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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11/28

서술트릭의 모든 것 - 니타도리 케이 / 김은모 : 별점 1.5점

서술트릭의 모든 것 - 4점
니타도리 케이 지음, 김은모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서점의 명탐정"의 작가 니타도리 케이의 단편집입니다. 원제는 간단하게 "서술트릭 단편집"이네요.

처음에는 서술트릭을 쓴 작품들을 모아놓고, 트릭들을 분석해 놓은 책일거라 생각했는데 단편집이라서 의외였습니다. 서술트릭은 작가가 독자를 속이는게 핵심인데, 이 책에 수록된 단편은 모두 서술트릭물이다! 라고 서두에서 알려주는 것도 독특했고요. 한 마디로 "속일테니 맞춰봐라!"라는 마술사의 마술 공연같은 발상이었달까요? 독특하면서도 신선했고, 그 패기도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작품들 수준은 영 기대에 미치지 못했습니다. 서술 트릭을 사용하려고 무리수를 둔 작품들이 많은 탓도 크지만 가장 큰 문제는 만화적이고 과장된 탐정 캐릭터 벳시의 존재때문입니다. 그래서 전체 평균한 별점은 1.5점입니다.

수록작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뻥 뚫어주는 신" 

주식회사 세븐티즈의 2층 화장실 변기가 막혀 물이 넘쳤었는데, 업자를 부르기 전에 뚫렸고 바닥도 깨끗하게 청소된 채 발견되었다. 누가 몰래 이런 기특한 짓을 하였을까? 궁금해하던 직원들에게, 지나가던 프리랜서 기자 벳시가 난입해 사건을 해결한다.

한 명을 제외한 등장인물들 모두가 70세가 넘은 노인들이라는게 서술트릭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작품은 아니었습니다. 내용에서 설득력이 거의 전무한 탓입니다. 막힌 변기를 뚫고 바닥 청소를 하는걸 몰래 할 필요가 없잖아요? 그것도 1층 화장실 창문을 통해 2층 화장실 창문으로 몰래 기어 올라가면서까지 말이죠. 때문에 이런 무리한 활약은 노인인 다른 사람들에게는 무리였고, 그래서 유일한 여고생인 아르바이트 우미짱이 범인이었다! 는 추리도 억지스러웠어요. 서술 트릭은 중요하게 사용되지도 못한 셈이지요. 화장실 매니아 벳시는 억지를 넘어선, 만화같은 존재라 더 와닿지 않았고요.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등을 맞댄 연인" 

호리키 히카루는 히라마쓰 시오리가 블로그에 올리는 사진을 본 뒤,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시오리도 히카루의 다정한 모습을 먼 발치에서 바라보고, 똑같은 감정을 품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 명 다 서로에게 다가갈 기회를 찾지 못해 애태우던 와중에, 시오리가 속해 있던 사진부에서, 암실 사진 확대기 필터가 0호로 바꿔치기된 사건이 일어났다. 유력한 용의자는 사진부 부장의 연인으로 부장과 싸운 뒤, 부장에게 복수심을 품었을 마쓰모토였다. 그러나 그녀는 범행 시각에 사진부와는 반대쪽에 있는 도서관 앞에서 호리키 히카루에 의해 목격되었다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호리키 히카루와 히라마쓰 시오리가 서로에게 호감을 갖고, 서로에게 다가가기 위해 각자 계획을 세우는 이야기를 시점을 바꿔가며 전개하는 청춘 연애물에서 급작스럽게 일상계 추리물로 전환되는 작품입니다. 

청춘 연애물로는 좋습니다. 두 청춘의 감정이 풋풋하면서도 귀엽게 묘사되고 있으니까요. 트릭도 깔끔합니다. 서술 트릭의 핵심은, 호리키 히카루가 마쓰모토라고 생각했단건, 사실은 히라마쓰 시오리였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쓰모토의 알리바이는 없어지고, 그녀가 범인이라는게 밝혀지게 되지요. 호리키 히카루가 시오리를 마쓰모토로 오해하게 된 계기도 잘 설명되고 있으며, 서술 트릭을 위한 억지도 눈에 뜨이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그러나 '벳시'라는 지극히 비현실적인 인물을 끼워넣은게 문제입니다. 자연스러운 일상계 추리물에 갑자기 만화 주인공이 등장한 느낌이거든요. 부자연스러울 뿐 아니라, 묘사와 행동은 유치할 정도였습니다. 벳시를 등장시켜 전체을 연작 단편 시리즈로 묶으려는 어리석은 노력을 하느니, 차라리 독립된 단편 작품으로 만드는게 훨씬 좋았을 겁니다. 모두가 한 자리에 모인 상태에서 서로 이야기를 하다보면, 사람을 잘못 알았다는건 바로 드러났을테 어차피 탐정이 필요하지도 않으니까요. 오해의 원인은 호리키 히카루의 여동생 소라나가 등장해서 설명해주면 되고요.

결론적으로 별점은 2.5점입니다. 서술트릭이 사용된 완벽한 청춘 연애 일상계 추리물이 될 수 있었는데, 벳시의 존재가 오점을 남겨 아쉽습니다.

"갇힌 세 사람과 두 사람"

강도단의 일원 아담, 해밀턴, 윌은 서로를 의심하고 있었다. 세 명이 잠깐 자리를 비운 틈에 샘슨이 누군가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산장에 있던 일본인 두 명은 꽁꽁 묶어 놓아서 움직일 수 없었다....

서술 트릭은 강도단이 묶어 놓은 일본인 2명이 벳시와 조수 우미가 아니었다는 겁니다. 둘은 강도단이 나오는 영화를 보러 왔던 거지요. 처음부터 미국을 무대로, 미국인 강도단이 나와서 뭔가 싶더라고요. 너무 비현실적이었으니까요. 진상도 역시나였고요. 왜 일본을 무대로, 일본인들이 등장하는 영화가 아니었을지 의문입니다. 독자를 속이는게 목적이 아니라, 이렇게 속일 수도 있다는걸 과시하기 위한 목적이었을까요?

서술트릭을 사용한 단편이라는 목적에는 충실했고, 강도단이 서로를 범인이라고 단정지으며 죽이는 과정의 추리는 제법 볼만했지만 작위적이었다는 느낌을 지우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별 생각없이 산 책의 결말"

벳시가 바텐더로 일하는 가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나는 잡담을 나누다가, 최근에 읽었던 책 속 트릭을 풀어내는 퀴즈를 내었다. 형사 사에지마 시리즈로, 산에서 낚시를 하던 네기시 기요시가 살해당한 사건이었다...

'나'와 벳시의 잡담 이후, 곧바로 '형사 사에지마 시리즈' 이야기가 이어지는, 일종의 액자 소설 구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너무나 착하고 성실했던 네기시 기요시가 살해당했던 이유는, 단골 스낵바에서 다른 단골 아라이에게 억지로 술을 권해서 먹였기 때문입니다. 아라이는 술만 먹으면 사람이 변해 폭력적이 되는 탓에, 오래 금주를 해 왔지만 네기시의 권유로 실패하고 말았던 거지요. 아라이의 음주 폭력으로 가족은 지옥같은 상황에 처했고, 그래서 둘째 아들 데쓰야가 복수를 하게 된 겁니다. 사용된 서술 트릭은 시점을 착각하게 만든 것이고요. 소설은 오래 전, 80년대에 발표되었던 작품이거든요. 

그러나 문제는, 이 서술 트릭은 사에지마 사건의 트릭을 풀어내는 것과는 무관했다는 겁니다. 데쓰야의 알리바이 - 범행 시각에 친구 누마타가 전화를 받았다 - 는 그 시간에 집 근처에서 있었던 선거 연설 방송을 다른 동네에서 미리 녹음해 두고, 친구에게 전화할 때 그 녹음을 틀었다는 간단한 조작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휴대용 플레이어만 있다면 어느 시대에나 가능했을 이야기입니다. 

'수화기를 내려 놓았다'는 묘사로 1985년 단기간에 생산되었던 NTT의 숄더백 핸드폰 '숄더폰'을 썼다고 추리하는건 완전 억지스러웠어요. 수화기 내려놓는 소리도 녹음했다가 틀면 되잖아요? 사에지마 소설 속 이런저런 디테일로 그 작품이 80년대 작품이라는걸 밝히는건 재미있었지만, 서술 트릭을 사용하기 위한 목적 외에는 작품의 시점이 다를 이유를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또 벳시 씨는 책이 오래 전 발표되었을 수도 있다는걸, 그동안 있었던 동네 서점 이벤트로 잘 알고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공정함도 부족한 편이고요.

그냥 사에지마 시리즈 단독으로만 보아도, 녹음기 트릭이 잘 사용되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이 트릭이 없었어도 범인 체포는 어렵지 않았을 거에요. 매주 일요일 네기시를 감시했던 데쓰야의 행동에 대한 증언이 나왔다면 바로 체포할 수 있었을테니까요. 아라이 가족에 대해 수사하고, 아라이 이사무의 주폭 행위를 추리해 내는 등의 디테일은 괜찮았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작품으로 보기는 힘들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은 많이 사용된 편이지만, 핵심 서술 트릭은 무의미했고, 이야기의 설득력도 약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드네요.

"빈궁장의 괴사건" 

너무나도 저렴한 방세 덕분에 외국인 유학생과 고학생들에게 인기있는 '유명장'은 흡사 교도소나 폐가같은 상태로 '유령장' 이라고도 불리우고 있다. 어느날, 세입자 중 한 명인 중국인 리의 귀중한 '하이셴'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범인은 사건 발생 시간에 있었던 유령장 세입자가 분명했다. 일본인 유아사, 세네갈인 응가보, 태국인 마시, 한국인 최선배였다...

태국인이 두 명이었다는게 서술 트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마시 오카를 닮은 라챠시챠나논미챠시브와실라, 잘생기고 양복을 입는 '챵' 라챠시챠논이챠시브와실라 두명이었던 거지요. 챵은 왼손잡이인데, 범인은 오른손잡이라는게 증명되었습니다. 하지만 둘이 '마시 오카' 한 명으로 오인된 탓에 그가 범인이 아닌 것 처럼 착각하게 만든 겁니다. 하지만 실제 소설 속 사람들에게는 명백히 두 명이라서, 이 서술 트릭은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긴 태국인 이름의 글자 한 자를 바꿔쳐서 독자를 속이려고 했던건 너무 조잡해 보였어요.

마시 오카가 벽 시계 위에 가짜 시계를 붙여서 응가보가 시간을 착각하게 만든 장치 트릭이 더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는데, 이 장치 트릭은 나쁘지 않고, 나름 설득력은 있었던 만큼, 억지로 서술 트릭을 넣으려고 몸부림 치는 것 보다는, 이 장치 트릭 중심으로 풀어나갔더라면 훨씬 좋았을 것 같아요. 벳시의 등장도 유치하고 만화적이었던건 마찬가지라, 당연히 빼는게 더 나았을 테고요.

제 별점은 2점입니다. 서술트릭 연작을 만들기 위해 잃은게 더 많았던 작품입니다. '하이셴'이 결국 무엇이었는지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 등 유쾌한 분위기만큼은 나쁘지 않았기에, 여러모로 아쉽네요.

"일본을 짊어진 고케시 인형" 

벳시 탐정 사무소에 정계 여당의 거물 다와라다 고사부로가 찾아왔다. 그는 일본의 미래를 걸고, 일본 내 유명 동상에 장난을 치는 걸로 유명해진 헤드헌터를 붙잡아 달라고 부탁했다. 벳시는 헤드헌터의 다음 목표물이 미야기현 센다이에 있는 세계 최대 고케시 오타네 짱이라는걸 알아냈고, 우미와 함께 현장으로 향해 잠복했다. 그러나 잠복에도 불구하고 오타네 짱도 헤드헌터의 장난 대상이 되어 버리고 말았는데....

단편집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작품입니다. 그런데 결과물은 수록작 중 최악이었어요. 헤드헌터의 장난은 정부에 비판적인 움직임을 보이는 정치단체 모션을 몰락시키기 위한 음모 - 모션의 리더가 연설하는 장소에서 헤드헌터가 장난을 친 뒤, 모션의 리더가 헤드헌터라고 음해할 목적 - 였다는 발상부터가 유치했고, 등장하는 벳시 씨가 전부 5명이었다는 서술 트릭도 한 번 속여보겠다!는 의도가 지나쳤어요.

뭐 이것까지는 그럴 수 있다 쳐도, 코케스 오타네 짱 얼굴에 낙서를 한 핵심 트릭은 황당하기 그지 없습니다. 벳시 씨 5명이 잽싸게 인간 사다리를 만들어서, 도장을 찍듯 낙서를 완성했다는건데 할 말을 잃게 만드네요. 이게 가능할거라고, 그것도 짧은 시간에 가능할거라고는 도무지 생각되지 않습니다. 3명 정도였다면 모르겠지만요. 오타네 짱이 있는 곳이 아니라, 오타네 짱으로 향하는 입구에만 카메라를 설치한 비상식적인 행동도 나중에나 트릭 때문이었다고 설명되지, 실제 잠복할 때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도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이전 이야기에 등장했던 벳시 씨는 모두 다른 사람이었고, 등장했던 우미 짱도 이전 이야기에 전부 등장했다는 등의 소소한 디테일도, 작품 내용이나 추리하고는 무관했습니다. 그야말로 최악이라, 별점은 1점입니다.

"작가 후기" 

간단한 소설과 함께 에필로그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소설은 딱히 언급할 수준이 아니었고, 앞서의 '독자에게 보내는 도전장'에 모든 작품을 풀기 위한 열쇠가 숨겨져 있다며 공개하는데, 나쁘지는 않았습니다만 "빈궁장의 괴사건"에서 등장인물 이름을 메모해보라는 것 외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는 열쇠는 없더군요. 앞서 말씀드렸듯 이름을 가지고 장난친 조잡한 트릭에 지나지 않는 탓입니다.

2016/01/12

모방살의 - 나카마치 신 / 최고은 : 별점 2.5점

모방살의 - 6점
나카마치 신 지음, 최고은 옮김/비채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7월 7일 7시, 추리작가 사카이 마사오가 청산가리를 음독하고 사망했다. 정황상 자살로 추정되었으나, 사카이의 약혼자 나카다 아키코와 친구 쓰쿠미 신스케는 의문을 품고 각자 사건의 진상을 추적해 나가는데.....

이런저런 추리 커뮤니티와 애호가들 사이에서 좋은 평을 받아서 관심 가던 차에 읽게 되었습니다. 읽어보니 확실히 추리적인 요소, 특히 트릭은 상당히 빼어나더군요. 추리 애호가들의 입소문을 타기에는 충분하다 싶을 정도로요.

추리소설가 사카이의 자살을 사카이의 약혼자 아키코와 친구이자 동료인 신스케가 각자 진상을 추적하는 과정을 교차하며 보여주는 전개가 가장 큰 특징입니다. 두 명의 시점을 오가는 교차 전개를 지닌 작품은 많지요. 그런데 이 작품은 여기에 트릭을 결합시켜 놓았습니다. 두 시점이 서로 다르다는 서술 트릭이지요.
핵심 트릭 중 하나인 '두 명이 알고 있는 사카이는 다른 사람이다!'는 중반 정도에 비교적 쉽게 눈치챌 수 있기는 합니다. 나카다 아키코의 약혼자 사카이는 출판사에서 정서 아르바이트를 할 정도로 깔끔한 원고를 쓰는 사람인데 신스케의 친구 사카이의 원고는 지저분하다는 설명이 가장 큰 단서였어요. 트릭을 알고 나니 그 외의 몇 가지 자잘한 단서들도 눈에 뜨이더군요. 아키코가 약혼자 사카이의 신인상 수상을 몰랐다던가... (다른 사람이니까)
하지만 이는 단점은 아니에요. 외려 공정하다는 측면에서는 높이 평가합니다. 또 작품이 발표된 시기를 고려해 본다면 (첫 발표는 1970년대) 상당히 앞서나간, 놀라운 아이디어라 생각됩니다. 저도 다른 서술 트릭물을 많이 접해보았으니 눈치챘지,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 무척 놀랐을 것 같네요.

