때문입니다. 전혀 다른 설정을 하나로 묶어놓은 느낌이라 영 별로입니다.
"내일 뉴스" 이야기라도 재미있었더라면 모르겠지만 뉴스를 어떤 식으로든 미리 알고, 그렇게 알게 된 사고를 막기 위해 노력한다는 쎄고 쎈 유사 작품 대비 특별한 부분도 없는 탓에 별다른 흥분과 재미를 불러 일으키지도 못합니다.

킹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지극히 극단적인 해피 엔딩이라는 결말은 특이하지만 그 외에는 건질게 거의 없는, 킨들 광고에 불과한 평균 이하의 범작입니다. 별점은 1.5점입니다.

2010/07/28

아시모프의 과학소설 창작백과 - 아이작 아시모프 / 김선형 : 별점 3.5점

아시모프의 과학소설 창작백과 - 6점
아이작 아시모프 지음, 김선형 옮김/오멜라스(웅진)

SF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가 아이작 아시모프의 여러 에세이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중-단편을 모아놓은 책입니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죠.

1, 2부에는 과학소설 및 창작에 대한 작가의 다양한 에세이들이 실려 있습니다. 그러나 전혀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고 적절한 유머를 갖추면서도 아시모프 자신의 방대한 지식과 경험이 잘 녹아있어서 정말 몰입해서 읽을 수 있었어요. 솔직히 작가의 소설보다도 재미있던 것 같습니다.

특히 '(과학/SF) 소설의 창작 비법'에 대한 에세이들이 인상적이었는데, 셰익스피어의 "햄릿"을 예로 들며 설득력있게 풀어가는 플롯에 대한 이야기

플롯은 곧 소설이 아니다. 플롯을 둘러싼 이야기를 만드려면?
1. 아주 자세하고 복잡한 플롯을 만들어서 이야기 구축 작어에 많은 노력을 들일 필요가 없도록 한다. 사건에 사건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도록 하는 것.
2. 극단적으로 플롯 자체를 폐기하고 작은 에피소드만 줄줄 늘어놓는 것.
3. 명쾌한 플롯의 제작
a. 플롯을 사용하여 유머나 풍자를 도입한다.
b. 소설 속 등장인물들의 성격을 통찰하는 방법으로 플롯을 사용한다. '등장인물의 성격창조'가 중요함
c. 어떤 사상을 개진하는 수단으로 플롯을 이용한다. 인생관이나 세계관 등.
"아시모프의 SF매거진" 1989.6
라던가 훌륭한 SF 작가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에 대한 친절한 설명
1. 경력을 쌓기 위한 준비 작업을 철저히 해야 한다. - 작문법 등의 학습 / 거장의 작품에 대한 꼼꼼한 독서 등
2. 과학지식을 쌓아야 한다.
3. 글을 쓰면서 배워야 한다.
4. 인내심을 가져야 한다.
"아시모프의 SF매거진" 1979.3
등 거장의 비법을 알려주는 보석과도 같은 에세이가 듬뿍 실려있습니다.

또한 과학 / SF 소설 그 자체에 대한 다양한 에피소드들도 재미있는데 인상적인 것을 하나 소개하자면

나는 퇴고하지 않고 초고를 최대한 빨리 쓴다. 그 뒤 다시 읽어보며 오자, 잘못된 문법 등을 고친다. 다음에는 두번째 원고를 다시 써나가면서 떠오르는대로 부분적으로 글을 수정한다. 로버트 하인라인이 어떤 식으로 글을 쓰냐고 묻기에 대답해 주었다. 그러자 그가 말하기를 "두 번씩이나 타이핑을 한단 말이야? 처음부터 안 틀리고 타이핑하면 되잖아"
거장들의 대화라고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만 일반인하고는 참으로 다른 사고방식이죠?

이러한 에세이 이후 마지막 3부는 중, 단편 15편이 실려있는데 독특하고 재미있는 작품들이 많아서 아시모프라는 작가의 새로운 면모를 확인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평점은 좀 들쭉날쭉하기는 하지만요.

