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자살 - 도진기 지음/들녘(코기토) |
길영인은 아내 한다미의 가출 이후 자살 충동에 시달리다가 인터넷에서 '정신자살연구소' 홈페이지를 발견했다. 정신을 파괴하여 자살 없는 인생을 살게 해 준다는 연구소 소장 이탁오 박사의 말에 혹한 길영인은 3천만 원이라는 거액의 시술비를 지불하고 정신자살 시술을 받았다. 그러나 시술 이후 오히려 한다미의 과거에 더욱 집착하며 그녀의 행적을 추적하기 시작하는데...
어둠의 변호사 고진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 어쩌다 보니 두 번째 작품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을 건너뛰게 되었네요. 전에 읽은 "어둠의 변호사"가 요코미조 세이시 느낌이라면, 이 작품은 에도가와 란포 느낌이 강하게 듭니다.
먼저 좋았던 부분부터 이야기해보죠. 제일 먼저 언급하고 싶은 것은 "어둠의 변호사"와 비교할 때 소설적인 완성도가 더 높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 장편인 덕분이겠죠? 문체나 전개가 모두 세련되어졌습니다. 길영인이 "정신자살"이라는 독특한 말에 이끌려 이탁오 박사의 연구소에 찾아가는 과정과 정신자살 시술 후 오히려 한다미의 과거를 파헤치며 진상을 더듬어 가는 전개도 흥미진진하고요. 전작과 달리 고진과 이유현 형사 콤비의 캐릭터도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고진의 가벼운 모습이 많이 보이는 것도 이채로웠고요.
작가의 작품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요소인 트릭도(중반까지는) 괜찮은 편입니다. 4년 전 이탁오 박사가 저지른 첫 사건인 박재성 - 우호선 사건에서의 트릭은 장편에서 캐릭터 소개에 사용되기에는 아깝지 않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좋았습니다. 이후 신재인이라는 이름을 둘러싼 트릭도 복선이 잘 설계되어 있으며, 신재인 집에서의 소실 트릭도 괜찮았어요.
또 전작에서의 아쉬웠던 점 - 판사가 쓴 작품이지만 실제 법률을 이용한 부분이 별로 없다 - 를 초반 염상우의 친족상도례 작전에서 잘 써먹습니다. 때문에 여기까지는 별점 3점, 아니 4점 가까이 줄 수 있을 정도에요.
그러나... 마지막 진상과 반전이 모든 것을 망쳐버립니다. 일단 다중인격이라는 길영인 사건의 진상은 현실적이지 않고 작위적이라는 점에서 설득력이 너무 떨어져요. 1인칭 시점에서의 수기와 전개를 통해 서술 트릭 같은 효과를 노린 것 같기도 한데, 뜬금없이 밝혀지는 것들이 많거든요. 그나마 두 가지 - 1년 전 프리버드의 전화와 펜션 사건에서의 길영인 전화 - 단서는 그럴듯하지만, 그것만으로 다른 것들을 설명하기는 역부족입니다. 스쳐 지나간 사람들이 그렇게나 많은데, 아무리 띄엄띄엄 보았다고 하더라도 정체를 눈치채지 못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고요. 개인적으로는 한초록이 끝까지 입을 다문 이유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뭐 다중인격 부분은 그럴 수 있다고 칩시다. 그러나 그다음, 펜션에서의 살인 사건에서의 과일을 이용한 트릭은 어떨까요? 그림 몇 장 본다고 과일을 가지고 사람 모양을 만들 수 있을까요? 그럴 능력이 있다면 수박을 깎아서 사람 모양을 만들거나, 아니면 화장실 휴지를 적셔서 종이찰흙을 만드는 게 더 나았을 겁니다.
게다가 마지막 장면, 인간거미 합체 장면은 정말이지 나오지 않는 것만 못했습니다. 작품에 불필요할 뿐만 아니라, 어설픈 에도가와 란포 흉내 내기에 불과했으니까요. 게다가 그 이유가 체포를 막기 위함이라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의 극치. 다시 병원으로 보내 둘을 나눠 놓으면 될 텐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탁오 박사도 불법 시술로 구속되었을 테고요.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일까요?
덧붙이자면, 이탁오 박사 캐릭터는 전형적인 스테레오 타입의 매드 사이언티스트라 작품에 현실감을 심는 데는 오히려 장애 요소였습니다.
그래서 결론 내리자면 별점은 1.5점입니다. 초, 중반부의 전개는 좋았고 독자를 빨아들이는 흡입력도 있으며, 세 번째 장편다운 완성도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후반부, 특히 마지막 장면 두 페이지는 도저히 용납하기 어렵습니다. 한국 추리소설의 현재이자 미래를 나타내는 작품이고 시리즈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으나, 일본 추리소설 스타일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영역을 보여주는 것이 시급해 보이네요.
댓글 없음:
댓글 쓰기