게다가 이 트릭 하나에 그치지 않는 점도 대단합니다. 즉 두 사건이 1년의 시차를 두고 벌어졌다는 다른 서술 트릭도 등장하며, 곁가지로 사용된 트릭들도 나무랄 데 없습니다. 아키코 - 사카이 사건에서의 사진을 활용한 알리바이 트릭,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 열차와 충돌한 트럭에 쓰여진 회사 이름("오코노기" / "고시바")를 활용한 트릭 등이 그러합니다. 물론 이건 트릭이다! 라는게 노골적이라서 약간은 추리 퀴즈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수준도 높고 작품과 잘 연결되어 재미있게 묘사됩니다.
서술 트릭과 함께 이러한 트릭들이 연이어 펼쳐진다는 점에서 작가의 노력이 여실히 느껴지네요. 이렇게까지 아이디어를 아낌없이 투입한 역작은 최근에 본 적이 없으니까요.

범행에 관련된 동기도 비교적 설득력이 높아서 와이더닛 물로도 괜찮습니다. 아키코 - 사카이 사건에서 뇌성마비 아이와 관련된 유괴, 거액의 현금이라는 동기와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의 유명 작가 표절에 얽힌 동기 모두 그럴듯했어요. 특히나 신스케 - 사카이 사건에서 거장 세가와의 작품을 표절한 것으로 알려진 사카이의 작품에 얽힌 진상 - 사실 세가와가 1년 전에 죽은 사카이의 작품을 표절한 것이었고, 이 노트를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우연히 입수한 1년 후의 사카이가 표절한 것이라는 표절의 윤회 - 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제목 그대로 첫 번째 사건을 "모방"한 이유도 비교적 타당하고요.

하지만 이러한 장점들에도 불구하고 좋은 작품이냐고 하면 선뜻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습니다. 우선 이름이 같은 다른 두 사람이 1년의 시차를 두고 같은 날 같은 시간에 같은 방법 (청산가리 음독)으로 자살한다는 것부터 트릭을 위해 사건을 만든 느낌이 드는 탓입니다.

물론 이런 작위적이라는 굴레는 본격물이 숙명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고, 트릭이 빼어나서 단점이라고만 하기 어렵습니다만, 소설로서의 완성도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아키코와 신스케가 각자 범인으로 지목한 인물들, 즉 도가노 리쓰코(아키코)와 야나기사와 구니오(신스케)를 대면하자마자 즉흥적으로 범인임을 확신하고 공격하는 등 이야기의 밀도와 설득력이 낮기 때문입니다. 택시에서 몇 마디 들은 것을 가지고 처음 만난 사람을 살인범으로 몬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요.

또 비교적 공들인 트릭인 사진을 이용한 알리바이 트릭을 사용했음에도 첫 번째 사카이의 죽음은 자살이라는 것이 밝혀진다던가, 마찬가지로 알리바이를 공작한 편집장 야나기사와 구니오가 실제로 범인이 아니었다는 결말도 허탈했고요.

작가 스스로도 정말 여러 번 고쳐서 발표한 작품이라는데, 고쳐 쓴 작품이 이 정도라면 역량 부족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괜한 욕심에 여러 가지 트릭을 넣어 이야기를 키우지 말고, 차라리 서술 트릭에 1년간의 시차를 이용한 표절의 윤회 중심으로 보다 짧게 썼더라면 완성도는 높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사카이 유괴 사건과 그로 인한 자살, 슌스케의 사카이는 표절의 진상 폭로를 걱정한 나카이에게 살해당한다 정도면 아주 깔끔했을 텐데 말이지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좋은 트릭들이 결합된 좋은 추리물입니다.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캐릭터와 묘사 역시 트릭에 비하면 좋다고 하기 어렵기에 감점하지만, 추리 애호가라면 한 번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2011/11/17

로트레크 저택 살인사건 - 쓰쓰이 야스타카 / 김은모 : 별점 2점

로트레크 저택 살인 사건 - 4점
쓰쓰이 야스타카 지음, 김은모 옮김/검은숲

이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상당히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의하여 주세요.

8살 때 친구 때문에 허리를 다쳐 하반신 불구가 되고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한 시게키는 어렸을 적 살던 로트레크 저택에 친구와 함께 방문했다. 그들이 아름다운 아가씨들, 멋진 그림과 함께 보낸 즐거운 시간은 곧이어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으로 악몽으로 돌변하는데...

"시간을 달리는 소녀"로 잘 알려진 천재 중의 천재라는(그러나 개인적으로 솔직히 이해하기는 어려운) 쓰쓰이 야스타카의 몇 안 되는 본격 추리물입니다. 명성은 익히 들어왔습니다. 이런저런 리스트에 선정된 작품이기도 하고, 예전에 이런 글을 남겼을 정도로요.

쭉쭉 읽히는 재미는 확실해서 한 번에 읽을 수 있다는 점은 확실히 명성에 값합니다. 무려 3건의 살인 사건이 벌어져서 지루할 틈도 없고, 호흡과 길이도 적당한 덕분입니다.

무엇보다도 출판사 비밀 홈페이지에서 밝혔듯, 나름 공정하면서도 디테일한 여러 장치들이 공들여 짜여져 있어서 본격물로서의 가치가 아주! 높다는게 가장 큰 장점입니다. 약도를 비롯한 디테일들을 되짚어 보면 정말 감탄이 저절로 나올 정도예요. 예쁘게 만든 책의 만듦새도 좋습니다. 곳곳에 삽입된 로트렉 작품 컬러 화보 등의 디테일도 마음에 들고요.

하지만... 아쉽습니다. 국내 출간이 너무 늦었어요. 인칭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전형적인 서술 트릭 작품인데, 정확하게 트릭을 파악하지는 못했지만 초반의 도입부부터 "아, 이렇게 독자를 속이려고 하는구나"라는 게 티가 팍 났거든요. 이 모든 게 "벚꽃지는 계절에 그대를 그리워하네", "살육에 이르는 병", "통곡", 오리하라 이치의 "도착 시리즈" 등 후대의 서술 트릭물을 너무 많이 접한 탓이지요.

또 다른 서술 트릭의 걸작들과 비교하면, 진범을 숨기려는 노력이 너무 작위적이라 거슬리기까지 했습니다. 분명히 한 명이 더 있는데 그것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하다 보니 묘사의 설득력이 많이 떨어지고, 억지스러운 부분이 있어서 공정한 느낌이 전혀 들지 않았거든요.

국내에서는 친숙하지 않은 일본 이름을 이용한 전개도 불만스러운 부분이었습니다. 이름을 이용할 것이었다면 차라리 "십각관의 살인"처럼 결정적 트릭으로 써먹었더라면 모르겠지만 하마구치 - 시게키 - 구도라는 등장인물의 호칭이 성인지 이름인지를 불명확하게 흐린 점은 서술 트릭을 위한 꼼수로 밖에는 느껴지지 않더군요.

아울러 추리적으로 본다면 서술 트릭 외에는 점수를 줄 부분이 거의 없습니다. 최소한 다른 트릭이나 장치가 한 개 정도 더 있어야 했습니다. 사건 자체의 수수께끼나 트릭은 없고 결국 경찰이 사건을 해결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트릭만 놓고 보면 시대를 앞서간 좋은 작품이고, 나름 정교한 부분은 높이 평가할 만합니다. 20년, 아니 10년만 먼저 출간되었더라도 꽤 충격을 가져다줄 수 있었을 텐데 안타까울 뿐이네요.

여러 서술 트릭 작품을 많이 읽지 않으신 독자분들께는 추천하지만 그렇지 않은 추리 애호가분들에게는 좀 심심한 작품일 수 있다는 점 염두에 두시길 바랍니다. 그러고 보면 아이디어에 의존하는 작품의 아이디어가 퇴색하는 순간 작품 자체가 빛을 잃는다는 예술사 고유 명제를 증명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2023/11/18

명작 추리 소설 5선 : 이 서술 트릭이 굉장해!

소설에 대해 안내하고 소개해주는 일본 사이트 '소설마루' 에서 발견한 글입니다. 가볍게 소개해 드립니다.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의 핵심 트릭이 노출되어 있으니, 읽으시기 전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2010/04/07

도착의 사각 - 오리하라 이치 / 권일영 : 별점 1.5점

도착의 사각 - 4점
오리하라 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서술트릭의 대가로 알려진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입니다. 대표작이기도 한 "도착의 론도"도 그냥저냥이었기에 별로 땡기지는 않았지만 "도착" 시리즈는 한권정도 더 읽어볼 생각이었기에 읽게 되었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도저히 봐 줄 수 없는 수준의 작품이더군요.

일단 서술트릭이라고는 하지만 설정과 이야기에 현실성이 전무하고 억지로 짜 맞추었을 뿐입니다. 서술트릭의 기본이 되는 기본 전개가 두 주인공의 정신이상에 근거를 두고 있으니 당쵀 설득력이 있을 수가 없죠. 차라리 정신병원에서 두 정신병자가 침대 양 옆에서 이야기를 전개시켰다고 하는게 더 재미있지 않았을까요? 물론 정신병과 망상을 글로 써내려 간 것을 진실처럼 포장하는 것도 서술트릭의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이중구속"은 걸작이죠) 이 작품에서는 독자를 납득시키는 요소가 전무한, 그야말로 트릭을 위한 설정일 뿐이었어요.
그나마 중심이 되는 서술트릭 자체도 별다른 게 없습니다. 가장 중요한 두가지 요소 -마유미의 정체와 오사와의 범행- 의 대부분이 중간 지점에서 짐작 가능하거든요. 곳곳에 숨겨놓은 단서가 읽다보면 쉽게 드러나는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이번에는 이렇게 속일꺼야"라는 작가의 의도가 너무 뻔했으니까요.

덧붙이자면, 마지막의 봉인 페이지는 솔직히 코미디네요. 마유미가 돌아온다는 것과 앞서 연쇄 여성 폭행범에 대한 진상, 편지 왕래에 대한 수수께끼가 밝혀지는 정도인데 뭐가 그리 대단한 반전이라고 이렇게까지 오버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와 손톱" 시대에나 통했음직한 마케팅을 되도않는 작품에 시도한 것 자체가 비웃음거리가 아닌가 싶군요.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서술트릭의 대가라는 명성을 얻게 된 전작을 너무 의식한 나머지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토해낸 어설픈 결과물로 보이네요. 꼼꼼하게 날짜와 시간대별로 메모하면서 읽게 만드는 재미는 그런대로 있기에 별점은 1.5점입니다만, 더 이상 이 작가의 다른 작품, 특히 "도착"시리즈는 읽을 생각이 없습니다.

2026/02/27

성모 - 아키요시 리카코 / 이연승 : 별점 1.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착실하고 성실한 고등학생 마코토는 어린 아이들을 괴롭히는 악동들을 없애는 충동을 제어할 수 없는 범죄자로 두 명의 아이들을 살해하고 유기했다. 뛰어난 머리로 검도 호구 가방을 쓰는 등의 작전으로 알리바이도 만들었지만, 경찰도 무능하지 않은 탓에 수사망이 좁혀지기 시작했다.

한편, 어린 딸 가오루 때문에 연쇄 아동 살해범을 강하게 의식하던 호나미는 근처에 사는 다테시나가 수상하다는걸 알아차리고 경찰에 신고하는데...

밀리의 서재를 통해 읽게 된 장편 범죄물로 이야기는 크게 범인인 마코토의 시점, 어린 딸 가오루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인 엄마 호나미의 시점, 그리고 사건을 수사하는 사카쿠치-다니자키 형사의 시점으로 나뉘어 전개됩니다.

마코토는 검도부 소속이자 방과 후 검도 선생님으로, 호구와 장비를 넣는 큰 가방을 범행에 이용해서 아이를 가방에 넣어 옮긴 뒤 살해했습니다. 형사들은 가방에 아이들이 충분히 들어갈 수 있다는 점을 파악하고 마코토에게 혐의를 두기 시작하고요.
한편 호나미는 과거 성폭행범으로 실형을 살았던 다테나시를 의심해 신고했지만 다테나시의 알리바이가 확실해 풀려나자, 다테나시의 열쇠를 몰래 복제해 그의 집에 잠입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가오루의 사진과 성폭행 관련 증거들을 발견하자 그를 범인이라 확신한 뒤 결국 그를 죽이고 맙니다.

뒤이어 결말이자 반전이 등장하는데 마코토는 여자였고, 가오루는 마코토의 딸이었다는 겁니다. 또한 호나미는 마코토의 엄마였고요. 즉, 호나미가 ‘딸’을 지키기 위해 했던 행동은 가오루를 위한 것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마코토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호나미는 마코토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죄를 다테나시에게 뒤집어씌운 뒤 그를 죽인거지요.
마코토가 여자였다는 점, 가오루의 친엄마라는 점, 그리고 마코토의 엄마가 호나미라는 설정은 서술 트릭으로 사용되어 반전을 극대화합니다.

이처럼 서술 트릭과 반전은 그럴듯한 편인데, 좋은 작품이라고는 말하기 어렵습니다. 마코토가 과거 다테나시에게 성폭행을 당해 임신했고, 그로 인해 가오루를 낳으며 남성 공포증과 트라우마가 생겼다고 해도, 그것이 어린아이들을 살해하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는 탓이 큽니다. 아이들이 가오루를 괴롭히고 못되게 굴었다는 이유로 살해하는 것은 정도를 한참 벗어난 일입니다. 범행 수법 또한 지나치게 잔혹해 읽는 내내 불쾌감을 줍니다. 사카구치 형사가 사체의 상태를 보고 ‘상냥하다’고 표현하는 부분 역시 거부감이 들었습니다. 솔직히 말해, 이런 범행 묘사만으로도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서술 트릭의 걸작이라 하더라도 "살육에 이르는 병"을 추천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지요.
그나마 "살육에 이르는 병"은 서술 트릭 자체를 굉장히 잘 쓴, 선구자적 작품이라는 의미라도 있지만 이 작품의 서술 트릭은 독자를 속이겠다는 의도에만 치중한 듯한 인상이 강해 별로입니다. 독자가 진상을 눈치챌 수 있는 단서가 지나치게 부족하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봐도 남자로 밖에 설명되지 않는 마코토의 초반부 묘사처럼요.

또한 경찰 수사가 다테나시를 범인으로 단정한 채 종결될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다테나시에게는 완벽한 알리바이가 있었고, 호나미가 반복적으로 그를 의심하며 신고한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더구나 마코토 역시 수상한 정황이 존재합니다. 마지막에 마코토가 호나미의 진심을 알고 죄책감을 벗어던진 듯 홀가분해지는 묘사가 나오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했을까요? 경찰이 이 두 개의 연결고리를 가지고 수사한다면 진상을 밝혀낼 지도 모르는데요. 성모랍시고 모성애로 포장하는 것 보다는, "살육에 이르는 병"이나 "통곡"같이 참혹한 범죄를 저지른 마코토는 단죄받는다는 결말이 더 깔끔했을 겁니다.

결론적으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보다는 서술 트릭을 활용한 다른 유명 작품들을 읽는 편이 더 나은 선택입니다.

2022/10/10

외눈박이 원숭이 - 미치오 슈스케 / 김윤수 : 별점 2.5점

외눈박이 원숭이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김윤수 옮김/들녘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 반전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도청 전문 탐정 미나시는 다니구치 악기가 의뢰한, 구로이 악기가 디자인을 표절하고 있는지 여부를 조사하던 중 우연히 살인 사건 순간을 엿듣게 되었다. 미나시는 피해자 무로이가 만나기로 했었던 여성 '다바타'가 파트너 후유에이며, 후유에가 7년 전 지인 아키에 자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걸 알게 되는데....

미치오 슈스케의 장편입니다. '트릭이 굉장하다!'는 랭킹에 선정되어 있기에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고전 스타일의 본격 추리물을 좋아하는 탓에 트릭이 굉장하다니 도저히 안 읽어볼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읽어보니 '트릭이 굉장하다!'라는 말은 어폐가 있네요. 일단 이야기의 핵심인 무로이 살인 사건은 별 볼일 없습니다. 범인은 다니구치 악기의 간부이자 미나시를 고용했던 가리타였습니다. 거액을 횡령한걸 악덕 탐정사 요쓰비시 에이젼시에게 들켜서 협박을 당하다가, 요쓰비시 에이젼시의 클라이언트인 구로이 악기의 무로이를 살해하고 죄를 요쓰비시 에이젼시 탐정 다바타 후유에에게 뒤집어 씌울 계획을 짜 냈던 겁니다.