이외의 국내 작가들의 서평과 이글루스 회원이시기도 한 잠본이님의 무지막지할 정도로 자세한 연표 역시 마음에 꼭 드는 부분이었어요. 아이작 아시모프가 '베이커 스트리트 일레귤러즈' 멤버였다는 것이라던가 AIDS로 사망했다는 것은 정말 처음 알았습니다. 잠본이님의 방대한 지식에도 경의를 표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딱 한가지 아쉬운 점은 '추리작가'로의 아시모프도 좋아하는데 추리 소설 이야기가 없다는 것 뿐입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에세이 부분만으로는 4점 주어도 충분하지만, 전체 평점 2.7점의 3부 중-단편 소설 부분 때문에 약간 감점했습니다. 그래도 워낙에 에세이 쪽이 탁월하기에 과학 / SF 소설 뿐 아니라 모든 장르문학 작가와 독자들이 한번쯤 읽을만한 가치있는 책이라 생각되네요.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그나저나, "흑거미 클럽"의 다른 에피소드는 물론 다른 추리소설들이 좀 보고싶은데 과연 출간될 수 있을련지도 궁금해지는군요. 추리쪽은, 특히 장편은 별로 높은 평가를 받는 것 같지는 않지만요...

"칼"

작가가 되고 싶은 로봇 칼을 위해 주인 노스롭이 기술자를 불러 여러 기능을 업그레이드하여 진정한 작가로 만들어 준다. 그러나 칼이 쓴 작품을 읽고 위기 의식을 느낀 노스롭은 다시 기술자에게 칼을 초기화시켜 줄 것을 요청한다.

액자 소설같은 구성을 취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칼이 작가가 되어가는 과정과 함께 단계별로 칼이 쓴 작품이 소개되고 있거든요. 마지막에 작가가 된 칼이 쓴 작품 "완벽한 정장차림"은 "조지와 아자즐"이라는 아시모프의 시리즈 작품이기도 하다는군요. 아시모프의 유명한 '로봇3원칙'보다 '작가가 되고 싶다'라는 소망이 더 우위에 있다는 주제를 놓고 보자면, 아시모프 스스로 로봇 3원칙과 자기 자신에 대한 풍자와 비평을 담은게 아닌가 생각됩니다. 별점은 4점입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쇼트쇼트 단편. 좌우 역전에 대한 과학적인 이론을 담고 있지만 반전은 말장난 유머입니다. 깔끔해서 볼만하네요. 책 뒤 잠본이님 해설을 통해 포워드 박사가 실존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니 더 웃깁니다. 포워드 박사는 이 작품을 보고 어떤 기분이었을지 궁금하네요. 별점은 2.5점.

"낙심"

워게임 시뮬레이션을 다룬 단편입니다. 컴퓨터가 '자신이 정의롭다는 독선'이 없기 때문에, 완벽한 시뮬레이션을 도출할 수 없다는 내용이지요. 풍자가 세련되고 유머러스해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환각" 

15살 샘 체이스는 중성자별에서 에너지를 추출하려는 에너지 플래닛에 배속된다. 그리고 기이한 환각현상에 대한 소문을 듣게 되는데... 

작은 곤충(?)들이 연결되어 거대한 집단 지성을 이룬다는 설정과 텔레파시를 통한 의사소통이라는 아이디어가 좋았습니다. 마지막에 기계에 대한 맹복적인 신뢰가 좀 거슬리기는 하는데 저연령을 타겟으로 한 것 같기에 납득할 만 했고요. 별점은 3점입니다.

"불안정성"

빅뱅의 시작에 대한 독특한 아이디어가 담긴 쇼트쇼트입니다. 그냥저냥 평범한 소품으로 보이네요. 별점은 2.5점.

