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성한 관계 -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황금가지 |
패트릭 켄지와 안젤라 제나로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거부 프레드 스톤에게 납치되었다. 그는 둘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 어쩔 수 없었다며, 실종된 딸 데지레를 찾아달라고 의뢰했다. 켄지의 사수이기도 했던 최고 탐정 제이 베커마저도 데지레를 찾다가 실종된 상태였다.
알고보니 데지레는 사이비 종교 집단에서 200만 달러를 횡령한 관계자 제프 프라이스와 도망쳤고, 베커는 그녀를 찾아낸 뒤 사랑에 빠져 사라졌던 것이었다. 그러나 프라이스가 데지레를 살해한 뒤 베커는 프라이스를 죽였다. 베터는 둘에게 데지레를 죽이라고 의뢰했던건 트레버 스톤이라며, 복수를 위해 출발했지만 스톤 부하의 공격으로 죽고 말았다.
겨우 경찰에게서 풀려난 켄지와 제나로의 앞에 데지레가 나타나 도움을 요청하는데....
직전작 <<어둠이여 내 손을 잡아라>>에서 곧바로 이어지는, 데니스 루헤인의 사립탐정 켄지와 제나로 시리즈 후속작. 이전 작에서의 충격으로 켄지와 제나로는 탐정 사무소 문을 닫고, 상실감을 달래고 있던 중이라는 설정이지요.
수사 과정 초기에 불거지는, 슬픔 치유사와 연계된 사이비 종교 집단의 사기 행각은 꽤나 볼만했습니다. '고해 성사'를 협박과 사기를 위해 써먹는게 효과가 큰건 당연할테니까요. 단순 협박 수준에 그치지 않고, 은행 비밀번호와 같은 개인 정보까지 수집한 뒤 이를 교단 내 국세청 직원 등의 전문가를 통해 모든 재산을 장악한다는건 90년대 초반 발표된 작품 치고는 꽤나 앞서가는 발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좋은 설정을 잘 써먹지는 못했습니다. 슬픔 치유사들에게서 정보를 빼낸 방법도 강도짓과 부바 등 친구들을 동원해 완력을 써서 캐내는게 전부였고요. 이 뒤는 트레버 스톤이 사실 데지레를 죽이려고 했다는 것, 그리고 알고보니 데지레가 먼저 트레버 스톤을 불구로 만든 사고를 사주했다는 것 등이 밝혀지며 트레버 스톤과 데지레 스톤, 두 악마가 서로 죽이려는 대결로 바뀌고 맙니다.
데지레가 비련의 천사가 아니라 주위 남자들을 모두 홀린 뒤 써먹다가 죽게 만드는 악녀라는 반전은 나쁘지 않았지만, 억지스러웠어요. 주변 모든 사람들의 죽음과 자신의 이익을 단지 몸 하나를 팔아서 얻어내는데, 남자들이 아무리 섹스에 미친 바보들이라 하더라도 지나치게 유치한 발상이었습니다.
전개도 억지스럽고 납득하기 어려운 점 투성입니다. 모든 것의 발단인 데지레 실종부터 그러합니다. 그녀는 왜 사라졌을까요? 트레버 스톤이 사고를 사주한게 그녀라는걸 알아냈기 때문에? 그런 묘사는 전혀 없었습니다. 제이 베커의 입을 통해 그녀를 죽이는게 트레버 스톤의 의뢰라는걸 밝히기는 하지만, 이 때만해도 그녀가 악당 흑막이라는건 드러나지 않습니다. 또 애초에 제이 베커에게 이렇게 의뢰했다면, 켄지와 제나로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는지도 이유가 불분명하고요.