동기는 말이 되는데, 아쉽게도 별다른 트릭은 없습니다. 거짓 정보를 미나시에게 주고 범행 시간에 도청하게 만들고, '귀'로만 도청하고 있던 미나시가 범인이 여자라고 착각하도록 가리타가 하이힐을 신고 구로이 악기 건물에 침입해 살해했던게 전부입니다. 변장 트릭의 일종으로 볼 수 있는데 '눈' 대신 '귀'가 사용되었다는게 독특했고 나름대로 현실적이라는 점에서는 마음에 듭니다만, 기발하거나 새로운 맛은 없습니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가리타가 범인이라는걸 입증할 증거가 전무하다는 겁니다. 흉기가 들어가 있던 봉투에는 후유에의 지문이 묻어 있었고, 미나시의 지시로 후유에가 구로이 악기 사무실에 잠입했던 탓에 그녀 지문이 현장에서 발견되는 등 후유에가 범인이라는 증거만 넘쳐납니다. 증거도 없이 추리쇼를 펼친 미나시에게 가리타가 진상을 줄줄 털어놓을 이유는 없어요. 미나시가 이를 몰래 녹음했다는건 더 억지스럽고요. 가리타의 불륜 상대였던 마키노가 이 때 미나시를 살해하려 했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시체를 대체 어쩔 셈이었을까요? 이렇듯 이 사건만 놓고 보면 별점 2점도 과하다 싶을 정도에요.

이런 점을 놓고 본다면, 아무래도 '트릭이 굉장하다!'는건 작품 전체에 사용된 일종의 서술 트릭을 이야기하는 듯 합니다. 서술 트릭만큼은 일품이거든요. 비현실적인 여러가지 설정, 그 중에서도 미나시와 그가 거주하는 맨션 로즈 플랫 주민들에 대한 설정 - 귀에 특이한 문제가 있는 '천리귀' 미나시, 눈에 문제가 있어서 항상 선글라스를 끼지만 먼 곳을 볼 수 있는 듯한 '천리안' 후유에부터 시작해서, 제대로 발음을 하지 못하는 미나시의 스승이었던 전(前) 탐정 노하라, 샴 쌍동이같이 행동하는 도우미, 마이미 자매, 뇌에 문제가 생겨 언어 능력을 잃은 대신 트럼프로 예언을 할 수 있게 된 도헤이 등 - 이 현실이라는게 밝혀지는 반전에는 무릎을 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등장인물들 모두가 제목의 '외눈박이 원숭이' 처럼 뭔가 결여되어 보였던건 진짜!였다는건데 억지스럽지 않게 잘 짜여져 있으니까요. 

예를 들자면 노하라 할아버지 발음 문제는 그가 과거 매독에 걸려서 '코'를 잃었기 때문이었고, 둘이서 게임 패드 하나로 게임을 하는 쌍동이 자매는 알고보니 각각 왼손, 오른손을 사고로 잃은 아이였다는게 밝혀지는 식입니다. 진상을 중반부에 도헤이의 카드 예언으로 드러내는 전개도 본격 추리물의 '독자에의 도전' 같아서 좋았습니다. 미나시의 도청은 귀에 특별한 능력이 있는게 아니라, 단순히 도청기를 통한 것이었다는 진상도 현실적이며, 어린 시절 눈에 파묻혔던 사고로 귓볼이 떨어져 나갔다는 이유도 작 중에서 여러 번 이야기하는 경험이 바탕이라는 점에서 치밀하게 짜여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서술 트릭은 7년 전에 자살했던 아키에 사건 이야기에서도 잘 써먹고 있습니다. 악덕 탐정 사무소 요쓰비시 에이젼시는 자신들이 손에 넣은 불륜과 같은 범죄 정보를 이용하여 당사자들을 협박하는게 주요 영업 수단이었는데, 그들이 7년 전 여자 화장실 몰카로 아키에가 남자였다는걸 알아내어 협박했던게 자살의 원인으로, 아키에가 남자라는걸 진상이 드러날 때 공개해서 독자를 놀라게 만들거든요. 또 이 진상을 통해 그녀가 자살했을 때 긴 머리를 대충 짧게 자르고 새 것인 운동복을 입고 있었던 이유, 가방이 발견되지 않은 이유가 깔끔하게 설명되는 것도 좋았습니다. 자신이 여장을 하고 지냈다는걸 부모에게 알리지 않으려는 목적이었다는건 충분히 말이 되니까요.

초반에 후유에가 지하철에서 혼자 큭큭 웃고, 심지어 먼 곳의 비행기 추락을 본 '천리안' 같다는 설정의 진상에 대한 추리처럼 추리적으로 볼 만한 부분도 제법 있어요. 작 중에 계속 반복되는, 미나시가 자주 듣는 아침 방송과 후유에도 좋아한다는 이탈리아 호러물이 단서가 된다는게 특히 마음에 들었습니다. '공정함' 측면에서는 더할나위 없는 셈이지요. 참고로 진상은 그녀는 라디오를 들으며 웃었고, '오치루 (떨어지다)' 는 라디오 퀴즈를 위해 이탈리아 감독 '루치오 폴치'의 이름을 거꾸로 읽었다는 것으로, 작위적이기는 하지만 재미있었습니다.

그 외에도 약간 모험물, 액션물 성격도 있습니다. 요쓰비시 에이젼시를 그만두려는 후유에를 구하기 위해 로즈 플랫 거주자들이 총 출동하는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화끈하고, 달릴 때 달려주는 미덕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기대했던 것 만큼 트릭이 대단한 본격 추리물은 아닙니다. 그래도 재미도 있고, 서술 트릭과 소소한 디테일에서 재미 요소가 많으므로 한 번 읽어보셔도 좋을 듯 합니다.

덧붙이자면, 독특한 인물들과 비현실적인 설정, 세계관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다가 이 모든게 '현실' 이라는게 드러나면서 의외의 진상, 반전이 드러난다는건 작가의 다른 작품인 "해바라기가 피지 않는 여름"이 떠오르기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해바라기가 피는 여름" 쪽에 더 점수를 주고 싶네요.

2026/05/03

콘 비프 샌드위치를 먹는 밤 Season 2 : (1) 반전을 차린 식사

그동안 추리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음식, 요리들에 대해 몇 차례 글을 써 왔습니다. 단순히 배경 설명으로 등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사건의 단서가 되는 등 작품에서 중요하게 사용된 음식이나 요리들 중심으로요. 글을 엮어 책을 출간하기도 했지요. 출간 후 수 년이 지났고, 다시 자료와 정보가 좀 모였기에 관련 글을 이어서 좀 써 볼까 합니다. 

이번에는 조금 독특한 사례를 소개해 보려고 합니다. 보기만 해도 군침이 도는 요리가 아니라, 오히려 등장인물들이 질색하는 음식입니다. 그런데도 이 음식이야말로 작품의 핵심을 떠받치는 중요한 요소였지요. 바로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신의 로직, 인간의 매직"에 등장하는 식사입니다. 니시자와 야스히코의 작품들 가운데서도 특히 ‘반전’이 뛰어나다는 평과 함께 자주 거론되는 작품인데, 작품에서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았던 식사 장면이 반전을 뒷받침하는 데 큰 역할을 합니다.

작중 화자인 마모루는 여러 아이들과 함께 수수께끼 같은 기숙학교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왜 이곳에 모였는지, 무엇을 위해 이런 생활을 하는지 분명히 알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지요. 그리고 그 생활 속에서 아이들을 가장 괴롭게 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식사입니다.

식사를 맡고 있는 코튼 부인은 꽤 나이가 많습니다. ‘교장 선생님’에게는 어머니뻘, 아이들에게는 할머니뻘 정도니까요. 흰머리를 뒤로 둥글게 틀어 올리고, 검은 옷에 하얀 앞치마를 두른 모습은 얼핏 보면 오래된 저택에서 일하는 노련한 하녀를 연상시킵니다. 하지만 적어도 아이들 눈에는, 요리만큼은 영 기대할 게 없습니다. 단순히 맛이 없는 정도가 아닙니다. 한창 자라는 아이들이 먹는 식사치고는 지나치게 부실하고, 메뉴도 너무 단조롭기 때문입니다. 고기는 좀처럼 보이지 않고, 저녁이면 어김없이 자투리 채소를 잔뜩 넣어 걸쭉하게 끓인 수프 비슷한 음식이 나옵니다. 또 하나 빠지지 않는 것이 매시드 포테이토 비슷한 음식인데, 맛은 분명 그쪽 계열이지만 정말 감자로 만든 것이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흐물흐물하고, 밍밍하며 씹는 맛도 없습니다. 마모루가 도무지 밥을 먹었다는 기분이 들지 않는다고 느끼는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덕분에 원래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던 베이컨조차, 여기서는 그야말로 진미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마모루의 친구인 ‘시인’은 코튼 부인의 요리가 하나같이 푹 끓여져 부드럽고, 간이 심심한 이유에 대해 단순히 요리 솜씨가 없어서가 아니라 본인 입맛과 사정에 맞추어졌기 때문이라고 추리합니다. 치아가 좋지 않은 할머니에게 어울리는 음식이라는 이야기인데, 꽤 그럴듯해요. 이는 기숙학교의 엄격하고 강압적인 분위기를 만드는 배경 소품 역할에 충실할 뿐 아니라, 코튼 부인이 독선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인물임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게 전부는 아닙니다. 이 식사는 작품의 핵심 반전으로 이어지는 중요한 실마리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추리소설에서 말하는 서술 트릭은, 말 그대로 서술의 방식 자체를 이용해 독자를 속이는 기법입니다. 화자가 거짓말을 한다기보다는, 독자가 당연하다고 여기도록 묘사를 교묘하게 이용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코튼 부인이 만드는 수프와 매시드 포테이토 비슷한 음식, 고기가 빠진 식단, 지나치게 부드러운 조리 방식, 간이 약한 맛이라는 요소들도 그러합니다. 앞서 말한대로 배경 소품과 인물 설명 역할에 불과해 보이니까요. 하지만 작품을 다 읽고 나면, 이 학교 식사들도 반전으로 이어지는 서술 트릭에 활용된 디테일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좋은 서술 트릭은 정보를 감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정보는 일찍부터 독자의 눈앞에 내놓습니다. 다만 그것을 독자가 자연스럽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게 만들지요. 앞부분의 사소한 묘사들이 뒤늦게 다른 의미를 띠고, 독자가 처음 읽을 때는 전혀 의심하지 않았던 장면들이 다시 살아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서술 트릭의 매력입니다.
이 작품 속 수프와 매시드 포테이토 역시 그런 예입니다. 맛은 별로지만 이야기의 중심에서 교묘하게 제 역할을 해냈기 때문입니다. 이런 디테일들을 활용해 서술 트릭을 완성했다는 점이야말로, 이 작품이 아직도 회자되는 이유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반전인지는 직접 책을 읽으며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정통 매시드 포테이토 조리법을 소개하며 글을 마치겠습니다.

  1. 감자 삶기
    감자 껍질을 벗기고 큼직하게 썬 뒤, 소금을 약간 넣은 물에 부드러워질 때까지 삶는다.
  2. 물기 제거하기
    감자가 익으면 물을 버리고, 냄비에 잠시 두어 남은 수분을 날린다.
  3. 감자 으깨기
    뜨거울 때 감자를 곱게 으깬다. 체에 한 번 내리면 더 부드럽다.
  4. 버터와 우유 넣기
    버터를 먼저 넣어 녹이고, 따뜻한 우유나 생크림을 조금씩 넣어 원하는 농도로 맞춘다.
  5. 간 맞추기
    소금, 후추로 간을 하고 잘 섞는다. 취향에 따라 파슬리나 치즈를 조금 넣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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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22

탐정영화 - 아비코 다케마루 / 권일영 : 별점 3점

탐정영화 - 6점
아비코 다케마루 지음, 권일영 옮김/포레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사 FMW의 대표이자 귀재인 영화감독 오야나기가 촬영 중이던 최고의 추리 영화 결말 촬영을 앞두고 실종되었다. 영화사 직원과 스태프, 그리고 투자까지 한 여섯 명의 배우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고, 감독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지만 아무런 실마리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은 감독이 찍어놓은 96분 분량의 필름을 전제로 범인을 추리해 영화를 완성하기로 결정했다. 여섯 명의 배우와 세 명의 조감독, 그 밖의 스태프들은 십 분 남짓한 영화의 결말을 찍기 위해 시나리오 콘테스트를 열고, 누가 범인이어야 가장 그럴듯한 영화가 될지 고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출된 시나리오들의 결함을 지적하고 수정하는 과정을 거쳐 시나리오를 선정하고 영화 촬영을 마치는데...

아비코 다케마루의 장편소설. 데뷔 이듬해에 썼다는 초기작입니다.

위의 줄거리 소개에서처럼 결말을 모르는 상태에서 궁지에 몰린 스탭들이 스스로 결말을 짜내는 과정에서 출연자와 제작진의 다양한 아이디어와 추리가 펼쳐지는 전개가 인상적입니다. 동호인들끼리의 추리 게임 같은 느낌도 전해줍니다. 결말 직전까지만 감상하고 그것에 대한 다양한 아이디어를 쏟아낸다는 점에서요. 이런 점은 "독 초콜릿 사건"의 판박이기도 합니다. 미완성 영화의 결말을 추리해야 한다는 설정은 빙과 시리즈인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와 같고요. 하지만 읽다 보니 전개와 과정은 "허무에의 제물" 같은 안티 미스터리 느낌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이런 결말은 어떤가요?"라는 결말이 이어지는 "5인의 탐정가"가 떠오르기도 했고요. 미스터리 영화를 완성하는 과정이 이야기의 핵심이니 광의의 의미로 볼때에는 작가 후기에 쓰여진 대로 메타 미스터리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많은 작품들이 떠오르지만 다행히 작품의 독특함을 유지하고 있는데, "영화"라는 소재에 굉장히 충실한 덕분입니다. 초반에 화자인 다치하라(나)가 출연진들과 이야기하면서 영화에 사용된 서술트릭에 대해 설을 푸는 장면이 대표적이며, 그 외에도 영화에 관련된 정보들이 곳곳에 삽입되는게 아주 그럴 듯 했습니다. 정말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 썼구나 싶을 정도였어요. 

추리적으로도 여러 관점에서의 재미있는 트릭들이 등장해서 풍성함을 전해준다는 설정이 가지고 있는 장점에 더해 진짜 트릭인 극적인 서술트릭 - 첫 장면은 시점적으로는 영화 속 내용이 모두 흘러간 다음의 일이다 - 은 단연코 기발했기 때문에 만족스럽습니다. 소설로도 가능하겠지만, '첫 장면과 똑같은 화면에서 이야기가 이어져야 한다'는 점에서 "영화"라는 장르에 아주 특화되어 있는 트릭이라 다른 데에서는 흉내내기도 힘들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어요.

그 외에도 "바보의 엔드 크레디트"에서 문제로 지적했던, 결말을 창작해내야 하는 상황의 설득력이 높았던 것도 좋았습니다. 출연자들이 결말에 대해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는 이유도 마찬가지로 설득력이 높았어요. 자기가 "범인"이어야 영화에서의 비중이 높아지니 어떻게는 자기를 범인으로 만드는 각본을 들고 온다는 것인데 와 닿을 수 밖에 없죠.

하지만 작품 속 추리는 진상이라고 부를 것이 없는, 픽션의 영역이라는 문제는 큽니다. 출연진이나 제작진 누구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찍더라도 작중에 표현된 대로 "가장 그럴듯"하면 되는 것일 뿐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야부이 센조가 밖에서 사기누마 준코의 방문을 잠그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는 것도 조금 아쉬운 부분이었고요.

그리고 감독의 의도대로 편집, 완성된 결과물은 앞서 언급한대로 트릭 자체는 기발하나 그닥 공정하다는 느낌을 받기는 어려웠습니다. 외부에서 모든 제작 과정을 지켜본 "독자"라면 수긍할만 하지만 이 영화를 처음 접하는 "관객" 입장이라면 반쯤은 반칙이라 여길 수도 있어 보입니다. 제가 관객이라면 사기누마 준코가 죽는 시점에서 다쓰미는 어디로 사라진 것인지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것 같거든요. 이렇게 무리한 서술 트릭보다는 주인공 다치하라(나)의 아이디어나 배우 야부우치 젠조의 아이디어가 더 낫지 않나 싶었습니다.

아울러 감독의 실종이라는 상황도 억지스럽기는 마찬가지라 좋은 점수를 주기 어렵습니다. 픽션이기 때문에 가능했지 감독이 원하는 대로 흘러갔으리라는 보장이 없잖아요. 최소한 조감독 한 명 정도는 사기니의 의도를 알려줘서 의도대로 움직이게끔 하는 공작이 추가로 설명되었어야 했습니다.

그래도 앞서 말씀드린 다양한 추리가 펼쳐지게 만드는 아이디어는 좋았으며 작가의 초기작답게 젊은 청춘들의 알콩달콩한 이야기가 펼쳐지는 것도 나쁘지 않았습니다. 여러 가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된다는 점도 좋았고요. 그야말로 좋았던 시절의 행복하고 따스한 이야기입니다. 추리소설 입문자분들께 추천하고 싶네요. 별점은 3점입니다.