"신이 되려 한 알렉산더" 

컴퓨터 천재 알렉산더가 뛰어난 컴퓨터 부세팔러스를 만들어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는 내용입니다. 컴퓨터를 이용하여 주식 및 각종 사회 현상을 예측한다는 아이디어는 새로울게 없지만, 부세팔러스의 능력이 너무 막강하여 과거에 없었던 '변수'가 된 바람에 마지막에 다운된다는 결말은 신선했어요. 부세팔러스가 알렉산더를 대치하려는 야망을 품는다는 결말은 어땠을까 싶은데, 그럼 너무 뻔했을까요? 별점은 3점입니다.

"협곡에서" 

화성 협곡에 사는 화자가 보낸 편지로 이루어진 작품입니다. 일상계 SF라고 할 수 있겠죠. 화성 협곡이 장래 화성 개발의 미래가 될 거라는 내용은 과학적 이론으로 무장되어 향후 개발 과정에 대한 높은 설득력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재미는 없었어요. 드라마가 없으니까요. 별점은 2점입니다.

"지구여 안녕"

정착지라 불리우는 우주 식민지 주민이 지구에 던지는 경고, 즉 정착지 자체가 머나먼 우주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주장은 상당히 합리적이기는 하지만 시스템의 개선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를 너무 극단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기도 하더군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전송가"

화성에서의 하이퍼스페이스 실험을 원하는 지구정부가 반대파 화성 거주민을 설득시키기 위해 프랑스 국가를 이용한다는 황당한 내용이 설득력있게 전개되는 유머러스한 작품입니다. 

화성 거주민이 프랑스 출신이 많다던가, 프랑스 국가가 승리의 이념을 담고있다던가 하는 식인데 결말은 '라 마르세예즈'를 이용한 말장난 '마르스 세이 예스!'로 끝나긴 하지만 위트가 넘쳐서 마음에 듭니다. 별점은 3.5점.

"페그후트와 법정" 

미국 속담을 이용한 말장난 유머로 작품이라기 보다는 짧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아니나다를까 만담선집에 수록된 작품이네요. 영어에 능통하다면 즐길만한 이야기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왠지 마크 트웨인이 연상되는 소품이었어요. 별점은 2.5점입니다.

"오류 불허" 

컴퓨터 - 워드프로세서가 작가의 글쓰는 법을 터득하여 창작 기계로 거듭난다는 이야기입니다. "칼"과 동일한 소재이지요. 

그런데 전개가 평이합니다. 기계가 학습을 통해 인간 이상의 능력을 지니게 된다는 케케묵은 설정의 변주로 밖에는 보이지 않네요. 결말도 무덤덤했고요. 그냥저냥한 평작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키드" 

산아제한이 있는 미래사회를 배경으로 한 작품은 많죠. 하지만 이 작품은 아시모프 작품 답게 산아제한의 해결책으로 로봇형제를 제시합니다. 그리고 결말에는 서늘한 반전까지 등장하는 좋은 작품이었어요. SF작가로서의 아시모프와 추리작가로의 아시모프가 공존하는 작품이랄까요? 별점은 4점입니다.

"우주공간의 나라들 : 현대의 우화" 

적대국가의 사람들로 짜여진 지구의 에너지원 핵심 조작 설비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교훈적인 우화입니다. 그런데 너무 교훈적이라 재미도 없고 작품으로 보기도 민망했어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칩퍼의 미소" 

타인의 생각을 조작할 수 있는 특수계층 칩퍼에 대한 짤막한 스릴러입니다. 두 칩퍼 중 더욱 뛰어난 능력자를 골라야 하는 테스트가 이야기의 핵심인데, 솔직히 잘 이해가 되지는 않더군요. 회사의 지위보다는 누구나 부러워하는 미모의 여성과 사귀게 된다면 별로 나쁘지 않아 보이는데 말이죠. "스캐너즈" 정도의 피튀기는 이야기가 전개되어야 설득력을 좀 지닐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되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골드" 

컴퓨드라마를 제작하기 위해 자칭 작가라는 러보리언이 컴퓨드라마 제작자 윌라드를 찾았다. 자신의 작품 "하나에 셋"을 제작해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하나에 셋"에 대한 짤막한 소개와 함께 컴퓨드라마 제작이 펼쳐지는데...

