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보수 - H. P. 러브크래프트 지음, 정광섭 옮김/동서문화동판(동서문화사) |
<광기의 산맥>으로 유명한 H.P 러브크래프트의 중단편집입니다. 러브크래프트하면 보통 "크툴루 신화"가 연상되죠. 하지만 개인적으로 대체 그게 뭔지 그동안은 접해보지 않았었는데 이 책을 통해 어느정도 궁금증이 해소되었습니다. 작품들 모두가 유사한 설정을 갖추고 있기도 하지만 마지막 이야기가 바로 크툴루 신화 그 자체인 <크투루프가 부르는 소리> 거든요.
읽고나니 대체 왜 "크툴루 신화"가 세대를 초월한 전설이 되었는지 잘 알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압도적인 상상력과 묘사는 정말 발군이었어요. 20세기 초엽에 쓰여진 작품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말이죠. 또 모든 점에서 현대 그로테스크 호러 장르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그러나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에요. 워낙에 오래된 작품이라 이야기가 그닥 새로울게 없고 플롯이 원패턴일 뿐만 아니라 전개가 진부하기 짝이 없어서 압도적인 분위기를 전혀 살리지 못했습니다. 또 쿠투루프라는 발음이나 견신론자 등의 낯선 용어는 이 작품이 일본어 중역본임을 드러내서 아쉬웠고요. 생각만큼 번역이 별로는 아니었지만 용어 정도는 현대적으로 통일해 줬어야죠.
그래서 별점은 2점. 마지막 작품 <크투루프가 부르는 소리> 만큼은 3.5점을 줄 만큼 좋은 작품이기는 하나 전체적으로는 진부하고 낡은 느낌을 극복하기는 좀 무리였습니다. 물론 이건 21세기에 들어서야 읽은 제 탓이 큰데 과연 제가 이 작품을 당대에 읽었다면 어땠을까요? 대단한 컬쳐 쇼크를 받았을 것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과연 호평을 했을지 혹평을 했을지 궁금해지네요.
<인스마우스의 그림자>
정체를 알수 없는 마을에 우연히 방문한 외지인이 뜻밖의 위험에 빠진다는 호러 장르물은 그야말로 쎄고 쎘습니다. 보통 마을의 비밀이 무엇이냐에 재미의 촛점이 맞추어지곤 하죠. 이 작품에서도 역시나 마을의 비밀을 가지고 승부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한가운데 직구 승부랄까요. 그러나 직구의 구위가 정말 엄청나요. 비밀이 일종의 고대 괴물에 대한 의식과 관련이 있다는 한복판 직구에 "혼혈"이라는 설정을 집어넣어 볼끝에 변화를 주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한밤중에 인스마우스를 탈출하는 과정의 묘사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대단하거든요.
그러나 후반부에 이야기가 산으로 가버립니다. 마지막에 어설픈 변화구 하나 섞다가 역전 홈런을 허용한 기분이에요. 그만큼 작위적일 뿐 아니라 설득력도 전무한 반전이었습니다. 차라리 자살했다는 큰아버지 이야기를 앞부분에 복선으로라도 살짝 보여주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말이죠.
정말로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긴박감과 그로테스크한 묘사는 러브크래프트라는 작가 이름에 값하지만 어설픈 마무리는 실망스럽기에 별점은 2점입니다.
<벽속의 쥐>
저주받은 혈통과 그 비밀에 대해 파헤치는 고딕호러물.
이 바닥의 거장인 포 만큼의 현란한 묘사는 아니지만 스멀스멀 올라오는 불길함을 묘사하는 것 하나만큼은 더 뛰어난게 아닌가 생각될 정도로 발군이더군요. 고대인에서 시작된 저주받은 의식의 스케일도 엄청나고요.
그러나 후반부의 각성 및 뒤이은 결말은 너무 갑작스러웠습니다. 가문이고 뭐고 다 잊은채 미국에서 한재산 모은 후손이 저주의 현장을 보자마자 각성한다? 너무 설득력이 없잖아요. 이럴거였다면 전문가로 이루어진.발굴팀은 대체 왜 등장시켰는지도 모르겠고 말이죠.
그래서 별점은 1.5점. 초중반부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한 용두사미 결과물인데 차라리 앰브로오즈 비어스처럼 짧게 마무리하는게 어땠을까 싶네요.
<어둠속의 속삭임>
시골 지주 에이크리가 신비학자 월모트에게 보낸 편지와 홍수때 발견된 기묘한 생물의 사체 목격담에서 시작되는 작품으로 이 생물체들이 명왕성에서 온 외계인이라는 진상과 함께 에이크리의 비참한 종말, 또는 상상으로 끝맺는 작품으로 SF - 호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경악스러울 정도로 무시무시한 묘사는 역시나 발군으로 정말 이 작가의 괴기스러운 묘사는 타고난게 아닌가 싶을 정도에요. 그러나 후반부 급작스러운 에이크리의 편지에서부터 이어지는 결말은 너무 뻔하고 상상력의 범주 안에 있어서 아쉬웠어요. 극적 반전이 대단할 필요는 없지만 너무 예상대로 전개되는 것도 문제긴 하니까요. 덧붙여 밝혀지는 외계인들의 정체도 식상했고 말이죠.
뇌를 담는 원통과 이를 통해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을 그려낸 상상력은 현대 SF에 적용되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지만 역시나 결말은 후한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월모트의 탈출이 별로 긴박하게 그려지지 못한 것도 감점요소고요. 별점은 1.5점입니다.
<크투루프가 부르는 소리>
앞선 이야기들의 기원이라 할 수 있는 크투루프 신화를 전면에 드러낸 정통 그로테스크 호러 작품으로 이 중단편집의 메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주인공의 학술적 탐구를 통한 수기 형식으로 쓰여져 있는데 덕분에 상당한 수준의 설득력을 보이기도 하고요. 물론 몇몇 인물의 증언에만 기대고 있다는 약점이 있기는 하나 천재 조각가, 경찰, 선원 등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하나의 이야기로 완성되는 전개는 지금 읽어도 충분히 설득력있고 압도적인 전개였습니다.
무엇보다도 태고의 신이 별자리가 제자리로 돌아올 때 다시 지상을 지배할 것이라는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이만큼이나 묘사했다는 것은 온전히 작가의 능력일테고 그래서 크툴루 신화가 하나의 전설이 된 것이 아닐까 싶어요. 노르웨이 뱃사람의 기록을 통해 밝혀지는 신화적인 유적지와 크투루프에 대한 묘사는 너무 대단해서 말을 잃을 정도였거든요.
학술적 탐구에 이어 일종의 유언으로 끝나기 때문에 급작스럽기도 하고 완결된 이야기라는 느낌을 주지도 않는다는게 단점이기는 하나 지금도 생명력을 가진채 수없이 모방되고 인용되는 거대 서사의 기원이라는 점 때문이라도 꼭 한번 읽어봐야 하는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별점은 3.5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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