그나저나... 이런 작품을 쓴 작가가 나중에 "살육에 이르는 병"을 쓰게 된다니 믿어지지 않는군요.

2018/04/20

지금은 더 이상 없다 - 모리 히로시 / 이연승 : 별점 1점

지금은 더 이상 없다 - 2점
모리 히로시 지음, 이연승 옮김/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패션 디자이너 하시즈메의 별장에 약혼녀 마리코와 함께 방문하여 휴가를 보내던 공무원 사사키는 우연히 만난 니시노소노 양에게 푹 빠졌다. 마침 니시노소노 양은 가출 상태로 사에키에게 가까운 역까지 이동을 부탁했다. 하지만 급작스러운 폭풍우 탓에 니시노소노 양도 별장에서 하룻밤 신세를 지는데, 마침 그날 밤 밀실인 오락실-영사실에서 아사미 자매가 살해된 시체로 발견되고 말았다. 

모리 히로시의 대표작인 사이카와 - 모에 시리즈 8편입니다. 다른 작품들과 다르게 이야기의 대부분이 사사키라는 인물의 1인칭 수기 형태로 전개되는 작품입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완벽한 졸작입니다! 이유는 추리적으로 도저히 점수를 줄 수 없는 탓입니다. 거의 500여 페이지 가까운 분량으로 쌓아 올린 이야기와 설정을 모두 뭉개고 설득력이 전혀 없는 이야기를 진상이라고 설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생을 살해한 언니가 자살하고자 마음을 먹었다, 여기까지는 뭐 그렇다 칩시다. 그렇지만 구태여 좁은 창을 빠져나가면서 현장을 밀실로 만든 이유, 그리고 아사미 유키코가 동생 아스코에게 가발을 씌우고 옷도 바꿔 입힌 이유는 제대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다른 가설을 물리치는 역할을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들이 정작 진상에서는 유키코가 흥분 상태로 제정신이 아니었다는 식으로 흘러가니 황당할 뿐입니다. 이에 비교하면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등장하는, 방을 밀실인 척 할 수 있는 사사키가 범인이다! 라는 추리 퀴즈 수준의 가설들이 진상보다 더 흥미롭습니다.

또 사사키의 수기 속에 등장하는 니시노소노가 모에가 아니라 모에의 고모 무쓰코였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과 반전도 사기에 가깝습니다. 보통의 서술 트릭물은 앞부분에서 진상을 눈치챌 수 있는 단서를 던져주는데, 이 작품 속에는 휴대폰이 없고 HAM을 취미로 한다는 정도의 설정 밖에는 없고, 오히려 이름이 "모에" 라는 잘못된 정보를 의도적으로 흘리는 등 독자를 속이려는 노골적인 의도가 강해서 괘씸하기 짝이 없네요.

사실 중간까지는 제법 읽을 만 했기에 더욱 아쉬움이 큽니다. 사에키 1인칭 시점의 모에 홀릭 서술 트릭은 도대체 사이카와는 어떻게 된거지? 라는 독자의 흥미를 불러 일으키며, 폭풍우가 밀어닥쳐 고립된 산 속 별장의 밀실 살인이라는 전형적인 클로즈드 서클 설정도 나쁘지는 않거든요. 또 "둥글둥글해졌다" 는 말은 약한 부분이 없어지고 강한 부분만 남은 강한 형태다, 트럼프나 타로는 자신의 미래를 트집잡으며 기뻐하는 자학적 게임이다는 식의 모리 히로시다운 조금 삐뚤어진 사고 방식이 엿보이는 묘사들도 나쁘지는 않고요. 그러나 이런 요소는 이야기에 영향을 미치거나 재미를 주지는 못하며, 약혼녀와 여행 온 주제에 18살이나 어린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겨 어떻게 한 번 해볼까 하는 생각밖에 없는 사사키라는 인간 쓰레기 시점에서 이런 묘사가 많은 탓에 사사키의 비호감도만 상승할 뿐이라는 것도 문제입니다.

한마디로 본격 추리물로는 함량 미달에다가 서술 트릭물로 보기에는 트릭이라는 게 없는 사기극이라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작가 스스로 등장인물들의 입을 빌려 이건 추리 소설이 아니라 연애 소설이다, 사사키는 글재주가 없어서 이야기가 완전 별로다, 운운하는 마지막 대단원의 작가 변명은 이 길고 긴 이야기를 읽은 독자를 더욱 허탈하게 만듭니다. 연애 소설이지만 추리 소설로도 완벽한 작품들을 쏟아낸 여사님에게 부끄러운 줄 알아야죠.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끄는 몇몇 설정은 시리즈 독자라면 그런대로 재미를 느낄 수 있지만 이 작품만 놓고 보면 일고의 가치도 없기에 제 별점은 1점입니다. 단연코 제가 읽은 이 시리즈 중에서는 최악이었습니다.

2020/11/20

움직이는 집의 살인 - 우타노 쇼고 / 박재현 : 별점 2점

움직이는 집의 살인 - 4점
우타노 쇼고 지음, 박재현 옮김/폴라북스(현대문학)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가자마 아키라가 이끄는 극단 '마스터 스트로크'는 연극 "신은 예술가를 좋아해" 공연 연습에 한창이었다. 이 공연은 6년 전 무대에서 사고로 죽은 이자와 기요미 추모 공연으로, 그녀의 아버지인 유명 건축가 이지와 야스노리가 직접 만든 극장인 시어터 KI에서 공연될 예정이었다. 시어터 KI는 계란 형태로 생겨서, 가운데 노른자 부분인 무대가 회전하는 독특한 극장이었다. 

시나노 조지는 이 공연 제작 스태프로 참여하면서, 단원인 모리 쿄코와 연인이 되었다. 그런데 연극 공연 당일 배우 스미요시 가즈오가 부상을 입는 사고가 일어났다. 소품인 칼이 진짜 칼로 바꿔치기 된 탓이었다. 그럼에도 단원들은 공연을 강행하는데, 마지막 공연에서 각본가 겸 배우 다키가와 요스케가 무대에서 똑같은 소품용 칼에 찔려 죽고 말았다. 경찰은 칼을 바꿔치기 할 수 있던 단원들을 의심하고, 단원들은 내분에 휩싸이지만 시나노 조지는 극장 구조를 검토한 뒤 외부 인물이 범행을 저지를 수 있는 유일한 방법 한 가지를 깨닫게 되는데...

1980년대 중반 이후, 일본에서 태동하여 대 유행한 본격 미스터리를 '신본격'이라고 부릅니다. 본격 미스터리의 논리성과 게임성을 중시하는 작품들이지요. 문제는 비현실적인 설정과 트릭이 많다는 점이고요.

이 작품은 전형적인 신본격물입니다. 설정과 캐릭터, 트릭 등 모든게 비현실적, 만화적이며 과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선, 연극을 공연하는 무대에서 사람이 다치고 죽는다는 설정부터가 비현실적입니다. 핵심 등장 인물들인 극단 '마스터 스트로크' 인물들도 마찬가지에요. 연극에 미쳐 다른 건 돌아보지도 않는 성격에, 대체로 사회성이 부족하고 비인간적이며 자기 이익만 챙기는 극단적인 캐릭터들이 대부분이거든요. 대마초를 재배해서 피우고, 민폐 끼치기가 일쑤인 탐정 시나노 조지야 더 말할 것도 없겠죠.
연극 "신은 예술가를 좋아해" 무대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도 비현실적입니다. 애초에 소품을 잘못 써서 사고가 일어났다면, 장난감이나 가짜로 바꾸는게 당연한거 아닐까요? 또 연극용 소품으로 만들어진, 몸에 닿으면 쑥 들어가는 장치가 된 칼을 진짜 등산용 칼로 바꿔치기 하여 사건이 벌어진다던가, 한 명이 부상을 입은 뒤, 또 다른 한 명이 같은 흉기로 살해된다는 전개는 너무 뻔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어요.

무엇보다도 시나노 조지가 진상이라고 설명하는, 객석이 무대를 중심으로 회전하고 있었다는 거대한 장치 트릭이야말로 과장된 이야기의 정점입니다. 무대가 회전하는 줄 알았지만 반대였다는건데 "웃지 않는 수학자"같은 트릭이지요. 이를 통해 건축가 이자와가 나갔을 때 문은, 원래 방향과 정 반대로 분장실과 이어지게 된다는 겁니다.
그러나 당연히 현실성이 낮습니다. "웃지 않는 수학자"는 개인 건물에서 단 몇 명만 속이면 됐지만, 그리고 천문대가 회전하는건 말이 되는데 거대한 극장 객석이 회전한다는건 전혀 그렇지 않으니까요. 300명의 관객이 좌석이 회전한다는걸 모두 몰랐다던가, 중간에 아무도 화장실을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는건 아무리 신본격이라 하더라도 면죄부를 줄 수 없는 비현실적인 생각이에요. 문을 빠져나가 칼을 바꿔치기 하고 다시 돌아오려면, 객석이 회전하고 있으므로 문 위치가 틀어졌을텐데 그 해결 방법도 설명되지 않고요.
또 이자와 혼자만이 아니라 극장을 만든 모든 사람들, 그리고 범행 당시 무대 조작하는 사람 도움이 필요하다는 문제도 있으며, 무엇보다도 경찰이 조금만 조사해도 금방 알 수 있다는 문제도 큽니다. 읽으면서도 어처구니가 없었어요. 그나마 다행인건 이 트릭은 사실이 아니었다는겁니다. 경찰 조사 결과 객석은 회전하지 않았고, 이자와는 무죄로 풀려나게 되지요.

이후 시나노 조지는 피해자 다키가와가 자살했다고 추리하는데, 좀 시시하기는 하지만 현실적이라는 점에서 앞서 추리보다는 낫더군요. 연극에 미친 사나이가 자신이 직접 쓴 연극 무대를 자살 장소로 삼았다는건 과장된 캐릭터성에 기초하고 있기는 하나, 미래에 대해 절망한 차에 옛 연인 기요미 추모 공연이 도화선이 되었다는 등, 여러가지 동기에 대한 설명이 꽤 설득력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자살이라서 별다른 트릭이 없다는 문제는 존재합니다. 앞서 가즈가 다친건 우연한 사고에 불과했다는 설명이지요. '신본격'의 전형적인 틀을 깨고는 있는데, 이래서야 '신본격'이라고 부르기는 또 애매한, 그런 기묘한 장르물이 되어 버렸네요.

작가도 뭔가 트릭에 대한 사명감을 느꼈는지, 연극 무대 살인 사건과는 별개로 핵심 트릭이 따로 등장하기는 합니다. 극단 '마스터 스트로크' 제작 담당으로 일했던, 주인공인 시나노 조지가 사실은 시나노 조지가 아니었다는 일종의 서술 트릭이 그것입니다. 그는 소극장을 상대로 일 년에 한 두번 씩 5년 동안 수익금을 빼돌려 왔던 사기꾼 오니쓰카 도시였지요. 시나노 조지가 등장하는 전작은 읽어본 적이 없지만, 전작을 읽었던 사람들은 놀랄만한 트릭일거에요. 변장을 위해 착용했던 선글라스와 마스크, 수염을 기르는 행위 등을 절묘하게 드러내는 전개도 나쁘지 않았고요. 그러고보니 제목도 트릭이네요. '움직이는 집' 에서 '살인' 이 일어나지는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가짜 시나노 조지가 사기꾼이라는걸 눈치챈 배우 사이키와 다투다가 머리를 부딪혀 죽은 뒤, 트릭이 밝혀지면서 나름 추리력을 보여준 가짜 시나노 조지 캐릭터가 엉망이 된건 아쉽습니다. 그의 말대로 5년 동안 일 년에 한두 번씩 극단 상대로 사기를 쳤다면 최소 5번에서 10번 정도 반복했다는건데 진작에 들키지 않았을 이유가 없습니다. 연극계가 발이 좁다는 묘사는 작품에 넘쳐나니까요. 진짜로부터 신분을 훔친 방법도 '우연히' 보험증을 손에 넣은게 전부고요. 이래서야 나름대로 추리력을 보여 주었던 치밀한 범죄자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시시한 죽음을 맞은건 당연해 보입니다. 서술 트릭도 곱씹어보면 이야기와는 무관한 곁가지 이야기에 불과하고요.

그나마 가짜가 죽은 뒤 진짜 시나노 조지는 대마 불법 소지 및 재배 혐의로 체포되고, 모리 쿄코가 투신하는 장면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건 좀 괜찮았습니다 . 과장된 세계에 종지부를 찍는 작가 나름의 의식으로 보였기 때문이에요. 모든 비현실적인 캐릭터가 죽음, 아니면 감옥으로 현실의 굴레에 갖혀버리고 만 셈이니까요. 작가가 쓴 서문을 보면 본격 추리물을 쓰기 위해 등장시켰던 시나노 조지를 퇴장시키기로 결심한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 결심에 어울리는 결말이라 생각됩니다. 더 제대로 쓰려면, 시나노 조지를 진짜로 죽여버리는게 나았겠지만요. 

그래도 이 정도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본격 추리, 신본격 소설이면서도 트릭은 별볼일 없는데다가, 신본격 소설들이 갖춘 단점들도 두드러지는 탓입니다.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딱히 권해드릴만한 작품은 아닙니다.

2025/09/26

돈돈 다리, 떨어졌다 - 아야츠지 유키토 : 별점 2.5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야츠지 유키토가 쓴 단편집으로, 총 다섯 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독자에의 도전장' 삽입 작품으로 추천받았지만, 국내 번역 출간되지 않은 탓에 원서를 구해 읽었습니다. 수록작 중 표제작은 작년에 번역해서 소개해 드렸던 바 있는데, 아무래도 번역을 해서 읽어야 해서 완독은 좀 늦었네요.

특징이라면 앞서 말한 '독자에의 도전장'이 삽입될 정도로 본격 추리 소설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점입니다. 공정하게 단서가 제공되어 '후더닛' 물로는 완벽한 수준이에요. 본격물답게 여러가지 트릭도 사용되며, 다섯 편의 작품을 하나의 연작처럼 묶기 위한 디테일들도 인상적입니다. 등장하는 동물들 이름에 모두 '다케마루'가 사용된다는 점 처럼요.

그리고 작가가 조금 가벼운 마음을 쓴 팬 서비스용 작품인지는 몰라도, 약간은 장난스러운 센스도 가미되어 있습니다. 주요 화자가 작가 '아야츠지 유키토'인데 건방진 후배 U군의 도전에 패배하는 등 스스로를 비판하는 내용도 있고, 어떤 작품에서는 범인으로 등장하기까지 하니까요. 이런 부분은 작가의 팬이라면 크게 반길 요소라 생각됩니다.

다섯 편 모두 이야기의 밀도나 묘사는 가벼운 편이며, 한 편의 이야기로서의 완성도보다는 '후더닛'에 집중한 탓에 추리 퀴즈적인 느낌이 들게 만든건 조금 아쉽습니다. 그래도 독자에게 정정당당하게 단서를 제시하고, 그로부터 추리를 유도하는 정통 본격 추리의 맛을 선명하게 전해주기 때문에 추리 소설 애호가라면 충분히 즐길 만합니다. 별점은 2.5점입니다. 추리소설 애호가 분들께 추천드립니다.

수록작별 간단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돈돈 다리 떨어졌다"

서술 트릭을 사용해 범인의 정체를 감추는데, 비교적 쉽게 눈치챌 수 있습니다. 유명 추리 작가의 이름을 딴 것 부터가 도무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니까요. 작가 후기를 보면 1984년 교토대 추리소설연구회 합숙에서 했던 ‘범인 맞히기’의 단편이 원형이라는데, 아무래도 오래된 탓이라 생각됩니다. 심지어 지금 시점에서는 40년 전 트릭이니 어쩔 수 없겠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보우보우 숲 불탔다"

"돈돈 다리"와 유사한 서술 트릭이 사용되는데, 여기서는 이를 반대로 사용했습니다. 확실히 아이디어는 참신합니다. 생각도 못했어요. 

그러나 문제는 현실성이 부족하다는 겁니다. "돈돈 다리"도 작위적이었지만 이 작품은 그보다도 심하니까요. 이런 점에서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보다는 추리 퀴즈에 조금 더 가까워 보입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페라리는 보고 있었다"

아야츠지 유키토 작품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일상계 분위기가 물씬 나는 이색작입니다. 실존하는 편집자 등이 주요 등장인물로 등장하는걸 보면, 의뢰처와 웃고 떠들고 즐기기 위한 친목적인 성격의 작품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실제 사건 추리는 억지스럽고, 그냥 이런 것도 가능하다 수준으로 끝나며 진상은 그야말로 '현실'이었다는 것도 일상계 느낌이고요. 그래서인지 이 작품만 '독자에의 도전장'이 없습니다.