휴고상 중편 부문 수상작. 컴퓨드라마는 현재 시점에서 보자면 완벽한 풀3D 애니메이션 제작을 의미하는 듯 한데, 시간을 앞서간 아시모프의 빛나는 발상이 느껴집니다. 

그런데 솔직히 상을 탈만한 작품인지는 의문입니다. 번역자 해설에 따르면 세속적 하류 문화로 취급받는 장르 문학을 불멸로 만들기 위한 갈망을 드러냈다고 하는데, 아시모프 정도 되는 지위의 작가가 이러한 갈망을 표현한다는 것이 좀 억지스러워 보였습니다. 제가 SF팬이 아니라서 그러한 기분을 느꼈을지도 모르겠지만... 별점은 2.5점입니다.

2018/05/25

그대 눈동자에 건배 - 히가시노 게이고 / 양윤옥 : 별점 2점

그대 눈동자에 건배 - 4점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현대문학

2011년 ~ 2016년 사이 발표되었던, 비교적 신작들로 이루어진 히가시노 게이고단편집입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실망스럽네요. 고민 없이 단순한 아이디어에 의지해 써내려 간 작품이 대부분인 탓입니다. 추리물 성향의 작품들도 트릭의 깊이가 부족하거나 지나치게 작위적인 등 정교한 맛이 부족하고요.

이야기 꾼 히가시노 게이고 작품답게 쑥쑥 읽히는 맛은 있지만 전체적으로 기대에 미치지는 못했기 때문에 별점은 2점입니다. 작가의 팬이시라도 구태여 찾아보실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스포일러 가득한 각 수록작 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새해 첫날의 결심" 

새해 첫 날, 신사 참배를 가던 다쓰유키와 야스요 부부는 신사에서 속옷만 입은 남자가 기절한걸 발견하고 경찰에 신고했다. 그는 군수로 머리에 둔기로 타격을 입고 쓰러진 상태였다. 신사로 향하는 길은 외길로 부부는 아무도 보지 못했고, 군수의 옷은 멀리 떨어진 공원에서 발견되는 등 사건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흘러가는데... 

외길로 갇힌 공간에서 벌어진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일종의 밀실 트릭이, 피해자의 옷이 전혀 다른 곳에서 발견되었다는 점에서는 일종의 순간 이동 트릭이 사용된 불가능 범죄물입니다.

하지만 추리적으로 대단한 의외성을 지닌 작품은 아닙니다. 신사로 오는 동안 범인을 보지 못한 이유는? 당연히 신사에서 아직 도주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범인은 경찰이 조사하지 않은 유일한 장소에 숨어있다는게 진상이지요. 그래도 이 밀실(?) 트릭은 그런대로 설득력있게 설명되기는 합니다만, 군수가 옷을 벗은 이유는 문제가 아주 심각합니다. 한 여인을 두고 교육장과 벌인 달리기 시합에서 이기기 위해 벗고 뛰었다는게 진상이거든요. 전혀 설득력있게 다가오지 않습니다. 옷을 벗고 뛴다고 더 빨리 뛸 수 있는게 아니니까요. 불편한 구두를 언급하며 신발 정도를 벗었다면 모를까, 속옷만 입고 뛴다는건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안됩니다. 

결말도 문제입니다. 사실 다쓰유키와 야스요 부부가 자살을 결심한 상태였으며, 이 둘이 이러한 황당 사건을 접하고 삶에 대한 희망을 품는다는건 구태여 붙일 필요 없는 사족이었습니다. 시리즈 물도 아니고, 독자가 전혀 알 필요가 없는 쓸데없는 정보였어요.