제이 베커의 죽음도 이상합니다. 그는 데지레의 복수를 한다며 트레버 스톤을 찾아가려다 트레버 스톤 부하의 공격을 받고 죽게 되지요. 그러나 데지레가 죽었다면 트레버 스톤의 부하들은 제이 베커를 죽일 이유가 없습니다. 목적을 달성했으니까요. 제이 베커의 의도 (복수)를 알아챘다면 공격했을 수도 있지만, 그걸 알 수 있었던 방법도 없었습니다. 또 베커가 어떤 길로 가는지 알고 있었는데 도로에서 단순하게 자동차로 밀어버려 죽이려 했다는 것도 너무 어설펐어요. 프로답지도 않았고요.
반대로 데지레가 죽지 않았다는걸 알아챘다면, 제이 베커를 죽이지 않고 사로잡았어야 했습니다. 데지레와 가장 가까웠던 인물이니 사로잡아 행적을 캐내는게 당연하잖아요. 그러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다짜고짜 차로 들이받아 죽이려 한다는건 영 납득하기 어렵더군요. 이는 작가가 화끈한 액션 장면을 넣고 싶어서 삽입한 장면에 불과해 보였습니다.
게다가 켄지가 데지레의 정체를 알게된 건, 데지레가 제이 베커에게서 들었다며 '페일세이프'라는 말을 했기 때문입니다. '페일세이프'는 오래전부터 켄지와 제이 사이에 있었던 암호였습니다. 누군가 '페일세이프'라는 말을 하면서 나타나면 무조건 적이니 박살을 내야 한다는 뜻이었지요. 즉, 제이 베커는 데지레의 정체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켄지와 제나로에게는 말하지 않고, 사랑했던 그녀를 잃은 복수를 해야 한다고 트레버 스톤을 찾아가다가 죽는다는건 영 앞 뒤가 맞지 않아요. 트레버 스톤이 그녀를 죽이려고는 했지만, 정작 죽인건 그 시점에서는 아무 관계없던 프라이스였으니 복수의 대상도 잘못된게 아닌가 싶네요.
'페일세이프'를 통해 데지레의 정체를 알아낸 뒤, 켄지와 제나로는 그녀의 뒷통수를 칠 계획을 짜지만 정작 잘 써먹지도 못하고 데지레에게 사로잡혀 위기에 빠진다는 전개도 어이를 상실케 했습니다. 땅에 파묻었던 제나로가 자력으로 탈출해 스톤 부녀를 응징한다는 결말도 너무 대충 수습한 느낌이었고요.
이런 앞뒤 안맞는 급작스럽고 자극적인 전개는 오래전 신문 연재 소설이나 싸구려 펄프 픽션 느낌을 강하게 전해줍니다. 독자의 흥미를 잡아 끌기 위해 무리수를 막 던진다는 점에서요. 그래서 하드보일드 추리 소설을 기대했던 저로서는 도저히 좋은 점수를 줄 수가 없네요. 도를 넘는 폭력과 비도덕적인 가족 관계 정도만이 하드보일드스러운 느낌을 전해줄 뿐이며, 추리적으로도 건질건 거의 없었으니까요. 가짜 신분으로 수감된 제이 베커를 찾아가 그가 말한 기묘한 말을 듣고 진상을 풀어내는 정도만 그런대로 탐정스러웠을 뿐입니다.
한마디로 작가가 자극적인 소재를 끝까지 건드리고 전개 역시 흥미본위로 채워놓은, 노골적으로 흥행을 노린 펄프 픽션에 불과합니다. 전형적인 성인용 헐리우드 액션 범죄물로, 차라리 영화였더라면 더 볼만하지 않았을까 싶네요.
시리즈 팬에게는 켄지와 제나로의 사랑이 완성된다는 점, 그리고 <<라쇼몽>>을 언급한다던가, 막스형제의 고전 영화 <<선상 대소동>>을 즐겨 본다던가, <<페일세이프>>를 결정적 단서로 쓰는 등 영화광 켄지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고, 부바의 활약이 미미하지만 여전하다는 아주 약간의 즐길거리가 있기는 하지만 그 외의 가치는 높지 않습니다. 제 별점은 1.5점입니다. 이 시리즈도 이제 그만 읽어야 겠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