그래도 '페라리'의 정체가 드러나는 장면은 깜짝 놀랐습니다. 이 역시 서술 트릭으로 교묘하게 정체를 가리고 있기 때문인데, 단서는 마찬가지로 공정하게 제공하고 있어서 무릎을 칠 수 밖에 없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이소노 가의 붕괴"

밀실 살인으로 보였던 사건이 사실은 자살 사건이었음을 밝혀내는 추리가 아주 그럴싸합니다. 흉기를 사라지게 만든 트릭도 설득력 있게 제시되고요. 등장하는 여러 사건들을 해결하기 위한 단서 제공도 지극히 공정하며, 다른 작품들과는 다르게 동기도 설득력 있습니다. 하나의 작품으로의 완성도만 따지자면 수록작 중 최고입니다. 아야츠지 유키토 본인의 '본격 이론'이 꽤 길게 펼쳐지는 것도 볼거리였어요. 별점은 3.5점입니다.

"의외의 범인"

수년 전 아야츠지 유키토가 참여했던 TV 기획물의 대본이라는 설정으로, 드라마 대본 형식으로 쓰여 독특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진범은 화면 내가 아닌 밖에 있는 카메라맨이었다는 아이디어는 지금 보기에 새롭지는 않지만 작품에는 잘 어울렸어요. 게다가 단순히 카메라맨이 범인이라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그 카메라맨이 바로 아야츠지 유키토였다는 점이 밝혀지는 반전이 아주 신선했습니다. 이를 위한 정보 제공 역시 바람직했고요. 영상물로 실제로 만들어도 좋을것 같습니다. 별점은 3점입니다.

2021/10/23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 1 - 오카자키 다쿠마 / 양윤옥 : 별점 2점

커피점 탈레랑의 사건 수첩 1 - 6점
오카자키 다쿠마 지음, 양윤옥 옮김/㈜소미미디어

커피 애호가 아오야마는 여자친구와의 트러블 직후, 카페 탈레랑 간판을 발견한게 계기가 되어 인생 커피를 만났다. 아오아먀는 탈레랑의 명언과 같은 달콤한 커피를 찾아 헤메었는데, 탈레랑에서 그런 커피를 맛 본 것이었다. 커피를 내린 바리스타는 기리마 미호시로, 아오야마보다도 연상이었다. 그녀는 아오야마의 이메일 주소만으로 그의 이름을 추리해 내는 뛰어난 추리력을 선보인 뒤, 아오야마의 우산이 사라잔 이유 등의 소소한 일상 속 수수께끼를 커피를 갈면서 풀어내었다. "그 수수께끼, 이제 잘 갈아졌어요."라는 말과 함께.

특정 분야 전문가가 탐정으로 등장하는 흔해빠진 일상계 단편 추리물. 이런 류의 작품은 엄청나게 많지요. 제가 읽었던 것만 해도 아래와 같습니다.

이 작품은 이 중에서도 여러모로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를 연상케 합니다. 뛰어난 추리력을 가진 젊은 전문가 아가씨 탐정, 그리고 그녀를 연모하는 어수룩한 남성 화자 컴비가 주인공이라는 점에서요. 그러나 "비블리아 고서당" 시리즈에서는 헌 책의 역할이 중요했었는데, 이 작품에서는 '커피'의 역할은 미미하다는 차이는 큽니다. 카페 탈레랑은 사건이 발생하고, 사건이 모이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사건과 해결은 커피, 그리고 바리스타와는 무관하거든요. 그나마 관련이 있는건 "제 2장 비터스위트 블랙" 정도 뿐입니다. 이래서야 바리스타가 탐정일 필요도 딱히 없지요. 추리를 하는 동안은 핸드밀로 커피를 갈다가, 추리를 마친 뒤 "그 수수께끼, 이제 잘 갈아졌어요."라는 말을 하는게 바리스타가 탐정일 유일한 이유입니다. 문제는 너무 만화적이고 유치했다는 거지요.

추리적으로도 비약과 억지가 눈에 띄는 이야기가 많아서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았어요. 바리스타 미호시가 상처입었던 과거 이야기가 조금 긴 호흡으로 설명되며, 묻지마 폭행이라는 강력 범죄가 연루되는 마지막 에피소드는 최악이었고요. 과거 미호시의 접대를 개인적 호감으로 착각했던 스토커가 있었다는건 설득력없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4년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정신못차리고 주변을 맴돈다는건 현실적이지 못했습니다. 긴 호흡의 심각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것도 "비블리아 고서당"과 살짝 비슷하네요. 별로 마음에 드는 이야기가 아니었다는 점도 말이죠. 이외에도 서술 트릭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사용되고 있는 것도 문제에요. 마지막 에필로그에서는 지겹기까지 했습니다. 분량을 조절했더라면 훨씬 좋았을텐데 낭비된 느낌입니다.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커피'가 보다 중요하게 사용되었더라면 좋았을텐데 아쉽습니다. 지금은 그냥 흔해빠진 양산형 일상계 단편에 불과하네요. 2권에서는 보다 폭넓게 커피가 활용되기를 기대해봅니다.

에피소드별 상세 리뷰는 아래와 같습니다. 언제나처럼 스포일러 가득한 점,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제1장 사건은 두 번째 방문 때" 

아오야마가 탈레랑을 처음 찾는 이야기로 시리즈의 도입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미호시가 이메일 주소만 가지고 아오야마의 이름을 알아낸 추리는 마음에 들었어요. 커피 애호가라고 소개되기에 "블루 마운틴"은 커피인줄 알았는데, 이런저런 단서로 그게 이름을 의미한다는걸 추리하는게 지극히 합리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오야마의 우산이 사라지고, 새빨간 우산이 남아있었던 상황에 대한 추리는 조금 억지스러웠습니다. 애초에 이미 헤어진 여자 친구의 친구가 아오야마를 비난할 자격 따위는 없고요. 코믹하고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설득력없는 이야기였어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제2장 비터스위트 블랙"

아오야마의 친척 아가씨 고스다 리카의 남자친구가 바람을 피우는지 여부를 알아내는 이야기. 진상은 리카만 남자친구라고 생각했을 뿐, 그 남자의 진짜 연인은 따로 있었다는 겁니다.

리카가 외국에서 살다왔던 탓에 오해가 생긴 것이었는데, 이를 '블랙 커피'를 통해 드러내는 묘사는 일품이었어요. 일본에서 블랙커피는 설탕도 밀크도 넣지 않은 스트레이트 커피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지만, 미국에서는 커피 색깔만을 의미한다네요. 그래서 리카는 머그컵만 보고서 블랙커피라고 단정했지만, 쓴 커피를 마시지 못하는 남자 친구는 혼자 설탕을 넣은 커피를 마셨던 것이라고 합니다. 문화의 차이를 세련되게 드러낸 좋은 장면이지요.

남자친구 녀석도 리카와 하룻 밤을 같이 보낸건 사실인데 아오야마가 그 녀석을 좋게 바라보는건 납득이 가지 않더군요. 그 녀석은 리카가 오해할만한 행동을 저지른건 맞습니다. 단지 '오해'라고 넘어가는건 무리에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제3장 유백색에 하트를 숨기다"

아오야마는 창 밖에서 뛰어가던 혼혈아 켄토에 대한 이야기를 미호시에게 해 주었다. 켄토에게 가끔 우유를 사 주며 친해졌지만, 교토 여름의 풍물시 오쿠리비 축제 날, 다친 켄토를 걱정해주다가 다투고 말았다는 내용이었다. 아오야마의 이야기와 켄토의 행색에 주목했던 미호시는 카페 밖으로 달려나가 켄토를 찾기 시작하는데...

아오야마가 처음에 커피 맛이 떨어졌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미호시와 함께 다른 카페에 왔다는 것, 그리고 아오야마가 켄토에게 우유를 사 준게 아니라 단지 전해들은 이야기라는 두 가지의 서술 트릭이 숨어있는 작품.

서술 트릭은 신선했지만, 정작 다른 수수께끼들은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우선 다른 카페의 커피가 탈레랑과 맛이 같았던건 우연히 같은 원두를 사용했기 때문이지요. 이는 미호시가 탈레랑 커피 원두 구입처를 앞에서 설명해주기 때문에 수수께끼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오히려 이 이야기를 듣고 이유를 눈치채지 못했던 아오야마가 멍청한 거지요. 

켄토가 돌보던 고양이를 나쁜 아이들이 괴롭힌다는걸 미호시가 간파했던 건, 넘겨 짚은 것에 불과할 뿐 추리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비약이 심했던 탓입니다. 방학, 그리고 매일같이 축구를 핑계로 학교를 가면서 우유도 가져갔지만, 정작 축구 실력은 전혀 늘지 않았다는 이야기에서 학교에서 고양이를 키웠다는 진상을 끄집어 낸건 나쁘지 않아요. 문제는 아이들이 고양이를 빼앗아 죽이려고 했다는건 증명이 불가능했다는 겁니다. 급식 주머니는 단서가 되기 힘들었으니까요. 미호시 스스로도 확신을 가지지는 못했다는 말을 할 정도였지요. 그래서 별점은 2점입니다.

"제4장 바둑판 위의 추격전" 

아오야마는 산책 도중 전 여자친구 마미를 만났다. 그녀를 피해 도주하던 끝에 탈레랑으로 향했지만, 마미가 그곳까지 쫓아온 탓에 아오야마는 미호시를 새 여자친구라고 소개해버리고 말았다. 마미는 잠자코 물러났지만, 그녀는 어떻게 아오야마가 탈레랑으로 도망쳐 올 것이라는걸 미리 알았던 것일까?

제목의 바둑판은 탈레랑이 있는 상점가 거리를 의미합니다. 바둑판과 같이 직선으로 나누어진 구획의 거리라는 설정이지요. 상점가 거리를 비롯하여 교토 시내를 무대로 펼쳐지는 아오야마의 산책과 도주 과정은 여정 미스터리 느낌을 전해줍니다. 교토 시내 거리에 대한 설명이 자세한 덕분입니다. 그 와중에 "마루타마치 르부아"의 마루타마치 시가 등장하는 것도 반가왔고요. 풋풋한 사랑 싸움, 그리고 도라야 마미와의 옛 추억을 잃어버린건 슬픈 일이라는걸 아오야마가 깨닫는 결말은 여운이 남겨져서 좋았습니다.

문제는 추리적인 부분입니다. 모카와 마타지가 전화로 알려주었다는게 진상인데, 모카와 할아버지가 마미와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단서가 사전에 제공되지 않기 때문에 추리의 여지가 전무했거든요. 아무리 '일상계' 작품에 대단한 추리가 등장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래서야 추리물이라고 부르기도 힘들지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제5장 past, present, f*****?" 

아오야마는 잡화점에서 고가의 다트를 보고 홀딱 빠졌지만 막상 사려고 하자 이미 팔리고 없었다. 잡화점을 나온 아오야마는 미호시를 우연히 만났고, 함께 저녁을 먹기로 했다. 미호시는 저녁 술자리에서 아오야마의 깜짝 생일 축하 파티를 열어주었고, 선물로 그 다트를 주었다. 그런데 다트가 마음에 들었다는걸 미호시는 어떻게 알았을까? 다음날, 아오야마는 고나이라는 남자를 만나, 미호시의 과거 이야기를 듣게 되는데...

수수께끼는 흥미롭지만 진상은 전편과 같습니다. 잡화점에서 아오야마를 보고 미호시에게 정보를 알려준 공범(?)이 있었던 거지요. 다행히 전편보다는 잘 활용하고 있습니다. 공범의 정체를 진작부터 노출시키고 있는 덕분이지요. 아오야마도 진상을 추리해 내는데 거의 성공하고요.

하지만 고나이를 통해 드러나는 미호시의 과거는 뜬금없었고, 고나이도 굉장히 작위적인 설정이라 마음에 들지 않네요.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미호시의 다정함을 사랑이라고 착각했던 찐따가 위험한 스토커가 되었다는건 지나치게 뻔했을 뿐더러, 고나이가 아오야마아게 접근해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을 이유도 잘 설명되고 있지 못합니다. 별점은 2점입니다.

"제6장 Animals in the closed room" 

아오야마는 환상의 커피인 몽키 커피 원두를 구했다는 말로 미호시를 자기의 방으로 초대하는데, 그리고 이 때 그녀에게 깜짝 선물을 주려는 계획까지 성공했다. 그러나 선물이었던 테디 베어 인형은 날카로운 무언가로 찢긴 채였다. 밀실인 자취방에서 인형을 찢은건 누구였을까?

탈레랑의 고양이 샤를이 미호시 토트백 안에 숨어 몰래 들어와 인형을 찢었다는게 진상인데, 여러모로 지나치게 작위적이었습니다. 첫 번째로, 샤를이 가방 안에 들어간걸 눈치채지 못할 수 있을까요? 약에 취해 잠들었다는 설정이 붙어있기는 합니다. 그럼 깨어나서 인형을 찢었다는건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두 번째로, 샤를이 마침 아오야마가 미호시가 자리를 비운 틈에 가방에서 빠져나와 인형을 찢은 뒤, 아오야마와 미호시가 도착하기 전 조용히 옷장 안에 숨어 들어가 잠들었다는 우연도 과합니다. 세 번째로 새끼 고양이가 인형을 찢었다면, 작 중 묘사처럼 날카로운 날붙이로 악의를 가지고 찢은 것 같았을리가 없습니다. 조금 긁히고 만 정도가 아니었을까요? 이외에도 아오야마가 선물을 미호시 몰래 등장시키기 위해, 낚시줄과 후크를 이용해 만든 복잡한 장치 트릭도 억지스러웠습니다.

수상해 보였던 신문배달원(?)과 아오야마가 침대 밑에서 발견한 머리카락의 등장을 통해 위험인물 고나이의 존재를 다사금 떠올리게 만들고, 다음 에피소드를 위한 복선으로도 적절히 사용한건 괜찮았지만 그 외에는 앞서의 이유로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드네요. 별점은 2점입니다.

"제7장 다시 만난다면 당신이 내려준 커피를" 

고나이 나미카즈는 미호시가 아오야마와 사이좋게 지내는걸 참지 못하고 복수를 결심했다. 그리고 어두운 밤, 미행 끝에 브래스 너클로 폭행을 가하는데 성공했다. 아오야마는 이 폭행은 자신이 미호시와 만남을 가졌다는 것 때문이라는걸 깨닫고, 전에 받았던 고나이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어, 더 이상 미호시를 만나지 않겠다고 말하는데...

1권의 마지막 이야기. 고나이의 폭행으로 입원한 당사자가 아오야마였다는 서술 트릭이 사용된 작품입니다. 전편의 괴한은 아오야마의 전 여친 마미로, 유도부원이었던 그녀가 고나이를 처절하게 응징한 뒤 우여곡절끝에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가는 결말도 깔끔했어요. 독자는 아오야마를 미호시로 착각하고, 고나이는 마미를 미호시로 착각하는 이중의 서술 트릭이 사용된 셈이지요. 아오야마의 정체가 다른 카페 바리스타였고, 본명도 아오야마가 아니라 아오노 야마토라는 것도 밝혀지는데, 이에 대한 미호시의 추리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커피맛을 훔치러 왔다는 둥, 사랑 싸움같은 중반부 전개와 고나이가 폭행을 결심하는 이유가 잘 납득되지 않는건 단점이에요. 고나이의 생각을 잘 모르겠더라고요. 아오야마가 경찰에 신고하지 않을 이유는 없었는데 말이지요. 오히려 미호시를 생각한다면, 고나이같은 위험인물은 감옥에 보내는게 당연하잖아요? 서술 트릭도 병문안을 온 사람까지는 등장시킬 필요가 없었습니다. 다친 사람은 미호시, 병문안을 온 사람은 아오야마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위한 장치였는데, 지나쳤습니다. 병문안을 온 건 그럼 도대체 누구랍니까? 마미? 이런 단점들 탓에 별점은 2점입니다.

"에필로그" 

모든게 제자리로 돌아왔다는걸 공식적으로 알리는 짤막한 분량의 에필로그. 바리스타 고나이가 카페 로크온이 아니라 탈레랑에 있다는게 서술 트릭 형태로 밝혀지는데, 이 쯤 되니까 지겹네요. 점수를 주기 애매한 분량이라, 별점은 따로 없습니다.