추리 작가로서의 히가시노 게이고의 솜씨가 엿보이기는 하나 여러모로 작위적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10"

추리작가 미네기시는 10년 전 갑자기 사라진 옛 애인 쓰다 치리코의 연락을 받고 밸런타인데이에 재회했다. 둘은 옛 이야기, 그의 작품 이야기를 식사와 함께 이어갔다. 그러던 중 갑자기 치리코는 옛 동아리 멤버였던 후지무라 에미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는데...

미네기시가 10년 전 저지른 범죄에 대한 진상을 치리코가 풀어내는 내용으로, 후지무라 에미의 친구였던 치리코가 에미로부터 전해들었던 습작 줄거리가 미네기시가 발표한 소설과 똑같다는게 증거입니다. 즉, 작품을 훔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야기지요.

설정도 진부하고 전개도 일방적인 치리코의 주장 뿐이지만, 사건 당시 데이터가 삭제되었던 후지무라 에미의 노트북을 복원하여 이를 가지고 미네기시의 범행을 증명하는 과정은 잘 짜여져 있습니다. 데이터를 몰래 훔쳐내고 노트북 데이터는 지웠지만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는 미네기시의 주장을 논박하는게 핵심인데, 앞 부분에 살짝 등장한 미완성 휴재작 "심해의 문"이 여기서 효과적으로 사용되는 덕분에 설득력이 높아요. 아이디어가 고갈된 미네기시가 마지막으로 미완성작까지 손댔지만, 결국 완성하지 못했는데 마지막 데이터는 그녀가 살해당한 날 저장된 것으로 밝혀졌기 때문이지요. 정황 증거이기는 하나 이 정도면 결정적이라고 해도 무방해 보입니다.

미네기시가 아무리 별로라도 10년이나 프로로 활동했다면 최소한의 실력은 쌓았을텐데 너무나 무능하게만 그려진 것, 마침 치리코가 후지무라 에미의 친구였다는 점, 또 그녀가 경시청 형사라는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 등은 지나치게 편의적이고 작위적이라 좀 더 고민이 필요했지만 이 정도면 단편으로는 괜찮은 수준입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오늘 밤은 나 홀로 히나마쓰리"

사부로는 딸 마호의 결혼 소식을 듣고 놀라지만, 상견례 자리에서 사돈 식구를 보고 더 놀란다. 사돈 가문이 큰 종합 병원을 운영하는 지역 유지였기 때문이었다. 엄한 시어머니 때문에 힘들어 한 자신의 아내를 기억하고 있는 사부로는 사돈 부인의 엄격함을 알게 된 후 마호에 대한 걱정이 커지는데... 

사부로의 죽은 아내 가나코는 시집살이가 힘들었지만, 여러가지로 극복하고 즐겨왔다는걸 "히나마쓰리" 인형 장식과 사진을 통해 드러내는 일종의 일상계 작품입니다.

일상계는 제가 좋아하는 장르이기는 한데 이 작품 속 히나마쓰리 인형 장식을 가지고 한 장난은 추리라고 보기에는 너무 사소합니다. 지나치게 일본적인 소재라 우리에게 와 닿기도 어렵고, 어차피 약간의 장난에 불과한 탓입니다. 이 정도 만으로 "모든게 다 괜찮았고 앞으로 잘될거다" 라는 식으로 끝내는 결말도 안이했고요. 얼마나 시어머니가 괴롭혔으면 이렇게까지 몰래 숨어서 사진을 찍었을까 하는 애처로움이 생겨나야 정상일 것 같은데 말이지요. 

제가 딸 자식을 가진 부모라 그런지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그대 눈동자에 건배"

"나"는 우연히 나간 미팅에서 애니메이션 캐릭터같은 화장을 한 모모카를 만나 사귀게 되었다. 하지만  그녀가 자신에 대한 것은 철저히 감춘 탓에 둘은 애니메이션 관련 이야기만 나누었다. 그녀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나에게, 모모카는 자신에 대해 알면 실망할거라며 콘텍트 렌즈를 뺀 모습을 보여주는데...