2007/06/30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 와카타케 나나미 : 별점 3점

나의 미스터리한 일상
와카타케 나나미 지음, 권영주 옮김/북폴리오

간만에 구입해서 읽은 추리 단편집입니다. 중간중간 괴담이나 호러도 섞여 있다는 점에서 정통 본격물이라고 하기는 힘들겠지만 전체적으로 추리물이라고 보기에는 무리없는 단편집이죠. 원래는 제가 자주 찾는 추리 동호인 사이트인 "하우미스터리"에서 이 단편집의 제일 첫 단편을 어떤 분이 번역하셔서 올린 것을 읽고 호감을 가지고 있다가 정식으로 출간되었기에 구입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설정이 좀 독특한데, 중견 기업 회사 사보의 편집자로 일하게 된 시오타케 나나미 (저자)가 아는 선배를 통해 의뢰한 추리작가의 단편을 1년동안 사보에 싣는다는 설정으로, 이 단편들은 전부 작가의 실제 경험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과 매월 해당 월에 맞는 주제를 가지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실 거의 마지막 작품까지는 앞서 말했듯 괴담 등 다양한 작품이 섞여 있을 뿐 아니라 정통 추리물로 보기에는 좀 부족한, 설득력이 약한 작품들이 많아 그냥 저냥한 단편집으로 느껴졌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이야기에서 이야기 전체를 아우르는 복선과 트릭이 밝혀지는 전개로 구성되는, 독자를 깜짝 놀라게 하는 장치가 있더군요. 조금은 변칙적이고 일본에 너무 많이 특화된 트릭이기에 순수하게 해독하기에는 무리가 있지만 작가의 기발한 아이디어 하나는 정말이지 높이 사고 싶네요. 제가 좋아하는 일상의 소박한 사건들이 중심을 이룬다는 점도 무척 마음에 들었고요. QED 일상 버젼의 소설판 같다고나 할까요? 아울러 번역 역시 완벽한 수준이었습니다. 번역 후기까지 아주 깔끔하거든요.

결론내리자면 별점은 3점. 소박하고 경쾌한 이야기이니 만큼 누구나 즐길 수 있는 작품이기에 추리소설 애호가가 아닌 보다 많은 분들이 읽어 주셨으면 좋겠네요. 그래서 추리소설의 매력에 빠지는 팬들이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각 단편별로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한다면

첫 단편 "벛꽃이 싫어"
제목 그대로 벛꽃에 관련된 사건이 등장하는 단편으로 주인공의 경험에 근거한 이야기라는 것, 세세한 사물의 디테일을 놓치지 않는 주인공의 추리법이 제대로 보여진다는 것, 그리고 일상 생활 속에서의 소박한 사건이 바탕이라는 시리즈의 특징을 전부 갖추고 있는 작품입니다.

두번째 단편 "귀신" :
제대로 된 사건이라기보다는 주인공의 상상속에서 과거의 사건을 재구성하는 작품으로 기발함이 돋보입니다. 약간 호러틱하기도 하고요. 소박한 공포가 느껴졌어요

세번째 단편 "눈 깜짝할 새에" :
상점가 야구팀 경기에서의 야구 사인을 둘러싼 암호 트릭으로 설정이 아주 돋보였습니다. 트릭은 일본적인 트릭이라 전혀 해독할 수 없었지만 아이디어는 인상적이었어요. 특유의 소박함과 기발함이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네번째 단편 "상자 속의 벌레"
주인공의 사촌여동생에게서 듣는 기묘한 이야기. 여고생들의 시끌벅적한 분위기와 벌레에 관련된 묘사가 묘하게 궁합이 잘 맞는 소품입니다. 추리적으로는 일종의 소실 트릭인데 트릭 자체는 소박하지만 장치와 설정면에서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솜씨가 괜찮았어요.

다섯번째 단편 "사라져가는 희망"
심리 묘사 위주로 구성된 전형적 호러 스릴러라고 할 수 있는 특이한 단편입니다. 이야기의 완성도나 전개는 솔직히 기대 이하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 단편집에서 가장 중요한 단편입니다. 이유는 맨 뒤 "조금 긴 듯한 편집 후기"라는 단편에서 밝혀지니 한번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여섯번째 단편 "길상과의 꿈"
역시 호러에 가까운 단편. 일종의 꿈 이야기 같기도 하네요. 별로 언급할 부분은 없지만 전체 단편집에서의 장치적 요소로서 나름대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일곱번째 단편 "래빗 댄스 인 오텀"
이름 맞추기 게임에 관련된 단편으로 소박한 일상의 느낌이 좋았습니다. 하지만 역시나 일본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풀 수 없는 문제라 재미가 좀 반감되더군요. 그래도 즐길거리가 많은 작품이었습니다.

여덟번째 단편 "판화 속 풍경"
선배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주인공의 추리가 등장하는 작품인데, 개인적으로는 무리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여러가지로 설득력이 많이 떨어지거든요. 사건 해결의 중요한 요소가 "후각" 이라는 점은 특기할 만 하나 그 외에는 별로 건질게 없는 범작입니다.

아홉번째 단편 "소심한 크리스마스 케이크"
과거의 사건을 듣고 추리하는 아주아주 전형적인 안락의자형 탐정물. 조금은 공포스럽고 무서운 과거사의 재발견처럼 서술되다가 막판 깜짝 반전이 있는 점이 독특했습니다. 조금 반칙에 가까운 서술트릭이지만 깔끔하게 잘 풀어낸 점이 좋더군요.

열번째 단편 "정월 탐정"
자신이 정신병에 걸린 것 같다는 친구의 부탁으로 해결에 나선 주인공이 의외의 진실을 밝혀낸다는 작품. 맨 마지막 해설편을 제외하고는 가장 정통 추리물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트릭도 명쾌하고 결말 역시 깔끔하더군요. 좀 미국적인 스케일이 느껴지는 트릭으로 왠지 친숙하기도 했습니다.

열한번째 단편 "밸런타인 밸런타인, 봄의 제비점"
시끌벅적한 분위기의 수다로 진행되는 독특한 서술방법을 지닌 단편으로 밸런타인 데이라는 이벤트에서 하나의 추리물을 이끌어내는 작가의 기발함이 돋보였습니다. 트릭은 좀 시시하고 설득력이 약간 떨어지는 편이지만 유쾌하고 재미있다는 점에서 마음에 드네요. 또 막판에 살짝 깜짝 반전(?)이 있는 것도 재미있었어요.

열두번째, 마지막 단편 "봄의 제비점"
"제비점" 이라는 일본적 소재로 이끌어 내는 작품인데 그닥 설득력은 없었습니다. 너무 장치를 많이 마련한 느낌이 들었어요. 인쇄소 이야기는 빼는게 어땠을까 싶은데... 소재와 복선에서 결말까지 이끌어내는 전개는 좋았지만 약간 아쉬움도 남네요.

마지막 : 조금 긴 듯한 편집후기
드디어 1년에 걸친 연재가 끝나고 나나미가 작가와 상봉하여 단편에 얽힌 수수께끼와 복선을 추리하여 작가에게 밝히는 내용인데 앞부분에서 간과하고 지나갔던 수많은 복선과 단서들, 그리고 그 결론에 대한 것이 워낙 신선할 뿐 아니라 이러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아이디어 자체가 워낙 기발하여 이 단편집의 가치를 몇배는 높여주는 작품이었습니다.
저는 좀 이야기를 대충대충 넘어가는 편인데 마지막 단편을 읽고 정말 무릎을 칠 수 밖에 없더군요. 이렇게 작품을 구성한 작가의 아이디어에는 정말이지 경의를 표하고 싶습니다.

2026/03/06

소녀 A의 살인 - 이마무라 아야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라디오 DJ 신타니 카나는 심야방송에서 ‘F여학원 1학년 소녀 A’가 보낸 편지를 읽었다. 편지에는 양어머니가 죽은 뒤 양아버지와 단둘이 살게 되었고, 밤마다 성적 학대를 당하고 있으며 더는 버티지 못하면 자살하거나 양아버지를 죽일지도 모르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방송 후, 신타니 카나는 고교 동창 와키사카에게 연락했다. 후요 여학원 교사인 와키사카에게 편지 속 내용이 진짜인지 알려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와키사카의 조사 결과, 조건에 맞는 학생은 세 명 - 물리 교사 다카스기의 양녀 다카스기 이즈미, 의사의 딸 마쓰노 아이, 경찰의 양녀 스와 준코 - 이었다. 

카나는 세 명을 직접 접촉해 ‘소녀 A’를 찾으려고 연락처도 받았지만, 곧바로 다카스기 히사오가 살해당하고 말았다. 강도 사건, 혹은 소녀 A가 이즈미이며 그녀의 복수가 아닐까 생각되었지만 다카스기가 마쓰노 의사를 협박하고 있었다는게 드러나 마쓰노가 체포되었다.

그러나 조사를 받던 마쓰노가 “집에 유키에라는 여자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고 말했고, 같은 전화를 받았던 스와 경부는 수사를 통해 모든게 신타니 카나와 연결된다는걸 알아내는데...

국내에는 소개된 적 없는 이마무라 아야의 장편 추리소설로 원서로 읽었습니다.
작품은 다카스기 히사오 살인 사건을 쫓는 본편의 이야기와, 한 ‘소녀’의 독백이 교차하며 진행됩니다. 독백하는 소녀가 본편 등장인물 중 의외의 인물이었다는게 드러나는, 서술 트릭에 의한 반전이 재미의 핵심이고요.
지금 시점에서 이런 교차 서술을 통한 화자를 오해하게 만드는 서술 트릭은 제법 흔하기는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이 1995년에 나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발표 당시에는 상당히 신선했을 겁니다. 지금 읽어도 웬만한 재미는 선사해 줄 정도니까요.

단지 서술 트릭 뿐 아니라, 카나가 협박범의 주소를 알아내기 위해 ‘소녀 A’의 편지를 날조한다는 아이디어도 괜찮습니다. 소녀의 성폭행 피해에 대한 고백을 방송에서 소개한 뒤, 동창이자 고등학교 교사인 와키사카에로부터 소녀의 주소를 알아내는 계획으로 DJ라는 직업이 갖는 파급력, 그리고 누구에게나 공분을 불러일으키는 양부의 성범죄라는 소재가 결합되면서 ‘개인정보 확인’이라는 위험한 행위가 이야기 안에서 자연스럽게 정당화되는 덕분입니다.

얼핏 사소해 보였던 마쓰노의 주장, 즉 집에 있을 때 ‘유키에’라는 여자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는 말이 사건 해결에 중요하게 작용하는 등, 앞 뒤가 잘 맞아 떨어지며 막힘없이 물 흐르듯 이어지는 전개도 괜찮았어요. 쉽게 읽히며, 정교하다는 느낌도 전해주니까요.

다만 후반부는 지나치게 뻔합니다. 이즈미의 “알토 목소리”였다는 증언으로 신타니 카나가 전화를 걸었다는게 특정되고 나면, 그녀가 범인이라는 결론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탓입니다. 다카스기는 이전에도 협박범이었으니 카나를 협박한게 범행 동기가 되었을테고, 협박의 원인은 과거 카나가 ‘소녀’일 때 저질렀던 양부 살해일 것, 즉 카나가 '소녀'였다는 결론이 자연스럽게 도출되고요. 양부 사체를 고향집에 숨겨두었을 거라는 정황도 뻔하디 뻔합니다.
초반에 소녀가 “혹시 이즈미가 아닐까?” 하는 의심을 더 끌고 갔더라면 그나마 이런 뻔한 추정이 조금이나마 완화되었을지 모르지요. 그러나 이즈미 방의 자물쇠나 전날의 수면제 복용은 경찰 조사로 확인 가능하기 때문에, 독자 입장에서는 ‘이즈미가 소녀일 가능성’은 배제될 수 밖에 없습니다. 다른 ‘소녀들’은 그녀들이 다카스기를 죽일 이유가 희박하니 애초에 대상이 될 수도 없고요. 즉, 반전의 폭을 초반부터 줄여놓고 시작하는 셈입니다. 

범죄에 대한 여러 설정들도 설득력이 부족하고 거슬립니다. 대표적인게 신타니 카나에게 ‘운이 너무 없었다’는 설정입니다. 

  • 후요 학원에 모친 없이 양부와만 사는 1학년 여학생이 무려 3명이나 있었다
  • 아내가 유키에인지를 확인하는 전화를, 대상자인 다카스기에게 맨 마지막에 걸었다
  • 전화들을 사건의 핵심 용의자 마쓰노와 수사 담당자 스와, 그리고 피해자의 딸 이즈미가 각각 받았다

는 건데, 대상자가 딱 한 명이었거나, 이즈미가 처음 전화를 받았거나 했다면 사건은 아예 다른 방향으로 굴러갔을거에요. 이렇게 악운이 겹치는건, 불운으로 사건을 억지로 진행시킨다는 느낌밖에 들지 않습니다.
카나의 범행 동기도 마찬가지입니다. 요구 금액이 얼마였든, 2년만 버티면 공소시효가 성립되어 협박이 무의미해질 수 있었다는 계산을 생각하면 굳이 위험한 선택을 했어야 했나 싶거든요. 성실함으로 똘똘 뭉친 듯한 다카스기가 협박에 맛을 들여 계속 협박했다는 설정도 별로 와 닿지 않습니다.
여기에 더해 스와 경부가 공무집행 중 사망하게 만든 범인의 딸을 양녀로 키운다는 설정은 독자의 감정을 건드리려는 의도는 이해가 되지만, 솔직히 불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제 별점은 2점입니다. 독자가 분노할 만한 범죄를 이야기 안에 꽤 자연스럽게 녹여냈고, 그 사건을 둘러싼 여성의 심리 묘사가 설득력 있게 이어진다는 점은 좋습니다. 서술 트릭을 잘 활용했다는 분명한 장점도 있고요. 지금 읽기에는 다소 뻔하다는 단점을 극복하기는 어려워 감점합니다만, 번역 출간된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은 합니다.

2022/10/02

미로관의 살인 - 아야츠지 유키토 / 권일영 : 별점 3점

미로관의 살인 - 6점
아야츠지 유키토 지음, 권일영 옮김/한즈미디어

아래 리뷰에는 진상과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추리 소설계의 거장 미야가키 요타로가 환갑을 맞았다. 그는 자신의 저택 '미로관'에 제자 작가 4명과 평론가, 담당 편집자, 친한 추리소설 애호가를 초대했다.

미로관에 모인 그들에게 미야가키의 비서 이노 미쓰오가 요타로가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했다. 그리고 함께 공개된 유언장에는 4명의 제자 중 한 명에게 거액의 유산을 줄 생각인데, 그 한 명은 앞으로 닷새 동안 미로관에서 그들이 각각 쓴 추리 소설을 함께 참석한 편집자, 평론가, 애호가들의 심사로 결정한다는 내용이었다. 

사람이 죽기는 했지만, 워낙 거액이 걸려있는 탓에 작가들과 심사 위원들은 요타로의 유언을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작가 중 한 명인 스자키가 살해당했으며 나머지 생존자들 모두는 미로관에 갇혔다는걸 알게 되었다. 유일하게 사라진건 비서 이노였다. 작가 중 한 명인 기요무라는 이노가 범인이라며, 유언에 따른 추리 소설 창작 대결을 속행할 것을 주장하는데....

신본격의 탄생을 알렸던 아야츠지 유키토의 '관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일본에서는 1988년에 출간되었던 작품이지요. 

사실 이 작품은 나름대로는 비교적 빠르게 국내에 소개되었던 편입니다. 1997년에 학산 문화사에서 정식 출간되었었으니까요. 하지만 절판은 더 빨랐었습니다. 이유는 인터넷이 발달했던 시대가 아니어서 정보가 전달되고 소개되는게 많이 늦었던 탓입니다. 저 역시 추리 소설 애호가를 자처하고 있었지만 이 시리즈가 출간되었던 것 조차 잘 알지 못했던, 그런 시대였거든요. 인터넷 서점도 거의 없었고요. 그래서인지 오히려 절판 이후 인기가 폭발하게 되었습니다. 인터넷의 발달 덕분이지요. 덕분에 중고책 가격도 꽤나 올라가게 되었었고요. 이렇게 '1. 국내 출간 -> 2. 광속 절판 -> 3. 인터넷 등으로 유명세, 가치 상승 -> 4. 중고가 상승'이라는 과정을 거친 책들은 1990년대 후반에 꽤 많이 출간되었습니다. "점성술 살인 사건"이 대표적이지요.

그래도 저는 절판 직후 연이 닿아서, 2000년대 초반에 "십각관", "수차관", "시계관", 그리고 "인형관"을 구해 읽을 수 있었습니다. 내용도 대체로 기억나고요. 그런데"미로관의 살인" 만큼은 이상하게도 내용이 전혀 기억 나지 않았습니다. 분명 읽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요. 그러던 차, 추리 소설 관련 정보를 조사하다가 한 랭킹에서 마지막 한 줄의 반전이 빼어난 작품으로 "미로관의 살인"을 꼽고 있는걸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호기심도 생겼고, 오래된 숙제를 마치는 기분도 느낄 겸 해서 알라딘 전자책으로 구입하여 읽어보게 되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 오래 전에 읽지 않았던 작품이 맞더군요. 모든 내용이 새로왔기 때문입니다. 당초에 왜 읽었다고 생각했을까요? 사람의 기억이라는게 얼마나 오류가 많은지 다시금 느끼게 되네요.

각설하고 작품에 대해 소개해드리자면, 이야기는 '시마다'가 시시야 가도미라는 작가의 "미로관의 살인"을 선물받아 읽는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미로관의 살인"이라는 소설 속 소설이 곧바로 이어지는, 일종의 액자 소설같은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미로관의 살인"은 건축가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미로관'에서 벌어진 연쇄 살인 사건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고요. 시마다 기요시가 다른 시리즈들과 마찬가지로 탐정으로 활약하고 있습니다.

우선 미로관의 주인이자 추리 소설계의 거장인 미야가키 요타로가 자살하면서, 4명의 제자 중 가장 뛰어난 인물에게 유산을 넘겨줄 생각으로 그들을 미로관에 불러 모았다는 도입부부터 시선을 확 잡아 끕니다. 이들을 닷새 동안 미로관에 가두고 작품을 쓰게한 뒤, 같이 초대했던 평론가와 편집자, 추리소설 애호가에게 심사 위원 역할을 맡길 셈이었다는 계획은 꽤 그럴싸해 보였거든요. 뛰어난 신진기예 작가들의 실력을 극한으로, 하지만 공정하게 뽑아내기 위해서는 이만한 방법도 없을테니까요. 물론 공정함을 위해 현장에서 동일한 주제 - 무대는 미로관이며 피해자는 작가 본인으로 할 것 - 를 주기는 했지만, 작가 중 누구라도 자기가 쓰려고 했던 다른 작품에서의 획기적 트릭을 유용할 수 있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 실제로 다이잉 메시지를 쓰려고 했던 작가가 있었는데, 이는 장소와 피해자가 누구라도 상관없는 트릭이니까요 - 아주 공정했다고 보기는 힘들긴 하지만요. 이후 4명의 제자들이 각자 작업했던 작품에서처럼 살해당한다는 전개도 무척 흥미로왔습니다.

추리적으로도 볼 만 합니다. 피해자들이 살해당한 현장 등 여러가지 단서들과 정보들 모두가 화자격인 우타야마를 통해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제공되는 덕분입니다. 이를 통해 드러나는 진상 역시 합리적이고요. 조금 상세히 설명드리자면, 가장 처음 살해당했던 스자키는 목이 거의 떨어져 나간 상태로 발견되었습니다. 목 부분에는 소 머리 박제가 놓여 있었고요. 하지만 왜 머리를 아예 잘라 놓거나, 아니면 간단하게 박제 머리를 올려놓지 않고 이렇게 어중간하게 현장을 만들었을까요? 시마다 기요시의 추리는 범인이 현장에서 피를 흘렸기 때문에, 피를 피로 덮기 위해서 목을 잘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나중에 사실로 판명되고요. 

마찬가지로 하야시는 입구에 바리케이트까지 쳐 놓았을 정도로 준비가 철저했었는데, 왜 범인을 쉽게 방 안으로 들여 보냈는지? 그리고 후나오카가 살해당한 방은 빗장까지 걸린 완벽한 밀실 상태였는데 범인은 어떻게 도주한 것인지? 에 대한 답은, 미로관의 각 방은 비밀 통로가 있었다는 추리로 이어집니다. 하야시가 남겼던 다이잉 메시지, 후나오카가 죽기 직전 거울을 가리켰던 행위로 비밀 통로의 존재는 밝혀지고, 이로써 진범은 죽은 줄 알았던 미야가키 요타로였다는게 드러나고요. 그는 살인이 하고 싶어서 4명의 제자를 죽였다는 유서를 남기고 비밀 통로로 이어지는 방에서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지요. 이렇게 기묘한 현장 조작과 밀실 살인, 원격 조종 살인 등이 함께 펼쳐져 추리의 여지가 많다는 점은 높이 평가하고 싶습니다.

그런데 그냥 이 정도로 마무리되었다면, 이 작품이 그렇게까지 추리적으로, 그리고 반전에 대해 높은 평가를 받지는 못했을 겁니다. 워드프로세서의 키보드 배치 문제, S가 하나 더 표기된 MINOSS 왕의 철자, 지속적으로 나카무라 세이지가 만든 건축물은 특별한 장치가 있다며 시마다 기요시가 비밀 통로에 대해 수차례 언급하는 등 다이잉 메시지와 비밀 통로에 대해서는 정보가 많이 주어지고 있어서 아주 대단한 추리력을 필요로 하지 않으니까요. 

게다가 '비밀 통로'는 트릭으로서는 작품 내에서도 언급되듯 반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요무라를 살해한 트릭을 제외하고는 '미로관'이라는 말 그대로 미로를 이용한 트릭이 부족한 것도 조금은 실망스러웠던 부분입니다. 기요무라 살해 트릭도 우타야마의 입을 통해 '통로에서의 위화감'이 계속 언급되고 있어서 특별히 대단한 추리가 필요하지도 않았고요. 아울러 기요무라가 가면이 아니라 평면도를 통해 이동해서 함정에 걸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했을지 등 상세한 내용 설명이 부족해서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하지만 에필로그를 통해 드러나는 반전과 또다른 진상이 이 작품을 특별하게 만들어 줍니다. 작품 전체에서 당연히 남자인줄 알았던 사메지마가 여자였다는 서술 트릭이 사용되었던 겁니다! 이로써 스자키의 목을 잘랐던건 시마다 기요시의 추리가 맞았다는게 판명됩니다. 당시 현장에서 그 누구도 출혈을 일으킬만한 상처가 없어서 범인을 알아내지 못했었는데, 사메지마가 갑자기 생리가 터졌던게 출혈의 원인이라는게 밝혀지거든요. 그녀와 미야가키의 오래된 인연, 장애가 있는 그녀의 아이 등 사건의 동기 역시 모두 공정하게 설명되고 있고요. 자살을 위장해서 미야가키 요타로만 살해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면 유산의 전부나 일부가 미야가키 요타로가 만들려고 했던 추리상 기금으로 사용될 수 있었으니 그를 살인범으로 몰아 죽게 만들었다는건 충분히 합리적이었습니다. 연쇄 살인마가 만든 추리상을 받고 싶은 작가는 없을테니까요. 

액자 소설 형태를 취했던 이유도 알고보니 이 서술 트릭을 위해서였는데, 상당히 깔끔하게 마무리 되고 있어서 완성도도 높습니다. 서술 트릭물답게 성별은 물론, 여성이라고 짐작 가능하게끔 사메지마의 이름을 한 번도 언급하지 않는 등 알고보면 억지가 없지는 않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납득할 만 합니다. 이는 에필로그의 대화를 통해 '일부러 그렇게 썼다'는 작가의 말로 재치있게 빠져나가고 있기도 하고요.

그래서 별점은 3점입니다. 사건의 무대인 미로관과 사람이 죽어나가는 중에 벌어지는 추리 소설 창작 대결 등 비현실적인 소재가 많다는 등 단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그라나 신본격의 중흥을 이끌었던 작가의 당시 대표작다운 재미는 충분합니다. 추리적으로도 기본 이상은 해 주며 그리 길지 않다는 미덕도 크고요. 아직 읽어보지 않으셨다면, 한 번 읽어보기를 권해드립니다.

2010/05/12

섀도우 - 미치오 슈스케 / 오근영 : 별점은 2.5점

섀도우 - 6점 미치오 슈스케 지음, 오근영 옮김/노블마인

의대에서 만난 사키에와 결혼하여 아들 오스케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린 가모 요이치로는 아내가 암에 의해 사망한 이후 크게 낙담했다. 그런 그를 위로해 주었던건 대학 동창 친구 부부 미즈시로와 메구미, 그리고 그들의 딸이자 오스케의 소꼽친구 아키였다. 그러나 메구미마저 자살하고 마는데....


2007년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수상한 작품. 작가의 이름은 몇번 들어봤지만 작품을 읽은 것은 처음이네요.
중간중간에 교묘하게 등장시키는 단서들을 통해 사건의 진상을 재구성하는 부분은 제법 본격물답긴 했고 - 밤에 지진이 났었는지를 물어본다던가, 팬이 울리는 소리를 듣는다던가 - 실제 정신병들의 사례와 전문지식들을 작품과 줄거리에 녹여낸 솜씨도 탁월해서 읽는 재미가 있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악당은 지옥으로 가고 살아남은 사람은 어떻게든 행복해지는 결말도 제 취향이었고요.
하지만 재미를 떠나서 생각했던 것 만큼의 "본격" 작품은 아니더군요. 서술 트릭이 몇번에 걸쳐 쓰이는 작품이긴 하지만 잘 짜여진 범죄, 공들인 트릭, 수수께끼를 푸는 재미와 함께 독자에의 도전이 도드라지는 형태의 작품은 아니었다는 말이죠. 본격 미스터리 대상을 어떻게 수상할 수 있었는지 궁금해졌을 정도였어요.
이유는 앞서 이야기한 단서와 함께 진상을 재구성하는 부분에 있어 작위적인 부분이 많이 눈에 뜨이기도 하지만, 가장 중요한 서술 트릭이 뻔한 탓이 큽니다. 주인공들의 시점에 따라 전개되는 방식으로 독자를 속이는 작품은 이전에도 많이 있었기에 신선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중간 부분에서 노골적으로 수수께끼의 해답을 드러내 버리기에 트릭으로서 가치가 많이 떨어지거든요. 물론 중간에 드러낸 수수께끼는 주인공 범죄계획의 과정이었을 뿐이지만, 이후의 전개, 그러니까 주인공의 계획의 마지막 단계와 반전은 재미도 없고 뜬금없어서 맥이 빠질 정도였어요. 악역의 정체 역시 뜬금없기는 마찬가지였고요. 이러한 주인공의 어이없는 계획과 마지막의 뜬금없는 반전은 본격물로서의 가치를 훼손하는 내용이었다 생각되네요.

쉽게 읽히는 재미는 있고 전형적 일본식 서술 트릭물에 본격물의 형태를 일부 결합한 독특함은 좋았지만 두마리 토끼를 다 잡지는 못했습니다. 중반부분까지는 그나마 괜찮았었는데 뒷부분에서 점수를 많이 까먹기도 했고요. 무엇보다도 제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에 별점은 그냥저냥한 수준인 2.5점입니다.

2022/08/20

시체 찾는 아이들 - 시모무라 아쓰시 / 최재호 : 별점 1.5점

시체 찾는 아이들 - 4점
시모무라 아쓰시 지음, 최재호 옮김/북플라자

"아래 리뷰에는 진상 및 주요 트릭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8명의 여성을 살해하고 체포된 24살의 미청년 연쇄 살인범 아사누마 쇼고는 사형 선고를 받은 직후, 8명의 피해자 중 미즈모토 유카는 자신이 살해하지 않았고, 진범은 자기가 죽여 '추억의 장소'에 묻었다는 폭탄 발언을 해 버렸다. 세간에서는 시체 찾기 소동이 일어났고, 휴직 중인 형사 노조미도 독단적으로 재수사에 나섰다. 그녀는 유카 사건에서 아사누마 쇼고가 아닌 다른 3인조를 범인이라 생각하고 수사를 벌였었는데, 3인조 중 한 명인 히카루가 실종되었기 때문이었다. 한편, 인기 유튜버를 꿈꾸는 중학생 소타는 유튜버 니시얀, 세이와 함께 여름 방학을 이용하여 '시체 찾기'에 나서는데.... 

미즈모토 유카 사건에 대해 추적하는 노조미와 소타 일행의 시체 찾기가 병행 전개되는데, 중반부까지는 두 이야기의 관계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왜 병행 전개되는지 의문을 갖게 하는데, 나중에 소타 일행의 이야기는 노조미 이야기의 수년 전이며, 소타 일행 중 한 명인 세이가 아사누마 쇼고였다는 반전이 드러납니다. 아사누마 쇼고의 '추억의 장소'는 3인조가 시체를 찾아 나섰던 바로 그곳이었고요. 일종의 서술 트릭이기도 한데 꽤 괜찮아요. 잘 숨기고 있어서 반전에 대한 놀라움과 재미는 충분히 가져다 주는 덕분입니다. 

그러나 서술 트릭 외에는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대부분의 캐릭터는 - 특히 연쇄 살인마 아사누마 쇼고 - 클리셰로만 이루어져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뻔했고, 소타 일행의 시체 찾기와 노조미의 수사 모두 전개가 비현실적인 탓입니다. 이 중 시체 찾기는 "스탠 바이 미" 설정과 너무 유사한데다가 소타 일행 중 한 명인 고등학생 세이의 경우, 시종일관 비정상적인 사고 방식이 두드러지게 묘사됩니다. 일행의 목적지였던 치바의 '우는 아이 숲' 근처에서 만난 미모의 소녀 카호의 등장은 뻔하면서도 억지스러웠고요. 

굳이 변명한다면, 세이의 비정상적인 사고 방식은 그가 '살인마' 아사누마 쇼고라는게 밝혀지는 마지막 서술 트릭 장면과 엮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설정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카호도 앞 부분 미즈모토 유카 사건에서 "남편이 살인을 청부했다"고 말했던걸 설명하기 위해 등장시켰다고 할 수 있고요. 카호를 세이가 강간하려 했던 과정을 통해서, 그가 "믿어왔던 타인에 대한 절망"을 안겨주는걸 꿈꿔왔다는걸 드러내거든요. 이런 설명이 구태여 필요하지는 않았지만요.... 

그러나 노조미 이야기는 이렇게 독자가 이해해 줄 구석이 전무합니다. 특히 그녀의 사건 추적 때문에 실종된 카네다의 부친인 변호사가 현직 형사의 납치 살해를 교사한다는 설정은 최악이었습니다. 카네다의 부친이 이러한 대형 강력 범죄를 사주할 동기가 없기 때문입니다. 카네다가 미즈모토 유카 사건의 진범이라는건 이 시점에서는 밝혀지지 않았었습니다. 게다가 그녀를 납치해봤자 세간의 화제가 된 시체 찾기를 막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만약 시체 찾기가 성공하여 카네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한들, 카네다가 아사누마 쇼고가 살해한 유카 사건의 진범이라는 증거도 없고요. 변호사가 이런 기본적인 상황도 모른다는건 말이 안됩니다.

노조미의 수사는 그 외에도 문제가 많습니다. 증거없이 직관에 의존하는 탓입니다. 애초에 3인조가 범인이라고 주장했던 근거부터가 제대로 알아볼 수도 없는 사진 한 장 뿐이었지요. 아사나무 쇼코의 '추억의 장소'도 인터넷 시체찾기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읽고 떠올린 직감에 불과하고요. 이 직감은 정말 황당한데, '아사누마 쇼코와 전혀 관련이 없어 보여서' 신빙성을 느꼈다네요. 사건 수사 중인 형사가 사건의 결정적 단서를 'DC 인사이드의 사건 갤러리'를 읽다가 범인과 전혀 관련없어 보이는 글에서 찾아냈다는 것과 똑같지요. 이렇게까지 막 나가면 정말 뭐라 할 말이 없어집니다.

소타 일행의 이야기도 세이가 주도했던 시체 찾기의 진상이 드러난 뒤 - 부정을 저지른 모친을 세이가 살해했는데 시체를 부친이 몰래 유기했다. 그 뒤 세이는 모친의 환청이 들려 시체의 목을 베려고 시체를 찾아나섰다 - 부터는 막 나갑니다. 세이가 니시얀과 소타를 시체 찾기에 끌어들인 이유부터 설명이 안되거든요. 작중에서는 미쳐버려서 어머니 시체를 찾아 목을 베려 했는데 , 혼자서는 힘들어서 동료가 필요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니시얀과 소타가 시체를 찾는데 특별히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던 것도 아닙니다. 그렇다고 특별한 장비나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런데 이 둘을 왜 데리고 갔을까요?