표제작입니다. 머리에 염색을 하고 빠칭코와 경마장을 출입하는 "나"가 도박 중독자가 아니라 '미아타리 수사'에 종사하는 경찰관이었다는 반전이 선보입니다.

그러나 '미아타리 수사' 라는 수사 방식에 대해 조사한 뒤, 지명수배자의 특징을 기억하여 범인을 찾아내는 이 수사 방법의 포인트가 나이를 먹어도, 살이 찌거나 빠져도, 성형 수술을 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눈매라는 것에 착안하여 별 생각없이 작품으로 써 내려간 티가 물씬 납니다. 모모카가 지명수배자였다는 것을 알아내는게 콘텍트렌즈를 뺀 후였다는 장면 때문이에요. 아무런 고민 없이 그냥 "눈매" 를 숨기기 위한 방법으로 콘텍트렌즈를 선택한 것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거든요. 콘텍트렌즈 착용은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덧붙인 정도만으로는 많이 부족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우연에 기반한 작위적인 설정이 반전의 핵심인 탓이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미야타리 수사" 에 대해 알게 된 것 정도만 수확이네요.

"렌털 베이비" 

에리는 장기 휴가동안 휴머노이드로 가상 육아 체험을 하게 해 주는 사업에 등록한 후, 파트너 아키라와 함께 육아에 고군분투하며 모성애에 눈을 뜬다...

히가시노 게이고 스타일이 조금 덧붙여지기는 했지만 호시 신이치쇼트쇼트 SF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휴머노이드를 이용한 가상 육아 체험 서비스 사업이라는 기발한 아이디어에 더해, 아키라 역시 가상 육아 체험을 위한 계약 파트너에 불과했으며 에리가 60살이라는 것이 밝혀지는 반전 덕분입니다.

특히 반전이 핵심이에요. 아들 대신 가짜 로봇, 휴머노이드를 아들로 양육한다는 흔해빠진 이야기와는 다르게 육아를 체험하는 서비스를 내세운 것도 신선하지만 이 반전으로 인하여 모든 걸 가상 체험하게 만드는 미래 사회가 어떨지 잠깐 생각해보는 계기가 되었거든요. 정말로 귀찮고 힘든건 단지 잠깐의 체험만으로 끝나게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물론 이만큼 기술이 발달하면 귀찮고 힘든건 로봇이나 기계가 대신 해 주겠지만요.

고전 쇼트쇼트에 대한 경의와 함께 여러모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좋은 소품으로 별점은 3점입니다.

"고장난 시계"

"나"는 무직으로 모종의 브로커를 통해 수상쩍은 일을 가끔 하고 지내던 중, 한 맨션에서 흰색 조각상을 가져 오는 의뢰를 받았다. 하지만 "나"는 집을 뒤지다가 집 주인을 죽이고 마는 사고를 저지른다...

특정 범행을 저지르기 위해 아무런 상관없는 누군가에게 의뢰한다는 설정은 흔하지만, 이를 의뢰인이나 피해자 시점이 아니라 수행 당사자 시점에서 묘사한게 조금 특이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 손목의 시계가 범행 시간에 딱 맞춰 고장나 멈춘게 이상해서, 그걸 풀어 가져간 후 직접 고쳐서 되돌려 놓았다는 설정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최소한 가져갔다고 하더라도 그걸 고쳐서 되돌린다는 건 상식적이지 않아요. 