또 아무리 미쳤다 한들, 사람을 죽이면 벌을 받는다는 기본적인 사회적인 상식을 망각했을리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니시얀과 소타도 같이 죽이려고 했던 걸까요? 만약 그랬다면, 범행이 발각될 가능성은 더 높아질텐데요? 게다가 니시얀의 희생으로 소타와 카호가 도주한 다음 이야기는 그야말로 가관이에요. 소타는 세이 모친의 시체를 발견했고, 모친을 세이가 죽였다는 것도 알고, 심지어 니시얀까지 죽었는데도 경찰에 신고를 하지 않습니다! 단지 무섭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자기를 구하려다가 친구가 죽었고, 살인자는 자기 얼굴을 알고 있는데 경찰에 도움을 요청하지 않는게 말이나 될까요? 니시얀도 단순 실종으로 처리된 이유를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리고 소타가 니시얀이 죽는 상황을 방치했던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둘 사이에 절벽이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소타가 당시 경찰에 신고만 했어도 이후 8명의 여성은 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런데 소타가 "어릴 때 겁쟁이였다는 것을 처벌할 법은 없다" 고 노조미의 말을 듣고, 니시얀의 할머니를 찾아가 위안을 얻는 에필로그는 실로 어처구니가 없었습니다. 니시얀이 아니라 8명의 여성과 그 가족에게 사죄하고, 평생 죄의식을 갖고 살아가는게 당연합니다.

그래서 별점은 1.5점입니다. 서술 트릭만큼은 괜찮았지만 그 외 다른 부분들은 점수를 주기 힘듭니다. 독자를 속이려다가 이야기가 산으로 가 버렸네요. 추천하지 않습니다.

2020/02/22

추리소설 속 트릭의 비밀 - 에도가와 란포 / 박현석 : 별점 2.5점

추리소설 속 트릭의 비밀 - 6점
에도가와 란포 지음, 박현석 옮김/현인

일본의 추리 소설가 에도가와 란포의 전설적인 에세이입니다. 늦은 감은 있지만 드디어 출간되었네요. 오래 전 부터 존재를 알고 있던 책이기도 하고, 저 역시도 추리 소설(요리 중심이지만)에 관련된 에세이를 출간한 경험이 있기에 기쁜 마음으로 구입해 읽었습니다.

책은 1956년에 출간되었으며, 주로 1950년대 "환영성" 등 이런저런 잡지들에 기고했던 에세이들을 모아 놓은 구성입니다. 1953년, 에도가와 란포가 영미 탐정소설에서 예전부터 사용되던 트릭을 800여개 수집하여 쓴 "유형별 트릭 집성"이라는 글이 유래이며, 이 글로부터 여러가지 에세이들이 파생되어 이런저런 잡지들에 수록되었다고 하네요.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서 ―이 책의 탄생과정
1. 기발한 착상
2. 뜻밖의 범인
3. 흉기로써의 얼음
4. 특이한 흉기
5. 밀실 트릭
6. 은닉 방법에 관한 트릭
7. 프로버빌리티의 범죄
8. 얼굴 없는 시체
9. 변신 소망
10. 이상한 범죄동기
11. 탐정소설에 나타난 범죄심리
12. 암호기법의 종류
13. 마술과 탐정소설
14. 메이지의 지문 소설
15. 원시 법의학서와 탐정소설
16. 스릴에 대해서

각 주제별로, 에도가와 란포가 직접 이런저런 소설의 예를 충실히 들어가며 설명해 줍니다. 책의 특성 상 당연히 핵심 트릭이 까발려지고요. 노리즈키 린타로의 "나쁜 놈들은 추리 작가가 피를 토하는 노력 끝에 고안한 트릭을 쏙 빼다가 미스터리 가이드북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먹는 녀석들이지. 이쯤 되면 기생충 수준이야."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그런 기생충같은 책인거지요.

그나마 다행인건 지금은 읽기 힘든, 오래전 잊혀진 작품들이거나 우리가 접하기 힘든 일본 고전들, 아니면 너무나도 유명한 작품이 많다는 것입니다. 에도가와 란포 자신의 작품 이야기도 많이 소개된다는 점에서는 약간의 면죄부를 줄 수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요.
또 미스터리 가이드에서처럼 어떤 작품에서 어떤 트릭이 쓰였다고 명확하게 이야기해 주고 있지는 않습니다. 좀 두루뭉실, 애매하게 소개하고 있거든요. 뭐 그래도 알 사람은 다 알겠지만... 

그리고 거장이 쓴 책 답게, 단순히 트릭을 분류하여 정리하는 것에 그치지는 않습니다. 본인 스스로의 분석을 통해 깊이있는 식견을 보이는 글도 많아요. 마지막 16장인 "스릴에 대해서"가 좋은 예입니다. 스릴의 종류를 상세히 분류하여 이를 단계별로 설명하는 내용인데, 실로 이치에 맞고 설명도 적합하여 무릎을 치게 만듭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들을 예로 드는 것도 아주 좋았고요.

그러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글들도 제법 눈에 뜨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이 책이 처음 발표된 시점에서 60여년 이상 지난 탓이 가장 큽니다. 대표적인 예는 "이상한 범죄 동기"에서 결코 좋은 작품이라 할 수 없었던 "대통령의 미스터리"를 길게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 책이 발표되었을 당시에는 일본에는 거의 읽어본 사람이 없는 책이라 특별히 소개했던 모양인데, 지금 상황에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암호 기법의 종류"도 마찬가지로, 지금 읽기에는 다른 비슷한 책에 비하면 내용이 굉장히 부실한 편이에요. 메이지 시대 지문을 증거로 삼는 소설이 처음 등장했다는 역사적 사실만 소개하는 "메이지의 지문 소설"도 시대에 걸맞지 않은 이야기였고요.

아울러 하나의 트릭으로 완전히 자리잡은 서술 트릭이 빠져 있는 등, 현대적인 작품 속 최신 트릭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점도 문제입니다. 시대적으로 어쩔 수 없었더라도, 출판사나 후대의 작가가 증보판을 출간하는 선택지는 없었을까요? 제가 가끔 읽는 'oo의 지구사' 시리즈에 주영하 씨가 한국의 상황에 대해 수록한 글처럼, 다른 작가가 부록 형식으로 뒤에 최신 트렌드를 덧붙이는건 얼마든지 가능했을텐데 말이지요.

그 외에도 책의 완성도, 모양새 역시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고 도판도 부실합니다. 또 책 속에서 소개된 작품이 국내에 출간되었는지 여부, 그리고 출간되었다면 무슨 제목으로, 어디에서 출간되었는지를 따로 소개해 주는 정도의 노력은 필요했어요. 어차피 추리 소설의 애호가들만 구입할 이런 류의 책에서는 필수적인 정보인데 여러모로 아쉽네요.

그래서 별점은 2.5점입니다. 나름의 가치는 분명하나 여러모로 지금 읽기에는 낡은 결과물입니다. 책의 완성도도 부족하고요. 추리 소설의 대단한 애호가가 아니라면 구해 읽어보실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추리 소설 애호가시라면 즐길 거리가 제법 되는 만큼, 한 번 읽어보셔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게 누가 되었건, 누군가가 21세기에 걸맞게 내용을 수정하고 덧붙여 개정증보판 형식으로 재출간해 주면 더욱 좋겠습니다.

2025/10/10

밀실 황금 시대의 살인 (눈의 저택과 여섯 개의 트릭) - 가모사키 단로 / 김예진 : 별점 2점

아래 리뷰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밀실 황금 시대의 살인"은 제목과 '여섯 개의 트릭'이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 여섯 개의 밀실 수수께끼를 전면에 내세운 장편입니다. 수수께끼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설백관 밀실사건(간자키 살인 재현)
— 수수께끼: 잠긴 방문, 유일한 열쇠는 시체 옆 닫힌 플라스틱 뚜껑 달린 병 안에 있었고 창문은 열려 있으나 촘촘한 창살 때문에 방 안으로 병을 던져 넣을 수 없었다. 
— 해답: 고무줄-추-식칼을 연동한 장치 트릭. 고무줄을 병 뚜껑 고리에 꿴 뒤 방 안에서 창살을 통과시켜 투입 → 추를 창밖 고무줄 끝에 달아 장력 형성 → 사체에 꽂힌 식칼 주위를 통과하도록 병을 잡아 당겨 문을 나선다 → 문을 잠근 뒤 열쇠를 병에 넣고 병을 문 아래 카펫 속에 은닉 → 강제 개방하면 장력으로 병이 실내로 튕기고, 식칼에 의해 고무줄은 절단된다. 추에 의해 고무줄은 창밖으로 떨어진다.

시하이 씨 식당 살인
— 수수께끼: 사망 추정 시각에 누구도 식당동 출입 없음. 피해자는 모조 핼버드에 반복 찔림.
— 해답: 리모컨 슬라이드 식기장을 이용했다. 식기장이 비밀 통로의 숨은 출입구 겸 레일 구조 → 핼버드를 고정한 채, 외부에서 리모컨으로 식기장을 왕복 이동시켜 살해 → 핼버드는 액체 질소로 고정되어 시간이 지나자 녹아 떨어졌다.

사구리오카 방 내 사망
— 수수께끼: 내부 잠금 상태에서, 피해자는 머리에 총상을 입고 죽었다.
— 해답: 시한 폭발 탄환 장치에 의한 것. 침대 밑에 놓였던 장치를 발견한 피해자가 장치 확인을 위해 수면등 아래로 옮기다가 폭발해 사망했다.

마네이 도미노 밀실 사건
— 수수께끼: 피해자 주변을 감싼 채 문까지 잇는 도미노 띠가 놓여 있었고, 문은 잠김. 열쇠는 시체 옆에 놓여 있었다.
— 해답: 액체질소 얼음 고정틀 + 데드볼트 임시 고정을 사용. 문에 얼음틀로 고정한 도미노를 붙임  → 데드볼트 일부를 잘라냄  → 도어 레버를 소폭만 돌린 상태에서 얼음으로 고정 → 문을 닫으면 도미노 얼음틀은 시체 주위와 문을 잇게 됨  → 도어 레버 얼음이 녹으면 도어락 자동 잠김  → 얼음틀 소멸로 도미노만 남음.

야시로 씨 도서실 밀실 사건
— 수수께끼: 문 잠김, 도서실의 유일한 열쇠인 동쪽 동 마스터 키는 시체 옆 꽉 닫힌 잼병 안에서 발견됨, 문 내부 레버엔 가샤폰 돔 커버가 덮여 있었음.
— 해답: 문짝 바꿔치기. 시신을 도서실로 옮김  → 마스터 키를 잼병에 넣고 시체 옆에 놓음  →  자신의 방 문짝과 도서실 문짝을 교환 → 안쪽 레버에 가샤폰 돔 커버 설치  → 문을 닫고 나가서 자기 방 열쇠로 문을 잠금.

미쓰무라의 과거 완전 밀실
— 수수께끼: 완전하게 잠긴 방문과 고정식 창으로 완전 밀폐된 현장, 스페어 키 없는 유일한 방 열쇠는 시체 옆 서랍 속(서랍은 시체 주머니 열쇠로 잠김).
— 해답: 문짝 바꿔치기 + 다른 방 스페어 키를 이용. 현장 외 다른 방에는 스페어 키가 있었음. 범행 후 현장과 다른 방의 문짝 교환 → 다른 방 열쇠를 현장에 남기고 스페어 키로 외부에서 잠금 것.


이렇게 여섯 개의 사건과 트릭이 펼쳐지는데, 이 중 고전적인 장치형 트릭의 맛을 잘 살린 몇몇 사건들은 볼 만 합니다.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첫 번째 설백관 밀실사건과 다섯 번째 야시로 씨 도서실 사건이었습니다. 설백관 사건은 고전적인 장치형 트릭을 현대적으로 변형한 사례로, 사용된 도구는 물론 현장 상황까지가 모두 실제로 범행에 필요했다는 점에서 설득력이 높습니다. 특히 녹음기나 불 꺼진 방 같은 설정이 단순한 분위기 조성이 아닌 트릭의 일부라는 것도 대단했어요. 비교적 간단한 장치로 복잡하지 않으면서 정교한 느낌을 주며, 독자가 충분히 추리 가능하도록 공정하게 정보를 제공해 주고 있고요.

도서실 사건 트릭은 정말 완성도가 높습니다. 무엇보다도 범인의 방 문짝과 도서실 문짝을 교체하는 트릭은 앞서 구즈시로의 대사를 통해 힌트를 제공함으로써 독자에게도 충분히 추리할 기회를 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 합니다. 단서 제공 역시 철저하게 이루어지며, 도서실만이 마스터 키로만 열 수 있다는 설정도 좋았습니다. 같은 방식을 사용하더라도 현장이 다른 방이었다면 문 안에 두 개의 열쇠(마스터 키, 방 열쇠)를 남기게 되고, 그 때 방 열쇠로 문을 열 수 없게 되니까요.

하지만 여섯 개의 트릭 모두 완성도 높게 제공하는 건 어려웠던 듯 합니다. 특히 시하이 씨 사건의 핼버드 트릭과 사구리오카 사건은 유치하고 황당한 수준이었어요. 사구리오카 사건에서 탄환을 발사한 시한 장치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도 잘 모르겠고요.

액체질소를 만능 도구처럼 쓴 트릭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게 마네이 사건의 도미노 트릭입니다. 너무 억지스러워서 납득이 되지 않았습니다. 도미노 설치를 위한 얼음판을 만들려면, AI의 확인 결과 약 7.3리터의 물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오는데, 이 정도의 얼음이 녹아 흐른다면 흔적이 남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닥재가 물이 스며드는 소재였다는 정도로 대충 넘어가는건 무리에요. 몰래 만드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닐테고요. 데드볼트 잠금만으로도 충분히 효과적으로 밀실을 만들 수 있어서 도미노까지 이용한 이중 밀실을 구현할 이유도 없습니다.

미쓰무라 과거 사건에서 사건 현장 외 다른 방의 열쇠는 스페어가 있었다는 중요한 정보를 서술 트릭처럼 숨긴건 반칙처럼 느껴집니다. 이런걸 경찰이 알아채지 못했다는건 설득력이 떨어지고요.

밀실 트릭 외의 추리적인 부분도 한심한 수준입니다. 트릭을 풀어낸 뒤, 이걸 저지를 수 있는건 ooo뿐이야!는건 워낙에 용의자가 적은 탓에 별다른 감흥이 없고, 동기도 설득력이 약하기 때문입니다. 꽤나 장황하게 설명하는 트럼프 연쇄 살인과 ‘녹스의 십계’, 그리고 단순한 십계 설정은 억지스럽기 짝이 없고요. 이를 통해 어떻게든 살인의 타당성을 보여주려 애쓰지만, 희생자들이 죽을 만큼 잘못한 것도 아니고 범인을 특정할 수 있는 단서도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결과에 과정을 꿰어 맞추는 느낌이라서 거슬리기만 했습니다. 

설정의 완성도는 더 문제입니다. 밀실을 풀 수 없으면 무죄 판결을 받는다는 핵심 세계관 설정부터가 성립하기 힘든 탓입니다. 마스터 키나 스페어 키가 존재하지 않음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는지 설명도 없으며, 21세기에 열쇠 복제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요. 작품의 세계관에 동의할 수 없으니, 재미를 느끼고 몰입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합니다. 

주요 인물들 역시 만화적이고 비현실적입니다. 완벽한 밀실 살인으로 무죄를 받은 미소녀 미쓰무라 시쓰리, 아이돌이자 밀실 제조사로 범행을 저지르는 리리아, 살인 현장을 숭배한다는 종교단체 ‘새벽의 탑’과 17세 소녀 주교 펜릴 앨리스해저드 등은 지나치게 작위적이고, 이들의 언행은 독자의 몰입을 방해하는 수준입니다. '빙해' 어쩌구하는 대사는 제가 다 창피해지더라고요.

그래서 별점은 한없이 1.5점에 가까운 2점입니다. 몇몇 밀실 트릭은 고전 본격물의 정수를 잘 살려 볼 만합니다. 하지만 억지 설정과 조악한 추리 요소, 몰입을 방해하는 세계관과 캐릭터는 치명적인 탓에 완성도 높은 작품이라고 하기 어렵습니다. 솔직히 이 리뷰를 쓰는데 걸린 시간이 아까울 정도의 망작이에요. 밀실 트릭물의 광팬이 아니라면 추천하지 않습니다. "이 미스터리가 굉장해" 대상작이라는데, 이 정도까지 수준이 떨어졌는지 몰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