이 불필요한 행위로 꼬리가 밟혀 체포되는 결말도 작위적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고장난 시간이 범행 시각이 아니라 그날 아침이었다는 약간의 트릭인데, 비록 10 여분 정도 차이가 났다고는 하더라도 이건 너무 지나친 우연이에요. 흰 조각상이 사실은 특수한 방법으로 굳힌 마약이라는 설정도 불필요했고요. 그냥 상자 하나 가지고 오라고 하면 될 것인데 뭐 이리 과한 설정을 넣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네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상식적이지 않은 불필요한 행동, 있기 어려운 기이한 우연을 밀어 붙인 결과물이라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사파이어의 기적"

미쿠는 신사에 나타난 떠돌이 고양이와 친해진 후 "이나리" 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지만 이나리는 트럭에 치여 죽었다. 한편 "사파이어"라 불리우는 파란색 털을 가진 페르시아 고양이가 파란색 후손을 원하는 브리더들 사이에게 전설과 함께 떠돈다.... 

파란색 털을 가진 고양이와 고양이 뇌 이식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작품인데, 딱히 재미가 있다거나 새롭지는 않습니다. 있을 수 없는 색을 가진 무언가를 다룬 작품은 흔하니까요. "너버스 브레이크 다운"에서의 블루 앤젤 피쉬처럼요. 또 미쿠와의 인연을 뇌 이식으로 가져가는 전개도 불필요했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다운 따뜻하고 인정 넘치는 이야기이기는 했지만 이야기가 정리가 안되는 느낌이 강했거든요.

순종 페르시안이 아니라 잡종만 파란색 털을 가진다는 마지막 반전은 나쁘지 않았지만 전체적으로는 평범 이하의 범작이었습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크리스마스 미스터리"

배우 쿠로스는 자신을 옭아매는, 연상의 각본가 야요이를 살해하기 위해 크리스마스 이브에 알리바이 장치를 마련한 후 그녀를 찾아간다. 

쿠로스의 범행 장면에서부터 시작하는 도서 미스터리인데 쿠로스가 범행에 사용할 독극물을 야요이로부터 훔쳐냈다는 형편없는 설정이 발목을 잡습니다. 아무리 멍청해도 그렇지 이게 뭐하는 짓인지 모르겠네요. 이 작품에서도 독극물의 분량을 확인한 후, 야요이가 쿠로스에게 복수하기 위해 타살을 위장한 자살을 감행하니까요.

게다가 복수를 위해 그를 놓아주고 잘 해주는 척 하다가 뒷통수를 치며 자살한다는 야요이의 행동도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런 범행을 목격했다면 거미줄처럼 그를 더 옭아매어 아예 피를 쪽쪽 빨아 먹는게 상식적이잖아요? 실제 관계를 맺었던 다른 배우들을 파멸시켰다는 그녀의 전례를 비추어 본다면 이 정도로 상처를 입고 죽을 결심을 한다는 건 설득력이 낮습니다. 자살로 그녀가 얻을 건 단 한 개도 없기도 하고요. 쿠로스가 파멸한다고 해도 죽고 난 다음에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도서 추리로 전개되는 과정은 나름 흥미진진하지만 캐릭터 설정과 이야기의 핵심인 위장 자살의 설득력이 너무나 낮아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군요. 별점은 1.5점입니다.

"수정 염주"

지역 유지 와타라이가의 외동 아들 나오키는 안락하고 편안 생활을 포기하고 미국에서 배우로 성공하기 위해 7년 동안 고군분투하던 중, 아버지가 시한부 인생이라는 누나의 전화를 받는데... 

와타라이 가에 전해 내려오는, 타임 슬립을 가능하게 한다는 "수정 염주"를 가지고 풀어낸, 일종의 일상계 판타지입니다. 타임 슬립이 등장한다는 점에서는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떠오르네요.
아버지 신이치로가 이 힘을 사용한 건 아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마지막 결말을 통해 "끝까지 꿈을 포기하지 말고 노력하라" 는 희망찬가를 전해주는 것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늙은 나오키가 염주의 힘으로 아버지 회사를 뛰쳐나오기 전으로 돌아가 얌전히 회사를 물려받아 다닌다는 이야기가 현실적인 결말이 될 것으로 생각은 하지만, 뭐 판타지는 판타지로 남겨둬야겠죠.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을 재미있게 읽으셨다면 이 작품도 재미있으실 것이라 생각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